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2 21:17:10

알 무타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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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지만 하산도 잠깐 동안이지만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
아바스 왕조 제15대 칼리파
알 무타미드
المعتمد
파일:Dinar_of_al-Mu'tamid,_AH_271.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름 아부 알 아바스 아흐메드 이븐 자파르
أبو العباس أحمد بن جعفر
출생 842년
아바스 왕조 사마라
사망 892년 10월 14일 (향년 50세)
아바스 왕조 사마라
재위 기간 아바스 칼리파
870년 6월 19일 ~ 892년 10월 14일 (22년)
전임자 알 무흐타디
후임자 알 무타디드
별명 알 무타미드 알라흐(المعتمد على الله: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자)
부모 아버지 : 알 무타와킬
어머니 : 피트얀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즉위 이전3. 치세
3.1. 연이은 반란
3.1.1. vs 잔즈 반란 (1기)3.1.2. vs 사파르 왕조3.1.3. vs 잔즈 반란 (2기)
3.1.3.1. 알 무와팍크의 진압
3.1.4. 자지라 전역
3.2. 권력 다툼
3.2.1. 이집트 망명 시도3.2.2. 툴룬령 자지라
3.3. 실권 회복 시도와 죽음

[clearfix]

1. 개요

아바스 왕조의 15대 칼리파. 알 무타와킬의 막내 아들이며 사촌인 알 무흐타디가 튀르크 군인들에게 살해당한 이후 추대되었다. 형이자 섭정이던 아흐마드 알 무와파크가 튀르크 군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하며 사마라의 혼란기가 종식되었다. 또한 잔즈 반란사파르 왕조의 침공이 진압되는 등 압바스 조는 중흥기라 평가될만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치세 대부분의 기간 동안 무타미드는 형 무와파크의 꼭두각시였으며 882년에 툴룬 왕조로 망명하려다 실패한 후에는 가택연금되어 정치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다. 891년에 무와파크가 사망하자 무타미드는 실권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조카이자 무와파크의 아들인 알 무타디드에게 패한 후 이듬해 사망하였다.

2. 즉위 이전

파일:1280px-Abbasids_Ninth_Century_svg.png
9세기 후반 칼리파 가계도 (알 무타심 ~ 알 무타미드)

아흐마드는 칼리파 알 무타와킬과 쿠파 출신의 하렘 여성인 피트얀 사이에 태어났다.[1] 그는 무타와킬의 다섯 아들 중 막내였고 두 형 (문타시르, 무타즈)과 두 사촌 (무스타인, 무흐타디)가 칼리파를 지내는 동안 별 존재감 없이 지냈다. 그동안 권력 다툼 속에서 둘째 형 무타즈에 의해 셋째 형 무아야드가 살해되고 넷째 형 탈하 (무와파크)가 감금되는 혼란 속에서도 그는 별 간섭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치세

파일:무타미드 금화 이라크.jpg
알 무타미드의 디나르 금화

870년 6월, 사마라의 혼란기가 막판으로 치닫던 때에 튀르크 군대에 의해 그의 사촌인 칼리파 알 무흐타디가 폐위되었다. 무신들은 새 칼리파로 생존하는 무타와킬의 두 아들 중에 고민하였는데, 군대와 밀접한 탈하 (무와파크) 대신 유약한 막내 아흐마드를 알 무타미드로 추대하였다. (6월 19일) 이틀 후 무흐타디는 살해되었고 23일에 실권자인 무사 이븐 부가가 사마라에 입성하여 무타미드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다. 25일에 무타미드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 앞에서 칼리파로 선포되었다. 861년 이후 10여년간 이어지던 '사마라의 혼란'은 알 무타미드 대에 이르러 실권은 무사를 비롯한 튀르크 무신들이 장악하고 무타미드의 형인 탈하가 그들과 칼리파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맡으며 권력의 균형이 맞춰졌다. 혼란의 종식을 상징하듯, 무타와킬 시절 와지르였다가 바르카로 유배되었던[2] 우바이둘라 이븐 야흐야가 복귀하여 재차 와지르로 선임되었다. (7월 5일)

비록 사마라는 안정되었지만 혼란기 동안 중앙집권이 약해진 각 지역들은 여전히 불안하였다. 서쪽의 이집트 총독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사실상 자립한 상태였고 다마스쿠스와 팔레스타인 총독 이사 역시 세금을 사마라로 보내지 않고 독점하였다. 동쪽에선 이란의 부흥을 외친 사파르 왕조가 흥기하여 아바스 왕조의 속국 타히르 왕조를 패배시키고 호라산 대부분을 수중에 넣은 상태였다. 북쪽의 타바리스탄에선 자이디 시아파인 알라비 왕조가 들어섰고 남쪽에선 잔즈 반란과 이스마일리 시아파인 카르마트가 극성이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으로, 바그다드 마저 위태로웠던 형국이었다.

