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18:38:06

키부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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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부 분쟁
Guerre du Kivu
Kivu Conflict
제2차 콩고 전쟁의 여파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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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3 반군에게 파괴당한 우루과이군이 파병한 UN 소속 LAV
기간
2004년 6월 2일~진행 중
([dday(2004-06-02)]일째)
장소
콩고민주공화국 키부 및 인근 지역[1]
교전국 및 교전세력
3월 23일 운동 (M23)
인민수호국민회의
지원국:

[[르완다|]][[틀:국기|]][[틀:국기|]](2017~)

[[부룬디|]][[틀:국기|]][[틀:국기|]]

[[콩고민주공화국|]][[틀:국기|]][[틀:국기|]]
르완다해방민주군(2022~)
파일:UN기.svg MONUSCO
콩고자유주권애국동맹(2012~2013)
파일:앙골라 국기.svg 앙골라
파일:르완다 국기.svg 르완다(2009)
파일:짐바브웨 국기.svg 짐바브웨
파일:보츠와나 국기.svg 보츠와나
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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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해방민주군(2004~2022)
콩고자유주권애국동맹(2013~2016)
FNL-은자밤페마(2013~)
FNL-팔리페후투(1993~2009, 2010~2013)
부룬디 인민군
신은두마콩고방위군(2014~)
은두마콩고방위권(2008~2017)
콩고주권국민연합(2017~)
라이아 무톰보키
파일:연합민주군기.svg ADF
파일:지하드 깃발.svgIS-CAP
마이마이 키얀데카
지휘관
병력
인민수호국민회의: 6,000~8,000명
3월 23일 운동: 5,500명 이상
2004년
콩고민주공화국군: 14,000명
마이마이 군부: 4,000~5,000명
2008년
콩고민주공화국군: 6,000~7,000명
마이마이 군부: 3,500명
2013년
UN군: 22,016명
르완다해방민주군: 2,000명
콩고자유주권애국동맹: 1,500명
민족해방군: 3,000명
신은두마콩고방위군: 1,000~1,250명
기타 무장세력: 10,000명 이상
피해
인민수호국민회의: 233명 사망콩고민주공화국군: 71명 사망
보츠와나군: 불명
UN군: 17명 이상 사망
불명불명

파일:M23_2025_02_AfterBukavu.png
2025년 2월의 전황 (M23의 장악 지역)

1. 개요2. 배경3. 진행
3.1. 정부군 vs CNDP (2006~09)3.2. FDLR의 준동 (2009~12)3.3. 정부-UN군 vs M23 vs FDLR3.4. 상대적 소강기 (2013~17)3.5. ADF vs 정부군 vs FDLR3.6. 정부군 vs ADF-IS (2019~)3.7. 정부군 vs M23 (2022~)
3.7.1. M23의 고마 점령 (2025)3.7.2. M23의 부카부 점령 (2025)

[clearfix]

1. 개요

콩고민주공화국북키부주남키부주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로 제2차 콩고 전쟁 종전 직후부터 발생했다.

주요 반콩고 반군 세력인 3월 23일 운동 (M23)을 르완다가 지원하기에 콩고민주공화국 내에서 반르완다 정서가 커지고 있으며, 양국 간의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위기는 2025년 1월, M23이 콩고민주공화국령 인구 80만의 대도시인 고마를 점령하며 고조되었다.

2. 배경

콩고 내전르완다 내전 때에도 벌어진 콩고 동부의 후투족 vs 투치족간 무력 충돌은 2003년 콩고 내전이 종전된 후로도 계속되었다. 르완다 해방을 위한 민주군 (FDLR)은 콩고 정부의 묵인 혹은 비호 하에 지속적으로 투치족과 르완다를 공격했고, 이에 격분한 콩고 정부군의 투치족 장교 로랑 은쿤다가 인민수호국민회의 (CNDP)를 조직하여 정부군 및 FDLR에 맞섰다. 반군들은 콩고 동부 일대의 자원인 콜탄 판매로 무기를 구입하고, 민족주의 선전으로 세를 불려갔다.

3. 진행

2004년 6월, CNDP가 (2020년대 기준) 인구 110만의 대도시인 남키부주의 주도 부카부를 점령하며 키부 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비록 UN 협상단의 노력으로 CNDP 군대는 8일만에 본거지인 마시시 숲으로 돌어갔지만, 전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2005년, CNDP 수장 은쿤다는 부패한 콩고 정부의 전복을 선포하며 정부군 이탈 세력을 모았다. 2006년부터 CNDP는 북키부주의 사케 일대에서 다시 정부군과 충돌했고, UN 제재 대상이 되었다.

