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07:25:18

중국국민당

국민당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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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국민당
中國國民黨 | Kuomintang(KMT)[1]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00aa,#FFF> 창당일 1919년 10월 10일 ([age(1919-10-10)]주년)
중앙당사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중산구 바더로 2단 232-234
이념 보수주의
삼민주의
중화민국 내셔널리즘 (친중화민국)
양안통일주의[2]
반공주의 (공식적)[3]
역사적:[A]국민당 우파:
우익권위주의
후한민 사상(민국 전기)[7]
장제스 사상(민국 후기)[8]
중화사상
국민당 좌파:기타:
스펙트럼 중도우파[10] ~ 우익[11]
역사적 :[A]
주석 주리룬 / 초선 (4대)
입법위원
52석 / 113석 (46.02%)
직할시/현시장
14석 / 22석 (63.6%)
지방의회의원
393석 / 912석 (43.2%)
당색
파란색[13] (#0000AA)
국제조직


청년조직 중국국민당 청년단 (KMT)[14]
정책연구소 국가정책 연구기금회
교섭단체 범람연맹
당원 수 345,971명 (2020년 기준)
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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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3. 성향4. 상징5. 역사6. 조직
6.1. 중앙위원회
7. 역대 선거 결과
7.1. 총통 선거
7.1.1. 국민대회 간선제 시기7.1.2. 국민 직선제 시기
7.2. 입법위원·국민대회 선거
8. 중국공산당과의 관계9. 중국 본토의 중국국민당10. 기타11.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중화민국(대만)의 보수주의 성향의 정당이다. 대만에서 범람연맹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현 제1야당이기도 하다.

1919년 상하이에서 창당하여 1925년부터 1949년까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유일한 집권 정당으로서 중국 대륙을 지배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1949년 국부천대로 타이완 섬으로 쫓겨났다. 이후 대만을 독재적으로 지배하다가 대만의 민주화 이후 다당제 민주주의 체제의 정당으로 변화하였다.

2. 명칭

흔히 '국민당'이라고 줄여 부른다. 2024년 기준으로 동아시아에 유사한 당명을 지닌 당은 존재하지 않는다.[15]

유의할 점은 이 당의 정식 당명이 중국국민당이지 '대만국민당'이 아니라는 것. 이름이 이런 건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 중화민국이 실제로 대륙에 있었고 정말 '중국'이었던 시절에 창립된 정당이기 때문이다. 1949년 국부천대 이후로도 ‘중화민국’의 국체가 남아있기에 이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국민당은 당원과 지지자를 가리지 않고 ‘중국(중화민국)’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대만국민당’이라 부르면 크게 화를 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별로 좋은 반응을 안 보인다.

한국에선 종종 언론에서도 '대만 국민당'이라고 적는 경우가 많이 있긴 하지만 이건 '대만의 (중국)국민당'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다만 2007~2021년까지는 대만에 정말로 명칭이 ‘대만국민당’인 군소정당이 등록된 적이 있기 때문에 중국국민당을 ‘대만 국민당’이라 지칭하면 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현재의 국민당은 (중화인민공화국과 구분되는) 중화민국(대만)의 정당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젊은 당원들을 중심으로 의미가 없어진 '중국'을 떼버리고 그냥 '국민당'으로만 지칭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간혹 '중화 국민당'이나 '중화민국 국민당'으로 고치자, 한술 더 떠서 '대만 국민당'으로 바꾸자는 등의 말도 나오지만[16] 아직 국민당의 주된 분위기는 아니다. 화독[17] 성향의 장치천 입법위원이 국민당의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탈중국화의 움직임이 보이는가 했지만 2021년 주석 선거에서 장치천이 2위도 아닌 3위로 낙선하여 재선에 실패하고[18] 양안 교류 활성화를 내세운 주리룬이 당선되어 화독파는 도로 주도권을 잃었다.

한편 1993년 설립된 대만 신당에서는 중국국민당이 당명을 바꾸면 자신들의 당명을 중국국민당으로 개명할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3. 성향

삼민주의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국제민주연합(國際民主聯合, International Democrat Union)의 회원이다.

구 대륙 출신(외성인)이 이 정당을 많이 지지하며, 비록 그 방식은 공산당과 다르지만 대만 독립파들이 지지하는 경우가 많은 민주진보당과 달리[19] 궁극적으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점진적인 통일에 호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덕분에 21세기 들어선 상대적으로 친중공적인 면모도 보이고 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위주의 통일은 당연히 반대하고 양안통일의 주체는 "정통 중국"인 중화민국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즉, 통일 방식에 대한 세부적인 주장은 중국공산당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지만, 중국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원칙 면에서 공산당과 접점이 생기는 것. 다만 외신에서도 pro-China나 pro-PRC라고 보도하는 경우가 있으며, 한궈위 문서를 보듯 국민당의 친-중국공산당 스탠스는 홍콩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비판받기도 한다. 물론 색깔론적인 측면은 있는 게, 국민당은 중화민국 정통성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홍콩의 보수 우파인 친설립파 수준의 막가파 친중공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당은 다른 정당에 비해 지지층 비율상 외성인본성인이 나름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대만 원주민객가인들 역시 외성인 못지않게 국민당 지지세가 강한 편이다. 대만에서 지지층이 가장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정당이란 소리. 리즈 시절이긴 하다만 2012년 총통 선거 지도를 보면 객가인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주변 지역에 비해 시퍼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친민당이나 신당은 외성인이 압도적이며, 앞서 언급한 민진당은 본성인이 압도적이고 대만 제1 민족당은 원주민 위주의 정당이다. 다만 원주민은 인구 비율이 낮다보니 선거에서 큰 영향은 못 주는 편이다.

4. 상징

파일:중국 국민당기.svg

당의 깃발은 청천백일기, 처음에는 신해혁명 시기 쑨원의 세력을 대표하는 기였지만, 이를 토대로 중국국민당이 결성될 때 정식으로 당기로 지정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청천백일만지홍기 문서 참조.

당의 휘장(당휘)은 이 문서 제일 처음 보이는 표에 제시돼 있는 이미지와 같다. 중화민국의 국장(국휘)과 비슷해 보이지만 형태가 미묘하게 다르다. 중국국민당 당휘는 흰 태양의 햇살 문양의 크기에 정확히 맞춰서 원형으로 잘라낸 형태라면, 중화민국 국장은 햇살에서 바깥 쪽으로 여유를 두어 원형으로 잘라낸 형태다.

