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04:26:46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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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中国国家足球队[1]
<colbgcolor=#DF0101><colcolor=#FF0> FIFA 코드 CHN
축구 협회 중화인민공화국 축구 협회 (CFA)
대륙 연맹 아시아 축구 연맹 (AFC)
지역 연맹 동아시아 축구 연맹 (EAFF)
홈구장 베이징국가체육장 (80,000석)
별명 龙之队 (용의 팀), 万里长城 (만리장성)
감독
[[크로아티아|]][[틀:국기|]][[틀:국기|]] 브란코 이반코비치 (Branko Ivanković)
주장
C
왕다레이 (Wang Dalei)
FIFA 랭킹 90위 (2024년 11월 28일 기준 / #)
Elo 랭킹 102위 (2024년 11월 20일 기준[2] / #)
공식 웹사이트 파일: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 파일:시나 웨이보 아이콘.svg
{{{#!wiki style="color: #FFF; margin: 5px -10px -5px"
{{{#FF0 {{{#!folding [ 대표팀 기록 보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color=#FF0><colbgcolor=#DF0101> A매치 최다 출전 리웨이펑 (Lǐ Wěifēng)
- 112경기 / 14골
A매치 최다 득점 하오하이둥 (Hǎo Hǎidōng)
- 106경기 / 39골[3]
첫 국제 경기 출전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vs [[필리핀 축구 국가대표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필리핀]] 1:2
(필리핀 마닐라 / 1913년 2월 4일)
최다 점수차 승리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vs [[괌 축구 국가대표팀|
파일:괌 기.svg
괌]] 19:0
(베트남 호찌민 / 2000년 1월 26일)
최다 점수차 패배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vs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0:8
(브라질 헤시피 / 2012년 9월 10일)[4]
}}}}}}}}}}}} ||
{{{#!wiki style="color: #fff; margin: 5px -10px -5px"
{{{#FF0 {{{#!folding [ 대회별 성적 보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F0101> 세계대회
월드컵 [진출] 1회
[최고] 31위/조별리그 (2002)
올림픽 [진출] 3회
[최고] 12위/16강 (1936)
대륙대회
아시안컵 [진출] 13회
[최고] 파일:트위터 은메달 이모지.svg(1984, 2004)
아시안 게임 [진출] 11회
[최고] 파일:트위터 동메달 이모지.svg(1998)
EAFF컵 [진출] 5회
[최고] 파일:트위터 금메달 이모지.svg(2005, 2008, 2010)
기타대회
차이나컵 [진출] 3회
[최고] 파일:트위터 동메달 이모지.svg(2017)
다이너스티컵 [진출] 4회
[최고] 파일:트위터 은메달 이모지.svg(1990, 1998)
킹스컵 [진출] 4회
[최고] 파일:트위터 금메달 이모지.svg(1993)
네루컵 [진출] 6회
[최고] 파일:트위터 은메달 이모지.svg(1982, 1983, 1984. 1986)
머라이언컵 [진출] 2회
[최고] 파일:트위터 금메달 이모지.svg(1986)
극동 선수권 대회 [진출] 10회
[최고] 파일:트위터 금메달 이모지.svg(1915, 1917, 1919, 1921, 1925, 1927, 1930, 1934)
}}}}}}}}}}}} ||
유니폼 컬러 어웨이
상의
하의
양말

1. 개요2. 상세3. 코칭 스태프4. 역사
4.1. 20세기 전반 (중화민국 시절) (1913~1949)4.2. 1951년~1970년 (중화인민공화국 시절)4.3. 1971년~2001년4.4.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4.5. 2003년 이후
5. 월드컵 진출의 좌절사6. 부진의 원인7. 플레이 스타일8. 험난한 도전기
8.1. 마르첼로 리피8.2. 파비오 칸나바로8.3. 마르첼로 리피호 2기8.4. 리톄호 (2020~2021)8.5. 리샤오펑호 (2021~2023)8.6. 얀코비치호 (2023~2024)8.7. 이반코비치호 (2024~)
9. 그래도 여자 축구 대표팀과 시각장애인 축구는...10. 역대 감독11.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12. 현재 선수 명단13. 역대 성적14. 연령별 대표팀15. 관련 문서1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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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축구협회 산하의 중국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이다. 역대 FIFA 랭킹 최고 순위는 37위(1998년 12월 23일), 최저 순위는 109위(2013년 3월 14일)이다.

2. 상세

메인 컬러는 적색.[5] 아르헨티나(하늘색 줄무늬), 네덜란드(주황색), 크로아티아(적색 체크무늬) 등과 함께 종목 불문하고 유니폼 컬러가 뚜렷한 팀 중 하나이다.[6]

2010년대 후반 들어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벤치마킹해서 약한 실력을 강력한 경기장으로 커버하고 있다. 그 미친 라파스에스타디오 에르난도 실레스 스타디움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꽤나 골치아픈 쿤밍의 퉈둥 스포츠 센터 스타디움의 고지대에서 경기를 벌인 바 있다.

2021년부터 중국축구협회는 문신을 새긴 선수들을 국가대표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세계적 관점에서는 물론이요 아시아 내에서도 실력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편이다.[7] 중국의 압도적인 자본과 인구, 인프라, 열렬한 투자 등을 감안하면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성적이자 좋지 않은 취급인데, 그래서 당연하겠지만 현재 자국민들에게 가장 많이 까이고 있는 국가대표팀이다.[8] 사실 중국은 축구와 야구만 빼면 세계적 스포츠 강국 중 하나로 반드시 꼽힐 정도로 타 종목 국가대표 선수들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올림픽 메달을 많이많이 따가는 등의 호성적을 꼬박꼬박 내는 반면 축구 대표팀은 그렇게 지원을 많이 받아먹고도 월드컵 본선 근처에도 매번 못 가고 있고, 그 외에도 올림픽은 물론이고 아시안컵, 아시안 게임 같은 아시아권 대회에서조차도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거치며 성장은커녕 오히려 더 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타 종목 뿐만 아니라 여자 축구대표팀이나 시각장애인 축구대표팀 등과도 비교되어서 예산낭비라면서 엄청나게 까이며, 치우미라고 불리는 중국 축구팬들도 아시안컵 준우승도 이제는 까마득한 옛말이 되었다고 자책하면서 해탈하거나 자국리그나 보거나 심지어 타국 국가대표팀을 더 응원하고 지지하는 신세다.

또한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라이벌[9]이라고 생각했던 한국과 일본이 유럽의 강호들을 꺾어 조별리그를 당당하게 뚫고 16강에 진출하면서 본선은커녕 예선에서도 베트남에게 발릴 정도로 퇴보하기만 하는 중국의 자존심은 더더욱 하락하는 중이다.[10] 그래도 연령별 대표팀의 경우 2020년대 이후로 실력만큼은 가면 갈수록 좋아지고 있는 편이긴 하다.

게다가 축구를 마치 격투기 하듯이 살인 태클과 몸싸움을 비롯한 거칠고 과격한 플레이를 일삼아서 중국과 경기라도 하다간 주축 선수가 중상이라도 당할 우려 때문에 외국 팀들은 중국 대표팀과의 경기를 기피하려는 성향이 있어서 외국에서도 중국 축구에 대한 평판이 매우 나쁠 수밖에 없다. 2023년 3월에 뉴질랜드가 중국과 2번의 평가전을 가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야말로 살인 태클 남발에 거친 플레이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걸 그대로 증명했다.[11] 이는 성인, 올림픽, 유소년 대표 셋 다 마찬가지다.

대표팀 선수 및 감독 선정에 있어서 뇌물수수가 드러났다.# 선수와 감독을 실력으로 뽑는게 아니라 재력으로 뽑는 것이니 애초부터 잘될 수 없는 팀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과의 전적은 2승 13무 23패로 절대 열세. 최근 전적은 2026 FIFA 월드컵 2차예선에서 원정 경기 0:3 패, 홈 경기에서 두줄 수비 전략을 내세웠음에도 그새를 못 버티고 이강인에게 결승골을 내주고 0:1로 패했다.

현재 유니폼 스폰서는 나이키다. 주요 선수로는 우레이, 장린펑, 황보원 등이 있다.

3. 코칭 스태프

4. 역사

4.1. 20세기 전반 (중화민국 시절) (1913~1949)

중화민국 시절부터 축구는 인기스포츠였다. 신해혁명으로 건국된 지 2년만인 1913년 아시안 게임의 전신인 극동 선수권 경기대회(Far Eastern Championship Games)에 축구대표팀을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중국의 라이벌은 필리핀 축구 국가대표팀이었다.[12] 그리고 2차 대전 전 시기의 아랍을 제외한 아시아 A매치 기록을 정리해보면 당시 최강팀은 중국이었고 그 밑에 필리핀, 일본이 각축을 벌이던 모양새였다. 1931년 중화민국은 FIFA에 가입하였다.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참여하여 잉글랜드 축구대표팀과 1경기를 치렀으며, 0-2로 패했다.[13][14]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 런던 올림픽에 참여하여 튀르키예 축구대표팀과 1경기를 치렀으며, 0-4로 패했다.

4.2. 1951년~1970년 (중화인민공화국 시절)

1949년 12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사실상 승리하며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국민당중화민국타이완섬으로 도피하였다.

여느 공산주의 국가가 그렇듯 중국 또한 체육, 특히 축구는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 체제를 증명해야 하는 장이라 여겼고, 중국 정부는 압도적인 인구를 바탕으로 중국이 세계 정상급 축구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중국이 수많은 스포츠 중에 가장 먼저 육성을 시작한 것이 바로 축구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국공내전 이후 스포츠 중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축구 대표팀이었으며, 농구 대표팀보다도 훨씬 먼저 정책적으로 육성되었다.

마오쩌둥의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에 이은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그 존재 자체로서 무결성과 무오류성을 가져야 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같은 공산권 국가라 하더라도 위대한 마오쩌둥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다른 공산국가들에게 패한다는 것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중국 대표팀은 태생부터 패배해서는 안된다는 압박감이 컸고, 패배 이후 몇년간 국제 무대에서 잠적했다가 나타는 것을 수차례 거듭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국 대표팀의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점차 약소국들하고만 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1970년까지 계속되었다.

공산화 이후 중국은 1951년 같은 공산권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축구 대표팀을 보냈다. 하지만 중국은 불가리아에 1:9로 대패했고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 1:17로 대패했다.

동유럽의 높은 벽을 실감한 중국은 체계적으로 대표팀을 선발, 육성, 운영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이에 전중국체육연맹 관리하에 체계적으로 국가 대표 선수들을 선발, 훈련시키기 위해 1951년 11월 중앙체육반(국가대표팀)을 설립했다. 1951년 12월, 축구 국가대표 선수를 선발할 목적으로 텐진에서 제1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열었으며, 이 대회에서 신(新) 중국[15] 축구 국가 대표팀 선수 30명(최종 29명)을 정식 선발했다. 이 대회에 참여한 중국 8개 지역팀 중 동북3성(만주) 연고의 동북팀이 우승을 차지했으며, 동북팀 주전 11명은 전원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중에는 이봉춘, 김룡호, 김병균, 최중석 등 연변 조선족 출신 선수가 4명 포함되어 있었다. 아울러 중국은 과거 중화민국에서 운영했던 축구협회와 단절된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 축구협회를 구성하여 1952년 6월 14일 정식 발족시켰고 같은 해 FIFA에도 가입했다.

중공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출전하길 원했지만,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국제 사회에서 기존에 중국 정부로 인정받았던 대만과 중공의 대표성 문제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공 정권이 중국 본토를 장악한지 몇 개월 지나지도 않아 발생한 한국전쟁에 중공은 UN의 결의를 무시하고 침략자 북한편에서 전쟁에 참여 중인 전범국이라는 상황도 존재했다. 여기에 당시 대만과의 문제로 국제사회에서 보이콧을 반복하던 중국 역시 올림픽에 참가할 것이냐 보이콧할 것이냐하는 결정이 늦어져 거의 대회 직전에 참가하기로 확정하는 등 너무 결정이 늦게 이루어졌고, 여기에 국제사회를 의식하던 IOC 역시 처리가 늦어지기도 하였다. 결국 올림픽 개막식 이후 선수단 40명을 헬싱키에 파견했지만, 단체 종목은 너무 늦게 도착하여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개최국인 핀란드가 올림픽 폐막식 다음날에 중국 축구 대표팀과 친선전을 열어줬다. 그리하여 1952년 8월 4일 핀란드와 친선 경기가 신 중국 대표팀(China PR)의 첫 공식 A매치 경기로 열렸으며, 0-4로 패했다. 유럽 축구 약소국인 핀란드에 대패하자 그 충격으로 이후 중국은 1956년까지 국제 무대에서 잠적했다.

첫 A매치에서 유럽에서 최약체로 평가받는 핀란드에게 대패하자 중국 공산당 정부는 또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1951년 체코, 불가리아에게 대패한 것은 당시 중공 정부가 수립된지 얼마되지도 않아 어수선하여 제대로 된 선발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출전했지만, 1952년 올림픽 대표팀은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선발한 중국 최정예팀이었다. 그러나 이 대표팀도 출전이 되지 않았다. 제때 도착하지 못했던 데다 아예 신청도 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 정부는 망신을 우려하여 1954 스위스 월드컵 불참을 결정했고, 맹훈련을 거쳐 6년 후에 열리는 1958 스웨덴 월드컵을 노리기로 결정했다. 기존 대표팀은 완전히 해산되었으며, 6년 후를 위해 20대 초반으로 구성된 새로운 대표팀을 선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53년 2월 전국청년축구선수권대회를 열어 젊은 선수들을 대거 발탁하여 새로 대표팀를 구성했으며, 여기에는 박만복, 김창길, 최호균, 최증석, 김인걸, 박증철 등 연변 조선족 선수 6명이 포함되었다. 중국 정부는 같은 공산국가인 헝가리에 1954년 4월부터 1955년 10월까지 1년반 동안 대표팀 전체를 유학 보내 훈련시켰다. 당시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은 '마자르 군단'으로 불리던 세계 최강의 축구팀으로 1950년 이후 195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서독에 패하기까지 30여경기 A매치 무패를 기록했으며, 1954년 결승전 패배 이후에도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로 와해될 때까지 2년간 패하지 않았던 자타가 공인하던 세계 최강의 축구 대표팀이었다. 당시 헝가리에 파견된 중국 국가 대표팀에는 7명의 조선족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친김에 중국은 헝가리 축구 레전드를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맹훈련을 거친 중국은 스웨덴 월드컵 지역예선에 나서기 위해 4년여간의 잠적을 끝마치고 다시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은 1957년 5월, 1958 스웨덴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 출전했으나, 예선 첫 관문인 1차 예선[16]에서 인도네시아에 패하며, 조기 탈락했다. 웃픈 사실은 당시 아시아 지역예선을 최종 통과한 이스라엘은 부전승으로 단 한경기도 치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애초에 경제 사정이 어려워 불참한 나라도 많았고, 그나마 참가한 팀들도 중단에 이런저런 이유로 다 기권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54년 월드컵 때 아시아 지역 예선을 최종 통과한 대한민국은 심지어 신청서를 잃어버려 월드컵 지역예선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이때 중국을 누르고 2라운드에 진출한 인도네시아도 다음 라운드에서 기권해 버렸다... 스웨덴 월드컵 출전이 좌절된 직후 중국은 FIFA가 중화민국의 회원국 자격 유지를 구실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FIFA가 주최하는 축구 대회를 모두 보이콧했다. 이렇게 중국은 1970년대까지 공식적인 국제축구대회에서 모두 잠적하게 된다.

이렇게 중국 축구 국대는 1958년 이후 FIFA나 IOC가 주관하는 국제대회를 모두 보이콧하며 나서지 않게 되었고, 대신 공산권 우방국들과의 친선전에만 나서게 되었다. 친선전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말그대로 친선과 우호 증진을 위한 친선경기 같은 것은 아니었고 나름 공산권 국가들간의 국제축구대회들이었다. 단지 FIFA 및 산하 AFC(아시아 축구 연맹)과는 무관한 대회였기에 FIFA 입장에서 친선 A매치로 분류되었을 뿐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중국은 공산권 국가들하고 경기를 가졌지만 동유럽의 벽은 높았다. 동구권에서 가장 약체였던 루마니아에게 패배한 것은 중국의 자존심에 다시 한 번 큰 상처가 되었다. 결국 1959년 이후 중국은 소련과의 국경 분쟁 악화를 구실로 소련은 물론이고 동유럽 국가들과의 친선전도 완전히 중단하며 이쪽 무대에서도 완전히 잠적하게 되었다.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의 친선전을 단절한 이후 중국은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 북베트남, 몽골을 규합하려 하였고, 이에 1959년 북한 평양과 1960년 북베트남 하노이에서 아시아 공산국가 4개국을 규합하여 축구 대회를 열었다. 이 4개국 대회에서 중공은 몽골을 상대로 6:1 대승을 거두며 큰 자신감을 얻기도 했지만, 북한과 북베트남과는 엇비슷한 경기력을 보이면서 패하거나 신승을 거두었다. 게다가 중국 대표팀 창단 이래 최대의 대승을 안겨주며 향후 중국의 양민학살 먹이감이 될 것 같았던 몽골은 소련 편에 붙었고, 결국 중국과의 축구 역시 중단되었다. 이제 몽골이 나가리되면서 중국이 같이 축구를 할 수 있는 나라는 기껏 아시아의 공산국가 북한, 북베트남 정도였는데, 중국 입장에서 이 나라들의 전력이 만만치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들 국가를 상대로 중국은 이겨야 본전, 지면 체면이 구겨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959년과 60년에 열린 아시아 공산국가 4개국 축구대회에서 중국은 북한, 북베트남에 엎치락뒤치락하는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이는 아시아 공산국가들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중국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결국 아시아 공산국가 4개국 축구대회는 1960년을 끝으로 중단되었고, 중국 축구 대표팀은 이후 3년간 다시 잠적했다.

그런데 60년대 동남아에서 공산주의가 크게 흥하면서 버마(미얀마), 북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서 잇달아 공산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은 동남아 공산국가들의 종주를 자처하며 이들을 규합하려 하였고 중국 축구 대표팀은 3년 동안의 잠적을 중단하고 복귀하여 1963년부터 아시아 공산권 국가들과 친선전을 가지며 활성화되었다. 나아가 당시 인도와 대립하며 중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파키스탄과도 접촉하며 친선전을 가지기도 했다.

1965년부터는 역시 비동맹을 표방하던 말리, 기니아,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에 접촉, 이들 국가들과 경기를 확대해 나갔다. 또 1966년에는 중동의 중소 국가들과 접촉하여 시리아, 팔레스타인, 남예멘 등과 경기를 가졌다. 중국은 이런 약소 국가들과 주로 경기를 가지며 북한, 북베트남, 파키스탄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국가들을 압도적인 전력차로 발라버리며 자신감이 상승하고 있었다. 사실 중국은 위에 언급된 1960년 몽골에 창단 이래 최초 대승을 거두면서 그 파급력을 확인한 이래 이후 의도적으로 신생 아프리카, 중동 약소국으로 범위를 확대했고, 이들 나라들에 압승을 거두며 중공 인민들에게 국뽕을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중국과 가장 가까운 북한, 북베트남은 전력상 만만치 않은 상대였고 이는 중국에 큰 시름을 안겨주었다. 외교적으로도 중국은 가장 가까운 공산권 국가인 북한과 북베트남을 확실하게 휘어잡을 필요가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중국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북베트남은 친소 정책을 추진하며 중국과 갈등이 깊어졌고, 북한 역시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중국은 축구에서도 이들을 상대로 우월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며 대국을 자처하는 중국은 내상을 입었고 있었다. 중국이 60년대 초 한때 국가대표팀을 거의 접다시피 한 것도 북한, 북베트남의 강한 전력 때문에 이겨야 본전, 지면 손해인 상황에서 일부러 경기를 기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60년대 중반 중국이 축구 약소국들을 쳐바르는 와중에도, 미국과 전쟁 중인 와중에 있던 북베트남과 1965년 비기거나, 당시 전력이 급격히 강해졌던 북한에게 0:3으로 대패한 것은 상당히 치욕적인 일이었다.

이 와중에 1966년 5월 문화대혁명이 발생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마자 중국 대표팀이 중단된 것으로 서술된 경우가 많은데,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문화대혁명 초기는 오히려 중국국가대표팀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시기였다. 당시 중국 대표팀은 북한, 북베트남만 안만난다면 다른 축구 약소국들을 상대로 우월한 경기력을 펼치며 중공 인민들에게 국뽕을 선사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 7월 ~ 8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한 대회에서 중국은 신생 아프리카 국가들과 중동 약소 국가들을 초청하여 경기를 가졌고, 축구 약소국들을 상대로 연이어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며 중공 인민들을 열광케 했다. 1966년말에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개최된 대회에 참여하여 여전히 타팀들을 압살하였고, 베트남 전쟁 중인 숙적 북베트남을 2:0으로 꺾으며 설욕했다. 여기까지는 매우 좋았다. 1966년말까지 중국은 A매치 10연승을 달리고 있었고, 전부 2점 ~ 7점차 대승을 거둔 경기였고, 또한 대다수가 무실점 경기였다. 하지만 결국 북한에게 또다시 패한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10연승을 한들 북한에게 한번 패하면 그것으로 도루묵이었다. 당시는 문화대혁명으로 마오쩌둥이 신격화되었던 때였다. 마오쩌둥의 지도로 이룩된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시아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그 존재 자체로서 무결성과 무오류성을 가져야 하는데, 마오쩌둥으로부터 사상적 가르침을 받은 일개 북한에게 패한다는 것은 위대한 혁명 역사에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북한한테 한번도 아니고 연패한 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었고, 이것으로 축구가 중국에서 단죄받아야 할 이유는 충분해졌다. 1966년 12월 6일 프놈펜에서 북한에 패한 이후 중국 국가대표팀은 또다시 5년간 국제무대에서 잠적하게 된다. 축구는 자본주의의 오락으로 단죄되었고, 축구선수들 중 일부는 "혁명의식"이 부족하다며 시골 오지로 끌려갔다.

4.3. 1971년~2001년

중국 대표팀은 1971년에야 재개되었다.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주도한 데탕트 정책으로 1971년초부터 중국은 핑퐁 외교를 통해 국제 무대에 다시 나서게 되었고, 1971년 10월 UN중화민국(대만)을 제명하고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China)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승인하자,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71년 마오쩌둥은 올림픽을 제패하라는 교시를 내렸고, 이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후 자본주의 적폐로 공격당하며 강제 노역으로 끌려갔던 스포츠인들은 마오쩌둥의 말 한마디에 혁명 전사로 지위가 180도 바뀌게 되었다.

UN이 중화민국(대만)을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대표 정부로 인정하자, IOC와 FIFA도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국가 대표로 선언하였고 중화민국은 축출되었다.

1971년부터 A매치를 재개한 중국은 60년대 약소국들과 축구를 하며 큰 재미를 본 것처럼 70년대에도 의도적으로 약팀들하고만 경기를 가졌다. 그리하여 중국은 1971년부터 1974년 아시안 게임 직전까지 3년간 18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가며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이 3년간 18경기 동안 중국이 맞붙었던 나라는 쿠바(1승), 탄자니아(1승 1무), 잠비아(1무), 소말리아(2승), 남예멘(2승), 스리랑카(2승), 네팔(1승), 가이아나(1승 1무), 세네갈(1승 1무), 알바니아(1무), 시에라리온(1승)와 같은 축구 약소국 일색이었다.