3.1. 연이은 반란

잔즈 반란, 쿠파와 라이의 자이디, 이라크 중부 카와리지, 파르스의 무함마드 알 와실, 시리아 남부의 이사 앗 샤이반의 반란

우선 무타미드의 즉위와 동시에 쿠파에선 알리 이븐 자이드가 이끄는 자이디 (다섯이맘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를 진압하러 간 앗 샤흐 빈 미칼은 대패하여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였다. 8월, 알리의 형제인 하산 이븐 자이드의 군대는 이란의 라이를 점령하며 압바스 조는 남쪽과 동쪽에서 시아파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라크 중부에서는 무사위르가 이끄는 카와리지 반란이 일어났고, 이란 남부의 파르스 지방에서도 무함마드 빈 와실 앗 타미미 휘하의 지역민들이 쿠르드 인들과 봉기하여 총독 알 하리스 빈 시마 앗 샤라비를 전사시켰다. 이라크 남부의 잔즈 반란 역시 계속되었다. 튀르크 지도부는 급한 불인 이라크 중부와 중남부의 반란부터 대처하기로 하였다. 무플리흐 앗 투르키가 카와리지 반군과 싸우기 위해 남파되었고 칸주르가 쿠파로 파견되었다. 이전에 하마단에 주둔하며 하산과 자주 싸워본 무사가 무타미드의 배웅을 받으며 라이로 출정하였다. (9월 11일)

11월 칸주르는 알리 이븐 자이드를 격파, 반군 다수를 전사시키고 쿠파에 질서를 회복하였다. 무사 역시 큰 어려움 없이 알라비 군을 격퇴하고 라이를 회복하였다. 무플리흐는 하디싸에서 무사위르를 축출하였으나 결국 그를 패배시키지는 못하고 사마라로 귀환하였고, 카와리지의 세력은 유지되었다. 알 무타즈의 죽음을 틈타 다마스쿠스를 장악한 팔레스타인-요르단 총독 이사 앗 샤이반에 대한 토벌은 툴룬 왕조를 세워 사실상 자립한 이집트 총독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거부함에 따라 아마주르 앗 투르키에게 일임되었다. 다마스쿠스 성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사는 아마주르에게 패하였고 라믈라로 도주하였다. 무타미드는 여전히 큰 세력을 지녔고 유능했던 이사와 전력으로 싸우기보다 타협하기로 하였고, 그에게 시리아를 포기하는 대신 기독교도들의 반란이 이어지던 아르메니아 총독직을 제안하였다. 이사가 수긍하며 시리아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 (871년 5월)

한편 같은해 1월 무타미드는 메카에서 막 사마라에 당도한 형 탈하에게 쿠파와 히자즈, 예멘 일대의 지배권과 라카브 '알 무와파크 빌라'를 하사하였다. 그해 7월에는 바그다드, 와시트, 바스라 등 사마라와 모술을 제외한 이라크 전역과 후제스탄, 파르스의 지배권을 더해 주었다. 압바스 군대가 카와리지, 자이디, 이사의 반란에 대처하는 동안 잔즈 반군은 기존의 우불라, 줍바에 이어 아바즈를 점령하고 아바단을 복속시켰다. 9월에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가 이끄는 잔즈 군대는 거의 1년간 봉쇄하던 바스라를 공격해 점령한 후, 수만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모스크 등 시가지를 파괴하였다.

3.1.1. vs 잔즈 반란 (1기)

제국의 주요 항구였던 바스라의 파괴는 압바스 조정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바스라 학살 직후 무함마드 알 무왈라드의 토벌군이 파견되었지만 늪지대로 물러난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에게 패하고 후퇴하였다. 반군은 우발라의 정부군 진영을 약탈하고 바스라를 재점령하였다. 결국 872년 2월 실권자 알 무와파크가 직접 무플리흐와 함께 남하, 역시 슾지대로 물러난 잔즈 군대를 쫓아 그 거점인 알 무크타라를 목표로 진군하였다. 4월 무렵 반군은 각지에 흩어져 있었기에 알 무크타라에는 잔즈 지도자 알리 이븐 무함마드 휘하의 병력만이 있었다. 압바스 군대가 공격하자 도시는 크게 동요하였고, 많은 여인과 아이들이 운하로 도주하려다 익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형을 이용한 잔즈 군대의 반격에 무플리흐가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그후 압바스 군은 혼란에 빠져 다수의 사상자와 포로를 남기고 철수하였다. 무플리흐는 며칠 후 부상이 도져 사망하였다.

우발라에서 병력을 가다듬은 알 무와파크는 티그리스 강을 따라 진군하던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의 첩보를 접하고는 타쉬티무르 앗 투르키에게 병력을 주어 추격하게 하였다. 알 무크타라로 기병대를 파견하고 후제스탄 총독 아스가준의 공격을 받아 약화된 잔즈 군대는 손쉽게 격파되었다. 아스가준이 보낸 함대에 의해 퇴로가 차단된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부상을 입고 도주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5월 사마라로 압송된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에 대해 무타미드는 무대를 조성하게 하여 공개적으로 그를 고문하였다. 200대의 채찍을 맞고 손과 다리가 잘린 그는 칼로 난도질당한 후 토막내어져 불태워졌다. 알 무와파크는 여세를 몰아 재차 알 무크타라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진영에 전염병이 돌아 미루어졌다. 얼마 후 알 무와파크는 토벌군을 파견한 후 자신은 소수의 병력과 후방에 남았다. 압바스 군은 사로잡힌 몇몇 마을들을 점령하고 사로잡힌 여성들을 해방하였으나 잔즈 군의 반격에 후방의 알 무와파크 진영까지 공격당하자 결국 그는 철수하였다. 늪지대에 고립된 백여명의 병사들은 몰살되었다.