중화민국 국가 역시 중국국민당의 당가(黨歌)에서 유래한 것으로, 국가와 당의 상징물이 겹치는 부분이다. 그래서 중국국민당을 지지하지 않거나 대만 독립파들은 첫 소절 "삼민주의는 우리 당의 근본(三民主義 吾黨所宗)"을 부르지 않고 다음 소절부터 부르거나 아예 부르지 않기도 한다.

과도정부인 국민정부가 통치했던 시기 중화민국은 중국국민당에 의한 일당독재 국가였다. 각종 정부기관 시설에는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와 당기인 청천백일기가 나란히 게양되어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1948년 정식으로 헌법에 의한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0년대 실질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현재에도 국민정부 시기의 영향으로 한 국가의 상징과 일개 정당의 상징이 겹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중국국민당의 정치인들은 "민진당 정치인들이 당선되면 중화민국이 망한다"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공격하곤 한다. 예를 들면 궈타이밍 폭스콘 회장이 중국국민당에서 경선 후보로 있던 시절에는 항상 국기 모자를 쓰고 나라 사랑을 과시하며 차이잉원에게 분홍 국기 모자를 선물해주고 싶다고 했다.


2000년 총통 선거에서 롄잔이 민진당 천수이볜과 대결할 때의 선거 광고로, 중화민국 국기가가 불리다가 중간에 "얼마나 많은 국기가 대만 독립파들에 의해 태워지고 있는지 아십니까?"라고 마타도어를 시전했으나 결과는 낙선.



2012년 총통 선거에서 마잉주가 연임에 도전하여 민진당 차이잉원과 대결할 때의 선거 광고로, 역시 중화민국 국기가와 국기를 활용하여 애국심 마케팅을 시전하여 연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마잉주는 재임 당시 대만에서의 청천백일만지홍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경찰을 동원하여 국기를 철거하거나 압수한 적이 많았다. 특히 마잉주가 타이베이 시장 재임 시절, 2001년 아시아 여자 축구 경기가 있었을 때 경찰을 동원하여 관중들이 들고 있던 국기를 압수한 적이 있었다. 선거 광고와 국기 몰수 사건을 다룬 뉴스를 합성하여 패러디한 영상.

그밖에도 2020년 총선에서 타이난의 입법위원 후보로 출마한 셰룽제(謝龍介)의 유세 현장에서 선거 운동원들이 국기를 흔들지 말고 숨기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한국의 태극기 부대가 자국을 사랑하는 걸 대표하는 게 아니듯이 중국국민당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로 민진당을 시험할 수 있는지 잣대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그들이 말하는 차이잉원도 공식 석상이었을망정 국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반대편인 대만 독립파들도 색깔론을 사용한다. 중화민국 정통론자들이 사용하는 '중국'을 일부러 '중공'으로 해석하는 거다. 대만인들마저도 중공을 중국이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일각에선 먹히며, 국민당이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중국(중공)에 넘어간다는 식으로 선동을 하기도 한다. 물론 색깔론이란 게 으레 그렇듯 정치적 목적성이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딱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논리적이어서 믿었던 게 아니라 믿고 싶어서 믿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5. 역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중국국민당/역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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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형식적인 연립 여당이자 실질적인 독재 정당이었다. 중국 청년당중국 민주 사회당은 3당 훈정의 여당. 그러나 1980년대 장징궈 총통 시절부터 점차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장징궈는 1984년 대만 출신인 리덩후이(이등휘/李登輝)를 부총통으로 앉히고, 죽기 몇 달 전에는 '내가 대만에서 40년을 살았으니 나도 이제 대만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1988년 장징궈가 사망하자 총통 및 당 주석 직을 이어받은 리덩후이는 언론 통제 폐지를 단행하였고, 보수파의 반발을 제압하면서 국민대회와 입법위원의 총선거도 시행하였으며, 1996년에는 총통 직선제를 시행해 대만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1993년 이에 반발한 국민당 내의 외성인 출신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당으로 분당되는 사태를 겪었지만, 어쨌거나 지속적으로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중국이 96년 선거에서는 무력 시위까지 하면서 리덩후이의 3선을 막으려고 했지만 되려 대만 독립파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리덩후이의 재당선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 국민대회 선거결과를 보면 국민당이 49.7%, 민진당이 29.9%의 득표를 보였는데 총통 선거에서 리덩후이가 54.0%, 펑밍민 후보가 21.1%의 득표율을 얻었다. 결국 신당이나 무소속을 지지한 후보가 총통선거에서 25%, 국민대회 선거에서 5%의 득표를 얻었으니 갭이 좀 있다 하더라도 약 8%의 민진당 지지표가 리덩후이로 날아간 셈이 된다.

2000년 총통 선거를 앞두고 리덩후이의 지지를 받은 부총통 롄잔이 국민당 총통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쑹추위가 이에 반발하여 탈당, 독자 출마하면서 렌잔 후보는 3위에 머물렀고,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이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국민당은 정권을 민진당에게 넘겨준다. 이후 2001년 총선에서도 국민당은 개헌 저지선 확보에 실패하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천수이볜 정부가 난맥상을 보이고 롄잔과 쑹추위가 서로 화해를 하며 단일화를 결의하여 2004년 총통선거에서 우세를 보일 듯했으나, 전날 일어난 석연찮은 천수이볜 암살미수 사건으로 정권 탈환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듬해 총선에서 개헌저지선을 확보했고 뒤를 이어 지방선거에서도 기여코 압승을 거두며 천수이볜을 궁지에 몰아놓았다. 그리고 2008년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두고 그 뒤를 이은 총통선거에서도 마잉주 후보가 당선되어 기어이 정권 탈환에 성공한다.

