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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dd1e1f> 응우옌 왕조 제13대 황제 바오다이 황제 保大帝 | Bảo Đạ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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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13년 10월 22일 | ||
| 대남 응우옌 왕조 (프랑스령 안남 보호령)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 |||
| 사망 | 1997년 11월 6일 (향년 84세) | ||
| 프랑스 파리 | |||
| 능묘 | 프랑스 빠씨 묘지 | ||
| 재위기간 | 응우옌 왕조 황태자 | ||
| 1922년 ~ 1925년 11월 13일 | |||
| 제13대 황제 | |||
| 1925년 11월 13일 ~ 1945년 8월 25일 | |||
| 베트남국 초대 국장(國長)[1] | |||
| 1949년 6월 13일 ~ 1955년 10월 26일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dd1e1f> 성씨 | 응우옌(Nguyễn, 阮/완) | |
| 휘 | 푹빈투이(Phúc Vĩnh Thụy, 福永瑞/복영서) → 푹티엔(Phúc Thiển, 福晪/복전) | ||
| 부모 | 부황 홍종 선황제 모후 단휘황태후 | ||
| 형제자매 | 외아들 | ||
| 배우자 | 남프엉 황후 (1934~1963) 모니크 빈 투이 (1972~1997) | ||
| 자녀 | 응우옌푹바오롱 외 4남 6녀 | ||
| 신장 | 182cm | ||
| 종교 | 가톨릭 | ||
| 묘호 | 없음 | ||
| 시호 | 없음 | ||
| 제호 | 말제(末帝) | ||
| 연호 | 바오다이(Bảo Đại, 保大/보대, 1925년 ~ 1945년) | ||
| 절일 | 만수절(萬壽節) | ||
1. 개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대남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그리고 베트남국의 초대이자 마지막 국장.즉위하기 전에 이름은 응우옌푹빈투이(阮福永瑞)이었으나, 민망 황제가 제정한 법칙에 따라 즉위 후에는 응우옌푹티엔(阮福晪)으로 고쳤다. 카이딘 황제의 아들. 황후로는 남프엉 황후가 있는데 미인이다.
마지막 황제였기에 묘호나 시호는 받지 못했다. 정식 시호는 없더라도 선통제나 영친왕의 사례처럼 종친 차원에서 사시 정도는 올릴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사시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보통 연호를 따서 바오다이(保大, 보대) 황제나 말제로 불린다. 바오다이의 출전은 춘추좌씨전의 초장왕이 무에 대해 논하는 구절인 "綏萬邦,屢豐年… 夫武,禁暴,戢兵,保大,定功,安民,和衆…"(온 나라 제후들을 편안하게 하시고, 거듭 풍년이 되게 하셨다... 무릇 무(武)라는 것은 폭력을 멈추게 하고, 무력을 거두어들이고, 천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구하는 공을 세우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여러 제후국의 백성들이 두루 화목하게 하며...)에서 따온 것이다.
응우옌 왕조에 대한 마지막 기대까지 버리게 만든 장본인이다. 프랑스의 꼭두각시 역할은 하기 싫어했지만 정작 실행력과 책임감이 부족해 국정을 내팽겨치고 유럽이나 휴양도시 달랏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며 개혁과 독립에 소극적이었다. 젊을 때부터 프랑스에서 호화생활을 즐기면서 귀국과 통치를 계속 미룰 정도로 책임감이 부족한 암군이었으며 실제 통치에 들어간 뒤에도 프랑스의 보호령 체제를 제대로 깨지 못했다. 황제에서 퇴위하고 베트남국의 국가원수로 옹립된 이후에도 범죄조직 빈쑤옌을 대놓고 사병조직화하면서 나라를 개판으로 만든 데다가 허구한날 향락과 유흥에 찌들어살아 나이트클럽 황제라는 멸칭으로 불린 인물로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막론하고 평가가 영 좋지않다.
2. 생애
2.1. 프랑스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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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카이딘 황제와 프랑스 총독 알베르 사로와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어린 아이가 바오다이 황제다. |
1925년 카이딘 황제가 사망하자 1926년 1월 베트남으로 잠시 돌아와 대관식을 치르고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학업을 끝마치기 위해 그해 3월 톤탓한을 섭정으로 임명한 뒤 다시 프랑스로 출국했다.
