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1년부터 1519년까지 존속한 스페인의 쿠바 식민지에 대한 내용은 쿠바 총독령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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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도독부 Capitanía General de Cuba | |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 |
국기 | 국장 |
1607년 ~ 1898년 | |
위치 | 쿠바 지역 |
수도 | 아바나 |
정치체제 |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
국가원수 | 국왕, 도독 |
언어 | 스페인어 |
종교 | 가톨릭 |
성립 이전 | 쿠바 총독령 |
멸망 이후 | 미국 통치기 쿠바 (1898~1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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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07년부터 1898년까지 존속한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이다.도독부(Capitanía general)란 부왕령(Virreinato)의 하위 행정 구역으로, 스페인 본국에서 파견한 도독(Capitán General)이 통치하였다. 쿠바 도독부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 속하였다가 1821년 독자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2. 역사
쿠바 총독령이 1519년 누에바에스파냐에 편입된 이후, 쿠바 지역은 누에바에스파냐에 일부분으로 통치되었다. 쿠바의 주요 상품이었던 금이 금광의 고갈로 더 이상 채취하기 힘들게 되자, 쿠바는 스페인 본국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소외되었다. 식민지 본국의 외면으로 쿠바의 경제가 쇠퇴하게 되자, 쿠바는 이를 타파하기 위해 담배와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하였다.담배와 사탕수수 재배는 쿠바의 비옥한 토지와 알맞은 자연환경 덕분에 크게 성공하였다. 16세기 이후에는 대규모 농장주(Estancias)에 의해 사탕수수 가공공장이 세워졌다. 17세기 중반 이후 농작들이 산업화되면서 쿠바는 경제적인 부흥을 맞는다. 쿠바의 크리오요(Criollo)[1]들은 이 시기 경제적, 사회적인 권력이 증대되었다.
쿠바의 발전은 그동안 쿠바를 외면하고 있던 스페인 본국에서도 알려져 많은 관심을 받게된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서면 담배가 유럽시장에서 독점적인 상품으로 인정받게 되어 쿠바는 중개 무역기지로 요충지가 된다.
그러나 1702년 발발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스페인 제국은 많은 식민지를 잃고 크게 약화하게 된다. 하지만 식민지 본국과 달리 쿠바는 유럽 국가들의 전쟁으로 막대한 번영을 누렸다.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동안 쿠바가 프랑스 왕국과 교역을 중대하며 경제적 번영을 누리자, 전후 스페인은 쿠바산 담배에 대해 독점정책을 강제로 시행하였다.
이는 도리어 담배 밀무역을 성행시켰고, 이를 깨달은 스페인 본국은 정책을 선회하여 1740년 왕립상사를 창립, 쿠바산 설탕과 담배 등을 본국이 독점 구매하였다. 이 정책으로 쿠바의 담배농장주들은 막대한 부를 쌓아올렸다.
1756년 발발한 7년 전쟁에서 스페인은 독점적인 무역체계 조차 상실하게 된다. 게다가 7년 전쟁 중인 1762년부터 1763년 동안 영국에게 쿠바를 뺏기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쿠바에게 적용되고 있던 스페인의 독점정책이 제거되어 오히려 더욱 번영하게 되었다.
7년 전쟁 종전 이후 파리 조약(1763년) 체결로 쿠바를 돌려받은 스페인은 카를로스 3세의 개혁정책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무역정책을 점진적으로 철회하였다. 그리고 쿠바의 사탕수수 산업을 증진시키기위해 아프리카에서 많은 흑인 노예들을 쿠바에 들여왔다.[2] 1764년에는 식민지 통치 중심지를 산토도밍고에서 쿠바 내 아바나로 옮겼다.
또한 스페인 왕실은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인텐덴테(Intendente) 제도를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쿠바에 도입하였는데, 이 제도는 쿠바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어 크리오요들에게 많은 불만을 사게 된다. 노예제도로 혹사당하고 흑인 노예들도 16세기 이래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러한 쿠바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쌓이고 쌓여 결국 10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2.1. 10년 전쟁 ~ 쿠바 독립 전쟁
10년 전쟁(Guerra de los Diez Años)은 1868년부터 1878년까지 10년 동안 쿠바인들과 스페인 본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스페인 제국의 가혹한 무역관세제도, 노예 제도 등으로 쿠바인들의 불만은 지속적으로 증대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이후 기득권을 형성하게 된 크리오요들, 쿠바에 정착한 스페인 본국 출신 백인들인 페닌술라르들이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쿠바의 독립 움직임은 다른 중남미 식민지들에 비해 늦게 나타났다.
