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10 09:31:10

마도산 전투

발해의 대외 전쟁·분쟁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D1D1D; margin: -6px -1px -11px"
전쟁·분쟁 교전국
<colbgcolor=#2531a2> 천문령 전투
,697,
<colbgcolor=#fff,#191919> 무주
발해-당 전쟁
,732 ~ 733,
등주 공격
,732,
마도산 전투
,733,
발해-요 전쟁
,926,
}}}}}}}}}

마도산 전투
馬都山戰鬪
<colbgcolor=#2531a2><colcolor=#ffd700> 시기 733년 음력 3월 6일
장소

중국 하북성 천안현 북쪽 마도산
원인 발해와 당의 외교 및 군사적 대립
교전국 <rowcolor=black> 발해·거란·돌궐
(공격)

(방어)
주요 인물 발해군
지휘관

설초옥
곽영걸
오극근
오지의
나수충
지휘관

무왕(발해 국왕)
거란·돌궐군
지휘관

가돌우(거란)
참가자

참가자 불명
참가자

참가자 불명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발해·거란·돌궐 연합군의 승리
영향 당, 발해의 국제적 위상 인정

1. 개요2. 배경3. 전개 및 결과4. 영향

[clearfix]

1. 개요

733년. 발해의 계승 문제 및 복속 문제를 두고 발해와 당이 충돌한 사건. 발해가 거란을 후원하여 당군을 하북성 천안현 북쪽에서 궤멸시켰다. 발해 측은 거란 및 돌궐 세력과 연합하여 공격했으며, 이들과 대립하던 해족은 당나라와 연합했으나 발해의 승리가 굳건해지자 배반하고 이탈한다.

2. 배경

732년 9월 5일경 발해가 장문휴의 지휘 하에 당의 등주성을 공격하여 등주 자사 위준을 죽이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분개한 당현종은 이러한 발해의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고 당으로 망명해 있던[1] 무왕의 동생 대문예 편에 군대를 주어 파견토록 함으로써 직접 발해를 침공할 준비를 하도록 했다.

같은 달 21일에 신라에게도 발해의 남쪽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는 등 사방에서 발해를 옥죄었으며, 이러한 당의 협공에 대응하기 위해 무왕은 당에 적대적인 거란의 가돌우와 돌궐을 지원하는 등 당과 노골적으로 대립각을 세웠고 결국 당군과 충돌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요청대로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북진했으나, 폭설과 이로 인한 보급 문제를 핑계로 말머리를 돌려버렸으며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해를 넘긴 733년 3월에 당의 군대는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기동했다. 여기에 거란의 가돌우가 이끄는 거란·돌궐군이 마도산에서 맞서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3. 전개 및 결과

당군이 마도산 인근에 다다르자 발해의 후원을 받은 가돌우가 거란·돌궐 연합군을 지휘하며 당군을 먼저 공격하였다. 당은 유주 절도사 설초옥이 부총관 곽영걸, 오극근, 오지의, 나수충 등을 출동시켰으나 곽영걸이 마도산 인근에서 거란·돌궐 연합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기병 1만명이 마도산 주변에서 전멸당하며 주력군을 삽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당이 순식간에 주력 부대를 잃자 당군 진영에 속해 있었던 해족 기병대가 패배를 직감한 뒤 배신하여 이탈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당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사실상 더 이상 전투가 어려운 지경에 몰렸다.

한편 무왕이 직접 친정한 발해군은 당이 침공하자 가돌우와 합세하기 위해 마도산으로 진공했으나 발해 군대가 마도산에 도착했을 때 전투는 이미 끝나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발해군은 철수하지 않고 도착한 직후 병력을 추스려 후퇴하는 당의 군대를 추격하기 시작했으나 당의 군대는 진군해오는 발해군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돌로 400리에 이르는 장벽을 쌓아 항전했으며 이에 발해군은 더 이상 추격을 포기하고 철군했다.

4. 영향

마도산 전투에서의 패배로 당은 발해의 국제적, 정치적 능력에 대해서도 재고를 해야 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발해는 당으로 하여금 동북 제민족에 대한 제어에 있어 발해의 협조를 구해야만 한다는 점을 확실히 못박아 두었다. 당 현종은 이 이상으로 발해의 계승권 다툼에 끼어들지 않았고 발해의 독자적 영역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 발해의 군사력과 이에 바탕을 둔 외교적 능력은 발해와 당이 원만한 외교 관계와 활발한 문화 교류를 지속시키는 바탕이 되었으며, 발해가 향후 200년에 이르는 동안 외적으로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보낼 수 있게 된다.

다만, 이로 인해 발해의 국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시 당의 주적은 발해가 아닌 북방의 돌궐[2]과 서방의 토번이었으며, 이후 남쪽에서는 남조, 서북쪽에서 위구르가 발흥하는 등 당의 외적이 사방에서 갈수록 불어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게다가 신라도 내부 문제로 이 시점에 발해와 싸울 의지는 없었지만 당이 심각한 위협을 받을 지경이면 자기들도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협공을 가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당은 굳이 발해를 더 자극하여 적을 늘리지 않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했던 것이고, 발해 역시도 몇 번 승리를 거두긴 했다지만 전반적으로 국력 면에선 당에게 밀렸고 당과의 전면적인 전쟁은 자살 행위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동북지역 통제를 위해서는 발해를 존중해 줘야 한다는 점만 확인시키고는 더 이상 자극하지 않고 끝냈다. 또한 다음 왕인 대 문왕에 이르면 발해는 동북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인정받는 대신 친당정책으로 전환하여 태평성대를 누리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물론, 전대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 건국한지 30년만에 이룬 위업으로써는 엄청한 쾌거였음이 분명하다.

[1] 종전 흑수말갈 처리 관련 문제를 둘러싸고 대문예무왕 대무예 간의 대립이 있었고 결국 대문예는 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대문예, 무왕 항목 참조.[2] 그러나 사실 돌궐은 남북조시기가 전성기로 이전 왕조인 수나라때에 이미 꺾였고, 이후 한번 완전히 무너졌다가 다시 세력을 키우던 중이였다. 오히려 직전 시기인 무측천시기에 거란이 잠깐이나마 중국을 위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