이름 | Dietrich von Choltitz 디트리히 폰 콜티츠[1] |
출생 | 1894년 11월 9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주 노이슈타트군 그레플리히비제[2] (現 폴란드 오폴스키에주 웡카 프루드니츠카(Łąka Prudnicka)) | |
사망 | 1966년 11월 5일 (향년 71세) |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바덴바덴 | |
복무 | 작센 왕국군 육군 국가방위군 육군 독일 국방군 육군 |
최종 계급 | 육군 보병대장 |
주요 참전 |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주요 보직 | 프랑스 군정청 파리 광역권 군정장관 |
서훈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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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독일 국방군 군인. 최종계급은 육군 보병 대장이다.프랑스 군정청장 시절 연합군의 파리 탈환에 앞서 파리를 파괴하라는 아돌프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한 것에 대해 세간에서는 파리의 구원자라고 평가하였고 콜티츠 장군의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콜티츠 사망 소식이 보도되는 뉴욕타임즈의 기사에서도 '파리의 구원자로 불리는'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으며 프랑스에서도 수도에 대한 히틀러의 파괴명령을 거부한 의로운 나치의 적장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부전선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전범 혐의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슐레지엔의 융커 귀족 가문 출신으로 가문의 영지인 그레플리히 비제 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 폰 콜티츠는 프로이센 왕국군의 군인이었고, 숙부 헤르만은 1907~20년에 노이슈타트 군수였다. 1907년 드레스덴의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1달 정도 전에 작센 왕국의 보병연대에서 장교후보생으로 복무하기 시작하였다.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보병장교로써 마른 전투, 이프르 전투, 솜 전투, 생캉탱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인해 연대에 배속된지 1년도 안 되어 소위로 진급, 대대 참모로 보임받았다.1차대전 이후에도 독일 제국군에서 국가방위군으로 변한 군에 계속 남아 기병대에 복무하였다. 1937년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22공중강습사단[3]의 16보병연대 3대대 대대장으로 근무하였으며, 1년뒤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1938년 주데텐란트의 합병에 참여하였으며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에는 우치와 브주라에서 활약하였다.
1940년에는 로테르담 전투에서는 로테르담 시내로 향하는 주요 교가(橋架)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고, 공수부대의 전신이었던 공중강습부대의 항공기들이 착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로테르담의 폭격이 끝나고 나서 네덜란드의 항복에 대한 논의가 있던 중 쿠르트 슈투덴트 공군 중장이 총격으로 인해 머리를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4] 슈투덴트 장군이 장병들에게 인기있었던 장교였던 만큼 독일군 내에서 네덜란드 장교들에게 복수하자는 분위기가 일었으나 콜티츠가 이를 중재하여 학살을 막을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한편 네덜란드에서의 전공으로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훈받고 대령으로 진급, 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1년 뒤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의 11군 아래로 배치되어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하였다.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는 4800명이었던 부대원 거의 전부를 잃었으며 자신도 팔에 총상을 입는 부상을 입는다. 이후 소장으로 진급하여 260 보병사단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1942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11기갑사단을 지휘하였다. 이 당시부터 러시아의 혹독한 기후 조건 때문에 평생 가는 순환계, 폐 질환을 앓게 된다.[5] 이 시기 그는 유대인 학살 등 각종 전쟁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이며, 후일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본인이 이 일을 "내가 수행한 것 중에 최악의 임무였지만, 그럼에도 가장 꾸준하게 해낸 것이 유대인의 몰살이었지. 난 그 임무를 철저하게, 완전하게 해냈네."라고 직접 말했다고 하며, 이런 사건으로 인해 후일 파리의 구원자라는 명칭에도 꾸준히 전범 논란이 따라붙게 된다.
1943년에는 다시 76기갑군의 군단장 대리로서 이탈리아 전선으로 옮겨져 연합군의 안치오 상륙 작전을 저지하는 데에 투입되었다. 1944년에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전개되면서 동부전선으로 또 다시 옮겨져 84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944년 8월, 보병대장(General der Infanterie)으로 진급하여 서부전선 프랑스 군정청의 파리 광역권 군정장관(Kommandierenden General und Wehrmachtbefehlshaber von Groß-Paris)으로 발령받는다. 이 시점에 이미 나치 독일은 패망의 위기였기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의 잿더미 외에는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말아야한다."고 하며 파리를 파괴할 것을 명령하였다.
