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엽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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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엽 許曄| Heo Yeop | |||
양천허씨대종회 상상화 | |||
출생 | 1518년 1월 10일 (중종 12, 음력 1517년 12월 29일) | ||
조선 한성부 건천동 허엽 본가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인현동1가)[1]) | |||
사망 | 1580년 2월 18일 (선조 13, 음력 1580년 2월 4일) (향년 62세, 62년 1개월 8일 / 22,684일) | ||
조선 경상도 상주 객관 (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상주시 객관) | |||
객사 (비명횡사) | |||
묘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산61 | ||
학력 | 장음정 나식의 문하 이여(李畬)의 문하 화담 서경덕의 문하 퇴계 이황의 문하 회재 이언적을 사숙 식년시 진사 급제 (음력 1540년 2월 23일) 문과 식년시 갑과 급제 (음력 1546년 10월 8일) | ||
직업 | 관료, 유학자, 서예가, 문장가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 양천(陽川)[2] | |
국적 | 조선 | ||
공훈 | 없음 | ||
최종 관등 |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 ||
휘 | 엽(曄) | ||
자 | 태휘(太輝) | ||
호 | 초당(草堂)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붕당 | [[동인(조선)|{{{#!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15B; font-size: .8em" | ||
작품 | 《초당집(草堂集)》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 ||
부모 | 부 - 허한(許澣, ? ~ 1532) 모 - 창녕 성씨(? ~ 1554)[3][4] | ||
형제 자매 | 형 - 허구(許昫, 1514 ~ ?) 남동생 - 허명(許明, 1529 ~ ?) 누이 - 이염(李念)의 처 | ||
배우자 | 전처 한이정(韓二貞, 1515 ~ ?)[5][6] 후처 강릉 김씨 - 김광철(金光轍)의 딸 | ||
자녀 | 3남 3녀 장녀 - 허묵석(許墨石, 1544 ~ ?)[7] 한씨 소생 차녀 - 허대정(許大貞, 1546 ~ ?)[8][9] 한씨 소생 장남 - 허성(許筬, 1548 ~ 1612) 한씨 소생 차남 - 허봉(許篈, 1551 ~ 1588) 김씨 소생 3녀 - 허초희(許楚姬, 1563 ~ 1589) 김씨 소생 3남 - 허균(許筠, 1569 ~ 1618) 김씨 소생 | ||
경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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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관료, 유학자, 서예가, 문장가.본관은 양천, 자는 태휘, 호는 초당(草堂)이다.
2. 가족
양천 허씨 허한에게 3명의 아들이 있는데 장남 허구, 차남 허엽, 삼남 허명이다. 즉 허엽은 형 허구와 남동생 허명이 있다.[출처] 그러나 과거 시험 급제자 기록에 허구와 허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허구와 허명이 허엽보다 일찍 죽었거나 과거 급제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자식으로는 허성, 허봉, 허균, 허난설헌 등을 두었는데, 모두 글 쓰는 재주가 훌륭하였다. 그러나 이후 허균이 역모 혐의로 사형을 당하면서 가문도 쇠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균 외의 다른 자식들도 일생이 불행한 편. 허성은 임진왜란 때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공신 칭호조차 받지 못하고 죽은 뒤에야 대접을 받았다. 허봉은 이이를 탄핵했다가 오히려 '계미삼찬'으로 몰려서 함경도 종성까지 유배를 당했고 이후 풀려났으나 3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허난설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3. 생애
3.1. 생애 초기
나의 친가(親家)는 건천동(乾川洞)에 있었다. 청녕공주(靑寧公主) 저택의 뒤로 본방교(本房橋)까지 겨우 서른네 집인데, 이곳에서 국조 이래로 명인(名人)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동(李季仝)이 같은 때였고, 양성지(梁誠之)ㆍ김수온(金守溫)ㆍ이병정(李秉正)이 한 시대였으며, 유순정(柳順汀)ㆍ권민수(權敏手)ㆍ유담년(柳耼年)이 같은 시대였다. 그 후에도 노 정승(盧政丞 노수신(盧守愼))과 나의 선친 및 지사(知事) 변협(邊協)이 같은 때이며, 근세에는 유서애(柳西厓 서애는 유성룡(柳成龍)의 호)와 가형(家兄) 및 덕풍군(德豊君) 이순신(李舜臣)ㆍ원성군(原城君) 원균(元均)이 한 시대이다. 서애는 국가를 중흥(中興)시킨 공이 있었고, 원ㆍ이 두 장수는 나라를 구원한 공이 있었으니 이때에 와서 더욱 성하였다.
