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5:21:04

서필원



徐必遠
1614년 ~ 1671년[1]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 지방관 역임, 중앙 정계 진출 (1613 ~ 1663)2.2. 공의(公義) / 사의(私義) 논쟁 (1663 ~ 1664)2.3. 사망까지 (1664 ~ 1671)
3. 가족관계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시호는 정의(貞毅)이다.

김장생과 정홍명의 문인이다.[2] 산림의 학연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노력한 현실 정치가이다. 지방 관찰사로 재직할 때에는 충청도와 전라도 해읍의 대동법을 현장에서 시행하였으며, 민생 안정과 지방의 폐단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1664년 (현종 5년) 발발한 공의/사의(公義/私義) 논쟁에서 공의론을 주장하며 송시열에 맞선 것으로 유명하다. 부드럽지 못하고 직설적인 발언으로 산림에서 강하게 배척받았으나 현종이 신임하여 중용받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지방관 역임, 중앙 정계 진출 (1613 ~ 1663)

1614년 관서 이산군(關西 理山郡)[3]에서 아버지 서운기(徐雲驥)와 어머니 전주 이씨[4]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서운기와 조부 서용갑(徐龍甲)은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된 상태였다.[5] 부친은 1622년 서필원이 10세 때 이산에서 사망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신원되어 가문의 집성촌인 충청도 논산 은진현 육곡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로 이주했다. 1627년(인조 5년) 15세에는 국구인 한준겸[6]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왔던 적이 있다. 1629년 17세에 양녕대군의 후손인 전주이씨 이성간(李成幹)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0년 충남 연산에서 김장생을 찾아가 주자학을 배운다.[7] 20세 되던 1633년(인조 11) 봄에 식년 진사시 초시에 장원하고, 가을에는 복시에서 3등 14위로 입격했다. 1639년 서울로 이주하여 정홍명(鄭弘溟, 1592 ~ 1650)[8]에게도 배운다.[9] 정홍명은 부친의 과거 정치 행보로 인해 광해군 대에 관직 생활이 쉽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당쟁에 회의를 느껴 인조대에는 대부분의 관직에 출사하지 않았다. 정홍명의 당쟁에 대한 의식은 서필원에게도 영향을 주어 훗날 소신 발언을 하며 뜻을 펴는 기반이 된다.

1643년 창릉 참봉이 되었고, 1645년(33세)에 송시열을 방문했던 바가 있다. 당시 송시열에게 출사를 권유했던 것 같다.송시열이 송준길에게 보낸 편지 1647년 아들 서경조(徐敬祖)가 태어나나 부인 전주이씨가 사망한다. 1648년(36세) 전주 이씨 이이현(李頤賢)의 딸과 재혼하였고, 이후 중직대부(中直大夫) 행(行)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를 지내다가 그해 8월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해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권지(權知)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시강원 설서[10], 예문관 대교, 봉교가 되었고, 1651년 병조좌랑, 정언이 되었다. 이후 이조좌랑, 수찬을 거쳐 1656년(효종 7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서원의 정리, 철폐 상소링크와 수군(水軍)의 폐단 개혁 상소링크를 올린다. 당시 충청도는 대동법이 시행되고 있었으며 서필원은 그 실무를 맡아 경험할 수 있었다. 다시 중앙으로 올라온 서필원은 병조 참지, 형조/예조 참의, 동부승지, 대사간을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1657년 충청도에서 시행된 대동법이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자 전라도의 대동법 시행이 논의되었다. 찬반 논란이 붙자 해읍(바다 근처)과 산군(내륙 지방)으로 나누어 실시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서필원은 1658년 당시 윤선도의 탄핵으로 백천 군수로 나가있다가, 그를 눈여겨 보았던 김육의 추천으로 8월에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된다.[11] 다음 달 서필원은 상황 보고 및 시행을 위한 현실적인 안건을 건의한다.[12][13] 그리고 굶주린 백성 구휼을 위해 왕대비의 삭선(朔膳; 매월 초하룻날 각 도의 특산물을 정기적으로 왕실에 진상하는 물건 진상)을 감하자고 청했다가 추고되기도 했다. 김육이 10월에 사망하였고, 서필원은 다음 해인 1659년 대간의 탄핵으로 전라도 관찰사에서 파직되었고,[14] 이어서 모친상도 당했다. 1661년 모친의 장례를 마치고 병조 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으며, 1662년 홍문관 관원 선발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하였고링크, 그로 인해 도승지로 대제학을 겸임하던 김수항이 사직하는 일이 있었다.링크[15] 그리고 대사간, 예조/이조/형조 참의를 거쳐 1663년 좌승지가 되었다.

