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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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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초대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국 제13, 15대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Władysław II Jagiełło
파일:Jogaila_(Władysław_II).jpg
이름 요가일라(Jogaila)[1], 야기에우워(Jagiełło}[2]
출생 1352년 / 136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빌뉴스
사망 1434년 6월 1일 (향년 71~82세)
폴란드 왕국 그로데크 야기에우워스키
재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1377년 5월 ~ 1381년 8월 (1차)[3]
1382년 8월 3일 ~ 1434년 6월 1일 (2차)[4]
폴란드 왕국의 국왕[5]
1386년 3월 4일 ~ 1434년 6월 1일
배우자 야드비가 (1386년 결혼 / 1399년 사망)
안나 (1402년 결혼 / 1416 사망)
엘즈비에타 (1417년 결혼 / 1420년 사망)
조피아 (1422년 결혼)
자녀 엘즈비에타, 헤드비히, 야드비가 야기에우워[6], 브와디스와프 3세, 카지미에시[7], 카지미에시 4세
아버지 알기르다스
어머니 트베리의 울리아나
형제 동복형제 13명[8], 이복형제 8명[9]
1. 개요2. 생애
2.1. 집권 이전의 상황2.2. 리투아니아 대공: 1차 재위2.3. 리투아니아 대공: 2차 재위2.4. 폴란드 국왕
3. 가족4. 평가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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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제13, 15대 대공,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초대 국왕.

2. 생애

2.1. 집권 이전의 상황

리투아니아 대공국 12대 대공 알기르다스트베리 공작 알렉산드르 1세의 딸인 울리아나의 아들이다. 1990년대까지는 1352년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알기르다스와 울리아나 부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번째 아이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많은 학자들은 1362년생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두 부부의 여덟번째 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여전히 1352년생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요가일라가 태어났을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리투아니아 대공을 자처한 알기르다스와 트라카이 공작을 자처한 켕스투티스 형제에 의해 양분되었다. 알기르다스는 동방 전선을 책임지고 루스 공국들과 킵차크 칸국을 상대로 적극적인 확장 정책을 벌였고, 켕스투티스는 서방 전선을 맡아 헝가리 왕국러요시 1세, 폴란드 왕국카지미에시 3세, 튜튼 기사단국,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의 영역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홀로 상대하기에 벅찰 경우 서로 협력해 외적에 맞섰다. 이 시스템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켕스투티스가 서방의 침략자들을 상대로 분전하는 동안, 알기르다스는 루테니아 전역에서 킵차크 칸국을 몰아내고 키예프를 장악하는 등 동방 영토를 크게 늘렸다.

그러나 서방 기독교 세력의 공세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리투아니아는 점점 피폐해졌다.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1362년에서 1370년 사이에 약 20번의 원정을 감행했다. 튜튼 기사단은 카우나스 북쪽과 스벤토지 강 유역을 습격했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리투아니아 북서쪽 국경지대를 공략했다. 이들은 수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을 사로잡은 뒤 무슬림에게 노예로 팔아넘겨 막대한 이득을 취했으며, 점령지에 요새를 신설해 지배력을 굳혔다. 급기야 1365년, 켕스투티스의 아들 부타우타스가 아버지와 알기르다스가 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에 참여한 형제 나리만타스를 돕기 위해 볼히니아에 가 있는 틈을 타 여러 귀족과 함께 빌뉴스에서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빌뉴스 총독 디르수나스에게 발각되었고, 부타우타스는 추종자들과 함께 튜튼 기사단국으로 망명한 뒤 기독교로 개종하고 헨리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1365년 8월 튜튼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침공을 감독해 리투아니아 수도권에 위치한 케르나베와 마이시아갈라를 심각하게 파괴했다.

1367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가 리투아니아인들이 튜튼 기사단의 연이은 침공으로 피폐해진 틈을 타 루테니아를 침공해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그 땅의 주군인 루바트로부터 블라디므르와 루스크를 계속 다스리는 대가로 모든 적에 맞서 자신을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368년, 리투아니아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조프셰를 침공해 프워츠크, 체르빈스크, 비쇼그로드, 풀투스크를 파괴했지만, 폴란드 본토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1370년, 튜튼 기사단의 거듭된 침략에 견디지 못한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는 리투아니아인, 사모기티아인, 루테니아인, 그리고 타타르인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프로이센으로 쳐들어가서 쾨니히스베르크 북쪽의 루다우 일대를 파괴했다. 그러나 이어진 루다우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패배해 막대한 전력을 상실했다. 1376년 11월 카지미에시 3세 사후 폴란드 왕국이 내란에 휘말린 틈을 타 일전에 카지미에시 3세가 빼앗아갔던 루테니아를 탈환한 뒤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 인근까지 진격했지만, 헝가리 겸 폴란드 국왕 러요시 1세의 반격으로 밀려났다. 설상가상으로, 튜튼 기사단이 헝가리의 리투아니아 공세에 가담해 1377년 2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포위했다. 알기르다스는 이를 가까스로 격퇴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병에 걸려 1377년 5월 24일 빌뉴스에서 사망했다. 당시 알기르다스의 다른 아들들은 다른 곳에서 영지를 경영하고 있었고 오직 요가일라만 빌뉴스에 남아있었기에, 그가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지명되었다.

