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5 01:02:51

김숭빈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537B, #006494 20%, #006494 80%, #01537B);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제28대
진덕왕조
중시 죽지
제29대
무열왕조
중시 문충 | 김문왕
제30대
문무왕조
중시 문훈 | 진복 | 지경 | 예원 | 천광 | 춘장 | 천존
제31대
신문왕조
중시 순지 | 대장 | 원사 | 선원
제32대
효소왕조
중시 원선 | 당원 | 순원
제33대
성덕왕조
중시 원훈 | 원문 | 신정 | 문량 | 위문 | 효정 | 사공 | 문림 | 선종 | 윤충
제34대
효성왕조
중시 의충 | 신충
제35대
경덕왕조
중시 유정 | 대정
시중 대정* | 조량 | 김기 | 염상 | 김옹 | 양상
제36대
혜공왕조
시중 김은거 | 정문 | 김순 | 주원
제38대
원성왕조
시중 제공 | 종기 | 준옹 | 숭빈 | 언승 | 지원 | 김삼조
제39대
소성왕조
시중 충분
제40대
애장왕조
시중 수승 | 김헌창
제41대
현덕왕조
시중 양종 | 원흥 | 장여 | 김충공 | 영공
제42대
흥덕왕조
시중 김우징 | 윤분 | 김명
제43대
희강왕조
시중 이홍
제44대
민애왕조
시중 헌숭
제46대
문성왕조
시중 의종 | 양순 | 김여 | 위흔 | 김계명
제48대
경문왕조
시중 위진 | 인흥
제49대
헌강왕조
시중 예겸 | 민공
제50대
정강왕조
시중 준흥
제52대
효공왕조
시중 계강 | 효종
제54대
경명왕조
시중 유렴 | 언옹
* 경덕왕 6년 중시를 시중으로 고쳐 부름.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537B, #006494 20%, #006494 80%, #01537B);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철부 김구해 김거칠부 김세종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수을부 을제 수품 비담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알천 금강 김유신 김군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진복 김문영 김개원 인품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배부 김사공 김정종 김사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신충 만종 신유 김옹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김양상 김경신 충렴 세강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김언승 김숭빈 김수종 김충공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김균정 김명 김귀 장보고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김예징 김의정 김안 김정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위진 김위홍 준흥 김성
제45대 제46대 제47대
계강 박위응 김성
문헌상 기록이 확인된 인물
김춘추, 김순정, 김주원
}}}}}}}}}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상대등(上大等)
김언승 김숭빈 김수종
金崇斌
? ~ 819년

신라의 상대등.

원성왕 8년(792년) 헌평태자 김의영이 태자가 되자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2년 뒤인 794년 김의영이 사망하자 시중 자리에서 물러나고 후임 시중은 태손 김준옹의 동생 김언승이 되었다.

이후 헌덕왕 원년(809년) 상대등에 임명되었으며, 헌덕왕의 즉위를 당헌종에게 고하고 문극을 하사받았다. 이후 10년간 상대등의 직위에 있었으며 819년 사망해 후임 상대등은 태제 김수종이 되었다.

김의영의 태자 책봉 및 사망 시점이 그가 시중으로 활동했던 시점과 일치하는 점 때문에 헌평태자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자로 지명되었을 당시 김의영도 꽤나 장성한 나이였으므로, 흥덕왕 사후 정상적이라면 차남인 헌평태자 가문에서 차기 국왕이 배출되었겠지만 정작 왕위 계승권이 있던 건 3남인 김예영[1]의 가문이었다. 그의 가계가 이후 왕위계승권에서 배제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김헌창의 난에 가담했기 때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 태자책봉 등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때 최소한 의영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