이후 중국 대륙에 경제 협력에 한해 우호적인 성향[20]을 보이고 있었는데, 09년 12월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이전보다 부진하면서 다시 흔들리는 형국이다.[21]

이어서 벌어진 2010년 1월의 입법위원(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3:0으로 전패, 민진당이 30석을 차지하면서 개헌안과 총통 파면안 제출에 필요한 총의석(113석)의 1/4(29석)을 넘어섰다. 이어진 2월 말의 보궐에서도 4석 가운데 3석을 내주었다. 이를 돌파하고자 했는지, 아니면 무릅쓰고 했는지 마잉주 정권은 같은 해 7월 중국과의 ECFA(경제협력기본협정)까지 체결시키면서 대외적으로는 "차이완(Chiwan) 시대"를 열었다고 홍보했으나 국내 반응은 냉담했다. 의회에선 난투극이 벌어졌고, 수만명의 시위가 빗발쳤다(리덩후이도 함께 참여했다). 11월로 예정된 5대 시장선거에서도 참패 전망이 우세했으나 의외로 선거 결과는 국민당의 승리. 선거 막판에 국민당 중앙위원이 총에 맞아 다치는 사고로 국민당 표가 집결하면서 다섯 곳 중에 세 곳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체 득표에서는 민진당이 49.9%(377만 2,000여표)를 차지해 국민당의 44.5%(337만 9,000여표)를 5.4%포인트 앞섰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 실시된 2012년 총통선거와 입법위원선거에서 국민당은 선거 레이스 내내 근소한 차이의 우세를 보여왔으나, 언제든지 역전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표출되었다. 하지만 독립 노선을 지향하는 민진당의 집권을 원치 않았던 중국의 지지와 대만해협에서의 대립관계를 원치 않는 미국의 암묵적 동의 등이 겹쳐져 예상보다 손쉽게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허나 이후 마잉주 정권 지지율은 20~30%대에 머무는 등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난맥상이 이어지면서 지지율이 계속해서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2014년 홍콩 민주화 시위가 좌절되면서 자칫했다가 중국에게 흡수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도 겹쳐 결국 지방선거에세 대패하고 말았다. 타이베이 시장을 친 민진당 성향의 무소속 후보에게 내줬고, 거기에다가 당초 국민당 후보가 승리할 걸로 보였던 타오위안 시장도 민진당이 가져간데다가 역시 국민당이 여유있게 승리할 것으로 보였던 신베이 시장도 접전 끝에 겨우 승리할 정도였다. 게다가 한국으로 치면 옹진군에 해당하는 텃밭 진먼을 아예 무소속에게 내주었으며 펑후도 민진당이 가져갔다. 전체적인 판세를 본다면 국민당은 6개 시장 선거 가운데 딱 한 곳만 건졌고, 현장과 현급 시장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는 하지만 5곳만 건졌다.

2014년 12월 3일 마잉주 총통이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국민당 주석직을 사퇴했다. 2015년 1월 18일에 주리룬 신베이 시장이 당 주석에 당선됐다.

2015년 7월 19일 총통선거 후보로 훙슈주(洪秀柱) 중화민국 입법원 부원장(국회부의장)[22]을 지명하여 선거 태세에 돌입했다.# 이 사람이 여성이고 야당인 민주진보당도 여성인 차이잉원 주석을 총통 후보로 지명했기에 차기 대만 총통은 여성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다만 훙슈주가 차이잉원에 비해 여론조사 등에서 조사한 지지율이 10~20% 정도 밀리고 있어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건이다. 심지어 훙 후보는 지지율이 쑹추위에게도 밀리는 3위일 때도 있었다.

결국 2015년 10월 17일 초유의 후보 교체가 이루어졌다. 현 주리룬 주석을 후보로 교체한 것이다. 국민당이 최후의 수를 두었다는 평가가 많다. 현 홍슈주 후보가 워낙 인기가 떨어지는 것으로 인해 2위 자리까지 위태롭게 되자 내린 선택으로 보인다. 그리고 주리룬 주석의 출마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쑹추위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도 급물살을 살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쑹추위는 단일화를 거부했다.


중국국민당 홍보 광고.

결국 2016년, 제9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제14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과반수를 넘긴 민주진보당은 9천억 원에 달하는 중국국민당 재산의 국유화를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민진당 주석이자 차기 총통인 차이잉원까지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상황이다. 이에 국민당측은 모든 재산은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사1 기사2

중화민국은 상당기간 중국국민당이 좌지우지하는 독재국가였고, 중국국민당이 타이완 언론계의 큰 손으로 군림하기도 해서 장제스 독재정권 시절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지상파 방송사인 CTV와 관영지인 중앙일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CTV는 2000년대 초 이후에 케이블 방송에게 발리면서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고, 중앙일보는 1966년 복간[23] 이후에 1980년대까지 대만 제1신문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역시 1990년대 민주화 바람으로 여타 신문사에게 밀리면서 재정이 악화되었다. 그래서 2000년대 중반에 죄다 처분한 상태다.

사실 중국국민당은 일개 정당이라고 하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식 발표만 해도 역대 최고액이 918억 위안이고 2015년 기준 7억 6,000만 달러(약 9,169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범록연맹에서는 국민당의 보유 자산이 실제로는 3~4조원대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6년 초 중화민국 내정부(내무부)는 국민당 재산이 2조 8천억 원 정도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국민당이 분리된 것이 1991년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혁파 때이기 때문이다. 2016년 기준 중국국민당이 보유한 자산은 대만일치시기가 끝나면서 1945년대만총독부에서 중국국민당이 넘겨받은 자산[24]을 기초로 하고 있다. 1946년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중화민국 정부와 국민당이 잠시 분리되나 얼마 안 가 국공내전의 패색이 짙어지자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입법하면서 헌정을 변칙으로 유지하다가 전황이 나빠지면서 중단하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국부천대가 일어나면서 중국 대륙의 재벌이나 상류층들이 보유한 자산을 국민당에 넘겼고[25] 이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체제에서는 당정군의 일체화(중화민국 정부+중화민국 국군+중국국민당)가 더욱 심해져서 국민당의 자산을 중앙정부에 넘기지 않게 되었다. 1991년 동원체제 혁파 당시 총통은 국민당 소속리덩후이였고 결국 국민당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정부에 넘기는 것은 아예 밀려버리고 만다. 국민당 정권이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이 부분은 은근슬쩍 넘어간 것이다. 2016년 들어서 차이잉원 차기 총통과 민주진보당 측에서 국민당 자산의 국고 환수를 주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2000년대 천수이볜 민주진보당 정권에서 한 차례 환수 논의가 있었으나 민진당이 입법원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법안 성립은 불발됐고 대신 국민당이 CTV와 중앙일보, 몇몇 호텔들을 처분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지고, 2008년 마잉주 정부에서도 일정 부분 국민당 재산이 처분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국민당 재산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국민당이 소유한 부동산에서 나오는 임대수익만 해도 민주진보당, 친민당, 대만단결연맹, 시대역량 등 다른 정당들의 총 수입을 합친 것을 가볍게 능가할 정도니 말 다 했다. 이후 차이잉원이 총통에 당선되면서 자산 상당수를 몰수당할 위기에 처했다. 더군다나 의회도 민진당이 압도적으로 과반을 차지하고 있기에 실현 가능성도 큰 편. 기사 국민당 내부에서도 자산을 정리하자는 개혁 목소리가 있긴 하다. 결국 3월 14일부터 입법원에서 국민당 자산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다.