1일에 부임한 콜티츠는 투옥된 일부 레지스탕스들을 교외로 풀어주기도 하였으며, 주둔군 병력이 부족했던 탓에 레지스탕스들과 정전협정을 맺기도 하였다. 물론 정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레지스탕스들의 저항은 계속되었었다. 부임 일주일 뒤 쯤에는 히틀러는 계속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고 계속 물어왔으나 콜티츠는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머지않은 25일에는 자유 프랑스군 필리프 르클레르 장군 및 레지스탕스에 콜티츠와 휘하 주둔군 만 7천여명과 함께 항복한다. 이때 파리의 구원자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이때 유명한 "히틀러를 배신할지언정 인류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6] 되려 파리 내 레지스탕스와의 협정 도중 계속 저항활동을 이어간다면 주둔군은 탈출하지 않고 파리에서 방어전을 펼칠 것이며 도시를 파괴할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 이는 레지스탕스를 고깝게 여긴 콜티츠 본인의 견해가 반영된 표현이었다.[7] 도시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였다는 증언이 있으며, 한편 히틀러에 대해서는 "이러한 미친 놈에게 독일 국민의 운명이 달려있다니"라는 평을 남긴 적이 있다고 한다.
종전 후 영국으로 이송돼 다른 독일 장교들과 함께 포로로 지냈다가 나중에 미국 미시시피주의 포로수용소로 옮겨져 수용되었다. 전쟁 초기 동부 전선에서 자행한 학살 이외에는 특별한 전쟁 범죄가 더 추가로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2년 뒤인 1947년에 석방되어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다. 석방 이후 1956년에는 다시 프랑스에 가서 파리 군정청을 비롯한 서부전선사령부, 서부해군집단군 사령부 등이 있었던 콩코드 광장의 머큐리 호텔을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머큐리 호텔은 그 가운데서도 파리 군정청이 있던 곳이었으며, 당시 호텔 직원이 콜티츠에게 와인 한잔을 권했으나 사양하고 몇 분간 호텔 내부를 조용히 응시한 뒤 나갔다고 전해진다.
석방 이후에는 자신이 말년에 살 곳을 고르다가 서독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지역에 정착하였고,[8] 전쟁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1966년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9]에서 사망하였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대립하던 독일군의 적장이었지만 전쟁 말기 히틀러의 도시 파괴 명령을 거부하고 자국의 수도 파리를 보존했다는 점이 참작되어서였는지 프랑스군의 고위 장교와 정치인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유가족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였다.[10]
3. 비판과 전쟁 범죄 논란
레지스탕스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이 불만을 제기한 부분이지만(특히 후술할 영화 개봉 후에 활발하게) 폰 콜티츠의 공로는 주로 본인의 회고록에 기반해 있다는 것, 나치 장군을 레지스탕스의 영웅보다도 더 떠받들고 명판까지 헌정하는 건 당치도 않다는 것, 그리고 당시 폰 콜티츠는 파리를 철저히 파괴할 능력이 없었다는 부분이 지적되고 있다. 폰 콜티츠는 연합군이 포위를 좁혀오는 파리의 상황상 파리 전체를 철저히 파괴할 만한 인력과 물자가 부족했다는 것이다.물론 파리 전체는 아니여도 파리의 상징 에펠탑을 비롯한 주요 랜드마크를 개발살내거나 파리에 방화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인력과 물자는 있었으나 콜티츠는 명령을 행하지 않았다. 콜티츠는 자신의 의지로 총통의 파리 파괴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파리를 인질로 자신과 휘하 장병 1만 7천여명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콜티츠가 가장 비판받을 문제는 동부전선에서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전범 의혹이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영국군이 독일 육군 장교 포로들간들의 사적인 대화를 도청을 했는데, 1944년 8월 29일에 콜티츠가 "내가 했던 최악의 일은 유대인의 청산이었다. 나는 이것을 철저하게 수행했다" 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11]
물론 파리를 보존시킨 공이 있다 한들 동부전선에서의 유대인 학살 등 전쟁범죄를 묻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의 콜티츠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에서 군인으로서의 임무와 파리를 지키는 선택 간에 고뇌하는 중요 인물로 출연한다.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2014년작 프랑스 영화인 디플로머시에서는 프랑스 배우 닐스 아레스튀프가 분했다. 외모는 별로 닮지 않았지만 독어와 프랑스어 2개 국어를 완벽히 구사했기 때문인듯. 망조가 든 서부전선의 상황도 가뜩이나 고민인데 파리를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정신나간 명령이 내려오자 많은 독일군 장성들이 그랬듯 불합리하고 비인도적인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군인의 딜레마[12]에 고뇌하는데, 스웨덴의 외교관 라울 노르들링이 그가 집무실로 쓰는 르 뫼리스(Le Meurice)호텔 스위트룸이 지어질 때 설치된 비밀통로[13]로 몰래 잠입해 들어와 그를 필사적으로 설득한다.
