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05 21:50:25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문화대혁명의 전개 순서
5.16 사건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경험 대교류 운동
중앙문혁소조 설립 류사오치 실각 홍위병의 준동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류사오치의 항복3.2. 홍위병의 폭주3.3. 사령부를 포격하라3.4. 대학살3.5. 결과
4. 참고문헌5. 관련문서

1. 개요

1966년 8월, 문화대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대학살극. 실제 폭풍이 불어온 자연재해가 아니라 홍위병들이 저지른 대규모 반달리즘, 학살행위를 뜻한다.

2. 배경

해서파관 사건으로 오인소조가 해체되고 천보다, 장칭, 야오원위안, 장춘차오가 주도하는 중앙문화혁명소조가 성립되었다. 문화혁명소조는 6월 1일 선언을 통해 "괴물과 악마들을 척결하라"고 선동했고 베이징대학 서기 녜위안쯔가 베이징대학이 주자파들에게 점령당했다는 대자보를 내걸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사회비판의 목소리를 내었다가 류사오치가 파견한 공작조의 핍박을 받았던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우후죽순처럼 홍위병을 결성, 전국 각지에서 대자보를 내걸고 교수와 교사들을 타도하기 시작했다. 대자보로 시작된 '혁명적 조치'는 곧 조리돌림, 구타, 머리 깎이기, 바보모자 씌우기, 제트기 형벌 등의 물리적인 제재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전국 각지에서 수천명의 교사들이 학생들의 공격으로 자살하거나 살해되었다.

그러던 중 마오쩌둥이 1966년 7월 16일 유명한 장강 도하 수영을 감행하여 제국주의자와 수정주의자들의 검은 폭풍우를 쓸어내라고 지시했고 콰이다푸를 비롯, 그간 류사오치 정권의 핍박을 받은 학생들을 위문하며 류사오치를 맹비난했다. 결국 공작조가 해체되었고 류사오치는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

3. 전개

3.1. 류사오치의 항복

1966년 7월 24일 마오쩌둥이 조어대 국빈관 1층에서 잠옷 차림으로 당 지도층 인사들을 맞이했다. 마오쩌둥은 지도부가 "대중을 두려워하고 학생들을 탄압한다."고 크게 꾸짖었고 공작대를 해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공작대가 해체되었고 1966년 7월 29일 인민 대회당에서 류사오치의 자아비판이 거행되었다. 대회당에는 1만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운집했고 칭화대학의 학생 지도자 콰이다푸가 특별 제공된 자동차를 타고 대회장에 입장했다. 이어 베이징대학 혁명위원회 회장으로 추대된 녜위안쯔도 입장했다. 마오쩌둥은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무대 뒤편의 커튼 뒤에 앉아 있었다.

단상 위에 류사오치덩샤오핑이 나타났다. 류사오치는 자신들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늙은 혁명가들이었으며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당시에 알지 못했다고 자아비판했다. 그 말을 들은 마오쩌둥은 싸늘하게 비웃었다.
"늙은 혁명가라고? 그보다는 늙은 반동분자라는 말이 더 가깝겠지."

대회 막바지에 커튼이 갈라지고 마오쩌둥이 단상 위에 나타났다. 흥분한 학생들이 함성을 지르며 마오 주석 만세를 연호했고 마오쩌둥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몰랐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대단히 당황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거느리고 객석 전체에서 쏟아지는 숭배를 받으며 퇴장했다.

3.2. 홍위병의 폭주

"우리는 사람을 때리는 행위를 옹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령 사람을 때린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에게 맞으면 맞을 만하기 때문이다."
1966년 7월 28일 장칭의 교시

1966년 8월 1일, 마오쩌둥은 칭화대학 부설 중학교의 학생들에게 친전을 보내면서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뜻의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문구를 남겼다. 마오쩌둥의 지원사격을 받은 학생들은 곳곳에서 <홍기>, <동풍>따위의 이름을 지어 홍위병을 조직했다. 8월 4일, 칭화대학교 부설 중학교 학생들은 교장과 교감을 흑방의 우두머리로 몰아 조리돌림하여 곤봉과 채찍, 허리띠로 구타했다. 이어 베이징 사범 대학 교감 볜중윈이 학생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하고 조리돌림당하고 강제로 흙을 먹는 등의 고문을 당했다. 8월 5일 오후, 홍위병들이 볜중윈을 포함한 학교 관리자 5명을 억류하여 잉크를 뿌려 모욕을 준 다음에 대못이 박힌 곤봉으로 마구 폭행했다. 볜중윈이 몇시간에 걸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자 홍위병들은 볜중윈을 쓰레기차에 버렸다. 2시간 후에 볜중윈은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이미 목숨이 끊어진 후였다.

