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15:24:21

춘추



1. 봄과 가을2. 어른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호칭3. 노나라의 역사서4. 공자노나라의 역사서를 편집하여 저술한 역사 비평 서적

1. 봄과 가을

말 그대로 가을. 혹은 여기서 더 나아가 '1년', 그리고 '세월'이라는 뜻이 나왔으며, 어른(보통 중년층 이상)의 나이를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봄과 가을은 계절이 바뀌는 시기이다. 환절기라서 계절이 바뀌면 사람들이 확실이 느낄정도로 기후도 바뀌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비유하는 단어가 됐다.

율곡 이이는 여름은 봄 기운에 속하고, 겨울은 가을 기운에 속하니, 하동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춘추라고 말하는 것으로 포함된다고 풀이하였다. 묵자는 "시세는 춘추하동"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춘하추동이 아닌 춘추하동으로 절기를 표현했음을 보여준다. 한때, 갑골문에서 계절을 나타내는 문자는 '춘'과 '추' 뿐이며, '하'와 '동'에 해당되는 글자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잘못된 이야기가 퍼졌지만, 현재는 '하'와 '동'의 갑골문 원형이 발굴된 상태로 해당 이야기는 잘못된 것으로 확정되었다. 다만 상나라 시기의 하와 동은 지금의 여름과 겨울의 의미를 가진 글자가 아니었고, 주나라 때 뜻이 추가된 것으로 보이므로 상나라 초기 한정으로 춘과 추만 계절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맞다. 자세한 것은 (여름 하) 와 (겨울 동) 문서 참고.

신라 29대 임금인 태종 무열왕의 휘이기도 하다. 한자도 똑같다.

2. 어른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호칭

1번 항목의 확장된 의미에서 유래한 표현. '연세(年歲)'와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다. 다만 일상적으로는 '연세'가 훨씬 많이 쓰이며 '춘추'는 약간 예스러운 표현처럼 여겨진다. 따라서 '춘추'라 하면 '연세'라 했을 때보다 나이가 상당히 지긋하다는 이미지를 주며, 따라서 다른 사람을 나이가 든 것을 강조하여 놀릴 때 흔히 쓰는 '님 연세가?'를 업그레이드해서 '님 춘추가?'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청년층에게는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고, 보통 중년층 이상한테 사용된다.

3.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시대 노나라에서 저술되었던 역사서. 공자가 편집한 춘추의 원본이 되었다.

흔히 공자가 편집한 춘추를 역사서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엄밀히 말해 공자 편집본은 역사의 일부를 뽑아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자 한 목적이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 비평서이다. 정확한 의미로 '역사서'로서의 춘추는 이 노나라의 원본에 해당하는 것이나, 현재는 유실되어 꿩 대신 닭 격으로 공자 편집본이 이를 대체하였으므로 둘 사이의 엄밀한 구분이 힘든 상황이기는 하다.

진(晉)나라의 『(乘)』, 초나라의 『도올(檮杌)』 등과 비슷하게, 주나라의 일원적 지배가 무너지면서 각국이 역사서를 편찬하게 된 상황을 반영하는 사서이다. 노나라 이외에도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에서 독자적으로 사관을 두고 역사서를 편찬했으나,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한 후 각국의 역사서를 모두 분서해 지금은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한다.

4. 공자노나라의 역사서를 편집하여 저술한 역사 비평 서적

유교 십삼경
삼경 삼례 삼전 기타
시경서경역경주례의례예기춘추좌씨전춘추곡량전춘추공양전논어맹자이아효경




영어: Spring and Autumn Annals, Chunqiu

유교의 경전인 사서오경 중 하나로 공자가 편집하여 저술한 것이 확실한 서적이다. 일단 사서삼경에는 포함되지 않고, 사서오경이 되면 예기와 함께 들어간다. 그리고 사실상 이에 포함된 거의 유일무이한 이유는 공자가 지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그 연원이 가장 오래된 중국의 편년체 역사 관련 기술서이며, 이 춘추에서 춘추시대의 명칭이 생겨났다. 또한 인경(麟經)으로도 일컬어지는데 애공(哀公) 14년 봄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을 잡았다는 기록에서 비롯되었다.[1][2]

본래는 노나라의 사관이 기록한 춘추를 공자임의로 편집 작업을 한 것이다. 본디 이 춘추가 도덕적인 면에서 엄격한 점을 따 저술되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 '춘추필법'이지만, 신채호 등이 임의성에 대해 강한 공격을 한 것 이후 점차 인식이 악화되어 요새는 역사왜곡이라는 변질된 의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 인물인 신채호와 달리, 오늘날에는 사람이 역사를 바라보는 이상 어찌 됐건 역사가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여기므로 어느 정도 감안될 수도 있다.

