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창 六昌 | |||||
김창집 | 김창협 | 김창흡 | 김창업 | 김창즙 | 김창립 |
[1]
金昌業
1658년 ~ 1721년
1. 개요
조선의 문인. 본관은 신 안동 김씨. 자는 대유(大有), 호는 노가재(老稼齋), 석교(石郊)이다.김상헌의 증손자이며, 김수항의 여섯 아들인 육창의 넷째로 시와 그림에 특히 뛰어났다.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포의로 평생 삶을 즐기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후대에는 청의 수도 연경에 다녀와 쓴 연행일기로 이름을 남겼다.
2. 생애
이하 내용은 여러 논문을 참조하여 작성된 것이다.[2]1658년 김수항과 모친 안정 나씨 사이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큰형 김창집은 1648년생으로 10살 차이이고, 바로 윗 형인 김창흡은 1653년생, 아랫 동생 김창즙은 1662년생이다.
1671년 익풍군 이속의 딸과 혼인하였다. 조부 김상헌의 동생 김상복의 아들 김광식이 후사가 없어 김창업이 출계되어 대를 이었다.[3] 어린 시절 그림에 빠져 19세 때 부친 김수항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4][5] 형제들과 독서, 강학, 작시 활동을 즐겼고 낙송루시사, 청풍계시회의 멤버이기도 했다.[6]
1678년 21세에 부친 김수항이 철원에 유배되었고, 김창업은 배소에 찾아가 부친을 모셨다. 1681년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대과 응시도 하지 않는다. 부친이 김창업의 문재(文才)를 높이 평가해 과거에 응시하면 명성을 떨치리라 장담했지만, 본인이 뜻을 두지 않아 강권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재능은 묻힐 뻔 했으나 훗날 연행일기를 쓰며 발휘하게 된다.[7][8][9][10] 1684년 자신의 평생 생활 공간이 될 송계의 동장(東庄), 석교장사(石郊莊舍)에 대한 언급이 있는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전에 이미 마련은 해두었던 것 같다. 8월에 성균관 유생이던 조정만이 윤선거, 윤증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노가재가 상소에 동참했었는지 부친에게 훈계받았다.링크
1687년 부친이 양주로 물러나 있을 때 동장을 떠나 성릉 주변으로 동생 김창즙과 함께 이주하였다. 1689년 부친이 결국 사사되었고, 형제들과 모친을 모시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수항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시는 김창업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1693년 배우자 이씨가 셋째 아들 김신겸 출산 후 사망하였다.김창협이 작성한 묘지명
1694년 김수항이 신원되었고, 김창업도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다시 송계로 돌아와 동장을 다시 경영한다. 이때 '노가재'라는 편액을 걸고 자신의 호로 삼게 된다. 이후 김창업은 잠깐잠깐의 외유나 시묘, 연행을 제외하면 내내 동장에서 지내게 된다. 1703년 모친이 사망하여 시묘살이를 한다.
조용히 살던 김창업은 1712년 55세 때 형 김창집을 따라 연행길에 오르게 되고 연행일기를 저술하여 후대에 이름을 남긴다.노가재연행일기 관련 참조 1713년 연행길에 다녀온 김창집과 김창업을 마중 나왔던 동생 김창즙이 사망하였다.
만년에 큰 형 김창집의 지위가 높아지고 가문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불안해하고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며, 뛰어난 모습을 보이던 막내아들 김신겸의 대과 응시도 만류하였다.[11] 결국 1721년(64세) 신임옥사로 형 김창집이 유배되자 충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몇 달 후 김창흡도 사망하고, 또 몇 개월이 지나 김창집이 결국 사사된다.
훗날 김신겸이 행장의 초안을 잡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김원행이 완성하게 된다.링크 1820년 김시보가 편집하여 김조순이 김창업의 문집 노가재집(老稼齋集)을 간행하였다.