2.2. 공의(公義) / 사의(私義) 논쟁 (1663 ~ 1664)

1663년(현종 4년) 11월, 서필원의 이름을 후대에 남긴 공의, 사의 논쟁이 발생한다. 논쟁은 서필원의 스승인 김장생의 증손자이자 송시열, 송준길의 문인인 수찬 김만균에게서 불거졌다.[16] 청나라 사신이 오게 되었는데 김만균은 병자호란 당시 자신의 할머니가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원수 국가인 청나라의 칙사를 맞는 업무를[17] 할 수 없다며 사직을 요청한다. 이 때의 칙사는 단순한 사신이 아니었다. 1663년 3월 조선 조정이 청에 사은하기 위해 정사 정유성(鄭維城,1596-1664)을 포함해 사신을 파견했는데 봉황성(鳳凰城)에서 마부 2명이 유황을 밀수입한 것이 적발되었다. 강희제가 사건 조사를 요구하며 관료를 파견한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큰 부담이었고, 특히 임금인 현종이 직접 심문에 참여해야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도 논의가 크게 오갈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실록 링크[18]

효종 시기 청과의 업무에서 이런 비슷한 연유가 있는 관리들을 일에서 제외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곧 사의(私義; 개인적인 의리)로 인한 사퇴는 필수가 아니었던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서필원은 김만균의 사직 요청 다음 날 바로 현종에게 아뢰어 벼슬을 한 사람은 사적인 정보다 공의(公義; 공적인 의리)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며 사직을 허락하지 않아야 하며, 향후 부모과 관련되지 않은 사직소는 봉입 자체를 불허하자고 주장하였다.링크 부모의 경우는 정리상 강박할 수 없지만 기타의 경우는 부모와 차이가 있으며, 이번 건을 허용해줄 경우 사직할 자가 너무 많아 공무 수행이 어렵다는 논리였다. 현종은 서필원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승지 이경억이 김만균의 입직 거부 사실과 처벌을 아뢰자 금부에 하옥하라고 명했다.링크 그러나 다시 다음 날 응교 남구만이 가혹하니 다른 벌을 내려달라 청하자 파직하고 석방하였다.링크 이렇게 일은 마무리되나 싶었으나, 2달이 지나서 1664년 1월에 이슈메이커 송시열의 상소가 올라온다. 당시 송시열은 1659년 효종 승하 후 발생한 1차 예송논쟁으로 허목, 윤선도 등 남인과 대립하였고, 현종은 서인의 편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불씨는 남아 시끌시끌한 상황이었다. 서인의 존주의리 이념을 주도하던 송시열은 이 문제에 대한 시정 조처도 없고, 후속 논의도 없는 상황에 문제 의식을 느낀 것이다. 당시 우찬성이던 그는 상소에서 자신의 형도 호란에서 사망한 사실, 효종이 자신을 청 관련 일에서 빼주었던 사례, 주자의 복수 5세설[19], 송나라 유공의 사례[20]를 들며 사의를 인륜의 차원에서 강조하고 사람이 사람답고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니 어떤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링크 그 주장은 산림의 뿌리인 향촌의 사족이 지배하는 질서를 공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고, 이를 국가 운영으로 확장한 신료가 중심이 되는 정치이기에 사의가 공의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반면 서필원의 경우는 실무자로서 현실을 분석하여 최우선 방안이 선택되어야 하는 것이며, 혈육간의 사은도 중요하지만 벼슬한 자라면 공의를 더욱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고, 특히 부자 관계가 아닌 이상 사의는 절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임금의 명이 우선인 존군론(尊君論)에 입각한 주장이었다.

이에 맞서 우부승지 김시진(金始振, 1618 ~ 1667)[21]은 조손 관계에 형제 관계도 추가하여 부자 관계와는 같은 수 없다며 서필원의 편에 섰다.[22] 반면 산림에서는 유생들을 통해 상소를 줄기차게 올리며 서필원을 지지한 대사간 이경휘(李慶徽, 1617 ~ 1669)[23]·윤형성(尹衡聖, 1608 ~ 1676)[24]·유상운(柳尙運, 1636 ~ 1707)[25]을 삼간(三奸), 수찬 박세당[26]· 정언 조원기(趙遠期, 1630 ~ 1680)[27]·장령 박증휘(朴增輝, 1626 ~ 1672)[28]·부수찬 오시수(吳始壽, 1632 ~ 1681)[29]·정언 윤심(尹深, 1633 ~ 1692)[30]을 오사(五邪)로 지목하여 크게 비난하였다.링크 조정은 송시열의 뜻을 따르는 준론(峻論)과 서필원의 주장에 동조하며 양자를 조정하려는 완론(緩論)으로 분열되었다.