이렇게 약팀과 골라 경기하며 3년 간 18경기 무패를 자랑하며 자신감이 충만해진 중화인민공화국은 1974년 IOC아시아 축구 연맹에 재가입하여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 올림픽 대표팀이 출전했다. 그러나 아시안 게임 첫 경기인 북한전(10월 2일)에서 0:2로 북한에게 패배하면서 1966년 12월 북한에게 패한 이후 18경기 무패 행진이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게 A매치 3경기 연속 패배의 굴욕을 맛보았다. 2차전인 이라크전에도 0:1로 패하며 충격이 더해졌으나, 마지막 3차전에서 축구 약체인 인도와의 경기에서 7:1 대승을 거두며 분위기를 전환한 채 귀국할 수 있었다.

1958년 FIFA와 IOC를 보이콧한 이후 10여년만에 처음 출전한 아시안 게임에서 중국은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중국 대표팀이 1960년대 중반과 1970년대 초반에 북한전을 제외하고 30여경기 무패를 이어갔던 것도 축구 약소국들만 골라서 경기했던 결과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 하나는 패배했다고 다시 잠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오쩌둥이 올림픽에서 세계를 제패하라고 했기 때문에 이후 죽이되든 밥이되든 중국은 계속 국제 무대에 섰다. 1970년대 중국의 목표는 아시아 정상권 축구 강국이 되는 것이었다. 사실 몇몇 2~3개국 강팀을 제외하면 아시아 정상권은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1970년대 북한, 그리고 나중에는 대한민국에게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아시안게임과 아시안컵에 계속 대표팀을 출전시켰다.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아시아 밖의 세계무대에서는 망신을 당할 것이 두려워 FIFA 월드컵과 올림픽에는 여전히 예선에 참가하지 않았다. 70년대에 중국이 월드컵과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것은 지역예선에서 떨어져서가 아니라 지역예선에 참여조차 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국은 세계 무대에서는 잠적을 유지한 채 일단 아시아 무대를 평정하고 이후 세계 무대에 진출하려 했다. 물론 중국의 이런 전략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1974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1승2패의 성적을 거두었지만 예전처럼 잠수타지 않고 A매치 친선을 계속했으며, 1975년 6월에 홍콩에서 열린 1976 아시안컵 지역예선에도 정식으로 참가했다.[17] 1974 아시안게임 3차전에서 인도에 7:1 대승을 거운 것은 중국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고 중국은 1975 아시안컵 지역예선에서 4승 1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이중에는 난적 북한과 일본에게 거둔 승리도 포함되었다. 특히 숙적 북한을 오랜만에 꺾어며 중국은 열광했으나 지역예선 5차전이자 북한과의 2차전에서 북한에 다시한번 0:2로 패하면서 축제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게 되었고 중국의 A매치 7경기 무패 행진도 또다시 북한에 의해 중단되었다.

7경기 무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던 아시안컵 지역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북한에게 패한 후 중국은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친선전에서도 뉴질랜드와 호주 등에 연패를 거듭했고, 1976년 아시안컵 본선에서도 1승1무2패를 기록했다.

이후 1977년에는 친선전만 가졌는데, 자이레, 모로코, 자메이카, 태국 같은 약체들을 상대로 연승행진을 벌이는 와중에, 베이징 홈에서 홍콩에게 1:2로 패배하는 충격을 겪었다. 한편 당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이루며 1977년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3연전을 갖고 1무2패를 거두기도 했다. 이 경기는 1959년 중국이 소련에게 패배한 직후 동구권을 보이콧한 이후 처음으로 아시아권(오세아니아 포함)과 아프리카 이외의 국가들과 가진 경기였으며, 1952년 중공의 첫 A매치였던 핀란드(중립국)을 제외하면 서구 국가들과는 처음 가진 축구 경기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었고, 이후 물밑 권력 암투 끝에 마침내 1978년 덩샤오핑이 정권을 장악하고 집권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프랑스에 유학가서 끼니를 굶으면서 축구 경기를 관람했을 정도로 축구광이었던 덩샤오핑은 죽기 전에 중국 축구의 월드컵 진출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정도 축구에 열성적이었다. 덩샤오핑은 자신이 축구광이기도 했지만, 축구에 열광하던 중국 인민들을 보면서 중국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내면 중국인들의 마음을 결집하고 당에 대한 충성심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정치적인 의도도 깔려 있었다.

정권을 잡은 덩샤오핑은 중국 축구를 대대적으로 육성시키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집권하자마자 당시 열리고 있던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경기 중계를 지시했고 이에 중국중앙TV는 월드컵 위성 중계 신호를 훔쳐 중계했다. 당시까지도 중국은 FIFA에서 탈퇴해 있었고 대만 문제로 월드컵은 중국에서 금기 사항이었다. 이후 FIFA 재가입을 신청하여 1979년 공식적으로 FIFA 회원국 지위를 회복했다.

덩샤오핑은 중국 국가대표의 발전을 위해서는 중국 축구 리그가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당시 아마추어 리그였던 중국 리그를 대대적으로 개편 프로리그로 전환시켰다. 이에 1980년 마침내 중국 슈퍼리그의 전신인 중국 갑A 리그가 출범했다. 아울러 중국 축구 저변 확대를 위해 2군 리그를 창설했고 이어 3부 리그까지 창설했다. 또한 단순히 선수들의 기량만 높인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축구 심판들을 육성하기 위해 대거 유학보내는 등 축구 발전을 위한 덩샤오핑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세심한 곳까지 꼼꼼하게 이어졌다.

이처럼 축구광 덩샤오핑의 맹렬한 지원을 등에 업고 중국은 각종 국제대회 및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 참가하기 시작했으나, 번번히 떨어졌다. 특히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후 중국 국가대표팀 최초의 빅매치인 대한민국 대표팀과의 A매치가 1978년말 성사되었다. 이전까지 한국과 중국 국대가 축구에서 맞붙은 적은 없었다. 1978년 12월에 방콕 아시안 게임 및 아시안컵 예선으로 한국과 3주 간격으로 2연전을 가졌지만 2경기에서 모두 패하며 공한증의 시작을 알렸다.

비록 한국에게 패배했지만 마카오, 필리핀 같은 양민을 제물로 1980 쿠웨이트 아시안컵 본선에 진출했다. 그러나 아시안컵 조별리그에서 4위에 그치며 큰 실력차를 절감하고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덩샤오핑은 1982 스페인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관계자들이 피를 말리며 월드컵 예선을 준비했다. 1981년 열린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중국은 초기에 홍콩, 마카오, 쿠웨이트 등 약팀들을 이기며 한껏 기세를 올렸고 이에 10억 중국 인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어 난적 북한사우디까지 꺾으며 월드컵 본선 진출 3부 능선을 넘으며 중국 인민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결국 뉴질랜드에 패하면서 월드컵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도 다음 대회에는 본선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1984년 아시안컵에서 마침내 덩샤오핑의 중국 축구굴기가 빛을 보는 듯 했다. 중국은 지역예선을 자국 광저우에서 유치하여 10일간 10경기, 팀당 평균 2~3일마다 경기를 치르는 막장 일정 속에서 당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중이던 아프가니스탄을 비롯, 요르단, 홍콩, 카타르를 차례로 이기며 드디어 본선에 진출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안컵 본선 조별예선에서 이란에게 패했지만 싱가포르와 UAE를 이기면서 4강에 진출, 쿠웨이트와 연장전 승리로 결승까지 올랐다. 비록 결승전은 사우디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준우승을 차지한 중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아시안컵 준우승으로 드디어 아시아 정상권의 축구 강국이 되었다고 자평하던 중국 인민들과 중앙당 간부들은 한껏 고무되어 1986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을 낙관했다. 특히 1986 월드컵부터 아시아 진출권이 2장으로 늘어나면서 이번에는 월드컵에 진출할 것이라 고무되었다. 1라운드 1조에서 약체 중에 약체인 홍콩, 마카오, 브루나이 같은 미니 도시국가들과 같은 조가 되면서 1라운드 통과를 기정사실화하며 2라운드에 어떤 나라가 올라올지 경우의 수를 따지며 김칫국을 실컷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1985년 5월 19일 베이징에서 열린 홈경기에서 홍콩에게 박살나며 지역예선 1라운드 통과하지 못하고 광탈해 버리고 말았다. 경기를 관람하던 8만 베이징 관중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경기장을 비롯해서 주변 건물 시설물이 파괴되고 방화가 일어났으며 차량 수십대가 파손되었다. 소요는 이틀간 지속되다가 공안에 의해 진압되었다. 베이징에서만 이런 소요가 일어난 것이 아니었고 지방에서도 곳곳의 시설물이 파괴되기도 했다. 중국 대표팀 감독과 중국축구협회 회장은 경기 직후 사임했다. 2라운드도 아니고 1라운드에서 그것도 홍콩에게 패해 광탈하며 당시 중국 축구계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되었다. 사실 중국이 홍콩에게 패한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고, 중국의 역대 전적을 보면 지역예선 광탈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유독 폭동이 일어났던 것은 그만큼 1984년 아시안컵에서 약체들을 제물삼아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근자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1988 서울 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당시 중국은 차기 올림픽 개최를 노리며, 올림픽을 체제 경쟁의 무대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불운하게도 1988 올림픽 축구 한정으로 IOC가 FIFA 월드컵 출전 경험이 없는 프로 선수들의 출전을 허용하면서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1.5군으로 대표팀을 편성하며 공산권 국가 못지 않은 전력을 구축한 것이다. 결국 서독, 스웨덴 1.5군에 털리고 튀니지와 무승부를 거두면서 1무 2패를 기록하며 무승으로 조 최하위로 광탈했다.

1990년에는 한중일과 북한, 홍콩이 참여하는 동북아 4개국 대항전인 다이너스티컵 창설하여 1회 및 2회 대회를 연속 개최하였고, 3회 대회는 반환을 앞둔 홍콩이 개최하도록 밀어주는 등 노력했지만 4개국 중 평균 3위라는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었다. 결국 1998년 4회 대회를 끝으로 다이너스티컵은 폐지되었다.

4.4.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그러다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보라 밀루티노비치 감독의 지휘 하에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중국은 큰 승점차로 B조 1위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역대 중국 축구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월드컵 진출이며, 최종 예선에서 이와 비슷한 성적조차 낸 적이 없다.

대진운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운빨을 잘 받았다. 대한민국일본이 개최국 자격으로 예선에서 빠지고[18] 남아있는 다른 강팀들이 다른 조에 배정되는 바람에 여유롭게 본선에 왔다.

이 때 최종예선에서 이 대회의 개최국들과 동격으로 취급받는 아시아의 강자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한 조에 들어갔다.[19] 사우디, 이란, 바레인 등이 피터지게 싸우는 동안 중국은 상대적으로 쉬운 아랍에미레이트와 우즈베키스탄과 경쟁을 했다. 만약 사우디와 이란이 각각 다른 조였다면 이들이 무난히 조 1위를 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러면 중국은 2위로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노려봐야 했을 텐데, 당시 대륙간 PO에 진출한 이란이 만난 팀은 아일랜드였다.[20] 만약 조추첨 결과가 달라져 중국이 2위로 PO까지 갔다면 이란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본선 진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시드 배정을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에서 거둔 성적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우승국 일본과 3위 한국이 개최국으로 빠지고 준우승국 사우디와 4위팀 중국이 톱시드를 받은 것이다. 만약 현행 방식인 FIFA 랭킹 순서대로 시드를 배정할 경우, 1차 예선 종료 후인 2001년 6월과 7월 기준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태국에 밀려 2시드가 됐을 것이다.

최종예선 8경기를 치르며 2위와 승점 8점차로 여유있게 1위를 차지할 만큼 중국축구의 전력이 꽤 좋은 시절이었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실력 자체가 없으면 어느 나라고 본선 진출은 어림도 없다.

북한이 남조선에 가기 싫다고 불참한 것도 한몫했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최종예선은 곧잘 올라오던 전력이었고 특히 동아시아 국가 한정으로 전투력이 더 상승하는 팀이기 때문에 북한까지 꼈으면 저런 꿀조자체가 안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현재 월드컵 본선 단골손님인 호주는 당시 아시아 축구 연맹 소속이 아니라 오세아니아 축구 연맹 소속이었다.[21]

이렇게 좋은 상황들이 겹쳐서 중국의 월드컵 진출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월드컵 본선에서는 브라질, 튀르키예, 코스타리카가 있는 32강 조별리그 C조에 들어가 3전 전패 무득점 9실점이라는 처참한 기록을 세우면서 탈락했다. 그것도 경기마다 3골씩 퍼주면서 죄다 완패했다. 그저 브라질같은 세계적인 팀과 월드컵에서 싸워본 것만으로도 영광인 수준. 그나마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과 똑같이 3패를 찍고 독일에게 0:8로 대패하면서 최다 실점까지 깔아준 덕분에 중국은 월드컵 31위로 최종 꼴찌만 면했을 뿐이다.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도 그랬지만 한국이 4강까지 가버리자 시샘하는 눈이 많았는데, 특히 중국은 세계축구의 쓴맛을 제대로 보고 멘탈이 가루가 되었기 때문에 이게 심했고 중국 관영 언론에서도 자극적인 기사를 내면서 반한감정을 신나게 퍼뜨렸다. 그리고 당시 한국 관중들이 중국팀을 별로 응원해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웃나라끼리 이러기냐며(?) 여기에서도 삐졌다고 한다.[22] 그래서 지금도 2002 월드컵 얘기가 나오면 계속 조작, 편파판정 드립을 치면서 한국을 깎아내리는 중국인이 많다.

중국 국대가 본선 진출에 성공한 국제 대회는 전부 한국에서 열린 대회들이다. 1988 서울 올림픽[23]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인데, 월드컵은 일본과의 공동 개최지만 조별리그 전 경기를 한국 경기장에서만 치렀다.

4.5. 2003년 이후

2004년에는 자국에서 열린 AFC 아시안컵에서 일본에게 결승전에서 3-1로 패배하여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대회 내내 중국에 유리한 편파판정이 난무했기 때문에 그다지 인정받지는 못한다. 게다가 대회 후 극성 치우미들은 결승전 일본 대표팀의 신의 손 사건만 부각시키는 뻔뻔함을 보였다.

일부 축구팬들은 1990년대 말에서 2005년즈음까지가 중국팀의 전력이 그래도 강하던시기였고,[24] 중국화의 미신을 강조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은 선수들이 유럽에 꾸준히 진출해서 실력이 상승했는데, 중국만은 중국 슈퍼 리그가 출범(2004)한 후에 도리어 실력이 퇴보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드는 근거는 중국 국대가 아시안컵에서도 조별예선 통과 이상의 성적은 꾸준히 내고 있었고, 월드컵 본선도 어쨌거나 한 번 밟아 봤다는 것. 그리고 이 당시 중국의 여러 선수(둥팡줘(맨유), 정즈(찰턴), 리톄(에버튼), 리웨이펑(에버튼), 쑨지하이(맨시티)[25], 하오하이둥(셰필드))이 EPL에 진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사실이 아니다. 현재 중국이 이 당시보다 피파랭킹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이나 일본도 랭킹이 2002-04년보다 떨어진 것은 마찬가지이니, 딱히 중국만 퇴보했다고 보긴 힘들다. 아래 나오지만 최종예선까지는 간 1998년[26]과 여러가지 특수한 상황이 겹친 2002 월드컵 이후 중국은 2006, 2010, 2014년 모두 최종예선에 발을 딛지 못했으나, 2018년 월드컵 예선에서는 드디어 최종예선에도 나갔다.[27][28] 그리고 전통적으로 중국이 아시안컵에서 실력에 비해 매우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29] 2004년 준우승(그것도 홈개최)을 했는데 이후 아시안컵에서 성적이 더 안 나온다는 이유로 퇴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30] 그냥 아시안컵 위상이 갈수록 높아짐에 따라 점점 실력대로 성적이 결정되어 갔다고 보는 편이 옳다. 또한 2000년대 초반 EPL에 진출한 중국 선수들은 중국시장 개척전략 및 스폰서빨이 컸기 때문에 대부분 벤치신세를 졌고,[31] 온전한 실력으로 진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중국 리그에서 오가는 돈이 커치고, 빅리그에 가 봤자 몇년간 경기에 뛰지도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아예 진출을 안 하게 되었다.[32]

2004년에는 고작 7만 명의 인구를 가진 안도라를 상대로 0대0으로 비기는 굴욕을 당한 적도 있다.

2006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2차 예선 4조에 포함, 홍콩, 말레이시아, 쿠웨이트와 1위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5승 1패로 쿠웨이트와 동률을 이뤘으나, 다득점에서 뒤진 바람에 최종 3차 예선에 올라가지 못했다. 설사 올라갔다고 해도 한국, 사우디, 우즈벡, 쿠웨이트(A조)[33]로 구성된 최종 3차 예선에서 A조로 가든 B조로 가든 쉽게 뚫기 힘들었을 것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축구 본선에서는 1무 2패, 조 3위이자 최종 16강 조별리그 13위(1득 6실, 득실차 -5)로 탈락했다.[34] 사실 국대가 아닌 연령별 대표팀이었던 데다가 개최국빨로 자동진출했지만, 이 조는 브라질과 벨기에라는 2강 국가들이 있어서 8강은 보나마나였다. 브라질은 다 알다시피 올림픽과 월드컵의 전통적 강자이고, 호나우지뉴마르셀루가 포함되어 있었다. 벨기에는 당시 피파랭킹에는 중위권이었지만, 이후 황금세대의 주축이 되는 선수들이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기는 것은 힘들었다. 즉, 당시 벨기에는 마루앙 펠라이니(맨유), 무사 뎀벨레(토트넘), 얀 베르통언(토트넘), 케빈 미랄라스(에버튼), 뱅상 콩파니(맨시티), 토마스 베르마엘렌(아스널) 등등의 미래 특급선수들이 다수 포함된 팀이었다. 이들이 이 다수 들어간 2014 월드컵의 벨기에팀에게 대한민국 홍명보호도 벨기에가 한 명 퇴장당했음에도 일방적으로 밀리는 졸전을 하다가 운좋게 1-0으로 졌을 정도였기 때문에, 2008년 당시의 중국은 더 이기기 힘들었다. 결국 둥팡줘의 한 골로 뉴질랜드와 1-1로 비기는 것으로 전패는 면했다. 결국 중국으로서는 23세 이하 출전 규정이 생긴 이래로 올림픽 축구 본선 진출에 의의를 두어야 했다.

2010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3차 예선 1조(중국, 카타르, 이라크, 호주)에 포함되었으나, 1승 3무 2패의 조 최하위로 4차 최종예선에 올라가지 못하고 탈락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1:0으로 이기는 이변을 연출했다.[35]

201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도 3차 예선 A조(중국, 싱가포르, 요르단, 이라크)에 포함되었으나, 3승 3패 3위로 4차 최종 예선에 올라가지 못하고 탈락하였다.

2015년 아시안컵에서는 사우디, 우즈벡, 북한을 이기며 조 1위로 8강에 올랐으나 8강전에서 개최국 호주에게 패배하였다.

2018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그동안 번번히 2-3차 예선에서 고배를 마시던 전통을 깨고 최종예선까지 올라왔으나 2차 예선 치르고 최종예선 올라온 것이고 2차 예선에서는 홍콩, 몰디브, 부탄을 상대하여 5승 1무를 거뒀다. 그리고 카타르에게 1무 1패를 당해 조 2위를 거둔 것이었다. 그나마 최종예선 한국, 이란, 카타르, 시리아, 우즈벡이 포함된 A조에서 카타르를 꼴찌로 밀어내고 5위로 마감하였다. 하지만 가오훙보가 사퇴한 이후 명장 마르첼로 리피가 새로운 감독이 되면서 경기력이 급상승하여 한국, 카타르, 우즈벡을 이김으로써 비록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떨어졌지만 그래도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었다.

아시안컵을 앞둔 평가전에서 소위 23억의 지구매치라고 불린 2018년 10월 13일의 인도 대표팀과 비겼는데 가능성 있는 팀에서 다시 허접한 팀으로 돌아왔다고 비하당했다. 인도는 그동안 약체였지만, 2013년 인도 슈퍼 리그 출범 후 서서히 축구실력이 올라오고 있으며, 특히 2019년 인도팀이 아시안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나름 동남아의 맹주였던 태국을 4-1로 대파한 것을 봐서는 인도가 중국과 비긴 것이 딱히 중국팀이 졸전을 벌였다고 볼만한 근거는 되지 않는다.

2022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먼저 월드컵 2차 예선 조별국가로 시리아, 필리핀, 몰디브, 괌이라는 비교적 수월한 팀들을 상대하게 되었다.[36] 리피 감독 아래서는 필리핀과 무재배를 하고, 시리아에 패해 최종결선 진출이 암담했으나, 코로나 19 사태 이후 2021년 5월 재개된 2차 예선에서 자국의 감독인 리톄 감독 지휘 하에서 4연승(괌 7-0, 몰디브 5-0, 필리핀 2-0, 시리아 3-1)을 하여 각조 2위팀 중 1위로 최종예선에 진출하였다. 최종예선에서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오만, 베트남과 함께 B조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종예선에서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다. 베트남에게 승리한 1승을 제외하면 모두 비기거나 패하며 사실상 월드컵 직행은 요원해보이는 상황. 그나마 귀화선수들의 가세로 순위 싸움에 나름 태클을 거는 정도는 가능해보였으나, 이마저도 귀화선수들 대부분이 고국으로 돌아가버려서 이후로는 이조차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일본에 일방적으로 흐름을 내주며 2-0으로 패배했고, 이어 베트남에게 마저 3-1로 패배하는 졸전을 하며 결국 최종예선 탈락을 확정짓고 말았다.[37] 축구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베트남[38]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중국 축구팬들은 분노하다 못해 해탈해버렸다. 결국 B조 6팀 중 5위로 가볍게 탈락하였다.[39]

그렇게 대륙별 카타르 월드컵 예선도 다 끝나고 이제 본선까지 남는 기간 동안 다른 나라들은 A매치 친선경기를 가지면서 대표팀 별로 실력을 점검해보는 반면 중국은 그 어떤 나라와도 친선경기는 커녕 요청도 받지 못했다. 이제는 다른 나라들도 중국을 사실상 외면하고 있다. 하도 실력이 없다 보니 해도 별 의미도 없어서인지 아예 무시당하는 수준이 되었다.

또한 2022년 12월 26일에는 유소년 축구에서 승부조작이 적발됐다는 소식까지 보도되면서 중국 내에서는 '이러니까 중국 축구가 발전을 못하는 것이다'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기사. 내부에서부터가 얼마나 심각하게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월드컵이 끝난 이후 2023년 3월에는 뉴질랜드 원정 2연전을 치렀는데 0:0 무승부, 1:2 패배를 당하며 또다시 중국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6월에는 다른 아시아 팀들과 달리 받아주는 팀이 없어서(...) 미얀마와 팔레스타인과 2연전을 해야 했다. 결과는 무난하게 4:0, 2:0 완승.

9월에는 김판곤 감독의 말레이시아와 1:1로 비기며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게까지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 했고,(참고 영상)[40] 거기에 이어 다음 경기인 시리아전은 경기 내내 슈팅을 난사하다가 90분 동안 유일했던 시리아의 1번의 유효슛에 실점을 내준 다음 후반 막판 이어진 침대축구까지 겹치며 또 0:1로 패했다.

2026 FIFA 월드컵/지역예선/아시아에서는 2 포트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는데 설상가상으로 2026 FIFA 월드컵/지역예선/아시아/2차예선에서 아시아에서 최상위권 팀인 대한민국과 같은 조에 편성되어 앞날이 어두워졌다.

