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Carl-Heinrich von Stülpnagel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
출생 | 1886년 1월 2일 독일 제국 베를린 |
사망 | 1944년 8월 30일 나치 독일 베를린 |
최종 계급 | 육군 보병 대장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주요 서훈 | 기사십자 철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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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Karl-Heinrich von Stülpnagel)은 독일 제3제국의 보병대장이자, 히틀러에 대한 암살을 꾀한 인물이다.2. 생애
프로이센 융커 가문 태생으로 아버지 헤르만 폰 슈튈프나겔은 독일 제국군 중장이었고, 친척 오토 폰 슈튈프나겔 또한 독일 국방군 육군 장군이었다.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초급장교로 참전, 종전 시 육군 대위였으며 철십자 훈장을 2회 수훈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군에 남았으며 1937년에는 육군 중장으로 육군참모차장을 지냈고 1939년 4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3. 바르바로사 작전
제17군을 지휘하여 키예프 전투 등의 승전에 기여했다. 이후에는 프랑스로 이동하여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오토 폰 슈튈프나겔 보병대장의 후임으로 프랑스 군정청의 프랑스 주둔군 사령관(Militärbefehlshaber in Frankreich)으로 재직하고 있었다.4. 1944년 7월 20일
이미 패색이 조금씩 짙어져 가는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하라는 압력을 받은 슈튈프나겔은 슈바르체 카펠레와 연합하여 총통의 암살을 꾀했다.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슈바르체 카펠레 단원들이 베를린에서 발키리 작전을 발동함과 동시에, 프랑스 파리에 있던 슈튈프나겔도 자기 휘하 병력에게 파리의 SS와 게슈타포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파리에 있던 서부전선 해군 사령관 해군대장 테오도어 크란케(Theodor Krancke) 제독이 이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예하의 해군 병력 1천여명을 육전대로 동원하겠다며 대치했고, 보다못한 주 파리 대사의 중재로 슈튈프나겔 장군은 반란을 포기했다. 슈튈프나겔 장군은 "오해였다"며 상황을 무마한 뒤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해군과 SS 지휘관들과 건배를 하며 훈훈한 분위기로 헤어졌다. 그 뒤 슈튈프나겔 장군은 베를린에서의 거사 실패 소식을 접하고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한쪽 눈만 실명한채로 자살에 실패했고, 이후 체포되어 8월 30일에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