폰 콜티츠는 조롱하다시피 하면서 완강히 거부하다가 심장발작을 일으킨 뒤 노르들링에게 처치를 받아 목숨을 건지고 본심을 털어놓는데,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뒤로 광기 들린 히틀러가 파견되는 장군들의 처자식을 인질로 잡아서[14] 자신도 내키지 않는 명령이지만 거부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처자식을 죽이느냐, 파리 시민을 모두 죽이느냐의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노르들링은 레지스탕스들이 유대인인 자신의 아내를 스위스로 도피시켜주었다면서 같은 방법을 알선하겠다고 제안하고, 폰 콜티츠는 이 제안을 수락한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콜티츠'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Gräflich Wiese[3] 원래 22보병사단이었던 것을 공중강습사단으로 전환한 부대. 글라이더를 이용한 공중강습사단으로 일반적인 공수부대와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폴란드 침공, 네덜란드 침공, 크레타 섬 전투에서 참여한 부대로써 주요 지휘관으로는 크레타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보병대장 프리드리히 빌헬름 뮐러가 있다. 크레타 섬 전투 이후부터 종전까지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지에서의 파르티잔 활동을 진압하는 목적의 22 국민척탄병 사단(22. Volksgrenadier Division)으로 다시 전환된다.[4] 완전한 헤드샷은 아니었고 유리창에 총알이 맞아서 파편에 머리 부상을 입었다. 이는 네덜란드군의 총격이 아니었고 독일군 공중강습부대의 오인 사격이었다고 한다.[5] 2014년작 '디플로머시'에서도 몇번이나 이 질환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6] 당시 그의 휘하에 있는 장병들의 전의가 높지 않았다. 거기다 싸우면 패배할 게 뻔하고, 독일의 패전이 보이는 상황에서 히틀러 말을 듣고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었다간 전후에 전범으로 처벌될 것이 너무 뻔했다. 그래서 기왕 항복한다면 연합군에 좋은 인상을 남겨주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런 결정을 했을 거라고 보고 있다. 더구나 귀족 출신인 그에게 도시를 무차별로 파괴하는 것은 불명예스럽게 여겨졌을 것이다.[7] 그도 그럴게 콜티츠에게 레지스탕스는 게릴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콜티츠의 직위를 생각해보면 여차하면 자기도 레지스탕스에게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한테는 정중하게 대했는데, 항복 당시 미군 장교들에게 "미군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될 만큼 충분한 공적을 쌓았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군을 잘 싸웠다고 치켜세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조국 독일의 본토까지 침공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속내를 드러낸 발언이기도 하다.[8] 자신의 고향이던 슐레지엔 지방이 전후 폴란드에 합병되어 폴란드령이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9] 독일 분할 점령 당시 프랑스군의 관할이었다. 한국에는 현재는 시간이 흘러 인지도가 많이 낮아졌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1981년 IOC 총회가 열린 도시로 유명하다.[10] 프랑스는 대전 초반 프랑스 전역 당시 순식간에 파리 코앞까지 밀고 들어온 독일군과의 대규모 시가전으로 파리가 파괴되는 것을 우려해 파리를 비전투 지역으로 선언하고 그대로 파리에서 철수해 독일군에게 내어줄 정도로 파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11] Tapping Hitler 's Generals : Transcripts of Secret Conversations, 1942-1945[12] 위의 '유대인을 몰살한 것은 인생 최악의 임무였다'라는 발언도 나온다.[13] 나폴레옹 3세가 정부와 밀회를 즐기느라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14] 중반부터 SS 장교들이 찾아와서 명령을 빨리 수행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풋내기 주제에 까마득히 계급이 위인 국방군 장군을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복선이 있다. 당신 전임자도 비참하게 목매달렸다며 그 꼴이 나고 싶냐고 이죽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