결국 2차예선 대한민국전에서 0:3으로 완패했다. 그나마 태국전에서는 2:1로 승리하면서 비록 순위는 3위이지만 2위 싸움에서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다.[41]

2023년 말, 아시안컵을 앞두고 아부다비에서 연습 경기를 총 3경기 치렀다. 첫번째 경기는 상대적으로 매우 약체인 아랍에미리트의 2부 리그 팀 상대로 5대1로 승리하였다. 하지만 나머지 경기에선 매우 처참한 성적을 냈다. 우선 12월 29일에는 피파랭킹상 비슷한 체급인 오만에게 그 전해와 마찬가지로 0:2로 패배했으며, 심지어는 2024년 새해가 찾아온 1월 1일에는 홍콩에게 1대2로 역전패당했다! 친선경기인만큼 5.19 사건에 버금가는 수준의 패배는 아닐 순 있으나, 아시안컵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참사를 낸 만큼 같은 조에서 카타르는 물론 홍콩보다 강팀인 타지키스탄, 레바논에게조차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워지며 중국 대표팀의 아시안컵 전망에 빨간불이 켜졌다. 아니나다를까 조별리그 3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하는 처참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2무 1패에 그쳐 탈락했다. 중국 대표팀이 1976년 처음으로 아시안컵에 진출한 이래 기록한 최악의 성적으로 여지껏 1골이라도 넣던 거랑 달리 0골로 광탈한 것. 아시안컵 개최권을 코로나로 인해 반납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게 만약 개최국으로 아시안컵을 진행해서 저런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면 아시안컵 최초로 개최국으로써 무득점을 기록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5. 월드컵 진출의 좌절사

중국 선수들은 정신력이 없다. 중국 대표팀 선수들이라고 해도 A매치에서 선제 실점을 하면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버린다. 한국이나 일본 대표팀처럼 팀이 지고 있을 때 하나로 합심해서 역전골을 넣어보자는 자세가 없다. 중국 선수들은 기본기도 부족하다. 수비수는 수비할 때 공을 내 몸 안쪽으로 유도해야 할지 바깥쪽으로 튕겨내야 할지도 판단하지 못한다. 요즘 외국인 감독들은 중국인 선수에게 자율적으로 훈련하라고 하는데 중국 선수들은 그렇게 해본 적이 없다. 내가 독일에서 뛸 때에는 감독이 동아시아의 문화를 이해했다. 그래서 선수들을 끈으로 묶어서 팀 훈련을 하면서 대형에 맞추어 간격을 지키도록 했는데 감독들이 누구든 그렇게 디테일한 터치가 있으면 선수들이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양천
중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 경험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가 유일하다. 그나마 이것도 잠깐의 전성기와 상당한 운이 겹친 결과다. 일단 중국 월드컵 진출의 가장 큰 벽인 한국과 일본은 홈 어드밴티지로 빠져나갔고, 또다른 벽인 이란과 사우디와도 다른 조에 편성되는, 그야말로 기막힌 대진운 덕에 진출한 것이다. 1980년대 이전에는 중화민국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이유로 피파를 보이콧했고, 이후 피파가 중화민국을 축출하자 그제서야 피파에 가입해서 세계 축구 무대에 데뷔했다.

아시아권에서조차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한국, 일본, 호주, 이란과 같은 4강은 물론, 그 아래의 중동 - 중앙아시아보다도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중화사상이 절대 적용될 수 없는 유일한 분야가 축구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 처음으로 진출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개최국 자격으로 시드를 받아[42] 자동적으로 진출하고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같은 강팀들을 피하고 상대들이 싸그리 약체, 그나마 상대적으로 강팀도 아랍에미리트가 고작이던 환상의 꿀조를 만나 운좋게 겨우 진출했다.

이 대회에서 C조에 배정받았으나 브라질, 튀르키예, 코스타리카 등을 상대로 무득점 9실점, 3전 전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였다. 최종 순위는 뒤에서 2위.[43] 특히 비록 이 대회의 우승국이긴 했지만, 지역 예선에서는 에콰도르에까지도 밀릴 정도로 죽을 쑨 브라질한테는 당연하게도 0:4로 압살을 당했다.

그나마 브라질전과 튀르키예전은 충분한 변명이 되는 게 원래 남미 지역예선이 치열한 건 일상 다반사인데다가 어쨌든 간에 브라질은 당시 대회 우승팀이었으니 중국도 0:4로 압살당한 게 그렇게 부끄러울 일은 아니고, 오히려 첫 대회 출전에 우승국인 브라질에게 4점만 내주는 선에서 끝낸게 선전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44] 튀르키예 역시 우승국인 브라질을 상대로 두 경기 모두 졌지만, 거의 접전을 펼쳤으며 또 다른 돌풍의 팀인 대한민국, 그리고 개최국 어드밴티지를 얻은 일본을 제치고 대회 3위를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기에 이런 팀한테 0:3으로 압살당한 것 역시 그렇게 부끄러울 일은 아니며 나름 중국치고는 선전했었다.

하지만 코스타리카전은 변명의 여지 없이 실력이 뒤떨어져 패배한 경기였다. 결국 이 조의 순위는 승점자판기를 넘어 "득점자판기"였던 중국에게 골을 얼마나 잘 털어냈느냐에 따라 갈린 셈이었다. 당시 코스타리카는 완초페, 폰세카 등을 앞세워 인상적인 공격축구를 했다. 터키와도 접전 끝에 1:1로 비겼으며, 브라질전에서도 막판에 무너지면서 탈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만찮은 화력을 뽐낸 바 있다.

2004년 아시안컵 준우승에 힘입어 2006년 독일 월드컵에도 진출하겠다고 선수단과 팬들은 자신했는데, 쿠웨이트 원정에서 0-1로 패한 것이 끝내 발목을 잡아 5승을 거두고도 2차 예선에서 미끄러졌다. 하필이면 같은 조의 말레이시아홍콩이 승점자판기였던 탓에 쿠웨이트와 같은 5승 1패를 거두고 결국 다득점에서 14점을 기록해 15점을 거둔 쿠웨이트에게 밀려 탈락한 것이다. 그리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3차 예선에서는 호주·이라크·카타르 등과 묶이는 죽음의 조 편성이 나오는 바람에 광탈 크리를 맞고 말았다. 당시 호주와 안방경기를 벌일 당시 일부러 1,900미터 높은 고지에 위치한 경기장[45]에서 경기를 했지만[46] 결과는 조 꼴찌로 탈락하고 만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선 이라크·요르단·싱가포르 등과 한 조에 묶여서 비교적 무난하게 최종예선까지 진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4년 전 카타르와 이라크에 고전하던 것을 생각하면 중국 축구팬들도 어렵다고 평했고, 예상대로 싱가포르에만 2승을 거뒀고 마지막 6차전에서 요르단을 이겼지만, 이미 최종예선으로 진출 확정이 된 요르단이 마지막 경기는 쉬엄쉬엄 진행한 탓에 이긴 승리였기에 결국 3위로 또 다시 광탈하고 말았다. 게다가 아시안컵에서도 2007, 2011년 8강조차 가지도 못 하고 연속으로 조별예선에서 탈락해버렸다. 두 대회 모두 조별예선에서 만난 복병 우즈베키스탄에 덜미를 잡히고 탈락하면서 아시아 대회에서도 별 것 아니라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2012년 6월에 가진 스페인과 친선경기에서 의외로 0-1로 패하는 통에 이걸로 당시 스페인에[47] 1-4로 대패한 한국보다 낫다고 우쭐거리긴 했지만, 1년만인 2013년 6월 6일, 또 우즈베키스탄에 평가전에서 1-2로 패했다.[48]

그러나 며칠도 안 가서 가진 경기에서 우즈벡전 패배는 '따위'로 보일 정도의 대 굴욕을 당하는데, 바로 2013년 6월 15일에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태국과의 친선경기에서 무려 1:5라는 믿기 어려운 스코어로 대참패를 당한 것이다. 태국과의 역대 전적은 그동안 12승 3무 2패였으니 명백한 중국의 우세고, 최정예로 나온 중국팀이었지만 태국 선수진들은 대부분이 23살 이하 올림픽 대표팀급이었다. 게다가 그나마 얻은 1점도 심판이 할리우드 액션에 넘어가 패널티 킥을 주는 바람에 간신히 넣은 오심이었다.

중국의 홈 경기[49]였음에도 아시아 2류도 아니고 3류팀 정도에 불과한 태국, 그것도 U-23팀에게 이런 대패를 거두면서 현지 반응은 분노 그 자체.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관중들이 줄줄이 나가거나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을 욕하더니 경기가 끝나자마자 팬들이 대표팀 차량을 에워싸며 단체로 항의를 했다. #[50] 심지어 축구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시진핑도 참패 소식에 노발대발했다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였다. #[51]

고작 한 경기의 후유증은 커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예선에서 3차 예선도 못 뚫은 이후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하며 날로 입지가 위태롭던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52]은 이 대패로 인해 계약 기간이 1년 남짓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경질되었다. 이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도 16강전에서 태국에 0:2로 패배하고 탈락하고 말았다. 이 패배들을 잊지 못한 중국은 2014년 10월 10일, 태국과 재평가전을 가져서 안방에서 3:0으로 이기며 일단 설욕은 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2차 예선에서는 조 톱시드를 받아놓고 홈경기에서 홍콩을 상대로 무를 캐며 자국팬들에게 또 욕을 먹었다. 굴욕을 당한 중국 국대는 홍콩과의 2차전 직전에 홍콩은 강하지 않다고 입을 털었지만, 원정에서 또 비겼다. 결국 알랭 페랭 감독은 전격 해임되고 후임으로 2010년 동아시안컵에서 공한증을 깨는데 성공했던 가오훙보 감독이 재선임되었다. 조 1위 자리를 카타르에 압도적으로 넘긴 터에 홍콩에 고전 끝에 2위를 차지한다고 쳐도, 꼴찌 부탄전의 득점을 빼고 골득실을 계산한다면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최종예선조차 못 가고 탈락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카타르를 잡고 북한필리핀에 역전패를 당하는 기적으로 간신히 최종예선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월드컵 본선의 길은 멀기만 하다. 아니나다를까, 최종예선 3차전에서는 홈에서 조 최약체 시리아에 0:1로 패배했다. 이 패배로 중국은 A조 5위로 떨어지면서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적신호가 켜졌다. 결국 마르첼로 리피를 스카우트 해오는 감독 교체 초강수를 두었고, 이게 통했는지 한국도 잡고 우즈베키스탄도 잡더니 최종전도 이기며 PO 티켓을 노려볼 만했다. 그러나 초반에 하도 털린 것도 있고 막판에 조 상위에서 놀던 이란과 한국이 같이 삽질을 하면서 대륙간 플레이오프 티켓은 시리아가 가져갔다.[53]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최종예선까지는 갔지만 역시나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호주 등 아시아 3강을 모조리 만나 열심히 털리며 일치감치 하위권에 맴돌다가 조 최약체 베트남에게 3:1로 패배하면서 결국 탈락이 확정되었다.[54]

2026 월드컵 3차예선에서 지난번에 이어 또 일본, 호주, 사우디와 엮여 이젠 가망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클릭장사 때문에 중국 축구가 세계 최하위권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말한 한일+호주+중동국가의 다음으로 아시아 중위권 정도는 된다. 단지 인구와 국력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맥을 못 추는 것일 뿐. 당장 2024년 2월 기준 AFC 랭킹에서는 회원국 45개국 중 13위였다. 사실 아시아 축구 강국들인 한국, 일본, 호주나 피지컬이 서구와 맞먹는 중동국가에게 번번히 덜미를 잡혀서 그렇지 동남아시아남아시아 상대로는 역대 전적상 극강이긴 하다.

의외로 일본 상대로도 역대 A매치 전적이 그렇게 밀리지 않는다.[55] 그러나 뜯어보면 1917년부터 1980년까지 학살해 놓은 옛날의 영광이 대부분이다. 중국이 마지막으로 일본을 격파한 것이 무려 26년 전인 1998년 다이너스티컵 2:0 승리다. 이후 26년 동안 11전 5무 6패로 승리가 없다. 참고로 중국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만나 승리를 거두지 못한 기간이 1978년부터 2010년까지 32년이다.[56]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 세계는 물론 중국 내부에서조차 중국이 월드컵에 진출하는 유일하게 가장 현실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중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반응이다. 일각에서는 카타르도 막대한 자본금을 바탕으로 월드컵 개최를 했다가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탈락했는데, 중국은 그 카타르보다도 최악의 성적을 거둘 확률이 매우 높기에 FIFA가 승인을 안 해줄 거라는 의견도 있지만 FIFA의 관심사는 돈이지 개최국의 성적 따위가 아니다. 실제로도 이런 사정 때문에 FIFA의 중국에 대한 태도는 다소 우호적이기도 하고. 다만 문제는 월드컵은 다른 국제 대회와 달리 개최를 원하는 국가가 줄을 서고 있는 상황이라 중국이 개최권을 가져가긴 쉽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고, 2034 FIFA 월드컵을 사우디가 막대한 자금을 풀어 개최권을 가져간 것처럼 어마어마한 돈을 풀어야 할 가능성이 높다.

6. 부진의 원인

[youtube(Ej048ReEpvU?si=Wy0BEs26pmjxS7gY)


시진핑: (태국 총리에게) 총리님도 축구 좋아하십니까?
세타 타위신: (시진핑에게) 네. 좋아합니다. 어제 중국이 태국을 이겼잖아요.
시진핑: (통역사에게 중국이 태국을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요? 그런데 저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저는 지금 우리 축구 대표팀의 수준에 대해 (잘 한다고) 확신할 수 없어요. 기복이 있습니다.
2023년 APEC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세타 타위신의 대화에서 나온 장면이다. 그 시진핑조차 자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실력을 100% 믿지 못한다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만 보면 중국은 뛰어난 축구선수를 배출하기에 유리한 조건들을 여럿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엄청난 인구
    중국은 14억에 달하는 엄청난 인구를 자랑하는 인구 대국으로, 이는 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즉, 이론상으로는 자국에서 축구를 잘 하는 23인을 모으기가 어지간한 인구 대국들보다 유리해야 한다. 비록 빈부 격차가 심하고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어 있기에 모든 중국인들이 스포츠를 향유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걸 감안해도 인구가 워낙 많다 보니 스포츠가 제대로 발전할 정도의 계층을 추려내도 스포츠 빅마켓이라는 미국 인구의 3배, 축구에 가장 열성적인 두 대륙들인 유럽과 남아메리카의 인구를 합친 수준에 달한다. 참고로 축구 이외의 종목들에서는 이것이 실제 성과로 이어져서 중국은 21세기 올림픽에서 최강국인 미국 다음 가는 올림픽 메달을 보유하고 있다. 아시아 안에서는 2/3위의 스포츠 강국을 다투는 대한민국, 일본과 함께 3강이라고 할 만하지만, 대한민국, 일본 같은 다른 스포츠 강국들과의 격차는 실로 엄청나다. 이들은 같은 아시아권 팀이 아니라 러시아나 미국 같은 스포츠 초강대국들을 라이벌로 여긴다.
  • 막대한 경제력
    중국은 GDP 2위 국가이며, 이러한 경제적 규모를 바탕으로 G2를 자처하고 있다. 물론 1인당 국민 소득은 이제야 1만 달러를 겨우 찍었고 상술했듯 양극화도 심하지만, 그래도 국가 전체의 돈만큼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으므로 축구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도 그만큼 많다. 러시아나 인도처럼 정부 자체의 예산이 매우 풍족하고 중앙정부의 힘이 그야말로 막대하기 때문에 국책 사업을 벌이기에도 최적의 조건이다. 적어도 돈이 없어서 안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대표팀은 인구가 어떻든 간에 23명 스쿼드로 구성된 단 하나의 팀만 있으면 되므로 막대한 인구와 GDP를 모두 갖춘 중국은 이런 점에서도 국가대표팀을 운영하기에 유리하다.
  • 중국 지도층의 축구에 대한 열정
    아무리 국가에 충분한 돈과 사람과 전문가가 많이 있어도 그 국가의 지도층들이 축구에 무관심하다면 축구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은 그런 것도 아닌 게 오히려 중국 지도층들의 상당수가 열정적인 축빠다. 생전에 축빠로 유명했던 덩샤오핑의 소원 중 하나도 자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FIFA 월드컵에 나가는 걸 보는 것이었고, 현재 중국 주석 시진핑도 열성 축구광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부진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자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육성하는데 많은 투자와 지원을 꾸준히 하고 있다.
  • 외국 축구 관계자들의 중국 축구에 대한 많은 관심
    FIFA를 비롯한 전 세계의 많은 축구 관계자들은 중국 축구가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중국 축구가 흥해야 그만큼 축구 시장의 파이도 커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2016년에 FIFA 회장 잔니 인판티노FIFA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48장으로 늘리겠다는 말을 했으며, 중국의 월드컵 진출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국 48개국 확대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켜줬을 정도다. 물론 이는 FIFA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시아 시장 전반을 염두에 둔 발언이지만, 중국의 비중과 영향력이 큰 것도 사실이다.
  • 중국 슈퍼 리그의 존재
    중국에는 중국 슈퍼 리그라는 거대한 축구 리그가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다. 또한 이 곳에는 디디에 드록바, 에세키엘 라베시 등 쟁쟁하고 위상 높은 선수들도 뛴 적이 있으니 이들의 좋은 플레이를 보고 배울 기회도 상당하다.

그렇지만 이런 여러 유리한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유독 축구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외국인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중국 축구의 약세를 세계 최대의 미스터리라고 칭할 정도다. 물론 이러한 양상이 정말로 오리무중인 건 아니고, 중국이 축구를 끔찍히도 못하는 것에 대해 아래의 수많은 이유들도 거론되고 있다.
  • 인구와는 무관한 스포츠 인재
    비단 축구 뿐만 아니라 어떤 '종목'에서의 성패는 전체 인구수보단 해당 종목에 관심이 있는 유소년 층, 다시 말해 '유스풀'에 달려 있다. 단거리 육상 강국 자메이카의 인구는 300만 명 정도이고, 2018 러시아 월드컵 준우승국 크로아티아의 인구는 400만 명, 남미의 축구 강국 중 하나이자 비록 머나먼 옛날이기는 하지만 이래봬도 FIFA 월드컵에서 두 번(1930, 1950)이나 챔피언을 먹은 우루과이는 인구가 300만 명대에 불과하다. 1970년대부터 수많은 월드 클래스들이 즐비한 유럽의 대표 강호 네덜란드도 인구가 1700만 명 정도이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도 1000만 명 정도이다. 월드컵에서 우승을 3번 이상 달성한 4개국인 브라질(2억 1600만 명 정도), 이탈리아(5880만 명 정도), 독일(8400만 명 정도), 아르헨티나(4500만 명 정도) 중에서 인구가 1억 명이 넘는 유일한 나라는 브라질 뿐이다.

    즉, 어떤 특정 종목에서 배출되는 뛰어난 선수의 수는 단순히 그 나라의 인구만으로 단정짓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물론 중국은 인구가 워낙 많은 만큼 신체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수로만 따졌을 때는 좀 더 많겠지만, 그들이 축구를 1순위로 선택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며, 후술하겠지만 오히려 축구를 택하지 않는 스포츠 인재들이 더 많다. 근본적 원인은 중국의 청소년과 유스들이 스포츠쪽 진로를 택할 때 축구를 전혀 안 고르고 탁구[57]와 쇼트트랙, 수영 같은 다른 종목들을 위주로 진로를 잡기 때문이며, 중국의 스포츠 인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국내 축구팬들이 중국 축구의 실력을 이야기하면서 농담삼아 "메시가 밭을 갈고 호날두가 벼농사를 짓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정말로 중국은 메시가 탁구하고 호날두가 배드민턴을 하느라 축구에는 인재가 도통 안 모이는 나라인 것이다. 유소년 인재들은 축구가 아닌 다른 스포츠들을 택하며, 그게 더 성공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축구 인원 부족
    의외로 중국의 축구 유소년 인구는 매우 적다. 중국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 2013년까지 계획생육정책을 강도 높게 시행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중국 학부모들은 하나뿐인 귀한 자식이 불안하고 무조건 출세한다는 보장도 없는 운동선수의 길보다는 안정적인 학업을 선택하길 원한다. 그나마 체육인의 길을 택하려는 인재들도 축구가 아닌 다른 종목으로 진출한다. 그래서 중국의 어린이들은 축구선수의 꿈을 가지려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중국에서 감독을 오래 해서 중국 축구 정보통이기도 한 이장수는 "중국 유소년 축구 인구는 겨우 몇천 명 수준으로, 한국보다 적다."라고 밝힌 적이 있으며, 스웨덴 출신의 스벤예란 에릭손"중국의 유소년 축구 인구가 터무니없이 적다." 라는 지적을 한 바 있다. '축구 인구'로 비교하면 중국은 오히려 축구 소국이자 (축구) 후진국인 것이다.#
  • 지도층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행정의 축구 강요
    지도층의 과한 관심과 간섭 때문에 축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방식도 문제이다. 바로 축구굴기를 앞세워 축구를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도 생각도 없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축구를 하라고 강제로 입단시켜서 구타 행위를 벌이기도 하니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 농구육상을 하던 아이들에게도 이랬기에 중국 농구 협회의 간부였던 야오밍도 "농구하던 아이들에게 왜 억지로 축구를 하라고 강요하냐?" 라고 잠깐 비난했다가 높으신 분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문 적도 있다.
  • 뒤늦게 시작된 현대적인 축구 문화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하던 1949년에 중화민국은 타이완 섬으로 후퇴(국부천대)했는데, 중국의 축구 지도자들 대부분도 이를 따라 바다 건너 대만으로 가버린 탓에 중국 축구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중국축구협회는 와해되고 말았다. 거기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대만 지위 문제를 두고 국제 사회에서 갈등을 빚었고, 이러한 불편한 상황 속에서 자국 대표팀이 부진하자 FIFA에서 탈퇴해 버렸다. 이로 인해 중국의 FIFA 재가입 전까지 중국 축구의 국외 교류는 공산권 국가들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문화대혁명이라는 악재까지 닥치면서 중국의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축구 역시 전통이 깡그리 단절되기에 이른다. 즉, 중국의 현대적인 축구 문화는 1980년대에야 비로소 제대로 시작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중국의 굴곡진 축구 근현대사의 여파로 인해 중국에는 유능하고 검증된 일류 축구 지도자들이 많지 않다.
  • 체계적인 유소년 육성 시스템의 부재
    그 동안 중국은 육상, 수영, 체조, 탁구 등 올림픽 메달을 따기 용이하고 적은 비용으로도 성과를 보기 쉬운 개인 종목 위주로 엘리트 체육을 육성해왔다. 그러다 보니 축구처럼 돈이 많이 들고 선수 하나가 아니라 리그를 키워야 하는 단체 종목의 육성은 오랫동안 소홀했고, 자연스레 유소년 육성 시스템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당시에는 체육부도 구성되지 않은 일반 학교에서 재능이 특출난 유망주들을 발굴하는 식으로 선수를 수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중국은 자국 대표팀이 여러 굴욕들을 당한 201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유소년 시스템을 정비하며 축구에 온갖 투자를 하면서 선수들을 육성하고 있는데, 7~8년 정도 지났음에도 아직도 뚜렷한 성과가 도통 나오지 않고 있다.
  • 프로 선수들의 해외 진출 동기부여 부족
    대부분의 축구선수들은 축구판 메이저 리그라 불리는 유럽에 진출하는 것을 소원이자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흐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원인은 다름아닌 자국 리그 중국 슈퍼 리그의 막대한 연봉 때문이다. 상술한 중국 정부의 축구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로 인해 CSL의 연봉은 2010년대부터 K리그J리그를 뛰어넘어 아시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이때 중국의 국민 소득이 4,700달러, 한국이 23,000달러, 일본이 37,000달러 정도였다는 걸 감안하면 자국 리그에서 뛰는 중국 선수들은 실력에 비해 엄청난 고연봉을 받고 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중국 선수들은 언어, 현지 문화 적응 등 외국인으로서 겪을 어려움을 감내하면서까지 굳이 해외로 진출할 동기와 결심과 목적이 사라져 버렸다. 그 결과 중국 축구는 세계 축구의 흐름과 트렌드를 따라가 배울 동기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CSL에서 뛰고 있는 외국인 선수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자연히 실력 저하로 이어지게 되었다. 디디에 드록바의 경우만 하더라도 CSL에서 주급을 엄청 많이 준다는 이유로 혹해서 이적했으나, 막상 가서 뛰어보니 돈만 많이 주지 게으르고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형편없는 훈련 방식 탓에 선수 생명 버리기 딱 좋은 열악하고 최악의 조건인지라 얼마 동안만 선수로 좀 뛰어보고 바로 도망쳐 버렸다.
  • 선수들의 부실한 자기관리
    본래 체육인은 철저한 식단 관리 및 근력 운동 등을 통해 다른 직업인들보다도 몸 관리에 부단히 더 노력해야 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중국 축구선수들은 직업 의식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게으르고 나태하고 얼빠진 모습을 어지간히 자주 보이는 통에 자국민들의 비판을 듣고는 한다.[58] 중국에서는 자국 대표팀 선수들의 형편없는 실력을 비하하는 '궈쭈(国猪)'[59], '닭백숙(白斩鸡)'[60] 같은 멸칭들까지 있을 정도다. 이장수의 증언에 의하면 중국의 꽌시 문화에선 담배가 보편적인 관계 형성 수단으로 활용되는데, 이게 축구선수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라서 경기 전날에도 술판을 벌이거나 평소 흡연을 하는 일이 잦았다고 하며, 본인이 감독이 된 후 이를 전격 금지시켰다고 한다.[61]

중국 축구가 도통 발전을 못 하는 이유에 대해 한 국내 매체에서 정리한 칼럼이 있다. 축구 전문 기자 김현회에 의해 2016년에 작성된 칼럼이지만, 2024년에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즉, 8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발전이 전혀 없이 제자리 걸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중국 국내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가장 크고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중국 특유의 꽌시 문화에 의한 부정부패를 원인으로 거론한다. 심지어 2022년에는 우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유소년 리그에서 노골적으로 승부조작을 하다가 적발되었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왔을 정도로 중국 축구계는 정말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완전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썩어도 단단히 썩어있는 상태이다.

