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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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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 배경2. 제3차 피트나아부 알 아바스(750 ~ 754)3. 압둘라 알 만수르(754 ~ 775)4. 무함마드 알 마흐디(775 ~ 785)5. 황금기(786 ~ 861)
5.1. 하룬 알 라시드(786 ~ 809)5.2. 제4차 피트나(811 ~ 813)5.3. 알 마문(813 ~ 833)5.4. 알 무타심(833 ~ 842)5.5. 알 와시크(842 ~ 847)5.6. 알 무타와킬(847 ~ 861)5.7. 아바스 황금기의 사회상
6. 사마라의 혼란기(862 ~ 870)
6.1. 정국의 혼란과 제5차 피트나(862 ~ 866)6.2. 튀르크 군부에게 도륙된 칼리파들(866 ~ 870)
7. 알 무타미드(870 ~ 892)8. 1차 중흥기(892 ~ 908)
8.1. 알 무타디드(892 ~ 902)8.2. 알 무크타피(902 ~ 908)
9. 2차 쇠락기(908 ~ 944)
9.1. 알 무크타디르알 카히르(908 ~ 934)9.2. 알 라디(934 ~ 940)9.3. 6번 함락당한 바그다드(940 ~ 944)
10. 부와이 왕조의 지배(945 ~ 1056)11. 알 카디르(991 ~ 1031)12. 셀주크 제국의 지배(1056 ~ 1154)13. 2차 중흥기(1154 ~ 1258)14. 1258년, 몽골에 의한 멸망15. 카이로 아바스 왕조(1261 ~ 1517)

1. 건국 배경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사후, 그의 후계자들이 다스리는 정통 칼리파 시대가 열렸다. 대략 30년 동안 지속된 정통 칼리파 시대는 제4대 칼리파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무아위야 1세와 맞서던 중 카와리즈파 암살자에게 살해당하고, 뒤를 이은 하산 이븐 알리가 무아위야에게 항복하면서 종결되었다. 이후 무아위야는 스스로 칼리파에 올라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했고, 우마이야 왕조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일대까지 뻗어나가며 명실상부한 이슬람의 시대를 개막했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는 시스템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초기 이슬람의 중심이던 아랍인들만의 제국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정복지의 현지 주민들은 마왈리로 취급되어 이슬람교로 개종하더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고, 비신자가 반드시 납부해야 하는 지즈야를 그대로 납부해야 했다. 또한 도시 중심지에 거주할 수 없었고, 아랍인과 결혼하는 것 역시 힘들었으며, 아랍 양식의 복장을 입는 것도 금지되었다. 게다가 수니파가 주류였던 우마이야 왕조는 시아파와 기존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을 크게 억압했고, 이는 수많은 이들이 우마이야 왕조에게 반감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를 가장 증오하는 세력은 바로 시아파였다. 그들은 '찬탈자' 우마이야 왕조가 아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 그의 후손들이야말로 진정한 칼리파라고 여겼다. 게다가 카르발라 참극이 벌어지면서, 시아파는 우마이야 왕조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시아파는 사건이 발생한 지 1,400년이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일을 공공연히 언급하며 수니파를 비난하며, 아슈라의 날이 되면 후세인 이븐 알리가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기 위해 자신들을 채찍으로 때리거나 칼집을 내어 얼굴 등을 자해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1]

당시 우마이야 왕조 내 무슬림 비율은 10%가 되지 못했으며, 지배층인 아랍인으로 한정하면 이 비율은 극도로 줄어들었다. 무슬림들은 우마이야 왕조 칼리파들이 선교에 별로 열성적이지 않고 향락에 탐닉한다며 강한 반감을 품었다. 그들은 우마이야 가문이 이슬람의 정통적인 지도자가 아닌, 그저 그들의 귀족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우마이야 왕조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시리아 군대를 제국 전역으로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시리아군이 사방으로 분산되면서, 조직적인 대규모 반란이 벌어졌을 때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아부 알 아바스가 이끄는 아바스 가문이었다.

2. 제3차 피트나아부 알 아바스(750 ~ 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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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알 아바스를 그린 벽화.

아부 알 아바스는 빌라드 알삼 하와라(오늘날 요르단 후메이마 유적지) 출신으로, 메카의 지배 부족인 쿠라이시 부족의 하위 부족인 바누 하심의 일원이었다. 또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숙부인 아바스 이븐 압둘 무탈리브의 고손자였다. 일찍이 호라산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아버지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라를 따라 호라산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여러 이슬람 학자들과 접촉하며 이슬람 교리를 숙지했다. 743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형 이브라힘이 아바스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745년 샤라반 이븐 압둘 아지즈가 이끄는 카와리즈파의 반란에 참여했다가 피살당했다. 이복형 아부 자파르는 모친이 비천한 출신이었기에 아부 알 아바스가 새 수장으로 등극했고, 형 이브라힘의 원수를 갚기로 마음먹었다.

기존의 서구 역사가들은 아바스의 반란을 아랍인 주도 왕조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반발이라고 해석했으나, 실제로는 시아파 페르시아인뿐만 아니라 수니파 비아랍인, 수니파 아랍인, 비무슬림까지 가담한 초종파•초종교적인 반발이었다. 당시 비무슬림은 공직 진출에 제한이 있었고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아야 했는데 이들 비무슬림을 구성하던 콥트교인, 앗시리아인, 정교회 신자들은 이슬람 성립 이전부터 로마 제국과 교류하여 부와 지식을 축적한 계층이기도 했던지라, 즉각 아바스 가문을 지원했고 이들의 지원은 아바스 가문에 큰 힘이 되었다.

아바스 가문은 종교, 민족을 초월한 평등함을 내세워 수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또한 무슬림들에게는 무함마드의 친지들을 내세워 종말론적, 구세주론적인 선전을 체계적으로 펼쳐 환심을 샀다. 당시 적이라면 무조건 때려부수고 보는 아랍인의 관점에서 벗어나 체계적으로 선전 센터를 두고 별도로 담당자를 두는 등 여론전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또한 이들은 철저한 비밀을 유지했는데 우마이야 왕조 기간 내내 일어났던 반란은 왕조의 모순을 지적하며 인기를 얻어온 대중 운동가와 지방 영주가 힘을 합쳐 일으킨 형태가 대부분이었던지라, 자연히 그 전부터 당국의 눈에 띄어 감시 대상으로 낙인찍히면서 반란이 실패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바스 가문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처음부터 모든 일을 철저한 비밀에 부쳤고 그 결과 우마이야 왕조는 하심 가문과 아바스 가문의 접촉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는 수뇌부의 기밀 유지로도 이어졌는데 아부 알 아바스는 호라산과 이라크의 대다수 지역을 정복하기 전까지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아바스 왕조 창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아부 무슬림의 신원도 철저히 숨겨졌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아부 무슬림이 실존인물이 맞는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747년 호라산에서 라마단 기간(5월 16일 ~ 6월 14일) 동안 수많은 군중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스크에 집결했는데 아바스 가문은 이 때를 틈타 군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호라산을 지배했던 총독 나스르 이븐 사야르가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당시 85세의 고령인데다 중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748년 11월 9일 라이에서 사망했다. 나스르 사후 호라산의 우마이야 왕조군은 와해되었고, 아바스 반란군은 호라산 전역을 장악했다. 이후 749년 봄까지 이란을 석권한 뒤 이라크로 진격하여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749년 11월 28일 쿠파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반란군은 아부 알 아바스를 새 칼리파로 선출했다. 그는 이때서야 대중에 모습을 드러냈고, 우마이야 왕조의 상징인 백기에 대항하여 흑기를 군기로 썼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였던 마르완 2세는 이집트에서 발발한 콥트교의 반란 진압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방에서 아바스 가문이 반란을 일으켜 쿠파까지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이집트에서 철수한 뒤 전 병력을 긁어모아 이라크로 향했다. 750년 1월 25일, 티그리스 강 북부 지류인 대 자브 강에서 아부 무슬림이 이끄는 반란군과 우마이야 왕조군이 맞붙었고 전투는 이틀 동안 지속되다가 우마이야 왕조군이 참패하여 300여 명에 달하는 우마이야 왕족들이 전사했다. 마르완 2세는 수도 다마스쿠스로 피신했지만 주민들에게 입성을 거부당하자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피신했다.

아부 알 아바스는 시리아로 진군하여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뒤 우마이야 왕조를 따랐던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후 이집트로 추격대를 보내 파이윰 오아시스를 근거지로 저항하던 마르완 2세를 체포하여 750년 8월 6일에 처형했다. 마르완 2세의 수급은 쿠파로 옮겨져서 공개 효수되었다. 마르완 2세의 아들 압둘라는 에리트레아 지역으로 피신해 저항을 이어갔지만 몇 달 만에 전사했다. 이후 아직까지 살아있던 우마이야 왕족들에게
"신변을 보장해주고 재산을 유지해줄 테니 연회에 참석하라"
고 통보한 뒤 어느 섬에 모아놓고 연회를 벌이다가 전원 학살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아부 알 아바스는 시체 위에 카펫을 깔고 부하들과 함께 그 위에 앉아서 식사를 마저 즐겼다고 한다. 이때 초대에 응하지 않고 미리 도망쳐 살아남은 제10대 칼리파 히샴의 손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아바스 왕조의 추격을 피해 서쪽으로 도망쳤고, 아바스 왕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알안달루스에 도착해 754년 후우마이야 왕조를 건설했다.

물론 이래도 우마이야의 잔존 세력은 남아 있었고 그들은 이라크의 마지막 우마이야 총독인 야지드 이븐 우바이라 알 파자리를 중심으로 항전을 이어갔다. 아바스는 이복형 아부 자파르를 파견해 우바이라를 토벌하게 했고 자파르는 와시트에서 우바이라의 군대를 포위한 뒤 투석기를 대거 동원하여 도시를 폭격했다. 11개월간 이어진 항전 끝에, 주민들이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고 호소하는 걸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한 우바이라가 자파르에게 사절을 보냈다. 자파르는 그가 와시트를 떠나지 않고 아바스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사면했는 데 얼마 후, 자파르는 우바이라가 배신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며 우바이라 및 42명의 동료 및 친척을 긴급 체포해 모조리 처형했다.

그 후 알 아바스는 자파르를 다시 호라산으로 보내 아부 무슬림을 만나서 새 정권에 진정으로 충실한지를 알아보게 했다. 아부 자파르는 아부 무슬림과 접촉한 뒤 칼리파에게 돌아와서
"아부 무슬림은 거인 중의 거인이며, 그가 살아있는 한 인생을 즐길 수 없다"
라고 보고했다. 한 마디로 위험인물이라 지적한 것인데 아바스는 아부 무슬림을 제거하긴 커녕 그가 754년에 메카를 순례할 수 있게 해준 것과 더불어 호라산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줬다.

한편,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이 751년에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했다. 이에 지야드 이븐 살리흐 장군이 이끄는 호라산 주둔 무슬림군이 출진하여 탈라스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했다. 이때 사로잡힌 중국인들 중엔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을 갖춘 기술인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슬람 세계는 제지술을 습득했고, 나중에는 유럽에 전파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가 테오도시오폴리스(에르주룸)과 멜리테네(말라티야)를 공략하고 파괴한 뒤 주민들을 대거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끌고 가는 일도 있었는데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잔존 세력과 싸우고 있었던지라 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3. 압둘라 알 만수르(754 ~ 775)

754년 6월 10일, 아부 알 아바스가 붕어했다. 아바스는 이복형 자파르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지난날에 사망한 형 이브라힘의 아들 이사를 그의 후계자로 삼게 했다. 이때 시아파 측은 새 칼리파는 자신들이 선출한 이맘이 되어야 한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는데 이에 알 만수르(아부 자파르)는 시아파가 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긴 했지만 아바스 가문의 세습 집권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제3차 피트나 성공에 큰 기여를 했지만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여기던 아부 무슬림을 살해했고, 이에 반발한 아부 무슬림의 추종자들을 섬멸했다. 이후 시아파를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아바스 왕족과 비아랍 무슬림들을 요직에 대거 기용했으며, 시아파 지도부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며 그들을 모조리 체포해 처형했다. 이에 시아파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조리 진압당했고, 잔여 세력은 마그레브(현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와 아라비아 반도 남부, 이란 북부 등지로 흩어졌다.

이렇듯 각지의 반란을 모조리 제압한 뒤, 우마이야 역대 칼리파들의 왕릉을 모조리 파헤치고 시신을 짓밟음으로서 이전 정권을 철저히 부정했다. 다만 우마르 2세의 무덤만은 보전하게 했는데, 이는 비아랍 무슬림들을 공정하게 대한 우마르 2세를 인정하며 자신 역시 그를 본받겠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알 만수르는 학문적으로 뛰어났던 이란인들을 중용했고, 개종자들에게도 여전히 지즈야를 부과하던 악습을 폐지해 비아랍인들의 개종을 유도했다. 그 결과, 아바스 제국내의 무슬림 비율은 그의 치세 동안 8%에서 15%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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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바그다드의 모습.

알 만수르는 치세 초기엔 쿠파에서 권력을 행사했지만, 반란을 모두 평정한 뒤 쿠파에 시아파가 들끓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수도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768년, 티그리스 강의 서쪽 강둑에 마디나트 앗 살람(Madinat as-Salam: 평화의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지름 약 2.4km, 둘레 10km의 원형 도시는 쿠파, 시리아, 호라산, 바스라라는 이름의 4개의 문이 있는 이중 방어벽으로 둘러싸였다. 알 만수르는 칼리파의 궁전과 주요 모스크를 도시 중앙에 세우게 했다. 하지만 그가 지은 이름은 서류상에서만 유지되었고, 나중에는 기존의 지명인 바그다드로 대체되어 현재에 이른다.

새 수도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몰려온 다양한 신앙과 문화를 가진 남녀들로 가득찼다. 바그다드에는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 조로아스터교인, 유대인 등이 있었는데, 모두 아랍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또한 농업 진흥 정책, 과학 후원, 체계적인 관료 제도 구축 등 여러 정책을 단행했으며, 천문학, 수학, 의학, 철학, 등 여러 분야의 저서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특히 이란 서적 번역은 아바스 왕조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그의 이같은 정책은 훗날 바그다드가 학문과 과학의 세계적인 중심지로 거듭나는 배경이 되었다.

한편, 알 만수르는 그동안 우마이야 왕조 타도와 내전 수습에 치중하느라 외세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치중했던 정책을 공세로 전환했다. 동로마 제국령 아나톨리아에 습격대를 잇따라 파견하여 약탈을 일삼게 했으며, 763년 후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기 위해 토벌대를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세 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스 5세의 지휘하에 무슬림군을 번번이 격퇴했고,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된 토벌대는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에게 대패했다. 그는 암살자를 잇따라 보내 라흐만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그는 라흐만을 "쿠라이시의 매"라고 불렀다고 한다.

알 만수르는 당초 칼리파로 즉위할 때 이복형 이브라힘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이사 이븐 무사를 후계자로 삼기로 약속했다. 이사 이븐 무사는 763년 시아파 이맘인 알리 자인 알 아비딘의 아들 이브라힘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라크 서남부에 궁전을 세우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알 만수르는 자신의 아들인 무함마드 알 마흐디를 후계자로 세울 계획을 품고, 파르스 총독 할리드를 시켜 이사를 뒷조사하게 했다. 할리드는 부정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이사를 고발했고, 이사는 무함마드 알 마흐디에게 쿠파 총독 자리를 내놓고 은거했다. 할리드는 이 공적으로 중용받았고, 그의 바르마크 가문은 약 40여년간 권세를 누렸다.

4. 무함마드 알 마흐디(775 ~ 785)

775년 10월 6일, 압둘라 알 만수르메카 순례를 떠났다가 도중에 병사했고 아들 무함마드 알 마흐디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알 마흐디는 칼리파가 된 직후 이란인 아부 우바이달라 무아위야를 와지르로 임명하고 사산 왕조의 화려한 의식과 궁정 관습을 도입했다. 그는 궁정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시녀들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신하들은 칼리파에게 의견을 개진할 때 직접 만나지 못하고 환관을 통해 전달해야 했다. 무야위야는 권력을 잡은 뒤 조세 개혁을 추진해 농민에 대한 고정세금이 연간 수확량과 시장의 가격 변동을 고려한 비례 과세 체계로 대체되었다.

780년, 알 마흐디는 무야위야를 야쿱 이븐 다우드로 교체했다. 야쿱은 시아파 인사로, 지난날 압둘라 알 만수르를 상대로 발발한 시아파 반란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야쿱을 와지르로 선임해 앞으로는 시아파를 탄압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이후 시아파는 예전과는 달리 당국의 가혹한 박해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를 어느정도 누릴 수 있었다. '알 마흐디'(المهدي: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는 자신들을 복권시켜준 것에 감명받은 시아파가 붙여준 별칭이었다. 다만 야쿱은 783년에 물러났고 아히야 이븐 칼리드가 와지르에 선임되었다. 이후 바르마크 가문이 와지르를 독점하면서 강력한 권세를 누렸다.

알 마흐디는 고대 이란의 전통을 선호했지만 이슬람교 지도자로서도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슬람교를 각지에 전파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종종 모스크에서 직접 설교했다. 고위 관리를 위해 모스크의 울타리 구역을 없앴고, 메카와 메디나의 모스크를 재건했으며, 루사파와 바스라에 새 모스크를 세웠다. 또한 마니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이란인들을 탄압했다. 이에 '호람딘'으로 일컬어진 이교 집단이 776년 북부 이란에서 알 무카나의 지도하에 반란을 일으켜 783년까지 항전했지만 끝내 토벌되었다. 또한 시아파에 대한 온건 정책에도 불구하고 785년 아라비아 반도의 서부 히자즈에서 시아파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에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778년,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4세가 아나톨리아 주둔 군대에 시리아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로마군은 즉시 출동해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무슬림 분견대를 격파하고 시리아에 거주하던 수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을 트라키아에 강제 이주시켰다. 알 마흐디는 이에 보복하고자 779년 아시아 테마에 공격을 가했으나 격퇴되었다.

780년, 알 마흐디는 하룬 알 라시드에게 10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맡겨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게 했다. 물론 당시 17살이었던 하룬이 군대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고 아히야 이븐 칼리드가 실권을 행사했다. 무슬림 군대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고, 782년 아르메니아 장군 타차테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어린 콘스탄티노스 6세를 대신하여 통치하던 이리니 황태후는 아바스 왕조의 압박을 모면하기 위해 향후 3년간 매년 70,000 디나르를 바치고 칼리파에 경의를 표하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알 마흐디의 치세에 북아프리카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카와리즈파는 777년 북아프리카의 타헤타(타헤르트)를 수도로 삼고 루스탐 왕조를 건국했다.

5. 황금기(786 ~ 861)

5.1. 하룬 알 라시드(786 ~ 809)

785년 7월 24일 무함마드 알 마흐디가 의문사한 뒤 새 칼리파에 오른 알 하디는 어머니 카이주란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동생 하룬 알 라시드를 견제하며, 자신의 아들 자파르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으나 786년 9월 14일 재위 1년 3개월만에 급사했다. 뒤이어 칼리파에 등극한 하룬 알 라시드는 즉위 직후 바그다드 대모스크에서 금요일 기도를 주관한 뒤 관리들과 평신도들의 충성 맹세('바이아')를 받아냈다. 이후 알 하디 시대의 고관들과 총독들을 대거 축출하고 야히야 이븐 칼리드 등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로 교체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초기에는 모후 카이주란과 야히야 이븐 칼리드에 의해 억제되었고, 전반적인 통치는 모후 카이주란이 주도했다.

788년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의 장남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 야히야가 이란 북부 타바리스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카이주란은 즉시 50,000명에 달하는 토벌대를 야히야 이븐 칼리드에게 맡겨 진압하게 했다. 하지만 같은 무슬림끼리 피를 보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야히야 이븐 칼리드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반란을 일으킨 행위를 사면해줄 테니 귀순하라고 권고했다. 알리의 후손 야히야는 이길 가망이 없다는 걸 파악하고 항복한 뒤 바그다드로 후송되어 한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5개월 후 긴급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뒤 가혹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789년 어머니 카이주란이 사망하면서 비로소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하룬은 내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비툴 히크마'(지혜의 집)을 세우고 학자들을 그곳에 배속시켜서 국정에 관한 조언을 하게 했으며 법학가, 시인, 수학자, 과학자, 음악가 등 다방면의 뛰어난 인물들을 궁정에 들였다. 특히 이슬람 세계의 화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븐 하이얀이 이 시기에 하룬의 궁정에서 활약했다. 또한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데모스테네스, 피타고라스, 갈레노스 등 고대의 그리스•로마 현인들이 집필한 저서들을 번역했으며, 인도로부터 인도 숫자와 0의 개념, 《아유르베다》 의학 등을 수입하고 중국으로부터 연금술과 종이, 비단, 도자기 기술을 습득했다. 이렇듯 그의 통치 아래 예술과 문화가 융성하고 유능한 관리들이 국정을 잘 이끌면서, 아바스 왕조의 국력은 갈수록 강력해졌고, 수도 바그다드는 당대에 가장 화려한 도시로 번영했다.