3. 연행일기
노가재 연행일기 번역본1712년 형 김창집을 따라 연행길에 오른다. 그때 김창집이 당시 나이 65세의 고령이고 크게 앓고난 직후여서 자제 한 사람의 수행이 필요했다. 당시 김창업 형제들은 모두 중국을 보고 싶어했다고 한다.[12] 본래 김창흡이 가려고 하다가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고, 김창업이 결국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함께 가게 된다. 관직 없이 형만 보살피는 일만 맡겨져 연행에 자유롭고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김창흡, 김창즙이 연행길 배웅을 나섰고 서로 나눈 시들은 김창집의 '연행훈지록'에 남아있다. 이 연행으로 1712년 11월 3일부터 이듬해 3월 30일까지의 기록을 일기로 남긴 '노가재연행일기'가 탄생하게 된다. 당시 강희제 치하 중국 청나라의 산천과 풍속, 문물과 만났던 중국의 유생과의 대화, 교류가 담긴 책이다. 이 일기는 연행 노정 정보의 풍부함, 그 문학적 성취, 새로운 연행 지식의 양적, 질적 확장 등으로 노가재 이후, 이기지(李器之)의 일암연기(一庵燕記, 1720년)로 이어져 18-19세기 연행록에서 대거 참고하거나 전사(轉寫; 옮겨 베껴짐)되었다.[13]
당시 김창업의 나이도 적지 않아 주변에서 조롱과 비난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적잖은 나이의 노가재가 자제군관 자격으로 형을 수행하는 것이 가상하다고 칭찬하고 납제를 하사하기도 했다. 심지어 포의인(벼슬이 없는) 김창업도 앞자리에 함께 앉게 배려하였다. 크게 보면 형과 가문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으나, 노가재의 형제의 정을 임금이 높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숙종은 김창집을 전별하며 시 2편을 지었는데 공개하지 않았었고, 훗날 숙종 승하 후 유고를 정리하던 이이명이 어제시(御製詩; 임금이 직접 지은 시)를 찾게 되어 훈지록 앞에 실리게 된다. 훗날 형제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감복하여 그 시를 차운한 시를 남기게 된다. [14]
연경에서 마유병과 교류하며 그림과 수선화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김창업이 답례로 정선, 조영석, 이치의 산수화와 윤두서의 인물화를 보여주었다는데 정선의 그림이 좋다고 하여 선물로 준다. 수선화를 구입해 오기도 했는데 아마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수선화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인 이원영, 조화, 양징(楊澄)과도 교류했고 특히 양징과는 연행을 마친 후에도 서찰과 시로 교류하였다. 추후 양징은 자신의 문집 서문을 김창업에게 부탁하여, 김창업의 아들 김신겸이 대신하여 작성하기도 했다. 양징의 문집인 二橙集도 조선으로 보내와 조선의 문사들에게 퍼진다. 김창업은 양징에게 형제들의 시를 모은 '김씨연방집(金氏聯芳集)'의 평과 서문을 요청했고, 그는 특히 김창협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양징은 벼슬을 단념하고 문장과 시서를 즐기던 사람이었는데, 그에게서 포의로 나이들어가는 노가재 자신의 모습을 보았는지 유독 마음이 많이 쓰였던 것 같다. 연경 주위의 명산도 유람하며 기록을 남겼고, 후대의 안내서처럼 되기도 했다. 특히 사행 일정을 마치고 귀국 길에 일행과 따로 떨어져 2박 3일 동안 험준한 겨울 천산을 유람하기도 했다.[15] 그 때 만난 노승과의 이야기도 알려져 있다.[16]
4. 시
타고난 문재가 있었으나 조용한 삶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대과 응시도 하지 않았고, 시 창작도 형 김창흡처럼 인생을 걸지 않고 즐기는 수준에서만 했다.1688년 12월 어느 밤에 동장의 분매가 꽃을 피우자 기뻐하며 시를 지었다. 그 기쁨으로 부친에게 차운시를 부탁했으나 김수항은 답하지 못하다가, 사사당하기 전 마지막 시로 그에 대한 답시를 남긴다. 이 시는 김수항의 문집인 '문곡집'의 시 부분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김창업은 부친 사후 부친의 옥류동 매화를 직접 챙겨 백운산의 송로암에 옮겨 부친의 유명을 실행한다.
