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어: Hispano argenti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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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스페인 출신 후손들을 의미한다. 스페인계 아르헨티나인은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 다음으로 아르헨티나 내 인구 비중이 많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약 2,000만여 명의 아르헨티나인들이 스페인 혈통을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과거 아르헨티나가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였기에 스페인인들의 첫 이주는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시절에 처음 이루어졌으며, 팜파스의 혼혈 유목 집단 가우초들은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민족 문화의 근간으로 평가받고 있다.[1]2. 이민사
2.1. 독립 이전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탐사한 이후 스페인은 중남미 각지로 식민지를 급속하게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남미에 정착한 스페인인들은 강우량이 충분한 지역에서는 발렌시아에서처럼 벼농사를 지었지만 건조기후에서는 카스티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목축업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스페인의 중부 내륙 카스티야 지방은 건조한 기후로 인해 농업보다 목축업이 주로 이루어진 지역이었고, 남미 식민지에 파견된 스페인인들은 상당수가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지방 출신이기도 했다.16세기 중반부로 오늘날에 아르헨티나 팜파스 평원에 스페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팜파스는 플랜테이션 농사를 짓기에는 적합하지는 않았지만 말과 소, 양을 대량으로 사육하기 적합한 환경이었다. 광활한 팜파스 평원에서는 소와 양을 칠 때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고 목초지가 넓다보니 말을 사육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팜파스에 정착한 스페인인 목동들은 거의 다 남성이었고 대개 현지 원주민 여성들이나 흑인 노예 여성을 처첩으로 삼아 유목 활동을 이어가는데 이들은 오늘날 가우초의 조상이 된다. 당시 팜파스에서는 특별한 지하 자원도 발견된 것이 아니었고 이들은 주로 소가죽을 스페인 본국에 공납하였다.
1776년 스페인은 아르헨티나를 포함하는 남미 일대에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을 설치하였다.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및 볼리비아 일대에서 생산된 상품들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모여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의 세비야 항으로 이송되었다. 새로 남미의 상업 중심지가 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용감한 뱃사람들로 유명했던 바스크인들이 대거 정착하기 시작했다. 1806년 영국 해군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침공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당시 라플라타 부왕령에서 스페인 본토의 지원 없이 영국 해군을 자력으로 격퇴하였고, 여기에 자극받은 라플라타의 크리오요[2]들이 호세 데 산 마르틴의 지휘 아래 봉기하면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2.2. 독립 이후
통계 자료 | |
연도 | 이민 인구 |
1857–1860 | 1,819 |
1861–1870 | 15,567 |
1871–1880 | 24,706 |
1881–1890 | 134,492 |
1891–1900 | 73,551 |
1901–1910 | 488,174 |
1911–1920 | 181,478 |
1921–1930 | 232,637 |
1931–1940 | 11,286 |
1941–1950 | 110,899 |
1951–1960 | 98,801 |
1961–1970 | 9,514 |
1971–1976 | -2,784 |
합계 | 1,380,140 |
스페인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아르헨티나는 땅이 남아도는 상황[3]이 되었고, 팜파스 평원을 좀 더 효과적으로 개척하고자 스페인인들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북반구에 위치한 스페인과 남반구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는 수확철이 달랐고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 이른바 골론드리나스(Golondrinas; 제비)라고 해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농한기를 맞은 농업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로 찾아오곤 했다. 19세기 말 남유럽에서 아르헨티나로 가는 뱃삯이 50달러 정도였는데, 이 금액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철도로 독일로 이동하는 표값보다도 쌌다.
아르헨티나의 독립 이전 팜파스 초원으로 이주해온 스페인인들이 대개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에스트라마두라 등등 중부와 남부 출신이 많았던 것과 다르게, 독립 이후에 들어온 스페인인 이민자들은 북부 지방 출신이 많았다. 1857년부터 1960년 사이에 137만여 명의 스페인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갈리시아, 바스크, 아스투리아스, 칸타브리아, 카탈루냐 출신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독립 이후 스페인 식민 지배의 유산을 청산하고 고유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사람들을 가급적 스페인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갈리시아인(Gallegos)이라고 부르곤 했다. 여담으로 당시 갈리시아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극빈 지방에다가[4] 여타 지방과 다르게 갈리시아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들 이민자들은 스페인 출신임에도 불구 스페인어에 서툴러서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어를 새로 배우곤 했다.
한 편 아르헨티나에 스페인 바스크인들이 대거 정착하는 것을 본 프랑스의 바스크인들도 동포들을 따라 아르헨티나로 이주 정착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들의 기원이 된다. 1850년대 당시 바스크인들은 프랑스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했으나 징집병 중 탈영병의 절반이 바스크인이었을 정도로 프랑스화 정책에 반감이 심했다. 이들에게 아르헨티나는 일종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스페인의 아르헨티나 이민 붐은 1920년대 말부터 꺾이는 듯 하더니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측이 승리한 이후 1940년대, 50년대 다시 이민 붐이 일어났다. 1941년도부터 1950년까지 110,899명, 1951년도부터 1960년까지 추가로 98,801명의 스페인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이민 귀화하였고, 프랑코 정권 시절 당시에는 스페인 갈리시아 주의 주 가계 소득원 중 하나가 아르헨티나에 있는 친척들이 보내는 송금이었을 정도였다.# 1970년대에는 다시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으로 역이민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아르헨티나 내에는 약 9만여 명 상당의 스페인 국적자가 거주 중이며, 반대로 스페인계 아르헨티나인 상당수에게는 스페인으로 다시 원활하게 귀화할 수 있는 귀환권(Right of Return)이 주어진다. 이러한 연유에서 아르헨티나 내 부유층 상당수가 스페인 이중국적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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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화
오늘날 아르헨티나 문화는 미국 문화, 호주 문화가 영국 문화와 다른 것처럼 스페인 문화와는 어느정도 수준의 차이를 보인다.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사이 아르헨티나에 프랑스 출신 혹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지대 바스크계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아르헨티나인들 사이에서 스페인 문화보다는 프랑스 문화를 모방하는 것을 더 매력적이고 세련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성기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남미의 파리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도 이런 이유이다.
두 번째로는 팜파스의 유목민 가우초의 생활 양식이 아르헨티나 전통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과거 소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마테차를 마셔서 비타민을 보충하던 가우초들의 식문화는 스페인 요리와 사뭇 다른 오늘날 아르헨티나 요리 문화로 직접 계승되었다.
세 번째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아르헨티나에 이민 온 이탈리아인들이 스페인계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동화되지 않고 서로 상호 동화 과정을 거쳤던 점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계 이민의 영향으로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스페인어는 이탈리아어 및 이탈리아 각지의 방언 영향이 강하게 남아 본토 스페인어와 상당한 차이가 생겼다.
4. 관련 항목
[1] #1#2[2]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출생한 스페인인 후손들로 현지 원주민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으나 이베리아 반도 출신 스페인인 페닌술라르보다 낮은 계급으로 간주되는데 불만을 품고 라틴아메리카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3] 독립 이후 원주민들을 싹쓸이하면서 실질적으로 활용 가능한 영토가 크게 늘어났다.[4] 토양이 산성이라 농업 소출이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