서필원은 당시 함경감사로 나가 있었는데,[31] 송시열의 상소를 접하고 자신의 견해를 다시 밝혔다. 사실 서필원 또한 김집의 문인이기에 송시열은 한 스승을 모시는 사형이다. 과거에 송시열을 개인적으로 방문했던 친분도 있어, 본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산림계의 강력한 힘을 뒷배경으로 삼을 수 있던 서필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다.링크 자신의 주장의 출처를 보강하여 맹자, 삼강, 고훈, 복제 등에서 부자와 조손 사이의 의리 설명에는 차등이 있으며, 국정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사의 허용 범위에는 제한이 있어야 함을 다시 강조했다. 평소 멀쩡히 지내다가 청 사신이 온다면 다 도망가고 임금 혼자 그 부담을 가지게 하면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형제가 호란 때 사망한 세 신하(홍명하, 허적, 이일상)가 공을 우선하고 사를 뒤로 하여 일을 수행한 것이지, 형제의 우애가 김만균만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예도 들었다. 현종은 서필원에게 "혐의롭게 여길 것 없으니 마음 편히 직을 살피라."는 답을 내렸다.

이단상은 당시 응교, 집의였는데, 큰 형 이일상과 둘째 형 이가상의 가족사가 언급되자 친구 서필원의 비판에 나서며 '무식(無識)'이라는 표현이 포함된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단상도 기본 입장은 서필원에 더 가까웠고, 서필원의 충정을 옹호하며 공격이 너무 심하다고 하였기에 산림에게 비판 받게 되며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서필원의 상소에 언급된 이일상 본인은 당시 공조판서였는데 이에 대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32][33] 현종은 이단상에게는 사직하지 말라는 명만 내렸고, 이어진 송시열의 장문의 상소에도 이전처럼 우대하는 말 없이 간단한 답을 내리는 정도에 그쳤다.링크

서필원의 송시열 비판은 집권 세력인 서인 내부에 파문을 일으켰다. 도학과 의리를 앞세워 효종 말기부터 정국을 주도하였고, 1차 예송논쟁을 통해 더욱 영향력이 커진 송시열을 남인도 아닌 같은 동문인 서인계 인물로 볼 수 있는 서필원이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더불어 산림 세력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현종이 산림이 왕권을 가볍게 여긴다는 의구심을 점점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현종은 1차 예송부터 부왕의 상을 맞아 대비의 복제를 3년이 아닌 기년복으로 정하고, 체이부정이니 서자라는 등등 불경한 용어를 효종에게 들이미는 모습, 그리고 윤휴와 윤선도의 상소들을 접하고 산림을 경계하였다. 1664년(현종 5년) 4월에는 이조에서 인사 물망을 올렸는데, 중앙직인 정언과 지평에는 준론 인물 2명(서필원을 공격한 조성보가 포함된다.), 그리고 외직인 북청과 이성 수령에는 완론 인사(서필원을 지지한 윤형성조원기)를 올리자, 현종은 거꾸로 발령하는 명을 내리며 이조판서 김수항, 이조참판 민정중[34], 이조좌랑 이민서를 모두 파직시키고 '사적인 당파를 비호하는 작태', '한심스럽다'는 비망기를 내리며 완론 지지를 분명히 하였다.링크 송시열 또한 자신의 사의론으로 정치적 파란이 일어나자 자책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현종은 형식적인 답만 해주었고 그것도 며칠 만에 내렸다.링크 난감한 송시열은 송준길에게 어찌해야 좋을지 상의하였고,[35]링크, 뒤에서 잠자코 있던 송준길까지 결국 나서서 송시열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현종은 이번에는 답조차 내리지 않았다가, 링크 두 달이 지나서야 답해주었다.링크 그리고 현종은 부득이하다면 왕의 뜻에 따라 양송[36]이라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야한다는 견해도 비춘바 있다.링크

공의, 사의 논쟁의 수습은 동부승지였던 남구만이 앞장섰다. 우선 김만균에 대한 처사가 가혹하니 감해달라 청하였고, 조정이 분열되자 송시열의 의견을 복수를 잊지 않는다는 측면으로 이해해주자며 지지하고, 다수에게 배척받는 서필원의 처지도 고려하여 잠시 체직시키자고 현종을 설득한다. 서필원 또한 공격에 시달리며 사직소를 계속 올리고 있던 차에 현종은 그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청에 사신으로 다녀온 우의정 홍명하가 그 수습을 마무리했다. 송시열의 본 뜻을 준론이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서필원을 금수로까지 몰며 공격하며 분쟁을 격화시켰다고 비판하고, 서필원의 주장은 복수의 큰 뜻을 꺽자는 것도 아니나 언관에 맞서는 것은 조정의 체통을 무시한 것이니 파직하여 일을 바로 잡자고 했다. 송시열과 준론을 따로 보자는 이 의견으로 임금과 산림의 대립 인식도 약화시킬 수 있었기에, 현종도 이만하면 신하들에게 자신의 뜻을 충분히 전달하였다고 생각하여 서필원을 일단 파직하고, 양송을 다시 예우하는 모습을 보였으며,링크 마지막으로 양사에서 서필원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는 논계를 정지시켰다.링크 김만균의 사직에 대한 시비의 판결은 유보되고, 결국 서필원의 파직으로 끝났지만 이 논쟁은 산림의 정치적 위상에 큰 타격을 가했다.