2.2. 리투아니아 대공: 1차 재위

아버지 알기르다스 사후 리투아니아 대공이 된 요가일라는 숙부인 켕스투티스의 용인을 받으면서 입지가 안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1377년 여름, 헝가리 겸 폴란드 국왕 러요시 1세가 이끄는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이 루테니아로 쳐들어가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하고 헤움과 벨츠를 공략했다. 이후 옛 루테니아 왕국 대부분 지역을 헝가리 왕국에 합병시켰다. 결국 라트노 공작 페도르, 포돌레 공작 알렉산더르와 보리스 등 리투아니아 공작들은 러요시의 패권을 인정했다. 튜튼 기사단도 리투아니아에 습격대를 보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설상가상으로, 1377년 겨울에 알기르다스의 장남이자 프스코프와 폴로츠크 공작 안드레이가 빌뉴스를 기습 공격했다. 요가일라는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망명한 뒤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로부터 병력을 빌린 뒤 안드레이를 몰아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프스코프로 이동한 뒤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요가일라는 그런 그를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그후 요가일라는 형제 스키르가일라를 측근으로 삼은 뒤 그의 조언에 따라 서방 기독교 국가들과의 전쟁을 종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379년 헝가리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으며, 1380년 5월 튜튼 기사단과 도비디슈케스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기사단이 켕스투티스를 공격할 경우 요가일라는 숙부를 돕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점점 강성해지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경계해 킵차크 칸국의 마마이 칸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마마이 칸은 1380년 9월 8일 쿨리코웨 장대 전투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참패한 뒤 몰락했고, 요가일라는 이로 인해 동맹 세력을 잃었다.

한편, 켕스투티스는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을 힘겹게 치르는 동안 요가일라가 자신을 돕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여러 번 항의했다. 이에 요가일라는 켕스투티스가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면서, 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군대를 대신 이끌게 하라고 요구했다. 얼마 후 도비디슈케스 조약의 내용이 누설되었고, 켕스투티스는 극도로 분노해 조카를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1381년 요가일라에 의해 빌뉴스의 대리통치자로 선임된 스키르가일라가 폴라츠크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출진했다. 켕스투티스는 이 때를 틈타 군대를 이끌고 빌뉴스에 입성한 뒤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등극했다. 요가일라는 곧 체포되었고, 크레바와 비테브스크에 잇따라 연금되었다가 자유를 대가로 모든 직위를 포기해야 했다.

2.3. 리투아니아 대공: 2차 재위

모든 직위를 잃고 풀려난 요가일라는 곧 반격을 준비했다. 당시 켕스투티스가 오랜 적인 튜튼 기사단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키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세를 부과하자, 리투아니아 주민, 특히 상인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요가일라가 대공에 복위하기를 희망했다. 요가일라는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두 형제 스키르가일라, 카리부타스와 동맹을 맺고 반격을 준비했다. 1382년 튜튼 기사단장 윈리히 폰 크니포르데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켕스투티스는 이 때를 틈타 튜튼 기사단의 본거지인 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그바르데이스크에 이르렀다. 이에 튜튼 기사단은 요가일라에게 사절을 보내 사모기티아의 영토를 양보해주면 그가 집권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고, 요가일라는 이에 힘입어 트라카이를 공략한 뒤 리투아니아 심장부를 향해 진격했다. 빌뉴스 주민들은 리가의 상인 하눌의 선동을 받고 요가일라의 군대가 빌뉴스에 은밀하게 진입하는 것을 받아들었다.

나중에 빌뉴스가 요가일라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켕스투티스는 회군했지만, 대규모 내전을 피하고 싶었기에 아들 비타우타스와 함께 요가일라와 만나서 협상했다. 그러나 협상 도중에 요가일라의 명령을 받은 전사들에 의해 생포되었고, 그 후 크레바 성내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요가일라가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복위했고, 켕스투티스는 1382년 8월 15일에 사망했다. 그가 자연사했다는 기록과 자살했다는 기록, 요가일라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제기되었지만 이 중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분명하지 않다. 비타우타스는 얼마 후 감옥에서 탈출한 뒤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폰 발렌로드에게 의탁했고, 콘라트는 이를 빌미삼아 요가일라와 맺었던 합의를 파기하고 리투아니아에 대한 습격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상황은 요가일라에게 유리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우선 헝가리와 폴란드 국왕이었던 러요시 1세가 1382년 9월 10일에 사망했고,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은 킵차크 칸국의 새 칸 토크타미쉬 칸의 기습 공격으로 모스크바가 함락된 뒤 킵차크 칸국의 봉신으로 돌아갔다. 두 강적이 저절로 사라지자, 요가일라는 튜튼 기사단과 평화 협약을 맺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1382년 11월 1일 기사단이 프로이센리보니아를 연결하는데 필요한 사모기티아 영토를 가지도록 허용하며, 4년 이내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가로 휴전을 맺는다는 내용의 두비샤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은 휴전 협정을 맺어놓고도 꾸준히 습격대를 보내 리투아니아인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기는 짓을 반복했고, 요가일라는 이들을 막는 데 전념하기 위해 1383년 드미트리 돈스코이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83년 7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튜튼 기사단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그해 9월 초, 튜튼 기사단과 비타우타스는 트라카이를 잠시 장악하고 빌뉴스를 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1383년 10월 21일, 비타우타스는 타파아와(현재 그바르데이스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은 뒤 위간다(Wiganda)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후 네만강 어귀의 영지를 수여받았고, 그곳에서 요가일라에 의해 추방된 자신의 가족 및 추종자들과 재회했다. 1384년 1월 30일, 비타우타스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조약을 체결해 튜튼 기사단의 가신이 되었고, 네비자강 일대까지 이르는 사모기티아 일부를 튜튼 기사단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5월, 튜튼 기사단은 카우나스에 '누베 마리엔베르더(Neue Marienwerder)'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성채를 건설했다.

