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과 북한의 통일 - 남북통일
- 중국과 대만의 통일 - 양안통일
- 대한민국 장로회의 분파 -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 남북통일에서 유래된 기차의 이름 - 통일호
- 러시아의 정당 - 통합 러시아, 통합(러시아)
- 평양시의 前 역명 - 모란봉역
1. 개요
통일 / 統一 / Unification'하나로 합치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주로 둘 이상의 국가의 통합을 의미한다. 현대에는 주로 분단국가 사이에서 많이 거론된다.
일반 국가끼리의 합병도 성공적으로 완수되면 통일이라 부른다. 중국사에서 숱하게 언급되는 천하통일이나 한국사의 삼국통일이 대표적.[1]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도 같은 표현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독일 통일은 동독과 서독의 독일 재통일 말고 프로이센 왕국 주도의 독일 제국 수립을 말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분단국가의 통일은 이전에 이미 통일된 상태였던 국가가 분단된 뒤에 다시 통일되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재통일'이다. 영어로는 reunification에 해당된다.
2. 장단점
2.1. 장점
통일을 하면 교통상, 군사적인 이점이 생긴다. 가로×세로 100km의 국가 2개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지켜야 할 국경의 총합은 400km의 2배인 800km지만 통일이 되면 600km로 줄어든다. 또한 교통도 편리해진다. 기존에는 국경을 한 번 더 건너야 갈 수 있던 지역을 한 번만 건너서 갈 수 있게 된다. 각각의 인구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경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시너지가 생기고 내수시장도 커진다.월스트리트의 전설적인 투자자인 짐 로저스는 남북한 통일을 예로 들며 통일이 이뤄질 경우 천문학적으로 낭비되고 있는 국방비가 인프라 확충 등 더욱 생산적인 자원에 대신 활용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2.2. 단점
통일을 하고 나서 억지로 붙여놓으면 내부 갈등이 심해져 국가가 혼란해질 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 국력까지 쇠퇴할 가능성까지 있다.대표적인 예로 동유럽의 체코슬로바키아나 유고슬라비아, 수단, 나이지리아 등의 몇몇 아프리카와 유럽 국가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만 해도 결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북마케도니아,
한편 거주 지역은 같으나 민족이 달라서 다른 국가 및 지역으로 분단된 곳도 있다. 해외를 떠돌아다니던 유대인들이 다시 자신들의 옛 땅에 세웠던 이스라엘과 그 이전에 이미 그 옛땅에 존재했던 아랍인, 아랍계 주민들이 독립해야 했으나 이스라엘에게 빼앗겨 절반 정도가 준독립이 된 팔레스타인도 넓게 보면 여기에 해당된다.[4]
반면 네덜란드와 벨기에처럼 민족이 같은데도 종교가 달라서 억지로 통일이 되었다가 다시 갈라진 사례도 있다.[5][6]
그 밖에 서로 붙으려는 열망이 강렬하다고 하더라도 사회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특히 남북통일을 반대하는 입장은 통일반대론 참고.
3. 종류
3.1. 평화통일
통일을 원하는 국가들이 합의 하에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제도를 개편해서 합치는 통일이다. 국가 역사는 어느 쪽도 따르지 않으며, 통합된 새 역사가 시작된다.3.2. 무력통일
전쟁을 일으켜 상대를 정복하면서 자신 관할로 만드는 것이다. 국가 역사는 정복자 것을 따르며, 법과 제도도 승자의 것을 따른다. 고대와 중세에는 이런 방식으로 통일을 많이 했다.1994년에 예멘이 재분단되었을 때, 북예멘이 남예멘을 전쟁으로 통해서 이긴 역사가 있다. 이 외에 1975년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적화통일시킨 것도 이에 해당된다.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킨 것도 이 이유에서다.
3.3. 흡수통일
대한민국이 북한 지역을 흡수했을 때의 통일에 대한 내용은 흡수통일(대한민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무력통일과 비슷해 보이나 여기는 국가 간 전쟁은 없고 멸망 원인이 내분과 자멸인 게 차이점이다. 한 국가가 막장이 되어서 우리나라 맡아달라 할 때 모든 권한을 받아서 자기 국가로 만드는 게 흡수통일.
1990년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예시로 들 수 있다.
4. 통일 후의 국기
통일 후의 국기 | ||
북베트남 | 남베트남 | 베트남 |
남예멘 | 북예멘 | 예멘 |
동독 | 서독 | 독일 |
대한민국 | 북한 | 한반도기 (비공식)[7] |
그리고 남예멘과 북예멘에서도 서로 분단을 겪으면서도 1989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1990년 5월 22일에 합의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서로 다른 공동의 삼색기만을 사용했다.
남예멘은 파란색 삼각형과 내부에 별이 들어가 있고, 북예멘은 가운데 별 한 개가 들어있었다. 통일 후에는 삼색기만을 사용했다.