8월 13일, 베이징 공인 체육장에서 수만명의 홍위병들이 운집한 가운데 군중집회가 열렸다. 홍위병들은 5명의 민간인을 체포하여 홍위병을 위협한 죄로 구타하고 채찍으로 때려 고문했다. 군중집회에는 저우언라이와 왕런중을 비롯한 고위 정치가들도 참여했으나 홍위병들을 막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어 베이징 제101중학교에서 홍위병들이 10여명의 교사들을 체포, 달군 석탄재 위를 기어 다니게 했고 베이징 6중학교에서는 홍위병들이 취조실을 설치, 닥치는 대로 사람을 고문하여 인간의 피를 담은 후에 <적색 테러 만세!>라는 구호를 벽에 썼다.

3.3. 사령부를 포격하라

이 와중에 마오쩌둥은 총회를 소집, 류사오치가 독재를 휘두르고 부르주아 계급과 제휴했다고 맹비난했다. 원로들은 마오쩌둥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에 마오쩌둥은 8월 6일 린뱌오를 호출했다. 린뱌오는 류사오치와 원로들을 맹비난하며 "폭풍을 만들고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서 세상을 뒤집어 엎자."라고 외쳤다. 총회 마지막 날의 비밀투표에서 중앙위원회는 11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구성, 류사오치를 실각시키고 린뱌오를 새로운 2인자로 선출했다. 8월 8일 총회는 자본주의 노선을 선택한 당내 권력자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했다. 소위 <16조>라 불리는 총회의 성명이 발표되기 3일 전인 8월 5일, 마오쩌둥이 이름도 유명한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대자보를 작성했다. 문제의 대자보는 1년 이후에야 공개되었지만 그 내용은 곧바로 새어나갔다.

8월 18일, 100만명의 홍위병들이 천안문 광장에 운집하였다. 홍위병들에게는 붉은 완장이 지급되었고 이들은 자정부터 마오쩌둥을 기다렸다. 동이 틀 무렵 마오쩌둥이 나타나 잠시 홍위병들과 악수를 나누었고 린뱌오가 "착취 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도하라!"라고 연설했다. 이어 베이징 사범대학교 학생 쑹빈빈이 마오쩌둥에게 직접 홍위병 완장을 채워주는 영광을 누렸다. 마오쩌둥은 쑹빈빈에게 이름의 뜻을 물었고 이름이 '점잖다'란 뜻이라는 대답을 듣자 '혁명은 점잖게 하면 안된다. 무력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지시, 쑹빈빈은 즉각 쑹야오우(무력을 빛낸다는 뜻)로 개명했다.[1] 中 100만 홍위병의 상징… 쑹빈빈, 48년만에 참회

마오쩌둥을 직접 보게 된 홍위병들은 이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베이징 3여자 중학교에서 홍위병들이 교장을 때려죽였고 학생 주임을 고문하여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베이징 사범대학 산하 중학교에서 교사들이 끓는 물을 끼얹는 고문을 당했고 베이징 교육대학 산하 중학교에서도 홍위병들이 교사를 때려죽였다. 홍위병들은 교사들을 붙잡아 못과 배설물을 삼키게 하고 서로 따귀를 때리게 강요했다. 비단 교사들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의 눈에 거슬렸던 지식인들도 타도 대상이 되었다. 중국 국가의 가사를 작성했었던 희곡작가 톈한이 길거리로 끌려나와 조리돌림 당한 후 린치되었고[2] <낙타상자>의 저자 라오서도 베이징 8중학교[3]에서 몰려나온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과 고문을 당한 후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다음날 연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3.4. 대학살

"베이징이 부랑자 세상이 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다! 좋은 사람이 항상 다수다. 나쁜 사람은 항상 소수다. 어떻게 부랑자 세상이 된다고 하는가?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들이 몇개월 동안 난리를 피워도 간섭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견결하게 다수가 좋은 사람을 믿어야 한다. 나쁜 사람들은 100분의 몇 밖에 안된다.
1966년 8월 20일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린뱌오의 발언.

