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7 04:27:04

잭 케루악

파일:LIFE_LOGO.pn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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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라이트 형제뿐이다.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조지 발란신
<안무가>
존 바딘
<물리학자>
어빙 벌린
<작곡가>
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말론 브란도
<배우>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데일 카네기
<작가>
월리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존 듀이
<철학자>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W. E. B. 듀보이스
<NAACP 설립자>
앨런 덜레스
<CIA 국장>
밥 딜런
<포크 뮤지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헨리 포드
<기업가>
존 포드
<영화감독>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
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조이스 홀
<사업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존 에드거 후버
<FBI 초대 국장>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잭 케루악
<시인, 작가>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마틴 루터 킹
<목사, 인권 운동가>
알프레드 킨제이
<성과학자, 생물학자>
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레이 크록
<맥도날드 창업자>
에드윈 랜드
<과학자, 발명가>
윌리엄 레빗
<부동산 개발업자>
존 L. 루이스
<노동당 지도자>
찰스 린드버그
<비행기 조종사>
레이먼드 로이
<산업 디자이너>
헨리 루스
<편집자>
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정치인>
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로버트 모세
<공무원>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잭슨 폴록
<화가>
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리처드 로저스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윌 로저스
<배우, 작가>
엘리너 루스벨트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조너스 소크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빌 윌슨
<AA 창립자>
앤디 워홀
<화가>
얼 워런
<대법원장>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월터 윈첼
<신문기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출처 }}}}}}}}}

<colbgcolor=#000><colcolor=#fff> 잭 케루악
Jack Kerouac
파일:Kerouac_by_Palumbo_2.png
본명 진 루이스 케루악
Jean-Louis Kerouac[1]
출생 1922년 3월 12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웰
사망 1969년 10월 21일 (향년 47세)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즈버그
직업 작가
분야 , 소설
활동 1942년 – 1969년
학력 컬럼비아 대학교
배우자 이디 파커 (1944년 – 1948년, 이혼)
조안 하버티 (1950년 – 1951년, 이혼)
스텔라 샘파스 (1966년 결혼)
자녀 잔 케루악 (1952–1996)
종교 가톨릭[2][3]
서명 파일:Jack_Kerouac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
2.1.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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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작가이자 시인. 앨런 긴즈버그, 윌리엄 S. 버로우즈와 함께 비트 세대의 선구자로 꼽히며 동시에 히피 문화의 창시자라고도 알려져 있다. 대표작은 1957년에 발표한 소설 '길 위에서(On the Road)'로, 이 소설은 앨런 긴즈버그의 산문시 '울부짖음(Howl)'과 윌리엄 S. 버로우즈의 소설 네이키드 런치 등과 함께 1950년대 비트닉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불린다.

2. 생애

1922년 매사추세츠주프랑스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족의 영향으로 유년기에는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했으며 제대로 영어를 배운 것은 중학생 시절이 되어서였다. 학창 시절엔 특히 스포츠에서 두각을 드러냈으며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해 컬럼비아 대학교에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했으나 코치진과 동료 선수들과의 불화, 부상이 겹쳐 일찍 선수 생활을 접게 되었다. 미식축구를 관둔 이후 그는 곧 대학을 중퇴했다.

중퇴 후로도 제대로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했으며, 한편으로는 점차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케루악은 선원, 역무원, 산림감시원 등 각종 직업을 전전하며 미국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에 입대했으나,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마 안가 조현성 성격장애 판정을 받아 의병 제대했다.[4] 이후 문학계에 본격적으로 투신해 앨런 긴즈버그, 윌리엄 S. 버로우즈, 닐 캐시디 등의 비트닉 작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 동료 문인 루시엔 카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50년 첫 작품 '마을과 도시(The Town and the City)'를 출판해 문학계에 등단했으며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판매고는 좋지 않았다. 그 후로도 꾸준히 글을 써왔으며 1951년 자신의 미국 서부와 멕시코 방랑기를 모티브로 한 자전적 소설 '길 위에서(On the Road)'를 탈고했으나, 지나치게 실험적이고[5]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부당해 완성 뒤 6년이 지난 1957년에야 간신히 출판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발표 이후 그 파격적인 내용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당대 청년층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비트 세대를 주류 문학계에 등장시켰다. '길 위에서'의 큰 성공으로 잭 케루악은 유명인사가 되었고 비트닉 청년들 사이에서는 "비트 세대의 왕(The King of the Beat Generation)"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러나 케루악은 이러한 유명세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6].