바다와르드에서 병력을 재정비하던 알 무와파크는 돌풍이 불어 발생한 화재로 진영이 전소되자 7월 와시트로 회군해 군대를 해산하였다. 한편 같은해 무플리흐에 이어 카와리지 전선에 나선 마스루르 알 발크히는 하디싸를 수복하고 카와리지 포로를 잡아 사마라로 귀환하였다. 873년 알리 이븐 아반 휘하의 잔즈 군대가 후제스탄을 재차 침공, 총독 아스가준을 전사시키고 5월 아바즈를 점령하였다. 다시 충격에 휩쌓인 압바스 조정은 무사 이븐 부가 알 카비르에게 잔즈 전선을 일임시켰다. 9월 14일 칼리파의 배웅과 함께 출정한 그는 무플리흐의 아들 압둘 라흐만를 지휘관으로 삼아 파견하였다. 압둘 라흐만은 초반에는 패했지만 반격하여 다수의 반군을 전사시켰고, 알리 이븐 아바단 휘하 잔즈 병력은 슾지대로 도주하였다. 압둘 라흐만은 부관 타쉬무르를 파견하였고, 후자는 숲에 불을 질렀다. 알리 이븐 아바단은 탈출했지만 다수의 반군이 사로잡혔다.

하지만 병력을 증원받은 알리 이븐 아바단이 결사대를 꾸려 압바스 진영을 야습하자 압둘 라흐만은 패배하고 아바즈로 철수하였다. 다만 압둘라흐만 역시 병력을 재정비한 후 반격하여 승리하였고, 알리 이븐 아바단은 재차 슾지대로 철수하였다. 그후 압둘 라흐만은 알 무크타라 부근 바얀으로 진군해 그곳에서 한동안 반군과 대치하였다. 그는 역시 무사에 의해 파견된 바다와르드의 이브라힘 이븐 시마와 함께 잔즈 핵심부에 지속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바스라에 배치된 이샤크 이븐 쿤다즈는 적의 보급망 차단에 주력하였다. 양측의 공방전은 1년 넘게 이어졌고, 마침내 875년 중반 무사가 파르스 방면 사령관으로 전임되고 카와리지 전선에서 능력을 보인 마스루르 알 발크히가 잔즈 방면 사령관이 되었다.

3.1.2. vs 사파르 왕조

파일:1280px-Battle_of_Dayr_al-'Aqul_svg.png
다이르 알 아쿨 전투

압바스 조가 잔즈 반란에 골머리를 앓는 동안 파르스의 무함마드 알 와실은 시스탄사파르 왕조 아미르 야쿱 이븐 알 라이쓰와 대립하였다. 870년까지 호라산-아프간 지역의 카와리지 & 토호 세력을 소탕하고 자립한 야쿱은 파르스로 진군했지만 무타미드의 사절이 당도해 경고하자 회군하였다. 이에 무함마드 알 와실은 872년부터 카라즈 (지세)를 바치는 등 중앙 정부에게 복속하였으나, 야쿱이 타히르 왕조를 멸하는데에 집중하여 그의 위협에서 벗어나자 재차 자립하였다. 이에 875년 기존 잔즈 전선 대신 파르스 방면을 맡은 무사는 압둘 라흐만을 파견해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회복하게 하였다. 강경 태세로 나선 무함마드 알 와실은 군대를 이끌고 후제스탄으로 진군, 람호르모즈에서 압바스 군을 격파하였다. 부사령관 타쉬티무르가 전사하였고, 압둘 라흐만은 포로가 되었다. 무함마드 알 와실은 후자의 석방을 위해 파견된 압바스 사절의 제안을 무시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이후 무함마드 알 와실은 아바즈로 진군하였고, 그와 맞서기에 역부족이라 여긴 무사는 파르스 총독직을 사임하고 알 무와팍크에게 직위를 양도하였다.

한편 서진하던 무함마드 알 와실은 야쿱이 재차 파르스로 진군한다는 소식에 회군하였다. 야쿱은 파르스 깊숙히 침공하여 에스타크르를 점령, 무함마드 알 와실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875년 8월 야쿱은 바크테간 호수에서 무함마드 알 와실의 대군을 격파하였고, 그의 거점 사이다바드를 약탈한 후 파르스를 장악하였다. 이라크로 도주한 무함마드 알 와실은 재차 압바스 조와 동맹하였고, 한동안 군대를 정비한 야쿱은 후제스탄으로 진군하였다. 12월 람호르모즈를 점령한 야쿱은 이라크로 진군하였고, 압바스 조정은 그와 잔즈 반군 간의 합동 작전을 우려하였다. 알 무타미드는 (타히르 조의 멸망에 대한 항의로) 873년 연금시켰던 바그다드의 야쿱 지지자들을 석방하고 사절을 보내 호라산, 타바리스탄, 파르스, 고르간, 라이의 총독직과 바그다드 수비 대장을 맡기며 타협을 시도하였다. 야쿱은 압바스 조의 약한 모습에 더욱 자신감을 얻어 수도로 진군할 것이라 답하였다. 압바스 조정은 전쟁을 준비하였고, 무타미드는 공개적으로 야툽을 저주한 후 876년 3월 7일 사마라를 아들 알 무파와드에게 맡기고 바그다드로 향하여 주둔하였다. (3월 15일)

