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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나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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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뒬하미트 2세 메흐메트 5세 메흐메트 6세 압뒬메지트 2세
^^ 1 :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지만 하산도 잠깐 동안이지만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
아바스 왕조 제34대 칼리파
알 나시르
الناصر لدين الله
파일:Dinar_of_Al-Nasir_607h.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름 아부 알 아바스 아흐메드 이븐 하산 알 무스타디
أبو العباس أحمد بن الحسن المستضيء
출생 1158년 8월 6일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사망 1225년 10월 5일 (향년 67세)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재위 기간 아바스 칼리파
1180년 3월 27일 ~ 1225년 10월 5일 (45년)
전임자 알 무스타디
후임자 알 자히르
별명 알 나시르 리디닐라(الناصر لدين الله: 신의 종교의 수호자)
부모 아버지 : 알 무스타디
어머니 : 주무루드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생애
2.1. 셀주크 제국의 멸망2.2. 호라즘 왕조와의 대결
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파일:Al-_Saray_Mosque_جامع_السراي.jpg
무스탄시리야와 함께 바그다드의 몇 안되는 압바스 시대 건축물인 앗 사라이 모스크 (1193년 건립)

아바스 왕조 34대 칼리파. 아바스 왕조의 2차 중흥기를 이끌어낸 명군으로 평가받는다.안정된 이라크를 물려받은 알 나시르는 과거 강력했던 압바스 조를 복원하려 시도했다. 우선 쇠퇴해가던 셀주크 제국에서 섭정 키질 아르슬란이 술탄을 칭하도록 사주해 이란을 더욱 분열시켰고, 이후 호라즘 제국의 손을 빌려 마지막 셀주크 술탄인 토그릴 3세를 제거했다. 동시에 내전을 틈타 1189-90년에는 티크리트, 1190-91년에는 하디싸와 아나를 점령하며 쿠르드 지방을 제외한 현 이라크 일대를 확보했다. 1195년에는 후제스탄을 정복하며 930년대 이후 압바스 조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하지만 이후 호라즘 조가 이라크를 압박하자 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에게 호라즘을 공격해 달라고 청해 호라즘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45년에 이르는 긴 치세 동안 이라크와 바그다드는 9세기 이후 유례없는 평화의 시기를 보내며 번영했다.

2. 생애

1158년 8월 6일 바그다드에서 아바스 왕조 33대 칼리파 알 무스타디와 움 왈리드 가문 출신의 주무루드(에메랄드)의 아들로 출생했다. 매우 명량한 성격에 아름다운 눈과 밝은 뺨, 붉은 입술을 갖추고 피부는 하얀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키는 중간 정도였고, 웅변술이 탁월해 사람들을 쉽게 설복시켰다고 한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활동하는 학자들로부터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다. 과학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연구에 매진하기도 했고, 하디스에 관한 연구에도 심취해 여러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독자적인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1180년 3월 27일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칼리파에 오른 그는 종파간의 분쟁을 조정했다. 당시 이라크와 이란 일대에는 푸투와(futuwwa)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이들은 종교 결사의 형태로 여러 도시에 자리를 잡고 서로 연계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이들을 활용하여 아바스 왕조의 부흥을 이끌기로 마음먹었다. 1182/1183년, 바그다드의 푸투와 지도자이자 라하시야 가문의 장로인 라하시야는 그에게 "푸투와 로브"를 입혔다. 그 직후, 그는 자신을 모든 푸투와의 우두머리라고 선언했다. 이후 울라마, 군인, 고급관료 등이 푸투와에 귀속되어 친목을 두텁게 다지고 아바스 칼리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82년 11월 살라흐 앗 딘이 모술을 포위했다. 그는 살라흐 앗 딘이 이라크의 지척인 모술까지 공략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모술을 구하고자 북상했다. 이와 동시에 셀주크 제국토그릴 3세도 군대를 이끌고 모술로 남하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슬람교의 수장인 칼리파와 대적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철수했다. 1183년에서 1184년, 알 나시르는 키르쿠크 남쪽의 다쿠르를 공략했다. 1186년, 살라흐 앗 딘이 모술의 복종을 받아내면서 레반트 일대의 이슬람 지역을 통합했다. 그 후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뒤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을 공략했다. 이리하여 메카, 메디나에 이은 이슬람 제3의 성도가 한 세기 만에 아바스 칼리파의 이름 하에 수복되었다.