황실은 바오다이에게 한문과 베트남식 예법을 가르치기 위해 유학자 한 명을 프랑스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인 교사들이 그의 교육을 가로막으면서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다. 훗날 베트남으로 돌아와 통치하게 된 바오다이 자신도 “자신의 왕조와 나라의 역사, 심지어 프랑스 식민 통치기에 일어난 일들조차 거의 알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바오다이는 파리 정치대학에서 호화로운 유학생활을 만끽하며 즐겁게 지냈다. 안남 총독을 지낸 장 프랑수아 외젠 샤를이 그의 후견인을 맡았는데 매일 방과 후마다 그의 집으로 불려가 저녁까지 숙제를 해야했다고. 게다가 여름이면 바오다이를 별장으로 데려가 휴가를 함께 보내기도 했다. 바오다이는 테니스와 골프, 스키를 좋아했고 답답한 베트남식 유교 예법보다 파리의 서구식 생활을 훨씬 편안하게 여겼다.[2] 바오다이는 파리의 샬롱을 드나들며 클럽과 파티를 즐겼으며 16살부터 고급 자동차들을 수집하며 파리 근교에서 드라이빙을 즐기는 한량이었다. 오죽하면 즉위하고 6년이 지난 1932년까지 베트남으로 돌아가지 않고 최대한 버팅기다가 프랑스 정부의 압박과 베트남 조정의 간절한 요청으로 마지못해 베트남으로 귀환했다. 당시 바오다이는 이를 감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회고하기까지 했다.
2.2. 재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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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오다이의 즉위식 | 남교단(南郊壇) 제사를 치르는 바오다이 |
섭정회의를 폐지하고 친정을 시작한 바오다이는 안남 각지를 순행하며 꼭두각시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했지만 프랑스가 이를 허용할 리 없었다. 바오다이는 의회 제도를 손보고 직접 국정을 주도하려 했으나 가장 중요한 세금의 징수와 배분은 여전히 프랑스 식민당국이 100% 장악한 상태였다. 황제조차 프랑스에서 정한 생활비를 받아썼으며 매달 프랑스 총독부에서 서명한 액수를 지급받아 사용하는 월급쟁이 신세였다. 프랑스 본국에서 임명한 안남의 프랑스 주재관은 황제가 내린 결정이라 할지라도 모조리 거부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실질적인 통치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고 바오다이는 여전히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남았다.
이런 가운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를 무너뜨린 후 프랑스의 식민지 행정 기구가 와해되자 괴뢰국을 세워 일본의 허수아비 황제로 그 지위를 유지했는데, 그야말로 만주국의 선통제와 똑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예 개념이 없지는 않았는지 일본이 패망한 이후 후에에 주둔하던 일본군 지휘관이 베트민의 정권장악에 대비해 무력으로 질서를 유지해주겠다고 제안하자 "짐은 외국군이 짐의 백성을 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소."라며 막으려고 나서긴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독립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해리 S. 트루먼, 윈스턴 처칠, 장제스, 샤를 드골 등 주요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베트남 제국을 승인해달라는 전문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바오다이를 일본에 협력한 부역자 취급하던 연합국은 바오다이의 요청을 무시했고, 특히 드골은 아예 바오다이를 내쫒고 드골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전 황제 주이떤을 재옹립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민이 권력의 공백을 틈타 8월 혁명을 일으켜 베트남을 장악하고 바오다이에게 정권을 넘기도록 압박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퇴위한다.[3] 바오다이는 1945년 8월 30일 후에왕궁 오문 앞에서 퇴위선언문을 낭독하고 황제의 옥새와 검을 베트민에게 넘긴 뒤 평범한 시민으로 격하됐다.
2.3. 퇴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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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위식을 치르는 바오다이[4] | 호찌민과 퇴위 직후의 바오다이 |
하지만 실권은 없는 명예직에 만족하지 못한 바오다이는 외교사절단 대표로 중화민국 충칭에 파견된 틈을 타 쿤밍을 거쳐 영국령 홍콩으로 탈주했다. 바오다이가 홍콩으로 도망치자 호찌민은 최측근들을 보내 금과 외화를 전달하고 바오다이의 귀국을 설득했지만 바오다이는 제안을 거절했다.