한편, 요가일라는 디미트리 돈스코이의 딸인 소피아와 결혼하고 정교회로 개종해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원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면서도 비타우타스에게 볼히니아와 루츠크를 줄 테니 내전을 끝내고 화해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비타우타스는 아버지 켕스투티스가 생전에 이끌었던 트라카이를 포함한 영지 전체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요가일라는 켕스투티스 사후 트라카이를 다스리던 스키르가일라를 폴로츠크로 보낸 뒤 트라카이를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때마침 튜튼 기사단의 지나친 횡포에 사모기티아인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자신에게도 온갖 간섭과 차별이 가해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비타우타스는 요가일라와 화해하고 튜튼 기사단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1384년 7월, 비타우타스는 네만 강 어귀에 세워진 2개의 튜튼 기사단 성을 기습 점령하고 파괴한 뒤 요가일라와 합류했다. 이후 두 사람은 누베 마리엔베르더 성을 6주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다.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로 돌아온 뒤 그로드노, 브레스트, 포들라시에, 볼로비스크를 수여받고 발트 신화로 복귀했다. 다만 트라카이는 스키르가일라가 종전대로 계속 맡았다. 튜튼 기사단은 비타우타스의 이같은 행위에 격분해 그를 배신자라고 규탄하고 리투아니아를 향한 대대적인 보복 공세를 준비했다.

요가일라는 튜튼 기사단을 자력으로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라고 여기고 동맹국을 물색했다. 당초에 동맹국으로 고려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토크타미쉬 칸의 침략으로 인해 피폐해져 그를 도울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폴란드 귀족들이 그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야드비가 여왕의 결혼 상대로 정해진 오스트리아 공자 빌헬름보다는 그와 결혼시키는 편이 자국에 유익하다고 여겼다. 요가일라는 이에 반색했고, 양자는 1385년 8월 14일 크레보에서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요가일라는 야드비가와 결혼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조건을 준수해야 했다.
  • 요가일라와 리투아니아인들이 모두 발트 신화 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
  •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에 병합할 것.
  • 요가일라는 야드비가와 함께 폴란드의 공동 통치자가 된다.

세 번째 조건을 제외하고 모두 리투아니아와 요가일라에게 무리한 조건이었지만, 요가일라는 폴란드에서 요구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리하여 크레보 조약이 성립된 뒤, 크라쿠프의 영주 도비에스와프 쿠르즈벤츠키는 야드비가가 있던 바벨 성으로 들어오려던 빌헬름을 문전박대했다. 1386년 1월 11일, 폴란드 귀족들은 볼로비스크에서 빌헬름과 야드비가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파기한다고 선언하고 200,000 골드 플로린을 오스트리아에 보내겠다고 밝혔다. 그 후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에게 여왕이 그의 아내가 되기로 동의했다고 알렸다. 요가일라는 즉시 크라쿠프로 가서 1386년 2월 15일에 세례성사를 받고 '브와디스와프 2세'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사흘 후인 2월 18일, 바벨 대성당에서 야드비가와 요가일라의 혼배미사가 거행되었다. 2주 뒤인 3월 4일에는 요가일라의 폴란드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요가일라는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로 등극했다.

2.4.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로 등극하고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자, 오랜 세월 이교도를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전쟁을 벌였던 튜튼 기사단은 이 소식에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이대로는 리투아니아를 공격할 명분을 잃게 되고, 장차 자신들의 입지가 위협받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폴란드 영주와 성직자들이 야드비가를 협박해 요가일라와 결혼시키게 했다고 비난했고, 요가일라는 폴란드를 가로채기 위해 기독교로 거짓 개종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황 우르바노 6세는 교황 특사 람푸냐노의 마피올루스를 크라쿠프로 파견해 요가일라와 야드비가의 결혼에 대해 조사하게 한 뒤, 마피올루스의 보고를 접수한 후 두 사람의 결혼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선포했다.

