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강연합자치정부 주석 |
초대 |
데므치그돈로브 |
몽골 제국 · 원 · 복드 칸국 · 몽골 인민공화국 · 몽골국 |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초대 주석 | ||
몽골어 | <colbgcolor=#ffffff,#191919>ᠳᠡᠮᠴᠦᠭᠳᠥᠨᠷᠥᠪ | |
정체 | 德穆楚克棟魯普 | |
간체 | 德穆楚克栋鲁普 | |
키릴문자 | Дэмчигдонров[1] | |
영문 | Demchugdongrub | |
출생 | 1902년 2월 8일 | |
청나라 치하 몽골 스니트기 | ||
사망 | 1966년 5월 23일 (향년 64세) | |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자치구 후허하오터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몽강연합자치정부 → 왕징웨이 정권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민족 | 몽골족 | |
학력 | 없음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종교 | 티베트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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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의 왕족으로, 내몽골에 있었던 일본 제국의 괴뢰국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수장이었다. 삼국지연의의 엄백호의 별명과 같은 덕왕(德王)이라는 청말의 작위로도 유명하다.[2]2. 생애
2.1. 초기 이력
1902년, 청나라 내몽골 스니트기(蘇呢特旗)[3]에서 명나라 시기에 내몽골을 통합한 다얀 칸의 적통 군왕(郡王)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칭기즈칸의 30대 손으로 황금씨족의 일원이다. 190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6살의 나이로 군왕에 올랐으며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할 때 외몽골 독립에도 불구하고 내몽골에서 중화민국의 지배를 인정하였다. 이 공으로 위안스카이로부터 1913년, 화석친왕(和碩親王)의 지위를 받았다. 1919년, 18세의 나이로 친정 체제를 구축하여 내몽골을 다스리게 되었다. 1924년,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선통제를 자금성에서 축출하자 데므치그돈로브는 톈진의 일본 조계지를 방문하여 푸이를 알현하였다.1925년 2월, 쑨원이 베이징에서 국민회의를 소집하자 데므치그돈로브도 대표로 참가하였고 선후회의 참의원에 임명되었다. 이때 자신의 영토가 사방 5백리이며, 몽골왕공 대부분이 세습으로 왕위에 앉은 부패한 인물들이라면서 자신들이 그들을 몰아내고 내몽골의 유일한 왕공이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후 손봉전쟁, 국민혁명 등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데므치그돈로브는 이를 긴밀히 관찰하면서 누가 중국의 지배자가 될지 지켜보았다. 중국국민당이 중국의 새 지배자로 떠오를 것으로 보이자 데므치그돈로브는 국민당과의 접촉을 준비하였으며 만약 국민당이 내몽골의 자치를 부정할 때를 대비하여 일본 제국과의 접촉도 준비하였다.
2.2. 장제스와 일본과 접촉
1932년, 반장전쟁까지 완전히 승리로 이끌고 중국의 지배자가 된 장제스는 해군 제독 계영청에게 친서를 주어 데므치그돈로브를 방문하게 했다. 장제스는 데므치그돈로브에게 장래에 몽골에 관련하여 데므치그돈로브를 책임자로 삼겠다는 의사를 타진하였고 이에 데므치그돈로브는 장제스를 등에 업고 내몽골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 이어 장제스는 데므치그돈로브에게 우한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보냈고 데므치그돈로브는 측근들을 거느리고 베이핑에서 장쉐량과 접견한 후 우한에서 장제스와 회담을 가졌다. 장제스는 데므치그돈로브에게 몽골에는 국민당을 지지하는 젊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몽골기병대를 조직하여 몽고보안통감(蒙古保安統監)에 취임할 것을 권유하고 필요한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장제스의 호의를 확인한 데므치그돈로브는 장제스와의 동맹을 체결하고 실무진을 남긴 채 장제스의 전송을 받으며 난징에 도착했다. 난징에서 치러진 2차 회담에서 군관학교의 내몽골 분교 설치가 제안되었고 데므치그돈로브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나 성사되진 않았다.