당연히 국민당 내부에선 이건 정치 보복이라면서 결사반대하고 있지만, 몇몇 원로들은 이 기회에 당 자산을 깔끔하게 국가에 헌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당의 차세대 주자였던 주리룬 신베이 시장(2016년 총통 후보) 역시 대선 유세전 당시 국민당 자산의 처분과 국민당의 회계감사를 통한 투명한 재정구조 확보, 문제 자산은 국고 환수 또는 원주인 반환을 공약한 바 있다. 이 와중에 리덩후이 총통 시절 당 자산의 일부가 헐값에 매각되면서 거액이 사라졌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관련기사

3월 26일, 훙슈주가 신임 주석에 취임했다. 이는 국민당 역사상 최초로 여성 당수가 취임한 것이다.



2016년 7월 26일 중화민국 입법원에서 기어이 민주진보당시대역량의 전원 찬성으로 국민당의 당 재산을 중화민국 국고로 강제 귀속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사 국민당은 강력히 반발하고 원내 시위까지 했으나 법안 통과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민진당과 시대역량을 합쳐서 74명이고 여기서 쑤자취안 입법원장 한명 뺀 73명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으니 친민당은 기권했다.

2016년 8월 27일 화롄 시장 보궐선거에서 국민당 후보가 승리했다. 2010년 이후로 지방선거에 승리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라 국민당 내부에서는 2018년 지방 총선도 노릴 만하다는 분위기가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관련기사

2017년 5월 20일. 주석 대표 선거에서 홍슈주를 꺾고 우둔이 전 부총통이 당선되었다. 관련기사

2018년 대만 지방공직인원 선거에서 기어코 전국 22개 지역 단체장 가운데 과반인 15개, 특히 직할시급의 6개 주요 단체장 가운데 절반인 3곳(타이중, 가오슝, 신베이)에서 당선자를 내는 승리를 거두었다. 오래간만의 대승에 당이 고무되었고, 2020년 차기 총통선거도 기대를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19년, 뜻밖의 재보선 패배[26]에 이어 다시 한번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나면서, 유력해보였던 정권 탈환의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양안관계에서 현재 여당인 민진당에 비해 친중 이미지가 강한 상황에서 중국의 일국양제 무력화 시도와 시민들의 저항, 뒤이은 홍콩 행정부의 추태를 대만인들이 직접 보게 되면서 보다 반중 정서가 강해졌기 때문. 실제 이 때문인지 지난 지방선거의 주역으로 평가받은 유력 대권주자 한궈위 가오슝 시장도 직접 일국양제 수용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장제스의 증손자이자 제9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에서 타이베이 선거구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장완안(蔣萬安, 장만안)이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위해 뛰쳐나온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며 일국양제를 거부하는 논평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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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港的學生及年輕人,無懼港警強力鎮壓,為了捍衛自由與民主,向全世界發聲及吶喊,對於這樣的勇敢,我必須要給予最高的敬意
홍콩의 학생 및 청년들 여러분, 홍콩 경찰의 강경 진압에 두려워 말고, 자유와 민주를 지켜내기 위해, 전 세계에 목소리와 외침을 내십시오. 이러한 용감함에, 저는 반드시 최고의 경의를 표합니다.

在臺灣,一國兩制沒有存在的空間,民主自由憲政體制也不容任何破壞及妥協。政府除了要密切注意並維護在香港就讀的臺生、在港工作的臺灣民眾人身安全,必要時也該提供香港民眾人道救援。
대만에서도 일국양제는 존재할 여지가 없고, 민주자유 헌정체제도 파괴 및 타협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홍콩에 재학 중인 대만 학생, 홍콩에서 일하는 대만 민중의 신변 안전을 주의하고 지키는 것 외에, 필요하다면 홍콩 민중의 인도적인 구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완안(蔣萬安, 장만안) 중화민국 입법원 입법위원. 출처

장개석의 자손이라는 점 때문에 양쪽에서 나름 시끌벅적했는데, 중국에서 몰려온 우마오당들은 해당 글의 댓글에 "장개석 얼굴에 먹칠할 거면 민주진보당으로 꺼져라" 등 각종 패드립을 치고 있고, 범록연맹 지지자들도 "진정성이 전혀 없다"며 비난하고 있다.[27] 시진핑을 지지하는 우마오당과 타이완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범록연맹이 하나되는 희한한 장면이 연출된 셈. 링크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12월 14일에 국민당 사무실 폭파 기도가 나왔다. #

2020년 1월 11일, 제15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출마한 한궈위 후보가 38.6%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심지어 동년 6월엔 현직이던 가오슝 시장 자리마저 아예 주민소환으로 파면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동시에 진행된 제10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도 38석에 그치는 패배를 당하며 다시 4년간 소수 야당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홍콩 경찰을 지지한다고 한 예위란(葉毓蘭)과 중국에 건너가 시진핑의 훈화를 듣고 온 퇴역 장성 출신 우쓰화이(吳斯懷)를 기어이 비례대표 1번과 4번에 부여해서 당선시켰다. 이로써 친중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선명하게 박혔다.

