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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판첸 라마 | ||
한문 | 曲吉尼瑪 | |
법명 | 툽텐 최키 니마 | |
영문 | Thub-bstan Chos-kyi Nyi-ma | |
티베트어 | ཐུབ་བསྟན་ཆོས་ཀྱི་ཉི་མ་ | |
출생 | 1883년 2월 19일 | |
청나라 티베트 | ||
사망 | 1937년 12월 1일 (향년 54세) | |
중화민국 청해성 제쿤도 사원 | ||
재임 기간 | 1883년 2월 19일 ~ 1937년 12월 1일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궁중교육 | |
직업 | 종교인, 정치가 | |
종교 | 티베트 불교 | |
판첸라마 재임기간 | 9대 1883년 2월 19일 ~ 1933년 12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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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베트의 9대 판첸 라마. 달라이 라마 13세와 갈등을 빚다가 국민정부로 망명하였다.2. 생애
1882년, 판첸 라마 8세 텐파이 왕축이 사망하자 금병추첨을 통해서 선정되었다. 1892년, 달라이 라마 13세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문에 들었으며 달라이 라마가 직접 그의 머리를 깎아주고 법명을 지어주었으며 상좌 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섭정 데모 후툭투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1902년, 성인이 되어 달라이 라마로부터 비구계를 받았으며 영국군이 쳐들어와 8월 라사를 함락시키자 몽골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와 달리 티베트에 남았다. 암반 여우타이가 영국군 지휘관 영 허스번드와의 교섭을 중재하자 1904년 9월 7일, 포탈라궁에서 영국군 지휘관들과 라사 협약에 합의하였다. 1905년, 판첸 라마는 장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오코너 대위의 호위를 받아 인도 제국을 방문, 당시 왕세자 신분이었던 조지 5세를 예방하였다. 이후 티베트로 돌아갔다.1910년,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여 티베트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려 하자 달라이 라마는 다시 인도로 망명했으나 판첸 라마는 남아서 청군을 맞이하였고 달라이 라마를 폐위하고 티베트의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청의 부탁이나 새 달라이 라마를 뽑아달라는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되고 티베트인들이 봉기하여 청군을 몰아내자 달라이 라마도 귀국하였는데 장체로 나아가 달라이 라마를 영접하였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 13세가 티베트의 근대화와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면서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1915년, 달라이 라마는 시카체에 승관(僧官)과 속관(俗官) 2개의 관청을 새로 건설하여 판첸 라마의 지배권에 간섭하였다. 1919년, 판첸 라마는 라사에서 달라이 라마를 예방하였으나 그로부터 냉대를 받자 큰 위협을 느꼈고 1920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군 사령관 차롱의 건의에 따라 재원조사사무처를 설치하고 티베트의 왕공들에게 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자 이에 반발하였다. 급기야 1923년 2월, 달라이 라마가 수저년 법령을 선포하여 판첸 라마에게 티베트 군비의 25%를 감당하라고 요구하자 판첸 라마는 그해 11월 15일, 100여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타쉬룽포 사원을 빠져나가 티베트 북부 초원으로 도주하였고 그의 지배 영역은 달라이 라마가 흡수하였다. 그는 감숙성, 청해성을 거쳐 내몽골을 유랑하다가 1925년에 베이징에 도착하여 북양정부의 환영을 받아 달라이 라마를 곤혹스럽게 하였으며 이후 동북지방 심양에 머무르며 티베트 보수파들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했다.
1926년, 서강성의 대표 格桑澤仁의 방문을 받았으며 그에게 국민정부와 접촉할 기회를 마련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1927년, 난징을 방문한 格桑澤仁은 고시원장 다이지타오 등을 방문했으며 달라이 라마 9세와 국민정부의 연줄을 만들어주었다. 1929년 9월, 판첸 라마는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의 초청을 받았다. 1931년, 난징에서 열린 국민회의에 초청받아 참석했으며 7월 1일, 국민정부로부터 호국선위광혜대사(護國宣化廣慧大師)에 봉해졌으며 몽장위원회 위원에 초빙되었다. 이후 백령묘에 거주하다가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1932년, 전국민에게 전보를 보내 전 국민들에게 일본의 침략에 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내몽골의 왕공인 데므치그돈로브에게 내몽골의 라마 사원들을 순례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는데 덕왕은 이를 내몽골의 왕공들을 규합할 기회로 사용하기 위해 수락하였다.
1934년, 달라이 라마 13세가 입적하자 판첸 라마는 1935년, 중화민국이 지배하는 티베트인 거주지역인 청해성 제쿤도 사원으로 이동했다. 국민정부는 판첸 라마를 통해서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확인하려고 했고 이 때문에 티베트 정부와 충돌하였다. 마침 달라이 라마 14세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이던 티베트 정부와 판첸 라마는 귀국 조건을 놓고 교섭했는데 판첸 라마는 자신을 호위하기 위한 중국군을 대동하고 귀국하겠다고 하였으나 라싸의 티베트 정부는 어떠한 한족이나 몽골족 군인도 대동하면 안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결국 판첸 라마는 티베트로 돌아가지 못하였으나 달라이 라마 14세를 찾아서 라사로 보냈다.
1936년,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의 결혼식에 축하 선물을 보냈으며 1937년, 제쿤도 사원에서 입적했다.
3. 참고문헌
- 티벳(西藏)불교와 판첸라마의 還生, 鄭仁在, 동아 연구 36호,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 티베트 불교 민족주의의 역사적 고찰, 吉熙星, 동아 연구 36호,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 國民政府時期 ‘邊疆’ 知識人의 ‘民族’ㆍ‘國家’ 認識과 西康 建設 方案 : 티베트인 國民黨員 ‘格桑澤仁’을 중심으로, 김희신, 동양사학연구 98호, 동양사학회.
- 19세기말 ~ 20세기초 티베트의 군주론의 변용, 박장배, 동북아문화연구 19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 20세기 전반기 달라이 라마의 이미지 변화 - 전쟁과 자연재해와 관련하여, 박장배, 동북아문화연구 23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