796년, 하룬은 유프라테스 강 중류 지대의 라카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그는 바그다드를 딱 한 번 방문했다. 라카는 동로마 제국 국경과 근접해서 동로마군이 쳐들어올 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고, 유프라테스 강을 통해 바그다드와 접하며, 발리크 강을 통해 다마스쿠스로 이어지는 훌륭한 연락망을 구축할 수 있었고, 풍부한 농경지를 보유하여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발발할 수 있는 반란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다시 호라산의 수도인 레이로 이동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통치했다. 그는 제국 전체의 관리를 위해 스승이자 오랜 동료인 야히야 이븐 칼리드에게 의지했고, 야히야와 아들들을 비롯한 바르마크 가문 인사들은 그가 맡긴 임무를 17년간 충실하게 수행했다. 또한 각 도시에는 자체 법 집행기관이 세워져 질서를 유지했고, 도박, 고리대금, 술 판매와 같은 불법 행위를 단속하는 기관도 수립되었다.

하룬은 동로마 제국에 대한 지하드를 종종 선포해 아나톨리아에 대한 약탈 원정을 보냈다. 802년 이리니 여제를 몰아내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니키포로스 1세가 그동안 바치던 조공을 더이상 보내지 않겠다고 통보하자, 803년에 친히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나톨리아를 침공해 동로마군을 크게 격파하고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러나 805년 니키포로스 1세가 또다시 평화 조약을 파기하자, 그는 크게 분노하여 14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806년까지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다. 이에 니키포로스 1세는 조공을 다시 바치겠으니 군대를 물려달라고 부탁했고, 당시 호라산 일대에 쳐들어온 튀르크족을 물리쳐야 했던 하룬은 이를 받아들이고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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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가 보낸 사절을 알현하는 하룬 알 라시드. 맨 왼쪽 순백의 옷을 입은 인물이 하룬 알 라시드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무력 충돌을 벌이면서,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마 제국의 황제에 오른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와 동맹을 맺고 코끼리를 보내줬다. 카롤루스는 코끼리를 보고 감명받은 나머지 자신의 수의에 코끼리 무늬를 넣을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당나라에 사절을 보내 무역 관계를 맺었다. 당나라 측 기록에서는 하룬을 '아룬'이라고 지칭하며 서쪽에서 위세를 떨치는 강력한 군주로 묘사했다.

그러나 하룬의 치세는 잦은 반란으로 혼란스럽기도 했다. 789년 모로코에서 시아파가 현지 베르베르인들을 포섭하여 이드리스 왕조을 건국해 아바스 왕조로부터 떨어져 나갔으며, 예멘에서는 795년 주민들이 아바스 왕조의 총독 무함마드 알 바르바디에 대항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804년까지 이어졌다. 이집트에서는 하르타마 벤 아히야가 지휘하는 이프리키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행정에서 몇 차례 실책이 벌어지는 바람에 분노한 주민들이 788년과 794~795년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현재 튀니지에 해당하는 이프리키야 역시 끊임없는 소요에 시달렸고, 하룬은 직접 통치로는 도저히 답이 없다고 판단해 800년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를 이프리키야의 세습 에미르로 세워서 자체적으로 다스리게 했다. 이브라힘과 후손들은 아글라브 토후국을 세우고 아바스 왕조를 종주국으로 섬기면서도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시리아에서는 우마이야 왕조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이들이 아바스 왕조에 대항하여 수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가 796년 파드힐 이븐 야히야에게 완전히 진압되었다. 카와리즈파 역시 데이람, 케르만, 파르스, 시스탄, 호라산에서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듯 반란이 잦은 데엔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민중의 불만, 카와리즈파시아파 등 반체제 종교 집단의 준동, 비아랍인이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한 아랍인들의 반감 등 여러 요인이 있었다. 하룬은 이에 대응하여 반란군을 가차없이 진압하고 시아파의 제7대 이맘인 무사 이븐 자파르를 바그다드의 지하 감옥에 수감한 뒤 독살했다.

한편, 야히야 이븐 칼리드가 무함마드 알 마흐디 치세에 재상으로 선임된 이래, 바르마크 가문은 아바스 왕조 밑에서 여러 고관과 총독을 배출하며 여러 칼리파의 통치를 도왔다. 하룬 역시 그들을 우대했는데, 특히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자파르 이븐 야히야는 '술탄'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국정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803년, 하룬은 바르마크 가문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여기고 그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808년, 라피 이븐 알 레이트가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사마르칸트에서 시작하여 호라산 전역에 확산되었다. 하룬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호라산으로 진군했으나 쉽사리 제압하지 못하다가 809년 3월 중순, 투스의 사나바드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병에 걸렸고, 호라산의 여름 별궁 다르 알 이마라에서 붕어했다.

5.2. 제4차 피트나(811 ~ 813)

하룬 알 라시드는 생전에 정실 아내 주바이다에게서 알 아민을 낳았고, 첩 마라질에게서 알 마문을 낳았다. 마라질은 알 마문을 낳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알 마문은 주바이다의 양자가 되어 알 아민과 함께 성장했다. 나이순으로는 알 마문이 맏아들이었지만, 첩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차남 알 아민이 787년 4월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하룬은 혹여 두 아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내전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사전에 조치를 취했다. 799년 일가족과 함께 메카 순례를 떠난 그는 카바 앞에서 알 마문을 알 아민의 뒤를 이을 두 번째 후계자로 지명했고, 또다른 아들인 알 카심을 세번째 후계자로 지명했다. 또한 자신이 죽으면 알 마문이 호라산 지방을 다스리고 알 아민은 나머지 지역을 다스리도록 했다.

809년 3월 하룬이 붕어한 뒤, 알 아민이 예정대로 칼리파에 등극했다. 하룬으로부터 알 아민의 보좌 임무를 맡은 알 파딜은 호라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가져온 군인 급료를 바그다드로 돌려보내서 알 아민이 직접 군대에 사려금으로 지급하게 했다. 알 마문은 알 파딜에게 하룬의 개인 유산을 자신에게 양도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알 파딜은 "지금은 때가 좋지 않다"며 거절했다. 이 일로 알 마문의 미움을 사자, 알 파딜은 만약 알 마문이 칼리파에 등극하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여기고 알 마문의 제위 계승권을 박탈하고자 음모를 꾸몄다.

알 아민은 처음에는 아버지 하룬이 카바 앞에서 한 서약을 준수하여 형 알 마문을 트란스옥시아나로 보내 그곳에 주둔한 군대를 이끌게 했다. 하지만 알 아민은 알 파딜의 참소를 듣고 알 마문을 의심하여 정보국 관리를 메르브로 보내 알 마문의 동태를 매일 알리게 했다. 이후 알 마문에게 라이, 쿠미스, 타바리스탄 정부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지시하며, 해당 지역의 세금 수입은 호라산에 주둔한 군대를 지원하기에는 너무 적지만 바그다드에 주둔한 군대를 지원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알 마문은 이를 거부하고 호라산에서 주조되는 동전에 칼리파의 이름을 생략한채 "알 이맘 알 후다"(올바른 길)라는 문구를 추가하게 하여, 메카에서 맺은 서약을 준수하라는 뜻을 공공연히 밝혔다. 이복형이 자신의 명령에 거부하자, 알 아민은 알 마문의 제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아들 무사를 차기 후계자로 지명했다.

알 타바리에 따르면, 알 아민은 알 마문을 징벌하고자 50,000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알 마문은 이에 맞서 20,000명에서 25,000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2배 이상의 전력이었지만, 토벌대는 레이에서 알 마문에게 참패했다. 알 마문은 이 때부터 자신이 속한 영토에서 "무슬림의 지휘관이자 이맘"이라고 자칭했다. 한편, 알 아민은 시리아에서 반란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접하자 아브드 알 말리크 이븐 살라흐를 그 곳에 보내 질서를 회복하게 했다. 그러나 아브드 알 말리크는 반란군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 이후 알 마문을 토벌하기 위해 아흐마드 이븐 마즈야드와 압둘라 이븐 후마이드를 보냈지만, 두 장군이 불화를 일으키고 서로 싸우면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알리 이븐 이사의 아들 후세인이 바그다드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그다드 정규군은 방관했고, 시민들이 민병대를 결성해 대신 진압했다.

이렇듯 알 아민이 군대의 신망을 잃고 위신이 땅에 떨어진 틈을 타, 알 마문은 811년부터 813년까지 이라크 각지를 공략하고 812년부터 바그다드를 포위 공격했다. 바그다드에 잔존한 알 아민의 지지자들은 1년간 완고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도시에 기근이 들면서 수비대는 차츰 기력이 쇠진했고, 813년 가을 알 마문의 병사들이 점차 바그다드의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게다가 감옥을 탈출한 죄수들이 거리 곳곳을 불태우며 난동을 부렸다. 결국 더 저항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알 아민은 안전한 탈출을 위해 협상을 시도했다. 알 아민은 칼리파의 홀, 인장 및 여러 상징물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사면해달라고 청했고, 알 마문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알 아민은 칼리파의 상징물들을 선박에 싣고 티그리스 강을 통해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발각되어 알 마문의 장교들에게 체포되었고 곧 처형되었다. 그의 수급은 한동안 안바르 성문에 전시되었다. 이후 알 마문이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5.3. 알 마문(813 ~ 833)

알 마문은 2년간의 내전 끝에 동생 알 아민을 처단하고 칼리파에 올랐지만, 이라크에서 몇년 간 소요사태가 빗발쳤기 때문에 자신의 근거지인 호라산의 수도 메르브에 머물렀다. 바그다드에서는 법률 집행이 수년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치안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 시아파의 일파인 자이드파의 지도자 시리가 반란을 일으켜 이라크 총독 핫산을 물리치고 한때 이라크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에 알 마문의 와지르 하르타마가 출진해 자이드파를 잔압한 뒤, 다른 와지르인 이븐 사울의 동생이자 이라크 총독 핫산의 착취를 지적했다. 처벌을 두려워 한 핫산은 형 사울에게 도움을 청했고, 사울은 알 마문에게 하르타마를 모함했다. 그는 사울의 모함에 넘어갔고, 816년 공신 하르타마를 처형했다.

한편, 카르발라에서 살해된 후세인 이븐 알리의 아들 알리에게는 바키르와 자이드가 있었다. 자이드는 5이맘파의 지지를 받아 쿠파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히샴에게 저항했다가 피살되었고, 바카르는 나머지 7이맘파의 지지를 받았다. 바카르의 아들이자 시아파의 제6대 이맘인 자파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이스마일은 7이맘파, 즉 이스마일리의 마지막 이맘이 되었고, 둘째 무사는 12이맘파의 제7대 이맘으로서 그의 후손들이 12이맘파의 8~12대 이맘이 되었다. 남은 셋째 아들 무함마드는 자이드파의 반란에 자극을 받았고 알 마문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듣게 되자 815년 11월 13일 메카에서 '마흐디'(구세주)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고, 그는 대중 앞에서 공개 사과한 후 메카에서 추방되었다.

시아파의 반란이 게속되자, 알 마문은 그들과 화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아파의 제8대 이맘인 알리 알 릿다를 메르프로 초대한 뒤 알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면서 딸 옴 하비브를 알리와 결혼시켰으며, 아바스 왕가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시아파의 상징인 초록 깃발로 바꾸고 동전에 레자의 이름을 새겼다. 또한 자신의 씨족에 속한 30,000명에게 연금을 수여했다. 그가 이런 조치를 내린 것은 아바스 왕조의 본거지였던 이란 대부분 지역이 시아파에 동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그다드에서는 아바스 왕조의 일원인 알 마문이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려 든다며 분노했고, 815년 하룬 알 라시드의 이복동생 이브라힘 이븐 알 마흐디를 칼리파로 추대했다. 이후 3년이 지나도록 바그다드의 반란이 잠재워지지 않자, 세간에서는 알 마문의 와지르 이븐 사울이 이브라힘을 봐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알 마문은 818년 봄 바그다드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해 4월 바그다드로 향하던 그는 이란의 투스에 있는 부황 하룬 알 라시드의 영묘를 참배했다. 그러다가 돌연 명령을 내려 자신을 따라오던 알리 이븐 무사를 독살하고, 메르프에 사람을 보내 이븐 사울을 처형했다. 시아파 측은 이 일에 대해 알 마문을 사악한 자라고 비난했지만, 수니파 측은 그가 나중에 후회했으며 마슈하드에 살해된 이맘을 위한 모스크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여정을 이어간 알 마문은 바그다드를 포위했고, 이브라힘은 819년 8월에 투항했다. 칼리파는 바그다드에 입성했을 때 초록 도포를 입었지만, 바그다드 시민들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1주일 후 검은 옷을 입었다. 그러면서 이븐 사울의 동생 핫산을 와지르로 임명했으나, 그는 형처럼 될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은퇴했다. 이후에도 각지에서 반란이 빗발쳤다. 825년, 압둘라 이븐 타히르는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이집트를 탈환하고 스페인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알렉산드리아를 해방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크레타 섬으로 이주했는데, 9~10세기의 이슬람 역사가 알 타바리는 그들의 후손이 자신의 시대에도 크레타 섬에 살고 있다고 기록했다.

알 마문은 타히르의 공적을 인정하여 호라산 총독으로 선임했다. 타히르는 바그다드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821년 '에미르'를 칭하고 자체적으로 세력을 일으키는 것이 허락되었다. 역사학계는 타히르의 에미르 정권을 가리켜 타히르 왕조라고 칭한다. 한편 819년 트란스옥시아나에서는 사만 가문이 각지의 반란으로 혼란에 빠진 아바스 왕조를 대신하여 주민들을 다스렸다. 이들은 알 마문의 시대에는 충실한 신하로 남았지만, 훗날 아바스 왕조가 내우외환으로 급격하게 쇠락해지자 자신들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제28대 샤한샤 바흐람 추빈의 후예로 사산 왕조의 위업을 잇겠다고 선언하며 사만 왕조를 건국했다.

이 시기에 이란 북부의 에서 과중한 세금에 대해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예멘에서도 827년과 829년에 봉기가 두 차례 일어났으며, 인도 북서부 신드 일대는 831년 가산 이븐 아바스에게 정복될 때까지 아바스 왕조에 대해 반항을 일삼았다. 한편 이란에서는 바박 호람딘이 이끄는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816/817년에 봉기했다. 알 마문은 이 봉기를 제압하려 했으나 숱한 패배를 당했고, 끝내 죽을 때까지 바박을 물리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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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집의 재현 상상도.

이렇듯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는 한편, 알 마문은 819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진 뒤 내치에 몰두했다. 먼저 이슬람 법률을 제정하고 일종의 법학교인 '울레마'가 신설되었다. 수니파 법학은 이 시기에 이르러 정립되었고,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교리적 차이는 더욱 뚜렷해졌다. 또한 하룬 알 라시드 치세 때 처음 도입된 '비툴 히크마'(지혜의 집)를 본격적으로 활성화해 고대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알 마문은 많은 번역가를 고용했고, 많은 학자를 후원했다. 그들 중 한 명인 알 콰리즈미는 "대수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이전에는 학자들이 고립된 채 연구했지만, 이제는 한 곳에 모여 서로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학문의 발전이 가속화되었고, 대화 주제는 종교 문제에서 사랑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알 마문의 궁정은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유대인, 조로아스터교도 등도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수용했다. 심지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무타질라 학파까지 생겨날 정도. 알 마문은 유클리드아리스토텔레스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는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꿈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후세에는 이 시기의 학문 발전에 대해 이슬람 황금기라고 칭할 정도.

알 마문은 이 많은 책들을 보관하기 위해 지혜의 집을 바그다드에 세웠다. 이곳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된 이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또한 그는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 메소포타미아 평야에서 직접 하늘을 관찰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했으며, 832년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가자의 대피라미드에 터널을 뚫어서 내부를 살펴보기도 했다.

알 마문은 말년에 <미흐나>를 발표했다. <미흐나>(Mihna) 또는 <서약>은 신앙심과 충성심을 시험하는 조사로, 이슬람교 신학과 칼리파에 대한 충섬심을 시험했다. 중앙 관리, 학자, 종교인, 판사, 지방 관료들은 필수적으로 이 시험을 봐야 했고, 시험에서 떨어질 경우에는 사형을 포함한 중벌을 받아야 했다. <미흐나>에 도입된 신학은 무타잘리 학파를 기반으로 했다. 무타잘리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그리스 합리주의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믿음과 실천의 문제는 《쿠란》에 근거하여 추론을 통해 결정해야 했다.

기존의 수니파 신학자들은 그리스 이교주의에 기반을 두고 신앙을 따지는 것에 불쾌해했다. 또한 무타잘리 학파는 《쿠란》은 영원하다기보다는 창조된다고 여겼는데, 이 역시 《쿠란》은 영원불멸하다는 수니파 신학자들의 반감을 샀다. 하지만 알 마문은 신학자들을 통제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이들을 지원했고, 이로 인해 많은 이가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미흐나>는 후대 칼리파인 알 무타심알 와시크의 시대까지 이어졌으나 847년에 제위에 오른 알 무타와킬에 의해 폐지되었다.

알 마문은 즉위 이래 수많은 반란을 수습하느라 외세를 상대로 소극적으로 처신했고, 동로마 제국군은 이 틈을 타 아바스 왕조의 영역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영역으로 강제로 정착시켰다. 그러던 820년, 슬라브인 토마스미하일 2세를 상대로 80,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 반란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슬람 세력은 이 때를 틈타 동로마 제국을 연이어 공격해 시칠리아와 크레타를 침략했다. 크레타는 아랍 세력의 수중에 쉽게 들어갔지만, 시칠리아에서는 현지 동로마군과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격퇴되었다.

829년 미하일 2세 사후 황위에 오른 테오필로스는 재위 내내 아랍 세력과 전쟁을 치렀다. 830년, 아랍인들은 시칠리아로 돌아와 팔레르모를 공략하고 자신들의 거점으로 삼았다. 한편 알 마문은 830년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가 타우루스 산맥의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지난날 동로마 제국으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도로 아바스 왕조의 영역으로 데려갔다. 테오필로스는 이에 맞서 831년 타르수스를 공략하고 무슬림 1,600명을 살해했다. 그해 가을 아랍군이 반격을 가하여 카파도키아에 주둔한 동로마군을 격파했다. 833년, 알 마문이 재차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동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테오필로스는 사정이 나빠지자 금화 100,000개와 아랍 포로 7,000명을 석방하는 대가로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연이은 전쟁을 치렀지만, 그 와중에도 문화 교류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가장 유명한 필사본들을 모아서 아랍어로 번역하게 했다. 또한 알 마문은 평화조약을 맺는 조건으로 테오필로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수학 논문인 《알마게스트》의 사본을 넘겨주는 것을 내걸기도 했다.

5.4. 알 무타심(833 ~ 842)

833년 9월 7일, 알 마문이 타르수스 인근에서 붕어했다. 알 마문은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이며 군대와 민중에게 인기가 많았던 알 아바스가 아닌 이복 동생인 알 무타심을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알 무타심은 즉시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기 위해 티아나에 집결했던 군대를 바그다드로 철수시켰다. 또한 이샤크 이븐 이브라힘 이븐 무사를 보내 하마단 인근에서 발발한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이샤크는 임무를 무사히 수행했고, 반란군 잔여병은 동로마 제국으로 도피했다. 한편, 알 아바스는 알 무타심에게 기꺼이 충성 선서를 했다. 병사들은 알 아바스를 칼리파로 세우려 했지만, 아바스는
"이 무의미한 헌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이미 삼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라며 거부했다.

834~835년, 무함마드 이븐 알 카심이 호라산에서 시아파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토벌대에게 패배한 뒤 생포되어 바그다드의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카심은 곧 탈옥했지만 다시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우제이프 이븐 안바사가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 하류에 거주하던 주트 부족을 물리쳤다. 우제이프는 이듬해에 그들을 배에 실은 채 그 앞에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선보였다. 주트 부족은 동로마 제국 국경으로 보내져 최전선에서 적군과 맞서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까다로운 반란이 있었으니, 바로 이란과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봉기한 바박 호람딘이었다. 바박은 816/817년에 봉기한 이래 20여 년간 토벌대를 모조리 물리치고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키는 등 아바스 왕조의 골치거리가 되었다. 알 무타심은 알 아프신 카이다르 이븐 카우스에게 이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알 아프신은 신중하면서도 꾸준한 공세를 벌인 끝에 837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바박은 체포된 뒤 838년 사마라로 끌려가 공개 처형된 후 수급이 호라산으로 보내졌다.