3.1. 정부군 vs CNDP (2006~09)

평화 협상이 시도되었지만 별 진전은 없었고, CNDP는 10여개 학교에서 남녀 학생들을 소년병과 성노예로 삼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다만 정부군 역시 전쟁 범죄와 민간인 지역 포격 등으로 UN도 비판할 정도로 인망을 잃었고, 2007년 10월 정부군이 대규모 반격에 나서자 37만의 난민이 발생했다. 하지만 반격은 실패했고, CNDP는 4개 마을을 점령했다. 같은해 12월에는 미국, 부룬디, 르완다, 우간다가 아디스아바바 회의에서 콩고 반군을 지원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후 재개된 협상에서 2008년 1월 31일, CNDP가 북키부주에서 철수하는 대가로 사면을 받는다는 내용의 휴전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같은해 10월, CNDP는 투치족 난민들의 재정착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을 이유로 공세를 재개했다.

CNDP는 비룽가 국립공원 일대를 장악했고, 고마 시에서는 주민들이 무기력한 UN에 항의하며 그 건물들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항의했다. 2008년 10월 말, CNDP 군이 고마 외곽에 접근하자 UN 평화유지군은 헬기와 장갑차를 동원해 지연 작전에 나섰지만 정부군은 무질서하게 도주하기에 바빴다. 다만 CNDP 수장 은쿤다는 고마 함락을 목전에 두고도 UN 평화유지군과의 정면 충돌을 부담으로 여겨 정부 측에 재차 협상을 요구하며 인도주의 회랑 및 안전 구역 설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협상은 산발적 교전이 이어지며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CNDP는 르완다와의 관계에 있어 내분을 벌이며 약화되었다. 그러던 2009년 1월, 후투족 반군인 FDLR에 대해 르완다는 콩고민주공화국과 공동 진압에 나서기로 약속한 후 5천의 병력을 파견했다.

잘 훈련된 르완다 군의 공세에 FDLR은 순식간에 패했고, CNDP 역시 고마 부근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1월 22일, 르완다 군은 은쿤다를 사로잡아 국내로 압송했다. 3월 23일, CNDP는 정부와 평화 협정을 맺으며 군대를 해체하고 정당으로 개편되어 투치족 권리를 위해 정치적으로만 투쟁하게 되었다. 이로써 키부 분쟁은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3.2. FDLR의 준동 (2009~12)

CNDP가 사라져 힘의 공백이 생기자, 그동안 CNDP에 눌려 있던 FDLR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르완다 군의 철수 후 세력을 회복한 FDLR은 2009년 5월부터 투치족 마을들을 공격했고, 1백여 주민을 죽였다. 2010년 여름에도 1백 이상의 투치족 주민들을 강간 혹은 살해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분노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군과 유엔 평화유지군이 수십명 전사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콩고 정부는 FDLR 토벌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유엔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요구해 감축시키는 등 투치족들을 더욱 위험에 노출시키기까지 했다. 2012년에만 FDLR은 264명의 투치족을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콩고 정부 및 유엔의 방관적 태도로 인한 투치족의 고난은 르완다 내전 당시 투치족 학살의 아픔을 뼈저리게 기억하던 옛 CNDP 대원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그들은 결국 재무장하여 2012년 5월 6일에 3월 23일 운동 (M23)을 조직했고, 자체적으로 FDLR과 싸웠다.

3.3. 정부-UN군 vs M23 vs FDLR

정부군에서 이탈한 3백 병력으로 보강된 M23은 FDLR을 격파한 후에도 멈췄다 않고 CNDP 시기처럼 고마 점령을 목표로 세력을 확장했다. 2012년 11월 20일, 마침내 M23은 정부군이 철수한 고마를 점령했다. 다만 협상 후 12월 초에 철수했고, 2013년 2월에 아프리카 11개국이 콩고 평화안을 결의했다. 이후 M23 내에서는 주전파와 협상파가 내분을 벌였고, 무력 충돌 끝에 주전파의 술타니 마켕가가 임시 지도자가 되었다. 다만 3월 28일, 유엔 안보리 결의 2098호가 채택되며 콩고 동부에 '공격이 가능한' 2만에 달하는 유엔군 파견이 시작되었다. 6월 ~ 10월에 걸쳐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말라위 군대로 구성된 유엔 평화유지군 (MONUSCO)이 고마에 당도했다. 유엔군은 M23을 키창가에서 몰아냈고, 이후 정부군도 치안 유지에 나섰다. 2013년 정부군은 키창가에서 지역 반군인 콩고자유주권애국동맹와 전투를 벌였고, 승리했으나 도시는 파괴되었다.

