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을 확인하세요.
<colbgcolor=#000><colcolor=#fff> 구드룬 부르비츠 Gudrun Burwitz | |
본명 | 구드룬 마르가레테 엘프리데 에마 아나 부르비츠 Gudrun Margarete Elfriede Emma Anna Burwitz) |
출생 | 1929년 8월 8일 |
바이마르 공화국 뮌헨 | |
사망 | 2018년 5월 24일 (향년 88세)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버지 하인리히 힘러, 어머니 마르가레테, 남편 불프 디터 부르비츠, 자녀 2명 |
[clearfix]
1. 개요
독일의 네오나치 운동가.나치 독일의 SS와 게슈타포의 지휘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 그의 부인 마르가레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일명 ‘나치의 공주’들 중 하나다. 원래의 성은 힘러(Himmler)였는데 결혼 후에 남편의 성인 부르비츠로 바꿨다.
일본의 전쟁범죄자 도조 히데키의 손녀인 도조 유코와 비슷한 인물이다.
2. 유소년기
어린 시절, 아버지 하인리히 힘러와 함께.
아돌프 히틀러와 찍은 사진.
하인리히 힘러는 소문난 애(공)처가이자 딸바보였다. 구드룬은 뮌헨에서 태어나 어머니 마르가레테와 함께 뮌헨에 살고 있었는데, 힘러는 수시로 아내와 딸을 베를린으로 불러들였고 매일같이 가족에게 전화하고 매주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힘러는 집무 중에도 딸을 곁에 두었고 '내 강아지(Püppi)' 라고 부르며 아꼈다.
구드룬은 왜 또래의 남자친구들이 자신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매우 의아해하면서,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는 신세에 대해 푸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힘러는 이따금 자신이 시찰할 곳에 딸을 데리고 가곤 했는데, 그곳은 193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최초의 강제수용소 다하우였다. 여기 가서는 아이한테 수감자들을 보여주면서 어떤 표시가 포로고 수감자라고 설명해 주었으며, 동료들과 함께 포로들의 집결 장소임을 알리는 표시판 아래서 단체로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구드룬은, 아버지가 승진 가도에 오르던 걸 경탄했다고 한다.
사랑스런 아빠가 라이히의 내무장관이라니 기뻐서 미칠 것 같아. 그렇게나 명성이 높은 아빠.
- 1943년 8월의 일기
- 1943년 8월의 일기
구드룬의 유년기에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힘러네 집에 찾아와서 함께 식사하기도 하고, 매해 첫날 만날 때마다 구드룬에게 인형이나 초콜릿을 선물로 줬다니, 싫어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1945년 5월(16세 무렵) 구드룬은 어머니 마르가레테와 함께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 주에서 미군에게 붙잡혔는데, 힘러의 옛 참모장인 카를 볼프가 볼차노[1]의 별장에서 체포되면서 '나를 독일로 돌려보내준다면 당신들에게 힘러의 아내와 딸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겠다'고 거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럽 각지의 수용소를 전전했는데, 혹시 대중이나 당원들이 일으킬지 모르는 폭력사태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호위대가 따라다녔다. 피렌체 영국심문센터의 한 경비원은 "만약 당신들이 힘러의 처자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갈가리 찢겨져 죽을 겁니다"라고 했다니 말 다했다. 구드룬이 아버지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이때였다.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하인리히 힘러가 1945년 5월 23일 자살했지만 구드룬은 한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어머니 마르가레테가 미국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결국 큰 충격을 받고 거의 3주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고열에 시달렸고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구드룬은 "아버지는 청산가리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녀에게 아버지가 자살한다는 것은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구드룬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를 관리하던 영국군 지휘관에게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떼어 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며, 쓸모도 없는데다 보호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슈미트'라는 가명을 부여했지만, 후술하듯 오래가지는 못했다.
구드룬은 수감 중 음식이 초라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결국 협상에서 승리하여 어머니와 함께 장교들과 똑같은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이때 "이제부터 제 성은 힘러예요. 더 이상의 가명도 연극도 필요 없어요."라고 강조했다. 1946년 11월, 전쟁범죄와 전혀 연관이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아버지와 전쟁에 관한 대화를 했는지 질문받았을 때) 저는 아버지와 전쟁이나 그런 비슷한 것들에 관해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어요.
석방되기 전까지 구드룬은 어머니와 함께 탈나치화 과정의 일환으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어머니는 석방될 때 오히려 떠나기를 거부했다. 무일푼인 데다 린치를 당할까 두려웠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수도원에 '정신박약자들'이라는 명목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1952년까지 그곳에서 지냈지만, 그곳에서도 구드룬은 안정되지 못한 삶을 살았다.