다만 한편으론 이런 연이은 대선, 총선 참패 때문인지 92공식, 하나의 중국을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당내에서도 커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당이 소멸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왔다. # 실제로 대만은 젊은 층일수록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져 가고 있는데[28], 현재 국민당의 주 지지층은 이들은 장제스·장징궈 시절을 그리워하는 50세 이상의 고령층이나 현재 40대 이하의 대만인들은 이런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국민당을 지지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즉,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전략은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당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러다보니 중국국민당의 "중국"을 당명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법 나오는 판국이다. 더군다나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패권주의로 인해 반중 정서가 매우 커진 상황이라 이번 선거 참패를 계기로 대륙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하느냐가 향후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이러한 여론이 국민당 내에서도 반영되었는지 2020년 3월 취임한 장치천 주석은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표명을 재차 하자, "차이 총통은 말로만 홍콩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지 말고 행동으로도 지지하라"며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또 국민당 당내 개혁위원회는 지난 몇 달 간의 논의를 거쳐 마련한 건의안에 92공식 거리두기를 언급하기도 했다. # 다만 당내에서는 여전히 중공과의 설정 문제에 이견들이 많아 통일된 담론이 나올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운 상황. 2020년 9월 6일 열린 전국 대표자 회의에서는 일단 92공식 당론 유지가 결정됐다.

8월 15일에 열린 가오슝 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25%만 득표하는 참패를 겪었다. 결국 가오슝은 다시 민진당의 텃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9윌 20일에 중국 푸젠성 샤먼에서 열리는 제12회 해협논단에 왕진핑 전 입법원장(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 파견을 취소했다. #

2021년 2월에 들어 인터넷 상의 정치적 영향력이 민진당을 추월하여 대만 전체 정당 중 1위를 기록하였다. # 이러한 경향에 대해선 가오슝 시장 파면 이후 정치적 생명이 끝난 줄로만 알았던 한궈위 전 시장의 정치 재개를 예고하는 각종 활동들과[29] 더불어 장치천 현 주석의 주석 연임 선언, 정계 은퇴 후 각종 방송에서 정치 평론을 하던 유명 방송인 자오샤오캉(趙少康)의 국민당 차기 주석 선거 출마 선언과 이후의 정치적 행보 등 여러 요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한궈위 같은 경우는 이미 대선 후보를 한 경험이 있고, 그의 행보를 통해 그의 강력 지지층들인 한분(韓紛)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어 사실상 고사 직전의 국민당 내 분위기를 올리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자오샤오캉 역시도 그가 진행하는 정치 프로그램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가 100만 명이 넘고, 차기 유력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만큼 국민당 내의 성량을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당 내에선 이러한 경향이 차기 대선까지 이어지길 바라지만, 실제 선거와 SNS 내의 경향이 꼭 일치한다고 볼 수 없고[30], 올해는 대규모의 선거가 예정되어 있지 않은 만큼 국민당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러한 기조를 오래 끌어와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한편 2021년 6월 이후 국민당 소속 입법위원 중에서도 정리원(鄭麗文 / Cheng Li-Wen)[31] 위원이 민진당 비판에 선봉장으로 나서고 있는데, 주로 한국과 대만의 실태를 비교하며 현재 차이잉원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 및 유튜브 채널에 많이 올린다. 7월 12일에는 "작년에는 한국 누리꾼들이 대만이 방역모범국이라고 말했는데, 한국인들이여, 올해도 작년처럼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하며 현재 대만은 한국보다 방역 및 백신 확보·접종 면에서 더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과거 혐한성 광고를 내보낸 바 있다.

2021년 9월 25일 국민당 주석 선출을 앞두고 중국에 더욱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장야중 후보가 세를 불리고 있다. #

9월 25일 주석 선거에서 전 주석이자 2016년 총통 선거 국민당 후보였던 주리룬이 당선, 10월 30일 취임할 예정이다. #

그러나 2021년 대만 국민투표에서 중국국민당이 찬성을 내건 4개 안건이 전부 부결이 뜨며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허우유이의 경우 제4원전이 지역구 내에 있어서 국민당의 움직임에 협력하지 않았다.

차이잉원 정권의 코로나 확산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에 의한 반사이익과 천보웨이 파면 성공으로 기세등등했던 2021년과는 달리 2022년 들어 중국의 위협과 뚜렷한 구심점 부족으로 지지율이 정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커원저의 대만 민중당보다도 지지율이 낮다는 여론조사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차이잉원 정부가 반중 정책에만 몰두하다가 민생 경제는 신경쓰지 않는다며 반감이 늘어난 상태에서 치뤄진 2022년 대만 지방공직인원 선거에서 승리하며 부활에 성공했고, 차기 대권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이렇게 유리하게 시작한 대선에서 2연패를 끊고 정권을 가져올 수 있을지가 관심사였다. 그러나 선거 전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민진당 라이칭더 후보와 오차 범위 안 3~5% 사이로 따라붙었음에도 개표 내내 상당한 격차로 밀리며 결국 약 7% 격차로 패배하였다. 이로서 국민당은 대선에서 3연패를 당하게 되었으며, 지방선거 전문 정당이라는 조롱이 현실이 되었다.[32] 그나마 입법위원 선거에서는 민진당의 단독 과반을 막아내고 거기에 민진당을 한 석 차이로 제치고 원내 1당이 되기는 했으나 국민당의 단독 과반에는 실패, 게다가 득표수(득표율) 자체는 소선거구에서나 비례대표에서나 민진당에게 밀렸다. 막판 마잉주 전 총통의 친중 발언 등이 악재가 된 것으로 보이며, 친중 이미지를 탈피하지 않으면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수당이긴 하지만 과반이 아니고, 1석 차이에 불과한 만큼 라이칭더 정부에서는 제3당인 대만민중당을 끌어들이는 것이 정부 여당 견제의 핵심이 되었다.