다만 현대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염두에 두고서도 춘추의 역사 서술은 사가의 자의성이 지나치게 뚜렷한 것은 사실이다. 저자 공자의 언급을 감안해 볼 때, 춘추는 사실 역사서라기보다는 역사비평 내지는 정치비평에 가깝다. 춘추필법의 방식은 사실성의 의미를 엄밀히 따지면 역사왜곡이 맞다.[3]

역사왜곡을 부르는 춘추필법의 실례를 나열해 보자면
  • 부도덕하거나 예에 벗어난 사건에 관련해서는 벼슬이 높은 사람도 깎아서 표현했다.[4]
  • 당시의 예에 벗어나면 기록했다. 자주 보이는 XX년 겨울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그러하다. 당시 겨울에 성을 쌓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 짓으로 여겼기 때문에 기록하였다. 즉, 미미한 단어 사용으로 선악을 비평한 것이다.
  • 심지어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고 평가하면 국왕이 즉위했다는 언급도 삭제해버렸다.
  • 다른 나라와 싸울 때도 대의명분이 있는 전쟁과 아닌 전쟁을 구별하여 달리 표기하였다. 왕위에 오를 때도 정통성이 있는 왕과 아닌 왕을 구별하였다.[5]

한문의 경우에는 한 글자의 소실이나 변경만으로 문장의 의미가 180°로 극히 뒤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의 타격이 더욱 심하고, 고대사 자료 한 줄 한 줄이 귀한 현대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냥 내용을 덜었다는 것부터 아쉽다. 결국 공자도 예기에서 "춘추의 문제점은 난잡함이다. 내용을 더하고 사건을 비교하는 데 혼란을 겪지 않으면 춘추에 능통한 사람이다.(《春秋》之失, 亂. 屬辭比事, 而不亂, 則深於《春秋》者也)"이라고 스스로 춘추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춘추만 읽으면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춘추를 읽음이 독자에게 좋은 경험이 되려면 이미 사실관계에 능통해서 춘추의 필법에 혼란을 느끼지 않아야 하거나, 혹은 춘추의 필법 자체, 그러니까 공자의 선악과 미추를 판단하는 비평과 판단에 감명을 받아야 한다.

노나라의 춘추를 먼저 읽은 뒤에 비평서에 가까운 공자의 춘추를 접해야 이치에 맞을 터이다. 그런데 원본 격인 노나라의 춘추가 유실되어 공자의 춘추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현대의 독자들이 공자의 춘추를 읽으며 어려움 혹은 불쾌함을 느낌도 당연하다. 역사서가 아닌 책을 역사서로 읽으려 하니 책의 저술의도와 독자들의 목적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맹자는 춘추가 지어지자 간신적자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평했으니, 맹자가 공자의 뒤를 따라 그를 이상화한 것을 감안해도 공자가 춘추를 쓴 나름의 목적은 이루었다. 또한 춘추가 후대의 사관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엄연한 사실이다.

주석서로 춘추좌씨전,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이 있는데, 이를 두고 춘추 3전이라 하였다. 송대에는 호안국이 춘추의 경문에 새로 주석한 춘추호씨전을 써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외에 춘추 해설서로서 춘추번로와 국어[6]라는 것도 있다.

일각에서는 춘추라는 사서가 있다면 짝으로 하동(夏冬)이 있으리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춘추가 노나라 국내사라면 하동은 국외사를 다루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있다고 하나 근거가 크지 않다. 춘추란 단어는 한 해(年)를 가리키는 일종의 비유적 용어이고, 고대 중국에서 계절을 춘/추, 봄과 여름 두 가지로 나누었던 흔적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사통에서는 춘추를 두고 '밖으로는 현자를 중심으로 안으로는 본국을 중심으로 기록하면서 좋지 않은 일은 사건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모두 감추었고, 이같은 필법은 주공의 가르침이며, 이런 필법은 춘추뿐만 아니라 육경도 같았다.'고 평하며 춘추에 대한 의혹 12가지, 헛된 미화 5가지를 제시했다.

