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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중국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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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
본명은 공급(孔伋). 자(字)가 자사(子思)이다. 3세에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인 공자가 양육하였으나, 공자 역시 기원전 479년에 사망하였다. 공리에게는 두 부인이 있었고, 출처한 전처 외에 후처에게서 자사를 보았으나, 후처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예기》의 단궁편에 “서씨(庶氏)의 어머니”라고 언급되어, 서씨 집안으로 재혼하고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있었던 것 정도만이 확인된다.
장성한 뒤에는 공자의 애제자 중 생존자였던 증자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고, 학맥을 계승하였다. 뒤에 그의 제자의 제자 중의 한 사람에게서 나온 문하생이 맹자로, 이로부터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유교의 정통 학파가 구성되었다.
그 유명한 공자의 손자로,[1] 사서의 하나인 중용의 저자. 공자 사후 공자의 초기 제자들이 대부분 죽거나 곡부를 떠난 뒤[2], 공자 학단의 후신을 이끌던 증자에게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 문종 3년[3]에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사당(孔門祠堂)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다. 기(沂)라고 함은 할아버지 공자와 자사 본인의 고향인 노(魯)나라 남쪽에 있는 강 이름. 그 당시에는 온천이 있었다고 한다. 국(國)이라 함은 말 그대로 '~나라'를 뜻한다. 술(述)이라 함은 '전술(傳述)하다'의 의미로, 자사가 그 누구보다 왕성히 집필 활동을 하여 『중용(中庸)』, 『오행(五行)』 등의 서책을 남겨 유학의 도를 보전했음을 예찬하여 바친 글자이다.[4] 또한 술이라는 글자 자체에 '계승하다'라는 의미도 담겨 있으니, 공문도통(孔門道通)의 중맥(中脈)으로 꼽히는 자사에게 여러 모로 적절하다. 성(聖)이라 함은 앞의 '술'을 받아 '~하신 성인(聖人)'의 의미로 연결되어 '도를 전술하신 성인', 곧 '술성(述聖)'을 자사의 고유 칭호로 만든 것이다. 공(公)이라 함은 쉽게 말해 공작(公爵). 앞에서 굳이 역사상 있지도 않았던 가공의 나라 기나라(沂國)를 만들어 붙인 것은 바로, 이 '공작'이 제후의 작위이므로 반드시 거할 나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사는 예의상 가공 국가의 영주로 봉해진 셈.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에 따르면 맹자는 이 자사 계열에서 배운 것으로 나온다. 단, 맹자 본인은 그저 공자를 사숙했다고만 밝힌다. 즉, 홀로 책을 보고 공자의 가르침을 배웠다는 소리. 맹자 본인이 자신의 '사숙'에 관해 말하기를 "나는 공자의 학도가 될 기회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여러 사람을 통해 사숙하였다."하였다. 이는 단순히 사실의 회술이요, 성인을 면접치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의 표출일 뿐이다. 물론 맹자가 스스로를 꽤나 독보적인 존재로 간주했음은 《맹자》 전반에서 폭넓게 드러나고, 《한비자》에서도 자사의 유가와 맹자의 유가를 따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맹자가 증자ㅡ자사학파의 색채를 의도적으로 탈피하고 신학파의 구축을 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맹자는 증자와 자사의 고사 및 어록을 빈번히 인용하고, 이들로써 자신을 변호하기도, 자신이 역으로 이들을 변호하고 그 심중에 대한 해석을 내놓기도 하는 등 증자, 자사와의 밀접성을 크게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마을에 도적떼가 쳐들어 올 기미가 보이자 관리인한테는 집 지키라 하고 자기는 냅다 도망친 증자를 변호한 것(...). 그건 그렇고, 하여튼, 맹자가 활동하던 전국시대 중기는 공자, 자하, 자장, 자유, 증자, 자사 등 명망 있는 선비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별 볼 일 없는 대다수의 선비들은 정계 입문에 실패해 주간 상조업과 야간 도굴(...)로써 밥벌이에나 천착하던, 유가의 암흑기였다. 때문에 유학 사상계의 발전은 정체되었고, 유가는 타 학파의 성장과 도전에 비틀댈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때에 태어나 유가의 중흥을 꾀하고자 했던 맹자는 당연히 원시 유학 사상의 이론적 체계화와 정당화를 도모하였고, 이것이 자연 그의 학문적 독보성으로 표출되었으며, 그 스스로 그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사실 비단 맹자 뿐 아니라 맹자가 '호걸스러운 선비'라 칭송한, 맹자보다 한 세대쯤 위인 것으로 보이는 초나라 출신의 진량陳良 등 맹자 전후로 그러한 작업을 전개한 선비들이 제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 진량의 학파 또한 '중량仲良의 유가'로 《한비자》에 소개된다. 아마 초나라 일대의 유림이었을 것이다.). 그런 뜻있는 선비들의 결정판이 바로 순자였음은 공공연한 사실. 맹자는 엄연히 학문적 독보성을 띠었으나 이는 그의 목표나 의도가 아니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결과였다.
