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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1. 개요2. 역사
2.1. 국민정부와 독일의 밀월2.2. 막스 바우어 재임 시절(1928~1929)2.3. 게오르크 베첼 재임 시절(1930~1934)2.4. 한스 폰 젝트 재임 시절(1934~1935)2.5.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재임 시절(1935~1938)
3. 역대 단장4. 참고문헌

1. 개요

1928년부터 1938년까지 10년간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주재하며 국민혁명군의 훈련, 개혁을 맡았던 독일 국방군의 군사고문단을 일컫는다. 중국군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켜 중화민국의 국방력 증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중일전쟁 때 중국군이 8년에 걸쳐 항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2. 역사

2.1. 국민정부와 독일의 밀월

일찍이 중국국민당쑨원호법운동을 전개하던 시절부터 바이마르 공화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독일의 지원을 요청한 바가 있었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광저우 국민정부 대리주석 장런제는 독일 전문가를 초빙하여 대형 병공창을 설치하기 위해 중산대학 부교장이자 베를린 대학교 유학생 출신인 주자화(朱家驊)를 시켜 독일 군사고문을 초빙하도록 하였다.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국민혁명군은 전적으로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공결렬이 일어나고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난징 국민정부가 광저우 폭동을 이유로 소련과 외교관계를 단절함에 따라 더 이상 소련의 원조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겹치면서 국민정부는 더더욱 독일 군사고문단 초빙에 매달리게 되어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을 군사고문으로 초빙하였다. 하지만 루덴도르프는 난색을 표하며 대신에 오스트리아, 소련, 스페인, 아르헨티나에서 군사고문을 역임한 바가 있는 자신의 작전참모 출신 막스 바우어 대령을 추천해주었다. 막스 바우어도 중국행을 수락함에 따라 1928년 11월, 막스 바우어가 독일 군사고문단을 이끌고 부임하면서 주중 독일군사고문단이 창설되었다.

2.2. 막스 바우어 재임 시절(1928~1929)

파일:막스바우어.jpg
1대 군사고문단장 막스 바우어 대령

상술한 바와 같이 막스 바우어는 여러 나라에서 군사고문으로 일한 바가 있었으며 포병, 공병, 화학 전문가로 중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중국에 도착하기 전인 1927년 8월, 막스 바우어는 중국 육군 정리 계획서를 작성하였다. 1927년 12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장제스를 만난 바우어는 기관총, 평사포 등의 신식 무기를 소개한 다음에 항공기의 발전상황에 대해 설명하며 중국도 공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장제스는 바우어의 여러 건의를 수용하였고 바우어는 11월, 10명의 군사고문들을 데리고 정식으로 군사고문단을 조직하였다. 6명은 장비와 군사 전문가였으며 4명은 정치 직무를 맡았고 행정과 재정사무를 맡기 위한 일부 부사관들이 있었다.

막스 바우어는 군사정보시스템과 조직화된 군사훈련 시스템의 창설을 중요시하고 있었는데 마침 장제스는 난징에 중앙정치군사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바우어는 독일의 군사교육 시스템을 중국에 적용시킬 것을 건의하였고 완전히 정치로부터 분리된 군사교육을 중국에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이를 대단히 환영하며 독일의 선진적인 군사교육 시스템을 벤치마킹하여 대대적으로 군사교육 시스템을 개혁하였다.

1929년 반장전쟁이 터지자 막스 바우어는 고문단을 이끌고 참전, 1차 장계전쟁에서 계계군벌을 토벌하는 데 참여했으나 1929년 4월 한커우를 점령한 이후 갑작스럽게 천연두에 걸려 상하이로 후송되었으나 곧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서 나치당원 헤르만 크리벨 예비역 중령이 대행으로 부임하였다가 1930년 4월 게오르크 베첼 장군이 정식 단장으로 부임하였다.

2.3. 게오르크 베첼 재임 시절(1930~1934)

파일:게오르크베첼.jpg
2대 군사고문단장 게오르크 베첼 중장

1930년 4월, 중원대전이 한창이던 중에 중국에 부임한 베첼은 장제스에게 내전 승리를 위한 군사적 조언을 함과 동시에 시범적으로 5~6개의 엘리트 사단을 편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장제스는 이를 수용하여 1933년 최정예 사단인 87사단, 88사단, 36사단을 창설하였다. 베첼은 또한 포병부대 강화를 건의하였고 이에 장제스는 1932년 스웨덴제 고사포 48문을 수입하여 1개 포병여단을 창설하였다. 하르트만 소령과 보겔 중위를 추가로 초빙하여 신설 포병여단 산하의 2개 단을 각각 지휘하도록 하였다.

베첼은 중국군을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병과의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고 조언하였고 장제스는 이를 수용하여 각 병과학교를 설립, 독일군사교관들을 초빙하여 알보병이나 기껏해야 포병이나 조금 있던 중국군에게 의무대, 수송대, 치중대 등 다양한 병과들을 확충하였다. 베첼은 바우어와 마찬가지로 공군의 창설과 확충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일본 유학 경험이 있던 국민혁명군 고위 장교들이 베첼의 계획에 반발하기 시작하면서 베첼의 계획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러한 문제는 3대 군사고문단장인 한스 폰 젝트 장군이 부임하면서 해결되었다.

