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6-30 16:34:09

쯩 자매


고대 베트남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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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쯩 자매(공치제).jpg
호칭 쯩 자매
Hai Bà Trưng | 徵姉妹 | 징자매
공치제 쯩짝
Trưng Trắc | 徵側 | 징측, 14년경 ~ 43년
쯩니
Trưng Nhị | 徵貳 | 징이, 14년경 ~ 43년
재위 년도 40년 ~ 43년(공동)

1. 개요2. 생애
2.1. 항거의 배경2.2. 항거의 전개2.3. 비운의 결말
3. 기타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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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쯩 자매(徵姉妹)는 한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자는 목표로 남비엣의 반란을 주도한 쯩짝(14년경 ~ 43년)[1]과 쯩니(14년경 ~ 43년) 자매를 일컫는다.

2. 생애

2.1. 항거의 배경

베트남남월중국의 대제국 전한에 정복당한 것은 기원전 111년의 일이었다. 그 후 100여년 동안 한나라는 간접통치 방식으로 베트남을 식민지배했는데, 기원후부터는 직접통치 방식으로 전환했다. 한나라는 복장에서 예식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인들의 풍습과 습관을 강제로 바꾸려 했을 뿐만 아니라,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고 건강한 청년들을 징집하거나 노예로 끌고 가기도 했다.

잔인한 식민지배의 압제가 계속될 수록 베트남인들의 가슴 속에는 서서히 한나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당시 하노이 서북쪽의 작은 마을 '메린'의 토호인 '락장'(Lạc tướng)에게는 '쯩짝'(徵側 Trưng Trắc, 징측)과 '쯩니'(徵貳 Trưng Nhị, 징이)라는 용감한 자매가 있었다. 중국 한나라의 식민지배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때가 오고 있다고 예감한 그녀들의 어머니 역시 딸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군사 전술을 교육했다.

2.2. 항거의 전개

언니 쯩짝이 19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이웃 마을 '추지엔'의 '티 사익'(Thi Sách)과 혼인했다. 베트남에 전승되는 전설에 따르면 쯩 자매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언니인 쯩짝의 남편 티 사익이 후한태수에게 처형당했기 때문이었으며, 티 사익은 부당하게 대우받는 베트남인을 위해 투쟁했다고 묘사된다.

그 후 쯩짝과 쯩니 자매는 군중들 앞에서 "압제자를 몰아내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막강한 후한 군대의 위협 앞에 베트남인들은 행동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쯩 자매는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 화살로 호랑이를 사냥해서, 그 가죽을 벗겨 전투 명령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쯩 자매의 강인함과 의지에 감동한 베트남 민중들은 쯩 자매의 지휘하에 점령군을 몰아낼 준비를 했다. 드디어 서기 40년, 기병대로 중무장한 강력한 한군에 맞서 베트남 민중들은 봉기하게 된다. 무기도 전술도 신식 무기와 정복전쟁으로 단련된 강력한 한군보다 훨씬 뒤떨어졌지만, 식민지배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 하나로 베트남군은 한군에 맞섰다. 언니 쯩짝은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고, 동생 쯩니는 공포를 모르는 타고난 전사였다.

한나라군은 이를 진압하고자 쯩 자매가 이끄는 봉기군과 수차례 교전을 벌였지만, 증강되는 세력을 업고 달려드는 반란군이었던지라 한군은 점차 베트남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게다가 머지않아 쯩 자매의 베트남군은 당시 한나라가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려고 설치한 식민지 군(郡)인 교지(交趾)를 점령하고 베트남에 주둔 중인 한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기세를 타고 언니 쯩짝이 왕위에 올라 후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최초의 독립된 왕국을 선포하여 봉기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다.

한편 후한의 조정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쯩 자매의 반란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한 인근의 수많은 성들 및 마을들이 모두 쯩 자매의 세력권에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 영역이 오늘날 광둥성 남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결국 이는 제국의 변방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제국의 영토이자 남방 식민지 영토가 뚝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좌시할 리 없었던 후한은 베트남 반란군을 진압하고자 이제 점령군이 아닌 진짜 토벌군을 파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토벌군의 대장으로 임명된 이가 노익장의 유래이자 삼국지에 나오는 마등, 마초의 선조였던 명장 마원(馬援)이었다.

2.3. 비운의 결말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은 오래가지 못했다. 쯩짝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뒤인 서기 42년 ~ 43년, 후한의 세조 광무제 유수는 복파장군 마원을 대규모 토벌군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베트남으로의 침공을 개시했다. 30,000명의 토벌군을 상대로 베트남군은 여장군 '레쩐'(Lê Chân, 黎眞)의 반격 등 영웅적인 항전을 벌였지만, 베트남이 상대하기에 후한은 너무나도 턱없이 강력한 제국이었다. 게다가 보급품도 부족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베트남 군인들을 데리고, 난세를 통해 전투력이 강화된 후한의 정예 군대를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의 베트남 하노이 근처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에서 쯩 자매는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한군의 전쟁 포로가 된 수천 명의 베트남 군인들은 참수당하고 말았다. 쯩 자매는 서둘러 도망쳤지만 추격해온 마원의 한군에게 잡혀 결국 처형당하고 잘린 목은 후한의 수도 낙양으로 보내지면서 한나라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일어난 베트남의 반란은 끝내 실패하게 되었고, 베트남의 독립도 먼 훗날 응오 왕조가 개창될 때까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베트남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한나라군이 알몸 작전으로 나선 일로 베트남 여전사들이 모두 달아나고 남자들은 포로로 잡혀 처형되는데 쯩 자매는 추격병에게 잡혀 죽은 것이 아니라 서로 껴안은 채 송코이 강이 흐르는 절벽으로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하며 시체를 영영 찾지 못했다고 전한다.

3. 기타

베트남 아이들이라면 어려서부터 그리는 인물들로, 이들 자매와 코끼리는 늘 세트로 따라 다닌다. 쯩짝은 비록 베트남 현지 풍습을 존중하고 여왕이 됐지만 한족 출신인 조타와는 달리 베트남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처음으로 왕이 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족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는 쯩 자매를 뜻하는 하이바쯩(Hai Bà Trưng)군이 있고 베트남 곳곳에 자매의 상이 세워져 있으며, 남쪽의 대도시 호찌민 최대 번화가 1군 시내에는 하이바쯩 거리와 쯩짝[2]의 남편에게서 이름을 따온 티사익(Thi Sách) 거리가 나란히 있을 정도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쯩 자매가 갖는 의미는 크고도 깊다.

둘 중 언니인 쯩짝은 서기 1세기에 여왕에 올랐는데, 이 시기의 베트남에서는 유교 문화보다 토착 전통 문화의 영향이 더 컸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한국 인터넷상에 쯩 자매가 쌍둥이라는 설이 퍼져있는데 해외 인터넷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한국에서만 퍼진 낭설이다.

4. 창작물에서


[1] 언니인 쯩짝은 1세기 후한의 지배하에 있었던 남비엣여왕으로 즉위한다.[2] 쯩 자매 중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