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1:14:13

천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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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덕왕 6년 중시를 시중으로 고쳐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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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purple><colcolor=#fff> 작위 이찬(伊飡)
직위 중시(仲侍)[1]
본관 경주 김씨
이름 김천존(金天存)
이칭 천존(天尊)
국적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신라
생몰년도 ?~679년
가족관계 아들 김한림(金漢林)



1. 개요2. 행적3. 대중매체

1. 개요

金天存, 金天尊

신라 상대 ~ 중대의 장군. 삼국통일전쟁의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참고로, 문헌기록에서 주로 천존으로 기록되고 그에 따라 본 문서명을 비롯한 사전 등에서 '천존'으로만 나오는 탓에 성이 천이고 이름이 존으로써 외자 이름인 인물로 많이 알겠지만, 사실은 김씨로써 '김천존'이 본명이다.

2. 행적

뚜렷하게 대승을 거두거나 하는 임팩트 있는 전적이 많지 않아 인지도는 낮은 인물이지만[2], 7세기 중반 삼국통일전쟁에서 김유신, 김인문, 김흠순, 죽지 등과 함께 많은 굵직한 전투에 약방의 감초처럼 참여해 이름을 올리고 있어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역전의 용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천존 본인의 열전이나 그를 기준으로 소개된 기록이 없어 그의 행적은 파편적으로 알 수 있는데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649년이다. 백제 의자왕이 장군 은상에게 정예병 7천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石吐, 충청북도 진천군)을 비롯한 7개 성을 공격하게 했는데, 이에 진덕여왕김유신, 죽지, 진춘, 천존 등의 장군에게 이를 막게 했다.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신라는 3군을 다섯 갈래의 길로 나눠 공격했는데, 서로 이기고 지고 치열하게 싸워 열흘이 지나도록 싸움이 끝나지 않고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에 절굿공이가 둥둥 뜰 지경에 이르렀다 한다. 신라군은 도살성(道薩城,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주둔하며 휴식을 취했는데 이 때 백제인 스파이가 잠입하는 것을 예상, 원군이 온다는 거짓 정보를 일부러 흘려 은상을 조급하게 만들고 공격해 승리했다.

이후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는 전투에 무열왕, 김유신, 진주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의자왕이 잡히고 백제는 일단 멸망했지만 수도만 점령당했을 뿐 지방 세력은 건재했고, 천존은 구 백제 영토에 머물며 부흥군과 전투를 계속했다. 661년 복신이 이끄는[3] 백제군이 두량윤성(豆良尹城)에서 김품일 등이 이끄는 신라의 대군을 패퇴시키자 천존, 죽지 등을 시켜 구원군을 보냈다.

661년 7월 17일,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이 벌어지자 당나라는 나당연합에 의거해 신라에 원군 파병을 요청했고, 천존은 총관으로 출진을 준비했다. 그러나 지금의 대전광역시 인근까지 가서 백제 잔여세력과 몇 차례 전투하고 돌아왔다. 신라는 백제 전선이 우선이라 봐서 일부러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4]

663년 2월 김흠순과 천존이 이끄는 신라군이 충청북도 지역에서 남하해 백제부흥군의 거열성(居列城). 거물성(居勿城). (沙平城), 덕안성(德安城) 등을 함락시키고 수천 명을 베었다. 이 4개성을 신라군이 차지한 건 일본서기에도 나오는데, 거기 따르면 이 전투 때문에 백제부흥군이 수도를 피성(避城)[5]에서 주류성으로 다시 옮겨야 했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고 한다. 이로서 백제 무왕, 의자왕 때 빼앗겼던 경남 서부, 호남 동부를 전부 탈환한다.

663년 8월, 내분으로 진이 빠진 백제부흥군은 수만의 왜군 지원군과 합류해 한타 싸움을 시도했고, 문무왕은 손수 천존 등의 장군을 거느리고 7월 17일 원정길에 올랐다. 8월 13일 유인원이 이끄는 당군과 합류하고 8월 27일부터 백제-왜 연합군과 신라-당 연합군의 백강 전투가 벌어지고 나당연합군이 대승리를 거둬 백제 잔존세력은 완전히 몰락하는데, 천존도 여기에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664년 2월, 당나라는 백제와 신라까지 당나라의 영향권에 넣기 위해 이미 멸망한 백제와 아직 건재한 신라를 명목상 동급으로 놓는 웅령 회맹을 강요했고 김인문과 천존이 마지못해 신라 대표로 나갔다.[6]

667년 시작된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668년 여름쯤 사실상 고구려의 패배 분위기로 넘어가자 신라도 대군을 파병했고 천존은 대당총관으로 참여했다.

670년, 나당전쟁이 발발하자 천존과 죽지가 이끄는 신라군은 옛 백제의 수도 웅진에 당나라가 설치한 괴뢰 정부 웅진도독부를 기습공격, 7개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유사에는 670년 이 때 당나라 수군이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황해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고 승려 의상이 전하자 문무왕은 방어할 대책을 논의했고, 천존이 도술[7]을 하는 명랑 법사(明朗法師)를 천거해 명랑의 도술로 폭풍을 일으켜 당의 수군을 2차례 침몰시켰다는 글이 있는데, 다분히 설화적인 이야기지만,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처럼 실제로 폭풍으로 좌초한 일화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다.

나당전쟁이 끝나고 679년 중시가 됐는데, 이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3. 대중매체

3.1. 천년의 신화

선술했듯이 RTS 게임 천년의 신화의 신라 영웅으로 등장한다.

제철공방에서 생산되며, 마법은 은신술.

다만, 신라 내에서도 핵심 장수는 아니라서 그렇게 많이 쓰이는 장수는 아니다. 은신술이 최고테크에서 쓸 수 있는 기술이다보니.

3.2. 황산벌

한국 영화 황산벌에서는 김윤태가 배역을 맡았다.


[1] 최종 직위.[2] 다만, 게임 천년의 신화를 해 본 사람이라면 그 게임을 통하여 이 인물을 처음 알아서 인지도가 낮지는 않을 것이다.[3] 이 백제군을 복신이 이끄는 것은 자치통감에 언급된다.[4] 3차 고구려-당 전쟁에서도 처음엔 귀순하는 고구려인만 받으면서 관망하다가, 2년이 지나서 고구려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그때서야 막타치러 출진한다. 이미 660년대 초중반부터 신라는 언젠가 있을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러려면 같이 싸워야 할 고구려인과 원한을 많이 쌓아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5]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등으로 비정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6] 이후 당나라는 문무왕이 직접 참가해 당의 꼭두각시 부여융과 맹약을 맺어야 더 효력이 있을 것이라 판단해 취리산 회맹을 강요한다.[7] 도술의 이름은 문두루 비법(文豆婁秘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