3.4. 상대적 소강기 (2013~17)

2013년 11월에 M23의 술타니 마켕가는 사실상 항복을 선언하며 무장해제 후 대원들과 우간다로 망명했다. 이로써 휴전이 체결되며 콩고 동부는 1년 이상 상대적 평화를 누렸다. 그러던 2015년 1월, 정부군은 여러 반군들에 대한 공세에 나서 그중 라이아 무톰보키를 항복시켰다. 뒤이어 정부군은 FDLR을 공격해 182명을 전사시켰고, 여러 마을을 탈환했다. 하지만 북키부주는 안정되지 못하여 2016년 1월에 FDLR과 현지 반군이 충돌했다. 2017년 6월 30일, 남키부주에서 콩고주권국민연합 (CNPSC) 반군이 결성되며 전쟁은 새 국면에 돌입했다. 또한 그 무렵부터 우간다의 반군인 ADF가 콩고 동부에서도 활동하며 우간다와 콩고 양국이 협력하게 되었고, 술타니 마켕가가 150여명과 돌아와 우간다-콩고-르완다 국경지대에 거점을 세웠으나 별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3.5. ADF vs 정부군 vs FDLR

2017년 12월, ADF는 유엔군 기지를 공격해 15명 이상을 전사시키며 존재감을 알렸다. 이는 1993년 소말리아 이후 유엔군의 단일 전투 최대 손실이었고, 국제적 공분을 샀다. 2018년 들어 ADF는 북키부주 북부의 거점 도시 베니를 수차례 공격했고, 수십명의 주민이 사망했다. 2018년 기준 콩고 동부에는 134개의 무장 조직이 있었다. 2019년 9월, 정부군은 FDLR 지도자를 사살했다. 하지만 그해 말에도 CNPSC 등 반군이 백여개의 투치족 마을들을 불태워 20만이 피신하는 등 투치족에 대한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3.6. 정부군 vs ADF-IS (2019~)

2019년 가을 들어 정부군은 ADF에 대한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2020년 1월, 정부군은 ADF 거점인 '마디나'를 기습해 점령했다. 그럼에도 ADF는 5월에 이투리주에서 민간인 40여명을 학살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10월에는 ISCAP (IS 중앙아프리카 지부)가 베니를 공격했고, 1300여 교도소 수감자들이 탈옥했다. 12월에도 ADF는 25명의 민간인을 학살해했고, 2021년 1월에도 25명을 학살했다. 2021년 들어 정부군은 유엔군과 함께 공세에 나서 로세로세를 점령했다. 2월 22일, ISCAP로 추정되는 UN 호송대에 대한 공격으로 고마 인근에서 주콩고민주공화국 이탈리아 대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뒤이어 정부군이 ISCAP 거점을 공격했으나 40여명이 전사했다. 3월에도 ISCAP와 결탁한 ADF가 베니 인근에서 23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4월에는 정부군 기지가 습격을 당했다. 4월 30일,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은 북키부주에 대해 계엄령을 내렸다.

이후로도 ISCAP의 산발적 공격과 기독교도 살해가 계속되었고, 8월 9일 ISCAP가 이투리주의 두 마을을 점령했다. 11월 30일부터 정부군은 우간다 군과 함께 ADF 및 ISCAP에 대한 공동 토벌 (수자아 작전)에 나섰다. 2022년 1월, ISCAP 간부 살림 모하메드가 사로잡혔고, 3월에는 ISCAP 지휘관 아부 아덴이 사살되었다. 하지만 ISCAP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고, 일부 반군 세력을 흡수했다. 2023년 2월에 정부군은 ISCAP 기지를 폭격, 사령관 엘리아스 세구자의 사살을 발표했다. 6월 16일에 ADF는 우간다에서 음폰드웨 학교에서 42명을 살해하는 학살을 벌여 국제적 공분을 샀다. ISCAP는 8월 16일에 카콴구라 감옥을 습격해 8백의 수감자를 풀어줬다. 9월에 우간다군은 ISCAP 부수장 메디아 은칼루보의 사살을 발표했다. 2024년 들어서는 베니 일대의 안전이 확보되었고,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3.7. 정부군 vs M23 (2022~)

파일:M23_Offensive_Map.svg.png
2025년 2월 기준의 M23 점령지. 키부 ~ 에드워드 호에 이른다.