이러한 양상은 19세기 중반, 설탕산업의 기계화를 계기로 변화하게 된다. 설탕산업의 대규모화, 자본화는 크리오요들 사이에서도 양극화 현상을 일으켰고, 비대해진 설탕산업을 감당하기 위해 더많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수입하게 되었다.[3] 주력산업이 발전하게 쿠바는 자연스럽게 국제무역구조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변화로 스페인 제국은 더 이상 쿠바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경제적 영향력 상실은 정치적인 영향력 약화로도 이어졌다. 결국, 그동안 쌓인 불만과 식민지 본국의 영향력 약화로 쿠바인들은 서서히 독립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1867년 스페인 본국은 도리어 쿠바에 반동적인 정책을 시행하게 되면서 전보다 많은 세금을 증세하자, 쿠바 내 자유주의자, 개혁주의자, 독립주의자, 중소규모 농장주, 노예제 폐지론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반스페인 운동을 일으켰다.
1868년, 쿠바의 설탕 농장주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 del Castillo)를 중심으로 크리오요들이 10년 전쟁이 일으켰다. 세스페데스는 '야라의 외침(Grito de Yara)'을 발표하고 자신의 노예들을 풀어주면서 쿠바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다. 여기에 쿠바 독립운동가 안토니오 마세오(Antonio Maseo)가 합류하였다. 세스페데스는 쿠바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스페인에게 저항하였다. 200여명으로 시작된 이들은 1개월 이후 1만 명의 대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적 크리오요들을 중심으로 노동자, 농민, 그리고 해방된 유색인들이 주체가 된 이 세력은 승승장구하였다. 1869년, 임시정부는 세스페데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세스페데스 중심의 쿠바 공화국은 스페인 제국을 지지하는 쿠바 내 지주들을 의식하여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때문에 노예제 폐지론자, 노동자, 농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전쟁이 쿠바 공화국과 스페인 제국 양쪽이 비등한 상태로 10년 동안 지속되자, 쿠바의 보수적 지도층은 1878년 산혼조약(영어: Pact of Zanjón, 스페인어: Paz de Zanjón)[4]을 맺어 전쟁을 사실 상 종결시켰다.
10년 전쟁 종결 이후, 쿠바 사회는 크게 변화하였다. 1886년 산혼조약에 따라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부유했던 쿠바의 지주들은 몰락하고 중산층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쿠바의 설탕산업에 미국의 자본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쿠바는 사실 상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5]
1895년, 쿠바의 지식인이자 혁명가인 호세 마르티(José Julián Martí Pérez)를 중심으로 쿠바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는 독립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894년 쿠바 혁명당을 조직하여 전쟁에 참여하였다. 호세 마르티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페인군의 기습을 받아 안타깝게도 사망하고 만다.
그러나 쿠바 독립 전쟁은 10년 전쟁과 다르게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쿠바 독립 전쟁은 미국 내 신문들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보도되기 시작했고, 미국인들은 스페인을 쿠바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잔인한 제국주의 열강으로 여기고 분노하게 되었다. 급기아 윌리엄 매킨리는 1896년 선거에서 쿠바 독립 문제를 공약으로 꺼내들게 된다.[6]
2.2. 미국-스페인 전쟁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도 쿠바의 사태가 악화되고, 미국의 언론들은 선정적인 기사를 찾고자 쿠바 사태를 앞다투어 공개했다. 실제로 1896년 부임한 신임도독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 y Nicolau)는 '재수용 정책(Reconcentración)'[7]을 시행하여 1898년까지 약 10만 명의 쿠바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매킨리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쿠바 독립 전쟁은 더욱 거세졌고 그 반작용으로 스페인의 진압 정책도 점점 잔인해졌다. 결국 매킨리는 1897년 5월 초 특사를 보내 쿠바의 실상을 조사하게 했고 결과는 미국 언론들이 보도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쿠바는 아비규환의 상태였고, 더이상 좌우시할 수 없었던 매킨리는 국무장관 셔먼(John Sherman)에게 지시하여 스페인 대사에게 교신을 보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매킨리는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적어도 1898년 초까지 미국은 스페인과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인 자세는 1898년 2월 15일, 쿠바의 아바나 항에 정착한 미국 순양함 메인호가 폭발하여 침몰한 사건으로 급격하게 반전하게 되었다. 호전적인 미 언론들은 앞다투어 메인호 폭발 사건을 보도했고 은연 중에 스페인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8] 미국 국민들은 분노했고, 미국의 여론은 전쟁 측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메인호 폭발 사건 초기 매킨리의 대응은 매우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연일 보도되는 언론들의 자극적인 메인호 사건 보도와 그로 인해 분노하는 국민들의 압박을 매킨리는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1898년 3월 7일, 매킨리는 국가 방위를 위해 의회에 5천만 달러를 책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1898년 3월 17일, 미 상원의원 레드필드 프록터(Redfield Proctor)에 의해 식민지 쿠바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4월 22일, 매킨리는 쿠바에 대한 해군 봉쇄령을 내렸고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실감한 스페인은 이틀 뒤 공식적으로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미 의회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쿠바 전역 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 치하에 있었던 필리핀에서도 벌어졌다. 1898년 8월 12일까지 계속된 미국-스페인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전후 파리조약(1898년)이 채결되어 쿠바 도독령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독립에 성공하였으나, 미국의 영향권 하에 편입되었다. 미국은 쿠바의 독립투사들을 교전 당사자로 인정하기 거부하고, 쿠바를 점령하여 4년 동안의 군정을 실시하였다. 쿠바 외에도 스페인은 필리핀, 괌[9], 푸에르토리코를 잃었다.