압바스 장군 마스루르는 와시트 일대의 운하를 파괴, 홍수를 내어 야쿱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그럼에도 3월 24일 야쿱은 와시트를 점령하였고, 며칠 후 다시 북상하여 바그다드에서 동남쪽으로 50여 km 떨어진 다이르 알 아쿨에 접근하였다. 다만 모든 조건에 수긍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 달리 무타미드는 알 무와팍크에게 대군을 주어 저지하게 하였다. 양측은 다이르 알 아쿨과 십 바니 쿠마 사이의 이스타르반드에서 마주쳤다. 야쿱의 1만 병력을 상회한 압바스 군은 알 무아팍크가 중앙, 무사가 우익, 마스루르가 좌익을 맡았다. 이제라도 칼리파에게 복속하라는 의례적인 요구가 묵살된 후, 4월 8일 아침에 전투가 개시되었다. 종일 이어진 전투에서 양측 모두 큰 사상자를 내었고, 야쿱 역시 부상을 입었으나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황혼 무렵 압바스 측 원군이 당도하였고, 마울라 누사이르가 티그리스 강의 선박으로 사파르 진영의 후방에 접근해 보급 수레에 불을 질렀다. 사기가 꺾인 사파르 군은 도주하였고, 야쿱은 친위대를 이끌고 계속 싸웠으나 결국 철수하였다. 일전에 마스루르가 와시트 일대를 범람시킨 탓에 많은 사파르 병사들이 익사하였다.

알 무와팍크는 사파르 진영을 점령, 타히르 왕공 무함마드 빈 타히르 등 야쿱이 전장에 대동한 그의 정치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다이르 알 아쿨의 패전 이후 야쿱은 더이상 이라크를 넘보지 않았다. 다만 알 무와팍크가 파르스,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한 무함마드 빈 와실과 무함마드 빈 타히르 역시 사파르 조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임지에 부임하지 못하였다. 파르스에서 옛 세력을 모으던 무함마드 빈 와실은 877년 사파르 군에게 사로잡혀 감금되었다. 879년 야쿱은 사망하였고, 그를 계승한 동생 아므르는 무타미드와 휴전을 맺었다. 이로써 압바스 조는 이라크, 사파르 조는 이란을 지배하는 현상 유지가 이어졌다. 이러한 평화를 틈타 압바스 조정은 잔즈 반란의 진압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3.1.3. vs 잔즈 반란 (2기)

야쿱에 맞서기 위해 압바스 장군 마스루르가 이라크 남부의 병력을 불러들이자 잔즈 반군은 더욱 활개를 치며 일대를 습격하였다. 알리 이븐 무함마드는 술레이만 이븐 자미 휘하의 주력군을 와시트 남쪽의 알 하와니트로 파견하였다. 잔즈 군은 압바스 함대를 파괴하며 진군, 수차례 압바스 군을 패배시켰으나 와시트 수비를 맡은 아부 무아드 알 쿠라이쉬의 습격에 격퇴되었다. 이후 잔즈 군은 재차 진격하여 아부 무아드를 격파하고 와시트 인군을 약탈했으나 압바스 원군에 크게 패하고 철수하였다. 877년 압바스 조정은 아가르트미쉬와 쿠샤이쉬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술레이만 이븐 자미에게 패하였고, 쿠샤이쉬가 전사하였다. 잔즈 군은 압바스 진영을 약탈하였고, 알리 이븐 무함마드는 쿠샤이쉬의 수급을 전시하게 하였다. 그후 알 하와니트로 진군한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압바스측 지휘관 아부 타밈을 전사시키고 그의 진영을 약탈하였다.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타킨 알 부카리가 이끄는 압바스 군을 거짓 후퇴로 유인한 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격파하였다. 승리 이후 그는 회군하려 했으나 다른 장군 술레이만 알 줍바이는 병력을 이끌고 타킨 알 부카리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진영의 압바스 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잔즈 군은 철수하였고, 전력을 회복해 돌아왔으나 이미 타킨 알 부카리는 병력을 철수시킨 후였다. 따라서 잔즈 군은 압바스 진영을 약탈한 후 진영으로 귀환하였다. 한편 회군 허가를 받은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남은 병력을 술레이만 알 줍바이에게 맡기고 알 무크타라로 돌아갔다. (878년 초엽) 하지만 줄란 앗 투르키과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 야쉬쿠르즈가 이끄는 압바스 군에게 잔즈 군이 패하자 다시 복귀한 그는 다시 승리를 거두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공세에 나선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7월 무렵 와시트 턱밑의 알 루사파에 당도, 마타르 이븐 자미가 이끄는 수비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약탈한 후 불태웠다. 다만 신중했던 그는 여세를 몰아 와시트까지 공격하는 대신 알 무크타라로 회군, 8월 8일에 당도하였다.

