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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륜



1. 개요2. 기록3. 관련 문서

1. 개요

金仇輪
?[1] - ?

신라의 왕족으로 삼국유사가 인용한 이제가기에만 등장한다. 옥륜(玉輪)이라고도 한다.[2]

이제가기에 따르면 진흥왕과 백숭부인의 3남으로 신라의 왕족이지만 이제가기의 기록이 사실일 경우 후백제의 건국자인 견훤의 조상이 된다.

2. 기록

李碑家記云, “真興大王妃思刀謚曰白𪀚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 波珎干善品之子角干酌珎妻王咬巴里, 生角干元善, 是為阿慈个也.
《이비가기》(李碑家記)에는 “진흥대왕의 왕비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숭부인(白𪀚夫人)이다. 그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角干)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阿慈个)이다.
삼국유사》 제2<기이> -후백제 견훤-

삼국유사에서는 고려시대 견훤의 후손이 지었다 현대에는 실전된 이제가기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제가기에 따르면 구륜은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3남으로 아들 선품(善品)을 두었고[3] 선품의 아들 각간 작진이 왕교파리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신을 낳았고 그가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라 기록되어 있다.

선품의 딸인 문무왕의 처 자의왕후가 620년경 출생으로 추측되기에 적어도 진흥왕 & 백숭부인 → 김구륜 → 김선품까지는 그럭저럭 출생 연도와 세대가 아귀가 맞다.[4] 물론 김선품(문무왕의 장인) → 작진 & 왕교파리 → 문경~상주 일대 호족이자 이씨인 각간 원선(元善) = 아자개 이 계보는 세대차로 봐서는 크게 엉터리지만 진흥왕의 왕비 사도의 시호를 '백숭부인'으로 적시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기에 이들이 아자개, 견훤 등과 연관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 백숭부인은 동륜태자와 진지왕의 모후 사도부인이 아닌, 백제 성왕의 딸 소비 부여씨일 개연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5]

견훤과 아자개의 기원인 문경~상주 일대는 신라 왕실의 정예병 양성 지역으로 왕실 직할령이나 마찬가지인 지역이었고 그 일대 호족들이 이미 눌지 마립간 때부터 나름 꽤 특별대우를 받았던 것도 고고학적으로 검증된다. 그러니 신라 왕실 직할령의 유력한 호족인 견훤과 아자개의 조상 중 하나인 '이씨'가 김선품의 후손인 김씨녀와 혼인해 이들의 선조를 낳았었고, 이 인상 깊은 기억이 구전으로 내내 내려오다가 이제가기에 실렸다고 보는 게 더욱 개연성 높은 추측이라 하겠다. 선품부터 아자개 사이에서 나오는 인물이 작진[6]과 왕교파리[7] 외엔 없었던 건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한미한 가문에서 이름이 계속 전해질 가치가 있었던 건 그 뿐이었던 것이고. 그래서 이런 기이한 계보가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아자개의 집안이 한미하다는 얘긴 어디까지나 당대 신라 사회의 최상층인 서라벌 진골 기준에서 하는 얘기다. 견훤의 신라군 최종 승진 계급이 5두품이 오를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자리인 '비장'이었기에, 적어도 아자개 집안은 5두품은 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이 정도면 어떻게 봐도 당대 기준으로는 은~동수저 급이었다. 무려 5세기 중반부터 그 눌지 마립간 이래로 300년 넘게 왕궁 경비대 병력 및 정예병을 배출해온 왕실 직할령인 추풍령 출신임을 고려한다면 서라벌과 5소경 다음가는 지역 출신이 된다. 거기다 성덕대왕신종에서 박씨를 5두품으로 기록한 것이나 속일본기에서 대나마(5두품) 석씨가 등장하는 등 5두품 이하의 왕성(王姓)도 많았던 걸 고려하면 5두품이 절대로 평범한 신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후 견훤이 부여융의 8대손이란 선전이 나온 것을 보면 오히려 이 족보의 신빙성은 높아진다. 무려 3백 년 되짚어야 나오는 조상 할머니 중 하나가 성왕의 딸 소비 부여씨와 진흥왕 사이 후손인 걸 갖고 백제 왕족 후예라고 행세한다는 건 누가 봐도 엉터리였기에 그런 술작들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직계 부계가 지증왕부터인 신라 원성왕 또한, 무열왕 딸의 후손인 걸 갖고 무열왕계를 자칭한다는 건 너무나도 말이 되지 않았기에 선덕왕, 경덕왕, 자신 등 이 셋의 공통 부계 선조 내물 이사금을 강조해야 했던 걸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8] 백 번 양보해서 백숭부인이 소비 부여씨가 맞다 한들 견훤과 소비 부여씨의 간극은 무열왕의 딸과 원성왕보다도 멀었으니, 견훤이 어떤 떳떳한 FACT를 갖고 백제 부여씨 왕가와의 연결을 강조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9]