이어 지역 주민 자치조직인 거민 위원회가 홍위병들의 사냥도구로 전락, 홍위병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일반인들을 닥치는대로 고발했다. 주로 출신성분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고발된 이들은 홍위병들의 고문을 당해 일가가 몰살당하는 일이 흔했고 도시 전체가 조리돌림과 구타로 가득찼다. 베이징 전체에서 7만 7천명이 불순분자들로 지목되어 베이징시에서 추방당했고 한 사람을 죽이고 나면 그 가족들이 보복하는 일을 예방하는 이유로 나머지 가족들을 죽이는 일이 흔했다. 프랑크 디쾨터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어떤 사람은 곤봉에 맞아 죽었고 어떤 사람은 작두칼에 베이거나 철사 줄에 목이 졸려 죽었다. 전기에 감전되어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거꾸로 매달린 채 채찍질을 당했다. 여덟살 짜리 한 소녀와 그녀의 할머니는 생매장을 당했다.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살인자들은 나중에라도 복수할 수 있는 사람을 남겨 놓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자식을 포함한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도 허다했다. 대부분의 시체는 사용되지 않는 우물이나 공동묘지에 버러졌다. 어떤 곳에서는 악취가 너무 심해지자 주민들이 시체를 파내서 연못에 버리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146페이지

하지만 공권력은 이를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홍위병의 학살을 도와주었다. 일부 인민해방군 장교들은 살인사건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며 개입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모두 묵살되었다. 이는 공안부장 셰푸즈의 개입 때문이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우리는 홍위병을 지지해야 한다. 홍위병과 대화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라. 그들에게 명령하지 말라. 그들에게 악한 사람을 때리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들이 흥분해서 누군가를 때려죽인다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8월 말까지 매일 100명이 살해되었고 8월 26일 하루에만 126명, 8월 27일에 228명, 8월 28일에 184명, 8월 29일에 200명이 살해되어 절정을 이루었다. 결국 9월 말까지 1770명이 살해되었다.

8월 24일에는 만력제의 시신이 보존된 정릉 박물관을 흥분한 홍위병들이 공격해 만력제의 시신을 비투회에 끌고 나와 조리돌린 후 투석형으로 박살내서 불태우고 고고학 자료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희대의 반달리즘을 저질렀다.

3.5. 결과

베이징을 피바다로 만든 마오쩌둥은 이어 전국 각지의 홍위병들에게 전국적인 경험 교류를 촉구했다. 이로 인하여 경험 대교류 운동이 벌어져서 1200만명의 홍위병들이 베이징으로 상경했는데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기차 태워주는 엄청난 비용은 모두 마오쩌둥이 국고로 대주었다.

결국, 홍위병들의 준동으로 인해 치안을 비롯한 모든 국가행정이 완전히 마비되기 시작했고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반달리즘이자 정치적 탄압인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 참고문헌

  • 로더릭 맥파커 외, 중국 현대정치사 : 건국에서 세계화의 수용까지 1949~2009(서울: 푸른길, 2012).
  • 로스 테릴, 마오쩌둥(서울: 이룸, 2008).
  • 로스 테릴, 장칭 : 정치적 마녀의 초상(서울: 교양인, 2012).
  • 백승욱,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와 '조반'의 시대(서울: 그린비, 2012).
  • 산케이신문 특별취재반, 모택동 비록 上(서울: 문학사상사, 2001).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서울: 민음사, 2017).
  • 장융, 존 핼리데이, 마오 :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下(서울: 까치글방, 2008).
  •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 공산당 역사 2권 하(서울: 서교출판사, 2014).
  • 프랑크 디쾨터,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976(파주: 열린책들, 2017).
  • 현이섭, 중국지 : 마오쩌둥과 중국 혁명 평석 下, 대란대치편(서울: 인물과사상사, 2017).

5. 관련문서


[1] 정작 쑹빈빈은 나중에 문혁의 광기에서 비교적 빨리 깨어났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등 정상적인 코스를 밟았다. 그 사이 정신 못차리던 다른 홍위병들은 상산하향 운동으로 농촌으로 내려가 인생이 사그라졌다.[2] 이때문에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국가를 연주할 때 가사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3] 이 학교는 현재도 푸싱먼역 근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