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14:36:22

이정암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선무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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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윗첨자의 경우에는 독립적인 열전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의 열전 속에서 함께 설명되는 인물들이다. }}}}}}}}}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지중추부사 증 좌의정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 충목공(忠穆公)
이정암
李廷馣
출생 1541년
사망 1600년 (향년 59세)
본관 경주 이씨
중훈(仲薰)
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공신호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봉호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
시호 충목(忠穆)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4. 가족관계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호는 사류재(四留齋). 본관은 경주 이씨. 증 영의정 오산부원군(鰲山府院君) 이탕(李宕)의 차남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 생애

1558년 진사가 되고 156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했다.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쳤으며 특히 외직으로는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경상도 등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 백성들을 수탈하던 탐관오리들과는 달리 백성들을 보살피고, 폐단을 근절[1]하여 민심을 얻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이조 참의로 있었는데, 전란 발발 후, 평안도로 몽진하던 선조를 호종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하고, 전란을 막지 못하여 명목상 체직(직위 해제)되었다. 임무가 없어지자 그는 개성으로 가서 당시 개성 유수로 있던 동생 이정형과 합세하여 개성을 수비했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함락되고 개성 또한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동생과 함께 개성을 탈출, 황해도 초토사로 임명되어 의병장이 되었다.[2]

의병장으로서 이정암이 세운 최대의 전공은 바로 연안성 전투다. 전란 발발 후 4개월이 지난 8월 28일에 일본 제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가 직속 병력 5,000여명을 이끌고 연안성을 공격해오자, 의병 1,400여명의 병력을 규합해 연안성을 수비, 사흘 밤낮으로 싸우던 끝에 격퇴했다.

이런 혈전을 끝내고 이정암이 올린 장계가 대단한데,
以二十八日圍城 以二日解去(이이십팔일위성, 이이일해거)
28일에 성을 포위했다가 2일에 포위를 풀고 물러갔습니다.

라는 한 줄 짜리 장계를 올려 조정을 심히 당황케 했다.[3]

물론 나중에 그 상세한 내막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적을 물리치는 일은 쉽지만 이를 자랑하지 않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치하했고, 선조 또한 정2품의 벼슬을 제수하고 황해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했다. 이때의 승전을 기념해 1608년 황해남도 연안읍에 연성대첩비가 건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로도 전라도, 충청도 등을 오가며 관찰사를 지냈는데 특히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때 죄수를 임의로 처벌한 것이 논란이 되어 잠시 파직을 당했다가 다시 황해도 관찰사로 돌아왔다.

정유재란 때에도 초토사로서 황해도 일대를 수비했으며, 전란 평정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얼마 안 가 죽었다. 사후 1604년 전란 당시의 공적이 인정되어 김시민, 이억기 등과 함께 선무공신 2등에 이름을 올렸다. 시호를 충목(忠穆)이라 하였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4]

2008년 개성시에서 남서쪽으로 35리(14㎞) 떨어진 연강리에서 그의 무덤을 발굴했다.#

3. 대중매체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의외로 등장이 빠른데 동래 부사를 맡던 시절부터 등장한다. 일본 사절단으로 꾸민 쓰시마의 다치바나 야스히로의 행동에 수상함을 느끼고 전운을 직감한다.

4. 가족관계

왕실족보인 선원록에서 이정암의 부모부터 형제자매, 자녀 등까지 확인이 가능하다.# 선원록에 실린 이유는 왕실의 외손이기 때문인데, 세종-임영대군-이씨[5]-김응진(金應辰)-김씨[6]-이정암으로 이어진다.

5. 관련 문서


[1] 전란 중에도 이러한 폐단 근절을 위해 힘썼는지 난중일기에도 그 기록이 남아있다. 1593년 9월 7일자에 따르면, 당시 전라도 순찰사였던 이정암이 폐단을 진술하는 일에 대한 공문, 군제를 개편하는 일에 관한 공문 등을 이순신에게 보내왔다고 한다.[2] 이정암의 동생 이정형은 선조가 이순신이 출전명령을 안따르자 노발대발하며 길길이 날뛰고 신하들도 부하뇌동하며 파직을 거들고 있을때, 정탁과 함께 유일하게 옹호해줬던 인물이기도 하다.[3] 이걸 현대에 비유하면 태풍 관련 보고서에 태풍이 지나간 기간만 적은 것이다. 상위 관청 입장에선 당황을 넘어 어처구니가 없을 상황이고 곧바로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어 경과를 구체적으로 써서 다시 보내라할 사안이다.[4] 경주이씨대종보 및 월천부원군이공신도비명(우암 송시열 찬)에는 좌의정으로 추증된 것으로 나오나 왕실족보인 선원록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된 것으로 나온다.[5] 임영대군의 서녀로 의성 김씨 김풍공(金豐公)에게 출가했다.[6] 김응진의 딸로 이정암의 아버지인 이탕(李宕)의 후처로 들어갔다. 이탕의 전처인 전주 이씨도 왕실의 후손으로 정종의 7남인 수도군(守道君) 이덕생(李德生, 1393~1449)의 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