개신교인 여성들이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그녀는 공동체와 거리를 두고 '나는 아빠처럼 되고 싶어요.'라며 끊임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힘러의 집안은 가톨릭 집안이었기 때문이다.[2] 그곳의 사람들에게 그녀는 결코 마음을 열지 않았고, 떠날 때까지 울거나 웃는 등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였다.
3. 성인이 된 후와 나치 옹호 활동
구드룬은 단 한 번도 나치 이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변호할' 책이 아니라[3]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킬 책을 쓰고 싶어했으며 "오늘날에 나폴레옹, 웰링턴, 몰트게가 거론되는 방식대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구드룬은 끝까지 자신에게 다정했던 아버지를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확신했고 그를 열렬히 사랑했는데, 아버지의 직업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는 "제 아버지는 SS 국가지도자였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을 정도였다. 이러다보니 인생이 순탄치 않았다. 그녀의 삶은 나치 거물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학교 입학 요구를 거절당했다가 간신히 입학하고[4], 성을 밝힐 때마다 해고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직장 동료들에게 기피당하고, 손님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를 거부당하는 등 거부와 왕따의 끝없는 반복으로 점철되었다.
1955년에 영국 정치인 오스왈드 모슬리[5]가 히틀러 시대 외무부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아들인 아돌프 폰 리벤트로프와 함께 마련한 야회에 참석했는데, 자긍심을 드러내면서 "많은 파시스트를 만났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가 자신이 일하던 펜션에서 손님이 "제 아내도 아우슈비츠의 가마에서 불에 타 죽었는데, 어떻게 제가 그런 여자에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하는 바람에 쫓겨난 적도 있다.
구드룬은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불프 디터 부르비츠(Wulf Dieter Burwitz)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는데, 남편도 힘러의 이상을 추종했다고 한다. 그녀는 네오나치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였고 1951년 이후부터는 징역을 살고 있거나 도주 중이던 SS 단원들을 구원하는 모임인 '슈틸레 힐페(Stille Hilfe, 번역하면 '조용한 손길' 또는 '침묵의 원조')' 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수십 년 간 그녀는 '슈틸레 힐페' 의 상징으로 활동했고, 모임을 주최하거나 저술활동을 하였으며 나치의 공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조직의 목표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전쟁포로와 수감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책임지고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치의 남미 도주에도 관여했고 아돌프 아이히만, 요제프 멩겔레 같은 S+급 나치 전범들도 이곳의 네트워크에 도움을 받았다. 이 조직은 옛 나치 당원들하고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네오 나치 운동을 위한 비자금을 공식적으로 모았다.
그녀는 SS 상사이자 힘러의 측근이고 수용소 수감자들이 가장 두려워했으며 가장 잔인했던 관리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전범 안톤 말로트가 2001년에야 유죄 판결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을 때 주요 지지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슈틸레 힐페는 말로트가 최고급 양로원에 거처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이 양로원이 세금으로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많은 비판이 일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도 쏟아지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2002년에 말로트가 죽을 때까지 꾸준히 면회를 갔다.
1952년에는 히틀러유겐트를 모방한 비킹 유겐트(Wiking-Jugend)를 설립하는 데 일조했다.[6] 전후 네오나치 활동의 주축인 '블랙 위도우' 플로렌티너 로스트 판 토닝언(Florentine Rost van Tonningen)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한때 뮌헨 근교의 고급 요양원에서 생활하였으며 나치의 전범을 구원하고 원조하는 활동을 지속하였다. 2010년에 슈틸레 힐페가 네덜란드 나치 전범 클라스 카렐 파버[7]가 본국으로 인도되는 걸 막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으며 심지어 네오나치가 관여한 적이 있다는 뮌헨 올림픽 참사에도 그녀의 개입이 있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다. 극우 정당 NPD를 지지했다. <나치의 아이들>의 저자는 아버지의 명예를 복원시키려고 노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버지의 이상을 따라가려 한다고 평한 바 있다.
2018년 5월 24일에 자신이 생활하던 요양원에서 향년 88세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1960년대에 독일 연방정보국(BND) 직원으로 활동했음이 사후에 확인되었다.#
4. 평가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동정과 비난, 둘 중 하나만은 아니다. 때로는 둘 다이기도 하고 그녀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분석을 시도한 이도 있다.구드룬은 아버지가 '역사'의 가장 흉악한 범죄 중 하나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걸 상상하지 못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아버지를 옹호하고자 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아버지와 SS의 괴물, 사고가 편협하기 짝이 없는 광신자, 궁극적인 해결의 계획자이자 현장 감독인 아버지 사이에서 상황을 고려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젠가는 과거에 독일군이었던 사람들이 나타나 아버지의 무고함을 증명해줄 거라 믿고 있다.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는데도 그녀에겐 소용이 없다. 그녀가 이토록 맹목적인 건 아버지와 맺었던 특별한 관계 때문일까?