바오다이는 홍콩에 머무는 동안 카지노와 댄스클럽을 드나들며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5]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탕진해버린 뒤에는 프랑스 측에 먼저 손을 벌렸고 아직 바오다이에게 이용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프랑스가 매달 5,000 홍콩 달러를 지급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바오다이는 홍콩 최고 부촌인 스탠리 해변 인근에 영국식 주택을 구입했고, 코즈웨이베이에서 손님 접대하기를 즐기며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을 홍콩호텔이나 파라마운트, 생프랑시스 등에 머물도록 했다. 완전히 프랑스 측에 기울어진 바오다이는 고국에 편지를 보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최고고문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2.4. 베트남국 국장
프랑스와 손을 잡은 바오다이는 1947년 12월 7일 프랑스와 제1차 하롱베이 협정을 체결했다. 겉으로는 프랑스가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는 듯한 내용이었지만 실제 구속력은 거의 없었으며 베트남에 실질적인 권한을 넘겨주지도 않는 의미없는 협정이었다. 응오딘지엠 등 베트남 내 민족주의 세력이 곧바로 이 협정을 비판하자 바오다이는 정치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유럽으로 도망쳐 넉 달 동안 유흥과 여행을 즐겼다. 이때문에 나이트클럽 황제라는 멸칭을 받기까지 했다. 프랑스가 끈질기게 바오다이에게 추가 협상을 요구하자 마지못해 유럽에서 돌아와 1948년 6월 5일 제2차 하롱베이 협정에 서명했지만 역시나 베트남 독립에 대한 약속은 미약했고 성과는 없다시피한 수준이었다.바오다이는 몇 달 동안 뱅상 오리올 대통령과 협상을 이어간 끝에 1949년 3월 8일 엘리제 협정을 체결하고 베트남국을 수립한 뒤 국가원수인 국장(國長)에 취임했다. 프랑스는 황조강토를 설치해 그 안에서는 바오다이가 여전히 황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줬지만, 정작 베트남국의 자치권은 여전히 제한적이었고 프랑스가 외교권과 군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독립을 원하는 베트남인들의 열망이 거세지고 안팎으로 국정이 악화되자 환멸을 느낀 바오다이는 프랑스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지 않겠다며 국정을 내팽겨치고 휴양도시 달랏에 틀어박혀 사냥과 향락에 빠져들었다. 본인 딴에는 프랑스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었지만 안그래도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민족주의자들의 눈에는 방탕한 생활로 비칠 뿐이었다. 응오딘지엠을 비롯한 강경 민족주의자들은 베트남국이 실질적인 독립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바오다이 역시 휴양지를 오가며 국정을 방기했다. 바오다이가 임명한 친프랑스 성향의 총리 쩐반흐우와 응우옌반땀 역시 베트남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바오다이의 인기는 바닥을 쳤고, 베트민과 프랑스 간의 전쟁은 갈수록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베트민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의 위세를 업고 세를 불려나갔다.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이 대승을 거두며 1954년 7월 제네바 합의가 체결되어 북쪽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남쪽은 베트남국이 각각 관할하게 되었다. 베트남국은 마침내 프랑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았지만 바오다이는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임명하고 본인은 파리에 머물렀다.
바오다이는 프랑스에 머물며 범죄조직 빈쑤옌이 수도 사이공의 매춘업, 도박업, 경찰 조직을 장악하게 놔두는 대가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상납받았다. 바오다이의 부패와 무능에 질린 응오딘지엠은 결국 1955년 빈쑤옌을 제거하기 위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고,[6] 베트남 내 세력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모은 뒤 바오다이를 쫒아냈다. 바오다이를 국가원수직에서 끌어내린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거쳐 무려 98.9%의 지지율로 베트남국을 폐지한 뒤 공화국을 수립했다.[7]
2.5. 망명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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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바오다이 묘 |
한편 화려한 여성관계는 계속 이어가 1963년 남프엉 황후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끊임없이 프랑스 여인들을 만나며 지냈다. 1957년에는 알자스에 머물던 크리스티안 블로크카르스나크를 만나 1970년까지 교제했고 1972년부터는 자기보다 서른 살 어린 프랑스 여성 모니크 보도와 함께 지내다가 1982년 결혼했다.
망명지에서 꾸준하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민족 화해를 호소하는 공개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향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실제로 옛 수도 후에 일대에는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고 북베트남 정부 측에서도 소수의 근왕파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위해 바오다이를 연립정부에 참여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바오다이가 베트남에 있을 때나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나 베트남인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멸시했기에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1982년 해외 황족협회가 출범하자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는 도시를 상징하는 황금열쇠를 받았으며 웨스트민스터 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 칭호도 받았다. 캘리포니아의 베트남계 불교도와 까오다이교 공동체 행사에 참석해 축하 인사를 전했고, 텍사스의 베트남계 미국인 사회도 방문했다.