폴란드 국왕으로서 브와디스와프 2세가 수행해야 할 첫번째 과제는 러요시 1세 치세 때 헝가리에 넘어간 루테니아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1387년 봄, 폴란드 왕국은 헝가리 왕국이 내분에 휩싸인 틈을 타 루테니아를 공략했다. 이때 야드비가 본인이 원정군과 함께 가서 현지 총독들로부터 별다른 무력 충돌 없이 항복을 받아냈다고 전해진다. 1387년 3월 8일에는 리비프 시의 특권을 확인했다. 1387년 9월 26일, 몰다비아 공국의 공작 표트르 1세는 그동안 주군으로 모셨던 헝가리 왕국과의 관계를 끊고 야드비가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스몰렌스크 공작 스뱌토슬라프 4세가 리투아니아를 침공하자, 그는 스키르가일라를 파견해 이들을 물리치도록 했다. 이때 리투아니아에 들린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명령하고 빌뉴스에 주교구를 설치했다. 여기에 이교 사원과 신들의 형상을 파괴했으며, 기독교로 순순히 개종한 귀족들에게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후 스키르가일라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섭정으로서 그를 대신해 리투아니아를 이끌었다.

1388~1390년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하는 것을 격퇴한 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일시적으로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 공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스키르가일라가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신망을 점점 잃는 반면에 비타우타스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면서,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은 자신들을 위한 독자적인 정부가 세워지기를 원했고, 비타우타스가 그 정부를 이끌 수장으로 적합하다고 여겼다. 이 상황을 파악한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빌뉴스에 폴란드 수비대를 주둔시켜 억제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욱 심한 반발을 샀다.

1389년 5월, 브와디스와프 2세는 루블린에서 스키르가일라와 비타우타스를 불러들인 뒤 비타우타스에게 스키르가일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하는 공식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비타우타스는 어쩔 수 없이 서명했지만, 내심 깊은 불만을 품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석한 튜튼 기사단 측 대표단의 주장에 따르면, 비타우타스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이용해 고기, 건초 및 기타 물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보내면서, 전사들이 이를 호위하는 척하다가 빌뉴스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장악해버릴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발각되었고, 공모자들이 모조리 처형되었으며, 비타우타스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타우트빌라스 켕스투타이티스와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 형제가 영지를 박탈당했다.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고, 포로로 잡혀 있던 튜튼 기사 마르콰르 폰 잘츠바흐를 튜튼 기사단국에 돌려보내면서 협상을 시작했다. 1390년 1월 19일, 비타우타스는 지난날 튜튼 기사단과 협의했던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을 따르겠다는 내용의 리크 조약에 서명했다. 튜튼 기사단은 비타우타스가 또다시 배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타스, 타우트빌라스 켕스투타이티스, 비타우타스의 아내 오나, 딸 조피아, 여동생 림가일레, 그리고 여러 추종자들을 인질로 받아냈다. 그 해 5월, 31명의 사모기티아 귀족 대표단이 쾨니히스베르크에 도착한 뒤 비타우타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프랑스, 독일, 잉글랜드 출신의 자원병 및 용병들도 여기에 가담했는데, 1399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즉위하게 될 더비 백작 헨리, 프랑스 원수 장 르맹그레도 원정군에 가담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의 이같은 움직임을 전해듣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의 군대는 포들라시에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폴란드 수비대를 남겨둔 뒤 흐로드나를 6주간 포위 공격한 끝에 1390년 4월에 함락시켰다. 튜튼 기사단과 비타우타스의 연합군은 1390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 반격에 착수해 리투아니아의 첫번째 수도였던 케르나베 성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이 게오르겐부르크를 포위 공격하던 중 튜튼 기사단장 콘르트 쇨너 폰 로텐슈타인이 사망하면서, 연합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그들은 게오르겐부르크 공략을 포기하고 빌뉴스로 방향을 돌렸다. 1390년 9월 11일, 연합군은 빌뉴스에 도착한 뒤 5주간 포위 공격했다. 튜튼 기사단은 빌뉴스 외곽 마을 대부분을 폐허로 만들었고, 빌뉴스 외성을 허물었다.

그러나 스키르가일라가 이끄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루테니아 연합군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빌뉴스 공략에 애를 먹었다. 여기에 비타우타스의 형제 타우트빌라스가 전사했고, 화약 공급이 줄어들고 날씨가 악화되었으며, 서유럽에서 온 자원자들 대부분의 복무 기간이 만료되면서 많은 이들이 이탈하려 했다. 그리고 튜튼 기사단은 속히 프로이센으로 돌아가서 새 기사단장을 세우려 했다. 결국 연합군은 빌뉴스 공략을 포기하고 프로이센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후 양자간의 소규모 접전이 이어졌지만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392년, 브와디스와프 2세는 많은 폴란드 귀족들이 리투아니아 내전 때문에 병력을 계속 차출해야 하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는 데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황폐해지고, 리투아니아 주민들의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 심한 부담감을 느꼈다. 그는 리투아니아인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스키르가일라를 또다른 형제이며 케르나베 공작인 비긴타스로 교체하려 했지만, 비긴타스는 돌연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비긴타스는 비타우타스 또는 스키르가일라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와 화해하기로 하고, 플로츠크 주교인 마조프셰의 헨리크를 비타우타스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이에 따르면,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받든다면 리투아니아 총독으로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다.