내몽골로 돌아온 데므치그돈로브는 내몽골 독립은 중국과의 인접한 지정학적 상황, 분열된 내몽골의 정치적 상황을 미루어 볼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932년, 내몽골의 청년들에게 내몽골 자치를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1932년, 달라이 라마 13세와의 갈등으로 중국으로 망명했던 판첸 라마 9세가 라마사원을 순례할 것을 권하자 데므치그돈로브는 내몽골인들의 여론을 파악하기 위해 이를 수락하여 여러 지역의 군왕들을 방문했다. 군왕들은 내몽골 전체의 공동통치를 희망하였고 자치회의를 열기로 합의하였는데 이때 관동군 참모 다나카 규지로가 몽골 통역관을 데리고 참여하였다. 1933년 7월 26일, 백령묘에서 개최된 1차 자치회의에서 관동군은 내몽골의 자치는 일본군의 힘을 통해서 보호받는 상황에서 전개되길 희망한다고 타진했고 이때 데므치그돈로브는 일본이 국민당을 내몽골에서 몰아내고 자신들이 내몽골을 조종하려 한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백령묘 회의 이후 데므치그돈로브는 내부통합과 국제사회의 지원을 통한 자치를 주장했다. 내부통합이란 분열된 몽골의 민심과 정치세력을 규합하고 국제사회의 지원이란 외부의 침략세력들의 힘을 역으로 빌려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는 것이었다. 데므치그돈로브는 우선 국민정부 측에 내몽골의 자치를 요구하고 내몽고자치정부의 수립을 요청하는 한편, 2차 자치회의를 열어 모든 맹의 군왕들의 참여를 유도한다는 결의를 내렸다. 1934년 봄, 몽고지방자치정무위원회, 소위 몽정회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몽정회의 유지를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척박한 내몽골에서 유지비는 큰 부담이라서 장제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장제스는 매월 3만원의 운영경비, 건축비 12만원, 발전기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잘 이행되지는 않았다.
2.3. 일본과 협력
한편 일본 제국은 데므치그돈로브의 영향력이 계속 강화되자 그를 포섭대상으로 삼아 접근했다. 일본은 선령협회이사장, 만주국의 몽골인 장교들을 통해 데므치그돈로브에게 줄을 대는 한편 내몽골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키고 데므치그돈로브에게 뇌물과 무기를 제공하며 그의 환심을 사려 했다. 또한 일본군 특무기관과 전신국을 내몽골에 건설하였다. 데므치그돈로브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라 여겨서 이런 지원을 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1934년 8월, 데므치그돈로브의 측근인 한펑린(韓風林, 한풍림)이 베이핑에서 국민혁명군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데므치그돈로브를 유인해 일본에 투항시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데므치그돈로브는 격분하였다. 데므치그돈로브는 이를 두고 한풍림이 내몽골의 황포군관학교 출신자들의 견제와 계영청으로부터 남의사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거부한 것 때문에 국민당 고위층의 미움을 사서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펑린 사건 이후 데므치그돈로브는 1935년 10월, 관동군 참모부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특무부대장 다나카 류키치의 사주로 몽정회에서 전격 탈퇴해버렸으며 데므치그돈로브의 부하 이수신은 차하얼성에서 일련의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당황한 국민정부는 1936년 3월, 수원성 정무위원회를 설치하였으나, 데므치그돈로브는 내몽골에 몽골인의 독립 정권을 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수동사변을 일으켰으며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도움을 받아 내몽골 지역에서 국민혁명군을 내쫓고 독립을 선언해 몽골연맹자치정부를 세웠다.
데므치그돈로브는 칭기즈 칸의 30대 손임을 내세우며 소련의 위성국인 몽골 인민 공화국에 대항하는 정통 몽골 정부임을 내세웠다. 데므치그돈로브는 외몽골 및 부랴티아까지 통합한 대몽골의 통일을 내세우며 독립국임을 선언하려 했지만, 만주국이 내몽골 동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있었으므로 관동군은 반대했다.