김창업의 매화시
夜靜梅花發, 밤 고요한데 매화꽃 피어나
參橫獨掩門. 깊은 밤에 홀로 문을 닫았지.
苔査元自古, 이끼 낀 등걸 본래 예전과 같고
冰蘂不須繁. 언 꽃술 모름지기 무성할 것 없다네.
暗馥爐添氣, 은은한 향 화롯불에 향기를 더하고
踈枝月近盆. 성근 가지 달은 화분에 다가온다.
無人共淸賞, 맑은 감상 함께할 사람 없는데
孤鶴唳中園. 외로운 학 뜰 가운데에서 울어대네
夜靜梅花發, 밤 고요한데 매화꽃 피어나
參橫獨掩門. 깊은 밤에 홀로 문을 닫았지.
苔査元自古, 이끼 낀 등걸 본래 예전과 같고
冰蘂不須繁. 언 꽃술 모름지기 무성할 것 없다네.
暗馥爐添氣, 은은한 향 화롯불에 향기를 더하고
踈枝月近盆. 성근 가지 달은 화분에 다가온다.
無人共淸賞, 맑은 감상 함께할 사람 없는데
孤鶴唳中園. 외로운 학 뜰 가운데에서 울어대네
김수항의 차운시
苔積根蟠土, 이끼 쌓인 곳 매화 뿌리 흙에 서렸고
紗明影透門. 감실이 훤한 달빛 그림자 문에 비친다.
幽香偏愛靜, 그윽한 향기 특히 고요함을 사랑하고
素蕚不嫌繁. 하얀 꽃받침 가득해도 싫지 않다네.
朔氣凋千卉, 朔氣는 천 개의 꽃을 말려 죽이지만
春光寄一盆. 봄빛은 하나의 화분에 기탁하리.
還憐二三樹, 두세 그루 나무 도리어 가련하구나,
蕪沒玉流園. 옥류동 뜰에 蕪沒되어 있으니[17]
苔積根蟠土, 이끼 쌓인 곳 매화 뿌리 흙에 서렸고
紗明影透門. 감실이 훤한 달빛 그림자 문에 비친다.
幽香偏愛靜, 그윽한 향기 특히 고요함을 사랑하고
素蕚不嫌繁. 하얀 꽃받침 가득해도 싫지 않다네.
朔氣凋千卉, 朔氣는 천 개의 꽃을 말려 죽이지만
春光寄一盆. 봄빛은 하나의 화분에 기탁하리.
還憐二三樹, 두세 그루 나무 도리어 가련하구나,
蕪沒玉流園. 옥류동 뜰에 蕪沒되어 있으니[17]
숙종의 어제시 2편
雪天辭闕赴燕都 눈 내리는 날 대궐을 떠나 연경으로 가게 되니
錦席初開酒滿壺 비단자리를 처음 펴고 술을 가득 채우노라
平日大臣恩遇別 평소에도 대신에 대한 은혜 남달랐으니
矧當餞慰禮應殊 하물며 전별자리니 예우가 더욱 특별해야지
此行上价弟兄偕 이번 사행은 형제가 함께 가는데
其所相須豈有涯 서로 의지하는게 어찌 끝이 있으랴
今歲壬辰周甲在 올해로 임진난이 두 번째 갑년을 맞이하니
山河觸目定傷痕 보는 산하마다 회포가 많으리
雪天辭闕赴燕都 눈 내리는 날 대궐을 떠나 연경으로 가게 되니
錦席初開酒滿壺 비단자리를 처음 펴고 술을 가득 채우노라
平日大臣恩遇別 평소에도 대신에 대한 은혜 남달랐으니
矧當餞慰禮應殊 하물며 전별자리니 예우가 더욱 특별해야지
此行上价弟兄偕 이번 사행은 형제가 함께 가는데
其所相須豈有涯 서로 의지하는게 어찌 끝이 있으랴
今歲壬辰周甲在 올해로 임진난이 두 번째 갑년을 맞이하니
山河觸目定傷痕 보는 산하마다 회포가 많으리
노가재가 전별연 이후 지은 시
飲水行色向幽都 초라한 모습으로 연경에 향하는데
前席同時醉御壺 임금님이 주신 술에 함께 취하였으니
誰想九重珍劑降 궁궐의 귀한 약 주실 줄 누가 알았으랴