1392년 여름,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밀 협의를 맺은 뒤 튜튼 기사단에게 인질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냈다. 이후 자신의 본부인 네만 강 섬에 있는 리터스베르더 성에 기사들을 초대했다. 별다른 의심 없이 초대에 응한 기사 대부분은 생포되었고, 비타우타스의 군대는 흐로드나 인근의 리터스베르더, 메텐부르크 및 노이가르덴 성을 파괴했다. 1392년 8월 4일,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오스트루프 협정을 체결하면서 비밀 협의를 비로소 공식화했다. 비타우타스는 자신의 영지를 되찾고 리투아니아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스키르가일라는 키예프 대공으로 부임한 뒤 1397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통치했다. 튜튼 기사단은 비타우타스에게 두 번이나 배신당한 것에 분노해 리투아니아를 반드시 무너뜨리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1395년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내 야드비가의 누이 마리어가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야드비가는 자신이 헝가리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이를 무시하고 마리어의 남편이자 룩셈부르크 가문의 일원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아들인 지기스문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받들었다. 그녀는 한동안 "헝가리의 상속자"라는 칭호를 채택했지만, 남편이 헝가리 왕위를 되찾게 해주는 데 별 관심이 없는 데다 교황청이 오스만 술탄국을 상대로 일어난 십자군에 가담한 지기스문트를 지지하자, 어쩔 수 없이 뜻을 거두었다. 1397년, 야드비가와 브와디스와프 2세는 지기스문트와 만나 협의한 끝에 지기스문트가 갈리치나 루테니아 일대를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영구적으로 양도하는 대가로 몰다비아에 대한 주권을 헝가리에게 반납했다. 이후 야드비가는 이노브로츠와프에서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폰 융잉겐과 만나서 도브진을 폴란드 왕국에 반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튜튼 기사단이 이 지역을 포기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1399년 7월 17일 야드비가가 사망했다. 이리하여 폴란드의 단독 국왕이 된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00년 7월 26일에 카지미에시 3세 시절 건설되었다가 방치되었던 크라쿠프 대학을 재건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로 명명했다. 1400년 겨울 비타우타스와 만난 뒤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 결의는 1401년 3월 11일 라돔에서 체결된 협정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의 오랜 앙금이 비로소 해소되었다. 1401년 말에는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사모기티아인들을 지원했다.

1402년 1월, 리투아니아 공자 스비트리가일라가 튜튼 기사단으로 망명한 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비타우타스를 타도하고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차지하려 했다. 1402년 3월, 스비트리가일라는 말보르크에서 자신을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언하고 튜튼 기사단이 사모기티아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프스코프에 대한 그들의 소유권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후 리투아니아 내 정교회 신자들의 지원을 받아낸 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함께 리투아니아를 침공해 빌뉴스를 위협했지만, 폴란드군의 지원을 받은 비타우타스의 반격에 직면하자 철수했다. 1402년 7월 기사단이 재차 원정을 벌였지만 비타우타스를 물리치지 못했다. 1403년 2월, 튜튼 기사단과 스비트리가일라는 공세를 재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3년 브와디스와프 2세가 교황청으로 파견한 사절단은 튜튼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공격을 금지하는 교서를 교황으로부터 받아냈다. 이로 인해 휴전이 성립되었고, 튜튼 기사단은 1404년 스비트리가일라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이후 튜튼 기사단과 브와디스와프 2세, 비타우타스간의 협상이 이어진 끝에 라치용제크(Raciążek)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브와디스와프 2세는 1년 6주 이내에 5만 헝가리 플로린을 튜튼 기사단에게 주고 도브쥔을 구입한다.
2. 브와디스와프 2세는 1년 6주 이내에 2천 4백 프라하 그로센을 지불하고 즈워토리아 성을 구매한다.
3. 비타우타스는 튜튼 기사단이 사모기티아를 소유하는 걸 확인한다.
4. 튜튼 기사단장 콘라트 폰 융잉겐은 리투아니아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한다.
5. 콘라트 폰 융잉겐은 폴란드 왕국의 왕관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들과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6. 브와디스와프 2세와 튜튼 기사단장은 카지미에시 3세와 튜튼 기사단이 서명한 1343년 칼리슈 평화 협약을 확인한다.
7. 비타우타스는 협의를 위반하면 기사단과의 전쟁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받아들이며, 폴란드 왕국은 그를 돕지 않는다.
8. 비타우타스는 자신의 대표자들과 기사단 측 사절들 사이의 협의가 있기 전에 자신의 나라에 망명해온 사모기티아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는 이 협약을 그대로 준수할 생각이 없었고, 서로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전력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1408년 사모기티아에서 또다시 튜튼 기사단의 지배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이를 지원했다. 튜튼 기사단은 1409년 봄 이를 보복하기 위해 리투아니아로 향하던 폴란드 선박들을 나포하고 곡물을 압수했다. 비타우타스는 이에 대응해 자신의 군대를 사모기티아로 보내 반군을 지원했다. 튜튼 기사단은 즉시 폴란드에 사절을 보내 항의했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했다. 이에 당시 튜튼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겐은 헝가리 국왕이자 독일왕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고 포메라니아의 여러 공작들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내며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그는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도 가담해주길 바랐지만, 이들은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의 공격을 우려했기 때문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 역시 튜튼 기사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력을 끌어모았고, 각지에서 용병들을 데려왔다. 특히 보헤미아에서 이름을 한창 날리고 있던 용병대장 얀 지슈카가 비타우타스에게 고용되었다. 1410년 전반기,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체르빈스크 근처에 건설된 다리를 건너 비스툴라 강을 건넜다. 1410년 7월 15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16,000 ~ 39,000명과 튜튼 기사단군 11,000 ~ 27,000명이 그룬발트 전투에서 격돌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이 전투에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지만 끝내 대승을 거두었고, 튜튼 기사단장 울리히 폰 융잉겐을 비롯한 수많은 튜튼 기사들이 전사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튜튼 기사단의 수도인 말보르크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양자는 1411년 2월 1일 토룬 평화 협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폴란드 왕국은 즈워토리아와 보브로니키 등 도브쥔 일대를 즉시 되찾는다.
2. 튜튼 기사단은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가 살아있는 동안 사모기티아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다.
3. 마조프셰 공국은 조크레를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돌려받는다.
4.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점령된 토룬과 헤움노를 튜튼 기사단에게 돌려준다.
5. 양측 상인들은 고대 관습에 따라 육로와 수로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6. 튜튼 기사단은 1,000만 프라하 그로센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포로들을 넘긴다.
7. 양측이 점령한 땅, 도시, 성은 이전 통치로 돌아가고, 전쟁 중 폴란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은 맹세를 준수할 의무에서 풀려난다.

