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陜川 海印寺 尊像圖. 1458년(세조 4년)에 만들어 합천 해인사 금구전(金口殿)에 봉안했던 세조의 어진. 전 세조대왕 진영(傳 世祖大王 眞影)이라고도 부른다.지금은 해인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3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상세
어진의 크기는 가로 86㎝, 세로 136㎝로 연녹색의 종이 위 아래에 비단을 덧대 채색했다. 어진 속 세조는 곤룡포를 입고 호랑이 가죽을 씌운 의자에 앉아 양손에는 홀(笏)을 쥐고 정면을 향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불교 전각 안에 설치되는 천개(天蓋)가 표현되어 있으며 뒤에는 국화꽃이 그려진 5폭 병풍이 있다. 세조의 양쪽으로 신하 2명이 홀을 들고 있고, 그 아래에는 2명의 동자가 부채를 들고 있다.어진 오른쪽 상단부에는 세로로 世祖大王御眞(세조대왕어진)이라 쓰여있고 그림 맨 아래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天順二年戊寅秋(천순이년무인추)
領中樞府事臣尹師路(영중추부사신윤사로)
丞政院都丞旨臣曺錫文奉命(승정원도승지신조석문봉명)
奉安于海印寺(봉안우해인사)
大韓光武三年己亥十月二十五日(대한광무삼년기해시월이십오일)
重模與舊眞(중모여구진)
同安于祝聖殿(동안우축성전)
1458년(천순 2년 무인년, 세조 4년) 가을, 영중추원부사 윤사로(尹師路)와 승정원 도승지 조석문(曺錫文)이 명을 받들어 해인사에 세조의 초상화를 봉안했다. 1899년(대한제국 광무 3년 기해년) 10월 25일 옛 어진과 같게 다시 그려 축성전에 함께 두었다.
領中樞府事臣尹師路(영중추부사신윤사로)
丞政院都丞旨臣曺錫文奉命(승정원도승지신조석문봉명)
奉安于海印寺(봉안우해인사)
大韓光武三年己亥十月二十五日(대한광무삼년기해시월이십오일)
重模與舊眞(중모여구진)
同安于祝聖殿(동안우축성전)
1458년(천순 2년 무인년, 세조 4년) 가을, 영중추원부사 윤사로(尹師路)와 승정원 도승지 조석문(曺錫文)이 명을 받들어 해인사에 세조의 초상화를 봉안했다. 1899년(대한제국 광무 3년 기해년) 10월 25일 옛 어진과 같게 다시 그려 축성전에 함께 두었다.
조선시대에 그려졌던 다른 왕들의 어진들과는 달리 불교 전각 안에 설치되는 천개(天蓋) 등이 표현되어 있는 등 불교적인 도상을 근거로 제작된 유일한 왕의 어진으로 다른 작품들과 비견되는 그 특이성 때문에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600여년전에 신하들이 직접 왕을 보고 그린 작품으로, 그 출처와 제작연대, 제작인 및 제작방식 등이 모두 확실하고 무엇보다 현재까지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사료적 가치와 미술사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고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2016년에 발견된 김은호 화백의 세조 공식 어진 모사본과 둥그런 얼굴형, 숱이 적은 수염 등이 일치하는 것이 확인되었다.[1] 또한 세조 재위 시기인 조선초 1400년대 당시 합천 해인사의 국가적 위치와 불교문화성황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세조가 1457년에 우리나라의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과거 자신의 잘못과 업장을 세상에 밝히고 깊이 참회함을 표방하며, 당시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팔만대장경 전문을 총 50부 간행하여 전국의 명산대찰 및 여러 불교인들에게 분장하여 고려대장경의 글귀를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하는 도서 사업을 추진하였다.
《대장경(大藏經)》 50벌을 오는 봄철 2월부터 시작하여 해인사(海印寺)에서 모인(摹印) 하여 모름지기 6월 전에 일을 마치게 하라. 지금 경차관(敬差官) 윤찬(尹贊)·정은(鄭垠)을 보내어 포치(布置)하게 하니, 경(卿)이 뜻을 기울여 시행하도록 하라.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1457년) 6월 26일 무오 3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1457년) 6월 26일 무오 3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당시로서는 굉장히 큰 일이었기에 전국에서 물자를 모아 합천 해인사에 보내기로 했는데 그 양이 다음과 같았다.
《대장경(大藏經)》 50벌을 찍어 내는 데 들어갈 물자는, 충청도에서 종이가 5만 1천 1백 26권이고, 먹(墨)이 8백 75정(丁)이고 황랍(黃蠟)이 60근(觔)이요, 전라도에서 종이가 9만 9천 4권이고, 먹이 1천 7백 50정이고 황랍이 1백 25근이요, 경상도에서 종이가 9만 9천 4권이고 먹이 1천 7백 50정이고 황랍이 70근이고 호마유(胡麻油)가 1백 두(斗)이요, 강원도에서 종이가 4만 5천 1백 26권이고 먹이 8백 75정이고 황랍이 1백 25근이요, 황해도에서 종이가 만1천 1백 26권이고 먹이 8백 75정이고 황랍이 60근인데, 모두 관(官)에서 스스로 준비하여 해인사(海印寺)에 보내라. 만약 백성들의 닥나무(楮)를 거둔 것이 비록 1냥(兩)이라 하더라도 경들은 마땅히 큰 죄를 받을 것이다.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1457년) 6월 26일 무오 4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1457년) 6월 26일 무오 4조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세조는 물자를 보내 대장경판을 인경(印經)하고 장경판전을 크게 증축하는 등 불사(佛事)를 일으켰기에 해인사와는 아주 각별한 관계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해인사에 세조의 어진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3. 외부 링크
- 월간 해인 : 수다라장에 봉안된 세조 영정
- 두산백과 : 합천 해인사 존상도(전 세조대왕 진영)
- 부흥 : 세조대왕 어진(진영)
- 한국어 위키백과 : 합천 해인사 존상도
- 문화재청 홈페이지 : 합천해인사존상도(전세조대왕진영) (陜川海印寺尊像圖(傳世祖大王眞影))
[1] 정작 어진의 모사본에 해당하는 선원보감이나 열성어진은 원본과 아예 딴 판으로 그려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