ㅡ 《성소부부고》 제24권 성소부부고 #
아들 허균이 쓴 성소부부고에서 알 수 있듯이 허엽의 친가쪽 고향은 한성부 건천동에 있었다. 즉 건천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동(李季仝)이 같은 때였고, 양성지(梁誠之)ㆍ김수온(金守溫)ㆍ이병정(李秉正)이 한 시대였으며, 유순정(柳順汀)ㆍ권민수(權敏手)ㆍ유담년(柳耼年)이 같은 시대였다. 그 후에도 노 정승(盧政丞 노수신(盧守愼))과 나의 선친 및 지사(知事) 변협(邊協)이 같은 때이며, 근세에는 유서애(柳西厓 서애는 유성룡(柳成龍)의 호)와 가형(家兄) 및 덕풍군(德豊君) 이순신(李舜臣)ㆍ원성군(原城君) 원균(元均)이 한 시대이다. 서애는 국가를 중흥(中興)시킨 공이 있었고, 원ㆍ이 두 장수는 나라를 구원한 공이 있었으니 이때에 와서 더욱 성하였다.
ㅡ 《성소부부고》 제24권 성소부부고 #
장음정 나식의 문하, 이여(李畬)의 문하, 화담 서경덕의 문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회재 이언적을 사숙했다.
음력 1540년 2월 23일 허엽은 식년시 진사 시험을 성균관에서 보고 합격했으며, 진사 2등에서 합격 인원 100명 중 17위로 급제했다.#
음력 1546년 10월 8일 식년시 갑과 시험을 한성부에서 보고 합격했으며, 합격 인원 33명 중 3위로 급제했다.#
3.2. 동서분당 당시 행적
동서분당 당시 동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정동(正東) 쪽을 뜻하는 묘지(卯地)가 별명으로 붙을 정도로 동인 내에서도 입장이 강경하였다. 동문수학한 사이인 박순과는 본래 서로 친밀한 사이였으나, 허엽이 동인, 박순이 서인의 중추적 인물이 되면서 사이가 갈라졌다. 이이, 이황 등에게 학문이 부족하다고 디스를 당했으나,[11] 경전 익히는 것을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아 이 점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벼슬을 30년간 했으나 생활이 검소하고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같은 서경덕의 제자인 토정 이지함과는 절친인 친구였다.3.2.1. 이이와의 향약 시행 논쟁 관련
선조에게 향약의 시행을 권하였으나, 이이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당시 허엽은 향약 시행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이이는 그보다는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며 허엽의 주장을 반대했다. 그래서 허엽이 이이를 찾아가 따졌는데, 이이가 허엽에게 "선생 집안은 향약으로 집안을 다스리십니까?"라고 묻자, 허엽이 "나라의 명이 없어서 안 하고 있소"라고 대답했다. 이에 이이는 "선생은 집안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일일이 나라의 명을 기다리신단 말입니까? 부자지간에도 매일 매를 때리면서 글을 배우라고 권하면 반드시 서로 등을 지는 결과가 벌어질 것인데, 더구나 백성이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이후 허엽은 "선한 사람이 많으니 시행할 수 있다"고 하였고, 이이는 다시 "당신의 마음은 선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한 것만 보셨습니다마는, 나는 선하지 않은 사람을 본 것이 더 많으니 필시 내 마음이 선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몸으로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써 가르치면 말썽이 생기는 법인데, 지금 향약의 경우 어찌 말썽이 없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그런데 선조수정실록 7년 2월 1일에 올라있는 이 기사는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우선 서인 집권기에 쓰여진 선조수정실록 내용과 달리 북인 집권기에 쓰여진 선조실록에는 향약의 시행을 미루라는 이이의 제안이 굉장히 짧게 다뤄진다. 선조실록 기사가 선조 7년 2월 1일 기사의 전부인데, 반면 선조수정실록에는 같은 날 기사 중 9개에서 이이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저 허엽과의 대화이다. 내용이 두 사람의 대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저 내용은 이이 혹은 이이의 제자의 문집에서 실록으로 가져간 내용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신뢰도는 상당히 낮아진다.