그러나 베트남 같은 경우에는 북부의 공산정권이 일방적으로 무력통일[8]을 한 거라 국기는 북베트남의 금성홍기로 정했다.
남북한의 경우에는 아직 통일이 되지 않고 각각 태극기와 인공기를 사용중이다. 다만 올림픽 공동입장이나 남북단일팀 등 필요시 통일의 상징으로 한반도기를 사용하는 편이다.
남북통일이 실제로 된다면 국기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나,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이 될 경우 태극기를 계속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9] 북한 또한 북조선인민위원회 시절에는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다. 일부에선 통일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국기를 제정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렇다 할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해외 커뮤니티에선 마치 유니언 잭처럼 태극기와 인공기를 합성한 국기를 통일한국의 국기로 제안하고 있으나[10] 유니언 잭이 유독 특수한 사례이고 이런 식으로 국기를 합쳐서 통일 국가의 국기로 쓴 예는 매우 드물다.
5. 방법
군주제 시절에는 통일이 되려면 한쪽은 군주직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전쟁을 통한 통일이 많았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 왕과 여왕이 결혼을 해서 통일이 된다든가, 영국에서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이 통일된 것처럼 인접한 나라끼리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가 결국 통일이 되는 일이 있었다. 다만 동군연합이 곧 통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현대 민주주의 국가로 통일이 되는 경우 원칙적으로는 양쪽에서 똑같이 의원을 선출하거나 대통령을 선출하면 되지만, 인구가 많은 쪽이 정치를 주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통일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두 지역간에 경제적이나 문화적이나 차이가 나는 점도 갈등 요인이 된다. 한쪽의 정치 제도가 민주주의가 아닌 전제주의인 경우 그쪽이 무력으로 적화통일에 성공하지 않는 이상 혁명으로 비민주적 정권이 무너져야 통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독일은 혁명이 일어난 뒤 동독에 새로 들어선 민주정권이 서독과 재통일을 하였다.
5.1. 완전한 단일국가, 완전한 제도의 통일
서로간에 경제적 격차가 없고 제도가 유사하며, 국민들간의 가치관이 유사한 경우 가능한 통일방식이다. (벨기에) 플랑드르-네덜란드[11],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와 같은 예를 제외하면 실현이 어렵다.5.2. 인구가 적은 지역을 배려하는 방식의 통일
소선거구제/비례대표 제도로는 인구가 많은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이 훨씬 많아져서 인구가 적은 지역 주민이 반발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고 인구를 무시하고 동등한 의석을 할당하면 반대로 인구가 많은 지역의 주민들이 반발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양원제와 같이 인구가 적은 지역에 좀 더 많은 비율의 의석을 할당한 상원과 인구에 비례하는 하원으로 나누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단원제로 한다고 해도 한국을 예로 든다면 남한 인구가 북한 인구보다 2배 이상 많지만, 의회에서는 2:1 정도로 인구가 적은 지역을 배려할 수 있다.5.3. 연방제 내지는 경제적 특례의 부여
어려운 지역에 대해 경제적인 특례를 부여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 의료제도와 연금 제도를 서독의 제도로 통합하는 대신 동독 지역의 의료비나 연금액을 정부에서 보조해주었다.사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경제적 능력이 적은 지역(동독)은 경제적 능력이 높은 지역(서독)에 비해 자원, 지가, 봉급 등이 상당히 저평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6. 통일을 저해하는 요인
6.1. 지배층의 지배권 상실
한쪽 지역에서는 일당제 독재를 한다든가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없는 경우 그 정권에서 통일에 반대하게 된다. 베트남의 경우 남베트남은 1958년 국제사회의 결정에 따라 남북 총선거를 통해 통일을 하기로 결정되어있었지만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통일을 거절하였고, 북한도 정확히 언급하자면 소련이 남북분단이 되기 전 남북 총선거를 통해 통일을 하자는 국제사회의 제안을 거절하여 오늘날까지 분단이 되어 있다.대만은 중국이 민주주의로 전환하면 양안통일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당연히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일당제를 포기할 생각이 없으므로 통일을 못한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는 대만은 미국만 없었으면 당장 들어가서 박살낼 수 있는 국가라서 그들이 하는 요구를 들을 리가 없다.
현재 북한의 경우 북한이 남한보다 인구가 적고, 북한의 이념을 대변하는 정당이 남한에서 표를 얻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통일이 되면 북한의 지배층은 실권의 상실을 넘어 국가보안법은 사면해준다고 쳐도 정치범수용소 등 인권 문제에서 처벌받을 테니 남한의 통일 시도에 사실상 응하지 않고 있으며 남한을 전복시키려는 적화통일을 고집한다. 권력의 속성은 매우 냉혹하니 만일 북한 지배층의 모든 범죄를 통일정부에서 무효화한다고 가정해도 통일 후의 전 북한 지배층의 신변을 장담하기가 매우 어렵다. 과연 전 북한 거주 국민들이 자신을 억압하고 굶기고 총살, 공개처형하던, 권력을 잃은 전 지배층을 가만히 내버려 둘까?