그 뒤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벌였으며 1958년에는 불교와 관련된 '달마 행려(The Dharma Bums)'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후대의 히피 문화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 때문에 케루악은 히피 문화의 창시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성공적인 행보로 케루악은 당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으나, 이를 부담스러워한 그는 1961년부터는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캘리포니아, 뉴욕, 플로리다 등 여러 곳으로 이주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

잭 케루악은 정규 문학 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많은 명작을 써내며 후대 미국 문학에 크게 기여했다. 첫작품 '마을과 도시'에서 보이는 그의 초기 문체는 토마스 울프[7]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고유의 실험적인 문체를 갖게 되었다.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러한 독특한 스타일은 닐 캐시디를 비롯한 동료 비트 작가들과의 교류와 반야심경금강경 등의 불교 경전,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여담으로 많은 문인들이 그랬듯 그 역시 상당한 기행인이었으며[8], 평생 각종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9]. '길 위에서'를 집필할 당시엔 1951년 04월 9일부터 27일까지 18일 집에 칩거하면서 카페인을 비롯한 각성제를 다량 복용한 뒤 단번에 써내렸다고 한다. 원고 자체도 특이했던 것이 텔레타이프(teletype, 전신타자기) 용지를 이어붙인 120피트(약 36미터)짜리 기다란 종이 롤을 타자기에 끼워[10] 휴식이나 수정도 없이 미친 듯이 써내려간 작품이다.[11]

또한 대부분의 작품을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썼으며, 등장인물 역시 자신과 주변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 '길 위에서'의 등장인물인 샐 페러다이스와 딘 모리어티는 각각 잭 케루악과 닐 캐시디[12] 그 자체이다. '달마 행려'의 경우 초고에선 주인공의 이름이 아예 '잭 케루악'이었고 다른 등장 인물들도 자신의 지인들이나 당대 유명 인사의 실명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이대로 냈다간 바로 고소당할 것이다"라는 편집자의 만류를 듣고 내용을 고쳤다.

고양이 애호가였다. 어머니와 함께 기른 '타이크'라는 이름의 중대형 칼리코 무늬 페르시아 고양이를 매우 사랑하고 아꼈다. 여행 중 어머니로부터 타이크의 죽음을 편지로 전해 듣자, 이 고양이의 죽음은 동생이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일기를 썼다.