현재 중국 민중의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한 심정은 가히 애증(愛憎)에 가깝다. 이웃집 아저씨부터 CCTV 앵커까지 공공연히 중국 대표팀 이야기가 나오면 질타하기에 바쁘며[62], 국가대표전에서 무능하고 한심한 모습을 보이는 자국 대표팀을 향해 비난을 퍼붓거나 심지어 외국 대표팀에게 응원을 보내는 극단적인 경우까지 쉽게 관측된다. 이러다 보니 중국인들은 "중국 축구는 독재 국가인 중국에서 유일하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욕할 수 있는 대상이다" 라고 말한다.

한국에선 초중고대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남학생을 쉽게 볼 수 있고, 심지어 군대에서도 간부와 병사들이 연병장에서 축구를 한다. 동네에서 아저씨들의 조기축구회도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축구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다. 남학생들은 대부분 농구를 하고, 그나마 체육학교에서나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다. 사실 중국과 대만의 학교 운동장은 일반적으로 다수의 야외농구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축구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축구장은 체육학교 또는 대학교에나 존재한다. 일반 성인들이 축구를 하는 경우는 당연히 찾아볼 수가 없다. TV 예능과 드라마에서도 농구가 등장하는 경우가 더 많으며 축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인민해방군 병사들도 농구를 하는 경우가 많고 시민, 공무원, 군인들이 참가하는 지역 아마추어 농구 대회도 자주 열린다. 그래서, 중국의 농구 실력은 아시아에서 최정상급에 속한다. 결국, 중국인들은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실제로 축구 선수가 많지 않은 현실이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준에 악영향을 줬을 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7. 플레이 스타일

전체적으로 선수들의 기본기가 탄탄하지 못하다. 축구굴기 같은 엉뚱한 지출을 하다가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등 매우 엉성하다. 이렇다 보니 같은 축구 변방국이더라도 미국이나 러시아 등이 기본은 하는 것과는 달리 중국은 피지컬도 기술도 그들에게조차 한참이나 못 미친다.[63] 적어도 미국이나 러시아는 본선에 진출을 간간히 하고 미국은 최근 들어서 16강에도 곧잘 올라가 주는[64] 반면 중국이 본선에 오른 거라곤 2002년 월드컵이 유일하며, 그나마도 공동 개최국들인 한국과 일본이 자동 진출을 하면서 경쟁자가 사라지고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같은 강팀들까지 운 좋게 피하게 되면서 겨우 진출한 것이다.[65]

8. 험난한 도전기

중국의 유소년 축구 선수들도 재능이 출중하다. 스프린트도 잘하고 턴 동작도 빠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면 유럽파가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속도는 10~12세 선수들이 가장 빠른데 이때 기본기를 쌓아야 하고 14~16세 시기에는 벌크업하기보다 스프린트를 연습해야 한다. 내 청소년기에는 이것을 몰라서 근육부터 키우기도 했지만 최근의 프로팀 유스 지도자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축구가 일반에 보급되는 것도 필요하다. 지역리그들을 만들고 충분한 지원이 있어서 향이나 촌 단위에서도 축구팀이 있고 그들이 1부리그 팀이 될 수 있다면 손흥민만한 선수나 리오넬 메시 같은 중국인 선수를 10명 만드는 것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양천
중국은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팀도 생겼고, 세계 최고의 인구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시장성을 지닌 국가다. 미래에는 중국 축구가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다.

중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나서서 축구 진흥책을 펼치겠다고 선언한 해가 2015년이었고, 당연히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가 1-2년만에 빠르게 성과를 내기는 불가능하다. 중국 측도 50년 후를 바라보고 추진하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만약 그런 식으로 단기간에 국가대표팀의 축구 실력이나 리그의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프로젝트 자체도 필요없을 것이다. 특히 위에서 기술한 대로 중국의 현대 축구 역사는 1980년부터 시작됐다.

2015년부터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중국팀들이 선전하고 있으며, 마르첼로 리피, 그리고 리톄 부임 후 몇 가지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중국 축구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축빠가 많은 자국인들의 열성적인 응원 역시 중국 축구를 앞으로 더 성장하게 만들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한 이미 여러 전문가들도 다시는 중국 축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중국 축구가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라는 언론 매체의 분석도 있다.

하지만 몇년이 지난 현재 이런 장미빛 전망은 빛이 많이 바랜 것은 물론 사실상 일장춘몽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그간 축구에 뭉칫돈을 투자했던 중국 거대 기업들이 경영 실적 악화와 코로나로 인한 경제 침체로 축구에 투자를 많이 줄인 상황. 때문에 중국의 프로축구 구단에서는 옛날처럼 거액의 연봉을 지급하기 어렵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외국인 지도자와 유명 선수들이 속속들이 중국을 떠나 버렸다. 게다가 중국 국가대표팀은 용병 선수를 대거 귀화시켜서 전력 강화를 시도했지만, 이 귀화 선수들은 전혀 시너지를 보여주지 못했고, 이것들이 원인이 되면서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도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그간 역대전적 무패였던 베트남과의 원정경기에서 졸전 끝에 1대3으로 최초로 참패하기도 했다.[66] 이렇다 보니 외신들은 중국 축구는 앞으로도 평생 안 될 것이라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자국인들도 우린 앞으로도 평생 안될 거야 아마 식으로 한탄만 하고 있다.

참고로 중국은 1998년에는 다이너스티컵에서 홈팀 일본을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었고, 2002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며, 1984년과 2004년 아시안컵에서도 결승에서 사우디나 일본에게 패하면서 우승에 실패하긴 했지만 1984년엔 대표팀이 부상하기 직전이었고, 다음 홈에선 홈빨로 준우승이라는 기적같은 성적을 거둔 적이 있었다. 즉, 중국 축구는 지금처럼 축구에 그렇게 거액을 들이지도 않았고 국민들의 관심도 그렇게 높지 않았던 20년 전에 오히려 더 강했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일본의 축구 전문가나 매니아들도 차라리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중국 축구가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는 의견을 많이 내비친다.[67] 현재 중국 축구의 상황은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또한 너무 과한 투자가 항상 경기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8.1. 마르첼로 리피

2016년 10월 22일, FIFA 월드컵 우승, 그리고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 횟수가 무려 4회에 빛나는 화려한 커리어를 가진 마르첼로 리피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전까지의 전적은 1무 3패로 자력진출은 힘든 상황.

하지만 250억 연봉의 리피감독은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일신하는데 성공한다. 대표적 사례가 창사에서 치러진 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로 공한증의 한국을 1-0으로 꺾어버렸다. 게다가 그 1골도 정교한 세트플레이 상황에서 나온 것. 리피감독은 가오훙보 감독의 색깔을 완벽하게 지워버리고, 공격과 역습이 가능한 팀으로 변모시켰다.

월드컵 최종예선 전반에서 1무 3패를 기록한 가오훙보호를 물려받은 리피호는 3승 2무 1패를 기록, 중국팀을 일신시키는데 성공한다. 비록 A조 최강이었던 이란에게는 패배했지만, 어떻게 보면 중국팀에게 있어서 이란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한국을 1:0으로 이겼고, 카타르 원정에서는 첫골을 얻어먹고도 2-1로 역전승을 거두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비록 전반기의 부진을 떨쳐내지 못하고 최종예선 5위로 탈락했지만 2위인 한국과 승점 3점차, 시리아와 우즈벡과는 1점차로 아쉽게 탈락했다는 점에서 중국 측으로서는 희망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리피 감독은 "중국팀의 문제는 자신감이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며 패배에 주눅든 선수들의 승리 본능을 일깨워주는데 힘썼다.

2017년 여름 U-20 국가대표팀이 독일의 4부리그 레기오날리가의 남서부지구에 참여하려 했으나, 논란을 일으키며 결국 정식 리그전이 아닌 친선전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마저도 일부 관중이 경기장에 티베트 깃발를 내건 것에 대해 반발, 1게임 마치고 참여를 포기했다.

2017년 11월, 한국대표팀과 똑같은 상대인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과 평가전을 가졌다. 0-4, 0-2로 각각 참패했는데, 한국 대표팀이 2-1 승리, 1-1 무를 기록한 것을 보면, 중국 국대가 잠시 피파랭킹에서 한국을 앞서긴 했지만 실력면에서 앞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이 패배로 다시 11월 피파랭킹에서 한국 국대는 59위, 중국은 60위로 한국이 앞서기 시작했다.

한편 마르첼로 리피 감독은 2020년까지 재계약을 했다. 축구감독으로는 무리뉴에 뒤이어 2000만 유로로 세계 2위의 연봉을 받는 리피가 얼마나 중국 축구의 실력을 끌어 올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18년 3월 22일 차이나컵 웨일즈전에서는 가레스 베일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며 6-0으로 참패했다. 리피도 화가 났는지, "선수들의 정신력이 문제있다."고 일갈. 뒤이어 체코와 치른 3위 결정전도 편파판정의 힘입어 선제골을 기록했지만 후반전에만 4골을 먹혀 패배했다.

2018년 5월부터 태국, 미얀마 등과 꾸준히 치러온 평가전은 승리하였으나 하필 9월에 카타르와 치른 평가전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점점 리피 감독에 대한 투입 비용 대비 성과와 관련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U-21감독으로 부임한 히딩크 감독을 리피 감독의 삽질이 더더욱 심해질 경우 바로 성인대표팀 감독으로 써먹는 대체자로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2018년 10월 소위 지구매치라고 불린 인도팀과 무승부, 2018년 12월에는 이라크에게 1-2로 발리고 요르단에게도 1-1로 간신히 비기는 등 좋지 않은 결과를 보였다. 하지만 2019년 아시안컵을 보면 인도는 2013년 인도 슈퍼 리그가 출범한 이후 실력이 급상승, 최근에 동남아팀은 압살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졌고, 이라크는 몰락했어도 중동팀중에서 상당히 까다로운 팀이고, 요르단은 2019년 아시안컵에서 보듯이 다크호스팀의 하나였기 때문에 중국이 쉽게 이길만큼 약팀들은 아니었다.[68]

이렇게 리피가 이런 평가전 와중에서 "아시안컵 본선에서만 잘하면 된다"고 하면서 여러 선수들을 엔트리에 넣다 뺐다하면서 테스트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런 시도나 발언은 당연히 한국에서는 소개안되고, 일부 기레기들에 의해 마치 리피가 계약만료를 앞두고 팀에 관심이 없거나 태업을 벌이는 것처럼 보도되었다.[69] 어쨌든 리피호의 2018년 A매치의 총 전적은 11전 3승 4무 4패로 승률이 30%도 되지 않았는데, 리피는 계속 "팀의 최종목표는 아시안컵이다"라며 불만에 찬 중국팬들을 달랬다.

한편 중국축협은 교육상 이유로 A매치에 내온 선수들의 팔문신을 가리라며 붕대로 감거나 스티커를 붙이게 해서 선수들의 불평을 샀다. 슈퍼리그에 문신을 즐겨하는 브라질리언이 많이 진출하면서 중국선수도 이를 모방, 장린펑처럼 아예 팔뚝을 모조리 문신으로 덮은 중국 선수들이 많아졌다.

2019년 아시안컵 1차전에서 키르기즈스탄에 2-1로 이기고, 필리핀은 3-0으로 이겨서 조1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조1위를 둔 최종전에서 벤투호의 한국한테 2-0으로 복수당하게 된다.

16강전에는 태국을 간신히 이기고 내부적인 목표인 8강에 도달했다. 문제는 다음 상대가 우승후보 이란이었다는 것. 결국 이란을 상대로 수비수가 알아서 골을 먹혀주는 예능축구를 선보인 끝에 0-3으로 완패하면서 탈락했다. 경기 종료 후 완전히 해탈한 듯한 리피의 표정은 덤이다.

결국, 리피 감독은 이날의 경기를 끝으로 대표팀과의 계약을 끝내고 중국 대표팀을 떠나게 되었다. 2년 3개월 남짓하게 대표팀을 맡았던 기간,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한때 한국을 상대로 승리도 거둔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주었으나 결국 16년 만의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고 동아시안컵 3위의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순위와 중국의 아시안컵의 목표였던 8강에는 들었지만, 그 8강 경기에서 철저하게 이란에 지배당하면서 중국대표팀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세대교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못했는데, 이번 대회에 출전국중 평균나이가 29.1세로 가장 나이가 들었으며 29세가 7명, 30세 이상의 선수가 10명이나 되었던 경험으로 상쇄하기에 중국대표팀은 노쇠한 팀이었다.

8.2. 파비오 칸나바로

결국 아시안컵을 끝으로 리피 감독이 중국을 떠나고 후임 감독으로 파비오 칸나바로가 선임되었다.

헌데 2019년 3월 21일, 데뷔전인 차이나컵에서 태국에게 0-1로 지고 말았다. 이어 3, 4위전에서 우즈벡에게도 0-1로 졌다. 이 2연패와 칸나바로가 이끌던 광저우가 대구 FC에 1:3으로 패배한 일 때문에 중국 언론에서는 이른 경질설을 살포하고 있다.

4월 29일에 결국 2경기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8.3. 마르첼로 리피호 2기

결국 칸나바로의 사임 후 리피 감독을 다시 불러들였다.

중국 혼혈 출신이거나 슈퍼 리그에서 5년 이상 활동한 용병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귀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중화사상으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빠져있던 중국이라서 상당히 의외의 행보고 그만큼 오직 월드컵 진출에 눈이 돌아갔다는 소리다. 언론에서도 "중국이 언제부터 한민족 국가였냐? 중국은 원래 다민족 국가고 당연히 역사적으로 중국은 타민족의 인재도 중국의 발전을 위해 잘 받아들였다. 언젠가 라틴계도 중국의 57번째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칼럼도 나왔다.

사실 중국 국대의 문호는 점점 넓어지고 있는 중이다. 1990년대까지는 순수 한족 아니면 축구 국대가 되는 것이 힘들었지만 2010년대부터는 조선족(김경도, 지충국 등등) 및 회족(우레이, 장린펑)이 국대에 올라타기 시작했고, 2010년대에는 미라흐멧잔 무제페르가 위구르계 최초로 국가대표에 승선했고,[70][71] 2019년에는 혼혈 2세 니코 예나리스가 6월부터 국가대표에 들어왔으며 9월에는 중국 축구 최초의 귀화 국가대표 엘케손이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으며 10월에는 히카르두 굴라르, 알랑 카르발류, 알로이시우의 귀화가 완료되면서 2020년부터 이들의 중국 국가대표 데뷔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2020년에는 화교 2세 장광타이,[72] 브라질 국적의 페이난둬[73]의 귀화가 끝났다.

하지만 리피 감독이 월드컵 2차 예선 도중 갑작스레 사임하며 리피호 2기도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리피 감독은 장린펑의 자살골로 시리아에게 1-2로 패한 후 기자회견에서 사임 의사를 밝히며 "나는 고연봉을 받기 때문에 패배에 책임을 지겠다. 나는 사임할 것"이라며 "중국 대표팀의 플레이는 열정도 투지도 아무것도 없었다. 선수들이 질까봐 두려워 할 정도면 다 내 잘못"이라며 우회적으로 선수들을 비판했다. 중국축구협회(CFA) 역시 그의 사임을 받아들일 계획이다. 사임 기자 회견 직후 리피 감독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중국 대표팀이 묵던 호텔을 떠나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리피감독은 귀국 후 "자격에 비해 돈을 많이 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 사퇴했다"고 기자회견을 했는데, 겸손함의 행간을 읽어보면 중국팀을 월드컵에 진출시키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고 느낀 듯하다.당시 경기 영상 요약 및 리피 기자회견

덤으로 시리아전 패배 이후, 반발 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중국 시나닷컴 및 여러 언론에서는 중국 선수들의 몸값 거품을 지적하고 있다. 중국을 패배시킨 골을 넣은 시리아 스트라이커 오사마 오마리가 받는 월봉은 1,600위안(약 26만 8,000원)에 불과함에도 중국 선수들은 그저 1,000만 위안(한화 약 16억 원)을 넘는 돈을 받는 달마다 받는 선수들이 여럿 있다고 지적.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이 정도 받는 선수는 극소수인데 중국 리그 물거품이 너무 심하고 이런 물거품이 심한 선수들을 국대라고 하니 희망이 안 보인다고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서 중국 축구협회에서 샐러리캡을 도입, 중국선수 수입을 깎을 상황이 올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중국 축구협회는 이를 시행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1부인 슈퍼리그부터 3부리그인 을급 리그까지 속한 모든 프로축구 선수 계약 협상을 중단하라고 각 팀에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현재 중국 클럽들은 자국 선수들과 연봉 협상을 멈추고 중국축구협회가 제시할 다음 정책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이뤄질 경우. 브라질 선수로서 연봉 5,000만 위안(약 83억 8,000만 원)을 받던 엘케손같이 귀화한 선수는 더는 외국인 선수가 아니니 연봉이 대폭 삭감될 수밖에 없다. (다만 엘케손의 경우는 규정이 발효되기 전에 이미 다년계약을 했기 때문에 당장 몇년간은 상관 없다.) 중국 인터넷 언론 <화체망>은 엘케손이 1/5 수준인 1,000만 위안 정도 밖에 받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인이 됐다는 이유로 기존 연봉의 80% 가량을 강제적으로 삭감당하는 셈이다.

실제로 <화체망>은 중국축구협회의 이번 조치 때문에 지나칠 정도였던 중국 슈퍼리그 내 외국인 선수들의 귀화 러시에 제동이 걸렸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될 경우 황사머니에 혹해 중국 선수로 귀화한 외국 선수들이 포기하거나 귀화를 알아보던 선수들이 그만둘 경우가 많으리라 전망된다.

8.4. 리톄호 (2020~2021)

리피 감독이 사임한 이후 2020년 에버튼 FC에서 뛰었던 리톄 우한 줘얼 감독이 국대 감독에 선임되었다.

일부에서는 위에 적힌 기술처럼 귀화 열풍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지만, 리톄 감독은 단시일에 성적을 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듯, 적극적으로 귀화 선수를 기용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 축협에 귀화선수만을 전담하는 부서를 만든다고 한다.

2기 리피호가 2022년 월드컵 2차 예선에서 삽질했지만 리톄 감독 하에서는 어느 정도 팀을 안정화시킨 듯, 2021년 5월-6월 재개된 월드컵 2차 예선에서 4연승을 거두어 조 2위들 중 승점 1위로 무난히 통과하여 12개팀이 겨루는 최종예선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최종예선에서 일본, 호주, 사우디, 오만, 베트남이 속한 죽음의 조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난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팀인 일본, 호주, 사우디야 말할 것 없고 그나마 오만, 베트남 정도가 중국이 해볼만한 상대인데 그나마도 오만은 중동의 다크호스로 불릴 정도로 저력있는 팀이고 베트남도 박항서 감독의 지휘아래 상승세를 타고 있기 때문에 만만하게 볼 정도는 아니다.

그리하여 벌어진 1차전 예선 경기에선 호주를 충분히 이긴다고 온갖 큰 소리를 치고 준비를 엄청 오래하고 많은 돈을 들였음에도 호주에게 3-0으로 참패했다. 그야말로 슈팅 수에서 23-7로 뒤쳐졌다. 중국은 이 경기 이전에 벌어진 평가전에서 필리핀, 몰디브, 괌, 시리아를 상대로 모두 이기고 3차 예선에 올라왔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홈게임이어야 하지만 중립지역인 카타르에서 치러진 일본전은 0:1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상대 감독인 모리야스 하지메도 위치가 간당간당한 상황에 양쪽 다 밤 11시[74]나 12시[75]에 하는 경기 치고 졸전을 펼치는 등 험난해 보이기만 하다.

2021년 10월 7일 벌어진 박항서가 지휘하는 베트남과의 경기에게는 3-2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일본-호주전에서 별 활약을 못했던 우레이가 두 골을 넣는 대활약을 하여 그나마 이름값을 했다.[76]

그러나 4차전인 사우디 아라비아전에서 2:3으로 패하며 앞으로도의 전망이 어둡게 되었다. 스코어만 보면 중동의 사우디를 상대로 2골이나 넣은 게 준수해 보이지만, 첫번째 골은 귀화선수인 알로이시오가 개인기로 만든 골이고 두번째 골은 사우디 골키퍼의 실수였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 성적 부진의 이유로 중국인들의 비난을 받으며 2021년 12월 1일 사퇴했다.

8.5. 리샤오펑호 (2021~2023)

감독이 바뀌긴 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암담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첫 상대는 20년 넘게 승리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 설상가상으로 귀화 선수 대부분이 지난 예선전 종료 이후 브라질로 돌아가버렸고, 재소집하는 과정에서 알로이시우와 페르난두는 경유지 암스테르담에서 도쿄로 가는 직항편까지 취소되어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에서 14시간을 넘게 대기해야 했다.