이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튜튼 기사단간의 평화 협의가 이뤄졌지만, 양자간의 분쟁은 여전히 이어졌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지기스문트와 튜튼 기사단간의 동맹을 깨뜨려서 튜튼 기사단을 좀 더 옥죄기로 마음먹고, 1412년 3월 15일 루보울라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지기스문트와 브와디스와프 2세는 서로를 더 이상 적대하지 않기로 했고, 루테리아와 포돌리아는 지기스문트와 브와디스와프 2세 중 한 명이 사망할 때까지 폴란드의 일부로 인정되며, 통치자 한 명이 사망한 후 폴란드와 헝가리 영주들의 공동 위원회가 그들의 추가 운명을 결정하기로 했다. 또한 몰도바는 폴란드 왕국의 영토로 남게 되고, 폴란드는 그 대가로 지기스문트가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것을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포란드는 헝가리가 왈라키아를 다스리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1413년 10월 2일, 폴란드 왕국의 영토인 흐루비에슈프 인근 부 강 유역의 호로드워 마을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의회가 개최되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이 의회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리투아니아, 루테니아, 사모기티아 출신 귀족들의 권리를 폴란드 귀족과 동등하게 만들었고, 리투아니아와 사모기티아 및 루테니아의 귀족 가문들의 문장을 폴란드 귀족 가문과 동등한 권위로 체택했다. 그러면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폴란드 왕국의 왕관에 통합한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으며, 국장에 폴란드의 상징과 리투아니아의 상징을 동등하게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양국이 서로를 인정하고 동질 의식을 가져서 국가 통합이 이뤄지기를 희망했다.

1414년 여름,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가 튜튼 기사단국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재발했다. 튜튼 기사단은 회전을 벌이기를 거부하고 요새에 틀어박히면서 청야 전술을 사용했고, 이 바람에 프로이센 전역에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튜튼 기사단이 농성하는 여러 성들을 장기간 포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교황 특사인 로잔의 윌리엄이 외교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자고 제안했고, 양자는 이를 받아들여 그해 10월 스트라스부르에서 2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와 바타우타스는 때마침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에 그니에즈노 대주교 미코이 트라바가 이끄는 폴란드 및 사모기티아 사절단을 보내 튜튼 기사단과의 분쟁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다. 튜튼 기사단 역시 이에 맞서 사절단을 보내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 튜튼 기사단은 리투아니아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척만 했다는 구실을 들어 전쟁을 이어갔고, 리투아니아인들은 이에 맞서 콘스탄츠 공의회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의회는 논의 끝에 1417년 10월 24일 바르니아이 교구를 설정하고 리투아니아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이 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선전을 이어가고 습격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자, 브와디스와프 2세는 지기스문트와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특히 지기스문트는 1420년 1월 브로츠와프에서 튜튼 기사단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중재안을 내놓는 등 기사단을 편드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1422년 양자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폴란드군은 니에자와, 무르지노보, 올워보를 공략했으며, 리투아니아군은 주무츠를 확보했다. 이들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튜튼 기사단은 1422년 9월 27일 멜노 협약을 체결해 사모기티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완전히 포기했다. 폴란드 왕국은 이에 대한 대가로 포메라니아, 헤움노, 미하우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 무렵, 후스 전쟁을 치르고 있던 후스파로부터 보헤미아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한동안 고심한 끝에 이를 거부했지만, 리투아니아 공자 지그문트 코리부토비치를 프라하로 보내 후스파의 임시 지도자가 되게 했다. 이에 압박감을 느낀 지기스문트는 1423년 케즈마로크에서 튜튼 기사단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그 대가로 후스파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이후 친 룩셈부르크파인 즈비그뉴 올레스니키가 크라쿠프 대주교에 선임되면서, 브와디스와프 2세와 지기스문트는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했다.