布衣亦被聖恩殊 포의로 남다른 성은을 입었네
飲水行色向幽都 초라한 모습으로 연경에 향하는데
前席同時醉御壺 임금님이 주신 술에 함께 취하였으니
誰想九重珍劑降 궁궐의 귀한 약 주실 줄 누가 알았으랴
布衣亦被聖恩殊 포의로 남다른 성은을 입었네
훗날 어제시를 알게된 후 지은 시
遠役燕都與伯偕 먼 사행길 맏형과 함께 갔었는데
山河風景恨无涯 산하의 풍경은 끝이 없어 한스러웠지
宸情特軫行人事 임금님은 행인의 수레를 걱정하는데
追覩奎章倍愴懷 임금님의 시편을 보니 배로 슬프네[18]
遠役燕都與伯偕 먼 사행길 맏형과 함께 갔었는데
山河風景恨无涯 산하의 풍경은 끝이 없어 한스러웠지
宸情特軫行人事 임금님은 행인의 수레를 걱정하는데
追覩奎章倍愴懷 임금님의 시편을 보니 배로 슬프네[18]
5. 동장 경영
보통 조선의 선비들은 수신과 공부 등을 위해 일상을 벗어나 도성이 아닌 경치가 빼어난 곳, 혹은 제자를 양성하기 위한 학문적 공간을 만들어 은거했다. 그러나 노가재는 일상 공간을 만들어 실제 농사도 지으며 생활도 하고 농장을 경영하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선비들이 말하는 은거와는 조금 다른 삶을 추구했다. 한양 근처의 송계 동장(東庄)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고, 사망한 곳도 동장이다. 구성하는 모든 건물에 이름을 붙여 의미를 부여했다. 대표적으로 침소의 이름은 본인의 호이기도 한 '노가재'이다. 동장에서의 일상을 한시로 기록해 남기고, 동장을 구성하는 화초, 나무, 바위 하나하나에도 시를 지었다. 원예에도 관심이 많아 다양한 화초를 재배하기도 했다. 수십 종의 꽃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하나하나에 오언절구를 지어 노래했다.[19]동장은 형제간의 교류의 자리이기도 했는데, 1706년 김창집이 파직당하고 물러나 머문 곳이 석교이며, 석교에 대한 기록도 그의 문집에 실려있다. 1701년 김창협이 아들 사후 큰 충격을 받아 절필을 선언하고 삼주를 떠나며 몸이 좋지 않을 때에 의약의 혜택을 받기 좋아 동장에 머물렀다. 1719년 김창흡은 동장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1722년에도 김창흡이 머문 기록이 있다. 또한 그해 사망한 김창흡의 상여도 동장에 머무르기도 했다. 동생 김창즙은 1709년에 가족 모두를 데리고 석교로 이주하기도 했다. 형제의 친우들인 어유봉과 홍세태, 조정만, 신정하가 동장에 대한 시를 남겼다.
김창업 사후 다음해 실록에 기록이 있다. 김창업이 형의 세도를 빙자해 사사로이 개간하여 소유한 열무장을 진폐하자는 논의가 나와 경종이 그리하하고 하였다.링크 다만 신임옥사로 인한 김창집 사사 후 노론이 궤멸된 상태에서 나온 논의여서 가려서 들을 필요는 있다.