잔즈 군이 떠난 후 마타르 이븐 자미는 잔즈 영역을 습격하였고, 이에 반격에 나선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8월 31일 알 루사파로 귀환하여 압바스 군을 격퇴하고 일대를 평정하였다. 879년 초엽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정예 병력을 이끌고 북상, 앗 샤디디야에서 격전 끝에 타킨 알 부카리를 격파하였다. 이에 와시트 지역 사령관 아흐마드 이븐 라이싸와야가 남하, 양측은 이틀간 치열히 싸웠다. 다만 3일째에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적군을 거짓 후퇴로 유인해 격파하였고, 아흐마드 이븐 라이싸와야는 겨우 도주하였다. 자신감을 얻은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증원 병력이 당도하자 와시트 공격에 나섰다. 총독 무함마드 알 무왈라드는 패퇴하였고, 하루에 걸친 치열한 시가전 끝에 도시는 점령되었다. 바스라, 아바즈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주민들이 살해되었고 도시는 약탈당한 후 불태워졌다. 이후 잔즈 군대는 폐허가 된 와시트를 떠나 쿠파 방면의 준불라 일대를 약탈하였다.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보급을 위한 운하를 파고 준불라에 계속 주둔했으나, 아흐마드 이븐 라이싸와야의 반격에 패배한 후 타히싸로 철수하였다.
3.1.3.1. 알 무와팍크의 진압
파일:이라크 반란.png
잔즈 반란의 최대 범위 (879년)

879년 잔즈 군대는 다이르 알 아쿨 부근의 잡불, 앗 누마니야, 자르자라야까지 진출하는 등 이라크 중부에 이르렀다. 이에 사와드 지역 주민들이 바그다드로 피난하는 등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해 말엽 반군의 일망타진을 결심한 알 무와팍크는 아들 아불 압바스 아흐마드 (후의 알 무타디드)에게 1만 기병과 보병, 그들을 운송할 하매를 주어 출정시켰다. 아흐마드는 잔즈 선발대를 거짓 후퇴로 유인해 격파한 후 와시트에 주둔하였다. 금요 예배를 드린 후 재차 출정한 그는 남쪽의 알 우므르에 진영을 세우고 잔즈 세력권을 지속적으로 습격하였다.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세 방향으로 북상하며 압바스 군을 끌어내려 하였지만 아흐마드가 말려들지 않자 정공에 나섰다. 알 루사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잔즈 군은 패하였고, 아흐마드는 결과에 만족한 채 알 우므르 진영으로 돌아갔다. 이후 증원된 잔즈 군은 진영을 공격하며 적을 유인하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잔즈 군이 유인에 속아 격파당하였다. 아흐마드는 기세를 이어 함대를 이끌고 진군했으나, 그의 전함이 본대와 분리되어 공격을 받아 간신히 탈출하였다.

그는 운행 도중 무단 이탈한 승무원 세 명을 참수하고 전투 시에 선박을 버리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라 공표하였다. 그후 재차 진군한 아흐마드는 와시트 남쪽에서 잔즈 군을 격파하고 압다시를 회복, 억류되었던 여인들을 구하였다. 뒤이어 잔즈 거점 알 마니아로 진격한 그는 격전 끝에 반군을 매복지로 유인해 격파하였고, 알 마니아를 불사른 후 포로들을 구출해 알 우무르 진영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880년 9월 알리 이븐 무함마드의 지시로 아바즈에 주둔하던 알리 이븐 아반이 이라크의 술레이만 이븐 자미 측으로 합류했다는 소식을 정한 알 무와팍크는 아흐마드를 지원하기 위해 이듬달 친히 출정하였다. 알 무와팍크와 합류한 아흐마드는 함께 남하하며 포로로 잡은 잔즈 병사들을 학살하였고, 재차 알 마니야로 진격하였다. 얼마 간의 전투 끝에 중과부적이라 여긴 잔즈 군은 도시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알 무와팍크는 이들을 추격하였고, 아흐마드는 도시의 성벽을 파괴하고 주민 대부분을 학살했으며 수천의 여인들을 구출하였다. 그후 알 무와팍크는 아흐마드에게 알 하와니트의 술레이만 이븐 자미를 공격하게 하였다.

비록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없었지만 아흐마드는 밤까지 격전을 벌였고, 전향한 이로부터 술레이만 이븐 자미가 타히싸의 알 만수라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아흐마드는 이를 부친에게 알렸고, 알 무와팍크는 그곳으로 진격하였다. 보급품과 선박을 정비하고 병사들에게 수당을 지급한 그는 운하를 막기 위한 인부들과 물품들을 준비한 후 도로를 정비하며 진군하였다. (880년 11월 말) 비록 악천후로 지연되었지만 압바스 군은 알 만수라에 당도하였고, 격전 끝에 여러 장교들이 사로잡히는 피해를 입었다. 다만 잔즈 지휘관 술레이만 알 줍바이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며칠 후 사망하였다. 압바스 군은 알 만수라에 총공세를 가하여 점령하였고, 잔즈 수비대는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술레이만 이븐 자미는 소수의 병력과 도주하였고, 다수의 여인과 아이들 및 정부군 장교들이 석방되어 와시트로 호송되었다. 알 마니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라 알 무와팍크는 알 만수라에서 노획한 많은 식량과 돈, 가축을 팔아 병사들의 급료로 지급하였다. 17일간 알 만수라에 머물며 알 무와팍크는 그 성벽을 허물고 해자를 메우게 하였다.

