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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2013~ )[1] |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한국어 | 기사의 성채와 살라딘 요새 | |
아랍어 | قلعة الفرسان وقلعة صلاح الدين | ||
영어 | Crac des Chevaliers and Qal’at Salah El-Din | ||
프랑스어 | Crac des Chevaliers et Qal’at Salah El-Din | ||
국가·위치 | [[시리아| ]][[틀:국기| ]][[틀:국기| ]] 홈스 탈칼라흐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1229 | ||
등재연도 | 2006년 | ||
등재기준 | (ⅱ)[2], (ⅳ)[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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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십자군 전쟁 시대 레반트에 건설된 요새로 대표적인 십자군 건축물이다. '기사들의 성채'라는 뜻이 있다.[4] 십자군은 프랑스 계열의 기사들이 주류였고 요새가 지어진 트리폴리 백작국은 프랑스 툴루즈 백작이던 레몽 드 생질이 건국하였으므로 프랑스식인 Krak Des Chevaliers 로 표기되었다.2. 난공불락의 성
얼핏 보기에 구릉지에 투박하게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첨단 축성술이 집약된, 극도로 난공불락인 성으로 유명했다.첫째로 사진에서 보다시피 산꼭대기(해발 750m)에 지어 놓았기에 성문 쪽을 제외하고는 전부 심하게 비탈져 있으므로 그 어떤 공성병기의 접근도 불가능하다. 공격 측이 공성탑을 대려면 공성로를 닦아 접근해야하는데, 이러면 사방에 배치한 탑과 이중성벽에서 퍼붓는 포화망에 갇히게 된다.[5]
둘째로 정문으로 돌파하려 하더라도 정문은 아주 좁은 다리를 통해서만 바깥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공격 측은 아주 불리한 싸움을 강요당하게 된다.
셋째로 무슨 수를 써서 정문을 돌파하더라도 이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진 이중 구조의 성이다.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큰 해자가 파져 있으며, 내성이 외성보다 높이 위치해 있기에 내성에서 외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다.
외성과 내성 사이의 공간이 아주 좁은 것도 고의적인 설계의 결과이다. 이정도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대군을 몰고 올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될 경우 그 대군은 비좁은 공간에서 병목현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공격측은 이렇게 좁은 공간을 통과하기 위해 비효율적으로 뭉칠 수밖에 없고, 수비측은 반대로 적에게 효율적으로 사격을 가할 수 있다.
3. 역사
이 요새의 내성은 원래 미르다스 왕조의 쿠르드족 계열의 영주가 만든 성이었다가 1차 십자군에 참가한 대영주 중 한 명인 트리폴리 백국을 세우는 레몽 드 생질이 점령하였다.당시 레몽 백작은 안티오크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보에몽 드 타란토 공작과 다투다가 패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충성을 맹세하고 수복한 제국의 땅을 자신에게 돌려주겠다고 맹세한 십자군 영주들이 모조리 배신하고 땅을 자신들이 차지한 데에 분개하고 있었으므로 끝까지 자신을 저버리지 않은 레몽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황제는 레몽에게 소수의 제국군을 지원해주고 갓 흘러들어온 십자군 무리와 동행시켰는데, 다시 레반트로 돌아온 레몽은 트리폴리를 점령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 싶어 했으므로 동로마 석수들을 동원하여 트리폴리 근처에 있는 이 요새를 확장 건설하였다. 그러나 정작 트리폴리 공략은 삽질만 하다 실패로 끝났고, 결국 초대 트리폴리 백작 자리는 그의 조카가 레몽의 부음을 듣고 찾아와 공성을 마무리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후 12세기 중반 성채의 소유권은 구호기사단에게 양도되었고, 구호 기사단은 이곳을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하여 이슬람 세력에게 타격을 주었다. 심지어 살라딘도 공성을 실패할 정도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십자군이 쇠퇴하고 맘루크 세력이 강해지던 1271년, 맘루크의 군주 바이바르스가 인근 12개 요새를 함락한 뒤 이 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크라크 데 슈발리에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성이었기에 병력상 20:1[6]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의 공성이 실패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바이바르스에게는 십자군의 세력보다 동쪽의 일 칸국의 움직임이 위협적이었기에 성 하나에 대군을 투입한 채로 매달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농성을 하고 있는 방어군 역시 그렇게까지 크게 성을 지킬 의지가 없었다. 저렇게 잘 싸우는데 왜 의지가 없는지 의아할 수 있지만, 기사단은 의미없는 싸움에서 옥쇄하겠다며 버티는 멍청이들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제외한 모든 거점이 함락되었다. 이는 크라크 데 슈발리에 역시 더 이상 전략적 가치가 없음을 의미했다. 즉 가능하다면 성을 포기하고 전력을 보전해서 다른 십자군 거점으로 후퇴하는게 훨씬 나았고 기사단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바이바르스는 이 부분을 간파했다. 그는 백작 보에몽의 편지를 위조해서 '더 이상 승산이 없다. 항복하라.'라는 내용을 비둘기로 성 안에 보냈다. 물론 기사단은 이를 속임수인 줄은 알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속은 셈 치고 성을 내주었다. 어쨌거나 무사 철수를 전제로 한 협상이었기 때문에 바이바르스가 기사단의 뒤를 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바이바르스는 약속이나 협상을 잘 깨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여기서 약속을 깨고 기사단의 뒤통수를 쳐도 이득을 더 얻을 일은 없어서 약속을 지켰다. 기사단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후 바이바르스는 요새를 수리해서 자기가 사용했고, 그 뒤로도 한동안 군대가 주둔하다가 군사적 가치가 없어지자 방치되었다. 이후 일부 민간인들이 요새 안에 들어가 거주지로 삼았는데, 시리아를 보호령으로 획득한 프랑스 정부가 1927년에 거주자들을 싹 몰아내고 원형을 되살렸다.
4. 현대
폭격을 받는 크라크 데 슈발리에
200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의 포화를 피하지 못하고 2012년 8월, 시리아 정부군의 공습에 의해 성채가 일부 파손되어버렸다. 2013년 7월 시리아 정부군의 공습을 받아 성채가 심하게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이 튼튼한 것은 현대에도 유효하기 때문에 크라크 데 슈발리에가 준드 알 샴을 비롯한 이런저런 테러조직들과 반군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폭격 이후로 추정되는 모습.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해당 사진은 2014년에 찍은 사진인데, 2014년 시리아 정부군에 의해 수복된 이후로는 복원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7]
이 때문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라있다.
[1] 시리아 내전[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십자군 점령 전에는 히슨 알 아크라드로 불렸다.[5] 게다가 비탈이라서 갑옷과 무구를 들고 등산을 해야하는 공격 측의 피로도 역시 증가한다.[6] 성을 수호하던 기사와 병사의 숫자가 대략 700명 남짓이었으므로 맘루크 군은 14,000명에서 15,000명으로 추정된다.[7] 이 비디오는 여행 전문 브이로거인 Drew Binsky가 2019년 11월 시리아를 여행하며 본 크라크 데 슈발리에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