2.1. 셀주크 제국의 멸망

한편, 1186년 이란 동부의 케르만 부 셀주크 제국오우즈의 침공으로 붕괴되고 무함마드 이븐 바흐람샤가 도주했다. 이제 셀주크 제국의 영역은 이란 서부로 한정되었으나, 그마저도 토그릴 3세키질 아르슬란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다. 토그릴은 바반드 왕조의 후삼 앗 다울라 등 왕공들의 지원에 힘입어 맘루크와 마라가, 젠잔 에미르들의 지원을 받은 키질 아르슬란을 수도 하마단에서 몰아냈다. 키질 아르슬란은 북부 산악지대로 도주한 뒤, 11월 7일 아잠을 떠나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한 후 바그다드에 사절을 보내 셀주크 술탄의 커져가는 힘을 경고하며 칼리파에 복속하는 대가로 원군을 청했다. 아잠 일대를 장악한 토그릴 역시 사절을 보내와 자신을 술탄으로 책봉하고 자신이 거주할 바그다드의 다르 알 술탄(술탄 궁전)을 보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키질 아르슬란과 토그릴 3세 중 어느 쪽을 선택할 지를 고심한 끝에 술탄 궁전을 흔적도 없이 밀어버리며 노선을 확실히 했다. 이후 60만 디나르를 들여 군대를 대대적으로 편성해, 1188년 1만 5천 명의 기병대를 확보했다. 그해 4월, 그는 와지르 잘랄 앗 딘 우바이둘라 이븐 유누스를 사령관으로 세우고 토그릴 토벌 임무를 맡겼다. 유누스는 키질 아르슬란과의 합류도 기다리지 않은채 곧바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하마단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던 1188년 5월 5일, 토그릴의 군대와 다이마르그에서에서 마주치자 곧바로 공격했다. 그러나 족장 마흐무드 바르잠 알 이바이 휘하의 튀르크멘 병력이 술탄 진영으로 배신하는 바람에 칼리파 군은 패배했고, 유누스는 사로잡혔다.

하지만 알 나시르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이라크 전역에서 긁어모은 세금으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고 1188년 7월 재차 출진했다. 이때 토그릴 3세는 휘하의 주요 아미르들 중 아이바와 오자다 등을 처형했다. 이 행위에 부하들은 동요했고, 앞서 전향했던 쿠틀루그 이난즈가 재차 토그릴 진영을 떠나 키질 아르슬란 편에 가담했다. 키질 아르슬란은 1년만에 아잠으로 귀환하였고, 이번에는 칼리파 군대도 약속한 장소에서 합류했다. 연합군은 어렵지 않게 하마단을 점령했고, 토그릴의 5촌 당숙인 산자르 이븐 쉴레이만샤를 술탄으로 추대했다.

토그릴 3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잠을 포기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했다. 그는 튀르크멘 영주 이즈 앗 딘 하산 이븐 킵차크의 성채에 피신한 뒤 살라흐 앗 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살라흐 앗 딘은 안티오크 공국 원정 도중 군대가 지쳐 후퇴하던 터라 여유가 없어서 응하지 않았다. 알 나시르는 여세를 몰아 티크리트에 대한 지배권을 수복했다. 이렇듯 아바스 왕조가 강성해지자, 1189년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 칼리파에 대한 예배를 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그들과 친선 관계를 맺으려 했다.