또한 그는 잔즈 병사를 잡아오는 이에 대한 포상제를 확립했고, 항복한 반군은 좋은 처우와 사면을 베풀며 이탈을 유도하였다. 누사이르 아부 함자에게 술레이만 이븐 자미의 추격을 맡긴 알 무와팍크는 지라크 앗 투르키로 하여금 타히싸에 남아 잔즈 잔당을 소탕하게 하고는 와시트로 회군하였다. 아바즈 출정을 위해 군대를 정비하던 그는 타히싸가 평정되자 지라크에게 누사이르 아부 함자와 합류,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내려가며 최종 목표인 알 무크타라 방면의 잔즈 병력을 소탕하게 하여다. 881년 초엽 알 무와팍크가 아바즈를 평정하는 동안[3] 누사이르 아부 함자와 지라크는 (반란의 발상지인) 우불라에 당도, 전자는 잔즈 군의 습격에 진영을 방어하러 귀환하고 후자는 잔즈 군을 매복해 격파하였다. 그후 지라크는 적의 수급들을 대동한 채 와시트로 돌아가 승전을 알렸다. 이 소식이 퍼지며 2천의 반군이 누사이르 아부 함자에게 귀순하였고, 토벌군에 편성되었다. 2월 중순 무렵 아바즈를 떠난 알 무와팍크는 19일 알 무크타라 인근에 당도, 제장들을 소환하였다. 이후 압바스 군은 알 무와팍크의 지휘 하에 도시를 포위하였다.

포위는 2년 반동안 이어졌고, 그동안 양측은 수차례 서로를 습격하였다. 장기화된 포위에 알 무와팍크는 병영 도시 알 무와팍키야를 건설, 병사들의 보급과 안전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귀순병들을 우대해주고 성벽 앞에서 행진시켜 반군을 설득하려 함과 동시에 전사한 반군의 머리 역시 전시하였다. 포위군은 인화 물질을 던져 성벽의 구조물을 파괴하려 하였고, 조금식 효과를 보였다. 비록 알 무와팍크가 중상을 입기도 했지만, 883년 봄 알 무크타라의 서쪽 성벽이 붕괴하였다. 반군은 그럼에도 버텨내었지만, 8월에 동쪽 성벽마저 붕괴하자 행방이 결정되었다. 이어진 총공격에서 알리 이븐 무함마드를 포함한 반군은 학살되었고, 일부 생존자들이 후제스탄으로 도주하려 했지만 사로잡혔다. 그들 중에는 알 무와팍크에게 중상을 입힌 자도 있었는데, 아흐마드는 그를 처형하였다. 난이 진압된 후 알 무와팍크는 바스라, 우불라, 아바즈, 와시트 등 피해를 입었던 도시들에 서신을 보내어 이제 반란이 끝났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도 안전하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11월 그와 아흐마드는 알리 이븐 아흐마드의 수급과 함께 바그다드에 개선하였다.[4]

3.1.4. 자지라 전역

사마라의 혼란기 동안 앞서 언급했듯이 이라크 중북부는 카와리지의 봉기에 직면하였고, 모술은 아랍계 바누 타글리브 족장들이 총독위를 세습하였다. 카와리지 반란을 이끌던 무사위르는 872년 마스루르 알 발크히에게 패한 후 잠잠히 지내다가 877년 사망하였다. 사후 무함마드 이븐 쿠르자드와 아이유브 이븐 하얀 알 와리키 알 바잘리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전자가 승리하였으나 카와리지 주류는 압둘라 이븐 야흐야 알 와리키에 이어 하룬 이븐 압둘라 알 바잘리를 지도자로 추대하며 반발하였고, 결국 그의 휘하에 통합되었다. 한편 잔즈 전선에서 활약한 튀르크계 장군 이샤크 이븐 쿤다즈는 879년 타글리브 부족의 총독 알리 이븐 다우드를 패배시키고 모술에 부임하였다. 10여년간 유지하던 자치의 상실에 분노한 타글리브 부족은 카와리지 반군에 합류하였다. 반격에 나선 이샤크 이븐 쿤다즈는 그 지도자 중 하나인 이샤크 이븐 아이유브를 격파, 후자의 거점인 니시비스를 점령하였다.

이에 이샤크 이븐 아이유브는 디야르바크르바누 샤이반 아미르 이사 이븐 앗 셰이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들은 연합군을 꾸려 남하했으나 압바스 조정에서 이샤크 이븐 쿤다즈를 모술에 더하여 디야르 라비아, 아르메니아 총독에 봉하자 20만 디나르의 연공을 약속하고 회군하였다. 비록 얼마후 타글리브 부족장 함단 이븐 함둔 (함단 왕조의 시조)이 가세한 연합군이 재차 꾸려졌으나 881년 봄 이샤크 이븐 쿤다즈는 이를 격파하고 패잔병을 디야르바크르까지 추격하였다. 이후 그는 도시를 포위했으나 이집트의 툴룬 왕조 토벌을 구상하던 알 무와팍크가 소환하여 풀렸다. 885년 하룬 알 바잘리와 함단 이븐 함둔은 재차 모술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전자는 금요 예배를 이끌었다. 다만 이들은 곧 기존 동맹이던 바누 샤이반에게 패하고 후퇴하였다.