이에 참다 못한 알로이시우는 공항 벤치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사진을 웨이보에 올리며 중국축구협회의 운영 능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후 충동 발언이라며 웨이보에 사과문을 올렸으나, 컨디션 관리가 중요한 프로 선수들을 저렇게 방치하는 행보는 솔직히 비판받아도 싸다. 장거리 비행을 2번이나 하고 와야 하는 선수들을 경기가 치러지기 며칠 전에야 소집하고, 심지어 페르난두는 암스테르담에서 가족의 병환 소식을 듣고 귀국길에 오르는 등 경기 전부터 꼬여도 제대로 꼬인 모양새다. 결국 천슈안 중국축구협회 회장이 공개 사과를 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으나, 이 와중에도 일부 중국 매체들은 선수들의 준비 부족이라며 선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렇게 개판 5분 전인 상황 속이니 결과는 경기 진행 전부터 더는 볼 것도 없어 보였고, 예상대로 일본에게 공수 양면에서 완벽하게 농락당하며 2-0 완패를 당했다. 무승부도 절대로 안 되고 반드시 승리만이 필요했던 일본전을 패배하면서 중국은 3위 호주와의 승점 차가 무려 9점, 골득실 차도 무려 15점 차까지 벌어지면서 사실상 탈락이 99.9% 확정되었는데...

며칠 후 베트남과의 최종예선 8차전 원정에서 일치감치 3골 먹고 종료 직전 만회골로 영패만 면하는 완패를 당하며 탈락이 100% 확정되었다.

이 패배는 중국의 흑역사로 길이길이 남을 가능성이 높은데[77] 이 패배로 베트남에게 새해를 기념해 월드컵 최종예선 사상 첫 승리 및 첫 승점, 대 중국전 첫 승리라는 세 가지 종합선물세트를 증정해 준 셈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종예선 첫 승리는 비단 베트남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축구 역사상 최초의 기록으로, 그나마 동남아시아를 상대로는 전통적으로 강했음에도 제물이 된 중국으로서는 굴욕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중국 축팬들이 TV를 부수고, "귀국하지 말라. 부끄럽지도 않은가?"라고 외치며 격앙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게 명분상의 피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피해로까지 이어졌는데, 이 패배 때문에 이후 중국은 2026 FIFA 월드컵/지역예선/아시아/2차예선에서도 1포트에서 탈락당하고 2포트로 강등당하는 바람에 2차 예선부터 아시아 예선에서는 천적 대한민국과 같은 조가 되는 절망적인 상황까지 겪고 말았다.

2022년 2월 16일에는 상술한 귀화 선수들의 임금 지급 문제가 지속되면서 광저우 FC가 결국 엘케손을 포함한 귀화선수 5명을 모두 방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원래 이들을 귀화시켜 리그는 물론 대표팀에서도 핵심 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었지만, 중국이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을 확정지은데다, 임금까지 제대로 지급되지 않으니 귀화 선수들로서는 더 이상 중국에 남을 동기부여와 의미가 없어졌을 것이다. 동시에 잔류한 자국 선수들에게는 최대 60만 위안의 자체 샐러리캡을 부여하여 연봉을 엄청나게 후려쳤다.

그런데 예선 탈락이 확정된 이후 귀화선수들이 모두 빠진 라인업으로 오히려 선전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 1:1로 비겼다! 물론 저 1골도 후반 막판 페널티킥으로 간신히 얻어낸 것이고, 양팀 다 베스트 멤버로 나오지 않은 경기인데다 볼 점유율 24%에 슈팅수도 16:2로 처참한 졸전이었다.

이후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상대였던 오만에게 2:0으로 완패했다. 오만전에서 중국은 스코어뿐 아니라 경기 내적으로도 유효슈팅 0개 등 역시나 형편없는 경기력을 선보이며 악몽같던 카타르 월드컵 예선경기를 마무리했다.

이렇게 시종일관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는데도 2018년부터 FIFA 랭킹의 변화가 거의 없다. 이런 이유로는 FIFA가 돈줄인 중국의 눈치를 보기에 이런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참고로 중국의 역대 최저 랭킹은 2013년 기록한 109위. 따라서 2024년 현재 중국의 FIFA 랭킹은 Elo 랭킹보다 무려 20~30위 이상 높다.

끔찍했던 예선이 끝나고 최대 4경기로 예정되어 있는 2022년 6월 A매치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중국을 상대해주겠다는 국가들도 전혀 나타나지 않으면서[78] 위상이 많이 추락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이대로 6월 일정을 소화하지 못할 경우 FIFA 랭킹이 대폭 하락할 수 있으며, 결국 대한민국도 일본도 6월 동안 4경기의 A매치를 소화한 것과 달리 중국은 단 한 경기도 치르지 못하면서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게다가 야심차게 준비하려고 했던 2023 AFC 아시안컵도 개최권을 반납한데다[79] 많은 수의 자국 프로 구단들도 재정난을 이유로 줄줄이 해체 선언을 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어두운 미래는 상당히 더 어두워지게 되었다. 또한 많은 나라들도 이제는 중국 축구에 대해서 맘껏 비웃고 다닐 정도로 아시아 내에서도 동네북으로 취급당하고 있다.

그리고 예상대로 2022년 6월 FIFA 랭킹에서 최종예선에 진출하지 못했던 77위 우즈베키스탄에 밀린 78위를 기록하며 아시아 랭킹 11위로 추락했다.

그리고 한달 후 2022 EAFF E-1 풋볼 챔피언십에 출전하게 되면서 오랜만에 A매치를 치르게 되었는데, 2진급 엔트리를 구성했으며, 선수들이 아무래도 경험이 많지 않은 신예 위주인데다 팀 자체도 오랫동안 A매치를 못 치른 상태라 컨디션들도 하나같이 정상들이 아니었으며, 그런 것들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1차전에서는 대한민국을 만나 3-0 완패를 당했다. 심지어 선제 실점은 가만히 놔두면 오프사이드가 될 공을 굳이 머리로 건드려 골대 구석으로 정확하게 밀어넣는(...) 자책골로 한심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게다가 성숙하지 못한 경기 태도를 보이면서 매너에서도 패했음을 적나라하게 인증하였다.

2차전 상대는 바로 앞 경기에서 홍콩을 6-0으로 대파했던 일본. 직전 대한민국에게 3:0으로 패한것과 마찬가지로 다실점이 나오리라 예상되었으나 일본을 상대로 0-0 무승부를 만드는 이변을 연출했다! 중국의 만리장성 세우기(...)와 일본의 고질적인 골 결정력이 이뤄낸 환상의 콜라보였다는 반응이 많았으며, 우주방어 속에서 신들린 선방을 선보인 한자치 골키퍼는 한국 팬들로부터 중화요리스, 위구르투아, 취두부폰, 반대사드, 팔보체흐 등 다양한 별명을 얻었다.

3차전 상대는 홍콩. 1대0으로 이기면서 도합 1승 1무 1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경기도 썩 만족스런 경기가 아니었으며, 또한 상대가 상대인지라 인정을 안 해 주는 분위기다. 한편 대회는 3위로 마쳤다.

이렇게 리그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 귀화 선수 영입, 합숙 훈련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했음에도 국제무대에서의 부진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중국인들은 분노를 넘어 이제는 체념한 상황에 이르렀다. 국민들이 자국 축구의 문제점에 지쳐 외면하고 포기하게 되는 심각한 단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 축구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져도 '그럴 줄 알았다', '이미 관심을 끊었다', '이제 더 이상은 언급하기도 싫다', '계속 얘기해 봤자 내 입만 아프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우리나라 축구는 솔직히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절대 안 된다', 우리나라 축구는 그 누가 와도 절대로 안 될 나라다', '축협이 개혁하지 않는 한 중국 축구의 내일은 없다', '우리한테 월드컵은 그저 사치에 불과하다' 등과 같은 냉담한 반응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중국 축구계에도 영향이 있는지 이미 자국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AFC 아시안컵의 개최도 포기한 상태였다. 방역 문제 때문이라는 이유를 걸었지만, 2년 넘게 남은 시점에서 개최를 포기한 것으로 보아 설득력이 없고, 실상은 홈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포기했다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중국의 1위가 사실상 보장된 항저우 아시안게임은 개최권을 반납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개최된 것을 감안하면 기정사실이다.

게다가 2026 FIFA 월드컵부터는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팀이 48팀으로 확대되면서 아시아의 배정 티켓도 8.5장으로 증가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중국 내에서는 기뻐하기는 커녕 월드컵에 가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한탄만 나왔다. 이유인 즉슨, 이미 카타르 월드컵 지역에선에서도 5위로 탈락해버렸고, 한국, 일본, 호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피파랭킹 상위 나라들과의 대결에서도 경쟁력이 전혀 없고, 이런 수준이니 여기보다 한 수 밑이라고 평가받는 북한, 우즈베키스탄, 아랍에미리트, 이라크, 레바논, 오만, 카타르, 요르단, 쿠웨이트, 바레인 같은 팀들도 이길 가능성이 낮으며 이젠 태국, 베트남, 필리핀 같은 동남아 팀들에게도 밀리기 시작한 것이 자국 언론들이 찝은 내용들이며, 중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은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까지 하였다. 실제로 그동안 중국은 아시아 상위 피파랭킹 나라들보다 중위권 나라들인 카타르, 요르단, 이라크 등등에게 지역예선에서 덜미를 잡혔고, 모처럼 최종예선에 올라와서도 차이는 없었는데다가, 2022 월드컵 최종예선에서조차 베트남에게 3-1로 원정에서 참패하여 이젠 동남아팀들을 상대로도 고전을 걱정해야 할 판국에 월드컵은 무슨 놈의 얼어죽을 월드컵이냐고 그만 꿈 깨라고 할 법하다.

2023년에 후임 선정 중 외국인 지도자들을 검토 대상에 올려놓고 있는데, 연봉 예산으로 최대 세후 200만 달러(약 24억 원)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

2023년 2월 24일 U-23 대표팀 감독이던 알렉산다르 얀코비치가 중국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며 리샤오펑호도 베트남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흑역사만 추가하며 막을 내렸다. #

8.6. 얀코비치호 (2023~2024)

이번 3월 A매치 기간 중에는 중국도 마침내 A매치를 치르게 되었다. 3월 23일[80]과 3월 26일, 뉴질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뉴질랜드 현지에서 2연전을 치렀다. 1차전은 슈팅 14:6, 유효슈팅 8:2라는 비율로 뉴질랜드를 압도했으나 뉴질랜드 선수 한 명이 퇴장당하는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끔찍한 골 결정력으로 0-0 무승부로 끝났다. 그러나... 나름 수비가 잘 버텼던 1차전과 달리 2차전에서는 주도권도 못 가져가고 수비수의 자책골과 어이없는 실수들로 인해 결국 뉴질랜드한테 30년만에 2-1로 패배하면서 아직도 멀었음을 증명하였다. 뉴질랜드 선수들에게 시전하는 온갖 살인태클은 덤.[81]

경기 끝나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1골이라도 넣었다는 인터뷰로 감독이 어거지스런 칭찬을 하는 터라 중국 누리꾼들조차도 칭찬할 게 없어 뉴질랜드처럼 중하위권에 속하는 나라에게 겨우 1골 넣은 것으로 칭찬을 다 하는 거 보면 감독이 다 안쓰럽다고 한탄할 지경이었다. 그 동안 중국 축구팬들이 농담삼아 월드컵에 나가려면 오세아니아로 편입해야 가능하다는 말을 했었는데, 이 경기들을 보니 그마저도 안 되겠다며 한탄하는 모습이 압권.

비슷한 시기 중국 U-24 대표팀도 뉴질랜드 U-22 대표팀과 2번의 맞대결을 가졌으나, 0:2, 1:2로 두 경기 다 패배했다. 그것도 중국이 2살이나 연령이 많은데도 말이다. 역시나 이 쪽도 온갖 더티플레이를 한 것도 똑같다.

4월 5일, 중국 시나스포츠는 한국의 전직 축구선수인 이천수유튜브에서 중국 축구를 비아냥거렸다고 보도했다. 근데 사실 이천수는 무작정 비난하고 깎아내리기만 한 게 절대로 아니라 중국은 앞으로 막대한 시장이나 투자로 발전될 여지는 분명히 있다고도 덧붙였지만, 그저 비난한 것에만 촛점을 맞춰 보도하는 치사하고 전형적인 기레기 행위를 보였다. 하지만 이 보도에서도 결국 그의 비난에 대해서 한 마디도 반론을 못 하는 게 중국축구의 씁쓸한 현실이라고 인정해버렸다. 2026 월드컵에서 아시아 참가국이 늘었어도 정말 중국은 2022 월드컵에 같이 못 나온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요르단, 오만, 레바논, 그리고 개최국이었던 카타르 같은 아랍권 나라들이나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같은 유라시아 나라들, 베트남이나 태국 같은 동남아 나라들조차 무조건 다 이긴다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고 이천수가 꼬집은 사항에 대하여 이들도 이길 수 있다고 뭐라고 자신있게 말은 못했다. #

2023 AFC 아시안컵 카타르에서 카타르와 같은 조가 되자 카타르 측이 "중국이라면 쉽다!"라고 언론이 평하자 중국 소후닷컴은 굴욕이라면서 "이제는 카타르에게도 무시를 당하냐?"라고 비난했다. 이에 중국 누리꾼들도 덩달아 비난했지만, "저번의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베트남에게도 졌던 걸 그새 잊었어?"라며 카타르가 우습게 볼 만하다고 역비난하는 누리꾼도 많다. 그리고 카타르는 객관적인 전력이 베트남보다도 앞서고, 감독도 아시아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카를로스 케이로스라 절대 중국에겐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중국 축구의 위상이 안 그래도 낮던 몇 년 전에 비해 더 낮아졌다는 것은 친선경기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돈으로 유혹한 것이긴 해도 차이나컵을 통해 중상위권팀들 중 중국과 붙고 싶어하는 팀들도 있어 이를 통해 웨일스, 크로아티아 등과 붙기도 했고, 리피호 시절 한국을 1:0으로 꺾을 때는 아예 한국과 A매치 상대를 공유하며 세르비아, 콜롬비아와 붙기도 했다.[82] 그러나 갈수록 중국 축구의 안 그래도 낮은 수준은 더 퇴보하는 반면 타국들의 수준은 점점 올라가는 상황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2023년 타 아시아 국가들과 중국의 친선 경기 성사 일정을 보면 그 차이가 실감이 난다.

6월 : 대한민국, 일본 : 페루, 엘살바도르 / 호주, 인도네시아 : 아르헨티나 / 카타르 : 자메이카, 뉴질랜드 / 요르단 : 세르비아 / 이라크 : 콜롬비아
9월 ~ 10월 : 대한민국 : 웨일스 / 호주 : 잉글랜드 / 일본 : 독일 / 요르단 : 노르웨이

반면 중국의 상대는 6월에 아시아에서도 하위권인 팔레스타인미얀마를 만난다. 9월에는 말레이시아를 만난다. 심지어 호주와 인도네시아가 아르헨티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중국이 비싼 돈 들여 아르헨티나를 중국으로 초청해 놓고는 정작 본인들이 아닌 호주와 인도네시아가 중국에서 아르헨티나와 맞붙는 괴상한 대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미얀마를 4:0으로 압살했고, 이어진 팔레스타인전은 2:0으로 완승을 거두면서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여론도 있는 반면 겨우 약체들을 이겼을 뿐인데 벌써부터 만족하냐면서 인정을 안 해 주는 여론도 있다.

9월의 홈에서 열린 말레이시아와의 친선전에서는 1:1로 비겼다. 참고로 말레이시아의 감독은 전에 홍콩을 이끌고 중국을 상대로 선방했던 김판곤이다. 말레이시아 다음으로는 시리아를 상대하는데, 문제는 시리아는 말레이시아보다는 강하고 무엇보다 2018 월드컵 예선에서 홈에서 중국에게 패배를 안겼다는 점이다. 참고로 명장 마르첼로 리피가 이 경기 때문에 사임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큰 문제는 2023년 가을부터 치러지는 2026 월드컵 2차 예선인데, 과연 홈에서 말레이시아와도 비긴 중국이 동남아시아 최강인 태국을 이길 수 있냐는 것이다. 더군다나 나머지 팀들 중 하나가 아시아에서는 최강 라인에 속하는 팀인 한국이라는 것. 승리는 둘째치고 3차 예선에나 가볍게 진출할 수 있을지부터가 문제다.

한편 말레이시아전을 치르고 며칠 뒤에 치른 시리아와의 경기에서는 0:1로 패배하였다. 10월 A매치 상대 중 하나는 시리아보다 백배 천배는 훨씬 쎈 상대인 우즈베키스탄이기에 변화가 절실한 상황이었으나, 1:2로 또 패배하면서 감독 경질론이 올라오고 있다.

2023년 10월 9일에는 최강희가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을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기사. 그러나 최강희 본인은 2023년 10월 24일, 고려해 본 적도 없다면서 전격 부인했다. 기사. 하지만 2024년 1월 24일, 관련 기사가 다시 나왔다. 기사.

아시아 2차예선 C조에서 태국을 상대로 2:1로 승리했지만, 손김이황을 필두로 한 대한민국을 상대로 0:3으로 무난히 패했다. 이날 손흥민은 425일 만의 헤더 골, 라보나 킥 패스 등 평소에 보여 주지 않았던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다만 그동안의 졸전 덕분에 기대치가 많이 낮아져있어 한국전의 패배는 달게 받아들이고, 현실적인 목표인 조 2위를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했던 태국 원정을 잡은 덕분에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2024년 1월에는 원래 중국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2023 AFC 아시안컵 카타르에 출전한다. 카타르, 레바논, 타지키스탄과 함께 A조에 편성되어, 무난한 조편성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다만, 유독 아랍 원정만 갔다 하면 고전하는 마당에 카타르와 레바논을 상대로 어떤 결과를 낼지 쉽사리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전 두 대회 연속 8강 진출에 성공한 만큼 그에 준하는 성적을 기대하겠지만, 자국민들에게도 조롱받는 것이 밈이 되어버린 지금 시점에서 중국팀의 성적이 앞으로의 여론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23년을 마무리하여 12월 30일에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바니야스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친선경기로 치러진 오만과 비공개 평가전에선 0:2로 패하며 2023년 마무리를 울적하게 끝냈다. 이에 앞서 아랍에미리트 2부리그 팀을 상대로 한 평가전은 5:1로 크게 이기긴 했지만 정작 국대팀끼리 대결에선 자국 언론과 여론의 '그럼 그렇지라'는 비아냥만 듣고 만 셈이다. 이 패배를 두고 카타르 아시안컵 대비를 위하여 아랍에미리트에서 강훈련으로 인한 체력저하라고 변명도 나왔다.

한술 더 떠서 2024년 아부다비에서 새해 첫날 열린 홍콩과의 비공개 연습 경기에서는 푼 푸이힌(Poon Puihin)에게 2골을 허용하며 1대2로 패배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선제골은 중국 쪽이 넣었으나, 3명이나 퇴장당하는 아주 보기 드문 일이 발생하고 2실점을 하며 역전패당했다.홍콩이 중국을 이긴 것은 1995년 다이너스티컵 2월 26일 경기 3,4위전에서 1-1로 비겨 승부차기로 홍콩이 3:1로 이긴 뒤로 28년만이지만 이건 공식적으로 무승부이다. 따라서,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지역예선에서 홍콩이 중국을 2:1로 이기던 1985년 5월 19일 경기 뒤로 38년 7개여월만에 홍콩이 중국을 이긴 것이다. 1985년 이후로 홍콩을 상대로 10승 6무 무패행진을 달리다가 패했기에 엄청난 비난을 듣고 있다.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어 아시안컵 첫 경기에서부터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타지키스탄과 졸전 끝에 0대0으로 비기며 토너먼트 진출에 초장부터 빨간불이 켜졌다. 오히려 비긴 것이 다행일 정도로 타지키스탄에게 두들겨 맞았으며, 주천제가 기껏 넣은 한 골도 장광타이가 타지키스탄 수비수를 밀치는 바람에 오프사이드에 걸려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리고 2차전 레바논과의 경기에서도 양팀이 나란히 처참한 경기력을 보여준 끝에 0대0으로 비겼으며, 특히 자국의 에이스 우레이가 골문 앞 2미터의 오픈찬스를 날려버린 장면이 이날 경기의 백미였다. 승점 2점에 조 2위에 올라 있는 중국은 자력으로 16강 티켓을 노리기 위해선 3차전에서 1포트이자 개최국인 카타르를 꼭 이겨야만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으며, 역시나 카타르에게 원더골을 얻어맞고 1대0으로 패하며 조별리그 3경기에서 2무 1패를 거뒀고, 조 3위이기는 하지만, 이 성적이면 조 3위 간 경쟁에서도 상당히 불리해서 왠지 16강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고, 결국 얼마 후 바로 옆조에서 시리아와 인도 간 경기에서 득점이 터지면서[83] 중국은 100% 탈락이 확정돼버렸다. 중국에게 있어서 가히 이번 아시안컵은 역대 최악의 아시안컵으로 남을 듯 하다. 결국 아시안컵까지 계약이 되어 있었던 얀코비치는 세르비아로 돌아갔다.

2026 FIFA 월드컵부터 본선 참가팀이 48개로 확대됨에 따라 아시아의 본선 진출권 배당도 8장으로 늘었는데, 아시안컵에서도 이렇게 무득점으로 광탈할 정도의 형편없는 실력이니 월드컵 진출은 어림도 없을 확률이 아주 높아졌다. 전통의 아시아 4총사 한국, 일본, 호주, 이란은 애초에 수준차가 아주 심하므로 제외한다 쳐도, 적어도 그 아랫급들인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84], 우즈벡, 오만, 이라크, UAE, 바레인, 요르단과 같은 중동에서 한 끗발 하는 팀들을 상대로 적어도 대등한 경기는 해야 본선 진출의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레벨보다 훨씬 아래인 레바논과 타지키스탄을 상대로조차 한 골도 못 넣는 처참한 실력인데 이 정도면 월드컵에 대한 꿈을 가지는 것조차 사치인 수준. 하물며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중국 슈퍼리그의 수준도 이전보다 퇴보했으며, 중국이 공을 들였던 귀화선수 작업도 사실상 장광타이를 제외하면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수비와 공격진의 핵심인 장린펑이나 우레이는 다음 월드컵이면 이미 나이가 많아 출전조차 장담하기 힘든 연령인데다 주천제, 한자치 정도를 제외하면 A매치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이는 젊은 선수도 딱히 없다. 그야말로 꿈도 답도 없는 상황. 더군다나 중국인들도 앞으로도 중국 축구는 평생 발전을 못 할 것이라며 기대를 안 하는 상황이다.

아시안컵에서의 끔찍한 졸전으로 FIFA 랭킹도 쭉쭉 하락해 2024년 2월 88위로 떨어지며 중동에서도 중하위권인 바레인에게까지 순위를 역전당했다.

8.7. 이반코비치호 (2024~)

2024년 2월 24일, 새로운 감독으로 최근 아시안컵까지 오만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브란코 이반코비치를 선임했다.[85]

선임 이후 그의 첫 데뷔전은 2024년 3월 21일, 2026 FIFA 월드컵아시아 2차 지역예선 C조 싱가포르 원정경기. 전반전에는 우레이의 2골로 앞서갔지만, 후반전에 조직력이 무너지며 2골을 허용하며 2대2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며 데뷔전부터 최종예선 진출에 적신호가 켜지고 말았다. 그래도 닷새 후 홈에서 열린 리매치에서는 앞경기에서의 굴욕을 뒤로 한 채 4대1로 크게 이기며 같은 날 태국을 이긴 한국에 이어 조 2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3개월 뒤 5차전 홈경기 태국전에서도 태국에게 먼저 실점하여 겨우 1-1로 비겼다. 이로 인하여 마지막 6차전 한국 원정이 실로 부담스러워졌다. 3위 태국은 6차전 상대가 꼴찌로 탈락이 확정된 최약체 싱가포르와의 경기만 남아있는데다 일단 크게 이기기만 하면 3골차 득실도 가벼이 넘어버리기에 한국에게 중국이 1대0이든 4대0이든 스코어에 관계없이 패하기만 하면 3위로 꼼짝없이 탈락해버리기 때문이다.[86] 상술한 대로 아시아의 월드컵 본선 티켓 확대에 대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유독 중국만은 환호는 커녕 월드컵 가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한탄만 나왔는데, 중국의 한탄이 뜻밖에도 현실화가 되기 일보 직전에 놓였다. 나아가 월드컵 본선 진출팀을 2026년 대회부터 기존의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확대한 것도 FIFA의 시장성과 비중이 엄청나게 큰 중국을 염두에 두어서 내놓은 기획안이었는데, 중국의 꼴이 이러니 피파도 울상만 잔뜩 짓게 되었다.