토그릴 3세는 마지막 시도로 키질 아르슬란과 알 나시르에게 사절을 보냈다. 특히 알 나시르에겐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사절단을 바그다드로 파견해 자신을 대신해 사과하게 하고, 이븐 유누스에 가한 행위에 용서를 구했으며, 칼리파의 명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카질 아르슬란과 알 나시르 둘 다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결국 1190년 10월 토그릴 3세는 킵차크 성채에서 2년간 포위 공격을 견딘 끝에 키질 아르슬란에게 항복했고,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타브리즈 인근의 카흐란 성채에 구금되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키질 아르슬란은 알 나시르의 동의하에 술탄 산자르를 폐위하고 형수 이나츠 카툰과 결혼한 후 하마단에서 자신을 술탄으로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동맹이 아잠 일대를 통치하게 됨으로써 북방 전선이 안정되자, 알 나시르는 유프라텐스 중류의 하디싸와 아나를 공략하는 등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런데 1191년 8/9월, 키질 아르슬란이 암살당했다. 키질 아르슬란 사후 그의 네 조카인 아부 바크르, 오즈베그, 쿠틀루그 이난즈, 아미르 아미란이 골육상쟁을 벌였다. 내전은 1195년 누스라트 앗 딘 아부 바크르가 아제르바이잔을 석권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1192년 5월에 자한 팔라반의 맘루크 마흐무드 아나스 오글루에 의해 유배지에서 풀려난 토그릴은 아부 바크르의 추격병들을 따돌리고 재차 튀르크멘들을 포섭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이후 동쪽으로 진군하여 그해 6월 22일, 카즈빈 부근에서 쿠틀루그 이난즈와 아미르 아미란 형제를 격파한 뒤 하마단에 입성하고 술탄에 복위했다. 아잠에서 축출된 쿠틀루그와 아미란 형제는 아제르바이잔의 아부 바크르에게 도전했으나 이 역시 패배하자 각자 라이와 시르반으로 도주했다. 그 중 라이로 도주한 쿠틀루그는 호라즘 왕조의 테키쉬에게 도움을 청했다.

테키쉬는 세력을 확장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군대를 이끌고 라이로 진군했다. 그리고는 쿠틀루그를 쫓아내고 라이를 장악했다. 토그릴 3세가 호라즘 왕조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자, 테키쉬는 협상을 제안했다. 토그릴 3세 역시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호라즘 왕조와 전쟁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딸을 호라즘 왕자 유누스 칸과 약혼시켰다. 하지만 테키쉬가 동생 술탄 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잠의 세금을 거둔 후 회군하자, 토그릴은 준비한 군대를 이끌고 출진해 1193년 3월 호라즘의 라이 총독 탐가치를 죽이고 라이를 공략했다. 테키쉬는 결혼동맹을 맺기로 해놓고 뒤통수를 날린 토그릴 3세에게 분노해 복수를 꾀했다.

토그릴 3세는 테크쉬의 임박한 반격에 대비해 쿠틀루그와 화해하고 그의 모친 이나츠 카툰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나츠 카툰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 정황이 드러나자 그녀를 살해했다. 쿠틀루그는 잔잔으로 도주한 뒤 테키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 시기에 알 나시르 역시 테키쉬에게 사절을 보내 토그릴을 응징해달라고 청했다. 테키쉬는 일단 7천의 호라즘 병력을 파견해 쿠틀루그를 지원하게 했다. 1194년, 토그릴은 쿠틀루그를 공격해 단숨에 물리쳤다. 쿠틀루그는 셈닌으로 도주해 호라즘 본대와 합류했다. 한편 호라즘 측의 하집 (관료) 시하브 앗 딘 마수드가 테키쉬의 아들을 술탄 휘하의 라이 총독으로 임명한 뒤 토그릴 3세에게 휴전 협상을 제안하며 우선 사베흐로 철수하라고 권고했다.