3.2. 권력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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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82년 사마라에 건설된 알 아쉬크 궁전

즉위 직후부터 알 무와팍크와 무사 이븐 부가 알 카비르에게 실권을 빼앗긴 무타미드는 자신의 와지르 (재상)를 임명할 권리만은 지니고 있었다. 870년 6월 그는 부왕 알 무타와킬 때에 재상을 맡았던 우바이둘라 이븐 야흐야 이븐 카칸을 선임하였다. 875년 7월에는 아들 자파르에게 알 무파와드 일랄라 칭호를 내리며 후계자로 선포, 압바스 조의 서부 (서부 이란, 아르메니아, 자지라, 시리아, 이집트, 이프리키야)의 지배권을 내렸다. 알 무와파크에게는 2순위 후계자로서 그대로 동부 (이라크 남부, 파르스, 아제르바이잔, 호라산)를 맡겼다. 다만 알 무파와드가 아직 미성년일 때에 무타미드가 사망하면 알 무와파크가 우선 계승하는 구조였다. 또한 알 무와파크는 자신의 동맹인 무사를 알 무와파드의 대리인으로 두어 서부에 역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던 877년 무사가 사망하고 같은해 8월 와지르 우바이둘라가 사망하였다. 후자의 사후 알 무와파크의 비서인 술레이만 이븐 와하브가 와지르가 되었지만, 그는 무타미드에게 면박 받은 후 이스마일 이븐 불불로 대체되었다. 다만 실권은 알 무와파크의 새 비서인 사이드 이븐 마클라드에게 있었다.

3.2.1. 이집트 망명 시도

한편 868년 이집트 총독에 오른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10여년간 내부를 다지며 사실상 자립하였다. (툴룬 왕조) 그는 알 무와팍크에 맞서 무타미드를 지지하였고, 많은 세금을 칼리파에게 바쳤다. 이에 877년 알 무와팍크가 시리아 총독 아마주르에게 이집트 토벌을 지시하였으나 그 상관인 무사의 죽음과 함께 무산되었고, 얼마후 아마주르가 사망하자 역으로 시리아를 정복하였다. 스스로 마울라 아미르 알 무미닌, 즉 칼리파의 종복이라 칭한 그에 대해 무타미드는 시리아 지배권을 인정해주었다. 881년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무타미드와 알 무파와드,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동전에 새기며 알 무와팍크만 배제하였다. 그러던 882년 가을 툴룬령 알레포 태수 룰루와 타르수스의 야자만이 압바스 조로 이탈하였다. 이에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직접 시리아로 진군하였는데, 사실상 사마라에 감금되어 있던 무타미드는 이를 기회로 그에게 의탁하기 위해 소수의 인원만을 대동하고 시리아로 향했다.

다마스쿠스를 지나던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칼리파의 사절로부터 이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는 기대를 품고 무타미드를 기다렸다. 그러나 와지르 사이드 이븐 마클라드가 모술 총독 이샤크 이븐 쿤다즈에게 이를 알렸고, 후자는 칼리파 일행을 돕는 척 하다가 마야딘바그다드 사이의 하디싸에서 그들을 붙잡았다. (883년 1월) 그는 사슬에 묶인 무타미드에게 왕조를 살리려 하는 동생을 버리려 했냐며 훈계한 후 사마라로 압송하였다. (1월 18일) 알 무와팍크는 크게 기뻐하며 이샤크 이븐 쿤다즈에게 칼리파를 동행한 이들의 영지를 압수해 하사하였고, 4일 후에는 예복과 함께 두 개의 의전용 검을 하사하며 둘 앗 사이판 (두 검의 주인)이란 칭호를 내렸다. 또한 그는 칼리파의 근위대 (슈르타트 알 카사)의 지휘권을 얻으며 압바스 조의 주요 권력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무타미드는 자우사크 궁전에 연금되었고, 6월에는 와시트로 옮겨져 알 무와파크의 직접적인 감시 하에 놓였다.

그동안 무타미드는 동생의 압력으로 아흐마드 이븐 툴룬을 비난하고 이샤크 이븐 쿤다즈를 (명목상의) 시리아-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해야 했다. 아흐마드 이븐 툴룬 역시 다마스쿠스의 성직자들을 모아 알 무와팍크를 찬탈자로 규정, 그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무타미드는 884년 3월에야 사마라의 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같은해 5월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사망하고 20세의 아들 쿠마라와이가 계승하자 일부 세력이 이탈하였고, 알 무와파크는 이를 틈타 885년 이샤크 이븐 쿤다즈와 무함마드 이븐 아빌 사즈 휘하의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시리아 대부분을 수복하였으나 원군을 이끌고 당도한 아흐마드와 대립하여 회군하였고, 남은 아흐마드는 앗 타와힌 전투에서 툴룬 군에 패하였다. (상세 내용은 다마스쿠스, 툴룬 왕조 문서 참고) 알 무와팍크와 친해졌던 이샤크 이븐 쿤다즈는 원정 도중 전자의 아들과 싸운 후로 관계가 서먹 서먹해졌다.

3.2.2. 툴룬령 자지라

다만 평화를 추구하던 쿠마라와이는 포로들을 석방하며 협상에 나선 결과, 쿠트바에서 알 무와파크를 언급하고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30년 동안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886년 12월) 한편 이후 무함마드 이븐 아빌 사즈가 쿠마라와이에 복속하며 이샤크 이븐 쿤다즈와 대립하였다. 설득하여 툴룬 조의 지원을 얻어낸 무함마드 이븐 아빌 사즈는 이샤크 이븐 쿤다즈를 패배시키고 그 역시 툴룬 조에 복속하게 하였다. 다만 887/8년 후자는 툴룬 조에 반란을 시도했다가 패배하였고, 쿠마라와이는 그를 해임한 후 무함마드 이븐 아빌 사즈를 자지라 총독에 봉하였다. 경쟁자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이샤크 이븐 쿤다즈는 쿠마라와이를 설득하여 889년 이번에는 그가 툴룬 군대를 이끌고 무함마드 이븐 아빌 사즈를 격파한 후 총독이 되었다. 축출된 무함마드 이븐 아빌 사즈는 알 무와팍크에게 망명하였고, 아제르바이잔 총독으로 봉해졌다. (사즈 왕조)