837년,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필로스가 7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휩쓸며 사모사타를 함락시키고 멜리테네(말라티야)를 조공 도시로 만들었다. 838년, 알 무타심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타르수스에 80,000명의 대군을 집결시킨 뒤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갔다. 아바스군은 칼과 방패에 테오필로스 가문의 고향인 아모리움 글자를 새겨 복수 의지를 다졌다. 이들은 알 아프신과 칼리파 알 무타심의 부대로 나뉘었다. 알 아프신의 부대는 카파도키아로 진군했고, 칼리파의 부대는 칼라키아 관문을 통해 진격했다.

테오필로스는 두 부대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토카트 인근의 다지몬(얀첸)에서 알 아프신의 군대와 대적했다. 당시 동로마군에 귀순한 뒤 용맹을 떨쳤던 아르메니아 장군 테오포보스가 이 전투에서 맹활약하여 아바스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튀르크 궁기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돌격하는 동로마 대열을 파괴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게다가 테오필로스가 말을 잃고 친위대와 함께 동분서주할 때, 병사들이 황제가 보이지 않자 죽은 줄 알고 전의를 상실하며 도주해버렸다. 결국 이 다지몬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완패했고, 아바스군은 여세를 몰아 앙카라를 공략한 뒤 아모리움을 포위해 2주만에 함락시키고 70,000명에 달하는 시민 중 절반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에로 끌고 갔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고 귀환한 알 무타심은 선제 알 마문의 아들 알 아바스가 주변인들의 권고에 따라 칼리파를 찬탈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 무타심은 즉시 알 사흐르 이븐 샤히, 아므르 알 파르하나, 우제이프 이븐 안바사, 아흐마드 이븐 알 할릴을 처형했고, 아바스는 감옥에 갇힌 뒤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 후 알 무타심은 알 아바스의 반역에 대거 연루되었던 아랍인 장성들을 불신하고, 어머니의 동족인 튀르크 출신 장성들을 우대했다. 특히 4,000명의 노예 튀르크인들을 소집하여 '길만'(ghilman)이라는 이름의 호위 부대를 결성해 자신을 경호하게 했다. 또한 반 튀르크 정서가 팽배한 바그다드에서 사마라로 수도를 옮겼다. 사마라는 892년 알 무타디드가 바그다드로 복귀할 때까지 아바스 왕조의 수도로 활동했다.

한편, 이전 칼리파 알 마문의 치세 때 호라산을 영지로 삼았던 타히르 왕조는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 사마르칸트, 파르하나, 헤라트의 총독직을 확보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마자르 이븐 카린이 838년 압둘라 이븐 타히르 총독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스피 해 일대의 세금을 타히르 왕조 대신 알 무타심의 대리인에게 직접 납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자르는 사리야인들을 투옥하고 아물 성벽을 허물었으며, 타미스를 요새화하고 유르잔 일대의 치안을 어지럽혔다. 압둘라 이븐 타히르는 이를 토벌하고자 하이얀 이븐 자발라를 파견했다. 하이얀은 마자르의 부관 카린 이븐 샤흐리야르를 회유해 마자르를 배신하게 했다. 여기에 사리야 사람들이 마자르에 대항하여 봉기했고, 하이얀은 사리야에 도착하여 합세한 뒤 와다후르무즈 산맥으로 진격하여 마자르의 재산 일부를 확보했다. 결국 세력을 잃은 마자르는 곧 사로잡힌 뒤 사마라로 후송되었다.

이때 하이얀은 다지몬 전투의 영웅 알 아프신이 마자르에게 보낸 서신을 확보하여 아바스 왕조의 수도 사마라에 보냈다. 한편, 알 아프신은 칼리파 알 무타심의 결혼 축하 행사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알 아프신의 친척인 민카주르가 아다르바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생포되었다. 이 일로 의심을 받던 알 아프신은 하이얀의 서신이 도착하자 칼리파 알 무타심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마자르는 아프신이 바박을 토벌할 때 바박이 가지고 있었던 재산을 자신의 영지인 우슈루사나로 옮겼으며, 바박의 조로아스터교 신앙서들을 번역하여 가지고 다녔다고 진술했다. 알 아프신은 억울하다고 호소했지만, 칼리파는 묵살하고 특별 감옥에 수감시킨 뒤 841년 5월 또는 6월에 처형했다.

알 무타심은 일생 내내 전쟁을 치렀고, 하룬 알 라시드와 알 마문에 비해 학문에 대한 열의는 없었다. 그렇지만 학자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지속했고, 바그다드는 비록 수도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예술과 문화, 학문의 중심지로 남았으며,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지적 풍토에서 번역가, 가정교사 등으로 활동했다. 알 무타심의 통치 기간 동안 활동한 학자 중에는 천문학자 하바시 알하시브 알마르와지, 아흐마드 알 파르가니, 박물학자 알 자히즈, 그리고 저명한 아랍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칼리파에게 첫 번째 철학서를 바친 알 킨디가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 신자이자 의사이며 번역가인 후냐인 이븐 이사크도 이 시기에 활동했고, 후냐인을 후원한 네스토리우스교 의사 의사 살마웨이 이븐 부난은 알 무타심의 궁정 의사가 되었다. 살마웨이의 라이벌이며 역시 네스토리우스교 의사인 이븐 마사웨이는 해부학 저서를 칼리파에게 바쳤다.

한편, 알 무타심은 알 마문 이래로 이슬람 신학의 주요 교리가 된 무타잘리 학파를 "《쿠란》의 영원불멸을 믿지 않는 이단"이라며 받아들이길 거부한 아흐마드 빈 한발을 체포하고 무타잘리 학파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했고, 한발이 끝까지 거부하자 감옥에 투옥시켰다. 그러나 한발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훗날 한발리파를 결성했다.

841년 10월 21일, 알 무타심은 중병에 걸렸다. 그의 주치의였던 살마웨이 이븐 부난은 작년에 사망했고, 새로운 의사는 정상적인 치료를 따르지 않아 병이 더욱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842년 1월 5일 임종을 눈앞에 둔 그는 아들 알 와시크에게 칼리파 직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붕어했다.

5.5. 알 와시크(842 ~ 847)

알 무타심 사후 칼리파에 즉위한 알 와시크는 843~844년에 아버지의 치세 때 권세를 누린 관료 일부를 체포하여 그동안 빼돌린 국고를 내놓을 때까지 고문을 가하고 직위해제시켰다. 그 빈자리엔 신진 관료를 임명했는데, 그 중엔 튀르크 출신 인사들도 있었다. 844~845년, 알 와시크는 튀르크 장군 중 한 명인 부그하 알 카비르에게 아라비아의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부그하는 즉시 아라비아로 출진해 반란군을 제압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또한 쿠르드족이 이스파한, 지발, 파르스에서 벌인 반란을 진압했다.

846년, 바그다드에서 아흐마드 이븐 나스르 이븐 말리크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븐 말리크는 오랫동안 아바스 왕조를 지지한 가문이었지만, 아흐마드는 알 마문, 알 무타심처럼 알 와시크가 지원하는 무타잘리 학파에 반대했다. 그들은 846년 4월 4일 밤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신호를 보내야 할 이들이 날짜를 착각하여 하루 일찍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당국이 눈치채고 철저히 수사했으며, 아흐마드는 곧 체포된 뒤 사마라로 끌려갔다. 칼리파는 그를 친히 심문했지만, 반란 계획보다는 종교적 신념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알 와시크는 아흐마드가 추종하는 한발리파가 너무도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이라서 따를 게 못 된다고 밝힌 뒤, 손수 '삼사마'(Samsama)라는 이름의 검을 사용하여 아흐마드의 목을 베었다.

같은 해 사마라의 궁정 금고에 도둑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42,000 디르함과 소량의 디나르를 훔치고 달아났다. 금고 책임자 야지드 알 후와니는 이들을 끝까지 추격해 모조리 체포했고, 도둑들은 전원 처형되었다. 846~847년, 알 와시크는 바누 누마이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부그하 알 카비르를 보냈다. 847년 2월 4일, 부그하는 알야마마에서 바누 누마이르와 교전했다. 초기에는 적의 강력한 공세로 인해 아바스 군대가 거의 붕괴될 뻔했다. 하지만 적의 후방으로 비밀리에 이동시켰던 별동대가 돌아와서 바누 누마이르의 후위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반란군은 괴멸되었고, 부그하는 아라비아 사막 지대를 종횡무진하며 2,200명이 넘는 베두인들을 체포한 뒤 847년 6월 또는 7월에 바스라로 귀환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알 무타심의 붕어 이후 크레타를 재탈환하려 노력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844년, 말라티아에미르 우마르가 이끄는 아바스군이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영역 깊숙히 침입하여 보스포로스 해안까지 이동했다. 이후 우마르는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비슷한 시기에 동로마 제국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박해받은 파울리키아파가 지도자 카르베아스의 인솔하에 아바스 왕조에 망명했다. 그들은 아바스-동로마 국경 지대에서 테프리케 요새를 중심으로 파울리키아 공국을 세우고, 아랍인들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수시로 공격했다.

845년, 알 와시크는 동로마 제국과 포로 교환을 하여 4,362명의 무슬림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것은 알 아민이 809년 또는 810년에 동로마 제국과 포로 교환을 한 이래 30여 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해 3월 아모리온에서 포로로 잡힌 42명의 동로마군 장교들이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거부한 후 사마라에서 처형되었다. 그 후 포로 교환을 위한 임시 휴전이 끝나자, 아바스 왕조의 타르수스 총독 아흐마드 이븐 사이드 이븐 살람은 845년 겨울 7,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러나 원정은 수많은 병사가 동사하거나 익사하고 상당수가 포로로 잡히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양국은 6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한편, 시칠리아에서는 아바스 왕조를 형식적이나마 종주국으로 받드는 아글라브 왕조가 메시나, 모디카, 레온티니를 점령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지배권을 서서히 밀어냈다. 이들은 845년 또는 846년에 이탈리아 본토의 나폴리 인근 미시노를 점령했고, 티베르 강에 출몰하며 로마의 주변 일대를 약탈했다.

알 와시크는 부황 알 무타심과는 달리 학문에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음악에 재능을 갖춰 100곡이 넘는 노래를 작곡했다. 기독교인, 특히 네스토리우스교 신자들과 유대인은 개방적인 지적 환경에서 계속 활약했고, 궁정에서 일하는 관료들 중에 이교도가 상당수 존재했다.

847년 8월 10일, 알 와시크는 수종에 걸려 치료법으로 제안된 찜질을 했는데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어 붕어했다. 사후 이복 동생인 알 무타와킬이 칼리파로 선임되었다.

5.6. 알 무타와킬(847 ~ 861)

알 무타와킬은 칼리파가 된 직후 형 알 와시크를 치료했던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를 긴급 체포해 칼리파를 잘못 치료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전 재산을 압수했다. 무함마드는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847년 11월 2일에 사망했다. 또한 칼리파가 되기 전에 자신을 모욕했던 알 자이야트를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가하여 살해했다. 849년 바그다드에서 열린 연회에서 저명한 튀르크 장군 이타크 알 카자리가 술에 취한 나머지 자신한테 고꾸라졌다는 이유로 체포해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타크의 집에서 금화 디나르 100만 닢이 발견되자 알 무타와킬은 분노해 이타크를 태양빛과 열이 가득한 사막 한 가운데에서 철창에 갇힌 채 방치하도록 했다. 결국 이타크는 갈증에 시달리다가 그해 12월 21일에 사망했다. 얼마 후 마흐무드 이븐 알 파라즈 알 나이사부리가 자신이 예언자라고 주장하며 봉기했다가 바그다드에서 체포되었고, 감옥에 수감된 뒤 잦은 구타에 시달리다가 850년 6월 18일에 사망했다.

851~852년,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바스 총독을 살해했다. 이에 부그하 알 카비르 장군을 보내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부그하는 반란군을 토벌한 뒤 853년 트빌리시를 공격해 황폐화시켰으며, 반란군 수괴 이샤크 이븐 이스마일을 생포했다. 그러나 855년 5월 22일, 동로마 제국 함대가 환관 다미아누스의 지휘하에 나일 강 삼각주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다미에타로 파견해 사라센 함선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무기고를 파괴하며 많은 포로를 잡아들였다.

856년 킬리키아의 아나자르부스에 동로마군이 들이닥쳐 무슬림들을 살해했다. 아랍 문헌에 따르면, 약 300척의 함대로 이뤄진 제국 함대가 에게 해와 시리아 해안 일대를 3차례 이상 공격했다고 한다. 알 무타와킬은 이 일련의 사태에 분노했고, 힘스에 살던 기독교인들을 동로마 제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추방했다. 856년, 부자흐(Bujah)에서 금광 개발에 동원되었던 현지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세금 납부를 중단하고 상이집트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알 무타와킬은 알쿰미를 파견해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7척의 보급선과 함께 나일 강을 따라 거슬러 진군해 험난한 지형에 숨은 반란군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모조리 토벌하고 광산을 탈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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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라의 대모스크.

이렇듯 동로마 제국의 침략과 잦은 반란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알 무타와킬은 수도 사마라 일대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그중 대표작은 848 ~ 852년에 걸쳐 완성된 대모스크(마스지드)로, 무려 17개의 회랑을 갖춘 당대 최대 규모의 사원이었다. 또한 나선형의 '말위야'(ملوية)[2] 미나렛은 52m의 높이를 자랑하며 당대 서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외에도 사마라에 20여개의 궁전을 세웠고 도시를 북쪽으로 확장시켰다. 9세기 중반 무렵 사마라는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폴리스, 장안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마라의 유적지구 넓이만 15,000 헥타르가 넘는데 그 대부분이 알 무타와킬의 시대에 지어졌다. 그의 치세 동안 사마라 일대의 건축에 들어간 예산은 2억 디르함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알 무타와킬은 859년부터 사마라 시내에서 북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옛 아시리아 ~ 페르시아 도시 유적 인근에 '알 자파리야'[3]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먼저 세워진 아부 둘라프 모스크(جامع أبو دلف)는 사마라의 대모스크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했다. 두 사원의 넓이는 각각 50,000 제곱미터에 이르렀다. 또한 둘 다 높은 나선형의 미나렛이 특징인데 둘라프의 미나렛은 33m로 말위야의 축소판이었다. 알 자파리야의 운하 건설은 유대계 기술자인 신드 이븐 알리가 맡았다. 860년경 조로아스터교에서 신성히 여기는 1,000년이 넘은 측백나무를 베어 알 무타와킬 자신의 궁전 기둥으로 쓰이게 했다. 이에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분노했고, 얼마 후 해당 목재가 도착하기 전에 그가 붕어하면서 신의 징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편, 알 무타와킬은 선대 칼리파들이 시아파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것과는 달리 12이맘파의 제10대 이맘인 알리 알 하디를 사마라로 소환하여 가택 연금했다. 이는 메디나 총독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가 시아파들이 그를 칼리파로 내세워 반란을 꾀한다고 밀고한 데서 비롯되었다. 다만 시아파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죽이지는 않았다. 또한 시아파의 상징이었던 후세인 이븐 알리의 모스크를 파괴해, 시아파들이 그곳을 순례하는 걸 막았다. 또한 알 무타심에 의해 투옥되었던 한발리파의 시조 아흐마드 빈 한발을 석방하고 무타잘리 학파에 대한 지원을 축소했으며, 알 마문 치세 말기부터 도입되었던 '미흐나'(종교 재판)를 폐지했다.

850년, 알 무타와킬은 기독교인와 유대인들에게 '꿀색' 모자와 벨트를 착용해야 하며, 재산의 10분의 1을 몰수하고 궁정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학자들은 대체로 박해의 증거가 없다고 여기지만 이집트 태생의 영국 이슬람 학자 밧 예올(Bat Yeʼor)은 알 무타와킬의 치세 동안 비무슬림은 지즈야를 3배나 지불해야 했으며, 교회는 수시로 약탈당했다고 주장했다.

알 무타와킬은 반란을 진압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끌기 위해 튀르크인 장성들과 노예 병사들에 계속 의지했다. 그러나 말년에 튀르크인 장성들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는 걸 경계하여 트집을 잡아 처형했고, 튀르크인들은 차츰 칼리파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다. 알 무타와킬은 849/850년에 장남 알 문타시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차남 알 무타즈를 점차 총애했다. 알 무타즈는 아바스 왕조의 기존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알 문타시르는 튀르크인 장성들과 노예 근위대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861년 가을, 알 무타와킬은 튀르크인 장군 와시프의 영지를 몰수하고 알 무타즈를 지지하는 알 파르트 이븐 카칸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이에 튀르크인 장성들은 곧 대대적인 숙청을 벌어질 징조라고 여기고 알 무타와킬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부황으로부터 숱한 모욕을 당하며 심지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은 알 문타시르 역시 가담했다. 얼마 후 와시프와 다른 튀르크 장성들이 12월 12일에 체포되어 처형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를 전해들은 공모자들은 거사를 개시하기로 했다. 알 타바리에 따르면, 알 무타즈의 지지자인 알 파르트와 우바이드 알라는 튀르크 여성으로부터 음모를 경고받았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861년 12월 10일 밤, 튀르크 병사들은 알 무타와킬과 알 파르트가 식사 중이던 방에 침입했다. 알 파르트는 칼리파를 지키려다가 살해되었고, 무타와킬 역시 곧바로 시해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칼리파가 술을 마시다가 질식사했다고 발표되었다. 알 무타와킬의 시해를 끝으로 아바스 왕조의 황금기는 종식되었고, 제국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5.7. 아바스 황금기의 사회상

아바스 왕조는 황금기 시절에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서 서쪽의 북아프리카 아시나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판도를 자랑했다. 또한 정복과 영토 확장에만 골몰했던 우마이야 시대와는 달리 정복사업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라 문화, 예술, 과학, 종교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인 8~9세기를 이슬람 황금기라 할 정도였다. 특히 동로마 제국사산 왕조 시대부터 남아 있었던 그리스, 로마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의 수혜를 톡톡히 받았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서유럽에서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 많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중세 말 유럽 대학들은 아랍어로 쓰여진 고전을 다시 번역해서 교재로 쓸 정도었다.

건축양식이나 의복 및 생활양식이나 궁정의례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바그다드의 궁전은 근처에 있었던 크테시폰 궁전의 영향을 받았고, 미술 양식에서도 동로마와 오리엔트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궁정 의식에서도 장엄한 의식이 강화되었고, 고급 직물의 수여와 같은 사산 왕조의 풍습이 수용되었다.

이전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행정 실무를 주로 담당한 사람들은 우마이야 왕조의 중심지가 다마스쿠스였던 것에서 보듯 주로 동로마 제국 출신 아람어 사용자들이나 그리스인들 혹은 페르시아 서부의 아람어 사용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호라산에서 발흥했던 아바스 칼리프조의 행정 실무 및 학문 발전에는 페르시아인이나 여타 중앙아시아인들이 크게 활약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한 것은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먼저였지만 이 지역을 성공적으로 이슬람화한 공로는 아바스 칼리파조에게 있었다. 초기 이슬람 제국의 아랍인 점령군은 지중해의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들과는 비교적 잘 융화되었을지 몰라도 동방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이나 마니교도, 불교도들과는 전혀 융화되지 못하고 계속 전쟁을 반복하던 상황이었다.[4] 호라산에서 발흥한 아바스 칼리파들은 중앙아시아의 무역상들을 비롯하여 여러 현지 유력자들을 우대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의 반아랍-반이슬람 감정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했고, '제국의 무덤'으로 악명높은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를 포함한 중앙아시아 지역은 아바스 칼리파들에게 충성하는 지역이 되었다.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동방의 여러 나라들 및 흑해 너머 바이킹들과의 교역들도 활발해지면서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여 아바스 왕조는 동•서양의 교역지로 그 이름을 떨쳤다. 특히 바다 건너 해상무역도 활발히 했는데 동쪽의 고려까지 이어졌다. 당시 아바스 왕조는 수은, 향신료, 상아를 수출했고, 고려는 금과 은을 수출하며 교역했다.