두번째는 위에도 언급했지만, 저 기사는 선조 7년 2월1일 기사이다. 그리고 그해 10월 1일 이이는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된다. 그리고 이 때 이이의 업적이라고 후대에 언급되는 것이 뭐냐면, 해주향약을 만들어서 반포했다. 그리고 이 해주향약과 서원향약이 조선 후기 서인 향약의 표준이 되었다.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기간은 5개월여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향약을 당장 시행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1년여만에 자기 말 자기가 무너뜨린 격이 된다.
3.3. 최후
1579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지만 약을 잘못 복용해서 병을 얻었고 동지중추부사로 전임했다. 1580년 봄에 병이 심해져서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다가 음력 1580년 2월 4일 경상도 상주 객관에서 객사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 사관이 기록한 허엽의 졸기이다.동지중추부사 허엽(許曄)이 졸하였다. 허엽의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다. 젊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따라 배웠고 노수신(盧守愼)과 벗하였으므로 사류로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가정(嘉靖)병오년 문과에 등제하여 즉시 간원에 들어갔다. 그는 일시의 원칙없는 논의에 대해 비록 의사를 달리하지는 못하였으나 마음 속으로 선류를 보호하려고 하여 일에 따라 구제한 점에 있어서는 칭찬할 만한 것이 있었다. 금상의 조정에서 간장(諫長)·관장(館長)에 오래 있으면서 직언을 잘하였지만 일의 실정에는 절실하지 못했으므로 상이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관질을 올려 경상 감사(慶尙監司)를 삼았다가 즉시 판서의 천망(薦望)에 의주(擬注)하여 장차 크게 등용하려 했다. 그런데 허엽은 말년에 매우 창기(娼妓)를 가까이 하였고, 조약(燥藥) 을 복용하다가 병을 얻은 뒤로는 성질이 편벽되고 조급해져서 형벌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 많게 되자 선비와 백성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결국 병으로 인하여 해직되어 오다가 상주(尙州)의 객관(客館)에서 졸했다.
허엽이 이황(李滉)과 더불어 학문을 논의할 적에 고집스럽고 구차한 논란을 많이 하자, 이황이 말하기를 ‘태휘(太輝)가 학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선인이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경훈(經訓)을 독실히 좋아하여 늙도록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이 점에 대해 훌륭하게 여겼다. 동·서의 당이 갈라진 뒤로 허엽은 동인의 종주(宗主)가 되어 의논이 가장 엄격했다. 박순과는 동문 수학한 친한 벗이었는데 만년에는 색목이 달랐기 때문에 공박하는 일에 서슴치 않았으며, 사람들이 묘지(卯地)라고 일컬었는데 묘(卯)는 정동(正東)이 되기 때문이었다. 세 아들인 성(筬)·봉(篈)·균(筠)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허엽의 졸기 #
허엽이 이황(李滉)과 더불어 학문을 논의할 적에 고집스럽고 구차한 논란을 많이 하자, 이황이 말하기를 ‘태휘(太輝)가 학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선인이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경훈(經訓)을 독실히 좋아하여 늙도록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이 점에 대해 훌륭하게 여겼다. 동·서의 당이 갈라진 뒤로 허엽은 동인의 종주(宗主)가 되어 의논이 가장 엄격했다. 박순과는 동문 수학한 친한 벗이었는데 만년에는 색목이 달랐기 때문에 공박하는 일에 서슴치 않았으며, 사람들이 묘지(卯地)라고 일컬었는데 묘(卯)는 정동(正東)이 되기 때문이었다. 세 아들인 성(筬)·봉(篈)·균(筠)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허엽의 졸기 #
4. 평가
허엽은 널리 알고 박식했지만 정작 학문의 깊이는 얕다는 비웃음을 주변 유학자들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아마 서경덕의 학파였던 것이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친절하였고 온화한 인물이었던 퇴계 이황마저도 허엽을 가리켜 "만약 그 친구가 학문을 하지 않았다고 실토한다면 참 거짓없는 사람이라 할텐데''라고 비꼰 적이 있을 정도다.다만 명종 시기 권신 윤원형에게 반항해서 명종의 신임을 받을 정도로 뚝심있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 이이와 정치적 성향이 달랐기에 서로 크게 대립했는데 오죽하면 허엽의 별명이 '묘지(卯地)'[12]였을 정도.
문장 실력은 있었는지 당대에 허균 가족을 가리켜 '허씨 5문장'[13]이라고 불렀다.
