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colcolor=#fff> 브루노 오스발트 브로이어 Bruno Oswald Bräuer | |
출생 | 1893년 2월 4일 |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주 야우어군 빌만스도르프 (現 폴란드 공화국 돌노실롱스키에 주 야보르 군 멩친카) | |
사망 | 1947년 5월 20일 (향년 54세) |
그리스 왕국 아테네 부근 하이다리 | |
복무 | 나치 독일 공군 |
최종 계급 | 공수대장 (General der Fallschirmtruppe) |
주요 참전 | 프랑스 침공 크레타 섬 전투 독소전쟁 베를린 전투 |
주요 서훈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공군 공수기장 황금십자훈장 |
▲ 1940년. 팔 겔프 작전의 공훈으로 헤르만 괴링이 철십자장을 수여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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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공군의 팔슈름예거 지휘관. 최종 계급은 공수대장(General der Fallschirmtruppe)2. 생애
1893년에 태어난 브로이어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보병으로 참전하였었다가 종전 이후 1917년, 독일 국가방위군(Reichswehr)에 입대하여 장교로 근무하였다. 이후 잠시 경찰로 옮겼다가 1936년, 공군으로 돌아와 4 공수연대의 지휘관으로 부임하였고 1939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1 공수여단의 지휘를 맡았다. 이후 1940년 2차대전에는 1공수여단을 지휘하여 네덜란드를 점령하는 데에 기여하였다.이후 동부 전투단을 지휘하여 1941년 머큐리 작전으로 알려진 크레타 섬 전투에 참여하여 이라클리온 지역을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에니그마의 해석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던 터라 추축국의 침공 사실을 알고 준비했던 영국군과 그리스군의 연합군에 막혀 동쪽의 침공루트는 실패하였다. 서쪽의 말레메를 통한 침공으로 통합·변경되었고 아주 힘겹게 크레타 섬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크레타 섬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군은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크레타 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1942년 11월에 브로이어는 알렉산더 안드레의 후임으로 사령관이 되었다. 크레타 섬의
이후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1944년에 새롭게 창설된 9공수사단(9 Fallschirmjäger-Division)을 창설, 지휘하였다. 다만 이 때의 공수부대는 말만 공수부대였고 사실상 루프트바페에 소속된 지상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었다.[2] 이후 45년 2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9공수사단의 2개 대대가 궤멸되었고 젤로고지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군 제1벨로루시전선군의 포격으로 9공수사단 전체가 와해되었다. 이 때의 일로 헤르만 괴링은 브로이어의 지휘권을 박탈하였고, 잔존한 9공수사단 병력은 SS 의용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에 합류하게 되었다.
브로이어는 종전 이틀 뒤 영국군에 체포되었으며 그리스 군법원에 의해 전쟁범죄로 기소·송환되었다. 그리스 해군 검사인 니콜라스 자카리아스 제독은 3천명의 크레타인에 대한 대량학살, 조직적인 테러, 추방, 약탈, 파괴, 고문 등의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하였고, 유죄가 선언되어 1947년 5월 20일에 총살당하였다. 나중에 그의 시신은 크레타 주둔군 사령관 재직기간 동안 파르티잔 활동을 했었던 인물이 거두어 매장하였다.#
한편 역사학자 안토니 비버는 그를 "다른 장군에 의해 이루어진 범죄와 죄목"으로 사형된 "진짜 불행한 사람"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하였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닌 것이, 무자비한 도살자였던 후임 뮐러에 비해 브로이어의 정책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고 전술했듯이 그는 통치기간에 죄수들을 특별사면하기도 했기 때문. 다만 결국 이 사람도 독일군이었기에 크레타에서 물자수탈 등의 행위를 저질렀고, 독일군 점령 기간 동안 독일에게 당할 대로 당했던 그리스에게 이는 결코 곱게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1] 1918~2017, 2022년 기준 신민당 당수이자 그리스 총리인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의 아버지[2] 그렇기 때문에 9공수사단은 공수훈련 경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