6. 그림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추강만박(秋江晩泊)'과 의림지 역사박물관의 '송시열 초상'[20], 국립중앙박물관의 '산수도'링크 등이 전한다. '추강만박'은 조선 후기 수장가인 석농 김광국이 역대 명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해서 꾸민 화첩 37면 중 9면에 있다.추강만박, 모시에 수묵, 20.5×18.5㎝,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위키백과에는 김창업이 김홍도의 스승이라고 적혀있는데, 김홍도가 1745년생으로 알려져있는데 1721년에 사망한 김창업이 그의 스승이 될 수는 없다. 또한 포졸 그림 등 풍속화 들이 김창업의 그림이라고 전하는 것도 있는데, 본 항목의 김창업이 풍속화를 그렸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보인다. 김창업이 맞다면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높다.
7. 가족 관계
3남 김신겸은 숙부 김창흡과 김창즙의 제자로 시문에 뛰어났다. 진사시 장원 급제 다음해 발생한 신임옥사로 연좌되어 유배되었다.[21] 이후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신겸은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이이명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의 아들 김양행도 사촌 형 김원행과 함께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고, 정조 시절 형조참판을 역임했다. 김양행의 아들은 김이구이며, 유척기의 손녀와 혼인하였다. 유척기는 김창업의 동생 김창즙의 제자이다. 김이구의 둘째 아들이 훗날 신유박해 당시 처벌받은 김건순이다.[22]서자인 김윤겸은 부친의 재능을 물려받아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영남기행화첩'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링크
[1]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45348 전(傳) 김창업 초상', 장동 김씨를 소개하는 섹션에 위치해있는데, 22년 10월 현재는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다.[2] 1. 구본현, 노가재 김창업의 동장에 대하여 / 2. 이학당, 노가재의 예술소양과 연행 문화교류, 2014 / 3. 신익철, 김창업 이기지의 중국 문인 교유 양상과 특징, 2019 / 4. 김남기, 김창업과 김창흡을 추도한 조정만의 만시, 2002[3] 김창업이 7세때 김광식의 집에서 자랐다는 아들 김신겸의 기록이 노가재집에 남아있다.[4] 김수항의 문집인 문곡집에 실려있다.링크[5] 부친이 영암군에 유배되었을 당시에도 공부에 집중하라는 편지를 받았던 바 있다. 이때는 몸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창업에게. 너는 금년에 어떤 책을 읽느냐. 들으니 네가 병환이 있어 학업에 전념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이것은 보통 근심이 아니구나. 너는 文理를 아직 깨우치지 못하였는데 나이는 벌써 20살이 넘었다. 학업은 한 번 그 때가 지나면 늙어서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으니 이것은 진실로 돌아보면 두려운 것이다. 창집은 문리는 제법 깨우쳤으나 製述의 공은 아직도 부족하니 너와 창집이 너의 집이나 본가의 책방에서 함께 거처하며 함께 공부하면서 일기도 하고 짓기도 하여 너의 형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또한 창집은 처가에 오래 머물게 하지 마라. 네가 만약 함께 있는다면 피차가 어찌 서로 편하지 않겠는냐. 내 말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니 모름지기 흘려듣지 말라. 이대로 행하여 천리 밖에서 바라는 내 소망에 부응토록 하여라.' - 김순희, 「文谷集」의 서지학적 고찰, 2011 참조[6] 다만 다른 형제들과는 예술적 기질의 종류가 조금 달라 노년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하나 그림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문재가 뛰어났다고 전하나 시에서 특별한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일상의 소소함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다.링크[7] 출처: 김세호, 17-18세기 壯洞金氏 淸陰派의 園林 文化 硏究[8] 김창협도 김창업이 일찍이 공에게 영빈(穎濱; 당송팔대가의 한 명인 소철)의 솜씨가 있다고 칭찬하였다고 한다.