6. 사마라의 혼란기(862 ~ 870)

6.1. 정국의 혼란과 제5차 피트나(862 ~ 866)

아버지 알 무타와킬을 시해하고 새로운 칼리파에 등극한 알 문타시르는 동생들에게 칼리파 계승권의 포기 각서를 쓰도록 강요하는 등 황권을 다지려 노력했으나 제위에 오른 지 7개월이 지난 862년 6월 7일에 급사했다. 이에 튀르크 장성들은 누구를 칼리파로 세울 지를 논의한 끝에 알 무타심의 막내 손자인 알 무스타인을 새 칼리파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사마라의 아랍인 군대가 알 문타시르의 동생 알 무타즈를 지지하며 봉기했다. 그들은 무기고를 습격하고 시가전을 벌였는데, 결국 막강한 튀르크 기병대에 굴복했고, 바그다드에선 총독이 시민들을 설득하여 알 무스타인이 칼리파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낸 시가전 이후 알 무타즈와 그의 동생들인 알 무아야드와 아부 아흐마드 탈하(알 무와파크)는 재차 계승권 포기 각서를 쓰는 것도 모자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863년 9월, 말라티야의 '아미르'(태수) 우마르 알 아크타가 파울리키아파와 연합하여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흑해 연안의 삼순을 함락시키는 등 깊숙히 진군했다. 하지만 그들은 랄라카온(Lalakaon)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에게 포위당하여 우마르 본인과 파울리키아파의 지휘관 카르베아스가 전사하는 등 대패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를 기회로 반격에 나서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아미르인 알리 이븐 야흐야를 주살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지하드를 요구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864년,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8대손이자 자이드파(5이맘파)의 이맘인 야흐야 이븐 우마르가 시아 무슬림과 베두인을 규합하여 쿠파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쿠파 인근의 다리에서 아바스군을 격파했고, 자이디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바그다드 시민들도 상당수 그를 지지했다. 하지만 8월 21일, 야흐야의 군대는 후세인 이븐 이스마일이 지휘한 아바스 정규군에게 대패했다. 포로가 된 야흐야는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되었다. 다만 그의 영향력은 이후로도 지속되어 868년에 일어난 잔즈 반란의 지도자 알리 이븐 무함마드는 자신이 야흐야의 환생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시리아의 홈스 시민들도 총독을 죽이고 봉기했으나 튀르크 장군 무사 이븐 부가에 의해 진압되었다.

865년 초, 아바스 조의 수도 사마라는 임금 체불에 분노한 튀르크 병사들의 칼부림으로 거리마다 화염에 휩싸였다. 위협을 느낀 알 무스타인은 자신을 따르는 두 튀르크 장군들 (부가 알 샤라비, 와시프 알 투르키)과 함께 배를 타고 사마라를 빠져나와 바그다드로 도피했다. 865년 2월 초, 무스타인 일행은 바그다드에 도착했고 총독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븐 타히르[5]의 환영을 받았다.

칼리파가 사마라를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튀르크 귀족들은 권력 투쟁을 멈추고 바그다드에 사절을 파견하여 알 무스타인에게 용서를 구하며 사마라로 돌아올 것을 청했다. 이에 알 무스타인은 병사들에 대한 밀린 급여의 지불에는 합의했지만 바그다드를 떠나 사마라로 돌아가는 것은 거부했다. 또한 알 무스타인과 무함마드 총독은 튀르크인들의 오만함을 지적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사마라의 튀르크 귀족들은 분노하여 알 무스타인을 폐위시키기로 했다. 그들은 알 무스타인에 의해 감금되어 있었던 알 무타즈를 새 칼리파로 옹립했다.

이리하여 발발한 제5차 피트나는 865년부터 866년까지 여러 전투를 치르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쏟아내며 아바스 왕조의 국력과 군사력을 소모했다. 866년 1월 12일 알 무스타인이 갈수록 불리해지는 전세에 전의를 상실하여 항복하면서, 내전은 비로소 종식된다. 알 무스타인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 아라비아 반도의 서부 히자즈로 은퇴하는 조건으로 칼리파 직위를 양도했지만, 약속과는 달리 와시트에 연급되었고, 866년 10월 사마라로 소환되어 가던 중 알 무타즈에게 고용된 암살자들에게 시해당했다.

6.2. 튀르크 군부에게 도륙된 칼리파들(866 ~ 870)

알 무타즈는 격렬한 내전(제5차 피트나)을 벌인 끝에 알 무스타인을 꺾고 아바스 왕조의 유일한 칼리파가 되었지만, 자신을 옹립한 튀르크 장성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진 것을 경계해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용병대를 중용하여 튀르크인들을 견제했다. 이에 튀르크 군대가 동생인 무아야드와 아부 아흐마드 탈하를 지지하자, 알 무타즈는 동생들을 감옥에 수감한 뒤 무아야드를 살해했다. 다만 제5차 피트나의 1등 공신이었던 탈하만은 군대의 지지 때문에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바그다드로 보냈다.

그 후 알 무타즈는 튀르크 장성들을 잇따라 숙청해 권위를 다지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튀르크 장병들의 반감을 샀다. 설상가상으로, 내전을 거치며 다른 지역은 물론이고 아바스 왕조의 본거지인 이라크에서조차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 9세기 중반부터 관례적으로 시행되던 신임 칼리파의 군대에 대한 10개월치 급료 지급이 2개월치로 줄어들어 버렸다. 이에 불만을 품은 튀르크 장병들은 869년 7월 13일 정변을 일으켜 알 무타즈를 체포한 뒤 퇴위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하고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는 튀르크 병사들의 멸시와 괴롭힘을 당하다가 7월 16일에 붕어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화로 속에 던져져 죽었다고 한다.

튀르크 병사들은 새 칼리파로 누구를 세울 지를 놓고 며칠간 고민한 끝에 7월 21일 알 와티크의 아들 알 무흐타디를 옹립했다. 알 무흐타디는 검소하고 경건했으며 개혁과 포용의 군주로 추앙받던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우마르 2세를 본받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악기를 금지하는 등 사치가 만연한 궁정 문화를 혁파했고, 친히 풍기문란을 바로잡는 법정('마잘림')을 주재했으며, 시민들과 소통해 그들의 마음을 샀다. 그러면서 튀르크 장성들이 권력 분쟁을 벌이는 틈을 타 숙청 작업을 단행하여 권력을 다지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을 알게 된 튀르크 장병들이 870년 6월 17일 반란을 일으켜 6월 21일 정부군을 물리치고, 궁궐을 장악하면서 폐위되었다. 군인들은 알 무흐타디를 고문하여 60만 디나르가 숨겨진 금고를 얻은 후에 활용 가치가 없어지자 시해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들은 알 무흐타디가 죽을 때까지 그의 낭심을 걷어찼다고 한다. 또는 그가 양위를 거부하자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했다고도 한다.

7. 알 무타미드(870 ~ 892)

알 무흐타디를 처단한 뒤, 튀르크 장성들은 알 무타와킬의 생존한 두 아들 탈하(알 무와팍크)와 아흐마드 중 누구를 옹립할 지 논의한 끝에 탈하는 군사적 역량이 출중하고,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꼭두각시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니 유약한 막내 아흐마드를 알 무타미드로서 칼리파에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실권은 무사를 비롯한 튀르크 무신들이 장악했고, 알 무타미드의 형인 탈하가 그들과 칼리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기로 했다. 이리하여 사마라의 혼란기가 종식되었다.

그러나 사마라의 혼란기 동안 각지에서 발발한 반란은 갈수록 거세졌다. 서쪽의 이집트 총독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사실상 자립했고, 다마스쿠스와 팔레스타인의 총독 이사 역시 세금을 사마라로 보내지 않고 독점했다. 동쪽에선 이란의 부흥을 외친 사파르 왕조가 흥기하며 아바스 왕조의 든든한 속국이었던 타히르 왕조를 격파하고 호라산 대부분을 수중에 넣었다. 북쪽의 타바리스탄에선 시아 계열인 자이드파 국가 알라비 왕조가 들어섰고, 남쪽에선 잔즈 반란과 이스마일리 시아파인 카르마트가 극성이었다.

알 무와팍크는 튀르크군 장성들과 함께 이 모든 반란을 수습하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숱한 칼리파를 죽일 정도로 불손하기 짝이 없는 튀르크인들이었지만, 전투력 만큼은 탁월했기에 사파르 왕조의 침공을 격파하고, 잔즈 반란을 악전고투 끝에 진압해 이라크를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총독 툴룬이 툴룬 왕조를 건국하여 이집트와 시리아를 장악하는 걸 막지는 못했다.

한편, 즉위 직후부터 알 무와팍크와 튀르크 장성들에게 실권을 빼앗긴 알 무타미드는 권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870년 6월에 알 무타와킬 시대에 재상을 맡았던 우바이둘라 이븐 야흐야 이븐 카칸을 선임했다. 875년 7월에는 아들 자파르에게 '알 무파와드 일랄라' 칭호를 내리며 후계자로 선포하고, 아바스 왕조의 서부[6] 지배권을 하사했다. 알 무와팍크에게는 2순위 후계자로서 그대로 왕조의 동부[7]를 맡겼다. 다만 알 무파와드가 아직 미성년일 때에 알 무타미드가 붕어하면 알 무와팍크가 우선 계승하도록 했다.

알 무와팍크는 자신의 동맹인 무사를 알 무와파드의 대리인으로 두어 서부에 역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던 877년 무사가 사망하고 같은 해 8월 와지르 우바이둘라가 사망했다. 우바이둘라의 사후, 알 무와팍크의 비서인 술레이만 이븐 와하브가 와지르가 되었지만, 그는 알 무타미드에게 면박받은 이후 이스마일 이븐 불불로 대체되었다. 다만 실권은 알 무와팍크의 새 비서인 사이드 이븐 마클라드에게 있었다. 이렇듯 형 무와팍크의 권력이 여전히 강성하여 황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자, 알 무타미드는 심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급기야 882년, 시리아를 장악한 툴룬에게 가담하기 위해 소수의 추종자를 데리고 시리아로 탈출했다. 그러나 도중에 체포되어 와시트로 끌려간 뒤 형 알 무와팍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알 무와팍크는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외세와의 전쟁을 이어갔다. 그러던 889년 말 모종의 이유로 아들 아흐마드와 대립한 끝에 후자를 감금했다. 891년 5월, 2년간의 원정을 마치고 바그다드로 귀환하다가 고질병인 통풍이 도져 특수 제작된 수레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알 무와팍크의 죽음이 가시화되자, 아흐마드와 대립하던 와지르 겸 바그다드 수비대장 이브라힘 이븐 불불은 칼리파 알 무타미드와 알 무파와드를 바그다드로 불러 친위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러나 군대와 여론은 아흐마드를 지지했다. 아흐마드는 병사들에 의해 석방된 뒤 부친 알 무와팍크의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891년 6월 2일 알 무와팍크가 사망한 뒤, 아흐마드는 부친의 권세를 이으며 '알 무타디드 빌라'라 칭했고, 알 무파와드에 이은 두 번째 후계자로 공표되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892년 4월 30일, 무력한 알 무파와드의 계승권을 박탈하며 1순위 후계자로 부상했다. 아들이 축출되자 절망에 빠진 알 무타미드는 6개월 후인 10월 14일 과식과 과음으로 인해 붕어했고, 알 무타디드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8. 1차 중흥기(892 ~ 908)

8.1. 알 무타디드(892 ~ 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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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라의 혼란기가 끝난 직후인 892년 아바스 왕조의 강역.

알 무타디드는 칼리파에 즉위하자마자 군사 활동을 개시했다. 먼저 이라크, 자지라, 페르시아 서부(지발) 등 아바스 왕조의 핵심 영토에 대한 확고한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는 자지라에서 아미드와 디야르 바크르의 통치자 아흐마드 이반 이사 알 샤이바니, 타길리비 족장 함단 이븐 함둔과 맞붙었다. 아흐마드는 893년 샤이반에서 생포되었고, 함단 이븐 함둔은 도주했으나 추격대에게 잡혔다. 이후 함단의 아들 후세인 이븐 함둔이 알 무타디드에게 귀순하는 조건으로 아버지를 석방해달라며 요청했고, 칼리파는 이를 받아들였다. 후세인은 아바스군의 주요 지휘관이 되어 896년 카와리즈파 수장이자 반란군 수괴인 하룬 이븐 압둘라를 체포해 바그다드로 후송하여 십자가형에 처하는 등 여러 공적을 세웠고, 함단 가문은 점차 자지라에서 권력을 장악해 훗날 함단 왕조를 건국했다. 899년, 알 무타디드는 자지라를 재침공하여 아흐마드 이반 이사 알 샤이바니의 아들 무함마드를 아미드로부터 축출하고, 후계자로 지명한 알 무크타피를 총독으로 임명해 아미드를 다스리게 했다.

한편, 이미 이집트와 시리아에 확고한 세력을 갖춘 툴룬 왕조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알 무타디드는 일시불로 20만 디나르를 주고, 연간 30만 디나르를 바치는 대가로 툴룬 왕조가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않게 했고, 툴룬 왕조의 통치자 쿠마라웨이 이븐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자지야의 두 지방인 디야르 라비아와 디야르 무다르를 반환하기로 했다. 이 조약은 쿠마라웨이의 딸 카타르 알 나다와 알 무타디드가 결혼하면서 이뤄졌고, 그는 아내의 지참금으로써 100만 디나르를 더 가져왔다. 그러던 896년 쿠마라웨이가 내부 반란으로 피살당하고 어린 아들들이 잇따라 칼리파로 세워지면서 툴룬 왕조가 혼란에 빠지자, 알 무타디드는 이 때를 틈타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해 매년 여름마다 서방 원정을 떠나 툴룬 왕조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홈스 북쪽의 시리아 전역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이제는 툴룬 왕조가 아바스 왕조에 45만 디나르를 바쳐야 했다. 이후 툴룬 왕조의 추종자들이 아바스 왕조로 잇따라 투항하면서, 알 무타디드의 위세는 갈수록 강력해졌다.

한편, 그는 동방 영토에서 강대한 위대를 떨치는 사파르 왕조와 평화협약을 맺었다. 지발, 레이, 이스파한은 아바스 왕조의 소유가 되었고, 파르스, 후라산, 이란 동부 일대는 사파르 왕조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면서 사파르 왕조가 아바스 왕조를 명목상 종주국으로 인정하게 했다. 한편, 알 무와팍크로부터 호라산 총독으로 선임된 용병대장 라피 이븐 하르타마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사만 왕조와 동맹을 맺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었다. 그는 888/889년에 타바리스탄을 침공하여 큰 타격을 입혔고, 찰루스 강 전투에서 자이드파(5이맘파)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자이드를 격파했다. 이후 카즈빈으로 진군한 뒤 889/890년에 레이로 진군하여 그곳에 지휘부를 세웠다. 그런데 알 무와팍크가 사망한 뒤 칼리파가 된 알 무타디드가 라피 이븐 하르타마에게 사파르 왕조와 맺은 협약에 따라 레이를 직접 통치하기로 했으니 그곳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라피가 거부하자, 칼리파는 아흐메드 이븐 아브드 알 아지즈 이븐 아비 둘라프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공격했다.

라피는 이에 맞서 무함마드 이븐 자이드와 화해했고, 금요일 기도를 자이드의 이름으로 낭독했다. 896년, 라피는 후라산을 침공하여 니샤프르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자이드의 이름으로 기도문을 낭독했다. 심지어 아바스 왕조의 검은 깃발 대신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흰색 깃발을 군기로 골랐다. 그러나 자이드가 약속한 지원군은 제때 도착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알 무타디드와 연합한 사파르 왕조군에 의해 니샤푸르에서 축출되었다. 라피는 후라산에서 호라즘으로 후퇴한 뒤 재차 맞서 싸웠으나 끝내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의 수급은 곧 베어져서 바그다드로 이송되었다.

898년, 알 무타디드는 사만 왕조의 지배를 받던 트란스 옥시아나의 총독으로 사파르 왕조의 통치자 암르 이븐 알 레이트를 임명했다. 이후 사만 왕조와 사파르 왕조는 서로를 적대시했고, 900년 암르가 사만 왕조군에게 참패해 사로잡혔다. 사만 왕조 통치자 이스마일 이븐 아흐메드는 암르를 쇠사슬에 묶어 바그다드로 보냈고, 암르는 902년 알 무타디드가 붕어한 직후 바그다드에서 처형되었다. 알 무타디드는 암르의 작위를 사만 왕조의 이스마일에게 수여하여 회유한 뒤 파르스와 키르만을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사프르 왕조의 잔당들에게 패퇴했다. 아바스 왕조는 알 무타디드 사후 8년이 지난 910년이 되어서야 파르스 지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편, 카르마티아인들은 897년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899년, 아부 사이드 알 잔나비 휘하의 카르마티아인들은 바레인을 공략했고, 이듬해에 알 아바스 이븐 암르 알 가나위가 이끄는 아바스 왕조군을 격파했다. 이들은 알 무타디드 사후, 잔즈 반란 이후에 아바스 왕조가 직면한 가장 위험한 적으로 부상했다. 같은 시기 이슬람 세계의 주변부에 더 많은 반 아바스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프리키야에서 시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 국가인 파티마 왕조가 권력을 장악했고, 예멘에서는 또다른 자이드파 왕조가 세워졌다.

이렇듯 알 무타디드는 수많은 내부의 적들을 상대로 분투하며 왕조의 영향력을 어느정도 회복했으나, 900년경에 큰 실책을 저질렀다. 이븐 아부 엘사지가 타르수스의 유명 인사들과 결탁하여 디야르 문다르 지방을 장악해 아바스 왕조로부터 독립하려는 음모를 꾸민 정황이 드러나자, 엘사지를 체포해 처형하고 타르수스의 함대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타르수스 함대는 지난 수십 년간 동로마 제국 함대를 수 차례 무찌르고 해안 지대를 맹렬히 습격할 만큼 강력한 집단이었다. 그런 그들을 손수 없애버렸으니, 동로마 함대가 활개를 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동로마 함대는 이 때를 틈타 데메트리아스 항구를 약탈했고, 동로마 육군은 해상보급을 토대로 국경 지대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해 아바스 왕조와의 사이의 무인 지대를 점거하고 새로운 테마를 세웠다.

알 무타디드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랍 역사 연구가 휴 케네디에 따르면, 당시 아바스 정부 지출의 80% 이상이 군대 유지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자연히 더 많은 세입을 확보하기 위한 개혁이 이뤄졌다. 이전에는 자체적으로 지방을 다스리는 에미르나 반 자치 총독들이 수도에 거둬들인 세금을 보냈지만, 그들은 세금을 빼돌리기 일쑤였다. 이에 중앙집권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을 더 작은 세구로 나누고, 디완의 수를 늘려서 세수입을 늘리는데 훨씬 더 면밀한 감독을 하도록 했으며, 에미르와 총독들에 대한 감찰을 좀더 착실하게 진행해, 정부에 세금을 꼬박꼬박 바치도록 유도했다.

한편, 알 무타디드의 시기에 고위 관료들은 세습을 허용받았다. 재상 우바이드 알라 이븐 술레이만 이븐 와흐브는 892년 알 무타디드가 즉위한 이래 901년까지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고, 901년 우바이드가 사망한 뒤 아들 알 카심이 뒤를 이었다. 또한 아바스 왕조의 핵심 지역인 이라크의 재정은 처음에는 바누 푸라트 가문이 담당했고, 899년부터는 바누 푸라트 가문의 라이벌인 바누 자라 가문이 담당했다. 두 가문은 아바스 왕조 정부를 향후 수십년간 지배하면서, 종종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전임자들에게 벌금을 매기고 고문을 가했다.

알 무타디드는 사마라에서 바그다드로 수도를 옮기는 사업을 완료했지만, 기존의 도시를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티그리스 강 동쪽 강둑으로 이전했다. 그가 세운 도시는 오늘날까지 바그다드의 중심지로 남았다. 또한 도시의 관개 네트워크를 복구하는 데 신경썼고, 진흙으로 뒤덮인 두자일 운하를 청소하면서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지주들이 그 비용을 감당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토지세를 수확 이전 대신 수확 이후에 징수되도록 하여 농부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알 무타디드는 통치 초기부터 수니파의 전통을 중시하는 한발리파를 확고히 옹호하여 무타질라 학파의 신학 활동을 금지했고, 한발리파가 불법으로 간주하는 재산을 책임지는 재정 부서를 폐지했다. 또한 자이드파와 격렬하게 대립하면서도 다른 시아파와 화해를 도모했고,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적수이자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인 무아위야 1세에게 공식적으로 저주를 내리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고문들이 "그랬다간 후폭풍이 엄청날 것이다"라며 말리자 단념했다.

하지만 무타질라 학파를 후원한 알 마문 시대의 과학 열풍을 되살리고자 노력했으며, 그리스 문헌 번역가이자 당대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인 타비트 이븐 쿠라와 문법학자 이븐 두라이드, 알 자히를 후원했다. 이중 이븐 두라이드와 알 자히는 알 무타디드의 자녀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알 무타디드의 스승이었던 아흐마드 이븐 알 타이브 알 사라흐시는 바그다드의 시장 감독관이 되었지만, 896년 그의 분노를 사 처형되었다.