그런데 사실 전 북한 지배층에 대한 북한 거주 국민들의 복수심이 폭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픈 상황이 전 북한 지배층을 중심으로 북한 거주 국민들이 결집하는 상황이다. 북한 지배층의 명백한 죄과에도, 통일 이후 (구)남북한간의 경제적/사회적 격차와 그 탓에 사회적 갈등이 두드러질 경우 소외감을 느낀 전 북한 주민들이 '같은 편'으로 간주하는 구 지배층을 옹호할 가능성은 결코 무시하기 어렵다. 집단의 논리라는 것이 원래 집단 내부에 아무리 큰 갈등이 있어도 외부에는 함께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최악의 경우 국회 의석의 1/3을 조선로동당 출신자가 채워버린다거나, 남한 출신 후보가 여럿 나온 틈에 조선로동당 출신의 후보가 북한 표를 싹 쓸어서 대통령에 오른다는 등의 상황도 벌어질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대한민국의 경우 이미 추진하는 정책들도 세금이 늘어난다는 이유로 범국민적인 반발에 부딪히는데, 자신들 정권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기보다 통일세 같이 당장 국민적인 부담을 강요하는 통일을 바랄 리가 없다. 통일을 통해 이득이 나오려면 잘해도 수십 년은 족히 걸린다. 저 헬게이트를 단기간에 정비할 수가 없다. 이는 북한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김일성과 공산 체제에 관해서만 배운 그들이 국가에 소득을 신고하고 일정 금액을 계속 헌납해야 한다는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사실 주기적으로 정권이 바뀌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해당 정권 집권기에 장기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꽤 강하다.
지역의 의견이 잘 대변되지 않는 문제는 특별히 지배층이 기득권을 누리던 것이 아니어도 통일 이후에 서로 갈등을 품는 요인이다. 예멘의 경우가 그런 상황이다.
6.2. 문화의 차이
오랫동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식민지배 등으로 문화권이 차이를 보인 국가간에 통일이 되는 일이 많다. 애초에 문화권이 같고 국민 의식이 같다면 서로 분리해서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서로 가진 의식이 달라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례로 독일에선 자본주의 서독 주민과 사회주의 동독 주민 간의 의식 차이로 인해 문제가 종종 발생하곤 했다. 동독 주민들은 거주, 고용을 당연히 정부에서 보장하고 식량도 배급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서독에서는 그런 의식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복지 정책이야 있었겠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의료 무료, 교육 무료, 노동 무조건 제공, 거주지 제공 등에 비하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의 경우 통일이 된다면 갈 길이 멀다. 일단 북한 주민들은 김씨 일가 신격화 교육을 받은데다가 공산주의적 의식 또한 남아있으며, 그 특성상 전체주의적 분위기가 강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남한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이고 정치에 냉소적이며 권위를 잘 신봉하지 않는 편이다. 이러한 거대한 두 집단의 인식 차이는 통일 후 사회 혼란을 가져올 확률이 매우 높다.
가장 큰 문제는 나라의 체제를 정해야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 70년동안 있던 한국과 사회주의와 김씨 일가가 다스리는 사회에서 70년을 머무른 북한과의 통일을 한다면 어려운 점이 많다. 평화적인 통일을 한다면 두 나라 모두 자신의 체제를 고집할 것 이며 만일 통일한국에서 두개의 체제 모두를 받아들인다면 국민을 어떻게 분배할지 또한 문제이다. 선택권을 주게된다면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많기 때문에 남한으로 많이 몰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균형이 생기게되고 김씨 일가도 가만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6.3. 경제적 격차
경제적 격차도 통일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못 사는 지역에서는 일단 소득은 어느 정도는 올라가지만 예전에는 실업자는 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던 것에 비해서, 통일이 되면 아예 실업자가 되는 일이 많아진다. 왜냐하면 서로간에 물자의 교환이 일어나면 품질이 떨어지는 상품의 수요가 줄어든다. 월급 자체는 최저임금도 있고 이래저래 '어느 정도' 올라가기는 하지만 그만한 생산성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못 사는 지역의 고용 여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직장을 유지하여 월급이 어느 정도 올라간 사람이라고 해도, 물가는 '훨씬 더 오르기 때문에' 삶의 질은 크게 떨어지게 된다. 반대로 통일을 받아준 잘 사는 지역에서는 못 사는 지역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대해 불만을 품는 사람이 늘어난다. 경제적 격차가 나면 통일 직후 급격한 인구 유출입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또한 도시 빈민이라든지 인구 유출 지역의 생산 기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 뿐만이 아니다. 애초에 왜 사회주의가 발생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문제가 엄청나게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상대적 빈곤, 박탈감을 가장 심하게 겪는 동물 중 하나이다. 비록 내가 먹고 살 정도를 벌 수 있다 해도 부유한 옆집 사람이 대저택을 짓고 종종 파티와 외식을 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부러워지기 마련이다.