5년간 웅크리고 있던 M23은 정부군이 ISCAP 토벌에 집중하는 틈에 세력을 키웠고, 2022년 3월 27일에 공세에 나섰다. 불과 3일 만에 M23은 10여개 마을을 점령했고, 콩고민주공화국은 르완다가 반군을 돕는다며 비판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우간다 군도 국경을 넘어 정부군 편으로 개입했고, 휴전 협상이 벌어졌으나 결국 결렬되었다. M23은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을 밝혔으나 정부군은 무시하고 공세를 가했다. 하지만 싸울수록 정부군은 연패했고, 5월 18일 M23이 키붐바를 점령했다. M23의 기세에 고마에서는 7만명이 피난했고, 5월 25일 M23 군대가 고마 외곽에 당도했으나 유엔군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한동안 소강 상태가 이어졌고, 콩고민주공화국과 르완다는 각각 르완다군 참전 및 르완다 영토 내 미사일 착탄 등을 두고 외교 마찰을 벌였다. 또한 정부군은 FDLR을 비롯한 현지 민병대들과 타협, 무기를 주며 M23과 싸우게 했다.

6월부터 부나가나에서 충돌이 재개되었고, 여러 전투 끝에 M23은 6월 13일에 부나가나를 점령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우간다군의 철수로 부나가나가 함락되었다며 비판했다. 이에 우간다 군은 콩고민주공화국과의 협력 및 슈자아 작전을 중단했다. 유엔군은 콩고민주공화국과 우간다 간 화해를 요청했다. 3일 후 정부군은 반격에 나섰으나 패하고 오히려 3개 마을을 더 잃었다. 다만 이후의 전투들에서는 승패를 거듭했고, M23 수장 술타니 마켕가가 부상을 입었다. 점차 정부군이 우세를 점하게 되자 르완다는 M23에 철수 및 휴전을 권했으나 거부되며 전쟁은 계속되었다. 콩고민주공화국 역시 M23의 철수가 선조건이라며 우간다의 협상을 거부했다. 7월 들어 M23은 점령지에 관료를 두고 세금을 걷는 등 정부의 모습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마에서는 적극적인 반격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유엔 건물 등을 공격했다. 8월 들어서는 임시 휴전이 체결되어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8월 15일부터 동아프리카 연합측 평화유지군으로 부룬디 병력이 당도했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10월부터 M23은 재차 공세에 나섰고, 콩고민주공화국은 르완다 대사를 추방했다. 고마의 시위대는 콩고민주공화국이 동아프리카 협력체를 탈퇴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요구했다. 11월 17일, M23은 키붐바 등 6개 마을을 점령했고 다음날 르완다는 임시 휴전을 발표했다. 얼마후 유엔군은 11월에 M23이 최소 131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밝혔다. 12월 23일, M23은 국제 사회의 압박 하에 키붐바에서 철수했으나 외곽에 병력을 남겼다. 한편 고마에는 케냐, 우간다, 남수단 평화유지군이 당도했다. 2023년 1월, M23은 평화유지군에 루만가보 기지를 넘겼다. 1월 24일, 르완다 땅에서 콩고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다시 공세에 나선 M23은 1월 27일에 키창가를, 2월 24일에 무샤키를 점령하며 고마를 더욱 고립시켰다. 3일 후에는 루바야의 콜탄 광산 역시, M23에게 점령되었고, 3월 들어 10만의 난민이 발생했다.

앙골라의 휴전 중재는 실패했고, M23은 몇몇 마을들을 평화유지군에 넘기면서도 새로운 곳들을 점령해나갔다. 4월 3일, 우간다 평화유지군이 부나가나를 접수했다. 다만 부나가나와 다른 반환 도시들에서 평화유지군은 M23과 함께 주둔했고, 이에 콩고민주공화국 여론은 분노했다. 10월 들어 콩고민주공화국은 동아프리카 연합측 평화유지군에게 철수를 요구했고, M23은 밤보를 점령하며 고마의 20km 거리에 육박했다. 2024년 2월 4일, M23은 샤샤를 점령하여 고마와 외부 간의 마지막 육상 통로를 끊었다. 고마로 향하는 모든 도로를 장악한 M23은 사케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6월 20일,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는 필요하다면 콩고민주공화국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뒤이어 유엔은 르완다의 M23 지원을 확인했다. 8월 5일에는 전투에 지친 백여명의 정부군 장교들이 우간다로 망명했다. 7월 31일에 제안된 루안다 협정의 조인을 위해 앙골라가 주최하려던 3자 회담은 르완다 대통령의 불참 의사로 인해 결렬되었다.