1988년 바오다이는 가톨릭으로 개종해 장로베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같은 해 프랑스에서 세례를 받았다.
말년의 바오다이는 그많던 재산을 탕진한 채 프랑스 정부가 매달 지급하는 2만 프랑의 수당을 받으며 파리 16구 프레넬 거리 29번지의 작은 아파트에서 조용히 생활했다. 1997년 7월 31일 오전 5시 파리의 발드그라스 군병원에서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파리에서 조촐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조전을 보냈다. 베트남 대사관에서는 흰색 화환[8]을 보냈지만 대표자는 참석하지 않았다.[9] 워낙 유럽에서 오래 지냈다보니 장례식에 동양인보다 백인이 더 많았다고. 유해는 파리 파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베트남에서 암군으로서 욕을 먹고 그가 죽은 뒤에도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으나, 사치 등의 행각과는 별도로 그의 처지 자체에 대해서는 동정하는 이들이 있다. 식민지 치하에서 허수아비로 살아가던 점은 일제강점기의 순종과 영친왕과도 비슷하다.[10]즉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즉위한 뒤에도 이미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사실 바오다이가 무슨 짓을 했더라도 베트남을 프랑스로부터 독립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며 프랑스가 입맛에 맞지않는 황제를 제멋대로 3번씩이나 갈아치웠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이 점을 바오다이 황제 본인도 잘 알고 있어, 젊은 시절 허수아비로서 인생에 대한 좌절감에 취해서인지 프랑스 망명 이후로도 사치를 부리며 한량 같은 모습만 보였다고 한다. 베트남국 국장 시절에도 프랑스의 꼭두각시 노릇에 환멸감을 느껴 휴양도시 달랏에 틀어박혀 정무를 거부하는 등 소극적이고 무능할지언정 폭정을 펼치는 폭군은 아니었다. 베트남에서 쫒겨난 뒤 1972년 북베트남에 보내는 메시지로 전쟁 중단을 요구하는 등 몇몇 언행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다지 부각되지는 못했다.
재위 초반부에는 미약하게나마 개혁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유럽식 교육을 받고 자란 터라 프랑스에서 돌아오자마자 보수적인 궁중 의례들을 폐지했고 신하들이 황제 앞에서 엎드려 절하도록 하는 것 역시 막았다. 초반에는 본인의 영향력이 미치는 안남 각지를 순방하면서 친정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고 국가 교육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새로운 형법과 민법을 제정해 베트남을 점차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려 했다. 바오다이는 1933년 노회한 기존 대신들을 치우고 응오딘지엠을 새 내무대신으로 임명하는 등 평균 연령 40세의 신진개혁세력들을 밀어줬다. 다만 응오딘지엠이 민의원을 통해 베트남인들에게 더 많은 행정권을 주려 시도하자 프랑스가 반대했을 때 응오딘지엠을 확실히 지원해주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3.2. 부정적 평가
“바오다이가 정치적으로 한 일에 대해서는 별로 비판할 것이 없다. 문제는 그가 뭔가를 하는 일이 너무 드물었다는 것이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 레옹 피뇽 |
“영리한 정치인이기는 하지만, 나약하고 매수되기 쉬우며, 스스로의 위대함에 도취되어 있고, 일관되게 책임 있는 행동을 할 능력이 전혀 없다.” 1954년 미국 국가정보평가(NIE)에 실린 바오다이에 대한 평가 |
그의 사치 행각 역시 확실히 비난받을 점이다. 젊은 시절부터 파리에서 황제로 대접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겨 베트남으로 돌아오기 극도로 싫어할 정도였고 1952년 미국에서는 바오다이가 1년에 500만 달러 가까이를 홀로 쓰고 있으며, 스위스 및 프랑스 은행에 상당한 돈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 국가 예산 5%에 달했던 거액이다. 서구에서조차 그를 플레이보이이자 클럽만 뺀질대게 드나드는 나이트클럽 황제라고 빈정댔고 미국은 바오다이가 자신의 실패를 프랑스 탓으로 돌리는 천성이 있고 돈에 지극히 약하다며 그를 돈으로 매수하자는 보고서까지 올렸다. 미국 카투니스트 알 허쉬펠드(Al Hirschfeld)(1903 ~ 2003)는 1947년 바오다이를 홍콩에서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만화에서 바오다이를 "거만한 돼지가 된 황제."라고 풍자했다.
