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9:40:35

오스카 쿠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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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_Bild_183-L17874,_Kummetz_(crop).jpg
이름 Oskar Kummetz
오스카 쿠메츠
출생 1891년 7월 21일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동프로이센 나이덴부르크군 일로보
사망 1980년 12월 17일 (향년 89세)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연방공화국 라인란트-팔츠노이슈타트안데어바인슈트라세
복무 독일 제국군(1910년 ~ 1918년)
국가방위군(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파일:AA-2.png 해군 상급대장(Generaladmiral)
주요 참전 노르웨이 침공
바렌츠 해 해전
스피츠베르겐 섬 전투
한니발 작전
주요 서훈 기사십자 철십자상
1. 개요2. 일생
2.1. 제1차 세계 대전2.2. 제2차 세계 대전
2.2.1. 노르웨이 침공2.2.2. 바렌츠 해 해전2.2.3. 스피츠베르겐 섬 공격과 이후
2.3.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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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해군의 장성. 최종계급은 상급대장(Generaladmiral)이다.

인지도는 높은 인물은 아니지만, 참여한 전투마다 죄다 패배하거나 졸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1]

2. 일생

2.1. 제1차 세계 대전

2.2. 제2차 세계 대전

2.2.1. 노르웨이 침공

2차 세계 대전 초기, 쿠메츠는 노르웨이 침공에서 오슬로를 목표로 한 "그룹 5"의 지휘를 맡게 된다. 여기서 그는 그룹 5의 기함 블뤼허에 승선했다. 1940년 4월 9일 새벽 5시 경, 쿠메츠와 블뤼허는 승선한 육군 산악부대[2]들을 상륙시키기 위하여 노르웨이의 Drøbak 협곡으로 접근했다. 당시 협곡에는 기뢰가 부설되어 있었고, 실제로 이로 인해 엠덴이 기뢰에 접촉해 손상되기도 하였다. 본래 이런 상황에서는 정찰이나 소해 목적으로 어뢰정 등 소형함을 먼저 들여보내야 했으나, 이미 저 시점에서는 아침이 오고 있었고 작전을 더 뒤로 미룰 순 없었기에 쿠메츠는 그대로 기함 블뤼허를 협곡으로 전진시켰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Senkingen_av_Bl%C3%BCcher_%285654566265%29.jpg
가라앉는 블뤼허.

그리고 그렇게 꾸역꾸역 협곡으로 들어가던 중, 블뤼허는 노르웨이군의 해안포대와 어뢰에 기습공격을 당했다. 당시 노르웨이측 해안포대가 블뤼허의 좌우측에 모두 위치했었던 관계로 블뤼허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해안포들에게 얻어맞았고, 뒤이어 선체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해안포들도 공격을 게시해 블뤼허 바로 뒤따라오던 뤼초 역시 손상을 입었다. 그나마 뤼초는 블뤼허가 다구리를 맞는 동안 좌현으로 변침하여 빠져나갔지만, 이미 협곡 안으로 상당히 전진한 블뤼허는 그것조차도 불가능했기에 계속해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쿠메츠는 기관실에 필사적으로 속력을 높이라고 명령하면서 동시에 해안포 진지들을 돌파하려고 노력했다. 해안포대만 지나면 오슬로가 코앞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블뤼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르웨이군 요새에 설치된 어뢰 발사대에 의해 추가적인 공격을 당했다. 이로 인해 함내에 대대적인 침수가 발생했고 화재 진압도 실패한 블뤼허는 결국 오전 7시 31분 경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승선인원 중 700명-850명이 탈출하지 못하고 익사하거나 화재로 인해 사망했으며, 가까스로 탈출한 1,000명도 포로로 잡혔다. 게다가 여기서 지상전을 담당할 산악부대원들이 죄다 수장당하는 바람에 독일군의 오슬로 입성이 늦어졌고, 그 결과 노르웨이 왕실이 금괴를 챙기고 오슬로를 탈출하여 영국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정말 엄청난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쿠메츠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다른 생존 승조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노르웨이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로서는 다행히도, 얼마 뒤 노르웨이 정부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쿠메츠는 다시 석방되어 독일로 귀환했다. 쿠메츠는 당대 최신형 순양함이었던 블뤼허를 날려먹었다고 비난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슬로 점령에 대한 공로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2.2.2. 바렌츠 해 해전

1942년 12월 25일, 쿠메츠는 바렌츠 해에서 소련으로 향하던 연합군의 수송선단을 요격하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순양함 2척(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아트미랄 히퍼,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뤼초) 및 구축함 6척을 이끌고 출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바렌츠 해의 기상은 좋지 않았고, 당연히 시계도 매우 불량했다. 이런 상황에서 쿠메츠는 에리히 레더 제독이 내렸던 "주력함대와의 교전 회피" 명령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수송선단을 공격할 찬스를 몇 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오전 10시 45분 경에는 뤼초와 구축함 3척이 선단의 4km 지점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하였는데, 당시 선단은 소수의 구축함들이 호위하고 있었기에 뤼초가 공격을 감행했다면 충분히 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량한 시계 속에서 선단을 영국의 주력함대로 착각한 뤼초는 그대로 안개 속으로 퇴각해버리고 말았다.