3.7.1. M23의 고마 점령 (2025)




2025년 1월 4일, M23은 인구 4만의 마시시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후 M23은 여러 마을들을 점령했고, 특히 부아보 지역에서 영토를 넓혔다. 1월 18일,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은 M23과의 협상은 없다고 선포했다. 다음날 M23은 룸비시, 찬구에 광산 지대를 점령했고 사케 인근을 포격한 후 남키부주의 미노바를 점령했다. 이후 M23은 키부 호수를 따라 마을들을 점령했고, 18만의 주민들이 대피했다. 고마에서는 정전이 벌어졌고, 1월 23일 M23이 사케를 점령하며 10여명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병사가 전사했다. 고마 북쪽에서는 연이은 포격전으로 많은 주민들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고, 유엔과 국제사회는 휴전을 촉구했다. 1월 25일부터 M23은 고마 외곽에 진입했고, 6명의 평화유지군이 전사했다. 사케에서는 3명의 말라위 평화유지군이 전사했다.

1월 26일에는 루사요 난민 캠프에 폭격이 가해져 10명이 사망했다.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은 M23을 테러리스트가 아닌 '정치적 반군'이라 지칭한 아프리카 연합을 비판했다. 고마에서도 포격으로 10여명이 사망했고 전파교란과 함께 약탈이 벌어졌다. M23은 48시간 내로 항복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고, 일부 군인 및 주민들이 항복하거나 배에 올라 부카부로 도주했다. 1월 27일 아침, M23은 고마 점령을 선포했다. 포격으로 파괴된 문젠제 교도소에서는 3천명의 수감자들이 탈출하며 불을 지르고 여자 죄수들을 강간해 200여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아침 킨샤사에서는 시위대가 M23의 철수를 요구하며 미국, 르완다,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케냐, 우간다 대사관을 습격했다. 고마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평화유지군이 4명이 추가 전사한 후 항복했다. 르완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싸우려 한다면 교전할 것이라 밝혔다.

1월 29일 M23은 고마 남쪽의 칼레헤 지역으로 진격, 여러 마을들을 점령했다. 같은날 고마에서는 정부군측 루마니아 용병단 3백명이 항복했고, 펠릭스 치세케디 대통령은 르완다에 저항하기 위함이라며 전국에 징집령을 내렸다. 1월 30일, M23은 고마 국제공항을 접수하며 고마 전투를 마무리지었다. 이후 정부군은 M23의 부카부 진격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했고, 유엔에는 지난 7일간 7백의 사망자와 2800의 부상자가 났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국제 사회의 압박 하에 2월 3일, M23은 진격 중지 및 휴전을 선포했다. 다만 공격을 받으면 바로 응전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정부군이 맘바사 등을 수복하고 공세에 나서며 전쟁은 재개되었고, 콩고 장관들이 직접 키상가니로 향해 수백명을 징집했다.

이후 M23은 부카부 방면의 응야마사와 응야비브웨를 공격해 후자를 점령했다. 한편 고마에서는 약탈된 현금 등이 르완다로 이송된다는 첩보가 있었다. 2월 8일, 다르에스살람 회담에서 콩고민주공화국 총리와 르완다 대통령이 마주했다. 콩고민주공화국 측은 르완다군의 철수 및 M23의 고마 철수와 원조 재개를 위한 공항 재개장을 요구했다. 정상들은 30일 내로 다시 만나 논의하기로 했다. 한편 2월 들어 우간다는 M23의 준동으로 콩고 정부군이 약화되자 ISCAP의 견제가 느슨해질 것을 우려해 주콩고 우간다 파견군을 증원했다. 2월 8일부터 멈췄던 총성은 2월 11일에 재개되었고, M23은 남키부주의 주도 부카부로 진격했다.

3.7.2. M23의 부카부 점령 (2025)

  • 2월 13일, M23은 고마와 부카부 사이의 칼레헤를 점령했다.
  • 2월 14일, M23은 부카부 북쪽의 카부무 공항을 장악했다.
  • 2월 16일, M23은 큰 저항 없이 부카부를 점령했다. #

정부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거나 항복했고, 부카부에서도 공권력 부재를 틈타 탈옥이 벌어졌다. 2월 17일 들어 M23은 주지사 관저에 본부를 차리고 혼란을 수습 중이다.
[1] 이투리주, 마니에마주, 탕가니카주 등 콩고민주공화국의 주와 르완다, 부룬디 등 주변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