타협의 결과로 몽강연합자치정부가 1939년 정식 수립되었으나, 관동군의 농간으로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부의 한족 거주지역까지 대거 포함하는 바람에 인구의 95%가 한족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실권은 모두 일본인이 쥐고 있었다. 일본이 몽강연합자치정부를 왕징웨이 정권에 편입시키려고 하자, 분노한 데므치그돈로브는 장제스와 내통한다. 관동군에 발각되었지만 일본 입장에서도 데므치그돈로브를 대신할 만한 지도자가 없어서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2.4. 몰락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괴뢰국이었던 몽강연합자치정부가 무너지자 데므치그돈로브는 충칭으로 가 장제스를 예방하고 국민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1946년 2차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이번에는 국민정부의 편으로 참전함으로 다시 한번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이미 그의 기반인 내몽골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청년들이 증가함에 따라 한때 내몽골 인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데므치그돈로브는 입지가 크게 좁아졌고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축출되어 난징으로 도주하는 수밖에 없었다.결국, 1949년 장제스도 무너져 대만으로 도주하면서 중국공산당에 항복했다. 중화인민공화국 법원에서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무순전범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한동안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내몽골은 공산당에 이용당했다고 주장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지만 오랜 수감 끝에 굴복하고 자신을 몽골 민족의 죄인이며 제국주의의 주구라고 자아비판하였다.
그는 1960년 특사되어 자서전을 집필하면서 말년을 보내다가 1963년 내몽골 인민위원회 참의를 지냈다. 1966년 사망했다.
카멜레온 같은 인생을 보냈으나 천수를 누린 참으로 특이한 인물로, 내몽골인의 지도자라는 인상이 있어서 그를 죽이면 내몽골인들이 그를 순국한 영웅으로 모시게 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푸이처럼 기본적으로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자녀 몇명을 남겼으나 장남은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일을 꾸며 보려다가 1952년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중국인이 되어 평범하게 살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칭기즈 칸의 황금씨족은 더 이상 권력을 잡지 못했다. 그래도 청 황족과 마찬가지로 황금씨족도 여전히 중국과 몽골에서 대를 이어 가고 있다.
3. 사진
몽골의 왕족이며 내몽골에 있었던 일본 제국의 괴뢰국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수장답게 사진 또한 당시 몽골 지도자에 비하면 많이 남겼다.사진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지도자와 악수하는 사진
4. 매체에서
- Hearts of Iron IV에서 몽강국의 국가원수로 등장한다. '칭기즈 칸의 기백'이라는 트레잇이 붙어있어 기병 관련 버프를 받을 수 있다. [4] 다만 게임 시작시점인 1936년 1월 1일은 몽강자치연합정부가 수립되어 있지 않는 시점이기에 엄밀히 말하면 고증오류로 볼 수 있으며, 관련 수립 이벤트등도 구현되어 있지 않다. 인게임에서도 만주국의 특정중점에서 합병을 꾀하는 것 이외에는 게임에서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다. 해당 게임의 중일전쟁을 더 상세화시킨 모드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에서는 국민정부의 속국인 몽정회의 국가원수로 등장하는데 금방 국민정부의 영도권을 부정하고 일본에 붙어 일본 제국의 괴뢰국으로 변한다. 그 전에 몽정회의 영역을 줄이기 위한 몽정회 분할 국가집중을 밟아야 하는데 운이 좋으면 수원성 일대가 옌시산의 지배 영역으로 합병되지만 상당한 확률로 국민정부의 결정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100% 전쟁이 제대로 돌아가기도 전에 일본의 보호령이 되어 흐지부지된다. 여기서는 순 운빨이다.
- 또 다른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몽골에 귀족정이 수립되거나 인민당의 혁명 후 보수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지도자가 된다.
-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주인공 푸이의 결혼을 축하하는 서신을 보냈다고 이름만 언급된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역사의 변화로 대한민국이 탄생하면서 일본이 간섭할 여지가 없어지자 한국에 손을 벌려 독립하려고 시도한다. 승려인 복드 칸을 땡중 취급한다. 한국이 외몽골 주도의 통일을 지지하자 한국이 내몽골과 외몽골의 관계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고 반발하지만 홍사익이 "그럼 당신은 삼균주의에 대해서 얼마나 아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서 홍사익에게 허를러깅 처이발상 의장은 1권을 통째로 외웠다면서 몸 좀 씻고 짱깨 티 벗으라는 폭언을 듣는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수구꼴통 뿐인 몽골 왕공들중 진보적인 젊은 왕공으로 첫등장,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 맞서서 부라티야, 외몽골, 내몽골의 단결을 촉구하지만 각 몽골 부족들의 반목으로 몽골 통합이 불가능하단걸 알자 만주에 있는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한다.
5. 참고문헌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1930년대 내몽골 덕왕의 초기자치운동과 외교전략 분석, 김선호, 국제문제논총 15집, 釜山外國語大學校 國際關係硏究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