6차전 대한민국 원정에서 예상대로 텐백 전술로 수비에 올인하였지만 결국 이강인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1-0으로 패배했다. 이로써 태국 vs 싱가포르 경기 결과에 따라 3차예선 진출 여부가 갈리게 되었다.[87] 결과는 태국이 싱가포르에 3대1로 완승을 거두었고, 중국은 태국과 득실과 승점이 모두 동일한 결과가 나왔지만, 다행히 승자승에서 앞섰기에 중국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3차예선에 진출했다. 하여간 어렵사리 3차예선은 갔지만, 이전들과는 달리 5포트에 자리잡게 되었다. 현재 평가는 5포트 내에서도 최약체는 물론 6포트에게 일격을 맞지나 않으면 다행라는 평이 대세다.

한편 2024년 6월 27일 있었던 3차예선 조 추첨에서는 일본,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인도네시아와 함께 C조에 속하게 되면서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다.[88]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일본과의 1차전에서는 초장부터 7-0로 대패하면서 출발이 상당히 불안해졌다. 2012년 브라질에게 당한 8-0 최다 점수차 패배 타이 기록을 세울 뻔했다. 더불어, 아시아 나라에게 가장 최다실점패이자, 월드컵 예선전 최다실점패이자 역대 일본전 최다실점 기록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일본에게 3골 이상으로 져 본적이 없었고 비록 40년도 더 된 1983년 인도 네루컵 대회에서 중국이 일본을 5-0으로 이겨본 적도 있었는데 이로서 완전히 뒤엎어졌다. 이 패배에 분노한 중국 관중들은 중국으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가는 대표팀에 물병을 던지고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 이날의 중국 축구 팬들의 극심한 난동과 행패로 인해 경찰 병력이 엄청나게 배치되어 막아야 했을 정도였다. 이어 홈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2차전도 사우디 선수의 퇴장이라는 수적 우위를 등에 업고도 1대2로 역전패하고 말았다.

한달 후 3차전인 호주 원정[89]도 1대3으로 역전패했다. 그래도 며칠 후 4차전인 인도네시아와의 홈경기는 2대1로 이기면서 드디어 첫 승에 성공했다. 하지만 첫승과는 별개로 경기에선 인도네시아에게 꽤나 고전했다. 2022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최약체 베트남은 홈에서 이겼던 중국이었다. 대신 원정은 패했다.

5차전 바레인전도 경기 종료 직전 장위닝의 결승골로 어렵게 이기며 2연승이 되었다. 이로써 지난 대회 예선에서 겨우 1승밖에 못 거두던 것을 어느덧 초장부터 2승이나 거두며 초반의 부진을 어느 정도 씻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그러자 중국 내에서는 이제야 월드컵의 희망이 보인다며 긍정적으로 보는 쪽도 있는가 하면[90] 겨우 약체 2번 이긴 거 가지고 벌써부터 설레발이냐며 부정적으로 보는 반응도 있는데, 실제로 이번 2연승이 중국에게 보약이 될지 아니면 강호들 앞에선 다시금 고양이 앞의 쥐가 되면서 말짱 도로아미타불이 될지는 앞으로 남은 5경기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검증될 것이다.

예상대로 일본과의 6차전은 1대3으로 완패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전개로 일본에게 첫 필드골 실을 안겨주었고, 동시기에 호주와 사우디는 승점 드랍이 발생되면서 조 꼴지임에도 불구하고 3위랑 승점이 동일한 상황이 되었다. 호주랑 사우디가 생각 이상으로 부진하고 있고 중국이 가장 유리한 일정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91] 잡을 경기만 잘 잡더라도 의외로 본선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다.

9. 그래도 여자 축구 대표팀과 시각장애인 축구는...

남자축구는 아시아권에서도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며 국제무대에 나가지도 못하지만, 여자축구는 세계수준으로 군림하고 있다. 한때 여축에서는 미국과 더불어 양강체제를 이루었을 정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지금도 중국 여자 축구는 여전히 세계 수준의 강자다. 지금의 유럽으로 치면 사실상 스웨덴과 비슷하다. 여자 축구만큼은 한국보다 더 잘한다.

하지만 남자 축구에서 나타난 것처럼 여자 축구도 기반이 튼튼하지 못해 2010년 이후로 전력이 흔들리는 중이다. 지역에서 전통의 강했던 북한과 일본에게 툭 하면 차이기 일쑤고, 왕년에 동네북으로 여겼던 한국 여자 축구도 발전하여 안방에서 열린 대회에서 0대 1 패배를 당했을 정도. 하지만 이보다 심각한 건 2015년 8월에 열린 U-19 아시아 예선. 3-4위전에서 한국에 0:4로 발리면서 세계대회 출전권을 잃었다.

사실 여자 축구에 투자 많이 하고 발전을 시킨 국가들이 많지 않다. 남자 축구에서는 극강인 아르헨티나만 해도 여자대표팀 피파랭킹은 오히려 중국보다 낮은 40위권이다. 미국, 일본, 잉글랜드, 프랑스, 스웨덴 등 여자 축구 강팀들을 보면 국가의 경제 구조가 안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은 의외의 케이스다. 중국은 국가의 경제규모가 굉장히 커서 여자 축구에도 투자할 여유가 있는 케이스. 여성 스포츠 자체가 남성에 비해 경기력이 떨어지는건 어쩔 수 없고 때문에 상업성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스포츠 시장 파이 자체가 커야만 가능하다.

최근 유럽의 여자축구 파이가 커지면서 세계무대에서는 꽤 고전 중이지만, 아시아 무대에서는 다시 최강급 전력을 회복했다. 2021년 올림픽 예선에서는 한국을 꺾고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더 나아가 2022 AFC 여자 아시안컵 인도에서는 8강에서 베트남을 꺾은 데 이어 4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일본까지 승부차기 끝에 이기고 결승에 올랐다. 그리고 대한민국과의 결승전에서는 전반전을 0-2로 뒤지다가 후반에만 3골을 몰아치는 대역전승으로[92] 통산 9번째 아시안컵 우승을 거머쥐면서 비슷한 시기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일본과 베트남에 연패한 남자 대표팀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93]

그리고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5인제 시각장애인 축구에서도 중국은 세계구급이다. 당연히 아시아에서는 적수가 없을 정도며, 패럴림픽이나 세계 선수권대회를 나가도 4강 이상은 하고 올 정도의 실력이다.

10. 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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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 현재
초대
리펑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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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엠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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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엠베르 / 다이린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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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천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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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니엔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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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팡런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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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니엔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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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니엔웨이스 / 런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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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니엔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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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홍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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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니엔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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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장홍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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쩡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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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니엔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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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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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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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가오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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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
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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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칸나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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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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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리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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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리샤오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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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대
얀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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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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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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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00>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리웨이펑 112회 1998.11.22 2011.11.15
2 가오린 109회 2005.7.31 2019.1.24
3 정즈 108회 2002.12.7 2019.11.14
4 장린펑 107회 2009.12.30 2024.3.21
5 판즈이 106회 1992.8.22 2002.6.4
하오하이둥 1992.8.22 200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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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현재 선수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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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00,#feff00>포지션등번호이름생년월일출장소속 클럽
GK 옌쥔링
(Yan Junling)
1991년 1월 28일 ([age(1991-01-28)]세) 57 0 파일:중국 국기.svg 상하이 하이강
왕다레이
(Wang Dalei)
1989년 1월 10일 ([age(1989-01-10)]세) 36 0 파일:중국 국기.svg 산둥 타이산
류뎬쭤
(Liu Dianzuo)
1989년 1월 10일 ([age(1998-01-10)]세) 4 0 파일:중국 국기.svg 우한 싼전
한자치
(Han Jiaqi)
1999년 7월 3일 ([age(1999-07-03)]세) 3 0 파일:중국 국기.svg 베이징 궈안
DF 가오준이
(Gao Zhunyi)
1995년 8월 21일 ([age(1995-08-21)]세) 17 0 파일:중국 국기.svg 산둥 타이산
장광타이
(Jiang Guangtai)
1994년 5월 27일 ([age(1994-05-27)]세) 32 1 파일:중국 국기.svg 상하이 하이강
장성룽
(Jiang Shenglong)
2000년 12월 24일 ([age(2000-12-24)]세) 14 0 파일:중국 국기.svg 상하이 선화
리레이
(Li Lei)
1992년 3월 30일 ([age(1992-03-30)]세) 16 0 파일:중국 국기.svg 베이징 궈안
웨이전
(Wei Zhen)
1997년 2월 12일 ([age(1997-02-12)]세) 3 0 파일:중국 국기.svg 상하이 하이강
양저시앙
(Yang Zexiang)
1994년 12월 14일 ([age(1994-12-14)]세) 2 0 파일:중국 국기.svg 상하이 선화
주천제
(Zhu Chenjie)
2000년 8월 23일 ([age(2000-08-23)]세) 32 1 파일:중국 국기.svg 상하이 선화
후허타오
(Hu Hetao)
2003년 10월 5일 ([age(2003-10-05)]세) 1 0 파일:중국 국기.svg 청두 룽청
MF 청진
(Cheng Jin)
1995년 2월 18일 ([age(1995-02-18)]세) 2 0 파일:중국 국기.svg 저장 FC
리위안이
(Li Yuanyi)
1993년 8월 28일 ([age(1993-08-28)]세) 6 0 파일:중국 국기.svg 산둥 타이산
왕하이지안
(Wang Haijian)
2000년 8월 2일([age(2000-08-02)]세) 1 0 파일:중국 국기.svg 상하이 선화
왕상위안
(Wang Shangyuan)
1993년 6월 2일 ([age(1993-06-02)]세) 23 1 파일:중국 국기.svg 허난 FC
셰원넝
(Xie Wenneng)
2001년 2월 6일 ([age(2001-02-06)]세) 6 1 파일:중국 국기.svg 산둥 타이산
쉬하오양
(Xu Haoyang)
1999년 1월 15일 ([age(1999-01-15)]세) 3 0 파일:중국 국기.svg 상하이 선화
차오융징
(Cao Yongjing)
1997년 2월 15일 ([age(1997-02-15)]세) 0 0 파일:중국 국기.svg 베이징 궈안
FW 베흐람 압두왈리
(Baihelamu Abuduwaili)
2003년 3월 8일 ([age(2003-03-08)]세) 6 2 파일:중국 국기.svg 선전 신펑청
페이난둬
(Fei Nanduo)
1993년 3월 16일 ([age(1993-03-16)]세) 7 1 파일:중국 국기.svg 상하이 선화
린량밍
(Lin Liangming)
1997년 6월 4일 ([age(1997-06-04)]세) 14 2 파일:중국 국기.svg 베이징 궈안
우레이
(Wu Lei)
1991년 11월 19일 ([age(1991-11-19)]세) 99 36 파일:중국 국기.svg 상하이 하이강
웨이스하오
(Wei Shihao)
1995년 4월 8일 ([age(1995-04-08)]세) 32 4 파일:중국 국기.svg 청두 룽청
장위닝
(Zhang Yuning)
1997년 1월 5일 ([age(1997-01-05)]세) 36 6 파일:중국 국기.svg 베이징 궈안
왕쯔밍
(Wang Ziming)
1996년 8월 5일 ([age(1996-08-05)]세) 5 0 파일:중국 국기.svg 베이징 궈안
타오창룽
(Tao Qianglong)
2001년 11월 20일 ([age(2001-11-20)]세) 2 0 파일:중국 국기.svg 우한 싼전
일정 2026 FIFA 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 2024년 11월 14일(목) 원정 파일:바레인 국기.svg 바레인
2024년 11월 19일(화)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출처: 중국축구협회 웨이보
2024년 11월 14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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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역대 성적

13.1. FIFA 월드컵

역대 월드컵 전적 순위 : 76위
대회 결과 순위 경기 승점 득점 실점
중화민국 국민정부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1930년 우루과이
FIFA 비회원국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34년 이탈리아
불참[94]
파일:프랑스 국기.svg
1938년 프랑스
※ 중화인민공화국
파일:브라질 국기.svg
1950년 브라질
FIFA 비회원국[95]
파일:스위스 국기.svg
1954년 스위스
불참
파일:스웨덴 국기.svg
1958년 스웨덴
본선 진출 실패[16개국][97]
파일:칠레 국기.svg
1962년 칠레
FIFA 비회원국[98]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66년 잉글랜드
파일:멕시코 국기.svg
1970년 멕시코
파일:독일 국기.svg
1974년 서독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1978년 아르헨티나
파일:스페인 국기.svg
1982년 스페인
본선 진출 실패[24개국][100]
파일:멕시코 국기.svg
1986년 멕시코
본선 진출 실패[24개국][102]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90년 이탈리아
본선 진출 실패[24개국][104]
파일:미국 국기.svg
1994년 미국
본선 진출 실패[24개국][106]
파일:프랑스 국기.svg
1998년 프랑스
본선 진출 실패[32개국][108]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2002년 한일
조별리그[109] 31위[110] 3 0 0 0 3 0 9
파일:독일 국기.svg
2006년 독일
본선 진출 실패[32개국][112]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2010년 남아공
본선 진출 실패[32개국][114]
파일:브라질 국기.svg
2014년 브라질
본선 진출 실패[32개국][116]
파일:러시아 국기.svg
2018년 러시아
본선 진출 실패[32개국][118]
파일:카타르 국기.svg
2022년 카타르
본선 진출 실패[32개국][120]
파일:캐나다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멕시코 국기.svg
2026년 월드컵
? ? ? ? ? ? ? ? ?
파일:스페인 국기.svg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파일:모로코 국기.svg
2030년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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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2034년 사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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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본선진출 1회 3 0 0 0 3 0 9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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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월드컵 역사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중국이 월드컵 무대를 밟아본 건 2002년 한일 월드컵 32강 본선 단 한 번 뿐이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무승부 이상의 전적을 내며 승점을 1점이라도 챙긴 적도, 선수가 직접 기록한 골이나 상대의 자책골까지 모두 포함해도 득점을 기록해본 적도 없고, 반대로 무실점 경기를 해본 적도 없다.

같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인도네시아, 대한민국도 첫 출전한 대회에서 득점에 실패했지만 당시에는 유럽/남미와 아시아 대륙과의 실력 차가 훨씬 컸던 시절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조차도 인도네시아가 출전한 1938년 대회는 조별리그 없이 전 경기가 토너먼트였기에 1경기만 치르고 탈락한 것이며, 대한민국이 출전한 1954년 대회는 조별리그가 1~2경기, 승자전/패자전으로 나뉘어 승자전 패자와 패자전 승자 간 동률이 발생했을 시에만 재경기로 3차전을 치르는 방식이었기에 3경기에서 단 1득점도 기록하지 못한 중국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이 이후 첫 출전한 북한, 이스라엘[121], 이란, 쿠웨이트,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카타르가 승리, 조별리그 통과와 무관하게 모두 첫 대회에서 득점을 기록한 것과 비교한다면 더더욱 초라하기 짝이 없다. 통산 전적은 3전 3패 31위[122] 무득점 9실점이다.

월드컵 전적은 코스타리카브라질, 튀르키예를 상대로 각각 1패씩 기록중이다. 스코어는 코스타리카를 상대로 0:2, 브라질을 상대로 0:4, 튀르키예를 상대로 0:3으로 패배했다. 득점자는 단 한 명도 없으며, 인도네시아[123], 콩고민주공화국[124], 트리니다드 토바고[125]와 함께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본 국가 중 단 한 번도 득점을 기록해본 적이 없는 국가이다. 최다 점수차 패배/최다 실점 기록은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기록한 0:4 패로 4실점이다.[126]

2026년 월드컵부터는 월드컵 48강 본선으로 확대되어 아시아 진출팀이 8팀 이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중국을 월드컵에서 보게 될 가능성이 조금은 올라갔다. 하지만 이것도 중국 시장을 의식하는 FIFA의 희망사항일 뿐이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 8팀이라면 많아 보이지만 AFC에는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아세안이라는 5개 산하 연맹이 있고 여기에 속한 국가들을 모두 합치면 거진 50개에 육박한다. 이 중에서 중국 축구가 8위 안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다.

당장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만 봐도 각조 1~4위는 각각 A조 이란, 대한민국, UAE, 이라크 순이며, B조 사우디, 일본, 호주, 오만 순이다. 아시아 진출팀을 8팀으로 확대해도 중국이 쉽게 이 안에 들 것이라고 낙관하긴 어렵다.

심지어 이러한 본선 진출팀 확대는 오히려 중국을 더 암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판이다. FIFA의 48강 확대는 전세계로 저변을 넓혀가고 있는 축구 열기에 힘입은 것이고 딱히 중국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말. 실제로 2020년대 들어 중동의 축구 열기가 상당한 기세로 확대되고 있고 카타르 월드컵에 이어 사우디도 2034 FIFA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를 보여주듯 아시아 국가들의 평균 축구 실력이 상당히 올랐다는 평. 2023 AFC 아시안컵 카타르만 봐도 이전 대회들과 비교했을 때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다는 평이 많다. 따라서 2026 월드컵에 가려면 한국, 이란, 호주, 일본, 사우디 외에도 상당히 실력이 좋아진 카타르, 바레인, UAE, 쿠웨이트,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오만 등 중동 국가들까지 제쳐야 한다. 사실 중동 국가들 중 상위권 팀들은 예전에도 중국을 그렇게 겁내진 않았다. 2006 월드컵 이후 지역예선에서도 중국을 광탈시킨 게 바로 이라크나 쿠웨이트 같은 나라였다.

한 술 더 떠서 중국은 2020년대 들어 오히려 실력이 더 떨어지고 있는 수모를 겪고 있다. 과거 동남아 국가들은 최상위 국가들도 손쉽게 이기던게 중국이었는데, 이제와선 태국과 베트남을 상대로도 간간히 패하는 수모를 보이고 있다. 당장 중국 언론들과 많은 수의 중국인들도 아시아 진출팀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카타르 월드컵 지역예선 당시 보여줬던 안 좋은 모습들 때문에 월드컵 가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한탄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아시아 진출권이 늘어나자 그동안 한국, 이란, 호주, 일본, 사우디에게 밀려 번번이 탈락하던 이라크나 아랍에미리트, 우즈베키스탄 등이 더 좋아라 하는 상황이다.

13.2. 올림픽

  • 1936베를린올림픽 12위[16개팀][128]
  • 1988서울올림픽 14위[16개팀]
  •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U-23 대회로 변경.
  • 2008베이징올림픽 13위[16개팀]

13.3. AFC 아시안컵

  • AFC 아시안컵 역대 순위 : 5위
대회 결과 순위 경기 득점 실점 승점
파일:영국령 홍콩 기(1955~1959).svg
1956년 홍콩
AFC 비회원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1960년 대한민국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1964년 이스라엘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1968년 이란
파일:태국 국기(1917~2017).svg.png
1972년 태국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1976년 이란
3위[131] 4 1 1 2 2 4 4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1980년 쿠웨이트
조별리그 7위 4 1 1 2 9 5 4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1984년 싱가포르
준우승 2위 6 4 0 2 11 4 12
파일:카타르 국기.svg
1988년 카타르
4위[132] 6 2 2 2 7 5 8
파일:일본 국기.svg
1992년 일본
3위[133] 5 1 3 1 6 6 6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1996년 아랍에미리트
8강 8위 4 1 0 3 6 7 3
파일:레바논 국기.svg
2000년 레바논
4위[134] 6 2 2 2 11 7 8
파일:중국 국기.svg
2004년 중국
준우승 2위 6 3 2 1 13 6 11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파일:태국 국기(1917~2017).svg.png 파일:베트남 국기.svg
2007년 아세안
조별리그 9위 3 1 1 1 7 6 4
파일:카타르 국기.svg
2011년 카타르
조별리그 9위 3 1 1 1 4 4 4
파일:호주 국기.svg
2015년 호주
8강 7위 4 3 0 1 5 4 9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2019년 아랍에미리트
8강 6위 5 3 0 2 7 7 9
파일:카타르 국기.svg
2023년 카타르[135]]
조별리그 18위[136] 3 0 2 1 0 1 2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2027년 사우디
본선 진출 ? ? ? ? ? ? ? ?
합계 본선진출 13회 / 준우승 2회 59 23 15 21 88 66 84

아시안컵 진출 13회, 최고 성적은 준우승 2회, 59전 23승 15무 21패, 88득점 66실점으로 아시안컵 통산 승점 순위에서 통산 5위에 올라있다. 아시안컵 본선 진출국 중에선 최다 패배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승 경력이 없는 팀 중에선 가장 순위가 높다. 현재 중국 대표팀의 수준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고 있는 것과 별개로 1980년대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는 아시안컵 무대에서 꽤 선전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아시안컵 승점 통산 4위를 유지해 왔으나, 2023년 대회에서 중국은 2무 1패 무득점으로 처참한 성적을 거둔 반면, 2승 2무로 승점 8점을 거둔 사우디아라비아가 승점 84점으로 동률이 되었으나, 평균 점수에서 밀려 5위로 하락했다.

다른 나라들과의 역대 전적은 아래와 같다. 볼드체로 표시한 팀은 아시안컵 우승국이다.
이란 : 4무 3패(1976, 1980, 1984, 1988, 2004, 2007, 2019)
대한민국 : 1무 3패(1988, 2000(2회), 2019)
일본 : 4패(1992, 1996, 2000, 2004)
사우디아라비아 : 1승 1무 3패(1984, 1988, 1992, 1996, 2015)
쿠웨이트 : 2승 2무 1패(1976, 1984, 1988, 2000, 2011)
이라크 : 2승(1976, 2004)
카타르 : 3승 2패(1996, 2000, 2004, 2011, 2023)
호주 : 1패(2015)
아랍에미리트 : 1승 1무(1984, 1992)
우즈베키스탄 : 1승 1무 2패(1996, 2007, 2011, 2015)
시리아 : 2승 1패(1980, 1988, 1996)
바레인 : 1승 1무(1988, 2004)
태국 : 1승 1무(1992, 2019)
북한 : 1승 1패(1980, 2015)
인도네시아 : 2승(2000, 2004)
인도 : 1승(1984)
말레이시아 : 1승 1무(1976, 2007)
타지키스탄 : 1무(2023)
레바논 : 1무(2023)
싱가포르 : 1승(1984)
키르기스스탄 : 1승(2019)
필리핀 : 1승(2019)
방글라데시 : 1승(1980)

지역별 상대전적은 다음과 같다.
동아시아 : 1승 1무 8패
서아시아 : 12승 6무 7패
중앙아시아 : 2승 6무 5패
동남아시아 : 6승 2무 1패
남아시아 : 2승

중국에 패배를 안겨준 팀은 일본(4패), 대한민국(3패), 이란(3패), 사우디아라비아(3패), 우즈베키스탄(2패), 카타르(2패), 쿠웨이트(1패), 호주(1패), 시리아(1패), 북한(1패)으로 총 10개 팀이다. 이들 중 일본호주를 상대로는 전패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이 승리를 기록한 나라들은 카타르(3승), 쿠웨이트(2승), 시리아(2승), 이라크(2승), 인도네시아(2승), 아랍에미리트(1승), 바레인(1승), 말레이시아(1승), 태국(1승), 인도(1승), 싱가포르(1승), 키르기스스탄(1승), 필리핀(1승), 북한(1승), 사우디아라비아(1승), 우즈베키스탄(1승), 방글라데시(1승)로 총 17개 팀이다. 이 중 이라크, 인도네시아, 인도, 싱가포르, 키르기스스탄, 필리핀까지 총 6팀을 상대로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이 아시안컵에서 가장 많은 승점을 획득한 팀은 카타르로 5경기 9점을 획득했다. 그 뒤를 이어 쿠웨이트가 5경기 8점으로 뒤를 잇고 있다.