2.3. 사망까지 (1664 ~ 1671)

체직되었던 서필원은 1664년 10월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논경이 힘든 백성에게 생업 수단을 위해 중앙에 목면[37] 종자 보급을 요청하여 받아서 보급했다.링크 그리고 서얼이 진휼을 위해 곡식을 바치면 서얼 허통첩 발행을 통해 과거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여 100장의 허통첩도 받았다.링크 당시 이단상의 공격[38]을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링크 다음해에는 강화 유수가 되어 마니산성을 재건하고 포대를 배치하였으며 진휼을 위한 진휼미를 요청하였다.[39] 1667년 재취하였던 부인 전주 이씨도 사별하고, 병으로 사직을 청하나 윤허받지 못하다가 1668년에 들어서야 사직할 수 있었다.링크 강화 유수를 사직한 서필원은 어떤 상황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송시열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 같다.[40] 그러나 앙금이 남았는지 서로 만나지 않았다.송시열이 이단상에게 보낸 편지. 호조 참판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는 등 조정의 탄핵을 우려하여 관직 제수를 계속 거부했으나 송시열이 이전의 일은 주자의 뜻을 밝힌 것이며, 이단상도 한직으로 가있으니 공격당할 걱정은 하지 말라며 화해의 편지를 보내와링크 다시 출사하여 예조 참판, 호조 참판을 거쳐 형조 판서가 되었다.

1669년 충청도 태안의 안흥(安興)에 포구를 파는 일의 논의가 있었다. 태안반도의 서쪽은 바닷길인데 암초가 많고 물살이 강하여 배가 자주 난파되었다. 충청, 전라, 경상도의 세곡미를 싣고 지나가는 조운선이 한양으로 가는 길인데 잦은 사고로 인명 피해는 물론 재정 손실도 잦았다. 그래서 효종 시기 김육이 이 지역에 창고 설치를 건의했던 바가 있었지만 효율성을 따져 논의가 유보되었었다. 호조판서 민정중이 포구를 파는 일을 의제에 올렸고, 송시열은 포구를 팔 수 없다면 창고를 설치해 육로 수송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현종이 동의하자 송시열은 김육의 뜻이었으니 아들 김좌명에게 맡기자고 주장하였고 김좌명도 수락하였다. 좌의정이었던 허적은 안흥 창고 설치를 반대했는데, 난파가 잦은 곳은 안흥보다 봉상강(奉上江, 현재 김포 부근)이며 특히 장마 때가 문제이므로 안흥에 창고를 설치할 경우 운송이 더 늦어져 장마 시기에 봉상강을 지나게 되어 난파가 더 발생한다는 의견이었다. 현종은 포구를 파는 것이 어떨지 민정중에게 다시 물었는데, 송시열이 늦어지면 빠져죽는 사람만 생긴다고 하며 빠른 결정을 촉구하자 결국 창고를 설치하고 1년간 득실을 보고 포구의 설치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현종은 바로 김좌명을 보내어 창고 설치 위치를 살피라고 했는데, 현장에 다녀온 김좌명은 이 지역은 포구, 창고 모두 이득이 없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의 강한 의견을 무시할 수 없어, 반대하지는 못하고 창고를 설치할 때 시험삼아 작게 짓자고 제안하였다. 허적은 설치 안을 받아보고 손실되는 세곡량이 많아져 백성의 부담이 증가함을 우려하였지만, 역시 송시열에게 강하게 반대하지는 못하고 작게 짓자고 의견을 밝혔다. 정치화, 정태화, 이경석도 작게 짓자고 주장하여 송시열도 결국 동의하였다.

그런데 서필원은 여기에서도 송시열에게 굴하지 않고 다시 창고 설치를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링크 1658년 충청도 관찰사 재직 당시 창고 설치를 제안했었지만, 실무 작업을 한 10년 동안 창고 설치가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를 알고서도 송시열에 강하게 맞서지 못한 허적과 김좌명을 비판하며 '불충(不忠)'이라고 표현을 썼고, 현종의 잦은 온천행으로 충청도 백성들이 음식 마련하는 노고도 있는데 흉년도 겹친 마당에 굳이 해야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말이 너무 강했는지 현종도 '생각한 바를 진달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나 말이 간혹 지나치다.'고 하였으며, 송시열도 그 말에 귀향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기회를 다시 잡은 산당 세력은 서필원을 강하게 비판하며 파직을 청했다. 파직은 받아들였으나, 삭탈관직, 문외출송에 대해서는 현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8월에 다시 형조판서를 제수하였고, 서필원이 받아들이지 않고 사직을 청하는 가운데 산당은 지속적으로 그를 배척하였다. 배척의 이유는 창고 설치 반대 때문이 아니라 송시열에게 '불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 또한 서필원이 '임금의 총애를 받아 멋대로 행동하는 버릇이 있다.'고 상소한 바 있다.링크 그럼에도 현종은 서필원을 신임하였고, 1670년에는 한성부 판윤[41], 총융사[42] 겸 비국 제조로 삼기까지 한다. 1670년 2월 이후에는 양사에서 더 이상 이와 관련된 서필원 배척 상소는 올라오지 않았다.링크 허적은 그의 표현이 과격했어도 관직 삭탈은 옳지 않다며 대인의 모습을 보였고, 공의, 사의 논쟁 당시 서필원의 편을 들어주었던 조원기가 이번에도 옹호해주었다.[43] 결국 서필원의 반대에도 안흥에는 창고가 설치되었는데, 시행의 비효율이 대두되며 몇 년만에 혁파되고 말았다.[44]