2.1. 사망

1969년 10월 21일 사망하였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 사망 며칠 전부터 복통을 자주 호소했고, 10월 20일 아침 집필 작업 도중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가 격렬하게 토혈하기 시작했으며 곧 의식을 잃었다. 케루악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긴급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결국 다음날 아침 향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간경변으로 인한 복부 출혈과 탈장으로, 잭 케루악은 평소에 알코올 중독에 가까운 애주가였었고 실제로 급격한 복부 출혈의 원인 역시 과음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1] 본인은 Jean-Louis Lebris de Kerouac 이라고 불렀다.[2] David A. King, “Discovering the Catholic in Jack Kerouac, author of the Beat GenerationThe Georgia Bulletin, 2014년 1월 23일.[3] 다만 케루악은 불교에도 관심이 있었다. (Simpson, Emily Patricia, “Religious Turmoil: The Conflict Between Buddhism and Catholicism in Jack Kerouac's Life and Writing,” NC State University, 2002년 12월 31일.)[4] 조현성 성격장애 환자의 경우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대한 거부가 주 증상이기에 미식축구 팀이나 군대 같은 단체생활이 중시되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생애 말년의 은둔 생활 역시 이를 이유로 한 것으로 보인다.[5] 후술하겠지만 장대한 양의 소설을 무려 36미터에 달하는 종이 롤에 그대로 적어 내려갔는데 단락도 여백도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 가독성부터가 극도로 떨어지고, 내용 자체도 생각을 그대로 가감 없이 적어 내려가다 보니(케루악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spontaneous prose' 즉 '연속산문')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선 이해조차 잘 가지 않았을 것이다.[6] '길 위에서'가 대히트한 후 그는 인세가 입금되어 생계가 해결되고 어디서든 여행자 수표에 잔액이 있는 여유로움, 출금해 친구들에게 즉흥 피자와 위스키 파티를 열어주는 행복도 경험했지만, 반대로 어머니와 거주하는 집에 온갖 소음과 무단 출입으로 고통을 주는 자칭 비트닉 애호가들에게 질릴 대로 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빅 서(Big Sur)'의 출간을 앞두고 당시의 괴로운 심정을 "술 취한 손님들이 서재에 토하고 책이며 연필까지 훔쳤고, 초대받지 않은 지인들은 며칠씩 뭉개면서 깨끗한 잠자리며 어머니가 만들어 준 맛있는 음식들을 즐겼다. 나는 사실상 늘 술에 취해 즐거운 척하면서 이 일들을 견뎌 봤으나, 결국 깨달은 것은 부지기수의 적에 포위돼 있다는, 고독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죽을 거라는 사실이었다"라고 토로했다. 그리고 혜능 스님의 가르침대로 명상과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정신적 안정을 꾀하기도 했으나, 결국 술을 끊지는 못하고 요절한다.[7] 미국의 작가. 1929년작 소설 '천사여, 고향을 보라(Look Homeward, Angel)'가 유명하다, 1900–1938.[8] 샤워도 안 하고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며칠간 먹을 햄치즈 샌드위치 도시락을 만들어 횡단 버스를 타고 예사로 여행하는 인물이었지만 의외로 한 부분만은 깨끗하게 유지했다고. 그는 "웃기는 미국인들은 살균이니 뭐니 난리를 치면서도 정작 볼일을 보고는 물로 씻지도 않는다니까?"로 입을 모은 데이브 웨인, 조지 바소에게 동조하며, 비트닉들이 일반인들보다 불결하다는 편견과 맞서 싸운 인물이다. 여담이지만 그는 미국인들의 절반이 더러운 'Asshole'로 돌아다닌다는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오히려 비트닉들은 대야에 물을 받아 비누를 들고 들어가 볼일을 본 후 앞뒤로 뒷물을 하고 다니는데 노숙하며 더럽게 감염을 시킨다는 누명을 쓴다는 식으로 억울해하기도 했다. 한 번은 "미국인들은 아침에 샤워하고 정성스럽게 세탁한 옷을 입고 향수 냄새를 풍기며 통근 열차에 오르지만 뭔가 찝찝할 텐데 그게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라는 말로 미국인들을 돌려까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빅 서'에서는 웨인, 바소와 함께 이 개혁운동을 주도하며 주변 화장실에 대야와 비누를 놓고, 급기야는 이러한 세정 방법을 주변 사람들에게 갖은 방법으로 전파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묵었던 집 화장실에도 비누 케이스를 놓아두고 온다.[9] 한 번에 알코올 도수 46%에 달하는 위스키를 1-2병 마시기 일쑤였으며, 밤새 음주를 하고 아침에 해장한 뒤 저녁에 또다시 마시는 생활에 질려 주변을 정리하고 떠나기도 했지만, 결국 원래대로 중독의 길을 걸었다. 그가 시달리던 만성적인 불면을 알코올로 해결하다 보면, 처음에는 괜찮았으나 5일 째 되는 밤에는 섬망과 식은땀으로 젖는 악몽의 지옥이 찾아왔다고 한다. 술을 고주망태로 마셔도 아침 식사를 하면 해장이 되는 축복 받은 위장 상태 덕분에 술을 계속 마실 수는 있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 밤과 술이 깰 무렵인 새벽이면 크나큰 고통을 겪는다고 토로했다.[10] 왜 하필 텔레타이프 용지였냐 하니 기존의 다른 타자기 용지를 가지고 시도했더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11] '길 위에서'의 번역본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기준으로 총 600페이지를 초과한다. (두 권으로 분할해 판매) 이런 장편을 3주 만에 그것도 단 한 번에 써낸 것이다. 때문에 길 위에서 원고는 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으며, 조금 편집으로 거쳐 원고 그대로 낸 판본도 존재한다.[12] '비트족의 왕'으로 불린 케루악의 친구로 또다른 비트족의 왕이었다. '길 위에서'의 모티브가 되었던 3년간의 히치하이킹 여행 당시 케루악과 동행했다. 위의 앨런 긴즈버그는 수려한 외모와 언변으로 여성들을 히치하이킹 동행길에 자주 유혹하는 그의 행각을 일컬어 '덴버의 색마 아도니스'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