중국이 상대 전적에서 열세를 보이는 나라는 대한민국, 이란, 일본,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우즈베키스탄까지 총 6팀이며 호각세를 이루는 나라는 북한, 타지키스탄, 레바논 3팀뿐이다. 나머지 팀을 상대로는 모두 우세를 보이고 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중동 팀과 동남아시아 팀을 상대로는 비교적 강세를 보이지만, 중앙아시아 팀을 상대로는 열세, 그리고 동아시아 팀을 상대로는 압살당하고 있다. 동아시아에는 중국의 천적인 대한민국과 일본이 있고 중앙아시아에도 또 다른 천적인 이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은 1980 아시안컵 10강 조별리그 방글라데시전 6:0 승으로 여섯 골을 기록했으며, 이는 중국의 아시안컵 최다 점수차 승리 기록이기도 하다. 반면에 한 경기 최다실점 기록은 1996 아시안컵 8강 사우디아라비아전 3:4 패로 4실점을 한 것이 최다 실점 기록이다. 최다 점수 차 패배 기록은 2007 아시안컵 16강 조별리그 우즈베키스탄전과 2019 아시안컵 8강 이란전에서 기록한 0:3 패배다.

13.4. EAFF E-1 풋볼 챔피언십

대회 결과 순위 경기 득점 실점 승점
파일:일본 국기.svg 2003년 결선리그 3위 3 1 0 2 3 4 3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5년 우승 1위 3 1 2 0 5 3 5
파일:중국 국기.svg 2008년 결선리그 3위 3 1 0 2 5 5 3
파일:일본 국기.svg 2010년 우승 1위 3 2 1 0 5 0 7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3년 준우승 2위 3 1 2 0 7 6 5
파일:중국 국기.svg 2015년 준우승 2위 3 1 1 1 3 3 4
파일:일본 국기.svg 2017년 결선리그 3위 3 0 2 1 4 5 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년 결선리그 3위 3 1 0 2 3 3 3
파일:일본 국기.svg 2022년[137] 결선리그 3위 3 1 1 1 1 3 4
합계 본선진출 9회 / 우승 2회 27 9 9 9 36 32 36

14. 연령별 대표팀

14.1. U-23 대표팀

14.1.1. 올림픽

연도 결과 순위 승점 경기 득점 실점
1992년 대회 부터 u-23세로 나이 변경
파일:스페인 국기.svg
1992 바르셀로나
본선 진출 실패[16개팀]
파일:미국 국기.svg
1996 애틀란타
파일:호주 국기.svg
2000 시드니
파일:그리스 국기.svg
2004 아테네
파일:중국 국기.svg
2008 베이징
조별리그 13위 1 3 0 1 2 1 6
파일:영국 국기.svg
2012 런던
본선 진출 실패[16개팀]
파일:브라질 국기.svg
2016 리우데자네이루
파일:일본 국기.svg
2020 도쿄
파일:프랑스 국기.svg
2024 파리
파일:미국 국기.svg
2028 로스엔젤레스
파일:호주 국기.svg
2032 브리즈번
합계 본선진출 1회 1 3 0 1 2 1 6

중국 대표팀은 U-23 대표팀으로 바뀐 1992년 이후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을 제외하고 예선에서 광탈 하고 있다.

14.1.2. AFC U-23 아시안컵

연도 결과 순위 승점 경기 득점 실점
파일:오만 국기.svg
오만 2014
조별리그 14위 0 3 0 0 3 2 5
파일:카타르 국기.svg
카타르 2016
조별리그 14위 0 3 0 0 3 4 9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2018
조별리그 10위 3 3 1 0 2 4 3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2020
조별리그 16위 0 3 0 0 3 0 4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우즈베키스탄 2022
기권
파일:카타르 국기.svg
카타르 2024
조별리그 9위 3 3 1 0 2 2 4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사우디아라비아 2026
? ? ? ? ? ? ? ? ?
굵은 글씨는 올림픽 출전권이 걸려있는 대회
합계 본선진출 5회[140] 6 15 2 0 13 12 25

14.2. U-20 대표팀

14.2.1. FIFA U-20 월드컵

연도 결과 순위 경기 승점 득점 실점
파일:튀니지 국기.svg
1977년 튀니지
불참
파일:일본 국기.svg
1979년 일본
파일:호주 국기.svg
1981년 호주
예선 탈락
파일:멕시코 국기.svg
1983년 멕시코
조별리그 12위 3 3 1 0 2 5 8
파일:소련 국기.svg
1985년 소련
8강 6위 6 4 2 0 2 5 5
파일:칠레 국기.svg
1987년 칠레
예선 탈락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1989년 사우디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1991년 포르투갈
파일:호주 국기.svg
1993년 호주
파일:카타르 국기.svg
1995년 카타르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97년 말레이시아
조별리그 18위 2 3 0 2 1 2 3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1999년 나이지리아
예선 탈락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2001년 아르헨티나
16강 15위 4 4 1 1 2 2 3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2003년 아랍에미리트
예선 탈락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2005년 네덜란드
16강 10위 9 4 3 0 1 11 7
파일:캐나다 국기.svg
2007년 캐나다
예선 탈락
파일:이집트 국기.svg
2009년 이집트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2011년 콜롬비아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2013년 터키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2015년 뉴질랜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7년 대한민국
파일:폴란드 국기.svg
2019년 폴란드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2023년 아르헨티나[141]
파일:칠레 국기.svg
2025년 칠레
? ? ? ? ? ? ? ? ?
합계 본선진출 5회 / 8강 1회 24 18 7 3 8 25 26

14.2.2. AFC U-20 아시안컵

연도 결과 순위 승점 경기 득점 실점
AFC youth championship 대회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59 말레이시아
불참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60 말레이시아
파일:태국 국기.svg
1961 태국
파일:태국 국기.svg
1962 태국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63 말레이시아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1964 남베트남
파일:일본 국기.svg
1965 일본
파일:필리핀 국기.svg
1966 필리핀
파일:태국 국기.svg
1967 태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8 대한민국
파일:태국 국기.svg
1969 태국
파일:필리핀 국기.svg
1970 필리핀
파일:일본 국기.svg
1971 일본
파일:태국 국기.svg
1972 태국
파일:이란 국기.svg
1973 이란
파일:태국 국기.svg
1974 태국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1975 쿠웨이트
8강 6위 8 5 2 2 1 6 3
파일:태국 국기.svg
1976 태국
8강 8위 5 4 1 2 1 7 8
파일:이란 국기.svg
1977 이란
불참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1978 방글라데시
조별리그 10위 3 3 1 0 2 3 4
파일:태국 국기.svg
1980 태국
예선 탈락
파일:태국 국기.svg
1982 태국
준우승 2위 5 3 1 2 0 4 3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1985 UAE
우승 1위 7 3 2 1 0 5 3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1986 사우디
예선 탈락
파일:카타르 국기.svg
1988 카타르
조별리그 8위 0 3 0 0 3 3 9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1990 인도네시아
예선 탈락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1992 UAE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1994 인도네시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 대한민국
준우승 2위 15 6 5 0 1 16 9
파일:태국 국기.svg
1998 태국
조별리그 6위 4 4 1 1 2 7 8
파일:이란 국기.svg
2000 이란
4강 3위 11 6 3 2 1 7 5
파일:카타르 국기.svg
2002 카타르
8강 6위 4 4 1 1 2 7 10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2004 말레이시아
준우승 2위 13 6 4 1 1 10 3
파일:인도 국기.svg
2006 인도
8강 5위 9 4 3 0 1 5 3
AFC U-19 챔피언십 대회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2008 사우디[142]
8강 5위 8 4 2 2 0 9 1
파일:중국 국기.svg
2010 중국
8강 7위 7 4 2 1 1 6 4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2012 UAE
조별리그 15위 0 3 0 0 3 2 5
파일:미얀마 국기.svg
2014 미얀마
8강 7위 5 4 1 2 1 5 6
파일:바레인 국기.svg
2016 바레인
조별리그 13위 1 3 0 1 2 0 3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2018 인도네시아
조별리그 11위 3 3 1 0 2 2 2
AFC U-20 아시안컵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2023 우즈베키스탄
8강 7위 4 4 1 1 2 5 6
파일:중국 국기.svg
2025년 중국
? ? ? ? ? ? ? ? ?
합계 본선진출 19회 / 우승 1회 112 76 31 19 26 109 95

14.3. U-17 대표팀

2024년 2월 6일, 중국 남자 축구 역사상 최초의 일본인 출신 우에무라 겐이치 감독을 선임하였다. 보통 이 서로의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는일은 아예 없었으며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 이전에 중국축구협회측은 성인대표팀을 한국의 최강희 감독 아니면 서정원 감독에게 말길려 했으나 거절을 당했었다.

14.3.1. FIFA U-17 월드컵

연도 결과 순위 승점 경기 득점 실점
파일:중국 국기.svg
1985 중국
8강 8위 7 4 2 1 1 8 7
파일:캐나다 국기.svg
1987 캐나다
예선 탈락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89 스코틀랜드
조별리그 10위 4 3 1 1 1 1 3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91 이탈리아
조별리그 14위 1 3 0 1 2 4 7
파일:일본 국기.svg
1993 일본
조별리그 14위 1 3 0 1 2 2 5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1995 에콰도르
예선 탈락
파일:이집트 국기.svg
1997 이집트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1999 뉴질랜드
파일:트리니다드 토바고 국기.svg
2001 트리니다드 토바고
파일:핀란드 국기.svg
2003 핀란드
조별리그 14위 1 3 0 1 2 5 7
파일:페루 국기.svg
2005 페루
8강 7위 5 4 1 2 1 4 7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 대한민국
예선 탈락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2009 나이지리아
파일:멕시코 국기.svg
2011 멕시코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2013 UAE
파일:칠레 국기.svg
2015 칠레
파일:인도 국기.svg
2017 인도
파일:브라질 국기.svg
2019 브라질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2023 인도네시아
파일:국기.svg
2025 FIFA U-17 월드컵
합계 본선진출 6회 / 8강 2회 19 20 4 7 9 24 36

14.3.2. AFC U-17 아시안컵

연도 결과 순위 승점 경기 득점 실점
AFC U-16 Championship
파일:카타르 국기.svg
1985 카타르
조별리그 6위 2 3 0 2 1 2 3
파일:카타르 국기.svg
1986 카타르
예선 탈락
파일:태국 국기.svg
1988 태국
4강 3위 10 6 2 4 0 7 4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1990 아랍에미리트
4강 3위 10 5 3 1 1 11 2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1992 사우디아라비아
우승 1위 11 5 3 2 0 9 4
파일:카타르 국기.svg
1994 카타르
조별리그 5위 6 4 2 0 2 14 5
파일:태국 국기.svg
1996 태국
조별리그 6위 4 4 1 1 2 5 10
파일:카타르 국기.svg
1998 카타르
예선 탈락
파일:베트남 국기.svg
2000 베트남
조별리그 5위 6 4 2 0 2 13 12
AFC U-17 Championship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2002 아랍에미리트
4강 3위 15 6 5 0 1 13 4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2004
우승 1위 15 6 5 0 1 10 5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2006 싱가포르
8강 6위 7 4 2 1 1 10 5
AFC U-16 Championship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2008 우즈베키스탄
조별리그 9위 4 3 1 1 1 4 4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2010 우즈베키스탄
조별리그 13위 1 3 0 1 2 1 4
파일:이란 국기.svg
2012 이란
조별리그 9위 3 3 0 3 0 4 4
파일:태국 국기.svg
2014 태국
조별리그 11위 3 3 1 0 2 2 6
파일:인도 국기.svg
2016 인도
예선 탈락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2018 말레이시아
AFC U-17 아시안컵
파일:태국 국기.svg
2023 태국
조별리그 13위 1 3 0 1 2 4 9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2025년 사우디
? ? ? ? ? ? ? ? ?
합계 본선진출 15회 / 우승 2회 98 62 27 17 18 109 81