선품의 후손이 추풍령의 5두품 귀족이었던 '이씨'와 혼맥을 가졌던 것을 사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무열왕계에서 원성왕계로 왕위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남은 무열왕계가 강릉 김씨가 되었듯 서라벌에서 밀려나 왕실 직할령인 추풍령으로 내려갔거나 선품의 후손 중에서도 진골이 아닌 5~6두품밖에 안 될 정도로 영락한 후손이 모종의 이유로 추풍령으로 내려가 5두품 이씨와 혼인했을 가능성이 높다.[10] 무열왕계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내물 마립간계인 선덕왕성덕왕의 외손자라는 점을 내세워 즉위하거나 원성왕이 무열왕의 딸의 후손임을 내세워 즉위하고는 무열왕계, 선덕왕, 원성왕계의 공통 조상인 내물 마립간을 강조한 걸 보면 무열왕계가 몰락할 당시 구륜계는 신라 왕위다툼의 중심에서 이미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의 후손인 김주원조차 원성왕에게 밀려 강릉 김씨가 되었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주도한 김유신의 후손조차 빠르게 몰락한 것이 확인되는 상황에서 구륜계가 빠르게 세를 잃은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11] 다만 강릉 김씨였던 김양이 중앙 귀족으로 활동하는 등 강릉 김씨라고 전부 서라벌에서 밀린 것도 아니기 때문에 기록에 안 남아서 그렇지 중앙귀족으로 남은 구륜계 진골이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3. 관련 문서


[1] 형인 동륜태자, 진지왕이 55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므로 김구륜은 빨리 잡아도 550년대 후반 ~ 진흥왕이 사망한 576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2] 동륜태자와 진지왕 사륜이 전륜성왕의 동륜왕과 철륜왕에서 이름이 유래되었기 때문에 동, 철 다음가는 구슬(玉)에서 이름을 따 지은 것으로 보인다.[3] 선품은 삼국통일로 유명한 문무왕의 처 자의왕후의 아버지로 기록된 사람이다.[4] 동륜태자의 아들 진평왕진지왕의 아들 용수의 나이 차이가 10살 전후는 나서 용수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가 5촌혼을 했기 때문에 구륜의 손녀와 진지왕의 증손자가 7촌혼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5] 백(白)은 오방색에서 서쪽을 뜻하고 숭(𪀚)에는 융(戎)의 부수가 들어가 서융(西戎), 즉 관산성 전투 이후 극도로 사이가 악화된 백제를 신라가 비하했다고 볼 수 있고, 소비 부여씨도 차비로 엄연한 진흥왕의 정실부인이었기 때문에 후대에 사도왕후와 혼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6] 앞서 언급한 김씨녀를 모친으로 둔 '이씨' 아니면 아자개의 부친이었을 개연성이 있다.[7] 여성인데도 족보에 등장하는 걸 봐선 나름 꽤 신분이 높은 집안에서 나온 조상 할머니였던 것 같다.[8] 1814년 경순왕전비에는 원성왕지증왕의 3남 진종의 후손이라고 기록했는데, 이 기록의 신빙성은 논란이 있으나 설령 사실이라고 한들 내물 마립간의 후손인 선덕왕성덕왕의 외손자라는 이유로 먼저 즉위한 상황에서 무열왕 딸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즉위했고 내물 마립간을 내세운 걸 보면 진종계라는 위치가 큰 메리트가 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9] 후삼국시대 백제계 호족은 대부분 대성팔족을 비롯한 백제 귀족의 후손임이 유력시되는데, 백제는 신라와 달리 부여씨와 귀족의 혼인이 흔했으며 이 과정에서 흑치씨, 귀실씨 같은 귀족 분가를 만들기도 해서 성왕 딸의 후손인 것으로 백제 왕실의 후예 운운하게 되면 대부분의 백제계 호족들도 같은 근거로 백제 왕실의 후예 주장이 가능해진다. 거기다 서씨 호족은 실제 부여씨의 후손이 맞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서씨 호족도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고.[10] 진골이 바로 2계급이나 밑인 5두품과 혼인했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이씨와 귀천상혼을 한다고 가정해도 해당 '김씨'는 6두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1] 문무왕의 처가 구륜의 손녀 자의왕후였던 것으로 보아 무열왕계 초기까지는 나름 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무열왕계가 몰락하면서 같이 힘을 잃고 지방으로 밀려났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