자사의 저서로 유명한 중용은 사서의 하나로 명성이 높지만, 그 심오함과 형이상학적인 내용에 실은 자사의 저서가 아니라 후대의 저작이 아닐까 추정되었지만[5], 1900년대에 자사의 저서로 보이는 죽간이 발견되면서 중용은 자사의 저작이라는 게 거의 확실해졌다. 다만 드문드문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추측되는 내용들이 있다. 대표적인 구절이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이다. <맹자>에는 이와 거의 같은 "誠者, 天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라는 문장이 나오지만, <중용>의 것이 더 세련된 표현이다. 후세에 나온 맹자가 스승의 구절을 오독할 이유는 없으니, <맹자>의 텍스트가 먼저 나왔고 후세 <중용>의 구절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구절의 경우 한나라 대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맹자는 자사를 직접 보지 못하고(학문적 유사성으로 둘은 자주 엮이나, 시대를 감안하면 자사와 맹자의 생몰년도는 겹칠 수 없다) 다만 '(유학을 배운) 여러 사람'을 통해 사숙하였으니, 자사의 말의 전승이 티미하게 이루어져 생긴 일일 수도 있다.
또한, <맹자>의 구절은 오히려 <중용>의 구절의 변용일 수도 있다. 문체적으로 <중용>의 구절이 더 세련됐다고는 하나, 뜻의 절실함을 따져 보면 <맹자>의 구절이 더 높게 칠 만 하다. 思라는 글자는 단순히 '생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가슴에 사무쳐 괴로이 생각하는 모양새'가 바로 思인데,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의 '사'가 곧 이 의미이다. '여인이 밤잠을 설쳐가며 멀리 계신 고운 임을 그리는 마음씨', 그것이 思의 전형인 것. <맹자>의 구절은 바로 그러한 마음씨로 誠을 갈구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사람의 감성을 분발시키는 데 중점을 두는 <맹자>의 성격을 감안할 때, 맹자가 의도적으로 <중용>의 구절을 변용시킨 것으로도 이해할 여지가 있다.청나라의 뒤를 이은 중화민국이 유교의 대표적인 성현인 공자, 맹자, 안회, 증자, 자사의 제사를 받들던 연성공, 한림원 오경박사 등의 작위를 각각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아성봉사관, 복성봉사관, 종성봉사관, 술성봉사관(述聖奉祀官)으로 개칭했고, 자사의 제사를 받드는 술성봉사관은 32대 연성공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었던 공덕성의 차남 공유녕(孔維寧)이 맡았다가 2010년 6월 10일 세상을 떠나면서 딸만 둘을 남겼는지라 대가 끊겨서 폐지되었다. 사실 모든 연성공이 자사의 직계 후손이므로, 이전부터 술성봉사관은 연성공의 차남 이하의 아들이 맡았고, 현대에 와서는 따로 제사를 지내기도 애매하다는 판단하에 내려진 결정이다.
2. 자사(회사)
자신의 회사. 혹은 자신이 속해있는 회사.[1] 아버지는 공리(孔鯉), 자는 백어(伯魚)이다. 백어는 《논어》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이른 나이에 아버지인 공자보다 먼저 죽었고, 그의 죽음을 시작으로 안회, 자로까지 죽음을 맞이하면서 공자는 크게 상심한다.[2] 공자 초기 제자들은 대체로 공자가 죽기 전에 죽거나 열국 중의 하나에 등용되었다. 공자의 수제자들인 안회, 자로, 자공 중에서도 공자가 죽을 때까지 살아있던 건 자공 하나 뿐이고, 그도 6년상 이후 곡부를 떠났을 것으로 보인다.[3] 지순(至順)원년, 서기 1330년[4] 그런데 정작 『중용』 빼곤 일찍이 거의 망실되었고, 몇몇이 전국시대 고분묘에서 최근에야 발굴되었다.[5] 공자의 실질적인 가르침이 중용의 개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내용으로 발전하기엔 50~100년은 너무 짧은 게 아니냐는 추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