1934년 1월 24일 공업산품상무사(工業産品商貿公司)가 설립되었으며 1933년 시점에서 군사고문단은 100여명까지 증가하였다. 이후 쑹쯔원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는데, 독일 군사고문단이 자신이 아니라 쑹쯔원에게 충성하는 사태를 염려한 장제스에게 결국 해임되었다.

2.4. 한스 폰 젝트 재임 시절(1934~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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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군사고문단장 한스 폰 젝트 상급대장

제5차 초공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3년 봄, 장제스는 독일군의 최고 실력자였던 한스 폰 젝트 장군을 중국으로 초청하였다. 1933년 5월 22일 중국에 도착한 젝트는 중국군을 시찰하고 6월에 중국을 떠나면서 장제스에게 비망록을 작성하여 중국군 개혁에 대한 조언을 하였다. 이 비망록은 중국군은 60개 사단의 현대군을 목표로 하여 점진적으로 현대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진을 양성해야 하며 자체적인 무기 산업을 발전시켜야 하며 중국에 풍부한 텅스텐과 독일의 공장과 군사장비를 교환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교들이 장제스에게 충성해야 하고 어떤 장군들도 독립적 직책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며 장제스가 완전히 군대를 통제해야 한다고 파악했다. 장제스는 젝트의 조언을 크게 흡족해했다.

젝트 장군은 1934년 정식 군사고문단장으로 중국에 부임하였다. 젝트는 중국 도착 이전에 부하들을 시켜 <교도사 건의서>를 작성하여 중국군 개혁을 준비하였다. 중국에 도착한 직후 젝트는 장제스에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군 재건 경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1개 교도사단을 창설하여 각 사의 훈련을 담당케 하면 장차 전국의 군대를 개혁하여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젝트를 군사위원회 위원장 대리에 임명하면서 큰 권력을 실어주었다.

젝트는 장제스의 신임 아래에 정력적으로 중국군의 개혁에 착수하였고 중국의 내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으나 제5차 초공작전에도 참여하여 장제스에게 큰 군사적 도움을 주었다. 젝트는 1935년 건강악화로 군사고문단장직에서 사직하였다.[1]

2.5.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재임 시절(1935~1938)

4대 군사고문단장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대장

젝트가 사임한 이후 팔켄하우젠 대장이 새로운 군사고문단장으로 취임했다. 팔켄하우젠은 의화단 운동 진압을 위해 중국에 온 적이 있으며 베를린 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1912년 주일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부임한 경력이 있는 등 독일 국방군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일본통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러시아,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에서 집단군을 지휘해본 경험이 있는 등 일본의 침략 위협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중국에 꼭 필요한 인재였다.

팔켄하우젠은 부임 직후인 8월 20일 <현 시국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이란 극비 문서를 제출하였다. 이 문서는 일본의 화북분리공작에 대응하기 위한 국민정부의 군사계획으로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국민정부가 장기적인 항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 <현 시국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에서 팔켄하우젠은 중국에 가장 위협적인 적은 일본이므로 당연히 대응방침을 정해야 하나 중국군이 현대전을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을 통렬히 지적하고 지구전을 이용해서 일본군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다. 국민정부는 팔켄하우젠의 조언에 기초하여 1936년 <민국 25년도 국방계획 초안>을 작성하였고 이것을 발전시켜 1937년 <민국 26년도 작전계획>을 작성하였다.

팔켄하우젠은 또한 중국군의 확충과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육군의 강화, 공군의 확충, 병력이동을 위한 수송로의 건설과 장강 연안에 철도 건설, 산과 계곡에 보급로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주중 독일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에게 독일의 자재와 차관을 국민정부에 제공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팔켄하우젠의 요청에 따라 독일의 삼림 전문가들이 중국에 파견되어 철도와 도로 건설을 감독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와 난징의 요새화에 박차를 가해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팔켄하우젠은 직접 우쑹 전투 등을 참관하여 제2차 상하이 사변을 지휘했고 중국군의 전투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일본군이 항저우에 상륙하면서 상하이의 중국군은 붕괴되었다. 이에 팔켄하우젠도 난징으로 철수했으며 일본군이 난징으로 접근하자 다시 우한으로 철수하여 중국군의 항전을 원조하였으나 독일이 중국과 사실상 단교하고 일본을 원조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938년 철수가 결정되었다. 팔켄하우젠은 철수를 거부하였으나 불이익을 주겠다는 나치당의 위협에 굴복하고 장제스의 송별을 받은 후에 중국을 떠났다. 이로써 독일 군사고문단은 해체되었다.

3. 역대 단장

대수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계급 비고
1대 막스 바우어 1928년 11월 1929년 4월 대령 1차 장계전쟁 중 천연두로 사망
대행 헤르만 크리벨 1929년 4월 1930년 4월 중령 게오르크 베첼 부임 이전까지 대행
2대 게오르크 베첼 1930년 4월 1934년 5월 중장
3대 한스 폰 젝트 1934년 5월 1935년 3월 상급대장 병환으로 사직
4대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1935년 3월 1938년 7월 대장 중일전쟁 발발로 철수

4.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 정두음, 도서출판선인.
  • 中日戰爭時期(1937-1945) 國民政府軍의 對日軍事戰略 變化 硏究, 기세찬 박사학위 논문.


[1] 젝트는 독일로 돌아간 직후인 1936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