토그릴은 아미르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는데, 화의를 수용하거나 최소한 잔잔과 이스파한의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다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전투를 결심했다. 이는 쿠틀루그 이난즈로부터 전투 때 호라즘 왕조군을 배신하고 그 편에 들겠다는 서신을 받았기 때문이다. 토그릴은 라이로 향한 뒤 전투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확신하며 궁전에서 유희를 즐겼다. 1194년 3월 19일, 테키쉬의 대군이 모습을 보이자 토그릴은 농성 대신 군대를 이끌고 회전에 나섰다. 술탄 토그릴은 별다른 작전도 없이 적진의 선발대 중앙부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를 직감한 아미르들은 요지부동이었고, 오직 60명의 근위대만이 술탄의 무모한 돌격에 함께했다. 짧은 전투 끝에 토그릴은 눈에 부상을 입고 낙마하였고, 그와 악연을 이어가던 쿠틀루그 이나즈가 나서 목숨을 애걸하는 술탄을 참수했다. 이리하여 셀주크 제국은 멸망했고, 토그릴 3세의 수급은 바그다드에 보내졌다. 알 나시르는 이를 궁전 앞의 누비 성문에 메달아 과거 셀주크 술탄들에게 핍박받았던 칼리파들의 넋을 기렸다.

2.2. 호라즘 왕조와의 대결

호라즘 왕조는 셀주크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하마단에서 메르브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알 나시르는 아바스 왕조를 오랜 세월 핍박한 셀주크 제국을 무너뜨린 테키쉬를 치하하면서 아잠 지역의 전체 혹은 일부를 환원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시당했다. 급기야 테키쉬는 칼리파의 승인 없이 기존의 호라즘샤 칭호 대신 술탄을 칭하며 위세를 드러냈다. 알 나시르는 와지르 무아야드 앗 딘 이븐 알 카사브에게 예복을 주고 군대와 함께 이란으로 파견했다. 이븐 알 카사브는 테키쉬에게 바그다드로 와서 칼리파에게 복종을 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테키쉬가 자신을 치려 들자, 카사브는 바그다드로 도주했다. 알 나시르는 바그다드로 돌아온 앗 카사브에게 와지르의 예복을 내리며 칼리파의 권위를 세워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이후 알 나사르는 알 카사브에게 군대를 주어 이븐 샤믈라가 사망한 뒤 혼란에 빠져있던 후제스탄을 공략하게 했다. 아바스군은 별 어려움 없이 후제스탄 일대를 평정했다. 이후 카사브가 아잠으로 진군하자, 토그릴 3세를 배신한 공으로 호라즘 조의 아잠 총독으로 봉해진 쿠틀루그 이난즈가 재차 배신하여 칼리파 측으로 전향했다. 미산에서 합류한 둘은 진군을 계속하여 케르만샤하마단을 점령하였고, 테키쉬의 아들과 그가 이끌던 수비대를 사로잡았다. 이란 서부를 평정한 이븐 알 카사브는 동진하여 라이를 점령했고, 비슷한 시기 이스파한 유력자들의 요청으로 알 나시르가 파견한 별동대가 일대를 장악했다. 이로써 아잠과 지발 지역은 약 2세기만에 아바스 왕조의 영토로 돌아왔다. 이렇듯 원정이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이란인들이 호라즘 세력을 이방인 혹은 야만인으로 여기고 칼리파 군에 열렬한 호응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크쉬는 자신을 셀주크 제국의 후예로 여기고 이란 전체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기에 그리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의례적으로 알 칼사브에게 철수를 요구한 후, 예상대로 거절당하자 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그런데 알 나시르에겐 불행하게도, 1196년 7월 원정군 사령관 이븐 알 카사브가 하마단에서 급사했다. 졸지에 지휘관을 잃은 칼리파 군은 마단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퇴하였고, 테키쉬는 하마단에 입성한 뒤 얼마 동안 머무른 후 본진인 호라산으로 귀환했다. 1197년 알 나시르는 재차 하마단 공략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1198년 아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테키쉬는 알 나시르에게 탄으로써 쿠트바(금요 예배문)에서 자신을 언급하라 요구하였고, 더 나아가 바그다드에 대한 세속 지배권까지 청구했다.