6. 조직

6.1. 중앙위원회

파일:중국국민당 중앙당.jpg
  • 주석
    • 부주석
  • 서기장
    • 정책위원회
  • 부서기장
    • 조직발전위원회
    • 문화전파위원회
    • 행정관리위원회
    • 심사기율위원회
    • 혁명실천연구원
  •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34명)
  • 중앙위원회
  • 당대표

7. 역대 선거 결과

7.1. 총통 선거

7.1.1. 국민대회 간선제 시기

선거명 후보 득표율 결과
제1대 정부총통 선거 (총통) 장제스 90.03% 당선
(부총통) 리쭝런 52.62% 당선
제2대 정부총통 선거 (총통) 장제스 96.91% 당선
(부총통) 천청 92.86% 당선
제3대 정부총통 선거 (총통) 장제스 93.97% 당선
(부총통) 천청 91.76% 당선
제4대 정부총통 선거 (총통) 장제스 98.60% 당선
(부총통) 옌자간 55.19% 당선
제5대 정부총통 선거 (총통) 장제스 99.39% 당선
(부총통) 옌자간 83.78% 당선
제6대 정부총통 선거 (총통) 장징궈 98.34% 당선
(부총통) 셰둥민 79.14% 당선
제7대 정부총통 선거 (총통) 장징궈 95.11% 당선
(부총통) 리덩후이 82.05% 당선
제8대 정부총통 선거 (총통) 리덩후이 85.24% 당선
(부총통) 리위안추 80.05% 당선

7.1.2. 국민 직선제 시기

선거명 총통 후보 부총통 후보 득표율 결과
제9대 정부총통 선거 리덩후이 롄잔 54% 당선
제10대 정부총통 선거 롄잔 샤오완창 23.1% 낙선
제11대 정부총통 선거 롄잔 쑹추위[친민당] 49.89% 낙선
제12대 정부총통 선거 마잉주 샤오완창 58.45% 당선
제13대 정부총통 선거 마잉주 우둔이 51.60% 당선
제14대 정부총통 선거 주리룬 왕루쉬안 31.04% 낙선
제15대 정부총통 선거 한궈위 장산정 38.6% 낙선
제16대 정부총통 선거 허우유이 자오샤오캉 33.49% 낙선

7.2. 입법위원·국민대회 선거

선거명 선출 의석 획득 의석 득표율
제1대 입법위원 선거 759석 716석
제1대 입법위원 선거 제1차 증원 선거 15석 15석
100%
제2차 증원 선거 51석 41석
제3차 증원 선거 52석 42석
제4차 증원 선거 97석 79석
제5차 증원 선거 98석 83석
제6차 증원 선거 73석 59석
제7차 증원 선거 101석 72석
제2대 입법위원 선거[34] 161석 102석
63%
제3대 입법위원 선거 164석 85석
52%
제4대 입법위원 선거 225석 123석
55%
제5대 입법위원 선거 225석 68석
제6대 입법위원 선거 225석 79석
제7대 입법위원 선거 113석 81석
제8대 입법위원 선거 113석 64석
제9대 입법위원 선거 113석 35석
제10대 입법위원 선거 113석 38석
제11대 입법위원 선거 113석 52석
선거명 선출 의석 획득 의석 득표율
1991년 국민대회 대표 선거 300석 254석
84%
1996년 국민대회 대표 선거 300석 183석
61%
2005년 국민대회 대표 선거[35] 300석 117석

8. 중국공산당과의 관계

20세기 초중반만 해도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서로 전쟁까지 했을 정도로 매우 험악한 관계였고, 장제스 집권기에는 서로 물어뜯지 못해 안달난, 말 그대로 견원지간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대만 민주화 이후부턴 아예 대륙과 대만이 별개임을 주장하는 민주진보당이 등장하고 집권하기까지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대만의 중국국민당에 호의와 협조하는 태도를 보이며 최대 정적이었던 장제스에 대해서도 '담대한 기질을 지닌 호걸' 정도로 꽤 고평가해주고 있다.[36][37] 또 국민당도 2005년 롄잔 주석의 중국 방문을 즈음하여 친중국 노선을 타면서 현재의 국-공 관계는 1920년대 중반 제1차 국공합작 시절에 버금갈 만큼 가까워졌다. 이는 국민당은 공산당과 비록 원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어쨌든 대륙과의 통일이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므로, 아예 통일을 하지 말자는 민진당에 비하면 최소한의 대화의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0년 3월 열린 중국국민당 전당대회에서 92공식에 대한 재검토를 주장한 장치천 입법위원이 주석에 당선되면서 공산당과 가까웠던 그간의 관계도 재정립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장치천이 하오룽빈을 누르고 주석에 선출되자 중국공산당은 15년만에 축전을 보내지 않았다. 양안 통일을 이뤄낼 파트너로 대만민중당 커원저를 선택해서 그렇다는 분석도 있다.

2020년 9월 장치천 주석은 푸젠성 샤먼시에서 매년 개최되어온 해협 포럼에 국민당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기로 결정하며 공산당과의 선을 한 번 더 그었다. 2020년 10월 6일 장치천 주석 주도 하에 민주진보당과 함께 대미 재수교 결의안 및 미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초당적인 결의안을 입법원에서 통과시키자 중국 관영 매체인 환구시보는 장치천 주석과 국민당을 한 번 더 디스했다. #

그러나 주리룬이 주석이 된 이후에는 다시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다.

9. 중국 본토의 중국국민당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약칭 민혁)로 중국공산당의 합법 구색정당(위성정당) 중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쪽은 중국국민당의 일원임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10. 기타