독일도 통일 과정에서 이런 면모가 드러났는데, 자본주의 진영의 서독이 공산주의 진영이었던 동독보다 훨씬 잘 살았으며, 그로 인한 지역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공산권에서도 생활 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동독에서도 서독에 대한 상대적 빈곤감으로 몸살을 앓았는데, 하물며 더 격차가 나는 상황(이를테면 남한과 북한)이라면 과연 어떤 상황이 일어날까?
게다가 그로 인한 교육적, 신체적 격차까지 많이 벌어져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더 이런 현상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남한의 성인 남성들은 1년 6개월 징병인 반면 북한의 성인은 남성 10년, 여성 6년 징병이다. 당연히 교육 격차가 클 수밖에 없다. 교육 과목 역시 격차가 크다. 남한은 지나칠정도로 국어 영어 수학 등에 집중하고 대학이 아니라고 해도 실업계 고교나 특성화 고교를 통해 실제 산업에 필요한 전문 지식들을 학습하는데 북한의 교육과정은 수학시간과 같거나 조금 적은 수준으로 '김일성 만세!'에만 할애하고 있다. 또한 북한 체제 특성상 다양한 생각과 사상이 막혀있고 창의력이 말살되어있어 발전할수가 없는데다가 대학에 진학할수 있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하고, 돈과 권력에서 떨어진 집안의 학생들을 졸업 후 다양한 직업군 중 자기가 원하는 곳을 선택해서 나아가기도 어려운 국가라 동기부여가 매우 적다.
이런 상황이니 북한은 직업 훈련도도 남한보다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의 신체적 조건 역시 마찬가지다. 신장 평균이 수 센티미터 차이도 아니고 수십 센티미터 정도 차이가 나는 상황으로 이 역시 노동 조건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다만 신체의 차이는 다 경제적 격차에서 온 것이다. 최소한의 음식 섭취가 가능해지고 초중고 급식이 활성화 되면 남한과 별 차이 없는 유전자를 감안할때 시간이 지나면 같아질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은 통일이 된다 해도 국민들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한동안 심화시킬 중요한 요소이다. 이 정도로만 끝난다면 모르되 은연 중 '미개한 난쟁이 자식들', '꺽다리 부르주아놈들' 등으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실제 독일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결과적으로 경제적 격차가 한 세대만에 따라잡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국으로 버틸 수 있었고, 통일이 되어 대국이 된 것은 이에 알게 모르게 많은 기여를 했다. 북한의 스트레스도 북한이
사실 북한도 결국엔 남한과는 같은 민족인지라(...) 독일 뺨치게 교육열은 높다. 국가의 교육 철학과 방식
또한 위와 반대의 입장에서 볼 때 경제력이 우월한 쪽이 그렇지 않은 쪽을 착취할 수 있다는 내부 식민지론 문제도 대두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남한만 해도 서울 공화국 문서만 참조하면 지역간 경제력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문제를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도 은연 중에 통일이 되면 북한의 영토와 자원, 인구를 경제적인 위기이자 기회로 여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식이 불러올 사회 문제는 통일 전의 지역감정이나 빈부격차를 아득히 추월할 것이다.
7. 목록
7.1. 성공 예
- 태평양
- 투이통가 왕국
7.2. 제안
- 유럽연합: 다만 어떠한 방식의 통일을 목표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유럽연합 내부에서도 유럽연합이 처음 발족했을 당시부터 여러모로 의견이 갈리고 있다. 미국이나 러시아 등과 같은 완전한 연방제 국가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지역의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의견과, 그렇게 완전한 연방제 국가로 가는 걸 반대하고 대신 지금과 같은 국가연합 단계의 통합을 형식상 유지한 상태에서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권한과 권력을 연방제 국가와 비슷한 수준으로 강화하는 방식으로 지역의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리고 있다. 전통적으로 완전한 연방제 국가로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고 국가연합 단계의 통합을 유지하면서 지역의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후자의 의견이 우세한 상황. 때문에 유럽연합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방식의 통일을 최종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발표는 딱히 행해지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이 처음 발족했을 때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럽 지역 전체의 통합을 추구한다는 두루뭉실하고 애매한 목표 이상으로는 명확하게 무언가가 결정된 바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의 통일을 최종적인 목표로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실하게 표명된 것이 없었고, 지금도 점진적인 통합을 추구하는 유럽연합의 특성 덕에 확실한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다.