5. 사상
윤원형 등 권신들이 힘을 가졌던 명종 시기 선비들의 교육과 인재 양성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근래 사기(士氣)가 좌절되어 사습(士習)이 바르지 못한데, 이는 오로지 기강이 해이하고 염치의 도가 없어진 탓입니다. 지금의 급무(急務)는 사습을 바르게 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 있습니다. 사습이 바르지 못하고 사기가 진작되지 못하는 것은 역시 경학(經學)에 밝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선하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은 고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없어 선악의 구분에 어두워 모르고서 저지르는 것입니다. 위로 조정에서 아래로 여염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학에 힘쓰게 하신다면 사습이 저절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ㅡ 《조선왕조실록》 허엽의 말 #
ㅡ 《조선왕조실록》 허엽의 말 #
6. 작품
6.1. 수결
허엽의 수결.
양천 허씨 승지공파 강릉종중 32세손 사무국장 허세광의 <양천허씨 5문장가의 묵적>에서 나온 초당 허엽의 수결이며, 수결은 허엽의 시에서 나온 수결이다. #
6.2. 시문집
저서로는 <초당집(草堂集)>,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7. 기타
- 강릉의 명물인 초당두부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초당두부의 이름 역시 그의 호를 딴 것이다. 강릉시에 그의 호를 딴 초당동이라는 지역명이 있으며 이 지역에 초당두부 요리 전문점들이 밀집하고 있다. 동네 자체는 이 부분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도심 외곽 지역이다.
- 서예에 재능이 있었다. 이언적의 옥선서원에 현판을 썼으며, 경상도 관찰사 시절 이언적의 묘에 제문을 올렸다. 《명가필보》와 《근묵》에 필적이 있으며, 《허씨 5문장가 묵적》 등 작품에서 필적이 있다.#
- 음률에 조예가 깊었으며 취미로 거문고를 자주 탔다.
8. 대중문화에서
- 대중문화에서는 딸 허난설헌과의 관계를 다룰 때 자주 언급되는데 작품에 따라서 허난설헌이 글을 배우는 것을 혼내면서 반대하는 모습이 묘사되거나 허난설헌을 성심껏 지원하거나 심지어 허난설헌과의 관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모습이 묘사된다.
- 1993년과 1994년 사이 방영된 초롱이의 옛날여행 한국위인전 홍길동전과 허균에서 허난설헌이 글을 배우려 하자 "아녀자가 글을 알아 무엇에 쓴단 말인가"라고 말하면서 딸이 시를 쓰는 것을 반대했다. #
- 만화 포천에서는 이시경의 사형으로 등장한다. 초기에는 이시경과 친밀했으나, 후반부에 들어서는 이시경이 그에게 맡겼던 딸 초희를 돌려주지 않으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 2018년 2월 1일 출판된 만화 who? 한국사 신사임당 허난설헌에서 여자라서 재능을 꽃 피우지 못하는 딸 허난설헌을 안타까워 해서 딸을 성심껏 지원했다.
[1] 인현동1가 31-2번지.[2] 20대손이다.[3] 정종의 9남 석보군의 외고손녀.[4] 석보군 → 성숙(成俶)의 처 이씨 → 성맹온(成孟溫) → 성희(成熹) → 성씨 부인[5] 한숙창(韓叔昌)의 딸이자 임영대군의 외증손녀.[6] 임영대군의 증손녀이므로, 왕실 족보인 선원록 세종 자손록에 이름이 남아 있다. 따라서 한이정 소생 딸들의 이름도 같이 남아 있는 것. 한이정[7]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나와 있다. 허묵석[8]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이 남아 있다. 허대정[9] 우성전(禹性傳)의 처.[출처] 양천 허씨 파계도 #[11] 이이는 율곡집에서 허엽에 대해 '그의 이론은 모순된 점이 많고 문장이나 글의 뜻에 잘 통달되지 못했다'고 했다. 또한 이황은 차라리 학식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개탄하였다. 혹은 또 "차라리 학문을 하지 않았다 하면 거짓없는 사람일텐데" 라고 개탄했다고도 한다.[12] 무덤이 있는 묘지가 아니라 십이지에서 토끼(卯)로서 방위는 정동쪽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십이지 항목 위에 있는 시계 사진에서 토끼가 어디에 있나 확인해 보자. 여기에 빗대 동인의 핵심이었던 허엽을 풍자한 표현이다.[13] 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