  • 1919년 설립되어 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정당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다. 아시아에 중국국민당보다 역사가 더 오래된 정당은 여럿 있어도 근현대사에 이만큼 굵직한 영향력을 끼치진 못했다. 오늘날 중국을 지배하는 중국공산당은 약간 뒤인 1921년 창설되었다.
  • 국제민주연합(보수 정당 연합체)의 정회원으로, 이 곳이 대만이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몇 안되는 단체 중 하나다.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에는 보수 우파 정당이 없기 때문에 회원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38]
  • 창당 당시 초대 당대표 명칭은 총리였으나, 쑨원 사후로 이 명칭을 폐지하고 총재로 전환하였으나 다시 랴오중카이, 후한민 등을 거쳐 장제스 사후 다시 총재 명칭을 폐지하고 주석으로 전환하였다. 해당 인물들이 국민당에 끼친 영향을 기리는 것과 동시에 변화해가는 시대 환경을 나름대로 반영한 결과라고 봐야 할 듯하다.
  • 처음엔 쑨원이나 장제스, 쑹메이링기독교인들이 핵심 인사로 활동한 정당이었고, 덕분인지 지금도 기독교인 지지세가 높은 편이다. 리덩후이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민당에 들어왔다가 나중에 대만 독립 문제로 이적한 케이스.[39] 마잉주 전 총통도 가톨릭 신자이다. 물론 지금은 대만에서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낮다보니(5% 미만), 불교, 도교유교, 전통신앙 등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무신론자들 중에서도 국민당 지지자는 많은 편이다.
    사족으로 홍콩의 범람연맹 지지자들도 기독교인이 많은 편인데, 사실 홍콩의 독립운동 혹은 민주, 자치 확대 운동은 대개 개신교 및 가톨릭 신자가 주동해왔다. 조슈아 웡 등의 우산 혁명 지도부는 전부 기독교인들이고 여기에 가톨릭 주교인 조셉 찬 주교도 은근히 동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사족으로 홍콩 기독교는 중국 대륙에 많은 신자를 보유한 지하교회와 파룬궁과도 연합하고 서로 도와준다. 당연히 홍콩 기독교인 중에 내륙여행 허가가 안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선교사로 의심받거나 중국 민주화 운동 내지는 파룬궁 지원 의혹이 있을 경우다. 물론 맨 처음 중국이 개방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간 것도 홍콩 기독교인들이었다.
  • 정치인의 막말로 선거에서 패배한 사례가 있다. 일례로, 중국국민당 당적의 전국 공무원 협회 이사장 리라이시(李來希)가 대만 여아 참수 사건 피해자의 두개골이 가오슝까지 굴러가라는 망언을 퍼부었다. 왜냐하면 단지 여아 참수 사건 피해자 어머니가 시대역량에 입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비상식적 막말에 분노한 가오슝 시민들은 안 그래도 친중 이미지가 있는 중국국민당을 더 싫어하게 되었다. 한궈위는 파면되고, 리라이시는 중국국민당으로부터 2년의 당권 정지를 받았다.# 한궈위 역시 가오슝 시장 재임 시절 구설이 잦았다.
  • 민주진보당범록연맹 지지층에게는 중국당(中國黨)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당연히 이들이 말하는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중공 국민당(中共國民黨) 같은 멸칭도 쓰인다.
  • 국민당은 당시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최대 물주였다.[40]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인물이 쑨원장제스였고, 김구, 김원봉, 김규식, 이시영, 안창호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당시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다만 쑨원때는 국민당이 중국 전역을 제대로 통치를 하지 못하고 군벌들이 난립하던 때라서 체계적인 지원은 힘들었고, 장제스가 중국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어느정도 확보한 뒤에나 체계적인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장제스가 자선 사업가는 아니라 임시 정부를 무작정 밀어준 것은 아니었고 이런저런 생색과 함께 이런 독립 운동에 대한 지원을 무기삼아 해방 이후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막상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즉, 한국 광복 후)에는 국공내전이 있었고 이어 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나 버려 말 그대로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 2010년 7월에는 국민당 소속 정치인 허즈후이(何智輝, 1950~)가 한화로 40억 원 상당의 뇌물을 받고 1심에서 징역 19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는데, 2심에서 징역 14년형을 구형받은 상태에서 판사, 검사에게 한화로 약 15억 원 상당의 뇌물, 성접대를 하여 무죄를 선고받는 역대급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이 사건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 마잉주 총통이 즉시 공무원 부패 척결 기구인 '염정서'를 설치해 동년 9월까지 부패에 연루된 여야 입법위원 8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을 정도였다.[41] 그나마 2011년 뇌물을 수수한 판사 4명은 징역 11~20년형, 검사 1명은 징역 6년형, 뇌물 전달을 중개한 변호사는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고, 2016년 최종심에서 허즈후이는 징역 13년형이 확정되며 수감되었다. 참고로 아내 왕수윤(王素筠, 1954~)도 전직 입법위원이었으며, 2004년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자 중국으로 도피했다고 한다.