그의 행적은 비슷한 시기 이웃나라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과 대비된다. 바오다이나 시아누크나 무능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나마 시아누크는 바오다이보다는 유능했다. 바오다이와 같은 처지에 있었지만 바오다이와는 달리 자력으로 캄보디아의 독립을 쟁취해냈고 때문에 바오다이가 바로 쫓겨난 것과는 달리 그는 1970년까지 집권하였으며 베트남이 침공해오자 민족통일전선(FUNCINPEC)을 결성하여 맞서는 등 바오다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을 보였다. 정치적 러브콜도 받아서 잠깐이지만 크메르 루주의 (명목상) 지도자가 되기도 했고 캄보디아국 때도 손 산과 함께 새 정부 구성을 했으며 훈 센 때에는 국왕으로 옹립되어 끝내 왕으로 복귀하였다. 물론 크메르 루주가 열심히 똥볼을 차준 덕도 있긴 했지만 그의 통치기가 그래도 좀 평화롭고 조용하던 시절이기도 해서 캄보디아인들도 그의 복귀를 환영해서 아주 무능하다고 보긴 힘들다.
시아누크는 1970년 론 놀의 쿠데타로 폐위, 축출된 이후에 왕정과 상극인 공산주의 반군 집단 크메르 루주와 제휴하면서까지 론 놀을 몰아내고 복위를 도모했다. 그러나 1975년 론 놀 정권이 몰락한 뒤에는 크메르 루주에게 배신당해 가택연금을 당하고 자식들과 손주들을 킬링필드 때 목숨을 잃고 살해당하는 등 여러모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캄보디아인들의 왕정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 분위기에 힘입어 1993년 캄보디아의 왕정 복귀가 이뤄지면서 복위에 성공했다. 하지만 반대로 바오다이 황제는 적극적인 권력 의지 없이 주변의 변화에 무력하게 끌려다니다 결국 망국의 군주로 남았다.
3.2.1. 빈쑤옌 문제
빈쑤옌의 보스 바이 비옌(Bảy Viễn).
크게 비판 받는 것 중 하나가 베트남 갱단 기반 군벌 세력인 빈쑤옌(Bình Xuyên, 平川)을 휘하 부대로 둔 것이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느아인 쩐(Nu-Anh Tran) 교수의 글에 따르면, 당시 남베트남 지역에는 반(反)베트민 성향을 지녔던 3대 군벌 분파가 존재했는데, 빈쑤옌은 그 중 가장 작은 세력이었다. 그러나 호아하오교와 까오다이교의 종교 기반 군벌들과 달리 빈쑤옌은 그 근본이 깡패 조직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본의 베트남 침략 당시 반불(反佛) 성향 때문에 일본에 단순 협력한 나머지 두 군벌 분파들과 달리 빈쑤옌은 친일파가 되어서 일본의 잔학 행위에까지 협력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항일 베트남인들을 가혹하게 학살하고, 그 식솔 및 마을 사람까지 팔다리를 잘라버린 일까지 저질렀다. 그런데 정작 일본군이 베트남에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자 빈쑤옌은 정반대로 친일파 베트남인들을 돌아다니며 죽여버리고 그 식솔들 팔다리를 자르는 등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바오다이 황제가 그 빈쑤옌의 보스이던 바이 비옌(Bảy Viễn)(1904년 ~ 1971년. 본명 레 반 비엔(Lê Văn Viễn, 黎文園))을 친위대장으로 임명하고 대장 계급을 수여했다는 점에서 지금도 비난받고 있다. 이를 두고 응오딘지엠 탓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응오딘지엠은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으로 평소 빈쑤옌을 세균 덩어리라고 멸시했다.