1671년 3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6월에 경신대기근이 왔고 판서임에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감기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실록 졸기 1753년 시호로 '정의(貞毅)'를 받았다. 1865년 문집인 육곡유고(六谷遺稿)가 간행되었다.[45] 묘는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에 있다.

여담으로 서필원 사망 1년 후 우의정이던 송시열은 사직 상소를 올리며 서필원을 끌어온다. 허적을 언급하며 허적과 서필원이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친한 사이인데, 서필원이 위의 안흥 창고 문제로 비판하였음에도 태연해서 도량이 넓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허적이기에 송시열 자신이 비판해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허적이 현종과 이야기하며 송시열을 배척하여 현종이 송시열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된 것 아니냐고 한다. 현종은 오해라며 의례적으로 사직하지 말라는 비답을 내렸다.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에서는 송시열의 이 상소를 두고 '이번 상소에 간사한 꾀를 부려 올렸다 내렸다 늘렸다 줄였다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서필원의 말을 끌어다가 상신의 넓은 도량으로는 반드시 노여워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 이 말을 했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임금을 속이고 한편으로는 필원을 공격 배척하였으니 그 교묘한 말솜씨와 아첨하는 본 모습이 이에 모두 드러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공자가 아첨하는 자를 미워한 것이다.'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링크 반면 서인이 편찬한 현종개수실록에서는 이런 평은 삭제되었다.링크

3. 가족관계

증조부는 서익(徐益, 1542 ~ 1587)이다. 서익의 호는 만죽(萬竹)이며, 1569년 문과 급제 후 병조, 이조좌랑을 거쳐, 안동부사, 의주목사를 역임했다. 의주목사 재임시 정여립에게 배척받은 이이, 정철, 박순을 변호하는 소를 올리고 파직되기도 했다. 1584년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로 파견되었는데 이이가 죽기 직전임에도 변방에 관한 방략 6조목을 지어 서익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생전에는 좋은 이미지로서 죽은 뒤에 서원에 배향되었고 우암 송시열도 존경했던 인물이지만, 대중적으로 탐관오리같은 이미지를 남겨버렸다. 바로 그것은 1576년 병조정랑 역임 당시 실무자인 훈련원 봉사이던 이순신에게 자신의 친구를 훈련원 참군으로 추천하는 인사 청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후 앙심을 품고 1582년 이순신이 발포 만호일 때 감사 역할을 하는 군기 경차관으로 왔다가 군기 보수 불량이라는 핑계로 이순신을 파직시켰던 일이다. 이후에 무고함이 드러나 이순신은 복직했으며 서익은 이순신 관련으로 무고하게 파직시킨 막되먹은 썩어빠진 상사로 길이길이 남게되었다. 이순신 위인전이나 이순신 관련 드라마, 만화에선 서익은 간사하고 영달에 급급한 쓰레기로 나오기 일쑤라서 서익 후손들로선 서익이 이순신을 무고한 잘못은 분명히 인정하고 욕먹을 하지만, 탐관오리로서 이런 대중 매체로 더 부풀려 나오는게 억울하다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걸 뭐라고 하면 이순신을 파직시킨 썩은 상관으로서 더 홍보를 하는 셈이라 뭐라고 못한다고...

조부 서용갑(徐龍甲)은 청주 한씨 한효윤(韓孝胤)의 딸과 혼인하였다. 한효윤의 동생 한효순(韓孝純, 1543 ~ 1621)은 북인의 대표 중 하나로 광해군 대에 좌의정을 역임했고, 인목대비 폐모론에 동참하여 사후 관직이 추탈되기도 했다. 그의 아들 한백겸(韓百謙)과 한준겸(韓浚謙)은 선조 시기 모두 정여립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았다. 한백겸은 실학의 선구자로 꼽히기도 하는 화담학파의 학자이며,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에게 배웠다. 이항복, 정경세와 친했다.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韓興一)은 효종 시기 우의정으로 김육과 함께 충청도 대동법을 추진한 인물이며 남인으로 활동하였다. 한준겸은 선조의 유언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한 명이며, 인열왕후의 부친으로 인조의 장인이다. 류성룡을 지지한 남인으로 분류된다.