알 무타디드는 형벌을 엄격하게 집행하기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에는 관료들의 실수를 너그럽게 봐주었지만, 중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궁전 아래에 특별한 고문실을 건설해 온갖 기발한 방법으로 죄인들을 고문했다. 알 마수디, 알 사파디 등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죄수들에게 가한 온갖 고문들을 설명했다. 심지어, 그는 바그다드 대중 앞에서 고문을 집행하는 장면을 공공연히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두 연대기 작가들은 이러한 엄격함 덕분에 흐트러졌던 기강이 바로잡힐 수 있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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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무타디드 붕어시의 아바스 칼리파조 직할령. 이란 서부, 자지라, 시리아 북부가 추가되었다.

알 무타디드의 통치기에 자지라, 시리아 북부, 지발 등을 직접 지배령으로 수복하고, 툴룬 왕조와 사파르 왕조로부터 형식적인 충성을 받아내면서 아바스 칼리파조의 통합을 겉으로나마 달성했고, 내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국 각지에는 반 아바스 정서가 팽배했고, 군대 유지에 필요한 세금 관리를 위해 비대해진 관료제 역시 왕조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겼다.

8.2. 알 무크타피(902 ~ 908)

902년 4월 5일 알 무타디드가 붕어한 뒤 아들 알 무크타피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그는 잔혹한 형벌을 즐겨 사용하던 부황과는 달리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아버지의 지하 감옥을 파괴하고 그 부지를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또한 디완 알마할림 회의에 직접 참석해 평민들의 탄원서를 듣고 조치를 내렸다. 한편, 그는 아버지의 바그다드 건축 사업을 이어갔다. 아버지가 세 번째 궁전으로 짓고 있었던 타지 궁전을 완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크테시폰에 있는 사산 왕조 통치자들의 궁전 벽돌을 재활용했다. 또한 '당나귀의 큐폴라'로 알려진 반원형의 탑이 있었다. 이는 알 무크타피가 당나귀를 타고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주변 시골 풍경을 바라본 데서 비롯된 명칭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궁궐 감옥이 있었던 자리에 자미 알 카스르 모스크를 건설했다. 903년 5월에는 바그다드를 떠나 옛 수도인 사마라로 옮기려 했지만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걸 알게 되자 단념했다.

이렇듯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내정을 잘 운영하는 그였으나, 궁정 관리들에게 쉽게 휘둘린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알 카심 이븐 우바이드 알라는 알 무크타피의 치세 초기에 여러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그는 수감 중이던 사파르 왕조의 통치자 암르 이븐 알 레이트를 처형했다. 선대 알 무타디드 치세의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바드르 알 무타디드를 모함해 사형당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삼촌인 아브드 알 와히드를 체포해 역시 처단했다. 903년 9월 알 무크타피의 총애를 받던 기독교인 비서 나스라니를 추방하고, 알 카심 자신의 아들인 알 후세인과 무함마드를 칼리파의 비서로 삼았다. 심지어 904년 3월에 자신의 어린 딸을 알 무크타피의 갓난아들 아부 아흐메드 무함마드와 약혼시켰다.

알 카심은 중앙정부에 봉직하는 관료들 사이의 분쟁에 개입했다. 당시에는 바누 자라와 바누 푸라트가 관료 세계를 양분하고 있었는데, 알 카심은 친 시아파 성향을 보이는 바누 푸라트를 경원시하고, 바누 자라를 선호했다. 바누 푸라트의 대표였던 아부 엘 하신 알리 이븐 알 푸라트는 904년에 체포되었지만, 알 카심이 도중에 병사하면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알 카심은 죽기 전에 후계자로 알 아바스 이븐 알 하신 알 자르자이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알 자르자이는 칼리파 알 무크타피가 붕어할 때까지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알 무크타피는 숱한 전쟁을 치렀지만 본인은 바그다드에 머물고 장수들에게 일을 맡겼다. 902년 사파르 왕조가 레이를 점령하자, 그해 11월 15일에 이를 탈환하고자 군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원정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사만 왕조가 레이를 점령한 걸 볼 때, 사파르 왕조로부터 레이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타격을 입힌 것으로 보인다. 알 무크타피는 사만 왕조가 강해지는 걸 경계해 사파르 왕조와 화해하고, 사파르 왕조가 파르스를 통제하는 걸 용인했다.

알 무크타피의 치세때 최대의 적은 단연 급진적인 시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인 카르마티아인들이었다. 이들은 카바 숭배, 도시 거주, 베두인 소외 등을 이슬람교의 진정한 가르침에서 벗어난 행위라고 여기고 초기 이슬람 사회로 돌아가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왕조를 타도하자고 외쳤다. 899년 바레인을 공략하고 팔미라 주변 지역에 또다른 기지를 건설해 아바스 왕조와 툴룬 왕조를 동시에 공격했다. 902년, 그들은 점점 쇠락하던 툴룬 왕조를 물리치고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 다마스쿠스는 오랜 농성 끝에 승리했지만, 카르마티아인들은 시리아의 다른 도시들을 계속해서 파괴했다. 한편, 카르마티아 선교사 아부 압둘라 알 시리가 베르베르인들을 포섭하여 902년 이프리키야의 아글라브 왕조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들의 공세는 909년에 완료되어 파티마 왕조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렇듯 갈수록 무섭게 팽창하는 카르마티아인들에 두려움을 느낀 알 무크타피는 903년 7월 바그다드를 떠나 라카로 이동했다. 그가 라카에 남아있는 동안, 토벌대 지휘관직이 육군부의 수장인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 알 카티브에게 주어졌다. 903년 11월 29일,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은 카르마티아 본대와 하마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카르마티아군은 괴멸되었고, 주요 지도자들이 생포되거나 전사했다. 알 무크타피는 포로들을 인솔한 채 바그다드로 귀환했고,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은 라카에 남아 농촌을 뒤져서 잔여 카르마트 반란군을 체포했다. 904년 2월 13일,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과 수도의 보안 책임자 아흐메드 이븐 무함마드 알 와티치는 쿠파와 바그다드에서 모인 카르마티아 지도자들과 동조자들의 공개 처형을 주재했다. 같은 해 아바스 왕조의 바레인 총독은 카르마티아인들을 무찌르고 바레인의 수도 카티프를 탈환했다.

그러나 카르마티아인들은 이 정도로 근절되지 않았다. 906년 아부 가님이 이끄는 바누 칼브 베두인족이 반란을 일으켜 하완과 티베리아스를 급습하고 다마스쿠스를 공격했다. 이들은 다마스쿠스 총독 아흐메드 이븐 나스르 휘하 수비대를 격파했지만 다마스쿠스 자체를 점령하지는 못하고 티베리아스로 이동한 뒤 약탈을 자행했다. 알 후세인 이븐 함단은 이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아 출진했지만, 그들은 물 웅덩이에 독을 넣고 사막으로 철수했다. 906년 6월 16일, 아부 가님과 베두인족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히트를 공격했다. 무함마드 이븐 이샤크 이븐 쿤다지크와 무니스 알 카딤이 이들을 제압하고자 바그다드에서 진군했고, 알 후세인 이븐 함단은 서쪽에서 진군해 이들을 포위섬멸하려고 했다. 이에 베두인족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아부 가님을 죽이고 수급을 바쳐 알 무크타피의 사면을 받았다.

남은 카르마티아인들은 지크라웨이 이븐 미흐라웨이의 명령에 따라 쿠파로 남하하여 10월 2일부터 쿠파를 공격했다. 그들은 쿠파를 돕기 위해 바그다드에서 파견된 구원군을 격파했지만, 쿠파 공략에는 실패했다. 이후 메카 순례에 나선 이들을 습격했다. 11월에 3개의 순례 행렬이 파괴되었는데, 두 번째 습격때는 자그마치 20,000명이나 살해당하고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이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907년 1월 초, 와시프 이븐 사와르타킨 휘하의 아바스군이 알 카디시아 인근에서 카르마티아인들을 섬멸했다. 이리하여 카르마티아인들은 시리아 사막에서 종적을 감췄지만, 바레인에서는 수십년간 아바스 왕조의 총독을 위협했다.

908년, 갈수록 아바스 왕조에 반항적이던 아다르바얀의 통치자 유수프 이븐 아비엘사이를 토벌하고자 하캄 알 무플리히가 이끄는 군대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원정 도중에 그가 사망하자, 이븐 아빌사이는 아바스 왕조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아르메니아와 아다르바얀의 총독으로 인정받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한편, 알 무크타피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탈환하기 위한 사업도 벌였다. 904년 5월 24일,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은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그다드에서 출진해 툴룬 왕조로부터 시리아 남부와 이집트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의 원정은 타르수스의 데미안 휘하의 킬리키아 변경 지역에서 온 함대의 지원을 받았다. 데미안은 함대를 이끌고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나일 강 연안을 급습해 툴룬군의 보급품이 나룻배로 운반되는 것을 막았다. 아바스군의 진군은 대부분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그해 12월, 툴룬 왕조의 에미르 하룬 이븐 쿠마라웨이는 삼촌 알리와 샤이반에게 시해당했다. 샤이반은 통치권을 이어받았지만, 다마스쿠스 총독 투그힐 이븐 주프를 포함한 많은 인사들이 아바스군에 투항했다.

905년 1월, 아바스군은 이집트의 옛 수도 푸스타트 앞에 도착했다. 샤이반은 밤에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고, 푸스타트는 곧 항복했다. 아바스군은 도시에 입성한 뒤 툴룬의 거대한 모스크를 부수고 툴룬이 세운 수도 알 카타이를 파괴했다. 툴룬 가문의 일원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체포되어 바그다드로 끌려갔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후 이사 알 누샤리가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알 누샤리는 신민들을 상대로 학정을 자행하다가 몇 달만에 이브라힘 알 할란지 휘하의 반란군에 의해 푸스타트를 버리고 알렉산드리아로 달아나야 했다. 이에 아흐마드 이븐 카이할라흐 휘하의 군대가 이집트 반란 토벌에 나섰다. 905년 12월 알 할란지는 알 아리쉬에서 카이할라흐를 물리쳤다. 그러나 뒤이은 공세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906년 5월 체포된 뒤 바그다드로 끌려갔다.

칼리파 알 무크타피는 숙적인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도 치렀다. 902년 5월, 알 카심 이븐 시마 알 파르가니는 자지라 변경 지역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동로마 전선을 총괄했다. 904년 여름, 트리폴리의 레온이라는 동로마 제국의 반역자가 시리아와 이집트 함대 54척을 이끌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한 뒤 아비도스를 약탈했다. 레온 6세는 트리폴리의 레온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한 아르히로스를 해임하고, 이메리오스를 새 함대 지휘관으로 세웠다. 하지만 트리폴리의 레온은 동로마 함대를 격파한 뒤 서쪽으로 이동하여 제국의 두 번째 도시인 테살로니카로 쳐들어가서 904년 7월 31일 3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키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하며, 수많은 노예를 아바스 왕조로 끌고왔다.

904년 11월, 동로마 제국의 사령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테살로니카 약탈에 보복하라는 레온 6세의 지시에 따라 아르히로스와 함께 아랍 원정을 떠나 게르마니케아 근방에서 모프수에스티아와 타르소스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906년 7월, 동로마 제국은 쿠루스(키루스)를 점령하고 도시를 파괴한 후, 주민들을 강제 이송했다. 906년 10월, 아흐메드 이븐 카이할라흐와 루스탐 이븐 바라두는 할리스 강까지 쳐들어갔다가 전리품과 포로들을 싣고 귀환했다. 동로마 제국 함대 사령관 이메리오스는 이에 보복하고자 타르소스로 항해해 아바스 함대를 완전히 격파하고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때 이메리오스와 협력하길 거부했던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토벌대를 피해 이코니온 부근의 한 요새로 도망쳤다. 두카스는 여기서 906년 3월까지 머물다가 제국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함께 타르소스로 피신했다가 다시 바그다드로 도피했다.

레온 6세는 바그다드로 사절단을 보내 포로 교환 협상을 벌였다. 포로 교환은 905년 9월부터 10월까지 킬리키아의 라무스 강에서 이뤄졌다. 동로마 제국이 합의된 조건을 지키지 않아서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추가 협상 끝에 908년 8월에 교환이 완료되었다. 이때 황제는 사절단에게 비밀 서신을 맡겨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에게 전하게 했다. 그 서신의 내용은 예전처럼 충성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원대 복귀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서신은 도중에 발각되었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이슬람교로 개종해 처형을 피했지만 철저한 감시를 받다가 얼마 후에 사망했다.

한편, 알 무크타피는 토스카나 변경백 아달베르트 2세의 아내 베르타와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906년, 베르타는 그에게 라틴어로 쓰여진 편지와 풍부한 선물들을 보냈다. 그녀는 이프리키야와 시칠리아를 장악한 아글라브 왕조의 아랍인들의 해적 행위를 근절해달라고 간청했다. 알 무크타피는 이에 긍정적인 답장을 보냈지만, 당시 아바스 왕조는 이프리키야와 시칠리아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908년 늦봄, 알 무크타피는 중병에 걸려 약 3개월간 병세가 호전되고 악화되기를 반복했다. 그에게는 9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모두 미성년자여서 누가 되든 칼리파의 입지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병을 오래 앓은 나머지 말을 제대로 구사할 수도 없어서 후계자를 직접 고르지 못했다. 이에 알 아바스 알 자르자이는 주요 관료들을 소집하여 후계자로 누구를 세울 지를 논의했다. 자르자이는 처음에는 제13대 칼리파 알 무타즈의 아들이며 유능한 인물이었던 압둘라 이븐 알 무타즈 왕자를 세우려 했지만, 튀르크 군부의 수장 무니스의 압박에 굴복하여 알 무크타피의 동생 알 무크타디르를 후계자로 정했다. 908년 8월 13일 알 무크타피가 붕어했고, 알 무크타디르가 새 칼리파로 즉위했으나 아직 어려서 튀르크 군부와 관료들이 실권을 잡았다. 이후 아바스 칼리파조는 또다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9. 2차 쇠락기(908 ~ 944)

9.1. 알 무크타디르알 카히르(908 ~ 934)

알 무크타디르는 908년 즉위 당시 나이가 13살로, 칼리파가 생겨난 이래 최초로 미성년자일 때 즉위했다. 이에 따라 통치를 돕기 위한 '알 사다'(al-sāda)가 설립되었다. 이 섭정 위원회엔 모후인 샤하브, 샤하브의 비서 움 무사, 샤하브의 여동생 카티프, 그리고 선제 알 무타디드의 다른 첩인 다스탄부웨이였다. 모두 여자였기 때문에, 당대 역사가들은 '알 사이다'(al-Sayyida: 여인)라고 불렀다. 어린 알 무크타디르는 이 여자들의 품에 들어가서 그녀들에게 제국의 통치를 맡겼고, 모후 샤하브의 숙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관료가 모인 궁궐이 아닌 군주의 사적 공간에서 정책이 결정되었고, 샤하브는 아들의 치세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어 관리의 임명과 해임에 간섭하고, 재무부에 기부 및 자선 활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게 했다. 또한 대부분의 삶을 하렘에서 보냈고, '카라마나'(시녀)들을 대리인으로 삼아서 하렘과 궁정 사이의 중개 역할을 맡게 했다. 카라마나는 자연히 강력한 권력을 확보했고, 그녀들에게 밉보인 자들은 태후 샤하브에 의해 강제로 쫓겨났다.

한편 동로마 제국과 아나톨리아에서 전쟁을 벌였으나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지자 917년 포로 반환을 위해 120,000 디나르를 보내고 전쟁을 멈춰야 했다. 이에 사람들은 분노했는데, 특히 칼리파 알 무크타디르가 음악가와 무용수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수도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한 이맘은 금요일 기도 중에 알 무크타디르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돌을 던지기도 했다. 아바스 정부는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921년 이븐 파디안을 불가리아에 사절로 보내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아랍 역사가 알 만수디에 따르면, 불가리아 왕의 아들이 메카를 순례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나라의 동맹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북아프리카의 시아파 파티마 왕조와 아라비아 반도의 시아파 카르마트, 모술알레포의 시아파 함단 왕조가 순니파 아바스 칼리파조의 입지를 위협했다. 여기에 시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의 일원인 카르마티아인들은 메카를 습격해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고 카바의 흑석을 훔쳤으며, 쿠파와 바스라를 공략하고 바그다드를 위협했다.

929년 2월 28일, 튀르크 장성 무니스 알 무자파르가 이끄는 쿠데타 세력이 알 무크타디르를 축출하고, 알 무타디드의 3남 알 카히르를 옹립했다. 하지만 사흘간 공모자들과 함께 바그다드를 약탈한 그들은 더 이상 얻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자 3월 2일 마음을 바꿔 알 무크타디르를 복위시켰다.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인명이 살육당했고, 바그다드는 폐허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여기에 각지에서 올라오는 세금마저 끊기면서, 도시 경비대에게 지급할 봉급마저 마련할 수 없게 되었다.

932년 10월, 무니스는 모술에서 독립해버린 함단 왕조를 징벌하고자 출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알 무크타디르로부터 귀환 명령을 받자 이에 따라 바그다드로 이동했다. 그런데 칼리파는 신하들의 참언을 믿고 무니스가 자신을 죽이려 돌아오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무니스를 체포하기 위해 예언자의 망토와 홀을 들고 궁궐에서 나와 무니스의 군대와 대적했으나, 바그다드 수비대가 급료 지급도 제대로 못하는 알 무크타디르를 따르길 기피하는 바람에 성벽 밖에서 참패하고 전사했다. 그 후 무니스는 알 무크타디르의 아들 알 라디를 새 칼리파로 옹립하려 했지만, 고관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포기하고 일전에 칼리파로 옹립했다가 곧바로 폐위된 뒤 연금 중이던 알 카히르를 새 칼리파로 옹립했다.

알 카히르는 칼리파에 복위한 뒤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선제 알 무크타디르의 모후이자 자신의 계모인 샤하브를 비롯하여 선대의 가족과 관료들을 가혹하게 고문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그는 사치를 배격하고 검소하게 생활해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몰래 술에 탐닉했다고 한다. 또한 무니스와 재상 알리 이븐 무클라를 타도하고 실권을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무함마드 이븐 야쿠트를 통해 반 무니스 세력을 모았다. 뒤늦게 이걸 알게 된 무니스 일당은 반란을 꾀했으나 933년 7월 계획이 누설되면서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이븐 무클라는 수도에서 도망쳤다. 알 카히르는 심복인 무함마드 이븐 알 카심 이븐 우바이드 알라를 비지에로 임명해 권력을 강화했다.

알 카히르는 반 시아파 정책을 확고히 펼치며 자신을 "신앙의 적들의 복수자"(al-muntaqim minaddán Alláh)라고 선언하고 이 문구를 동전에 새기게 했다. 그러나 무함마드 이븐 카심은 아바스 왕조의 재정 적자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해임되었고, 후임자인 아흐마드 알 카시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창을 지니고 다니며 거슬리는 자를 내리치는 알 카히르의 폭력성은 신하들과 여론의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일전에 수도에서 도주했던 알리 이븐 무클라는 알 카히르를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 934년 4월 24일 근위대를 매수한 뒤 쿠데타를 일으켜 술에 취해 있던 알 카히르를 체포했다. 조카 알 라디에게 양위할 것을 거부하던 알 카히르는 실명을 당한 후 투옥되었고, 뒤이어 추대된 알 라디는 숙부의 행방을 비밀에 붙였다.

9.2. 알 라디(934 ~ 940)

알리 이븐 무클라에 의해 새 칼리파로 옹립된 알 라디의 권력은 최소한으로 국한되었고, 실권은 무함마드 이븐 야쿠트와 무클라가 양분했다가, 935년 4월 야쿠트가 해임되면서 무클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935년, 한발리파 광신도들이 바그다드에서 소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습격하고 민가에 강제로 들어가서 술병을 부쉈으며, 악기를 부수고 가수를 학대하며, 거래의 세부사항을 조사하고, 경쟁자들을 폭행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당국은 이에 대해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한편, 각지의 지방 총독들은 아바스 칼리파조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세금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가로채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무클라는 이들을 무력으로 응징해 통제권을 확보하기로 하고, 함단 왕조가 지배하는 북부 메소포타미아(자지야)를 첫 번째 목표로 선택했다. 935년, 무클라는 함단 왕조의 모술을 공격해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그러나 함단 왕조의 에미르 나시르 앗 디울라 하산의 반격으로 패배했다. 아바스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함단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70,000 디나르의 연공과 바그다드 및 사마라의 밀 공급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936년, 무클라는 와시트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총독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에 대한 토벌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쓰는 바람에 재정 위기가 발생했다. 결국 무클라는 무함마드 이븐 야쿠트의 동생 알 무자파르에 의해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후 알 라디는 무클라의 정적이었던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를 신설 직책인 '아미르 알 우마라'(장군 중 장군)에 임명하고 질서 유지를 맡겼다. 총독들은 이웃 지방의 총독조차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칼리파 알 라디를 대놓고 무시했고, 이로 인해 아바스 왕조의 권력은 바그다드와 그 근방에만 미치게 되었다.