사실 바오다이가 자기 휘하에 확실히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세력이 빈쑤옌 뿐이던 건 사실이다. 일단 베트남국 자체가 프랑스의 괴뢰 정권이라 바오다이 황제가 프랑스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베트남국의 정규군은 바로 바오다이 황제에게 총구를 돌릴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응오딘지엠은 재빨리 수뇌부를 제거해버리고 자기 편으로 만들었으니, 그저 능력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
베트민의 경우 호치민이 그를 우대해줬다고 하지만, 퇴위를 종용하는 등 완전한 우군은 아니었다. 1940 ~ 50년대의 베트민은 이미 다른 세력에 손을 잡자고 제안한 뒤 배신하는 일을 수차례 해왔기 때문에 이들과 협력했다가는 자기도 언제 목숨을 위협받을 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 군벌들은 세력도 강대하고 빈쑤옌보다 도덕적으로는 우위에 있었으나, 자신들의 종교 지도자들의 신병이 협력 관계를 맺었던 베트민에게 위협받자 베트민과의 연합을 깨고 프랑스에 협력했다. 이런 행적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입장에 따라 행동하는 면이 강했기에 동맹이면 몰라도 휘하에 둘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물론 프랑스와의 협력에 반발하고 자기만의 강력한 군벌 세력을 순식간에 조직해서 베트민과 프랑스 양쪽과 맞서 싸운 찐민테 같은 독종도 있었지만, 찐민테가 자기 종교 주류와 다른 행보를 보였던 이유를 따져보면 프랑스와 깊은 연관이 있던 그가 과연 찐민테를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응오딘지엠은 결국 군대를 동원해서 빈쑤옌을 토벌해버렸다. 빈쑤옌은 일개 조직폭력배나 정치깡패의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의 군벌 세력이나 다름없었기에 경찰력으로는 뿌리 뽑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빈쑤옌 소탕전은 거의 내전 세력 진압을 방불케할 정도였다. 기관총과 박격포가 동원되었고, 일부 빈쑤옌 조직원들은 남베트남군에 대포로 응전할 정도였다.
결국 빈쑤옌은 완전히 제압당하고, 간부들은 공개 총살되면서 뿌리가 뽑혔다. 정작 보스인 바이비옌은 프랑스로 도망갔고, 1956년 남베트남 법원은 궐석재판으로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프랑스에 머물던 바이비옌은 파리에서 몇 번이나 암살을 당할 뻔했는데, 갱 조직 문제로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1971년까지 천수를 누리다 사망했다. 빈쑤옌 소탕전 이후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퇴위시켰다.
미국에서도 빈쑤옌에 부정적이었기에 남베트남 정부의 토벌을 격찬하며 지지했다. 반대로 빈쑤옌을 지원한 바오다이 황제는 큰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허수아비로 자라나서 저렇다는 변명도 있겠지만, 일국의 지도자급 인물이 조폭을 두둔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빙쑤엔은 한 가지 측면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빙쑤엔은 프랑스군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실제로 빈쑤옌 두목 바이비옌이 프랑스로 도주할 때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빈쑤옌과 응오딘지엠의 싸움은 프랑스와 미국의 대리전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빙쑤엔의 패배로 프랑스는 완전히 베트남에 손을 떼었고, 남베트남은 미국이 책임지게 되었다. 그리고 빈쑤옌이 사라진 후 사이공에 베트콩들이 득세하게 된 것을 보면 그들이 비록 악했지만 그 시절에는 필요악이었을 지도 모른다.
4. 가족
배우자 6명에게서 자식 5남 6녀를 얻었다. 사망 후 남프엉 황후 소생의 장남이자 전 황태자인 응우옌푹바오롱(Nguyễn Phúc Bảo Long, 阮福保隆)(1936~ 2007)이 명목상 응우옌 왕조의 황실 수장 지위를 이어받았다. 응우옌푹바오롱이 2007년에 사망한 뒤에는 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동생인 응우옌푹바오탕(Nguyễn Phúc Bảo Thăng, 阮福保陞)(1943 ~ 2017)이 뒤를 이어 수장이 되었다. 2017년에 응우옌푹바오탕이 사망한 현재는 그의 이복동생인 응우옌푹바오안(Nguyễn Phúc Bảo Ân, 阮福保恩)(1951 ~ )이 지위를 이어받았다.응우옌푹바오롱 · 바오탕 형제는 자손이 없어서 남프엉 황후의 남계자손은 끊겼다. 이들이 실제로 즉위했다면 민망 황제가 제정한 법칙에 따라 응우옌푹바오롱은 응우옌푹찌(阮福智)로, 응우옌푹바오탕은 응우옌푹한(阮福暄)으로, 응우옌푹바오안은 응우옌푹지안(阮福暕)으로 개명했을 것이다.
딸 응우옌푹프엉마이(Nguyễn Phúc Phương Mai, 阮福芳梅)(1937 ~ 2021)는 이탈리아 왕국 총리이자 1대 아디스아바바 공작인 피에트로 바돌리오의 손자 피에트로 바돌리오 주니어와 결혼했다.
