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표는 한국사에서 독자적으로 사용된 연호를 정리한 것이다. 위서인 환단고기 등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연호는 기록에서 배제하였다.
사용 개시 및 종료 연도가 적혀있지 않은 경우는, 사용했다는 기록은 확실하나 사용 기간을 알 수 없거나 정확한 사용 기간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뜻이다. 또한 연호 뒤에 (?)가 붙은 경우는 사서의 기록이 엇갈리거나 그 실재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빈약한 경우이며, (*)가 붙은 경우 사용 주체의 정통성이 의심되거나 널리 사용되지 않아 사실상 사연호(私年號)라고 보아도 좋은 것이다.
현전하는 한국의 연호 중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연호다. 정혜공주묘비에는 보력 7년이 나오는 반면 정효공주묘비에는 대흥 56년, 대흥 57년이 나온다. 두 금석문이 상충하지 않도록 설명하면, 774년 대흥 38년에 보력 원년으로 개원했다가 781년 보력 8년을 대흥 45년으로 환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963년 송과의 국교가 활성화 되고 송의 연호를 채용하면서 독자적인 연호 사용은 중단되었다.
고려 시기에는 중국에 여러 왕조가 들어서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외교 노선에 맞춰 연호를 바꾸는 일이 빈번하였다. 대표적으로 993년, 요가 침략하였을 때 서희는 송과 단교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여 요의 비위를 맞추었으며, 요가 쇠퇴하고 금이 흥성하였을 때는 금의 연호를, 몽골이 흥성할 때는 원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광덕의 경우 『고려사』에는 950년을 원년으로 세고 951년부터는 후주의 연호를 사용해 중지했다고 전한다.『대안사광자대사비』,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등 금석문에서는 광종 1년(950)을 광덕 2년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고려 국초에는 칭원법이 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후주의 연호를 받아들인 뒤에도 광덕 4년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두 연호를 병용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경종이 태평(太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학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 경기도광주시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그리고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마애보살좌상 옆의 명문에서 나타나는 연호이긴 한데, 여기의 '태평'은 송 태종의 연호인 '태평흥국'을 줄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3] 1150년(의종 4년)에 사망한 윤언이의 묘지명에는 아래 내용이 적혀 있다.
연호를 세우자는 이 청은 실로 임금을 높이려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태조와 광종이 그렇게 한 적이 있고, 지난 문서들을 살펴 보건대 비록 신라와 발해도 그 일을 하였습니다.
[1] 935년 10월에 반포된 견신검의 즉위 교서에서는 정개 연호가 아니라 후당 말제 이종가의 연호 청태(淸泰, 934~936)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정개 연호가 후백제가 멸망하는 936년까지 쓰였다는 식의 서술은 오류이며, 정개 10년이라고 명시된 910년 이후로 후백제가 얼마나 정개 연호를 더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2] 단, 준풍이라는 연호는 북송의 연호인 건륭을 피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건과 륭이 고려의 태조와 세조의 이름이기 때문.[3] 고려 경종은 975년에 즉위했는데, 만약 유년칭원법에 따라 연호를 사용했다면 원년이 이듬해(976)였을 것이다. 송 태종은 976년에 즉위했는데, 즉위년에 바로 태평흥국 연호를 사용했다. 만약 경종이 연호를 사용했다면 원년이 되었을 해와 태평흥국의 원년이 같기에 이런 오해가 생겼다.[4] 2024년 들어 선대를 지우고 자신과 후대(김여정, 김주애)만을 돋보이게 만들고 싶은 김정은에 의해 주체연호 사용이 많이 줄었으나 공식적으로 폐지를 선언하지는 않았다.[5] 서기와 병행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