- 키프로스 - 북키프로스: 북키프로스의 후원국인 튀르키예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큰데, 튀르키예의 북키프로스에 대한 수호 의지가 중국이 차라리 양반으로 느껴질 정도로 확고하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심지어 북키프로스는 중국,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더군더나 북키프로스의 경우 과거 키프로스 분단 이전 키프로스의 터키계 인구에 대한 탄압을 언급하며 분단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으며 민족에 따라 분단이 된 상황이라 영구분단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만 한반도와 같이 미중갈등의 연장선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 루마니아 - 몰도바: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통일 참조. 루마니아와 몰도바는 언어가 같으며 오스만 제국 지배 시절인 1812년 프루트강 동부의 몰다비아 공국 영토가 러시아 제국에게 할양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통일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소련에게 강탈당한 만큼 통일 요구가 강하다. 대체로 루마니아에서 통일 의견이 우세한 한편 몰도바에서는 비등[15]한 상황이다.
- 몰도바 - 트란스니스트리아 -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내의 슬라브족 자치구역이나 1990년 이후 사실상 독립한 미승인국가이다. 몰도바는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복귀를 주장하지만 트란스니스트리아는 한사코 거부하고 있으며 오히려 러시아와의 통일을 지지하는 상황.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합할 경우에는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정식 독립을 인정하자는 제안도 있다.
- 아일랜드 - 북아일랜드: 아일랜드 통일 문서 참조. 국가 대 국가의 통합이라고 볼 순 없지만, 아일랜드 역시 재통일을 시도하려는 국가이다. 그러나 위에 있는 국가들처럼 그렇게 활발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영국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재통일이 순탄치 않다. 그러나 벨파스트 협정으로 북아일랜드인들의 다수가 원한다면 투표를 거쳐 통일을 허용하기로 영국이 합의하였으며, 그전까지는 영국 잔류 여론이 우세했지만 브렉시트로 영국 본토에서 아일랜드 통일을 용인할 수 있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북아일랜드 주민 사이에서도 통일을 찬성하는 여론이 증가했으며 2022년 5월 북아일랜드 선거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 신 페인이 제1당으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 알바니아 - 코소보: 알바니아와 코소보의 통일 참조.
- 리비아: 2011년 1차 리비아 내전 종식 이후 새로운 정부가 나타났으나 내분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2014년 이후 내전이 다시 발발하여 국가는 하나였으나 정부들은 2개로 나뉘어져(트리폴리, 토브룩) 무정부 상태가 된 상황이었다. 국제적으로는 토브룩 정부가 인정받았다. 하지만 2015년 후반에 본격적으로 통합 합의에 동의를 했고, 2016년 트리폴리 정부가 있었던 곳에서 트리폴리 정부는 물러났고[16], 통합정부가 나서면서 정부는 사실상 하나가 되었지만, 토브룩 정부가 합의에서 빠져나오면서 통합에 실패하고 다시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후에는 통합 트리폴리 정부가 국제적인 승인을 받고 있다.
- 러시아 - 크림 반도( 크림 공화국, 세바스토폴): 소련이 붕괴된 이후부터 2014년 3월 18일 전까지는 우크라이나 영토였지만 3월 18일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독립되었던 크림 공화국은 러시아에게 합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이를 통일이라고 보고 있으나, 우크라이나에서는 점거로 취급하는 상황.
- 우크라이나 -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두 친러 공화국들의 경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끼여 우크라이나와 현재까지 분쟁 중이고, 여러 협상을 통하여 이 분쟁을 끝내려고 했지만 친서방 정책을 펼치는 우크라이나와 대비되게 러시아인, 러시아계, 친러세력들이 많은 돈바스 공화국들의 상황과 러시아의 개입[17]이지만 평화통일은 실패했다. 결국 두 돈바스 공화국들은 동남부 우크라이나 합병으로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고 2022년 현재 전쟁이 진행중이다.
- 예멘 - 여기도 사실상 다시 분단될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미 분리 세력이 나타난 상황. 그러나 기존 정부를 중심으로 통합을 유지하려는 듯하다. 분리 세력과 다른 정파 세력들의 주장이 달라서 내전이 더욱 심각해지기도 했다.
- 네덜란드 - 플란데런(벨기에) / 왈롱(벨기에) - 프랑스: 벨기에를 해체하여 북쪽(플랑드르)는 네덜란드, 남쪽(왈롱)은 프랑스에 통일하자는 시도가 있다. 이 중 네덜란드-벨기에는 1815년부터 1830년까지는 네덜란드 왕국으로 통합되었지만 사회, 경제, 정치적 갈등,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1830년 벨기에가 독립하면서 분리되었다. 참고로 벨기에 지역은 가톨릭교인들이 많은데 비해 네덜란드 지역은 신교도 숫자가 많다.