4.1. 조상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 바오다이 (Nguyễn Phúc Vĩnh Thụy) | <colbgcolor=#fff3e4,#331c00> 카이딘 (Nguyễn Phúc Bửu Đảo) | <colbgcolor=#ffffe4,#323300> 동카인 (Nguyễn Phúc Ưng Thị) | |
| 끼엔타이브엉 응우옌푹홍까이 (Nguyễn Phúc Hồng Cai) | |||
| 부이티타인 (Bùi Thị Thanh) | |||
| 흐우티엔 투언 황후 즈엉티툭 (Dương Thị Thục) | |||
| 푸꾸옥공 즈엉꽝흐엉 (Dương Quang Hướng) | |||
| 응우옌티미 (Nguyễn Thị Mỹ) | |||
| 뜨꿍 황태후 호앙티꾹 (Hoàng Thị Cúc) | 응이국공 호앙반띡 (Hoàng Văn Tích / Huỳnh Văn Tích) | ||
| 미상 | |||
| 미상 | |||
| 라티선 (La Thị Sơn) | |||
| 미상 | |||
| 미상 |
4.2. 자녀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남 | 황태자 응우옌푹바오롱 (Nguyễn Phúc Bảo Long) | 1936년 1월 4일 | 2007년 7월 28일 | 미혼 / 자녀 없음[13] |
| 1녀 | 응우옌푹프엉마이 (Nguyễn Phúc Phương Mai) | 1937년 8월 1일 | 2021년 1월 16일 | 피에트로 바돌리오 슬하 1남 1녀 |
| 2녀 | 응우옌푹프엉리엔 (Nguyễn Phúc Phương Liên) | 1938년 11월 3일 | 베르나르 술랑 슬하 2녀 | |
| 3녀 | 응우옌푹프엉중 (Nguyễn Phúc Phương Dung) | 1942년 2월 5일 | 프랑스인 사업가 슬하 1남 | |
| 2남 | 응우옌푹바오탕 (Nguyễn Phúc Bảo Thắng) | 1943년 12월 9일 | 2017년 3월 15일 | 미혼 / 자녀 없음 |
| 4녀 | 응우옌푹프엉타오 (Nguyễn Phúc Phương Thảo) | 1946년 6월 4일 | [14] | |
| 5녀 | 응우옌푹프엉민 (Nguyễn Phúc Phương Minh) | 1950년[15] | 2012년 | [16] |
| 3남 | 응우옌푹바오언 (Nguyễn Phúc Bảo Ân) | 1951년[17] | 슬하 1남 1녀[18] | |
| 4남 | 응우옌푹바오호앙 (Nguyễn Phúc Bảo Hoàng) | 1954년 | 1955년 | [19] |
| 6녀 | 응우옌푹프엉뜨 (Nguyễn Phúc Phương Từ) | 1955년 | [20] | |
| 7녀 | 응우옌푹프엉안 (Nguyễn Phúc Phương An) | 1955년 | [21] | |
| 5남 | 응우옌푹바오선 (Nguyễn Phúc Bảo Sơn) | 1957년 | 1987년 | [22] |
| 6남 | 파트리크에두아르 블로카르세낙 (Patrick-Édouard Bloch-Carcenac) | 1958년 4월 21일 | 클로딘 랑 자녀 없음[23] |
5. 창작물
프랑스의 허수아비였다지만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임에도 바오다이의 일대기를 다룬 베트남 사극은 매우 드물다. 2004년에 방영된《황궁의 양초(Ngọn nến Hoàng cung)》라는 작품이 그나마 유일하다. 일본에 의한 프랑스 총독부 축출과 베트남 제국 건국, 바오다이 황제의 퇴위까지를 다뤘다.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에 대해서도 언급이 나오지만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과거 군주제였었다가 공화제로 정체성과 체제가 바뀐 다른 국가들이라면 한번쯤은 있을 법한 입헌군주제 대체역사 시나리오조차 낮은 인지도와 높은 비호감도 때문에 없다.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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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트남국의 국가원수다. 대통령과 같은 직위였다. 한국사로 치면 영친왕이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 국가원수를 역임했을 경우에 가깝다.[2] 베트남 조정에서 차기 황제가 될 바오다이에게 한문과 베트남식 유교 예법을 가르치기 위해 유학자 한 명을 파리로 보내기는 했는데, 프랑스인 교사들이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유교 교육을 막았고 바오다이 본인도 유교 예법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거의 가르치지 못했다. 이때문에 훗날 베트남으로 돌아온 바오다이는 정작 자기 나라의 역사나 심지어 프랑스 식민통치기에 일어난 일들조차 거의 알고 있지 못하는 처참한 상태였다.[3] 바오다이는 베트민과 협력해 입헌군주정을 유지하는 방식으로라도 제위를 지키고 싶어했다. 