알 라디는 금요 예배를 진행하고, 정무에 참가하며, 빈민 구제에 나서고, 탐관오리들을 제어하려 한 마지막 칼리파였다. 그러나 '아미르 알 우마라'의 이름이 금요 예배에서 칼리파와 함께 거론될 정도로 권위가 추락했다.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근위대('후자리야')를 학살하여 칼리파에 충성하는 마지막 군사 집단을 소멸시키고 바그다드 정부의 전권을 차지하는 듯 했으나, 938년 부하인 바즈캄이 도전하면서 내란이 일어났다.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바즈캄의 바드다드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라크의 수로들 중 최대 규모인 나흐라완 운하를 막아 홍수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이라크의 농업은 향후 수세기간 쇠락했다.[8]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부질없었고, 938년 8월 바즈캄이 바그다드로 입성해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를 몰아냈다. 알 라디는 바즈캄을 '아미르 알 우마라'로 임명했다.

938년 가을, 알 라디는 바즈캄과 함께 모술 원정에 나서 도시를 점령했으나, 주민들이 반발한 데다가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가 시아파 카르마트와 연합해 바그다드를 위협하자 연공 납부를 대가로 회군했다. 한편 라이크는 시리아 북부의 지배권을 받는 대가로 바그다드에서 회군했다. 이후 바즈캄은 동방의 시아 계열 12이맘파 국가인 부와이 왕조에 맞서 바스라의 군벌 하산 알 바리디에게 와시트를 할양하고, 와지르로 임명하며 그 딸과 결혼해 동맹 관계를 맺었다. 하산 알 바리디는 후제스탄의 부와이 왕조 세력을 축출하고 이란 서부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이후 바즈캄과 하산은 대립했고, 940년 8월 말 바즈캄이 하산을 와지르에서 해임하고 와시트를 점령했다. 이와 동시에, 바그다드는 한발리파의 난동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렇듯 정국이 혼란한 와중이던 940년 12월 12일, 알 라디가 붕어했다. 바즈캄은 와시트에 머무르면서 비서를 바그다드로 보내 아바스 귀족 회의를 소집한 뒤 알 라디의 형제 알 무타키를 새 칼리파로 세웠다. 알 라디가 붕어할 당시에 이집트의 이흐시드 왕조, 자지라의 함단 왕조, 아제르바이잔의 살라르 왕조, 이란의 부와이 왕조와 사만 왕조, 아라비아 반도의 급진 시아파 카르마트 등이 발흥하여 아바스 칼리파조의 강역은 이미 시리아-이라크 일대로 축소되었다. 그마저도 시리아 북부는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 이라크 내에서도 와시트는 바즈캄, 바스라는 하산 알 바리디가 사실상 개인 영지로 지니고 있었고, 중앙정부의 권위는 땅바닥에 추락했다.

9.3. 6번 함락당한 바그다드(940 ~ 944)

바즈캄에 의해 새 칼리파로 옹립된 알 무타키는 바즈캄에게 예복과 문장을 보내며 그의 지위를 인정했다. 이리하여 절대 권력을 거머쥔 바즈캄은 941년 봄, 부관인 투준을 보내어 바스라의 하산 알 바리디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자 친히 와시트에서 남하했다. 다만 도중에 투준이 반격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와시트로 돌아갔는데, 도중에 사냥에 나섰다가 쿠르드족 유랑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바스라의 포기까지 고려하던 하산 알 바리디는 곧바로 이라크의 유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바즈캄의 사후 그의 병력 중 튀르크 용병들은 칼리파 알 무타키에게 충성했고, 1,500명의 다일람 용병들은 하산 알 바리디 측으로 전향했다. 처음으로 군대를 지니게 된 알 무타키는 바즈캄의 막대한 부 역시 소유하게 되었다. 한편 하산 알 바리디는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와시트로 북상하면서 알 무타키에게 자신의 군대에게 줄 급료를 요구했고, 응하지 않을 시에 바그다드로 진군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이에 바그다드는 혼란에 빠졌고, 알 무타키는 튀르크 군대와 함께 디얄라 운하로 진군했다. 다만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던 그는 일정 금액의 지불을 약속하는 패착을 범했다. 하산 알 바리디측의 병력은 사기가 올랐고, 튀르크인들 역시 봉급을 요구했다. 당황한 알 무타키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튀르크 병사들은 하산 알 바리디측으로 전향하거나 모술로 도주해버렸다. 이로써 알 무타키는 칼리파의 권위를 회복할 기회를 놓쳤고, 5월 31일 하산이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미르 알 우마라'의 예로써 환영받았다. 6월 4일 알 무타키의 와지르였던 아흐마드 이븐 마이문의 사임과 함께 와지르에 오른 하산은 4일 후 전임자를 사로잡아 와시트로 보냈다.

탐욕스러웠던 하산 알 바리디는 칼리파 알 무타키를 단 한 번도 알현하지 않으면서 그를 위협해 50만 디나르가 넘는 돈을 갈취했다. 하지만 그 후 병사들이 하산의 부를 탐내며 쿠란키즈 이븐 파라디의 주도하에 폭동을 일으켰다. 하산의 동생 아불 후세인의 저택이 전소되었고, 시가지 동부의 주민들 역시 가세하자 서부에 있었던 하산 알 바리디는 티그리스 강의 다리를 끊고 와시트로 도주했다. 이후 쿠란키즈가 '아미르 알 우마라'로 등극했다. 얼마 후 하산이 재차 아시트로 접근하자 쿠란키즈가 이스파한 휘하의 다일람 병력을 파견했고, 이에 하산은 바스라로 후퇴했다.

다만 쿠란키즈의 집권 역시 단기간에 그쳤고, 938년 이후 북쪽에서 힘을 기르던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가 칼리파 알 무타키의 복귀 요청에 따라 8월 말엽,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시가전 끝에 패배한 쿠란키즈는 감금되었고, 그의 핵심 세력인 다일람 용병들은 학살되었다.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의 남하에 우크바라로 피신했던 쿠란키즈는 며칠 간 이어진 전투에서 우세를 점했다. 그럼에도 8월 23일 부관 이븐 무카틸에 이어 이틀 후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가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쿠란키즈 역시 역시 하루 후에 입성하여 시가전을 벌였다.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시리아로의 귀환까지 고려했지만, 일단의 병력이 쿠란키즈 휘하 다일람 부대를 후방에서 기습하며 승기를 잡았고, 민중 역시 공격에 가세하며 승리했다. 쿠란키즈는 은거했고, 집권한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9월 22일 살아남은 다일람 용병들을 처형하고 다음날 '아미르 알 우마라'로 복귀했다. 이후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된 쿠란키즈는 궁전에 감금되었다. 9월 23일 아미르 알 우마라로 복귀한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하산 알 바리디가 와시트에서 열린 금요 예배에서 그를 칭송하는 등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 묵살하고, 10월 16일 옛 거점인 와시트의 수복을 위해 출정했다. 이에 하산은 바스라로 도주했지만, 11월 28일 투준과 누쉬타킨의 튀르크 병력이 반기를 들고 하산 측으로 전향했다.

이에 전황이 알 수 없게 되자,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의 비서 아부 압둘라 아흐마드 이븐 알리 알 쿠피의 중재하에 양측이 협상해, 하산 알 바리디가 17만 디나르를 바치고, 앞으로 60만 디나르를 연공으로 납부하는 조건으로 현상 유지의 휴전을 맺었다. 12월 9일 하산은 재차 와지르에 임명되었고, 대리인으로 아부 자파르 이븐 쉬르자드를 파견했다. 하지만 하산이 돌연 직접 바그다드로 향하려 하자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그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아부 이스학크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알 카라리티를 임명했다. 게다가 무함마드는 예배시에 하산을 저주했다. 이에 하산 역시 동생들에게 군대를 주어 바그다드로 파견했다.

942년 3월 7일 양측은 디얄라에서 충돌했고,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바그다드 주민들까지 가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11일 하산 알 바리디의 군대는 재차 바그다드에 입성했고, 전과 달리 무자비함을 보이며 칼리파의 궁전을 약탈했다.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는 칼리파 알 무타키와 그 아들을 대동하고 함단 왕조의 모술로 피신했다. 바그다드에 대한 하산 알 바리디의 가혹한 수탈은 110일간이나 이어졌고, 그동안 무려 10,000여 명이 기근, 질병, 또는 폭력으로 희생되었다. 보다못한 투준 등 튀르크 장교들이 정변을 시도했으나 발각되자 칼리파가 있는 모술로 도주했다. 이들을 환영한 함단 왕조의 수장 하산은 곧 본색을 드러내어 4월 11일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를 암살해 시리아 북부 영지를 흡수한 후, 라카브 '나시르 앗 다울라'[9]와 함께 '아미르 알 우마라'에 올랐다.

하지만 나시르 앗 다울라는 투준의 설득에 따라 칼리파 알 무타키와 함께 바그다드로 진군했고, 6월 4일 하산 알 바리디가 바그다드에 도망친 후 무혈 입성했다. 나시르는 자신의 딸을 칼리파 알 무타키의 아들과 결혼시키며 입지를 강화했다. 한편 와시트로 도주한 하산 알 바리디는 세력을 재정비한 후 동생 아불 후세인에게 군대를 주어 바그다드 수복을 시도했다. 나시르 역시 동생 알리(즉, 사이프 앗 다울라)에게 군대를 주어 맞서게 했고, 양측은 8월 16일부터 19일까지 마다인에서 격전을 벌였다. 3일간 이어진 마다인 전투에서 하산 알 바리디가 보낸 군대가 다수의 사상자를 내며 패배했다. 비록 함단 군대 역시 약화되어 아불 후세인을 추격하지 못했지만, 승장 알리는 9월 2일에 개선하여 '사이프 앗 다울라'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그 후 사이프 앗 다울라는 튀르크군과 함께 와시트를 장악하고 주둔하며, 바스라의 하산 알 바리디를 견제했다. 그러던 943년 봄, 급료 체불에 분노한 튀르크 병사들이 투준의 지휘하에 봉기했다. 5월 7일 이들은 사이프 앗 다울라의 진영을 습격해 불을 질렀고, 그는 바그다드로 도주했다. 투준은 와시트에서 허브를 가져와서 축하하는 옛 페르시아 방식으로 아미르로 추대되었다.. 함께 봉기를 주도한 카즈카즈는 '이스파살라르'(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5월 20일 하산 알 바리디와 공모했다는 혐의를 쓰고 침상에서 끌어내려져 실명당했다. 얼마 후 투준이 북상하자, 함단 왕조는 바그다드마저 포기하고 모술로 돌아갔다. 투준은 6월 3일에 바그다드를 접수하고 '아미르 알 우마라'에 올랐다. 3일 후 하산 알 바리디는 그의 부재를 틈타 와시트를 점령했고, 투준은 전향한 하산의 비서 무함마드 이븐 쉬르자드를 자신의 비서로 삼은 후 남하했다.

943년 8월, 오만의 군벌 유수프 이븐 와지흐가 샤트 알 아랍을 거슬러 올라오며 우불라를 점령하고 바스라를 포위했다. 안정을 추구하던 투준은 하산의 딸과 결혼하며 혼인 동맹을 맺었다. 오만 함대는 한 바스라 선원이 잠입하여 불을 지르자 철수했다. 944년 봄 튀르크인들이 자신의 재산을 탐낼 것을 염려하던 와지르 아불 후세인 이븐 무르카는 재차 함단 왕조에 개입을 요청했다. 이에 시리아 방면 사령관 아부 압둘라 후세인이 남하하여, 하르브 성문에 당도했다. 후세인은 칼리파 알 무타키와 함께 합류하여 모술로 향했다. 이에 놀란 투준은 하산 알 바리디에게 와시트를 영지로 내어준 후 북상하여 티크리트 부근에서 사이프 앗 다울라를 두 차례에 걸쳐 격파하고 모술을 점령했다. 함단 왕조와 칼리파 알 무타키는 니시비스로 후퇴했고, 사이프 앗 다울라는 칼리파를 호위하며 라카에 머물렀다.

한편 협상에 나선 나시르 앗 다울라는 5월 26일 모술을 돌려받는 대가로 이라크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고, 360만 디르함의 연공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휴전했다. 실망한 알 무타키는 이집트의 이흐시드 왕조 통치자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와 연락했고, 8월 이흐시드군이 북상했다. 칼리파 알 무타키를 알현한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는 882년의 경우처럼 이집트로 그를 초청하려 했지만 거부당하자 시리아에 병력을 주둔시킨 후 회군했다. 한편 투준이 안전과 충성을 맹세하며 바그다드 귀환을 청하자 알 무타키는 이에 응했다. 하지만 그가 바그다드에 당도하여 둘이 만나자, 투준은 알 무타키를 실명시키고 폐위한 후 사촌인 알 무스탁피를 칼리파로 추대했다.

바그다드는 알 무타키의 치세에 6번이나 함락되었다. 941년 5월, 하산 알 바리디가 잠령했고, 한 달 후에 쿠란키즈 이븐 파라디가 점령했으며, 두 달 후인 941년 8월 무함마드 이븐 라이크가 점령했다. 942년 3월 하산이 바그다드를 탈환했지만 3개월 후인 942년 6월 나시르 앗 다울라가 하산을 몰아내고 바그다드를 공략했다. 최종적으로 943년 6월 튀르크 장군 투준이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바그다드는 튀르크 군부의 수중에 넘어갔다.

10. 부와이 왕조의 지배(945 ~ 1056)

튀르크 대장군 투준에 의해 칼리파로 옹립된 알 무스탁피는 즉위 직후 궁궐 구석에서 11년간 유폐되고 있던 전임 칼리파 알 카히르를 석방시켰다. 하지만 알 무크타디르의 남은 자식들을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기고 박해했다. 특히 알 파딜과 그는 어렸을 때 타히리드 궁전에 머무는 동안 서로를 증오했다고 한다. 알 파딜은 두려움을 느끼고 잠적했고, 알 무스탁피는 알 파딜의 집을 불태웠다.

944년 가을, 이란의 12이맘파 국가인 부와이 왕조군이 이라크를 침공했으나 투준은 알 무스탁피를 대동하여 출정해 이를 격퇴했다. 그러나 945년 8월, 투준이 사망한 후 바그다드는 혼란에 휩싸였다. 투준의 후계자인 아부 자파르 무함마드는 정국을 장악하지 못했고, 더구나 그 해 가을 이라크에 흉년이 들어 민심 역시 흉흉해졌다. 이에 부와이군은 재차 진군하여 바그다드를 봉쇄했고, 시민들은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으며 쓰레기를 뒤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굶주림에 시달리던 민중이 폭동을 일으켜 상점들을 약탈했다.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던 아부 자파르는 북쪽의 함단 왕조에게 자신의 아미르직을 걸고 지원을 청했으나, 모술의 지도자 나시르 앗 다울라는 캅카스에서 남하하는 루스인들과 맞서느라 정신이 없었고, 알레포의 사이프 앗 다울라는 이집트의 이흐시드 왕조과 맞붙느라 역시 바그다드를 도울 수 없었다.

그때 와시트의 총독이 부와이군에 항복한 후 함께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이에 아부 자파르는 숨었고, 칼리파 알 무스탁피 역시 항복하기로 하고 부와이 측이 협상을 위해 보낸 관료를 맞이했다. 알 무스탁피는 부와이 왕조의 군주인 무이즈 앗 다울라 아흐마드에게 '아미르 알 우마라'직을 하사했고, 946년 1월 17일 그는 바그다드에 무혈 입성했다. 이후 무이즈의 이름은 칼리파 알 무스탁피와 함께 쿠트바와 동전에 새겨졌다. 하지만 그들의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이즈 앗 다울라는 튀르크 군부에 의해 옹립된 칼리파 알 무스탁피를 경계했고, 그 역시 무이즈를 축출하기 위해 장교들과 음모를 꾸몄다. 결국 946년 1월 29일 또는 3월 9일, 무이즈는 칼리파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뒤 폐위시켰다. 이리하여 순니파 아바스 칼리파조는 시아 계열 12이맘파 국가인 부와이 왕조의 치하에 넘어갔다.

파일:이슬람 제국 분열.png
10세기 아바스 칼리파조의 분열. 다만 정확한 지도는 아니니 대충 보기만 할 것[10]

부와이 왕조는 시아파 정권이었지만, 무이즈는 시아파 칼리파를 세운다면 바그다드 주변의 수니파 세력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아바스 칼리파들을 용인하되, 그들의 권력을 최소한으로 국한시키고, 재상을 부와이 왕조 출신 고관으로 임명해 바그다드 및 이라크 일대의 아바스 세력을 통제했다. 아바스 칼리파는 자신의 '찬탈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각지의 지배자들은 칼리파를 명목상 주군으로 받들었지만 사실상 독자적인 왕조를 꾸렸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서는 순니파 아바스 칼리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시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 국가인 파티마 왕조가 독자적인 칼리파를 선출하며 바그다드를 도모할 기회를 엿보았고, 한때는 이라크 일부까지 영향력을 뻗치기도 했지만 부와이 왕조의 비호로 인해 바그다드 공략에는 실패했다.

아바스 왕조 내 여러 군벌정권들이 난립한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랍어/페르시아어 시문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고대/중세 당시 시인들에게 시집 인세를 주는 것도 아니어서 당대 시인들은 황실이나 왕실에 고용되어 통치자를 찬양하는 시를 짓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는데, 아바스 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군벌 왕조 정권들이 너나 할것 없이 이런 어용 시인들을 고용했기 때문이었다.
오! 술탄이시여. 우리는 기꺼이 그대의 손을 우리의 보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손에서 끊임없이 보석의 비가 내리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너그러움과 고귀함으로 그대의 영혼을 만들기는 했지만
영혼이 고단할 때에도 숨 쉴 여력이 어떻게 남아있는지요.
아첨의 목적으로 쓰여진 시들의 수준은 위에서 보듯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임금이 체불되고 쫓겨난 어용 시인들은 복수의 목적으로 다른 문체의 시를 남기곤 했다.
발라미는 재상직을 완전히 개판으로 수행하고 있다.
쓰레기 더미에 달린 자물쇠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학자도, 귀족도, 서기도 존중할 줄 모르므로
가장 먼저 참수를 당해야 마땅하다.

11. 알 카디르(991 ~ 1031)

991년 칼리파에 오른 알 카디르는 지금까지의 칼리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12이맘파 부와이 왕조에 신종하고 시아파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 부와이 왕조의 호의를 샀다. 하지만 부와이 왕조가 수니파 가즈니 왕조술탄 마흐무드의 침략에 시달리느라 이라크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못하자, 그는 본색을 드러냈다. 1000년에 칼리파 알 카디르는 이라크의 여러 지역에 서신을 보내 지역민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촉구했으며, 1003년에는 바하로부터 수석 에미르로 임명된 아부 아흐마드 알 무사위가 수니파 관행에 반대하는 12명의 법관들을 임명하는 걸 강력히 반대해 민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1006년 4월 《쿠란》 개정판에 대해 수니파가 반대하고, 시아파가 지지하자, 칼리파 알 카디르는 개정판을 비난하는 학자 위원회를 소집하여 《쿠란》 개정판을 불태우게 하고, 이를 저주한 시아파 당주들을 처형시켰다. 바하는 병력을 보내 바그다드를 진정시켰지만, 대놓고 수니파를 옹호하는 칼리파를 어찌하지 못했다.

1010년 8월, 메소포타미아 상부의 우카일 에미르 키르와시 이븐 알 무칼라가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파티마 왕조는 수니파 아바스 왕조를 철저히 부정하고 독자적인 칼리파를 세운 시아파 정권이었기에, 바그다드 코 앞까지 그들의 영향력에 귀속된 것은 실로 큰 위협이었다. 이에 바하에게 사절을 보내 우카일 에미르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촉구했고, 키르와시는 바하의 강한 압력에 굴복하여 수니파 아바스 왕조로 돌아섰다. 한편, 성도 메카의 에미르들이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이라크에서 순례하러 온 이들을 박대하자, 사절을 보내 수니파 아바스 왕조를 따라달라고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11년 11월, 알 카디르는 수니파 학자들이 서명한 <바그다드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파티마의 교리는 거짓이라고 규탄하며,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신격화시키는 그들은 이슬람교의 적이라고 비난했다.

1012년 바하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인 술탄 알 다울라가 뒤를 이어 부와이 왕조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또다른 부와이 왕족 무샤리프 알 다울라가 반기를 들면서, 부와이 왕조는 심각한 내전에 시달렸다. 칼리파 알 카디르는 이 덕분에 시아파 부와이 왕조로부터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다. 1017년, 무타잘리 학파와 시아파의 교리를 비난하고 무타잘리 성향을 보인 하나피파 법학자들에게 속죄하라고 명령했다. 1018년 수니파 교리를 공식화한 <리살라 알 카디리야>(Risála al-Qadiryya)를 공표했다. 알 카디르는 이 칙령에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만 참된 칼리파이며,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찬탈자로 규탄하는 시아파를 비난하고, 모든 무슬림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파들의 선례를 받들라고 명령했다.