- 북오세티야 - 남오세티야: 러시아 내부의 자치국가인 북오세티야와, 조지아 내부의 지역이었다가 미승인국으로 자립한 상태인 남오세티야도 서로 사이가 준수하고 같은 오세트인으로서 합쳐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남오세티야의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조지아의 반대다. 남오세티야-북오세티야 관계 문서 참조.
8. 실패 사례
- 기니비사우 - 카보베르데: 둘 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독립당이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함께 독립투쟁을 하여 1975년 나란히 독립했다. 그 뒤 이 두 나라가 통일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끝내 무산되었다.
- 세네갈 - 말리: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할 때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소속 식민지였건 세네갈과 프랑스령 수단(=말리)가 말리 연방이라는 이름의 단일국가로 독립하였으나 말리 연방의 주도권을 두고 세네갈의 지도자 레오폴 상고르와 수단의 지도자 모디보 케이타 간의 갈등이 격화되자 결국 독립 2달 만에 상고르의 세네갈이 말리 연방에서 탈퇴해 나감으로서 해체되었다.
- 세네갈 - 감비아: 세네갈과 감비아 두 나라 다 다민족 국가이지만 민족 구성은 같았고, 감비아를 세네갈이 둘러싸고 있어 서로 불편했기 때문에 통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특정 민족어를 공용어로 정할 수도 없고 다민족 국가인 이상 식민지 지배국의 언어를 공식어로 채택한 상황에서 통일에 한계가 있어 결국 국가연합 단계에서 해체되었다.
- 유고슬라비아: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남슬라브 지역의 여러 군소국가들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합쳐진 나라로[18], 세르비아 왕가 하에 통합되었으나 효과적인 통치 실패에 제2차 세계 대전까지 겹쳐 와해되고 독일의 속국 크로아티아와 독일령 세르비아로 나눠지고 그 와중에도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가 서로 싸우며 피바람이 부는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종전 후 요시프 티토의 지도력으로 통합이 유지되었으나, 티토 사후인 1991년 6월 25일부로 구성하고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하고 나머지 연방들도 차례로 독립하여 결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코소보 등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 팔레스타인: 1946년에 팔레스타인이 독립했으나 1947년[19]에 분할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나뉘어졌고, 이스라엘이 가자, 서안지구를 제외한 대다수를 점령하면서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국경이 되었다. 무엇보다 팔레스타인 정치적 갈등과 내분 때문에 내부 역시 가자와 서안지구로 사실상 나뉘어진 상태이다. 통일보다는 통합 및 흡수에 가깝긴 하지만, 중동 전쟁 때 요르단은 서안 지구를 흡수했으나(그래서 서안지구가 서요르단으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다), 1988년에 요르단이 서안지구를 포기하면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갔으나 훗날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이 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흡수하는 상황도 있었으나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에게 빼앗기게 된다. 2014년 이후 팔레스타인에 통합 정부가 나타났고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정치당들이 겨우 화해했으며, 이스라엘의 아랍인들 중에도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까지 통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이기도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20][21]
- 모로코 -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서사하라): 모로코가 독립되면서 서사하라 역시 모로코가 가져가려고 했으나 서사하라가 독립되면서 나뉘어졌다. 결국 모로코는 서사하라 다수를 점령하고, 그곳에 주민들을 정착시키면서 서사하라 서북쪽 대부분을 모로코의 영토로 만들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서사하라 반군인 폴리사리오 단체들이 남아있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계속 저항하고 있다. 무엇보다 서사하라 내부 역시 함정, 지뢰들로 구성된 모로코 장벽을 경계로 서쪽은 모로코 주민들이 대다수이고, 모로코의 지배를 받는데 비해 동쪽은 여전히 모로코에 저항 중이다.
- 아랍연맹 - 원래 아랍권 국가들은 영국과의 약속 중 하나인 통일된 아랍권의 나라로 독립시키라고 했으나, 영국이 이스라엘 건국을 인정하고, 영국 외에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아랍권들을 식민통치하면서 분할했고, 그리고 이것은 22개의 나라들로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말았다.[22]
- 그란 콜롬비아(대콜롬비아) - 1819년부터 1831년까지 중남미에 있었던 국가. 지금의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주변의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파나마를 통합했으나, 투표를 통해서 에콰도르와 베네수엘라는 나중에 탈퇴하여 갈라졌다. 이후부터 1858년까지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한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콜롬비아의 전신, 그 당시의 파나마는 1903년까지 콜롬비아와 통합된 상태였다)으로 유지되어 니카라과와의 통합했으나 니카라과가 탈퇴한 이후 그라나다 연합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그라나다 연합 시기에는 코스타리카와 연합했지만 1863년 코스타리카가 탈퇴하여 콜롬비아 합중국이 되었다. 1886년에는 현재의 콜롬비아 공화국이 되었다. 파나마는 콜롬비아 영토로 유지되었으나 1903년에 파나마도 마지막으로 독립되었다.