현재 국내에서 성균관 부속 선비학당에서 교양과목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림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가르친다.

하여간 이후 동양사에 큰 영향을 끼친 역사서라서인지, 후대에 'XX춘추'라는 이름을 단 책이 여럿 나오기도 했다. 여씨춘추, 헌제춘추, 한진춘추 등.

신라의 제29대 국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이름은 여기에서 따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긴다. 당시 신라 귀족의 이름은 고대 한국 고유어나 불교적 개념에서 따 온 경우가 많은데, 김춘추는 유학적 이름이라 상당히 이질적이다. 김춘추의 아들 법민(法敏), 인문(仁問), 문왕(文王)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평생 사용할 것을 전제로 짓는 이름은 어떤 지향성을 띰이 일반적이니, 김춘추 본인이나 길게는 이름을 지었을 아버지 김용춘[7]부터 일가 전체가 기존 불교를 대신할 유교적 사회 질서와 개혁에 관심이 많은 성향이었다고 해석하고, 훗날 태종 무열왕이 비담의 난 평정 이후 실권을 쥐면서부터 있었던 당나라 제도 도입과 각종 개혁도 그 영향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유교적인 이름을 지은 김유신[8]과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성향이 비슷했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반대로 김춘추와 적대했던 비담의 이름은 대표적인 불교적 작명이도 하다.


[1] 十有四年, 春, 西狩獲麟. (14년 봄이라. 서쪽에서 사냥하다 기린을 잡았다.)[2] 기린은 어진 짐승으로 여겨졌는데 생물을 죽이지 않고 심지어 풀도 밟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기린이 나타나면 당시 국가가 잘 다스려졌다고 길한 징조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노애공 때에는 노나라가 쇠퇴했던 시기였으므로 공자는 이런 모순된 상황을 보고 탄식했다.[3] 다만 사서들이 춘추필법을 따랐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아래 언급되는 춘추좌씨전은 순수하게 춘추의 영향으로 경전이 됐지만 역사기록으로서는 훨씬 높이 평가받아서 사마천의 사기 등에 영향을 줬다.[4] 본명을 그대로 쓰는데 당시에는 이것이 모욕적이었다. 예를 들면 춘추의 은공 4년조에는 "戊申衛州吁弑其君完(무신일에 위나라 주우가 그 임금 완{위환공}을 죽였다)"라고 하여 임금을 죽인 사람의 이름을 밝혔지만, 다른 곳에서는 "九月衛人殺州吁于濮(9월에 위나라 사람이 주우를 복에서 죽였다)"라고 하여 임금 주우를 죽인 석작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주우는 정식으로 즉위한 환공을 죽인 반면, 석작은 임금을 죽이고 임금이 된 찬탈자 주우를 죽였기 때문이다.[5] 당대의 제후들이 왕공을 참칭할 때도 대부분 원래의 직위로 적고 있는데, 일부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공국인 노나라, 송나라의 수장을 칭할 때는 노공, 송공, 후국인 진나라는 진후, 백국인 정나라는 정백, 자국인 초나라는 초자로 부름이 공자가 강조하는 의례라는 개념에 들어맞는 서술이 된다. 그런데 기(杞)나라의 경우는 분명히 후국이었음에도 기백으로 부르다가 나중에는 예를 잃고 동이의 예를 따른다는 이유로 기자(杞子)로 깎아버렸다.[6] 다만 좌구명이 썼다는 국어가 춘추의 해설서가 맞는지는 논란이 많다.[7] 용춘이란 이름은 불교적이다. 아버지 진지왕이 지은 이름일 테니, 진지왕이 폐위당하고 왕위에서 밀려나 비주류가 되면서 성향이 바뀌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8] 당대의 현자로 이름 높았던 북주 사람 유신(庾信)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추정에 불과한 김춘추와 달리 사서에서 그 의미를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