한편 당시 쿠메츠 제독이 승선한 히퍼와 나머지 구축함 3척은 영국 해군의 구축함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어고 있었다. 구축함들은 기동력으로 히퍼의 공격을 피하면서 분전하였으나, 체급차가 너무 컸던 탓에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전투를 지속했더라면 구축함들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는 것이 가능했을 터였지만, 쿠메츠는 여기서마저도 교전회피 명령을 상기시키며 후퇴했다. 그리고 이 틈을 타 크라운 콜로니급 경순양함 HMS 자메이카와 타운급 경순양함 HMS 셰필드가 달려왔고, 이들은 우왕좌왕하던 히퍼를 상대를 공격을 게시하였다. 집중 공격을 받은 히퍼는 보일러실이 침수되어 속도가 28노트로 떨어져 버렸고, 5분 후에는 HMS 셰필드의 포격으로 인하여 1934년 A형 구축함 Z16 프리드리히 에콜트가 격침되었다. 결국 1월 9일 11시 59분 경 쿠메츠는 전 함대에 퇴각을 명했고 전투는 영국의 대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연히 본국에서는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히틀러는 격분하였고 급기야 독일 해군의 모든 대형함을 해체하여 대서양 방벽용 물자로 전환시키라는 극단적인 명령까지 내렸다. 해군최고사령관 에리히 레더는 자신이 사임하면서까지 이 명령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후임으로 임명된 카를 되니츠가 히틀러에게 간곡히 요청한 후에야 히틀러는 이 대형함 해체 명령을 폐기했다. 참고로 정작 이 해전의 당사자인 쿠메츠는 별다른 문책을 받지는 않았는데,[3] 근본적으로 히틀러는 이 졸전이 쿠메츠보다는 주력함대와의 교전 회피를 명한 상관 레더에게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프렌드, 아니 상관 쉴드 물론 쿠메츠도 잘한 건 없었지만 말이다.

2.2.3. 스피츠베르겐 섬 공격과 이후

1943년 쿠메츠는 비스마르크급 전함 티르피츠샤른호르스트급 전함 샤른호르스트, 구축함 3척, 그리고 제345 척탄병 연대를 이끌고 노르웨이 스피츠베르겐(Spitzbergen) 섬에 있는 연합군 기상 관측소와 발전소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워낙 동원한 전력이 압도적이었기에 전투 자체는 독일 해군의 압승으로 끝났으나, 섬을 지키던 노르웨이 저항군이 해안포로 격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구축함 두 척이 손상되고 4명의 승조원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나마 스피츠베르겐 섬 자체는 초토화되었고 관측소도 파괴되었으나, 불과 한 달 만에 연합군은 다시 병력을 스피츠베르겐 섬에 상륙시켜 기어이 관측소를 복구해 버렸다(...)

이후 1945년, 쿠메츠는 독일의 동프로이센 철수작전인 한니발 작전에 참여했다. 이 작전에서 그는 민간인을 수송할 상선들을 징발하였으며 카를 되니츠 제독을 도와 작전 전반의 지휘를 맡았다. 이를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과 독일 해군은 연합국에 항복했고, 쿠메츠는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2.3. 전후

쿠메츠는 1946년 11월, 약 1년 4개월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쿠메츠는 Bad Dürkheim에서 채소 재배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다가, 나중에는 카지노 접수원으로 일했다.

이후로 쿠메츠는 꽤나 장수하다가, 1980년 12월 17일에 8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역시 욕 먹으면 오래 산다 그리고 쿠메츠가 사망하고 일주일 뒤였던 12월 24일, 한때 그의 상관이있던 카를 되니츠가 사망하면서 독일 국방군의 고위 장성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 다만 개인의 능력은 없지 않았는지 종전 때까지 꾸준히 기용되었고 여러 굵직굵직한 작전에 참가했었다.[2] 왜 상륙부대가 수송선이 아니라 기함에 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 독일 해군은 수송선 전력이 극도로 모자란 상황이었기에 일반 군함에 상륙부대원들을 분숭시켰다. 또한 이렇게 하면 수송선 호위가 필요없어지니 다른 임무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최고사령부의 판단도 한몫했다.[3] 그런데 대형함 해체 명령을 생각해보면 어떤 면에서는 히틀러가 독일 해군 전체에게 큰 문책을 내렸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