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4 04:32:29

부여태후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군주 대리청정 · 수렴청정 및 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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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족
夫餘太后 | 부여태후
시호 불명
별칭 부여태후(夫餘太后)
성씨 불명
불명
부친 불명
부군 고재사
아들 태조대왕
생몰 불명
재임 고구려 섭정
53년 11월 ~ ?[1]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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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중략)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하였다.
삼국사기》 태조대왕조
고구려의 여성. 재사의 아내, 태조대왕의 어머니.

기록이 딸랑 이것 밖에 없어서 이름도 성씨도 알 수 없다. '부여태후'라는 호칭도 그냥 '부여인인 태후'라는 뜻으로 역사학계에서 임의로 붙여준 것이다.

대무신왕 시대에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백성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부여태후의 출신이 이들이라는 추정이 있다.출처

2. 생애

모본왕이 시해당하고 태자마저 불손하다는 이후로 폐위된 후 후계자로 지목된 남편 재사가 왕위를 거절하자, 아들 태조대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태조대왕의 나이가 7살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대신 섭정을 했다. 즉 한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섭정 기록이다. 남편 재사가 멀쩡히 살아 있음은 물론 신대왕이 태어나는 89년까지 생식기능을 유지했음[2]에도 여자가 정치를 담당했다는 것은 굉장히 신기한 일이다.[3] 태조대왕 초기의 행적들은 아마도 그녀의 주도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언제 섭정을 거두었는지는 기록되어있지 않다.

3. 가족 관계


태후의 출신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의 '부여 사람'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이병도는 태후가 졸본부여 출신 이라고 유추했다. 그밖에 서기 22년 대무신왕이 점령한 부여 지역, 또는 부여로부터 투항하여 연나부에 정착한 유민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집안의 자녀라든지, 부모나 형제가 누구인지, 단서가 될만한 기록은 전혀 없다.

또 태후의 나이도 알 수 없고, 정확히 언제 결혼했는지도 불투명하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아들 태조대왕이 47년생인 것을 알 수 있으므로, 태후의 나이까지는 몰라도 어렴풋이 추정해보는 정도는 가능하다.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면, 태후의 남편 재사유리왕의 아들이다. 유리왕이 서기 18년에 사망했으므로, 재사는 아무리 늦게 태어났어도 최소한 18년 전후에는 태어난 셈이다. 그리고 태후는 유리왕의 며느리가 되는 셈인데, 생전에 서로 만났을 가능성은 미지수다.

남편 재사의 아들은 태조대왕(47년생), 차대왕(71년생), 그리고 막내 신대왕(89년생)이다. 삼국사기는 태조대왕과 차대왕이 친형제 라고 했으므로 이 둘은 태후의 친자가 된다.[4] 하지만 신대왕의 친모는 누구인지 기록 조차 없다. 삼국사기에서 확인된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나이 차를 볼 때, 태후가 신대왕까지 다 낳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차대왕을 낳은 것만 해도 상당히 노산을 한 셈이다.

게다가 시아버지와 남편, 세 아들까지 나이 차가 너무 커서, 있는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막내 신대왕은 태후의 친자가 아니라고 쳐도, 남편 재사와 막내 신대왕의 나이 차이는 최소한 70살 이상이다. 물론 다른 건 다 배제하고 본 것으로, 큰아들 태조대왕의 즉위(7세) 당시 재사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남편 재사와 그 형제들은 몇 살 차이였는지 다 따진다면 더욱 복잡해진다. [5]

한편, 서기 121년 태조대왕이 부여에 가서 태후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는데, 대체로는 태조대왕의 모친인 부여 태후의 묘소일 것으로 여긴다. 반면 시조왕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의 사당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만약에 태조대왕이 제사를 지낸 사당이 모친의 것이 맞다면, 태후는 적어도 121년 이전에 사망했다고 확인 가능하다.

4. 기타

EBS1 역사가 술술 47회 고구려를 발전시킨 여걸 부여태후에서는 부여태후가 몸소 전쟁에도 참여하고 68년에 정치에서 물러났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 방송은 창작이 많이 들어간 것이며 근거가 부족하다.
[1] '【삼국사기】 권 제15고구려본기 제3'에 따르면, 태조대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7살이어서 수렴첨정 했다고 기록돼있다.[2] 삼국사기 기준. 후한서정사 삼국지에서는 신대왕의 아버지가 태조대왕으로 나온다.[3] 이 때문에 역사학자 김용만두로를 사주해 모본왕을 죽이게 한 인물이 부여태후라고 주장한다.출처[4] 물론 태후의 친자가 아닐 수도 있으며, 실제로 아닌 경우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중국 삼국시대의 위나라 황제 조예의 계모가 된 '곽태후' 라든지, 송나라때 인종을 빼앗아 기른 '유태후' 등이 있다. 이들은 황제의 친모를 죽게 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심지어 송 인종은 유태후가 죽을 때까지 친모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이렇듯 태후가 영달을 위해서 자식인 왕, 황제까지 속여가며 정치 음모를 꾸민 경우가 꽤 있었다는 것이다.[5] 이러한 기록의 모순 때문에 연구가들은 중국측 기록에 나와있는 관계에 더 무게를 두거나, 삼국사기의 기록 오류 등으로 추정한다. 말하자면 여러 왕들의 관계가 형제가 아닌 부자지간 이라든지, 혹은 친형제가 아닌 이복형제나 친척 이라든지 하는 식이다. 물론 각자의 연구에 따른 가설로써, 삼국사기의 내용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한 무엇이 더 정확한지는 장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