- 파키스탄 - 방글라데시: 인도 북부(서북부의 신드와 펀자브, 동북부의 벵골)를 중심으로 인도에 있었던 수많은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독립을 시도하려고 했으며 이로서 1947년 파키스탄이 독립되었다. 하지만 중심지는 서파키스탄이었고, 인도로 인해 월경지가 된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인들에게 좋지 않은 대우를 계속 받았다. 결국 불만이 커진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을 대상으로 수차례의 항쟁들과 분리독립을 시도하였으며, 1971년에는 인도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방글라데시로 독립한다.
- 페루-볼리비아 연합 - 페루와 볼리비아 모두 잉카 제국의 후신이라는 정체성을 어느 정도 공유하며 스페인 식민시절 당시 볼리비아가 상 페루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만큼[23] 또한 이 연합이 존재했던 1830년대에는 독립한 지도 얼마 안됐으니 이 두 국가간의 동질감과 유대감은 상당히 강했다. 당시 페루와 볼리비아 모두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고, 페루는 국경분쟁으로 그란 콜롬비아와의 전쟁도 치르고 있었기에 페루의 도움 요청을 받은 볼리비아 대통령 안드레 데 산타크루즈는 페루의 반란군을 진압, 페루-볼리비아 연합을 형성하였으나 두 국가 모두 이러한 통일에 반대파가 있었고, 이 반대파들은 통일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지역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전쟁을 선포하면서 존속 3년만에 다시 페루와 볼리비아로 돌아왔다.
9. 여담
- 동의어로 일통도 있다. 사용예로는 삼한일통이 있다. 합병과 병합의 관계처럼 한자 위치만 뒤바뀐것이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일통에는 정통과 유사한, 하나되어 만물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가미되어 있어 예로부터 중화 왕조들이 자주 사용해온 표현이고 이 영향으로 중국에서는 일통이 통일보다 더 널리 쓰인다.
- 일본의 통일지방선거는 본 문서에서 주로 다루는 국가 통합의 의미가 아니라 (한국의 전국동시지방선거의 '동시'처럼) 단지 동시에 선거한다는 뜻에서 쓰인 것이다. 그런데 문서에서도 보듯 이름과는 달리 선거 시점이 그렇게 많이 통일되어있지는 않은 편이다.
[1] 결과적으로 고조선과 단군이라는 공통조상을 후대에 찾아내 부각시키긴 했지만 삼국시대 당시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오랑캐로 지칭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처럼 삼국 서로를 언어가 통하기는 하지만 당나라를 바라보는 시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외국으로 여겼다. 이들이 비로소 서로 동족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분수령이 신라의 삼국통일이었기 때문에, 현대에 들어서 발해를 근거로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공격을 받고 있음에도 여전히 용어가 존속하는 것도 현대까지 이어지는 한민족 의식의 시초를 찾아 올라가면 이 사건의 의미를 좋든 싫든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2] 다만 통일 자체는 동의를 받아 이뤄졌고 이 민족들은 요시프 티토 통치 시절 당시엔 서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으므로 분단이 필연적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3] 다만 여기서 민족의 개념은 매우 주관적임에 유의해야 한다. 언뜻 보기에 외재적 요인, 가령 혈통과 언어를 공유하면 한 민족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민족들은 대다수가 남슬라브인이었고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썼으나 종교나 역사 때문에 서로를 다른 민족으로 여겼다.[4] 팔레스타인 땅에도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정확히 말하면 아랍계 유대인이었고,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을 만들었던 유대인들은 해외(특히 서구권)에서 거주했던 유대인들이었다. 이스라엘이 나타난 이후부터 지속적인 분쟁이 나타난 이후에는 결국 아라파트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PLO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정치인들은 오슬로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대신 골란 고원은 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에게 돌려주고 가자와 서안만 한정해서 독립을 하기로 결정하기로 하였고, 이스라엘에 남아있던 아랍계 팔레스타인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원래 땅에 올 수 있도록 하였으나, 문제는 이 협정을 이스라엘에서 대놓고 어기며 팔레스타인인들을 계속해서 차별하고 탄압하다보니 그 이후로는 팔레스타인의 분리 독립으로 변하고 만다. 특히 이츠하크 라빈 수상이 암살되고 이스라엘 정계가 강경파들로 채워지면서 오슬로 협정이 사실상 무의미하게 변질되자 다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 다시 분쟁이 나타나게 되었다.[5] 단, 벨기에의 북부지방인 플랑드르 지방은 네덜란드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벨기에 역시 왈론과 플랑드르가 서로 분리독립을 원하고 있으며, 이때문에 왈론에서는 프랑스로, 플랑드르에서는 네덜란드로의 귀속을 주장하기도 한다.