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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31a2> 발해 제6대 국왕 康王 | 강왕 | |
시호 | 강왕(康王) |
연호 | 정력(正曆) |
성씨 | 대(大) |
휘 | 숭린(崇璘) |
왕자 | 대원유(大元瑜) 대언의(大言義) 대명충(大明忠) |
작위 | 발해군왕(795) -> 은청광록대부 검교사공 홀한주도독 발해국왕(798)[1] |
출생 | 750년대 추정 |
사망 | 809년 (향년 50대 추정) |
재위기간 | 794년 ~ 809년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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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의 제6대 가독부이자 군주. 연호는 정력(正曆). 문왕의 막내아들이다. 제5대 군주인 성왕이 강왕보다 한 항렬 아래이다.2. 생애
문왕 대흠무가 붕어한 후 두 명의 군주(폐왕 대원의, 성왕 대화여)가 폐위되거나 단명하는 등 짧은 재위 시기로 발해는 혼란에 빠져 있었으나, 강왕 즉위 후 일시적으로 안정을 되찾아 국력을 발전시켰다. 25년간 군주가 6번 바뀌는 혼란기에 15년간 재위하였다.[2] 재위 중 당나라와 교류하였고 일본과 적극적인 교류를 진행시켰다.선왕이 조카인 성왕 대화여인데 일반적으로는 보통 조카가 죽은 후 삼촌이 왕위에 오를 일은 드물다. 성왕이 어린 나이에 자식없이 요절한 것도 있지만 무엇인가 정치적 격변이 있었던 모양. 다만 기록이 없다보니 명확하지 않을뿐. 강왕의 출생년도는 알 수 없으나 정효공주가 757년생이라 하니 그 전이나 그 즈음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조카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해석할 경우 마침 비슷한 시기 옆나라 신라에서도 삼촌 헌덕왕이 조카 애장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는데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옆나라의 이런 중대사 소식은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므로 실제로 서로 찬탈의 모범사례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
세 아들이 모두 왕위에 올라 신라의 경문왕과 비슷한 점이 있다. 세 명의 자식 모두 얼마 못 가 다 죽고 말아서 방계로 왕위가 넘어가는 점도 비슷하다. 프랑스의 앙리 2세와는 세 아들이 모두 후손이 없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경문왕 삼남매도 사실상 금방 대가 끊기다시피 하긴 했다.
3. 가족 관계
4. 연표
- 795년 2월 당덕종이 내상시 은지섬을 보내 강왕으로 하여금 부왕(문왕)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
- 795년 11월 광간대부 겸 공부낭중[3] 여정림 등 60인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 796년 10월 여정림과 함께 일본 사신이 도착하였다
- 798년 11월 조카 대능신과 여부구가 귀국
- 799년 1월 대창태가 일본의 수도에 당도하였다
- 799년 4월 대창태와 함께 일본 사신이 도착하였다
- 805년 5월 당에서 '금자광록대부' 관작을 보태어 주었다
- 806년 10월 당헌종이 '검교태위' 관작을 보태어 주었다
- 806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 807년 ?월 진봉단오사 양광신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 807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 808년 12월 당에 사신을 보내다
- 809년 1월 강왕이 죽었고 당 헌종이 중관 원문정을 사신으로 보내주었다. 아들 대원유가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