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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04년 (연산군 10) |
사망 | 1585년 (선조 18) (향년 80~81세) |
재임기간 | 제73대 영의정 |
1574년 5월 1일 ~ 8월 25일 (음력 선조 7년 4월 11일 ~ 8월 10일) | |
제75대 영의정 | |
1575년 8월 6일 ~ 1576년 8월 24일 (음력 선조 8년 7월 1일 ~선조 9년 8월 1일) | |
제77대 영의정 | |
1578년 11월 29일 ~1579년 2월 25일 (음력 선조 11년 11월 1일 ~선조 12년 2월 1일) | |
본관 | 남양 홍씨(토홍계)[1] |
자 | 퇴지(退之) |
호 | 인재(忍齋) |
시호 | 경헌(景憲) |
부모 | 부: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모: 정경부인 여산 송씨 -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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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관.2. 생애
1531년(중종 26)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5년(중종 30)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여 유배되었다가 김안로가 죽은 후에 풀려났는데, 이때 자신의 심경을 읊은 <원분가(冤憤歌)>가 전한다. 1552년(명종 7)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1554년(명종 9) 공조판서, 1555년(명종 10) 예조판서, 1558년(명종 13) 5월 우찬성 겸 예조판서, 동년 8월 우찬성 겸 이조판서, 동년 11월 좌찬성 겸 이조판서를 지냈다. 동년 12월 우찬성 겸 이조판서에 대제학까지 겸하게 되자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이 우찬성만 체직하도록 하였다. 이후 1568년(선조 1) 우의정, 1572년(선조 5) 무렵 좌의정을 지냈다. 1574년(선조 7)을 시작으로 1575년(선조 8), 1578년(선조 11) 등 도합 3차례 영의정을 지냈다.3. 여담
- 영의정 홍언필이 여름에 낮잠을 자는데 뱀이 배 위에 올라가 있었다. 언필은 내심 그걸 쫓고자 했지만 뱀이 놀라 사람을 다치게 할까 걱정되어 목석처럼 감히 움직이질 않았다. 아들인 퇴지(退之)[3]는 6살이었는데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갔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곧바로 연못에 가서 3~4마리 개구리를 가져와 던지니 뱀이 사람을 버리고 개구리를 따라 가버렸고 언필은 그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홍섬은 어려서부터 재치가 이와 같았고 장성하여서는 이름난 재상이 되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