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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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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공(文獻公)
이행
李荇
출생 1478년 6월 30일[1]
(음력 성종 9년 5월 21일)
사망 1534년 12월 10일[2] (향년 56세)
(음력 중종 29년 10월 25일)
평안도 함종현
묘소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
시호 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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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文定)
문헌(文獻)영조 연간
본관 덕수 이씨
택지(擇之)
용재(容齋)
부모 부친 - 이의무(李宜茂, 1449 ~ 1507)
모친 - 창녕 성씨 성희(成熺)의 딸
부인 전주 이씨 - 이조(李稠)의 딸
자녀 장남 - 이원록(李元祿, 1514 ~ 1574)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2. 생애

김종직의 문인인 연헌 이의무의 아들로 그 역시 김종직의 제자인 표해록의 저자 최부의 문인으로서 김종직의 일파였으나 조광조와 달리 남곤처럼 온건 사림파에 속했다. 1545년 을사사화의 주역인 이기의 아우이며, 형은 이권으로 이들 삼형제는 모두 문(文)과 무(武)에 뛰어났다. 형인 이권과 동생인 이행이 각각 무와 문에 뛰어나 가운데 있던 이기는 늘상 샌드위치 신세였다고 불만을 토로했었다.

벗인 남곤, 박은과 함께 시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연산군 시절 갑자사화 때 함께 화를 입어 박은은 죽고 남곤과 이행 두 사람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중종 때 관로가 비교적 순탄하여 대사간 등을 거쳐 대제학, 좌의정 등을 역임하다가[3] 이후 벗인 남곤이 영의정에 있을 때에는 그의 파트너였고, 남곤 사후엔 심정, 이항과 함께 주도권을 잡았는데,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영의정 자리는 정광필에게 양보하고 심정이 좌의정을 자신이 우의정을 맡았다. 이후 김안로의 모략으로 유배를 당하고 유배지에서 객사했다. 본래는 수염이 많았던 털보였지만, 유배하는 동안 거의 뽑혀져서 죽을 때, 검사를 한 후에 확인을 했다고 한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도문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근 삼월리에는 그가 심었다고 천해지는 회화나무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3. 기타

  • 김안로가 남곤의 탄핵으로 인해 처음 쫓겨난 이후에 작서의 변이 발생하는데, 이를 기회삼아 집권을 하려는 김안로는 아들 부마 김회(金禧)[4]에게 대신 중에서 누구를 구워 삶으라고 지시했다. 김회의 술 선물 공세에 넘어간 것이 이행이었다. 과연 뒤에 김회가 "아버지가 다 죽어갑니다. 복권만은..." 하고 읍소하자 중종이 대신들 모아놓고 "이제 김안로를 복권시키자." 한 자리에서 "네, 전하 말씀이 옳습니다." 한 것이 이행. 당시 정광필, 심정이 반대했음에도 중종은 이행의 한마디에 반색하며 기뻐했다. 아무튼 그 덕인지, 자신과 같은 걸음을 걸었던 심정과 이항은 사약을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귀양에 그쳤으니 김안로 입장에선 참작 한 셈.[5] 이 일로 보면, 권신에게 필요한 결단력과 냉정함이 약한 호인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통틀어 정치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김안로를 생전에 능숙하게 저지한 이행의 벗 남곤이야말로 편히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는 최상의 정치력을 보여준 것과 새삼 대비되는데, 물론 남곤 또한 조광조를 몰타낸 장본인이며 실세 영의정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니...[6]
  • 권신으로 후대인에게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문형'을 12년간 역임하여 대제학이라는 시스템을 정비한 공로가 있다. '문형'이란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 지성균관사를 겸임해야만 일컬어지는 칭호로, 오늘날로 따지면 국립도서관장과 국가가 반포하는 공식문건의 수석 작성자 혹은 총감독관, 국립대학 이사장을 역임하는 것과 같다. 그는 문형으로서의 자의식과 자부심이 상당하여, 후임 대제학을 추천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아, 소세양, 정사룡, 김안로 등을 키워주거나 추천하였다. 조선조 통틀어 정승으로서 문형을 겸한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대제학은 2품직이라 1품으로 승진하면 후임 인물을 추천해야 하는데 우의정, 좌의정이었음에도 문형 직책을 겸임하였다)


[1] 율리우스력 6월 21일[2] 율리우스력 11월 30일[3] 대사간 시절에 박상과 김정이 "폐비를 복권시키고 삼대장(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을 벌해야 합니다."(이 때 장경왕후가 후에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나서 산후병으로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으며, 삼대장 또한 이 때 죽고 없어진 뒤였다.) 라는 상소를 올리자 대사헌과 함께 "이 따위 의견을 올린 놈들 벌하소서." 했는데 이유는 1. 원자의 정통성이 흔들리므로, 2. 폐비의 복수 우려였는데 이게 조광조의 등장을 불렀다. 조광조가 석 달 뒤 대간에 와서 "저 녀석들이 바른 말 한 걸 옹호해야지. 반대했으니 나 저 인간들이랑 일 못함. 갈아치우셈." 했다가 진짜 대간 전체가 갈렸다. 원래 조광조가 명성이 있긴 했지만, 왕에게 드러낸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4] 당시 세자(후에 인종)의 누나인 효혜공주의 남편이다.[5] 정광필은 명망은 높지만 세력이 없어, 귀양에 그쳤다가 이내 복권되고 졸했으니 경우가 다르다.[6] 사실 이행도 이항, 심정이 날아가자 남곤을 본 받아 삼정승과 육조 판서/참판/참의를 모아놓고 김안로 체직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중종의 입장에선 일보 후퇴였겠지만...) 그러나 김안로계 대간들이 아예 남곤계 대신들을 경빈의 작당으로 몰며, 김안로 체직을 주도한 육조의 주요 판서들을 지목하여 한 방에 되치기에 성공했다. 보고 배운 것은 있으나 '어심'이 떠난 것을 알지 못했다고 봐야하니, 결국 정치력 미달을 부인하긴 힘들다. 참고로 이행이 김안로를 밀어내려고 실력 행사에 나선 것부터, 김안로의 되치기에 넘어가 면직 당하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사흘이었다(...)[7] 이 사람은 신흠, 이정구, 장유와 함께 당대 제일의 문장가롤 꼽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영의정 윤방이 1640년(인조 18)에 죽자, 그의 아들이 이식에게 청해 시장(시호를 청하는 글)을 받았는데, 하필 이 때에 심기원의 옥사, 소현세자의 죽음과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강빈 옥사, 김자점의 옥사 등 별별 사건이 터지는 중에 이식마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결국 윤방의 아들은 1651년(효종 2) 조익에게 다시 청했는데, 조익은 이식의 문장이 하도 좋으니 고쳐 지을 것이 없다면서 몇 구절만 빼고 그대로 배껴 썼는데, 문제는 이식이 지은 시장에 있던 강빈(소헌세자의 부인)실수로 고치지 않은 바람에 조익은 결국 삭탈관직을 당했다.[8] 이행의 아버지인 이의무의 맏형인 이의석의 현손으로, 그와 율곡은 6촌 재종조와 재종손의 관계가 된다. 율곡의 모친인 신사임당은 당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