1023년, 술탄 알 다울라로부터 이라크에 대한 통치권을 탈취한 무샤리프 알 다울라가 바그다드에 찾아왔다. 알 카디르는 무샤리프에게 영예를 부여했지만, 무샤리프가 자신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튀르크 장교들에게 충성 맹세를 갱신하자 항의했다. 이에 무샤리프는 그를 달래기 위해 앞으로는 칼리파의 동의없이는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1025년 무샤리프가 승하한 뒤 무샤리프의 형제인 잘랄 알 다울라와 조카 아부 칼리자르 간에 권력 분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아부 칼리자르가 권력을 장악했고, 칼리파 알 카디르는 수석 에미르를 칼리자르에게 수여했다. 그러나 1026년 잘랄 알 다울라가 칼리자르를 물리치고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잘랄은 칼리파의 권한을 축소하려 했지만, 군대가 다시 한 번 잘랄에게 등을 돌리자 어쩔 수 없이 바그다드를 떠나야 했다.

12. 셀주크 제국의 지배(1056 ~ 1154)

아바스 왕조는 알 카디르의 활약으로 시아파 부와이 왕조로부터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고, 수니파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었지만, 1056년 오우즈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의 술탄 토그릴 1세가 부와이 왕조의 내란으로 혼란스러운 이라크를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바그다드에 입성한 뒤 셀주크 제국의 지배에 귀속되었다. 아바스 칼리파는 종교적인 권위만 겨우 유지하고, 세속 권력은 셀주크 왕조의 술탄에게 모조리 내주었다.

그러던 1099년 7월 15일, 제1차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이 소식이 바그다드에 전해지자, 곳곳에서 울음과 탄식이 쏟아졌고 설교자들은 거리를 돌며 애도하라고 외쳤다. 카디 이부 사드 알 하라위는 십자군을 피해 바그다드로 피신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이끌고 칼리파의 궁정 앞에서 지하드를 선포하라며 거센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아바스 칼리파에게는 병력을 동원할 권한이나 능력이 없었고, 실질적으로 이슬람 세계를 이끌던 셀주크 제국은 심각한 내전으로 인해 십자군에 반격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아바스 칼리파였던 알 무스타지르는 이러한 현실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여기고 시민들의 지하드 선포 요구를 무시했다.

1118년 알 무스타지르의 뒤를 이어 칼리파에 오른 알 무스타르시드는 무기력했던 아버지 알 무스타지르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셀주크 제국이 잦은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독립하여 아바스 왕조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했다. 그는 친위대를 독자적으로 조직하고 1125년 3월 셀주크 술탄 마흐무드 2세가 경쟁자인 아제르바이잔의 토그릴과 싸울 때 지원군을 보내줘서 마흐무드 2세의 호의를 얻었다. 그러나 알 무스타르시드가 이라크 남부를 통일하기 위해 환관 아피프에게 군대를 주어 와시트로 쳐들어가서 공략하자, 셀주크의 마흐무드 2세는 아바스 칼리파가 자립하려 한다는 걸 깨닫고 장기에게 물리치라고 명령했다. 그해 12월, 장기는 와시트 인근에서 아피프의 아바스 칼리파군을 물리쳤다. 1126년 1월, 셀주크의 마흐무드 2세는 바그다드로 진격했고, 셀주크 군대가 아바스 칼리파 궁전을 약탈했다. 하지만 바그다드를 약탈하는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민병대를 조직하여 칼리파군을 도와서 셀주크군을 물리쳤다.

마흐무드 2세는 바스라의 셀주크 총독 이마드 앗 딘 장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1126년 2월 바그다드에 당도한 장기는 아바스 칼리파군을 재차 격파했다. 그리하여 바그다드는 셀주크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는 궁궐에 연금된 채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마흐무드 2세는 2개월 후 장기에게 바그다드를 맡기고 하마단으로 귀환했고, 장기는 이듬해 모술과 알레포의 '아타베그'로 봉해졌다. 1128년 아흐마드 산자르가 장기 대신 두바이스를 모술 총독에 봉하라고 압력을 넣자, 마흐무드 2세는 장기에게 모술 퇴거를 요구했다. 그러나 장기는 무력 시위를 벌이는 한편 10만 디나르를 산자르에게 보냈고, 산자르는 요구를 취소했다. 이후 입지를 강화한 장기는 1129년 셀주크 제국 서부 지역 전체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예복을 하사받고, 훗날 유럽 십자군에 맞서 싸우게 될 장기 왕조를 세웠다.

1131년 셀주크의 마흐무드 2세가 붕어한 뒤 아들 다우드가 계승했다. 그러나 숙부 마수드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셀주크 제국은 또다시 내란에 휩싸였다. 그때까지 궁궐에서 조용히 지내던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는 1132년 3월 27일 금요 예배를 진행하던 중 쿠트바(금요 예배문)에서 셀주크 황족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드러낸 것이었다. 이후 알 무스타르시드는 군대를 일으켜 힐라를 공략하는 등 이라크 중부에 대한 정복 사업에 나섰다.

1132년 5월, 마수드는 다우드 지지를 표방한 아흐마드 산자르에게 패배하고, 산자르에게 복속해 아제르바이잔 총독으로 봉해졌다. 그해 6월, 마수드는 모술의 장기에게 아바스 칼리파군을 물리쳐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장기는 모술에서 출발하여 그해 8월에 칼리파군과 대치했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전투 개시 전에 성유물로 전해지던 예언자 무함마드의 옷을 걸치고 전투에 임했고, 장기의 무슬림 병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전투를 거부했다. 이리하여 대패한 장기는 추격당하다가 티크리트 총독 아이유브가 도와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이 승리로 이라크의 패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1132년 12월, 마흐무드 2세의 아들 다우드 술탄이 토그릴에게 패배해 아제르바이잔을 잃고 삼촌 마수드와 함께 바그다드로 도주했다. 1133년 1월, 마수드는 알 무스타르시드로부터 셀주크 술탄으로 책봉받았다. 그 후 다우드와 마수드는 아바스 칼리파군과 함께 북상하여 그해 5월 토그릴을 격파하고 하마단에 입성했다. 그러나 마수드는 승리 직후 칼리파에게 등을 돌리고 하마단에서 자립했다. 이에 분노한 알 무스타르시드는 다우드, 토그릴과 연합하여 재차 북상해 7월 26일 마수드와 손을 잡고 있었던 장기의 모술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8일간 포위전을 벌이던 중 마수드의 원군이 당도하자 후퇴했다. 이후 마수드는 하마단, 다우드는 하산케이프에서 공존했다.

1134년 4월, 장기는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와 연합하여 하산케이프를 공격했다. 그해 6월엔 마수드가 토그릴에게 하마단을 잃고 바그다드에 재차 망명했다. 하지만 알 무스타르시드는 배신한 전적이 있는 마수드를 불신했고, 그해 10월 마수드를 바그다드에서 추방했다. 그런데 얼마 후 토그릴이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자, 마수드는 재빨리 주인이 없는 하마단을 접수하여 세력을 회복했다. 이리하여 마수드와 아바스 칼리파 간의 전쟁이 임박하자, 장기는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한 끝에 아들에게 모술의 열쇠를 주어 칼리파에게 보내도록 했다. 그러나 장기는 1135년 이라크 대신 다마스쿠스 원정에 떠나면서 둘간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장기에게 사절을 보내 다마스쿠스의 독립을 존중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장기는 다마스쿠스의 지배자인 부리 왕조가 자신에게 복속하고 볼모를 보내는 대가로 철군했다.

1135년 5월, 아바스 칼리파 측의 모술-바스라 연합군이 두바이스와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이에 바스라 총독 베그 아비는 비밀리에 마수드에게 귀순했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1135년 5월 25일 바그다드에서 출진하여 하마단으로 진격했다. 술탄 마수드 역시 셀주크 황실에 충성하는 제후들을 모두 소집해 맞서 싸우기로 했다. 마수드는 알 무스타르시드가 자그로스 산맥을 지나 하마단으로 진군하도록 내버려뒀다. 이후 칼리파군이 케르만샤에 당도하자 마침내 출진했다. 1135년 6월 22일 양군이 다이마르크에서 대치했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장병들이 험준한 산지를 지나면서 피폐해진 데다가 전면에는 대규모의 셀주크군 기병대가 있고 후방에는 자그로스 산맥이 가로막은 형국에 처해 빠져나갈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필사적으로 싸워서 길을 열기로 마음먹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6월 24일에 벌어진 다이마르크 전투는 바스라군의 갑작스러운 배신으로 인해 아바스 칼리파군의 완패로 끝났고, 알 무스타르시드는 생포되었다. 이후 막대한 배상금을 내주고 바그다드 궁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면받았고, 마수드가 하마단에 개선할 때 동행해야 했다.

마수드는 베그 아비를 바그다드 총독으로 임명했고,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바그다드의 성벽 일부를 허물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평정하던 마수드는 대술탄이자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의 장인이기도 했던 아흐마드 산자르로부터 두바이스를 넘길 것을 요구받았다. 마수드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자, 산자르는 하마단에 군대를 보내 압력을 가했다. 마수드는 산자르와 일전을 벌이기로 했지만, 칼리파가 호응할 것을 우려해 알 무스타르시드의 폐위를 선언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추방하기로 했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바그다드를 떠나 아제르바이잔으로 이동하다가 1185년 8월 29일 하마단 외곽에서 산자르의 군대와 마주쳤다. 이에 재기를 노리며 산자르의 군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막사에서 암살당했다.

뒤이어 칼리파에 선임된 알 라시드는 술탄 마수드가 아버지 알 무스타르시드를 암살했다고 확신하며, 마수드에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전쟁 배상금을 요구하는 술탄의 사절단과 셀주크 측 바그다드 총독 베그 아바를 축출한 후 도시 성벽을 재건하며 공성전에 준비했다. 그러면서 모술의 장기와 연대했고, 11월엔 마수드와 대립하던 조카 다우드가 바그다드에 당도해 아바스 칼리파 진영에 가담했다. 11월 22일의 쿠트바(금요일 예배문)에선 마수드와 산자르 대신 다우드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1136년 5월, 알 라시드는 재건된 칼리파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러나 6월에 장기가 마수드의 매복 계획을 알려주자 회군했다. 그리고 장기 역시 7월 이라크로 진군하여 마수드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알 라시드가 술탄 측과 협상에 나서자 실망하여 모술로 귀환했다. 마수드는 장기가 돌아가자마자 강경한 태도로 나왔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후 마수드는 남하하여 1136년 8월 3일부터 바그다드를 포위했다. 티그리스 강과 복잡한 운하를 갖춘 바그다드 성채는 굳건히 버텼고, 셀주크군의 습격은 번번히 격퇴되었다. 그러나 알 라시드는 식량이 부족해지자 함락이 머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장기의 초청을 받아들여 모술로 피신했다. 칼리파가 떠나자 항전의 의욕을 상실한 바그다드는 다음날인 8월 15일에 셀주크군에 항복했다. 그렇게 바그다드를 떠난 알 라시드는 장기의 보호를 받다가 마수드의 압력을 받은 장기에게 쫓겨나 아제르바이잔 서부의 다우드 진영으로 피신했으나, 1138년 6월 6일 아사신에게 암살당했다.

13. 2차 중흥기(1154 ~ 1258)

13.1. 알 묵타피(1136 ~ 1160)

알 라시드가 축출된 뒤 셀주크 술탄 마수드에 의해 새 칼리파로 옹립된 알 묵타피는 셀주크 제국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고 바그다드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1154년, 셀주크 제국이 심각한 내전과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사실상 붕괴되자, 아바스 왕조를 중흥시킬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알 묵타피는 1154년에 거병하여 힐라와 와시트 등 이라크의 중남부를 공략했다. 1155년, 그는 무함마드 2세와 내전을 치르고 있었던 쉴레이만샤와 협상한 끝에 그가 이라크에 개입하지 않는 조건하에 술탄으로 인정하고 '알 말리크 알 무스타지르' 칭호를 선사했다. 그러나 1156년 봄, 쉴레이만샤가 하마단으로 남하하다가 그해 초여름에 무함마드 2세에게 참패하고 사로잡혔다. 이와 동시에 이란 서부(지발)에 대한 아바스 칼리파군의 공격 역시 격퇴되었다. 무함마드 2세는 여세를 몰아 알 묵타피를 응징하기로 작정하고, 1157년 1월 모술의 쿠트브 앗 딘(장기 왕조)과 함께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알 묵타피는 바그다드 방어를 위해 힐라와 와시트의 주둔 병력을 불러들였다.

1157년 1월 12일, 셀주크의 무함마드 2세는 30,000명의 병력으로 바그다드를 포위했다. 술탄 측이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형세를 관망하던 알 묵타피는 티그리스 강 서안의 구시가지(원형도시)를 포기하고, 성벽이 짧아 방어에 용이한 동안의 신시가지로 병력을 옮기도록 지시했다. 이후 양안을 이어주는 교각 모두를 파괴하고 동안의 성벽을 강화했다. 무함마드 2세는 서안에 진영을 세우고 여러 개의 투석기와 발리스타 등을 배치했다. 한편 알 묵타피는 칼리파의 적이자 불신자인[11] 술탄에 맞서도록 호소하며 시민들에게 무기를 주어 부족한 병력을 보충했다. 또한 재상 아운 앗 딘 이븐 후바이라를 시켜 부상당한 병사들 모두에게 각각 5 디나르를 주도록 지시했다. 1개월 반 가량의 준비와 탐색전 끝에 본격적인 공방전은 1157년 3월부터 일어났다.

3월 4일, 술탄은 모술의 재상 자인 앗 딘과 함께 무자비한 폭격 후에 총공격을 시도했다. 바그다드 수비대는 시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수비에 매진하고 석유를 이용한 화공을 통해 공격을 격퇴했다. 이에 굴하지 않은 무함마드 2세는 이번에는 끊어졌던 교량들의 복구를 지시했고, 3월 29일에 완공되자 병력을 강 건너로 옮겨 동안의 성벽을 공격했다. 소규모 전투가 벌어진 후 또다시 공성전이 벌어졌는데, 수비군은 화공을 통해 적의 투석기를 파괴했고 성벽의 투석기로 적의 파성추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무함마드 2세는 군대를 재정비한 후 섣부른 공격 대신 도시를 봉쇄하고 기다리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6월 29일, 공격군은 400개의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넘으려 시도했으나 수비군의 맹렬한 화살 세례에 큰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같은 시기 야곱의 여울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리던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은 아바스 칼리파의 영토를 침공한 동생 쿠트브 앗 딘을 꾸짖었다. 길어지는 전쟁에 실증이 나있던 쿠트브 앗 딘의 재상 자인 앗 딘은 이를 핑계로 전선을 이탈해 모술로 돌아갔다. 이로써 셀주크 제국장기 왕조 간의 동맹과 주종관계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한편 술탄이 오랜 기간 수도를 비운 사이에 폐위된 말리크샤 3세가 하마단을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무함마드 2세 역시 7월 13일, 바그다드를 포기하고 북상하면서 알 묵타피와 평화협약을 맺었다. 그 후 알 묵타피는 티크리트 탈환을 위해 2차례 원정을 감행했지만 실패했고 1160년 3월에 붕어했다.

13.2. 알 무스탄지드알 무스타디(1160 ~ 1180)

파일:1280px-Syrischer_Maler_des_Kräuterbuchs_des_Dioskurides_001.jpg파일:1280px-Arabischer_Maler_des_Kräuterbuchs_des_Dioskurides_001.jpg
1160년경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어 약초학 서적. 후기 압바스 조의 화풍은 '바그다드 사조'라 부른다.

아버지 알 묵타피의 뒤를 이어 칼리파에 즉위한 알 무스탄지드는 아운 알딘 이븐 후바이라를 재상에 임명하고 내정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바그다드는 오랜 전란에서 벗어나 평온을 되찾았으며, 한발리파 성향의 이슬람 교리서들이 대거 출판되었다. 그러나 선대 때부터 16년간 재상으로서 아바스 왕조를 충실히 섬겼던 아운 알딘 이븐 후바이라는 1165년 3월 27일 정적들의 뇌물을 받은 주치의에게 독살당했다.

1163년, 아바스 칼리파 군대는 엘힐라를 점령하며 바누 마즈야드 토후국을 멸하였고, 1167년에는 후제스탄의 군벌 슈믈라의 침공을 격퇴했다. 한편 서쪽에선 누르 앗 딘 장기의 수하인 시르쿠와 살라흐 앗 딘이 시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 국가인 파티마 왕조가 통치하는 이집트 침공을 준비했다. 알 무스탄지드는 누르 앗 딘에게 카라크를 공격하도록 하는 등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성전)을 독려했고, 살라흐 앗 딘에게는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아디드를 폐위하고 수니파를 복구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1170년 12월 18일, 알 무스탄지드는 파티마 왕조의 멸망을 보지 못한 채 붕어했다.

뒤이어 칼리파에 오른 알 무스타디알 무크타피가 건설했지만 파괴되었던 알타지 궁전을 재건했으며, 모스크, 학교, 종교 기관들을 바그다드에 잇따라 설립했다. 왕비 바나프 샤는 한발리파 추종자로서 그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고, 1174년 티그리스 강에 다리를 건설하는 사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1171년 9월,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아디드가 붕어하고, 아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디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쿠트바)가 진행되면서 이집트가 200년 만에 수니파로 복귀했다. 성지 메카메디나의 아미르들 역시 살라흐 앗 딘과 아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디에게 복속했다. 1173~1174년에는 후제스탄의 튀르크계 군벌 슈믈라가 이라크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지만 격퇴되었다. 한편 1174년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이 승하하자 살라흐 앗 딘시리아 남부를 석권하며 급부상했다.

1175년 살라흐 앗 딘은 시리아의 왕을 칭했고, 하마 전투에 이어 1176년 4월 알레포에서 사촌을 도우러 온 모술의 아미르 사이프 앗 딘을 격파했다. 그해 5월, 알 무스타디는 살라흐 앗 딘을 술탄으로 책봉하고 예복을 하사하며 1년 내로 예루살렘을 회복할 거라며 격려했다. 이후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과 십자군의 예루살렘 왕국 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이어지던 1180년 3월에 알 무스타디가 붕어했다. 사후 아들 알 나시르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13.3. 앗 나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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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3년 앗 나시르가 건립한 앗 사라이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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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년 알 무스탄시르가 세운 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

알 나시르는 아바스 칼리파조의 황금기를 재현하겠다는 야망에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는 먼저 지지세력을 최대한 끌어모으고자 했다. 당시 이라크와 이란 일대에는 '푸투와'(futuwwa)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이들은 종교 결사의 형태로 여러 도시에 자리를 잡고, 서로 연계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알 나시르는 이들을 활용하여 아바스 칼리파조의 부흥을 이끌기로 마음먹었다. 1182/1183년, 바그다드의 푸투와 지도자이자 라하시야 가문의 장로인 라하시야는 알 나시르에게 "푸투와 로브"를 입혔다. 그 직후, 알 나시르는 자신을 모든 푸투와의 우두머리라고 선언했다. 이후 울라마, 군인, 고급관료 등이 푸투와에 귀속되어 친목을 두텁게 다지고, 아바스 칼리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82년 11월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이 모술을 포위했다. 알 나시르는 살라흐 앗 딘이 이라크의 지척인 모술까지 공략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모술을 구하고자 북상했다. 이와 동시에 셀주크 제국토그릴 3세도 군대를 이끌고 모술로 남하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슬람교의 수장인 아바스 칼리파와 대적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철수했다. 1183년에서 1184년, 알 나시르는 키르쿠크 남쪽의 다쿠르를 공략했다. 1186년, 살라흐 앗 딘이 모술의 복종을 받아내면서 레반트 일대의 이슬람 지역을 통합했다. 그 후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뒤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을 공략했다. 이리하여 메카, 메디나에 이은 이슬람 제3의 성도가 한 세기 만에 아바스 칼리파 알 나시르의 이름하에 수복되었다.