- <나치의 아이들> 중에서
그녀는 "저는 제 일에 관해 결코 말하지 않아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겁니다. 제가 할 수 있을 때 말이죠."라며[8] 인터뷰를 절대 거절했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유일한 예외가 1959년 노베르 르베르 기자에게 허용했던 인터뷰다. 이 기자의 아들 스테판 르베르가 자신의 책에서 아버지의 인터뷰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은 구드룬 같은 자식들은 이런 식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지녔던 영광을 경배하는 행위로부터 스스로를 확신시키는 어떤 부분을 이끌어낸다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들은 가족이 자아낸 무거운 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구드룬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은 훌륭한 가장으로서의 모습뿐이었고 다른 측면은 언론이나 책을 통해서만 전달됐다. 그것들이 얼마나 타당했든 간에 구드룬을 포함해 전범 아버지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전범 자녀들에게는 자신들의 경험과 이질적인 정보를 부정하는 행위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그녀는 평생 자신의 잘못이 아닌 잘못 때문에 배척을 받으며 살아 왔는데 이것은 그녀가 자신을 억울한 피해자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나치의 아이들> 중에서
그녀의 종질녀[9]인 카트린은 바르샤바 게토에 살던 유태인 가문의 후손과 결혼했으며 자식을 낳은 뒤 <힘러 가의 형제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어떤 감정에 자주 사로잡히곤 했다'고 술회하며 나치가 저지른 잔혹한 일을 절감했지만 자신의 가족에 대해 숙고한다는 건 오랫동안 힘든 일이었다고 밝혔다. 매우 가까운 사람이 문제가 될 때면 정신적으로 방어하려는 성향이 너무나 강하고 소외로 인한 고뇌로 끊임없이 위협받는 견디기 어려운 과정이며 특히 자식의 경우 방어하려는 성향이 유독 강하다고 그녀는 지적했다. 그래서 카트린은 당고모인 구드룬과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통설은 그녀의 행동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저지르지 않은 일에 그녀의 책임이 있다고 간주할 수는 없으며 그녀의 행동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없었던 자아의 방어기제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완벽한 예시라는 것이다.
좀 더 쉽게 풀이하자면 평범한 여성이 아버지를 정말 잘못 만나 비뚤어진 케이스이다. 힘러가 망나니였다면 몰라도 가정에서만큼은 남들 부러울 거 없는 모범가장이었으니 남들은 알 수 없는 내밀한 애정 및 추억을 잊을 수 없었고, 전범의 자식이란 이유로 갖은 차별까지 겪다가 결국 잘못된 길로 빠진 케이스다. 적악여앙[10]이라고 할 수 있다.
[1] 오스트리아 국경에 가까이 있는 이탈리아의 도시로, 유럽의 주요 교통로다.[2] 힘러는 젊었을 적에는 열렬한 신자였으나 이후 가톨릭 신앙을 버렸다.[3] 변호하게 된다면 아버지의 죄를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4] 1947년 응용예술학교에 입학하려고 할 때 교장이 이름을 보고 즉각 거부했지만 전범 혐의가 가족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빌레펠트 사회민주당 대표가 개입해서 등록할 수 있었는데 그는 "우리의 젊은 민주주의는 부모들의 잘못으로 그 자식들이 고통받도록 만들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구드룬은 재단사 교육을 받았다.[5] 영국의 유명한 파시스트 정치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창설했다. 반유대 폭동을 수차례 자행하였으며 베니토 무솔리니, 아돌프 히틀러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연금되었다. 종전 후 석방되어 다시 파시스트 짓을 하고 다녔다.[6] 이 조직은 1994년 활동이 금지되었다.[7] 전쟁 기간 동안 유대인과 반독일 운동가를 합해 총 22명을 살해했다. 1947년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8] '슈틸레 힐페' 활동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9] 하인리히 힘러의 동생인 에른스트 힘러의 손녀. 힘러에게는 종손녀에 해당되며 구드룬은 카트린의 당고모가 된다.[10] 積惡餘殃, 남에게 악한 짓을 많이 하면 그 죄에 따르는 재앙이 자손에게 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