3. 참고 문헌
- 김봉중 ( Bong Joong Kim ). 2002. 논문 : 서양사 ; 맥킨리, 메인호, 그리고 미서전쟁의 기원.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19(0): 753-776
- 정재호 (2004). 쿠바와 푸에르토리코의 식민지 경험과 탈식민지 독립운동에 대한 비교. 라틴아메리카연구, 17(3), 69-99.
- 아비바 촘스키, 『쿠바혁명사』, 정진상 옮김, 삼천리, 2014.
4. 관련 문서
[1] 남북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들. 크리오요들은 스페인 출신 백인인 페닌술라르(Peninsular)들로부터 식민지 관료조직에 진출하는 것을 원천봉쇄 당했다. 때문에 이들은 정치, 행정 등 여러 분야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6세기 중반이후 스페인이 재정적자를 겪으면서 매관매직을 단행하자, 이들은 관직에 진출하여 기득권을 형성하였다.[2] 이렇게 19세기까지 쿠바에 들여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는 100만 명에 이른다. 1866년까지 아프리카 노예들은 끊임없이 들어왔고, 이러한 현상은 1886년 산혼조약으로 노예제가 폐지되고 나서야 종료되었다. 오늘날 쿠바 인구의 상당 부분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 아프리카인들의 후손들이다. - 아비바 촘스키, 『쿠바혁명사』, 정진상 옮김, 삼천리, 2014, 40[3] 이 시기 노예무역을 폐지하라는 영국의 압박 때문에 크리오요들은 중국으로 눈을 돌려 19세기 중반에는 약 10만 명의 중국인들이 쿠바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노예와 별반 다르지 않는 조건에서 일했다. - 아비바 촘스키, 『쿠바혁명사』, 정진상 옮김, 삼천리, 2014, 40[4] 10년 전쟁을 종결시키는 대신, 스페인 본국이 쿠바의 독립운동가들을 사면시켜주고, 노예제도 철폐, 쿠바인의 의회 대표권 인정 등 정치개혁을 약속한 조약[5] 1880년대 이후 미국은 미국의 해외 영토와 시장 확보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870년대 남북 전쟁의 후폭풍과 그로 인해 미국 경제가 겪었던 공황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 사회는 시장 확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6] 그러나 매킨리와 공화당의 쿠바 독립 이슈는 여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고, 선거 운동 과정이나 결과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는 그 당시 미국인들은 아직까지 먼로주의에 충실했고 다른 유럽 열강들과 자신들이 다르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김봉중, 2002, 760-761[7] 시골에 거주하는 쿠바인들을 도시의 군부대 근처로 강제 이주시켜서 게릴라 전투를 벌이던 쿠바 독립운동가들을 저지하기 위한 정책.[8] 그러나 확실한 폭발 원인은 밝혀진 바 없고, 정황상 스페인이 벌인 일이라고 볼 근거도 희박하다. 당시 이미 2류 열강 정도로 국력이 쇠락한 스페인은 굳이 먼저 미국을 도발해서 미국과 정면 대결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미국-스페인 전쟁 항목의 '메인 함 사건' 문단 참고.[9] 필리핀, 괌은 스페인령 동인도에 속했다. 나머지 팔라우, 캐롤라인, 북마리아나 제도는 스페인이 독일 제국에게 25,000,000 페세타에 매각하여 독일령 뉴기니의 일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