15. 관련 문서

1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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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국가족구대. 중국에서는 축구를 족구라 한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족구라 부르는 놀이는 한국에만 있는 것. football의 어원을 보면 족구로 번역하는 게 더 정확하긴 하다.[2] Elo 레이팅스는 상시 나오는 것이므로, 가장 최근 A매치와 그 직전 A매치 사이의 순위변동을 기입함.[3] 하오하이둥이 중국공산당을 비판하는 영상을 올리자 중국축구협회는 그의 모든 기록을 말소하여 인정하지 않고 있다.[4] 이 경기에서 네이마르가 A매치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5] 2002년에 중국의 이웃 나라들이 개최한 월드컵 때는 홈 유니폼이 적색이 아닌 백색이었다. 이후 붉은색으로 변경했는데, 중국에서는 하얀색이 죽음을 암시한다는 등으로 기피되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로 붉은색은 복(福)의 색으로 여기어 전통 장식에도 많이 사용하는 등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색이다. 또한 붉은색은 비단 중국이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은 나라의 축구 대표팀 유니폼에 사용되는 색깔이다.[6] 아시아의 최강이라는 한국과 일본은 모든 종목 기준으로는 뚜렷하지 않다. 한국의 경우 축구는 적색이지만 야구를 비롯해서 청색을 쓰는 종목도 상당히 많고, 일본은 축구는 청색이지만, 다른 종목들을 보면 적색, 흑색도 있는 등 중구난방이다.[7] 사실 말이 약체지 실제로는 아시아 내에서는 물론이요 세계 기준으로도 평균 이상은 된다. 문제는 이 전력은 중국의 체급에 걸맞지 못하는 전력이라서 약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월드컵에 겨우 1번밖에 진출하지 못한 게 상당히 크다.[8] 실력도 실력이지만 축구는 정치, 사회랑 관련이 전혀 없어서 어떤 욕을 해도 허용되기에 중국인들의 주된 화풀이 대상이라고 한다. 심지어 국영방송 CCTV에서도 유머 소재로 공공연하게 방송할 정도이다. #[9] 사실 라이벌이라는 건 중국만의 착각일 뿐 한국과 일본은 중국을 한 수, 두 수 아래로나 볼 뿐이지 절대로 라이벌이라 여기지도 않는다.[10] 또한 당시 축제 분위기였던 한국과 일본과 달리 중국은 이런 기사까지 나면서 암울한 상황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11] 문제는 그러고도 중국은 뉴질랜드와 2연전 모두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1차전은 0:0으로 무재배를 거뒀고, 2차전은 1:2로 패배했다. 한술 더 떠서 올림픽 대표팀은 두 경기 다 패했다. 심지어 연령도 더 높았는데도 말이다.[12] 지금은 막장이지만 그 당시 필리핀은 알칸타라 같은 당대 초대형 축구스타를 배출했던 축구 강국이었다.[13] 당시의 잉글랜드 축구팀은 지금과는 달리 지상 최강의 팀이었고 1930년 월드컵 우승국 우루과이를 비웃고 1934년 월드컵 우승국 이탈리아와 직접 맞붙어 발라버렸다. 당시 잉글랜드는 월드컵이 너무 질이 떨어져서 불참하던 그런 팀이었다.[14] 이 당시에 출전한 선수 중에는 홍콩 배우 알란 탐의 아버지인 담강백이 있는데, 아시아 축구왕이라고 불리던 선수였다. 이 사람은 중국이 공산화되자 홍콩에 정착했다.[15] 이전 중화민국 대표팀과 구별하는 의미에서[16] 당시 1958 스웨덴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3차 예선까지 있었다.[17] 이 때 쫓겨난 중화민국(대만)은 1973년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의 이름으로 재가입했고 중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1975년부터 1989년까지 오세아니아 축구 연맹에 소속하기도 하였다.[18] 만약 개최국을 제외하고 아시아에 4.5팀이면 총 6.5팀을 보내준 셈이니 그 자체로 진출 확률이 올라가는 거지만, 본선은 32개국만 나가니 그렇게 아시아에 몰아주진 않았다. 4.5팀 중 한국과 일본이 2팀이니 남은 아시아는 2.5팀뿐. 첫 32개팀 체제였던 1998년 대회의 3.5팀보다는 하나 늘었지만 2006년부터 한국과 일본의 선전 때문인지 4.5팀으로 확대되었으니 중국이 번번이 미끄러진 이후 대회들과 같은 자릿수다.[19] 그래서 중동에서는 FIFA가 돈줄을 노리고 조편성을 조작했다고 믿고 있다.[20] 당시 아일랜드는 얼마 뒤 월드컵 본선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하고 스페인과 혈투를 벌인 끝에 승부차기로 아쉽게 탈락한 돌풍의 팀이었다.[21] 호주는 2005년 여름에 아시아로 이적했고, 2007년 남아공 월드컵 예선부터 아시아 소속으로 참가한다. 만약 호주가 저때부터 아시아 소속이었다면 중국 같은 약팀으로선 본선 진출은 꿈도 못 꿨을 것이고, 설상가상으로 호주가 아시아로 이사온 지금은 월드컵 진출이 더 어려워졌다.[22] 한국 관중들이 일본 관중들처럼 남의 경기에서 강팀, 인기팀만 일방적으로 편드는 짓은 없었지만, 쟤보다 못하면 안되는데 생각으로 지켜봤던 일본팀과는 달리 중국팀에게는 아예 관심 자체가 없었다. 중국관광객을 비롯한 원정팬들을 제외하면 당시 재한 중국인이나 화교, 조선족들이니 소소하게 모여서 응원한 정도. 그리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역사적인 이유와 중국 불법어선, 중국 농산물 문제 등으로 묻지마 까임을 당하기도 했다.(비슷한 이치로 미국팀도 한국에서 오노 사건 등으로 반미감정이 파다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부시정부만 비난했을 뿐 그래도 미국인과 미국인 관광객들에겐 호의적인 국민들이 대부분이어서 미국 선수단은 한국인들에게 오히려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당시 한국인들 중 자국팀이 4강까지 갈 거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1승부터라도 하자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 대회가 개최국이 2개였기 때문에 종전 방식으로 토너먼트를 하면 한국에서 경기한 팀은 계속 한국에, 일본에서 경기한 팀은 계속 일본에 있게 되는 문제가 있어서 A조와 C조, E조와 G조는 조별리그를 통과한 후 다른 국가에 가야 했다. 그래서 D조의 한국이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하든 2위로 통과하든 C조의 중국과 만날 일은 두 국가 모두 결승전에 진출하는 방법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C조에는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해 도와준 튀르키예(당시 터키)가 있었기 때문에 C조의 스포트라이트는 세계 최강급 팀인 브라질과 상기의 이유가 있는 튀르키예가 양분했다. 튀르키예와 중국의 경기에서 중국을 응원한 한국인보다 튀르키예를 응원한 한국인이 훨씬 더 많은 이유였다. 브라질과 중국,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경기에서 브라질과 코스타리카를 응원하는 한국인이 더 많았다.[23] 지금 올림픽은 23세 이하 대표팀이 출전 하지만 88년 서울 대회 까지는 A대표팀이 올림픽에 출전했다. 연령별 대표팀이 출전한 건 다음 대회인 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다.[24] 그나마 중국 축구의 전성기는 2000년 ~ 2004년까지로 볼 수있으며, 이 시기에 2000년 아시안컵 4위, 2002년 월드컵 본선진출(조별리그 3패), 2004년 아시안컵 준우승을 이뤘다. 2005년엔 해외파를 제외한 한일 양국을 제치고 동아시안컵 우승까지 해냈다.[25] 이 항목에서 같이 언급된 5명 중 가장 큰 활약을 했다. EPL무대에서 100경기를 넘게 뛰었고, 그만큼 실력도 좋았기 때문에 암흑기 시절 맨시티 레전드로 기억하는 현지 팬도 많다.[26] 1차 예선 8조에서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베트남을 밀어내고 최종예선에 올라갔으며, 최종예선 A조에서 사우디, 이란, 카타르, 쿠웨이트라는 중동 강팀들과 한 조가 되었다. 이 조에서 3승 2무 3패를 기록하며 3승 3무 2패를 기록한 이란에 승점 1점차로 밀리며 탈락했다. 사실 이란을 넘었다 해도 일본과의 플레이오프를 이겨야 했고 여기서 패배시 오세아니아 1위인 호주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거쳐야만 했기에 본선 진출은 역시 힘들었을 것이다.[27] 물론 최종예선이 12개국 체제로 확대된 덕도 있다. 하지만 득실차로 아쉽게 밀린 2006년 예선이라면 모를까, 2010년, 2014년 예선 때 보여준 퍼포먼스로는 아시아 12위 안에 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28] 그 전에도 몇 번인가 최종예선에 올라온 적이 있기는 한데, 당시 중앙아시아 국가들(우즈베키스탄 등의 강팀들)은 소련에 소속되어 있어 존재 자체가 없었고, 아예 월드컵 예선에 불참하는 국가들도 상당히 많았다. 때문에 경쟁이 지금만큼 치열하지 않아서 지금과 1대 1로 비교하기는 힘들다.[29] 아시안컵 승점수로만 따지면, 중국은 이란, 한국, 일본에 이어 4위다. 본격적으로 중화민국을 축출하고 나온 1976년부터 따지면, 준우승(1984, 2004)에 3위(1976, 1992), 4위(1988, 2000). 이 기간동안 한국(준우승 3번(1980, 1988, 2015), 3위(2000, 2007, 2011), 4위(0번)과 비교해보라.[30] 다만 리그가 워낙 돈이 몰려서 고연봉을 받기 때문에, 중국 선수들이 해외진출을 기피하고, 이렇게 고인물이 되다 보니 고연봉에 비해 실력이 별로라는 지적은 맞다. 중국리그와 중국 국대가 EPL과 잉글랜드의 나쁜 점을 닮아가는 것이다.[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쑨지하이는 리그에서 강팀은 아니었지만 맨시티에서 몇 년간 주전으로 상당한 활약을 했고, 리톄에버튼에서 어느 정도 활약했다.[32] 중국인 선수 입장에서는 스폰서 빨로 빅리그나 빅클럽에 가봤자 벤치 신세만 지고, 그보다 수준이 낮은 유럽 리그들에서 천신만고 끝에 주전으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10~20억의 연봉이 보장된 중국 리그 주전보다 돈을 훨씬 적게 준다. 거기다가 세금도 엄청나게 떼인다. 이런 리스크를 보면 개인 입장에선 답이 나온다. 축구팬들 입장에선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또는 "도전이 아름답다"고 쉽게 말하지만, 선수 본인의 입장에서는 어떤 것이 합리적일지는 불문가지다. 일부 축구팬들이 주장하듯이 딱히 중국인들의 멘탈이 나빠서가 아니다.[33] 일본, 이란, 바레인, 북한(B조)[34] 조 4위이자 최종 16강 조별리그 14위는 같은 1무 2패지만 1득 7실(득실차 -6)로 골득실에서 밀린 뉴질랜드.[35] 사실 이때 프랑스를 이긴 것도 중국이 잘 해서 이겼다기보다는 당시 프랑스가 중국보다도 더 개노답이라서 그나마 이겼던 것이다. 이후 프랑스는 월드컵 본선에서 남아공 쇼크라는 대사건을 일으킨다.[36] 여담으로 같은 조에 편성된 괌이 중국과의 경기 전 자신들이 잡아본 인도도 중국을 상대로 선전한만큼 자신들도 해내겠다며 의지를 불태웠지만, 아무리 톱시드 최약체라도 중국이 호구급은 아닌지라 무난하게 밟혔다.[37] 게다가 저 1골도 승부처에서 들어간 골이 아니라 경기 흐름이 완전히 넘어간 후반전 추가시간에 간신히 넣은 골이기 때문에 스탯관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38] 그런데 사실 축구의 불모지라고는 하지만 저 베트남은 일본과 무승부를 기록한 나름 강팀인 박항서호 베트남이었다.[39] 6위가 베트남이긴 하지만, 베트남은 최종예선은 난생 처음인데다가 중국보다도 더 약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사실상 이 조 꼴찌인 셈이다. 게다가 중국은 예선 도중 베트남한테 사상 최초로 패하는 굴욕까지 당했었다.[40] 영상에도 나왔다시피 한 관중은 우레이의 삽질에 열받아 화가 치밀어 호흡곤란으로 병원에 실려갔다.(...)[41] 태국이 싱가포르 상대로 3:1 승리했기 때문에 현재 태국이 2위고 중국이 3위이다. 하지만 중국은 C조 최강 대한민국과 경기를 치른 반면 태국은 최약체 싱가포르에게서 얻은 승리이므로 큰 의미는 없는 셈이다.[42] 한국과 일본이 있으면 중국은 웬만해서는 시드를 받기 힘드므로 자칫 잘못하면 이 두 팀, 혹은 이 두 팀에 필적하는 이란이나 사우디 등과 한 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강팀인 한국 일본이 없고 진출권 2장이 줄어드는 상황이 조편성에 더 유리한 것.[43] 뒤에서 1위는 독일에게 0:8로 털린 사우디아라비아였다.[44] 당장 4년 전 대회에서 중국보다도 훨씬 강한 대한민국이 네덜란드에게 5:0으로 처참하게 박살난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으로선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시 개최지가 네덜란드와 인접한 프랑스여서 중립 경기장이지만 사실상 원정 경기였음은 감안해야 한다.[45] 윈난성 성도 쿤밍(해발 1,891m)에 위치해 있다.[46] 홈&어웨이 방식의 A매치에서 경기장 선택은 홈팀의 권리다. 물론 2010년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는 이걸 오히려 악용하는 바람에 브라질과의 홈 경기에서 1-3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47] 2012년 5월 30일 친선경기.[48] 다만 우즈베키스탄은 중국에서 치러진 2007년 친선경기에서 3-1로 이기긴 했다.[49] 허페이(합비) 경기장에서 진행하였다.[50] "下课!(감독 짤라라!)", "解散!(대표팀 해산하라!)", "傻屄!(X신!)"를 외쳤다.[51] 다만, 이 기사는 대만 언론을 인용한 것이고, 그 대만 언론조차도 카더라 통신이라 신빙성은 그다지 없다. 한국 언론들보다도 신빙성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게 대만 언론이다. 또한 중국은 전통적으로 지도자가 대놓고 정서를 드러내는 걸 굉장히 꺼린다는 점도 있다.[52]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스페인 감독이었던 그 사람 맞다. # 1970~1980년대 현역 선수 시절에는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활동했으며, 울리 슈틸리케의 팀 동료였다.[53] 하지만 시리아에게 진 게 비웃을만큼 시리아가 아주 약팀은 아닌 게 슈틸리케호도 2016년에는 0-0으로 비겼고 2017년 3월 홈에서 겨우 1:0으로 승리했다. 말하자면 중동축구에 약한 것은 한중일 동아시아 팀이 가진 징크스다.[54] 다만 2017~2022년 당시의 베트남은 박항서 감독 지휘 하에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렇다 쳐도 베트남에게 패배할 가능성이 높게 예상되진 않았다.[55] 27전 7승 7무 13패.[56] 그런데 1980년대 중국이 한국을 격파한 경기는 1983년 12월 17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머라이온컵(2-0), 1984년 9월 3일 메르데카컵(1-0), 1986년 1월 18일 인도 네루컵(2-1)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경기들은 A매치 기록에는 올라 있으나 당시에는 프로의 출전 자격이나 규정 등의 미비함 때문에 참가한 대표팀조차도 1진팀은 전혀 없었다. 이렇다 보니 현재의 A매치와는 많이 다르기에 FIFA에서도 공인 A매치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머라이온컵이나 네루컵은 한국이 2진팀을 보냈고 이 대회들은 20세 대표팀 훈련이나 2진팀 훈련을 겸해서 보내던 목적이 컸기에 한국에서 듣보잡이 되어버렸다. 메르데카컵도 마찬가지라 1984년 대회조차도 한국은 20세 이하 대표팀을 보냈으며 중국 또한 2진팀을 보냈는데 한국은 중국 2진팀에게 졌지만 다른 경기는 모두 이겨 그 대회를 우승했다.[57] 특히나 탁구는 거의 모든 중국인들이 생활 스포츠로 즐길 정도의 종목이자 국민 스포츠이다.[58] 2002 한일 월드컵 당시의 중국 선수들은 비록 조별리그 3전 전패에 무득점 9실점을 기록했지만 뱃살만 나와 있는 현재 중국 선수들과는 달리 철저한 몸관리와 태양 아래에서 엄청난 연습량으로 인해 구릿빛 피부와 탄탄한 복근을 갖추고 있었으며, 현재보다 훨씬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59] 국가대표 돼지라는 뜻으로, 한국식으로 줄여 부르면 '국돼' 정도가 된다.[60] 구글에 白斩鸡를 입력하면 자동완성으로 白斩鸡 国足이 뜰 정도다. #[61] 중국 슈퍼 리그에서는 전반전이 끝나면 선수들이 락커룸에서 담배를 피우는 등 자기관리가 심각하게 부실했다고 한다.[62] 그래서, 중국의 네임드 축구팬 중에서는 이른바 "환불해!"(退钱!) 따거가 유명하다. 과거 중국 국대의 경기가 졸전으로 끝난 뒤 한 앵커가 관중과 인터뷰를 하던 중 졸전에 극대노했던 남성 한 명이 "우리를 볼 면목이 있냐! XX놈들아! 환불해!" 라며 욕설을 퍼붓고 이에 앵커가 당황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영상이 중국 웹에서 유명해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해당 발언 직전 앵커의 발언이 "축구 팬들은 마지막 1초까지 국가대표 축구팀의 곁을 지켰습니다." 라는 발언이였다. 참고로 해당 남성은 실제로 거의 모든 중국 대표팀의 경기에 찾아갈 정도로 네임드급 치우미(중국 축구 국대 서포터즈)라고 전해진다.[63]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중국 대표팀은 3패를 당했지만 적어도 그 당시의 중국 선수들은 철저한 몸관리로 탄탄한 복근을 갖추고 있었고 현재보다 그나마 좋은 플레이를 보였다. 그러나 현재 중국 선수들은 직업의식이 있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실한 몸관리로 피지컬도 최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64] 2010 ~ 2022 이 4개 대회를 보면 지역예선에서 떨어진 2018년을 제외한 3개 대회에서 모두 16강에 올랐다.[65] 정작 해당 대회에선 3전 전패(0득점 9실점)라는 굴욕적인 성적을 받아들인 채 일찍이 대회를 마쳤다.[66] 또한 이 경기는 중국의 지역예선 탈락 확정 경기이기도 하다.[67] 실제로 이 시기에만 양첸, 쑨지하이 등 유럽에서 나름의 성과를 낸 선수들이 나왔다.[68] 게다가 경기기록을 보면 리피가 각 평가전마다 계속 포메이션과 선수 포지션을 바꾸는데, 카타르(4-3-3), 바레인(4-4-2), 인도전(4-2-3-1, 위다바오 원탑), 팔레스타인전(3-4-3), 주공격수(좌, 우 모두 기용) 우레이, 가오린, 수비수(or 미드필더) 펑샤오팅, 골키퍼 옌준링의 붙박이를 제외하면 멤버를 계속 바꾸면서 테스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9] 아무리 리피가 전성기가 지났어도, 월드컵과 챔스 우승경력이 있는 초일류 감독인데 자신의 말년을 먹칠하는 태업을 벌일 정도로 무개념한 사람은 아니다.[70] 농구는 이미 1980~90년대부터 아딜잔 쉴레이만 등 여러 위구르계들이 국가대표 주축으로 활동했었다.[71] 이런 위구르 선수들은 국제무대에서 쓸 이름도 라틴 문자 스펠링이 한어병음과 너무 다르다 보니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인 기자들마저 애먹인다. 모르는 사람들한텐 외국에서 온 귀화선수라 오해받기도 다반사. 이 기사에 따르면 한국 기자가 중국 선수 이름을 못 읽고 쩔쩔매다 엘케손 같은 귀화선수냐고 중국인 기자한테 물어봤더니 자기들도 잠시 뜸 들이다가 신장 출신이라서 그렇다고 답을 해줬다고 한다.[72] 본명 타이어스 브라우닝, 조부가 중국인인 혼혈3세다.[73] 본명 페르난지뉴[74] 중국시간[75] 일본 및 한국시간[76] 참고로 이 경기가 이번 대회 예선에서의 중국의 유일한 승리 경기다. 그나마도 원정에서는 패했다.[77] 당장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하노이 참사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다.[78] 심지어 중국보다 더 약체인 나라들조차도... 이는 중국 국가대표팀 자체도 상대할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약체인 점도 있고, 중국 축구가 반칙에 무심해서 부상을 입을 우려가 있다는 점, 최근 코로나19와 더불어 자국은 높이고 타국은 무시하는 국수주의 행보에 전세계 모두가 반발감을 가진 점도 한 몫 했다.[79] 해당 대회는 당해 가을, 카타르가 대리 개최국으로 확정되었다.[80] 이 날 경기는 얀코비치의 데뷔전 경기이기도 하다.[81] 더불어서 뉴질랜드 역시 경기력이 좋지 않았던 것은 도찐개찐이었다.[82] 물론 경기 결과는 처참했다. 웨일스에겐 0-6으로 박살났고, 크로아티아는 2진을 상대했는데도 1-1 졸전 끝에 승부차기로 간신히 이겼다. 세르비아에겐 0-2, 콜롬비아에겐 0-4로 갈려나가며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83] 왜 이러냐면, 골을 넣은 상태로 비겼다면 다득점에서 득점을 하나도 못한 중국이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닌 게 C조에서도 팔레스타인 vs 홍콩의 경기도 무승부가 나와줘야 한다. 그렇지만 야속하게도 시리아와 인도는 1 : 0, 팔레스타인과 홍콩은 3 : 0으로 끝나면서 중국의 의도했던 무득점, 무승부 경기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84] 애초에 카타르와 사우디는 월드컵만 많이 못 나갔을 뿐 카타르는 직전 아시안컵 디펜딩 챔피언인 데다 2010년 중후반부터의 과감한 투자로 국대의 수준이 많이 올라왔으며, 사우디는 직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격파한 팀이다. 대한민국도 당장 카타르나 사우디와 붙어도 승리를 쉽사리 장담하기 힘든 마당에 하물며 약체화된 중국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85] 크로아티아 출신인 브란코 이반코비치의 그 동안의 이력들을 쭉 봐도 중국과 인연을 제외하면 감독으로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2000년대 이후 중국대표팀이 불러댄 엄청난 감독 라인업에 비하면 축구굴기가 사그라드는 것처럼, 감독의 네임밸류도 점차 사그라지는 느낌이다. 직전의 세르비아 출신 알렉산다르 얀코비치의 경우도 이미 이전에 비해 네임밸류는 많이 내려가긴 했지만 그래도 브란코보다는 이력이 화려한 편이었다. 그 전에는 이탈리아를 FIFA 월드컵 우승시킨 경력을 가진 세계 최고 연봉의 끝판왕 마르첼로 리피를 데려와서 세계를 경악시켰고, 그 중간에 선수로는 레전드, 감독으로도 중국리그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던 파비오 칸나바로를 앉히기도 했다. 그 이전에도 스페인 출신 세계적 명장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일본이 필립 트루시에를 부른 데 착안한 듯 프랑스에서 좋은 감독으로 평가받던 알랭 페랭, 그 뒤에는 한국이 계속 네덜란드 출신 감독들로 재미를 본 것에 주목한 듯 네덜란드 출신 아리에 한도 불렀었고, 더 이전에는 세르비아 출신으로 맡았던 모든 나라들을 16강에 진출시켜 16강 제조기로 불린 보라 밀루티노비치까지 검증된 명장이란 명장들은 거의 다 불러모았었다. 축구 변방인 중국이 이들을 부르기 위해 지불한 금액도 당연히 엄청났다. 2000년대 이후로 한정해서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이 외국인 감독들을 선임하면서 비록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결국 어떻게든 월드컵 등에서 성과를 내고 있으며 점진적으로 전력을 상승해 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가장 막대한 돈을 투자한 중국의 실패는 심각해도 너무 심각한 상황이다.[86] 더군다나 작년 가을에 있었던 자국 홈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에 0:3으로 참패했기 때문에 더 불리할 한국 원정 경기에서 승리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그나마 태국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내홍과 위르겐 클린스만이라는 감독 문제에 힘입어 무승부라는 성과(?)라도 얻었지만, 현재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도 김도훈 임시 감독을 영입하면서 어느 정도 추스린 상황이라 그런 행운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거기다 현재 한국은 호주와 피파랭킹 점수도 큰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시드를 얻기 위해서 이번 중국전에서 꼭 대승만이 필요한 상황이다.[87] 태국이 싱가포르를 2골차로밖에 못 이기거나 이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거나 반대로 싱가포르가 태국을 이기면 중국은 3차예선에 진출할 수 있다.[88] 놀랍게도 지난 월드컵 최종예선(현 3차예선) 때와 조 편성이 매우 유사하다. 일본, 호주, 사우디와 이번에도 대면하였고 중동 복병이 오만 대신 바레인으로 6포트 동남아시아 팀이 베트남 대신 인도네시아로 배정된 것까지 정말 많이 닮았다.[89] 호주 역시 초반 2경기를 1무 1패로 마치며 벼랑 끝에 몰려서 호주와 중국 모두 사실상 단두대 매치가 되었다.[90] 심지어 외신들 중에서도 이제야 중국의 월드컵이 보인다며 희망 섞인 언론 보도를 내보이는 언론사도 있다.[91] C조에서 가장 강한 일본을 먼저 다 상대했기 때문이다.[92] 당시 한국 팀은 왼쪽 수비 라인에서 약점을 보이고 있었는데, 중국 팀은 전반에 두 골을 얻어맞아가면서까지 이를 간파하고 공략해 결국 역전승을 거머쥐었다. 여자 아시안컵 최다 우승국 다운 노련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93] 남자 대표팀은 앞서 언급했던 여자 대표팀과는 달리 베트남 원정경기에서조차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여자 대표팀 선수가 남자 대표팀 선수의 머리를 떼어 축구공으로 쓰는 픽토그램이 유행을 탔을 정도다.[94] 당시 중국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라 월드컵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95] 기존의 중국을 관할하던 중화 축구 연합회는 1949년 국부천대와 함께 해체되었고, 현 중국 축구 협회의 전신인 중화전국체육총회는 1952년에 FIFA에 가입했다. 중국 축구 협회는 이때 FIFA에게서 중화 축구 연합회의 승계를 인정받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중화민국 축구 협회(대만)는 1954년에 설립되고 FIFA에 가입한 중화 전국 축구 위원회가 중화 축구 연합회를 재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아시아 축구 연맹 사이트에선 두 주장 모두 받아들여 중국과 대만 축구협회의 창설년도를 1924년으로 맞췄다.중국대만[16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97]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예선 1차 1조 탈락으로 인도네시아와 1차전 0:2 패배, 2차전 4:3 승리를 거두었으나 골 득실 차이로 탈락하였다.[98] 대만 문제 때문에 FIFA를 함께 탈퇴했으나 1976년에 마오쩌둥 사망한 직후 FIFA에 재가입했다.[24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100]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 아시아가 타대륙과 같이 경쟁한 마지막 합동예선이었고 86월드컵 지역예선부터 아시아는 단독으로 월드컵 2장 가지게 된다. 최종예선 3위로 탈락했으며, 당시에는 최종예선 1위가 월드컵 직행, 2위와 3위는 단판 플레이오프를 통해 월드컵에 직행하였는데, 2위 뉴질랜드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1로 패배하여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2002년 본선 진출 이전에 가장 월드컵에 근접한 지역예선이었다.[24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102] 아시아 지역 예선 1라운드 4그룹 A조 2위로 탈락했으며, 중국한테 비빌수는 있냐고 무시했던 홍콩한테 져서 탈락했다. 5.19 사건[24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104]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4위로 탈락했다. 월드컵에 직행할 수 있는 2위와는 승점이 2점차였으며, 당시에는 승리시 승점 2점/무승부시 승점 1점이었다.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인 5차전 카타르 전 승리시 UAE 제치고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24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106] 아시아 지역 예선 1라운드 1조 2위로 탈락했다. 이라크, 중국, 예멘, 요르단, 파키스탄이 조를 이뤄 1차리그 요르단, 2차리그 중국에서 경기하였다. 2차리그에서 4승을 거뒀으나 1차리그에서 예멘에게 충격패를 당하여 그 여파로 최종예선에 올라오지 못했다. 대신 이라크가 올라와 우리 입장에서는 이라크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32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108]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A조 3위로 탈락했으며, 당시에는 최종예선 A-B조 2위 간 플레이오프를 통하여 승자에게 월드컵 직행 자격을 주었고, 패자에게는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자격을 통한 월드컵 출전 자격이 주어졌다. 중국은 이때 2위와 승점 1점 차이로 탈락하였다.[109] 대한민국과 일본이 빠진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까지 올라가 B조 1위로 진출 자격을 부여받았다. 당시 FIFA랭킹은 사우디, 이란, 태국에 이어 4위였으나, FIFA에서 흥행을 위하여 1차예선 성적을 기준으로 시드를 부여 사우디와 함께 1번 시드를 부여받아 운 좋게 사우디와 이란을 피했다. 당시 최종예선 진출팀 10팀 중 각각 1무 또는 1패가 있었으나 사우디, 중국, 이란 3팀만 전승이었다.[110] 최하위는 독일전에서 0:8 대패를 당한 사우디 덕분에 겨우 면했다. 사우디가 중국보다 3실점(0득 12실)이나 더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사우디는 이후로도 세 차례의 대회를 더 나가 2승을 거뒀고 당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까지 잡는 이변을 연출했으니, 사실상 최대의 치욕을 입은건 중국이다.[32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112] 아시아 지역 예선 2라운드 4조 2위로 탈락했다. 2차예선 4조에서 쿠웨이트 5승1패 15득/2실, 중국 5승1패 14득/1실로 다득점에서 밀려 탈락하였다.[32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114] 아시아 지역 예선 2라운드 1조 4위로 탈락했으며, 3차예선에서 각조 4팀중 1,2위 두팀씩 최종예선에 올라가는 구조였으나 이때부터 아시아 예선에 참가한 호주, 202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하여 국가대표팀에 투자하는 카타르, 이라크 등과 1조에 편성 최하위로 탈락한다. 이미 최종예선 진출이 확정되어 힘을 뺀 6차전 호주 원정경기를 승리하는 등 원정경기 1승2무로 선전하였으나 홈경기를 1무2패로 말아먹었다.[32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116] 아시아 지역 예선 3라운드 A조 3위로 탈락했다. 3차예선에서 이라크, 요르단, 싱가포르 한조였다. 이라크, 요르단에 밀려 탈락하였다.[32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118]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A조 5위로 탈락했으며, 2차예선 각조2위 8팀 중 4개팀만 최종예선에 오르는 순위에서 북한에 앞서기 위하여 조1위인 카타르가 일부러 패하였다는 루머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북한이 필리핀 원정에서 패하는 경기력을 보였으나 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았다. 이로 인하여 2차예선 같은조였던 홍콩과의 경기가 주목을 받았고 이후 중국 프로축구 리그에서 홍콩인을 내국인에서 외국인으로 간주하는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홍콩이 카타르에게는 2패, 중국에게는 2무를 거뒀기 때문인데, 리그가 홍콩보다는 큰 무대에서 선수를 성장시켜줬더니 중국의 월드컵 발목을 잡았다는게 이유였다. 최종예선에서는 조 3위간 플레이오프를 치를 수 있는 3위와 승점 1점 차이였다. 홈 우즈베키스탄/대한민국, 어웨이 카타르와의 경기에서도 승리, 3승을 하는 등 선전하였다.[32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 실패했다.[120]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B조 5위로 탈락했으며, 이 대회를 치르면서 체면을 구겼다. 월드컵 최종예선에 처음 진출한 베트남을 상대로 코로나19로 홈 경기로 치렀어야 할 제3국 경기에서 3:2로 진땀승을 거뒀으며, 원정에서 1:3으로 완패했다. 이로 인해 베트남에게 월드컵 최종예선 첫 승리 및 승점을 내준 상대 팀, 그리고 동남아 팀에게 월드컵 최종예선 첫 승리를 내준 상대 팀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은 이 대회에서 유일한 승리가 베트남을 상대로 거둔 1승이 전부였다.[121] 1970년 월드컵 출전 당시 이스라엘은 AFC 소속이었다.[122] 당 대회 0득점 12실점을 기록한 최하위 32위 사우디는 제쳤다.[123] 1938년 월드컵 출전 당시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124] 1974년 월드컵 출전 당시에는 자이르[125] 이 쪽은 그래도 월드컵 준우승까지 해 본 국가인 스웨덴을 상대로 0:0 무승부를 거두며 승점 1을 딴 적이 있기 때문에 사정이 나은 편이다.[126] 브라질은 월드컵에서 동아시아 4개국(대한민국, 일본, 중국, 북한)을 모두 만나 이겼는데, 4개국 중 유일하게 브라질을 상대로 득점에 실패했다.[16개팀] 본선[128] 영국에 0:2 패하였고 대회 16강 토너먼트전 최종순위에서 노르웨이 4:0 터키, 페루 7:3 핀란드, 폴란드 3:0 헝가리의 타 경기 실점차이에서 앞서서 최종 12위 기록[16개팀] 본선[16개팀] 본선[131] 4강전에서 탈락 후 3,4위전 최종 3위[132] 4강전에서 탈락 후 3,4위전 최종 4위[133] 4강전에서 탈락 후 3,4위전 최종 3위[134] 4강전에서 탈락 후 3,4위전 최종 4위[135] 본래 개최국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하여 제로 코로나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개최 포기했다. 그리고 실제 개최연도는 1년 연기된 2024년이다[136] 최종적으로 오만(17위)보다 한 단계 낮은 18위에 기록되었지만 3전 무득점2무 1패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대회 일정을 끝마쳤다. 17위인 오만의 경우 2무 1패는 같으나 중국과는 달리 득점 기록이 있다(2득 1실)는 것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137] 순번상 중국 개최였으나 코로나 정책으로 인하여 개최권을 반납, 일본이 대신 개최하였다.[16개팀] 본선 올림픽 축구에 진출 실패했다.[16개팀] 본선 올림픽 축구에 진출 실패했다.[140] 최고순위 9위(2024 카타르)[141] 2021년 대회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취소[142] 이 대회부터 3.4위전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