[9] 김원행이 작성한 행장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명문가의 아들로 명성이 자자하여 당대의 사대부들이 모두 재상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는데, 스스로 집안의 성대함이 극도에 이르렀다고 여겨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문충공(文忠公 = 김수항)이 일찍이 나 부인(羅夫人)에게 이르기를, “아무 아이의 문장으로 볼 때 과거에 응시한다면 필시 명성을 크게 떨칠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로부터 나라에서 쓸 만한 신하 한 사람을 잃게 되는구려.” 하니, 나 부인이 묻기를, “그렇다면 어째서 과거에 응시하게 하지 않습니까?” 하자, 문충공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또한 각각 자식들의 뜻에 맡길 뿐이오.” 하였다. 대개 문충공이 공의 뜻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10] 문과에 응시하지 않은 것에는 배우자 이씨의 권유도 있었다고 한다.[11] '이러한 세상을 만나 이미 출사한 자야 어찌할 수 없겠지만, 어찌 은거하고 있는 사람이 출사하기를 구해서야 되겠습니까. 또 하늘이 어찌 우리 집안에서만 대대로 공경(公卿)이 나오게 하겠습니까. 한때의 영예만 구차하게 도모하기보다는 덕(德)을 쌓고 복(福)을 절제함으로써 자손에게까지 복이 미치어 가문을 실추시키지 않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이 아이가 급제하여 영예를 누리리라고 꼭 보장하지 못하는 경우에 있어서겠습니까.'[12] 김창협, 김창립은 사망한 상태였다.[13] 참고: 박지선,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연구, 1996[14] 참조: 윤경희, 18세기 초 장동 김씨 일문의 연행 체험 -김창집(金昌集)의 「연행훈지록」을 중심으로-, 2014[15] 형 김창집이 길도 험하고 일행과의 합류도 어려울 수 있어 염려하며 만류하기도 했다. 김창업은 유람이 어려운 이유 8가지를 들고 만반의 대비를 하는 모습도 기록해두었다. 정사인 형의 묵인이 아니었으면 방문이 어려웠을 것이다. 김창업은 연행 전부터 동생 김창즙이 주었던 연행길의 고적들을 안내한 책을 읽고 유람 계획을 세웠던 바 있다.[16] 한인으로 마병 출신으로 장군까지 올랐으나 승려가 된 사람이었다. 대표 척화파 김상헌의 증손자로서 마음 한편으로 명에 대한 의리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김창업이 배청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중국 문사와 폭넓게 교류한 사실에 대해 훗날 홍대용도 높이 평가 한 바 있다. 홍대용은 김창집의 손자 김원행의 제자이다.[17] 번역 출처: 김세호, 17-18세기 壯洞金氏 淸陰派의 園林 文化 硏究[18] 번역 출처: 정단, 夢窩 金昌集과 老稼齋 金昌業의 燕行壎篪錄 硏究[19] 김원행이 훗날 지은 행장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 사람이 맑은 세상에서 林園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사모하여, 東郊의 松溪에 나아가 밭과 집을 마련하여 나무와 꽃을 심고 채소밭을 일구어 늙어 죽을 계획으로 삼았다.'[20] 밑그림을 김창업이 그렸다는 김창협의 찬문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2021년 보물 제 2128호에 지정되었다.링크[21] 신임옥사로 김신겸의 큰아버지 김창집과 사촌형 김제겸, 오촌조카 김성행, 장인 이이명과 그의 아들 이기지, 사위 김용택, 조카 이희지가 모두 연루되어 사망하였다. 죽지 않고 유배로 그친 것이다.[22] 김건순은 항렬 자에서 나타나듯 풍고 김조순과 같은 항렬대이다(김조순 1765년생, 김건순 1776년생). 김건순이 천주교 신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본인의 재능과 여러 학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학과 연계를 가지게 되었다. 끝까지 천주교인인 것을 부정하고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진술하였으며, 천주교에서도 순교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정순왕후 김씨가 김조순과 안동 김씨를 견제하고 남인에게도 본보기를 보이는(노론 명문가의 후손도 엮이면 죽는다는) 시범 케이스로 참수당했다는 논의도 있다. - 임혜련, 정조 말-순조 초 김건순(金健淳)의 행보와 신유사옥(辛酉邪獄), 201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