한편, 1186년 이란 동부의 케르만에 있었던 셀주크 제국오우즈 튀르크의 침공으로 붕괴되고, 무함마드 이븐 바흐람 샤가 도주했다. 이제 셀주크 제국의 영역은 이란 서부로 한정되었으나, 그마저도 토그릴 3세와 키질 아르슬란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다. 토그릴 3세는 바반드 왕조의 후삼 앗 다울라 등 왕공들의 지원에 힘입어 맘루크와 마라가, 젠잔 에미르들의 지원을 받은 키질 아르슬란을 수도 하마단에서 몰아냈다. 키질 아르슬란은 북부 산악지대로 도주한 뒤, 11월 7일 아잠을 떠나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한 후 바그다드에 사절을 보내 셀주크 술탄의 커져가는 힘을 경고하며 칼리파에 복속하는 대가로 지원군을 청했다. 아잠 일대를 장악한 토그릴 3세 역시 사절을 보내와 자신을 술탄으로 책봉하고 자신이 거주할 바그다드의 다르 알 술탄(술탄 궁전)을 보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알 나시르는 키질 아르슬란과 토그릴 3세 중 어느 쪽을 선택할 지를 고심한 끝에 술탄 궁전을 흔적도 없이 밀어버리며 노선을 확실히 했다. 이후 60만 디나르를 들여 군대를 대대적으로 편성해, 1158년 15,000명의 기병대를 확보했다. 그해 4월, 알 나시르는 와지르 잘랄 앗 딘 우바이둘라 이븐 유누스를 사령관으로 세우고 토그릴 3세 토벌 임무를 맡겼다. 유누스는 키질 아르슬란과의 합류도 기다리지 않은채 곧바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하마단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던 1188년 5월 5일, 토그릴 3세의 군대와 다이마르그에서에서 마주치자 곧바로 공격했다. 그러나 족장 마흐무드 바르잠 알 이바이 휘하의 튀르크멘 병력이 셀주크 술탄 진영으로 배신하는 바람에 아바스 칼리파군은 패배했고, 유누스는 사로잡혔다.

하지만 알 나시르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이라크 전역에서 긁어모은 세금으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여 1188년 7월 재차 출진했다. 이때 토그릴 3세는 휘하의 주요 아미르들 중 아이바와 오자다 등을 처형했다. 이 행위에 부하들은 동요했고, 앞서 전향했던 쿠틀루그 이난즈가 재차 토그릴 3세의 진영을 떠나 키질 아르슬란 편에 가담했다. 키질 아르슬란은 1년만에 아잠으로 귀환했고, 이번에는 아바스 칼리파 군대도 약속한 장소에서 합류했다. 연합군은 어렵지 않게 하마단을 점령했고, 토그릴 3세의 5촌 당숙인 산자르 이븐 쉴레이만 샤를 셀주크 술탄으로 추대했다.

토그릴 3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잠을 포기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했다. 그는 튀르크멘 영주 이즈 앗 딘 하산 이븐 킵차크의 성채에 피신한 뒤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살라흐 앗 딘은 안티오크 공국 원정 도중 군대가 지쳐 후퇴하던 터라 여유가 없어서 응하지 않았다. 알 나시르는 여세를 몰아 티크리트에 대한 지배권을 수복했다. 이렇듯 아바스 왕조가 강성해지자, 1189년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 아바스 칼리파에 대한 예배를 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그들과 친선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토그릴 3세는 마지막 시도로 키질 아르슬란과 알 나시르에게 사절을 보냈다. 특히 알 나시르에겐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사절단을 바그다드로 파견해 자신을 대신해 사과하게 하고, 이븐 유누스에게 가한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했으며, 칼리파의 명령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키질 아르슬란과 알 나시르 둘 다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결국 1190년 10월 토그릴 3세는 킵차크 성채에서 2년간의 포위 공격을 견딘 끝에 키질 아르슬란에게 항복했다. 그 후 그는 아들 알프 아르슬란과 함께 타브리즈 인근의 카흐란 성채에 구금되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키질 아르슬란은 알 나시르의 동의하에 술탄 산자르를 폐위하고 형수 이나츠 카툰과 결혼한 후 하마단에서 자신을 셀주크 술탄으로 선포했다. 이리하여 동맹이 아잠 일대를 통치하게 됨으로써 북방 전선이 안정되자, 알 나시르는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하디싸와 아나를 공략하는 등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런데 1191년 8/9월, 키질 아르슬란이 암살당했다. 키질 아르슬란 사후 그의 네 조카인 아부 바크르, 오즈베그, 쿠틀루그 이난즈, 아미르 아미란이 골육상쟁을 벌였다. 셀주크 내전은 1195년 누스라트 앗 딘 아부 바크르가 아제르바이잔을 석권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1192년 5월에 자한 팔라반의 맘루크 마흐무드 아나스 오글루에 의해 유배지에서 풀려난 토그릴 3세는 아부 바크르의 추격병들을 따돌리고 재차 튀르크멘들을 포섭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이후 동쪽으로 진군하여 그해 6월 22일, 카즈빈 부근에서 쿠틀루그 이난즈와 아미르 아미란 형제를 격파한 뒤 하마단에 입성하고 셀주크 술탄에 복위했다. 아잠에서 축출된 쿠틀루그 & 아미란 형제는 아제르바이잔의 아부 바크르에게 도전했으나 이 역시 패배하자 각자 라이와 시르반으로 도주했다. 그 중 라이로 도주한 쿠틀루그는 호라즘 왕조의 테키쉬에게 도움을 청했다.

테키쉬는 세력을 확장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호라즘 군대를 이끌고 라이로 진군했다. 그리고는 쿠틀루그를 쫓아내고 라이를 장악했다. 셀주크의 토그릴 3세가 호라즘 왕조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자, 테크쉬는 협상을 제안했다. 토그릴 3세 역시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호라즘 왕조와 전쟁을 벌이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딸을 호라즘 왕자 유누스 칸과 약혼시켰다. 하지만 테키쉬가 동생 술탄 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잠의 세금을 거둔 후 회군하자, 토그릴 3세는 준비한 군대를 이끌고 출진해 1193년 3월 호라즘 왕조의 라이 총독 탐가치를 죽이고 라이를 공략했다. 테크쉬는 결혼동맹을 맺기로 해놓고 뒤통수를 날린 셀주크의 토그릴 3세에게 분노해 복수를 꾀했다.

토그릴 3세는 테크쉬의 임박한 반격에 대비해 쿠틀루그와 화해하고 그의 모친 이나츠 카툰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나츠 카툰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 정황이 드러나자 그녀를 살해했다. 쿠틀루그는 잔잔으로 도주한 뒤 호라즘의 테크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 시기에 아바스 칼리파 알 나시르 역시 테크쉬에게 사절을 보내 셀주크의 토그릴 3세를 응징해달라고 요청했다. 테크쉬는 일단 7,000명의 호라즘 병력을 파견해 쿠틀루그를 지원하게 했다. 1194년, 토그릴 3세는 쿠틀루그를 공격해 단숨에 물리쳤다. 쿠틀루그는 셈닌으로 도주해 호라즘군 본대와 합류했다. 한편 호라즘 측의 '하집'(관료) 시하브 앗 딘 마수드가 테키쉬의 아들을 술탄 휘하의 라이 총독으로 임명한 뒤 토그릴 3세에게 휴전 협상을 제안하며 우선 사베흐로 철수하라고 권고했다.

토그릴 3세는 아미르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는데, 화의를 수용하거나 최소한 잔잔과 이스파한의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다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전투를 결심했다. 이는 쿠틀루그 이난즈로부터 전투 때 호라즘군을 배신하고 그 편에 들겠다는 서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토그릴 3세는 라이로 향한 뒤 전투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확신하며 궁전에서 유희를 즐겼다. 1194년 3월 19일, 테키쉬의 호라즘 대군이 모습을 보이자 토그릴 3세는 농성 대신 셀주크 군대를 이끌고 회전에 나섰다. 술탄 토그릴 3세는 별다른 작전도 없이 호라즘군의 선발대 중앙부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를 직감한 아미르들은 요지부동이었고, 오직 60명의 근위대만이 술탄의 무모한 돌격에 함께했다. 짧은 전투 끝에 토그릴 3세는 눈에 부상을 입고 낙마했고, 그와 악연을 이어가던 쿠틀루그 이난즈가 나서 목숨을 애걸하는 술탄을 참수했다. 이리하여 셀주크 제국은 멸망했고, 토그릴 3세의 수급은 바그다드에 보내졌다. 알 나시르는 이를 궁전 앞의 누비 성문에 메달아 과거 셀주크 술탄들에게 핍박받았던 선대 칼리파들의 넋을 기렸다.

호라즘 왕조는 셀주크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하마단에서 메르브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알 나시르는 아바스 칼리파조를 오랜 세월 핍박한 셀주크 제국을 무너뜨린 호라즘샤 테키쉬를 치하하면서 아잠 지역의 전체 혹은 일부를 환원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시당했다. 급기야 테키쉬는 칼리파의 승인없이 기존의 호라즘샤 칭호 대신 술탄을 칭하며 위세를 드러냈다. 알 나시르는 와지르 무아야드 앗 딘 이븐 알 카사브에게 예복을 주고 군대와 함께 이란으로 파견했다. 이븐 알 카사브는 테키쉬에게 바그다드로 와서 칼리파에게 복종을 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테키쉬가 자신을 치려 들자, 카사브는 바그다드로 도주했다. 알 나시르는 바그다드로 돌아온 앗 카사브에게 와지르의 예복을 내리며 칼리파의 권위를 세워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이후 알 나시르는 알 카사브에게 군대를 주어 이븐 샤믈라가 사망한 뒤 혼란에 빠져있었던 후제스탄을 공략하게 했다. 아바스군은 별 어려움 없이 후제스탄 일대를 평정했다. 이후 카사브가 아잠으로 진군하자, 셀주크 술탄 토그릴 3세를 배신한 공으로 호라즘 왕조의 아잠 총독으로 봉해진 쿠틀루그 이난즈가 재차 배신하여 아바스 칼리파 측으로 전향했다. 미산에서 합류한 둘은 진군을 계속하여 케르만샤하마단을 점령했고, 테키쉬의 아들과 그가 이끌던 수비대를 사로잡았다. 이란 서부를 평정한 이븐 알 카사브는 동진하여 라이를 점령했고, 비슷한 시기 이스파한의 유력자들의 요청으로 알 나시르가 파견한 별동대가 일대를 장악했다. 이로써 아잠과 지발 지역은 약 200년만에 아바스 칼리파조의 영토로 돌아왔다. 이렇듯 원정이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이란인들이 호라즘 세력을 이방인 혹은 야만인으로 여기고 칼리파군에 열렬한 호응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크쉬는 자신을 셀주크 제국의 후예로 여기고 이란 전체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기에 그리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의례적으로 알 칼사브에게 철수를 요구한 후, 예상대로 거절당하자 호라즘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그런데 알 나시르에겐 불행하게도, 1196년 7월 원정군 사령관 이븐 알 카사브가 하마단에서 급사했다. 졸지에 지휘관을 잃은 칼리파군은 마단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퇴했고, 테키쉬는 하마단에 입성한 뒤 얼마 동안 머무른 후 본진인 호라산으로 귀환했다. 1197년 알 나시르는 재차 하마단 공략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1198년 아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테키쉬는 알 나시르에게 쿠트바(금요 예배문)에서 자신을 술탄으로 언급하라고 요구했으며, 더 나아가 바그다드에 대한 세속 지배권까지 청구했다.

알 나시르는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신흥 강국인 구르 왕조의 술탄 기야스 웃딘 무함마드에게 동맹을 제시하여, 테키쉬의 아바스 칼리파 영토 침범을 저지하도록 했다. 기야스 웃딘 무함마드는 이를 수락하고 호라산 남부로 진격해 카라 키타이-호라즘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 일대를 평정했다. 이에 테키쉬가 협상을 청하자, 기야스 웃딘은 아바스 칼리파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다. 테키쉬는 이를 받아들이고 칼리파 알 나시르에게 용서를 구했다. 알 나시르는 호라즘 왕조가 충분히 약해졌고, 구르 왕조가 지나치게 크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1198년 알 나시르는 선물과 함께 이라크 아잠(이란 서부), 호라산, 투르키스탄의 술탄으로써 예복을 보냈고, 테키쉬는 바그다드에 대한 지배권이나 쿠트바 언급 요구를 철회하고, 아바스 칼리파에 명목상 복속했다.

그후 아바스 왕조와 호라즘 왕조는 평화를 유지했지만 1200년 7월 테키쉬가 승하하고, 새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가 등극한 뒤 시아파 칼리파를 옹립하고 바그다드를 위협하면서 또다시 갈등이 일어났다. 알 나시르는 이에 분노했지만 무함마드가 주변 일대를 모조리 평정하는 등 왕성한 군사 활동을 벌이는 상황이었기에 함부로 적대하지 못했고, 단지 호라즘에서 바그다드를 거쳐 메카로 순례하는 이들을 박대하는 정도에 그쳤다. 1217년, 무함마드는 자카르테스 강에서 걸프 만까지 이르는 일대를 평정한 뒤 자신을 '샤'라고 선언하고 칼리파 알 나시르에게 공식적인 인정을 요구했다. 그가 거부하자, 무함마드는 호라즘 군대를 모아 칼리파를 폐위시키기 위해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그러나 자그로스 산맥을 건널 때 눈보라를 만나는 바람에 수천 명의 동사자가 발생하자 어쩔 수 없이 철군했다.

1219년 아이유브 왕조의 신임 술탄 알 카밀이 이집트로 쳐들어온 제5차 십자군에 맞서기 위해 칼리파 알 나시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알 나시르는 지하드를 선포하며 대규모의 지원군을 약속했다. 하지만 얼마 후 제5차 십자군이 궤멸되면서, 실제로 파견되지는 않았다.

1220년 칭기즈 칸이 15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왕조로 쳐들어가면서 몽골-호라즘 전쟁이 발발했다. 3년 전에 자신을 폐위시키기 위해 쳐들어왔다가 눈보라에 막혀 돌아갔던 무함마드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알 나시르는 몽골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 대신 이단자를 심판해줘서 고맙다며 막대한 선물을 안겼다. 이후 호라즘 왕조는 몽골에게 잔혹하게 정복되었고, 몽골 제국과 아바스 칼리파조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알 나시르는 아바스 왕조의 제2차 중흥기를 이룩한 명군이었다. 그는 45년에 이르는 긴 치세 동안 쿠르드 지방을 제외한 현 이라크 일대와 후제스탄을 공략하여 아바스 왕조의 영역을 930년대 이후 최대로 넓혔으며, 내치를 훌륭하게 다져 이라크와 바그다드가 9세기 이후 유례없는 평화를 누리도록 했다. 그가 1225년에 붕어한 후에도 그가 이룩한 업적은 고스란히 이어졌고, 아바스 칼리파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다. 제37대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1242년 이집트의 술탄에 오른 샤자르 앗 두르가 여자인 점을 문제삼아 인정하지 않으면서,
"너희가 술탄이 될 남자를 찾지 못한다면 내가 한 사람을 보내겠다."
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이집트의 맘루크 에미르들이 권고를 따르지 않았지만,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할 정도로 아바스 칼리파의 권위는 강력해졌다.

그러나......

14. 1258년, 몽골에 의한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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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대 칼리파이자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였던 알 무스타심이 지배한 지 16년차인 1258년, 몽골 제국이 쳐들어왔다. 몽골군은 몽골 고원에서 시작해 북중국중앙아시아, 동유럽, 고려 등을 싹 쓸었고 제4대 헌종 몽케 칸의 시대에 들어서 이전에 잠시 지지부진했던 세계정복을 막 재개한 상태였다. 몽골군의 지휘관 보르지긴 훌라구는 항복을 요구했지만 마지막 칼리파였던 알 무스타심은 처음에는
"마그리브[12]에서 이라크까지 모든 무슬림들이 날 구하러 올 것이다."
라며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도와줄 생각을 안 했기에 결국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훌라구에게 몸소 찾아가 부하들과 주민들은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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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되는 바그다드

그래서 바그다드는 항복했지만 처음부터 항복하지 않은 적군에 대한 몽골군의 조치는 늘 그렇듯이 대량학살파괴로 끝났다. 그래도 알 무스타심 본인은
"군주는 피를 흘리면 안 된다"
는 관례에 따라 자루에 넣고[13] 달리는 말들의 말발굽에 밟혀 압사시켰다.[14] 이리하여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었던 수니파 아바스 칼리파조는 파란만장한 오랜 역사를 마감하고 비참하게 멸망했다.

15. 카이로 아바스 왕조(1261 ~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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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압바스 칼리파 영묘군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용병으로 일하던 맘루크들은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의 침입을 저지하고 아이유브 조 술탄을 쫓아낸 후, 맘루크 왕조를 창건했다. 노예 출신이었기에 정통성이 떨어졌던 맘루크들은 아바스 칼리파의 후예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1261년 술탄 바이바르스는 살해당한 알 무스타심의 먼 친척[15] 알 무스탄시르 2세카이로로 초빙한 뒤 새 칼리파로 옹립했다. 이리하여 아바스 왕조는 형식상으로나마 부활했다. 이때부터를 카이로 아바스 왕조[16]라고 하고, 이전을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라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은 맘루크 술탄에게 있었고, 아바스 칼리파는 종교적인 권위만 가졌다. 그나마도 일생 동안 궁궐 구석에 틀어박힌 채 지내야 했다. 게다가 내전이 일상적이었던 맘루크 왕조였기에 그들이 칼리파 자리를 온전히 누리기도 힘들었다. 술탄들은 전임 술탄이 세운 칼리파를 그대로 놔두지 않고 폐위하곤 했으며, 폐위되었던 칼리파가 나중에 복위했다가 또다시 폐위당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당연히 칼리파들은 자신들의 이같은 처지에 불만을 품었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진정한 군주가 되려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그러다가 1516년 마르즈 다비크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군을 섬멸하고 1517년 이집트에 입성한 오스만 제국셀림 1세가 카이로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알 무타와킬 3세로부터 칼리파 직위를 양도받으면서[17], 아바스 칼리파조는 공식적으로 소멸되었다. 이때부터 오스만 제국의 황제가 공식적으로 칼리파를 겸하게 되었다.

[1] 다만 시간이 흘러 시아파 내부에서도 자해를 하는 것도 결국 알라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라 하람에 해당되는 것이니 차라리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헌혈을 하는 것이 알라와 후세인을 더 기분 좋게 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이 나와서 요즘은 자해는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는 정도로 끝낸 뒤 헌혈 시설에 찾아가 헌혈을 하는 것으로 개선되었다. 그래서 아슈라 기간에 한국에 와있는 시아파 무슬림들은 헌혈의 집을 많이 찾는다고.[2] 아랍어로 '뱀의 똬리' 혹은 '뒤틀린'이란 뜻이다.[3] 알 무타와킬의 본명은 '자파르'였다.[4] 대표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주민들이 인두세를 면제받기 위해 모조리 명목상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여전히 기존에 믿던 마니교나 불교 등을 믿었는데, 이 때문에 지역 아랍인 총독들이 현지인들이 진짜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이 맞다면 할례(포경 수술)를 한 증거를 제시해야 인두세를 면제받을 수 있다고 법을 수정하다가, 대대적으로 폭동이 일어나면서 아랍인들이 쫓겨나는 사태마저 벌어졌다.[5] 타히르 왕조의 왕족으로서 타히르 2세의 동생이었으며, 당시 에미르였던 무함마드 이븐 타히르의 숙부였다.[6] 서부 이란, 아르메니아, 자지라, 시리아, 이집트, 이프리키야[7] 이라크 남부, 파르스, 아제르바이잔, 호라산[8] 아랍 역사 전문 연구가 휴 케네디는 이 사건이 자힐리야 시기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쇠퇴를 부른 예멘의 마립 댐 파괴와 비견된다고 평가했다.[9] '앗 다울라' 형식의 칭호가 와지르 외의 인사에게 부여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10] 예를 들어 부와이 왕조가 바그다드를 점령했을 945년에 아글라브 왕조는 이미 파티마 왕조에 의해 멸망한 상태였다.[11] 칼리파는 움마(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이자 사도 무함마드의 후계자인데 그에 맞서는 것은 무슬림이 아니라는 것이다.[12] 지금의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를 말한다.[13] 혹은 양탄자에 말았다고도 한다.[14] 하지만 이렇게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것은 영혼이 피속에 있다고 믿는 몽골인들에게는 가장 명예로운 사형방식이라고 한다.[15] 알 무스타심과는 10촌 사이로 항렬로는 알 무스타심의 증조할아버지 뻘이다. 제28대 알 무스타시르의 장남이자 제29대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의 증손자가 알 무시탄시르 2세이고, 차남이자 제31대 칼리파 알 무크타피의 6대손(고손자의 손자)이 알 무스타심이다. 아래에 나오는 계보도를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16] 또는 후아바스 왕조.[17] 오스만 제국은 제3대 술탄인 무라트 1세 이래 계속 칼리파를 자칭하기는 했다. 다만 어느 나라에서나 일개 반란군 수령이 왕을 칭했다고 해서 역사서에 그를 왕으로 기록해주지 않는 것처럼, 셀림 1세 이전까지의 칼리파는 칼리파로 인정받지 못한다. 사실 아바스 왕조가 몰락한 이후 힘을 좀 키웠다 싶은 이슬람 군주들이 으레 하던 행사(?)가, 칼리파 자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