그래서 베트민 지도부를 후에로 초청해 내각을 구성하라는 칙령까지 내렸지만 애초에 공산주의와 상극인 군주정이 베트민과 양립할 수가 없었기에 실패했다.[4] 천명이 황제에게서 공화국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퍼포먼스로 황제지보(皇帝之寶)와 안민보검(安民寶劍)을 넘겨주는 장면. 원래 국가가 교체될 때 치르는 선위식에서는 망국의 군주가 새 군주에게 국새와 검을 바치는 것이 정석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황제의 시기가 완전히 끝났음을 만천하에 보여주기 위해서 후에왕궁 오문 바로 앞에서 이 의식을 치렀다. 앞쪽에 황포를 입은 채 등을 보이고 서있는 사람이 바로 바오다이다. 황제지보는 10kg이 넘어가는 금으로 제작했고 안민보검은 은으로 만들어 옥으로 장식했는데, 황제지보를 넘겨받은 사회주의 공화국 대표 쩐후이리우는 생각보다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렸다고.[5] 이때 미국 대표였던 조지 C. 마셜 장군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6] 바오다이는 자신과 관계가 있던 빈쑤옌을 보호하기 위해 응오딘지엠에게 프랑스로 오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응오딘지엠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7] 사실 바오다이의 행적과는 별개로 대놓고 바오다이 찬성파 쪽의 선거운동을 금지해버렸기에 부정선거이긴 했다. 사이공에서는 공화국 찬성표가 등록 유권자 수보다 15만 5,025표나 많았으며 전국적으로도 전체 투표수가 등록 유권자 수를 44만 9,084표 초과했다. 공화국 찬성표만 따져도 등록 유권자 수보다 38만 6,067표 많았다.[8] 백색 화환에는 “Mặt trận Tổ quốc kính viếng”, 즉 “베트남 조국전선이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9] 오히려 베트남 정부는 그의 사망과 관련해 성명을 내면서 바오다이가 한때 호찌민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오래가지 않아 등을 돌렸다는 식으로 그의 정치 경력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10] 그가 마지막 군주라는 점에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에 빗대기도 하지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황제 지위까지 박탈한 것과 달리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했지만 황제 지위는 허울로나마 유지했다. 게다가 정말 실권이 아무 것도 없었던 순종과는 달리 바오다이는 어느 정도의 실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순종보다는 재위 말년의 고종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11] 특히 베트남국 국가원수 시절에는 국고에서 거액의 수당을 지급받았고 이 밖에도 여러 사업과 이권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얻었다. 미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2년에는 정부로부터 매달 700만 피아스트르를 지급받았으며, 빈쑤옌이 장악한 도박 사업에서도 별도의 돈을 받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1954년 미국 대사관은 그의 공식적인 연간 수입만 당시 환율로 수백만 달러에 이른다고 추산하기도 했다.[12] 아직 근왕파가 남아있던 1950년대 초까지도 군부와 일부 종교·지역 세력이 그를 지지했고, 국가원수로서 정부 구성과 군 통합 등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미국 역시 베트남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바오다이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정도였다.[13] 모친은 남프엉 황후.[14] 모친은 부이몽디엡(Bùi Mộng Điệp).[15] 자료에 따라 1949년 1월 15일생으로도 기록된다.[16] 모친은 레티피아인(Lê Thị Phi Ánh).[17] 자료에 따라 1952년 또는 1953년생으로 기록되기도 한다.[18] 응우옌푹투이시, 응우옌푹꾸이캉. 모친은 레티피아인.[19] 모친은 부이몽디엡.[20] 모친은 프랑스인 비키(Vicky).[21] 모친은 호앙띠에우란(Hoàng Tiểu Lan). 일부 자료에서는 이름을 Phương Anh으로 표기한다.[22] 모친은 부이몽디엡.[23] 1992년 결혼, 2000년 이혼. 모친은 크리스티안 블로카르세낙(Christiane Bloch-Carcen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