알 나시르는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신흥 강국인 구르 왕조의 술탄 기야스 웃딘 무함마드에게 동맹을 제시, 테키쉬의 칼리파 영토 침범을 저지하도록 했다. 기야스 웃딘 무함마드는 이를 수락하고 호라산 남부로 진격해 카라 키타이-호라즘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 일대를 평정했다. 이에 테키쉬가 협상을 청하자, 기야스 웃딘은 칼리파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다. 테키쉬는 이를 받아들이고 칼리파에게 용서를 구했다. 알 나시르는 호라즘 왕조가 충분히 약해졌고, 구르 왕조가 지나치게 크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1198년 알 나시르는 선물과 함께 이라크 아잠(이란 서부), 호라산, 투르키스탄의 술탄으로써 예복을 보냈고, 테키쉬는 바그다드에 대한 지배권이나 쿠트바 언급 요구를 철회하고 칼리파에 명목상 복속했다.

그 후 아바스 왕조와 호라즘 왕조는 평화를 유지했지만 1200년 7월 테키쉬가 사망하고 새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가 등극한 뒤 시아파 칼리파를 옹립하고 바그다드를 위협하면서 또다시 갈등이 일어났다. 그는 이에 분노했지만 무함마드가 주변 일대를 모조리 평정하는 등 왕성한 군사 활동을 벌이는 상황이었기에 함부로 적대하지 못했고, 단지 호라즘에서 바그다드를 거쳐 메카로 순례하는 이들을 박대하는 정도에 그쳤다. 1217년, 무함마드는 자카르테스 강에서 걸프 만까지 이르는 일대를 평정한 뒤 자신을 샤라고 선언하고 칼리파에게 공식적인 인정을 요구했다. 그가 거부하자, 무함마드는 군대를 모아 칼리파를 폐위시키기 위해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그러나 자그로스 산맥을 건널 때 눈보라를 만나는 바람에 수천 명의 동사자가 발생하자 어쩔 수 없이 철군했다.

1219년 아이유브 왕조의 신임 술탄 알 카밀이 이집트로 쳐들어온 5차 십자군에 맞서기 위해 칼리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알 나시르는 지하드를 선포하며 대규모의 원군을 약속했다. 하지만 얼마 후 5차 십자군이 궤멸되면서, 실제로 파견되지는 않았다.

1220년 칭기즈 칸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왕조로 쳐들어가면서 몽골-호라즘 전쟁이 발발했다. 3년 전에 자신을 폐위시키기 위해 쳐들어왔다가 눈보라에 막혀 돌아갔던 무함마드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그는 몽골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 대신 이단자를 심판해줘서 고맙다며 막대한 선물을 안겼다. 이후 호라즘 왕조는 몽골에게 정복되었고, 몽골 제국과 아바스 왕조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222년 거의 실명한 그는 아들 알 자히르에게 섭정을 맡긴 뒤 말년을 궁궐에서 조용히 보내다가 1225년 10월 5일 20일 동안 이질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사후 알 자히르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3. 대중매체에서

징기스칸 4에서 압바스 왕조의 군주로 등장하는데 한국어판에서는 이름이 알 나셀로 나온다. 십자군이 안 오니 아이유브 왕조살라딘이 싸우라는 기독교도와는 안 싸우고 바그다드로 군대를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인공지능끼리는 알 나셀이 수세에 몰리기는 하지만 의외로 잘 막아내는 편.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못한 호라즘 왕조와는 서로 가도가 안 통해서 잘 오지도 않거니와 와도 아이유브처럼 맹공을 퍼붓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