여동생은 정홍명의 조카인 정뢰(鄭㵢)와 혼인하였다. 서필원의 딸은 동문인 박세교의 아들 박태만(朴泰萬)과 혼인하였다. 아들 서경조는 부친의 후광으로 박태순(朴泰淳)[46]의 천거를 받아 음관으로 나주목사까지 지냈다.
[1] 참고 문헌: 1. 정만조, 조선 현종조의 공의, 사의 논쟁, 2. 강정인, 17세기 관료학자 서필원의 정치활동과 경세관, 3. 손애리, 조선 현종조 '김만균 사건'을 통해 본 '국가'에 대한 이해, 4. 육곡유고 해제링크, 5. 우경섭, 정관재 이단상의 생애와 사상, 6. 이현지, 이일상 시문학 연구[2] 김집에게 직접 배운 것은 아니나 김장생처럼 스승으로 여겼다.신독재전서 문인록[3] 현재의 자강도 초산군으로 압록강 인근이다.[4] 이택민(李澤民)의 딸이다.[5] 서용갑의 서동생인 서양갑의 옥사[6] 조부 서용갑이 청주 한씨와 혼인하여 가문의 인연이 있다.[7] 다음해에 김장생이 사망하였고, 이후 김집을 김장생처럼 스승으로 섬긴다.[8] 정철의 아들. 송익필, 김장생, 윤근수에게 배웠으며 김장생의 학통을 이었고, 김집과 친분이 깊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서필원의 문집 '육곡유고'의 동문계첩에 정홍명의 제자 명단도 기록되어 있다. 이단상의 큰 형인 이일상, 박세채의 사촌 형 박세교도 동문이다. 이일상, 이단상 형제와 박세채, 박세교는 서로 사촌이기도 하다. 특히 이일상과 서필원은 가까운 이웃으로 친하게 지내서 서로 수창한 시도 다수 전한다. 이일상이 1살 위이며, 아마 둘 간의 친분으로 서필원과 이단상도 친해졌을 것이다. 이 둘은 낙산 아래에 거주한 문인들인 낙동계라는 모임의 일원이기도 한데, 낙동계에는 인평대군도 포함되어 있다.[9] 아마도 김집이 소개해주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서필원의 증조부 서익과 정철의 친분도 있다.[10] 당시 세자였던 효종의 교육을 맡았다. 효종은 한준겸의 외손자이며 인열왕후의 아들이다. 동생인 인평대군은 동복 오씨 오단의 딸과 혼인했고 오단의 손자인 오시수는 훗날 공의, 사의 논쟁이 벌어질 때 서필원의 편에 선다.[11] 김육은 사망 전 효종에게 상소문을 남겼고, 송시열송준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동법에 관련하여 서필원을 언급하고 있다.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 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는 힘쓰도록 격려하여 보내시어 신이 뜻한 대로 마치도록 하소서.'링크[12] 전라도의 흉년으로 쌀이 귀해 대동법 시행의 적기이니 전 지역에서 시행을 하자, 흉년으로 공물가가 높으니 1결당 13두에서 12두로 감하자, 해읍에는 배가 많지 않아 현재의 안면도에 육로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한 대동미를 보관 창고를 현재의 태안 안면도에 설치하자는 것, 대동수미 관원의 부족 + 창고 비용 조달 방안과 운영을 위해 주변에 백성들을 모아 거주하도록 하자는 구체적인 방안도 함께 제시했다.[13] 당시 서필원의 모든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으나, 1662년 김좌명의 주도로 전라도 산군에서도 대동법이 시행된다.[14] 죄인이 죄를 씻기 위해 쌀을 바치면 구휼을 위해서 쓰게 해달라고 임금에게 계청했는데, 사헌부에서 법을 무시했다하여 파직을 청했다.링크 당시 청탁으로 석방 받는 사람이 많아 문제가 되었고, 서필원도 같은 종류로 여겨져 처벌받았다. 그러나 전라도민들은 떠나는 서필원을 위해 인정비를 세웠다. 현재 이 비는 1940년에 부여 서씨 후손들이 집성촌으로 옮겨가서 현재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있다.[15] 당시 이단상은 김수항에게 편지를 보내 서필원의 성격이 거칠고 고집이 있어 그렇지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격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변호해주었다. 서필원보다 14세 연하였지만 절친한 사이였다.[16] 스승의 증손자이자 절친인 이일상의 사위인 김만균임에도 공사가 분명하여 할 말은 하는 서필원이다.[17] 영접은 임금이 하며, 김만균의 업무는 임금을 수행하는 것이다.[18] 참고: 정다운, 17세기 후반 西人의 咸鏡道 경험과 정치활동 - 金壽恒과 閔鼎重을 중심으로[19] '위 아래 5대까지는 복수를 해야한다.'[20] 언급한 송나라 유공의 일화는 인용이 잘못된 것이었고, 이단상이 그 문제를 지적하였다.[21] 송준길의 문인이다. 실무에 밝은 관료였으며, 산법에도 익숙해 민정중과 함께 균전 업무를 하는 경기 좌균전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전남/경남/충청감사, 수원부사, 한성부 좌윤, 승지, 대사간, 호조/형조/예조참판을 역임했고, 1660년 전남감사 시절에는 중국의 수학책 '산학계몽'을 인쇄하여 보급했다. 이 책은 과거에 세종도 정인지와 공부했던 책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이 정작 중국에서는 소실되어 구할 수 없었는데, 1839년 조선에서 결국 구해서 중국으로 재보급 되었다. 