1424년 10월 31일, 브와디스와프 2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 3세가 태어났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통치자가 되는 걸 보장받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폴란드 왕좌에 대한 그의 권리는 이전의 아내 야드비가와 결혼한 덕분에 주어진 것이었기에, 폴란드 귀족들은 그의 아들이 폴란드 국왕이 되는 걸 그냥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이에 브와디스와프 2세는 도시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아들의 계승을 보장받고, 귀족들에게 수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특히 1430년 에들니아에서 폴란드 귀족에게 개인적인 불가침성을 보장하는 특권을 부여했다. 1429년, 지기스문트가 루츠크 회의에 참석해 그에게 비타우타스를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인정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내심 이를 껄끄럽게 여겼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비타우타스와 이 일로 갈등이 생기길 원하지 않아 받아들였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비타우타스의 대관식을 반대했다. 그러다가 비타우타스가 1430년 10월 27일에 사망하면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되었다.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비타우타스 사후 스비트리가일라를 리투아니아의 새 대공으로 선출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루테니아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톨릭과 정교회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리투아니아인들이 폴란드 왕국 의 승인 없이는 새로운 대공을 선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1413년 호로드워 합의를 위반했다며 불만을 제기했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1430년 11월 7일에 스비트리가일라의 선출을 승인했다.

그러나 1430년 가을, 폴란드 귀족 그리츠코 케르디비치(Grytsko Kerdeevich), 테오도리크 부차츠키(Theodoric Buchatsky), 미하일 부차츠키(Michal Buchatsky) 등이 카메네츠 성을 무단으로 공략하고 리투아니아 수비대를 사로잡은 뒤 포돌리아 일대의 모든 요새를 공략하고 리투아니아 총독을 추방한 사건이 벌어졌다. 폴란드군은 여세를 이어가 볼히니아를 첨령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접한 스비트리가일라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측근들을 가택 연금했다.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9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던 과거를 상기시키며, 이제는 브와디스와프 2세 본인이 그리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포돌리아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계속 감옥에 갇혀 있게 하거나 심지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31년 8월 15일에 의회를 설립해 폴란드 귀족들이 무단으로 점령한 영토를 스비트리가일라에게 돌려주기로 결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카메네츠 성에 머물던 폴란드 귀족들에게 서신을 보내 당장 포돌리아의 모든 도시와 성을 리투아니아 총독에게 반환하라고 명령했고, 스비트리가일라는 교황 마르티노 5세로부터 당장 형제를 석방하라는 압력을 받고 석방했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2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1431년 2월 즈비그뉴 홀샨스키의 지도하에 산도미에시에 집결한 뒤 왕이 협박을 받고 그런 약속을 했으니 원천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스비트리가일라에게 브와디스와프 2세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라고 요구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이를 거부하고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비타우타스에게 수여될 예정이었던 리투아니아 왕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튜튼 기사단, 몰다비아, 킵차크 칸국 등 주변국들에게도 사절단을 보내 폴란드를 협공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1431년 6월 25일, 폴란드군이 볼히니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볼히니아, 호로드워, 볼로디미르-볼린스키 및 즈브라 일부를 점령하고 루츠크 인근에서 스비트리가일라의 군대를 격파한 뒤 스비트리가일라를 루츠크 성에 가두고 포위 공격했다. 한편, 튜튼 기사단은 일전에 합의한 대로 폴란드에 전쟁을 선포하고 침공을 개시해 드브진을 황폐화하고 니에자와를 점령한 뒤 쿠야비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1431년 9월 13일 당브키 전투에서 패배한 뒤 본국으로 퇴각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한동안 버티다가 8월 20일에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그해 9월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튜튼 기사단 사이에 합의가 스타리초르토리스크에서 이뤄지면서 2년간의 휴전 협정이 이뤄졌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스비트리가일라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을 포섭해 그에게 대항하게 만들려 했다.

1432년 4월, 스비트리가일라는 폴란드 측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인정해줄 테니, 브와디스와프 2세를 주군으로 받들어달라.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돌아가게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폴란드 귀족들은 그를 회유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음모를 밀어붙였다. 1432년 8월 31일 밤,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와 추종자들이 아시미아니에 머물고 있던 스비트리가일라 가족을 습격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그의 임신한 아내인 트베리의 안나가 구금되는 동안 폴로츠크로 탈출했다. 이후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가 리투아니아의 새 대공이 되었고, 브와디스와프 2세를 주군으로 받들 것이며 자신이 죽으면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 중 한 명이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지기만타스는 포돌리아와 볼히니아를 폴란드에 양도하겠다고 밝혔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톨릭과 정교회 귀족 모두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그후 리투아니아는 지기만타스를 지지하는 리투아니아 본토, 사모기티아, 포들라스키에, 흐로드나, 민스크 등 서부와 스비트리가일라를 지지하는 폴로츠크, 비테브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볼히니아 등 동부로 양분되었다. 스비트리가일라는 지기만타스에 대항하기 위해 킵차크 칸국의 셰이드 마흐메드 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세이드는 자국의 영역을 갉아먹던 리투아니아를 우방국으로 돌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였다.