[6] 위의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경우에도 같은 민족이었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자 갈등의 소재는 종교였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주로 정교회를 믿은 반면 크로아티아는 천주교를 믿었으며 보스니아인들은 무슬림들이었다.[7] 실제로는 한반도기는 국기로서 부적합하며, 태극기로 정해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 남한 주도로 통일될 가능성이 높으며 태극기가 역사성 등에서 인공기를 훨씬 뛰어넘고 북한조차 과거 태극기를 사용한 역사가 있기 때문.[8] 예멘은 한번 합의로 통일을 했다가 재분단되었고, 거기서 북부가 남부를 무력으로 제압한 것이다.[9] 북한 주도의 통일은 적화통일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가능성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10] 레딧에 올라온 통일한국 국기[11] 이 경우에는 벨기에에서 플랑드르가 분리해나가는 것이 일단 문제이다.[12]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북한과 다르게 동독은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경제사정이 괜찮은 편에 속했으며,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소련을 제외하고) 가장 잘사는 국가에 속했다.[13] 이 부분은 다소 성급한 일반화이다. 북한도 바보는 아니라 자국의 명운이 걸린 무기 개발을 주도하는 화학, 물리 등 이공계 분야 그리고 막대한 외화를 조달할 수 있는 해킹 등 특정 기술에 한해서는 남한에 준하는 수준의 교육을 시키고 있고, 실제로 이러한 교육을 받은 극소수의 인재들은 꽤나 높은 역량을 지니고 있다.[14]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모두 키예프 루스가 첫 역사의 국가이다. 키예프가 중심지였다가, 몽골 침략으로 쓸려나가고 훨씬 북쪽 내륙에 있어 몽골의 영향을 덜 받는 모스크바가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것.[15] 노년층은 반대, 젊은층은 찬성 경향이 강하다.[16] 물론 옛 트리폴리 정부 세력들은 아직도 조금 남아있는지 이들도 가끔 언급되기도 한다.[17] 사실 이게 더 주된 원인이다.[18] 유고슬라비아가 건국되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들은 런던 밀약에 의해 이탈리아의 식민지 내지는 속국이 될 공산이 컸다.[19] 원래는 10년 전인 1937년에 분할 방안이 제시되었다. 그 때는 이스라엘 영토가 북부에만 한정이었으나 1947년 이후에는 남부의 네게브 사막까지 추가되면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에 월경지 상태의 국가가 되고 말았다.[20] 이스라엘도 어쨌든 결국 독립했고 몇십 년 동안 유지하고 있으니 이스라엘 자체가 사라진다고 보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개혁을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는 만큼 팔레스타인과의 통일이나 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거나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통합이 쉽지 않을 것이기도 하다. 같은 셈함계라 하더라도 민족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문화도 다른데 유대인(이스라엘계 유대인이든 다른 출신의 유대인들이든)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 국가와 팔레스타인과의 통일을 합병이라고 여기며 반대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 중에서도 적긴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팔레스타인 정부에게 넘기거나 통일을 바라는 유대인들도 있다.[21]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할 방식 중에서 일국방안, 양국방안, 삼국방안이 있는데 일국 방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통일하여 모두 존중하면서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가 되는 것, 양국 방안은 1967년 국경을 경계로 하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존재하는 것, 삼국 방안은 팔레스타인이 있는 가자와 서안지구를 각각 이집트, 요르단에게 넘기는 대신 이스라엘이 있는 현상을 말한다. 헌데 이스라엘이 이를 전혀 지키지 않거나 어기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22] 그런데 같은 아랍이라도 지역에 따라 문화(예를 들면 이집트나 사우디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아랍이어도 복장이나 생활 등이 많이 다르다)도 다르며, 이집트 아랍어나 레바논 아랍어, 이라크 아랍어, 요르단 아랍어 등은 방언처럼 같은 아랍어라도 많이 다르다. 이런 문화적 차이 때문에 어차피 몇몇 나라들이 분리독립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모로코-서사하라나 리비아의 이바디파-수니파 분쟁(시아파도 있지만 극소수여서 수니와 시아의 대립이 적은데다가 수니파vs하와리즈파를 포함한 이바디파 계열의 대립이 더 강하다) 또는 이라크와 시리아의 시아파-수니파 분쟁만 보더라도 짐작이 갈 것이다. 당장 팔레스타인에서도 민족과 문화, 종교가 달라서 분리한 이스라엘도 있으며, 게다가 쿠르디스탄, 아시리아인, 투아레그족, 베르베르인 등 아랍 국가 내부의 비아랍 계통의 민족들도 분리독립을 시도하려고 하는 사례들이 있는 만큼 통합되었다고 해도 안정적이었을 것이라는 보장도 어렵다.[23] 볼리비아라는 이름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이후 시몬 볼리바르의 도움을 받아 독립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볼리바르의 이름에서 따온 국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