역학에도 밝아 대통력, 시헌력 사용 논쟁에도 참여하여 시헌력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바 있다. 실록 졸기에 나와있는 것처럼 사론과 배치되는 소신 주장을 자주 폈음을 알 수 있다. 이 논쟁에서도 같은 송준길 문하의 동문이라고 김만균의 편을 들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을 것이다.실록 졸기[22] 송시열이 자신의 형이 호란에서 사망하고 효종이 배려해준 사실을 언급했기에 그랬을 것이다.[23] 이제현의 후손이다. 이조판서까지 역임했으며,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서필원과 친했으며, 서필원 주장의 본 뜻은 공의를 생각하여 사의를 감추고 참는 것이니 탄핵에 반대를 표했다.[24]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 ~ 1641)의 문인이다.[47] 정온의 문집인 동계집 속집에 윤형성의 제문이 전한다. 문하에 출입한지 5년이라고 쓰여있다.링크 1662년 55세에 문과 급제하여 언관을 거쳤고 삼척부사, 통정대부에 오른다. 유계(兪棨)와 어릴 때부터 가장 친했던 절친이며, 둘째 딸을 유계의 아들 유명윤(兪命胤)에게 출가시켜 사돈이 된다. 이들 사이의 아들인 유상기(兪相基)는 윤증의 제자이나, 유계와 윤선거, 그리고 부친의 작업을 도운 윤증의 공저라고 볼 수 있는 '가례원류'를 훗날 유계의 단독 저작으로 주장하며 윤증의 분노를 산 바 있다. 먼저 출사한 유계가 음관으로 추천하려 하였으나 윤형성이 거부한 일화도 있다. 유계와 송시열이 김집 문하의 친한 친구이니, 윤형성은 송시열과는 친구의 친구인 셈인데 윤형성이 늦게 급제한 탓에 송시열보다 불과 1살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언관에 재직하고 었었다. 현종 시기에는 송시열에게 비판적인 견해를 표하였으나, 훗날 2차 예송 때는 송시열을 지지하기도 했다. 윤형성의 다른 딸은 김상용의 증손자 김성우와 혼인하였다.[48] 스승으로 보아서는 남인 계이나, 혼맥이나 지연으로 보면 서인 계이다. 소신으로 서필원을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25] 모친이 박동량의 딸이며 서필원의 사돈인 박세교와 외사촌이다. 송준길의 문인으로 서인 계열이며 훗날 소론으로 활동하며 형조판서,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26] 박세당은 임금이 굴욕을 당하거나 말거나 자기 몸만 깨끗이 하려는 것이냐고 크게 비판하였다. 서필원의 사돈인 박세교와 6촌이다.[27] 김창협, 김창흡 형제와의 관계, 영향으로 알려진 학자 졸수재 조성기(趙聖期, 1638 ~ 1689)의 큰 형이다. 임천 조씨 가문은 본디 증조부 조원(趙瑗, 1544 ~ 1595)이 조식의 제자이자, 조식의 조카 이준민(李俊民, 1524 ~ 1591)의 사위로 북인 계열이었다. 그러나 서인의 탄생에 기여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의 손자이자, 심정양의 딸인 청송 심씨가 조원기 형제의 모친으로 조원기 형제는 서인 계열이 되었다. 조원기의 아랫 동생 조현기(趙顯期, 1634~ 1685)가 김좌명의 사위가 되며 김육의 청풍 김씨와도 인연을 맺게 된다. 또한 김좌명이 신흠의 아들인 동양위 신익성의 사위이기에 평산 신씨과도 인연이 닿는다. 조현기는 신익성의 아들인 신최에게 배웠는데, 함께 배운 친구가 김좌명의 아들인 김석주이다. 조원기는 이경석의 사위이자 제자이며 서인에 가까웠다.[49]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난한 '수이강(壽而康)'은 1668년 이경석이 현종에게 궤장을 받을 때 사용한 문구로 다음해에야 그 뜻이 드러났기에, 1663년 이 논쟁 당시에 조원기가 송시열에게 악감정을 가질 일은 없었기에 그도 소신 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원기는 서필원의 말이 거칠기는 했으나 그의 마음은 조정을 높이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그의 마음이라고 논의하는 자들과 다르겠냐고 지적하였다.링크, 언관을 거쳐 숙종 시기 황해도 관찰사, 승지를 거쳤다.[28] 지평 이규령이 논의를 일으키자 당시 장령이던 박증휘가 저지하였다. 언관으로 주로 재직하였다. 김상용의 증손녀와 혼인하였으며, 김수항과도 교류가 있어 1659년 장성 부사로 제수되었을 때 송별시를 받았고링크, 사망 후 그를 그리는 시도 남아 있다.링크 다음 해인 1667년 청 사신이 조선에 와 피로인들이 조선으로 다시 도망온 일 등으로 추궁하자, 현종이 임금인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연경 쪽으로 무릎을 꿇으며 감형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박증휘를 포함한 일곱 신하(이숙, 신명규, 유헌, 이하, 김징[50], 조성보[51])들은 허적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청에 다녀온 후 그를 탄핵했다. 