한편 889년 이샤크 이븐 쿤다즈가 현지 카와리지를 죽였다는 소식에 하룬 알 바잘리는 보복을 위해 하디싸의 동료들과 진군했으나 모술의 유지들이 사과하자 회군하였다. 이샤크 이븐 쿤다즈는 891년 사망하였고, 아들 무함마드 이븐 이샤크가 총독위를 계승하였다. 892년 재차 연합한 하룬 알 바잘리와 함단 이븐 함둔은 무함마드 이븐 이샤크에 대해 봉기한 모술 주민들과 연합하여 그의 대리인을 축출하였다. 해당 대리인은 바누 샤이반의 군사 원조를 얻어 귀환하였고, 재차 패배하여 도주하였다.[5] 그후 일부 카와리지 세력이 무함마드 이븐 우바이다를 지도자로 추대하며 내분이 벌어졌고, 그는 신자르를 거점으로 삼았다. 하룬 알 바잘리는 도시를 포위, 사면을 조건으로 항복을 받은 후 지도부를 처형하였다. 무함마드 이븐 우바이다는 디야르바크르로 도주하였으나 총독 아흐마드 이븐 이사는 그를 바그다드로 보내었고, 칼리파의 지시대로 화형에 처해졌다.

3.3. 실권 회복 시도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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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년 경 압바스 왕조. 많은 부침을 겪었지만 이라크의 지배력 만큼은 유지, 향후 반격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885년 무타미드의 도피를 막은 사이드 이븐 마클라드가 실각하자 이스마일 이븐 불불이 단독 와지르가 되었지만 군대와 행정 모두를 장악한 알 무와팍크의 권력은 이미 너무 공고하였다. 887년 무타미드는 아르메니아의 아쇼트 1세에게 조공을 지속하는 대가로 국왕 지위를 내렸다. 한편 둘라프 왕조를 시켜 사파르 왕조를 공격하게 한 알 무와팍크는 같은해 직접 출정하여 파르스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다만 자지라의 혼란과 툴룬, 비잔틴 세력의 압박에 그는 사파르 조와 휴전하고 파르스를 포기한 채로 귀환하였다. 그러던 889년 알 무와팍크는 모종의 이유로 아들 아흐마드와 대립한 끝에 후자를 감금하였다. 890년 그는 재차 파르스 원정에 나섰지만 둘라프 조가 패하자 역시 현상 유지의 휴전을 맺고 회군하였다. 891년 5월 알 무와팍크는 2년 간의 원정을 마치고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고질병인 통풍이 도진 그는 제대로 말을 타지 못하고 특수 제작된 수레를 타고 다닐 정도로 약화되었다.

알 무와팍크의 죽음이 가시화되자, 아흐마드와 대립하던 와지르 겸 바그다드 수비대장 이브라힘 이븐 불불은 무타미드와 알 무파와드를 바그다드로 불러 친위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미 군대와 여론은 아흐마드를 지지하였고, 병사들에 의해 석방되어 부친의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6월 2일 알 무와팍크는 사망하였고 모친 무덤이 있는 알 루사파에 매장되었다. 이틀 후 아흐마드는 부친의 권세를 이으며 '알 무타디드 빌라'라 칭하였고, 알 무파와드에 이은 두번째 후계자로 공표되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892년 4월 30일 무력한 알 무파와드의 계승권을 박탈하며 1순위 후계자로 부상하였다. 모든 희망을 잃은 무타미드는 6개월 후인 10월 14일 과식과 과음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독살설도 재기되었지만 이미 탁월한 능력을 입증한 알 무타디드는 순조롭게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압바스 조는 사마라의 혼란을 끝내고 짧은 중흥기에 들어서게 된다.


[1] 따라서 이븐 피트얀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머니 이름까지 포함한 풀네임은 너무 길어지니 생략[2] 유배 자체는 867년 알 무타즈 시절에 풀렸다[3] 알리 이븐 무함마드가 알 무크타라로 병력을 불러들였기에 수월히 진행됨. 잔즈 반군은 후퇴하며 평화 협정을 맺은 마을들까지 초토화시킴. 한편 약 1천여 잔즈 반군이 사면을 받아 귀순, 군대에 편입됨[4] 시가 행진 시에 아흐마드는 창 끝에 꽂힌 알리 이븐 무함마드의 수급을 앞세워 주민들에게 보였다. 항복한 알리 이븐 아반, 술레이만 이븐 자미, 술레이만 이븐 무사 등의 잔즈 지휘관들은 알리 이븐 무함마드의 처자식들과 함께 바그다드에 감금되었다. 그러던 885/6년 와시트에서 최후의 잔즈 봉기가 일어나자 알 무와팍크는 잔즈 지휘관들을 처형해 수급을 가져오게 하였고, 그 몸은 하수구에 버려졌다가 바그다드의 동편과 서편에 전시되었다.[5] 초반에는 모술-카와리지-타글리브 군이 승리하였으나 그들이 적진을 약탈하는 동안 바누 샤이반이 재결집하여 기습해 승리하였다. 7년전 앗 타와힌 전투와 판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