1432년 12월 8일, 지기만타스의 군대와 스비트리가일라-세이드의 연합군이 야시미아니에서 격돌했다. 양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얀 드우고시에 다르면, 스비트리가일라의 병력 중 10,000명이 사망하고 4,000명이 생포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기만타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에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지 못했다. 1433년 7월과 8월, 스비트리가일라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리다, 크레바, 에이시슈케스를 습격하고 빌뉴스, 트라카이, 카우나스 교외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1433년 6월, 폴란드는 튜튼 기사단이 스비트리가일라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통해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스파와 동맹을 맺었다. 그후 후스파는 4개월 동안 튜튼 기사단의 영역인 노이마르크, 포메라니아, 서부 프로이센을 황폐화시켰고, 뒤이어 그단스크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이후 발트해에 도달한 뒤 병에 바닷물을 채워서 자신들의 여정이 성공했음을 자축했다. 이에 심한 압박감을 느낀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1433년 12월 15일 웽치차에서 폴란드와 기사단간의 12년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후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스비트리가일라에 대한 지원을 일체 중단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에서 이같은 혼란이 이어지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루테니아로 가던 중 메디카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감기에 걸렸고, 이후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다가 1434년 6월 1일 그로데크 야기에우워스키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6월 11일 크라쿠프로 옮겨져 성 베드로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7일 후 바벨 대성당에 이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은 그로데크 야기에우워스키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묻혔다. 사후 10살된 아들 브와디스와프 3세가 폴란드 국왕에 등극했다.

3. 가족

  • 야드비가(1373년 10월 3일에서 1374년 2월 18일 사이 ~ 1399년 7월 17일): 폴란드 여왕.
    • 엘즈비에타(1399년 6월 22일 ~ 1399년 7월 13일): 요절
  • 첼레의 안나(1386 ~ 1416): 첼레 백작 빌헬름의 딸.
    • 야드비가 야기엘론카(1408 ~ 1431):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1세의 둘째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와 약혼했지만, 브란덴부르크 측이 튜튼 기사단과의 전쟁을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 것에 브와디스와프 2세가 불만을 품은 데다, 지기스문트가 결혼 성립에 반대하는 로비 활동을 벌이면서 깨질 위기에 몰렸다. 그래도 약혼은 계속 이어졌지만 결혼식은 좀처럼 열리지 않다가 1431년 12월 8월에 돌연사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의 4번째 왕비 조피아가 아들 브와디스와프 3세의 폴란드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 필리카의 엘즈비에(1372 ~ 1420): 필리카 공작 오톤의 딸.
  • 조피아 홀샨스캬(1405 ~ 1461): 리투아니아-루테니아 공자이며 비타우타스의 오른팔이었던 이반 홀샨스키의 아들이었던 안제이 홀샨스키의 딸. 1427년 봄 셋째 아들 카지미에시 4세를 임신하던 중 불륜 혐의로 기소되었고, 일곱 명의 남자가 조피아의 연인으로 지명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조피아가 출산 후 법정에 출석해 자신이 결백하다고 맹세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가 사건을 기각시키기로 결정하면서 무마되었다.

4. 평가

그룬발트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최초로 두 국가를 동군연합으로 묶은 공을 인정받아 이따금씩 폴란드 황금기의 시작을 연 왕이라고 여겨진다.

이후 야기에우워 왕조1572년까지 이 두 지역을 통치했으며 중세 후기와 근대 초기 중유럽과 동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왕조 중 하나였다. 브와디스와프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를 합치면 기독교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큰 왕국이었을 정도였으며, 이 두 나라는 16세기 말 루블린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거듭나면서 국력이 더욱 건실해졌다.

5. 여담

  • 폴란드의 100즈워티 지폐에 그의 모습이 들어가 있다.
    파일:attachment/즈워티/zlo44.jpg
  •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4에서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 휘하 무장으로 등장한다. 정치/전투/지모 순으로 77/83/80인 만능형. 내정이나 전투 양면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역사대로 상당히 장수하므로 폴란드 플레이시 사위로 삼아서 후계자로 삼기 딱 좋다.

6. 관련 문서



[1] 폴란드 국왕 즉위 전 리투아니아어 이름.[2] 폴란드 국왕 즉위 후 폴란드어 이름.[3] 숙부 켕스투티스에 의해 추방.[4] 실질적으로는 1392년부터 1430년까지 사촌 비타우타스가 통치.[5] 1386년부터 1399년까지는 야드비가와 공동통치.[6] 안나 출생. 생몰년도 1408~1431.[7] 조피아 출생. 출생 후 1년이 안 되어 사망.[8] 알기르다스와 울리아나 출생.[9] 알기르다스와 마리아 출생.[10] 야드비가가 죽었기에 배경까지 우중충한 톤으로 변한다.[11] 야드비가 6장과 얀 지슈카 2장이 그룬발트 전투라는 공통된 사건을 다루기 때문이다.[12] 이 때문에 군주들의 여명 캠페인을 플레이 한다면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야드비가→얀 지슈카 순서로 플레이 하는 것이 전체적인 흐름 이해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