그리고 1차 예송논쟁에서 윤선도를 비호하는 조경의 상소를 음참부정(陰慘不正)하다고 비판한 것으로 보아 서인으로 보이나, 이 당시에는 소신으로 서필원을 지지한 것 같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생몰년도는 10년씩 잘못 기입되어 있다. 1662년 사망으로 나오는데 이 논쟁은 1663년의 일이다. 이 정보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링크[29] 인평대군의 처가인 동복 오씨로 인평대군의 처조카이다. 남인 중 청남에 속하며 탁남인 허적과도 거리가 있었고 숙종 시기에는 우의정까지 오르며 서인과 대립하였으며 경신환국으로 사사되었다.[30] 정언 조성보가 이규령에 이어 논의를 일으키자 박세당과 윤심이 저지하였다. 윤심은 남인 계열이며 훗날 대사간, 경기도관찰사, 공조/병조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다.[31] 함경감사로 떠나는 서필원이 이단상에게 시비를 물어오자 같이 하룻밤을 보내고 상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단상 입장에서는 서필원의 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내용이 포함된 전별시를 지어주었다.[32] 이일상은 김만균의 장인이기도 하다.[33] 이단상의 상소는 실록에 전문은 없고 요약본만 있다.링크 전문은 문집 정관재집에 전한다. '그렇다고 오늘날 모든 일을 한결같이 예경(禮經)에 적힌 대로 행하려면, 비슷하나 다른 점이 없지 않습니다. 고금의 마땅함이 다르고 시대의 흐름이 같지 않으니, 그 사이에 참작하여 헤아릴 길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서필원이 조손 관계로 단정한 것은 진실로 무식(無識)한 짓이었지만, 이른바 참작하여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요지는 전혀 소견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칠고 사나운 말로 송시열을 조롱하고 모욕한 일은 대단히 해폐(駭悖)하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간 서필원을 비판한 자들도 공격이 너무 심하니, 사정을 잘 파악하지 못하여 그를 승복시키지 못했습니다.'[34] 민정중, 민유중 형제는 서필원과 본디 친밀하게 교류해왔다. 당시 민정중은 논쟁 당시 서필원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관계는 회복하려고 노력하였고, 서필원 또한 본인의 후임으로 함경감사로 온 민정중에게 지역의 주요사안을 정리한 책자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서로의 의리 해석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관계는 끝난다.[35] '오늘날 제가 처신할 도리는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잠자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저더러 대강이라도 의리를 가려 내어 상의 마음을 이해시키라고 권하는데 그것은 만에 하나라도 효력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그 심정이 애처롭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다만 대죄(待罪)하고 있는 것이 옳을 듯한데 얼마 전에 이미 상소문을 올려 버렸으니, 이 또한 외람되고 번거롭게 하는 일이 아닌가 염려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36] 송시열, 송준길[37] 당시 목면은 조선의 화폐 수단이었다. 당시 함경도는 재배가 가능했지만 재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38] '무식하고 해괴하다'고 표현. 그러나 그 내용만 있는 건 아니고 서필원을 실드해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39] 강화도민들도 애민 선정비를 세워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 비는 현재 강화역사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있다.[40] 아마 고향인 논산 은진에 내려와 있었을 것이며, 멀지 않은 회덕에 송시열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송시열은 논산 이성에 살았던 윤증과 발생한 회니시비도 그렇고, 논산과 악연이 있는 듯[41] 현재의 서울시장[42] 종2품, 5군영의 하나인 총융청의 주장[43] 말투가 과격한 것으로 초래된 것인데, 있지도 않은 죄를 미리 적용하면 문제가 된다며 삭출이 과하다고 했다. 링크[44] 이후에도 이 문제는 지속되어 정조대에 과거 시험에 대책을 묻는 문제가 출제되기도 했다.[45] 시문을 크게 즐기지는 않았고, 사후 본가가 여러차례 화재를 당해 많은 유고가 소실되기도 했다. '호서수군방략(湖西水軍方略)'과 '서원교폐절목(書院矯弊節目)'의 대표적인 저작도 전하지 않는다.[46] 반남 박씨로 서필원과의 혼맥을 통한 인연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