11. 관련 문서



[1] '국민당'의 중국어 발음을 그대로 영문 표기한 것. 뜻을 감안해 영어로 번역하면 'Chinese Nationalist Party(CNP)'라고 적을 수도 있지만, 대외적으로 'Kuomintang'과 'KMT'를 공식적인 영문 표기로 사용하고 있다. 반면 경쟁 상대인 민주진보당의 영문 표기는 'Democratic Progressive Party'와 'DPP'이다.[2] 당 내 주류는 양안통일주의를 지향한다.[3] 당 공식 입장은 공산당 정권을 불법 정권으로 규정하며,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반공주의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제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옹호하는 댓글 부대를 꾸리며 국민당 후보에 자금을 대주고 있다는 논란도 있는 등 장제스 독재 시대 때 국민당에게 빨갱이 몰이를 당했던 민주진보당에게 중국공산당 첩자라는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이에 국민당 측 인사가 민진당에게 빨갱이 몰이 하지 말라고 대응하는 지경까지 왔다. (왕리창, 반침투법 문서 참조)[A] 대륙 시절.[5]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의 민생주의부터가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았다.[6] 쑨원이 이끈 신해혁명부터가 한족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이였고, 장제스도 중화사상에 기반해 한족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애초에 이들이 추구한 중화사상(Sinocentrism)부터가 Han Chinese 우월주의에 기반한 사상이다. 초기 국민당도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웠으나 다민족적인 중국 국가 특성을 고려해 점점 이러한 성향을 줄여나갔다.[7] 반장제스 성격이 있다.[8] 남의사 등등 유사파시즘적 성격도 있었다.[9] 후스를 비롯한 소수 리버럴들.[10] 출처: #, #[11] 출처: #[A] [13] 한국어에서와는 달리 현대 중국어에서는 남색이 파란색을 의미한다.[14] Kuomintang Youth League, Young[15] 한국에는 2022년까지 국민의당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16] 이건 반대편 민진당조차 시도했다가 역풍을 맞은 일이다. 천수이볜 시절 '중국', '중화'로 된 것을 '대만'으로 고쳤다가 반발이 심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17] 대만 독립파와 대비되는 중화민국 독립파를 뜻한다.[18] 2위는 중국과의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매우 강한 친중 성향인 장야중 쑨원학교 교장이 차지하였다.[19] 물론 민주진보당도 당장 독립하겠다는 얘긴 안 한다. 또 독립파도 지지층의 한 부분일 뿐이라 한편에선 대륙중국과 통일해야 된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 등 민진당 내에서도 복잡한 문제긴 하다. 다만 현재 기류는 여기나 저기나 현상 유지. 결국 중국이 민주화된 이후에나 뭔가 진지하게 고민할 거리가 생기기에 주제 자체가 묻혀 있다.[20] 단, 정통 중국이 어디냐 하는 문제에서는 '중화민국 = 정통 중국'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일국양제로 대만을 복속시켜 통일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실제 마잉주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 정권은 이와 관련해 2014년 홍콩 시위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21] 17개 선거구 가운데 국민:민진이 14:3이었던 것이 12:4가 되었다. (한 석은 무소속) 민진당의 득표율이 45.32%로 국민당(47.88%)이 우세지만 2005년의 선거(민진당 38.2%)에 비하면 대단한 약진이라서 패배로 받아들여진다고. 재밌는 것이 지지율 하락 원인이 부패와 경기 침체, 그리고 미국산 소고기 수입제한 완화였다고 한다.[22] 국회의장왕진핑이다.[23] 창간은 1928년이었으나 국부천대로 발행이 중단되었다.[24] 당시는 아직 훈정시기라서 중국국민당이 중화민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헌법 제정 전이므로 국민당이 당 자격으로 대만총독부의 자산을 압류한 것.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국민당은 사실 거의 비슷하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별개의 채제다. 예를 들어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특무조직은 중국국민당이 직접 다스리는 기관이라서 중화민국 정부가 개입할 수가 없었다.[25] 1949년 중순 난징이 함락당한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무력화되었고, 타이베이에 들어온 중앙정부가 기능하기 전까지 역시나 대만총독부 반환 직후처럼 당이 중앙정부의 기능을 임시로 대행했다.[26] 타이페이 2선거구를 포함한 5석이 걸린 재보선에서 민진당에게 2대3으로 패배했다.[27] 사실 국민당의 친중공적 인상은 차치하고서라도, 바로 장제스가 장완안이 말하는 민주자유 헌정체제를 대만에서 억압한 주범이었는데 그 증손자는 정작 다른 입장을 보이니 안티 입장에서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그러나 자손이라고 해서 조상과 정치 입장이 같으라는 법은 없으므로 엄밀히 보면 억까로 보는 것이 맞다.[28] 모 여론조사에서 고교생 중 자신이 오로지 대만인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79%에 달하고, 중국인과 대만인 양자 모두에 해당한다는 비율은 20%였다. 자신이 완전히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고교생은 1%도 되지 않았다.[29] 다만 한궈위는 파면 이후 4년 동안 해당 직에 다시 도전할 수 없다는 대만 법에 따라 2024년까지 가오슝 시장 선거에 나올 수 없다. 만약 정계 복귀를 한다면 차기 입법위원 선거를 노릴 가능성이 높아보인다.[30] 이는 인터넷상의 지지가 실제로는 극성 지지층에 의한 찻잔 속의 태풍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서인데, 대한민국에서도 팟캐스트 정치를 통한 네거티브 전략이 실패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유튜브를 통한 가짜뉴스, 극우 프로파간다 확산이 실패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이미 입증된 바 있다. 미디어를 통한 선거 전략에서 이기려면 국민당도 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31] 정치 토크쇼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TVBS의 샤오캉 상황실에서 패널로 자주 등장하며, 그 외에도 여러 정치 관련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많이 등장한다. 원래는 민진당 소속으로, 그것도 온건파가 아닌 급진 대독파로 정계입문을 하였으나 이후 모종의 사건으로 민진당에서 제명되어 국민당으로 당적을 바꾼 케이스다.[32] 사실 총통 선거는 상대적으로 외교가 중시되고 반대로 지방선거는 외교랑은 큰 상관없이 상대적으로 지역 민생이 중시되어 선거 이슈가 각각 다르기에 대만인들이 총통은 반중을 외치는 민진당을 밀어주고, 반대로 지방선거는 경제를 망친 민진당을 심판하기 위해 국민당을 밀어주는 교차 투표 현상이 굳혀졌기 때문이다.[친민당] [34] 이때부터 보궐 선거에서 총선으로 변경했다. 1991년까지는 1940년대에 중국 대륙에서 뽑은 국회의원들 가운데 타이완에 대피하여 종신직으로 재임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모자라게 된 인원을 충원하는 식이었다.[35] 이 때를 마지막으로 국민대회의 기능을 동결했다.[36] 이는 그동안 중국 공산당의 선전이나 많은 이들의 인식과는 달리 진짜로 장제스와 중국국민당이 중일전쟁에 성실하게 임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착각하는 것이 '중일전쟁 당시 공산군은 열심히 싸우고 있었는데 국민당은 공산당의 뒤치기만 일삼았다.' 라는 것인데 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위치를 바꿔야 맞는 말이다. 최근에는 중국 공산당이 일본 제국에게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알려져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든 편.[37] 이 때문에 2020년대를 기점으로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국민당에 대한 묘사는 대만에서 제작되는 드라마나 영화보다 오히려 중국 본토에서 제작되는 미디어물에서 훨씬 나은 편이다. 몰론 대만도 80년대까지는 항일과 애국심을 부각시키는 매체물이 많이 제작되었지만 현재는 오히려 2.28 사건이 항상 언급되면서 식민통치했던 일본보다도 만악의 근원으로 묘사되는 편이 많다. 반면 중국에서는 공산당보다는 못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일본과 열심히 싸운 항일 영웅이고 무엇보다 패션에서만큼은 오히려 공산당보다도 더 우월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할 정도다. 게다가 영화 색계에서 국민당의 항일 투쟁이 대놓고 후려쳐지고 한심하게 묘사되자 중국에서 기분나쁘게 받아들이면서 어그로가 잔뜩 끌렸을 정도였다.[38] 사실 덩샤오핑 이후 사실상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하고 사회보수주의화된 중국 공산당도 실질적으로는 유교 기반 보수주의적 정당에 가깝긴 하다. 그러나 일당제 독재 정당이기 때문에 서구식 보수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제민주연합 회원이 되기 어렵다.[39] 처음에는 기존의 대만 독립론하고는 다른 '중화민국' 이라는 기존의 체제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더 이상 통일을 지향하지 말고 주권국가로 인정 받자는 화독론을 주장하였다가, 이후에는 더 나아가서 대독파로 전향하였고 죽을 때까지 대만 독립을 주장하였다.[40] 중국공산당도 한국 독립 운동을 지원해준 물주였기는 했지만, 2차 국공내전 이전까지는 공산당이 야당이었기 때문에 그 입지가 제한적이었다.[41] 다만 2011년 5월 왕진핑 전 국민당 부위원장의 횡령 혐의가 무혐의 처리되는 등 국민당 정치인들에게 검찰이 관대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