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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2680> 행정원원장 · 사법원원장 · 감찰원원장 · 고시원원장 |
<colbgcolor=#0d2680><colcolor=#ffffff> 중화민국 제4-8계 입법원장 王金平 왕진핑 | Wang Jin-pyng | |
출생 | 1941년 5월 17일 ([age(1941-05-17)]세) |
일본령 대만 타카오주 오카야마군 로치쿠장 (現 대만 가오슝시 루주구) | |
학력 | 대만성립사범학원 (수학 / 학사) |
소속 정당 | |
재임기간 | 제2 ~ 3계 입법원 부원장 |
1993년 2월 1일 ~ 1999년 1월 31일 | |
제4·5·6·7·8계 입법원장 | |
1999년 2월 1일 ~ 2016년 1월 31일 | |
경력 | 제1대 입법위원 제2대 입법위원 제3대 입법위원 제4대 입법위원 제5대 입법위원 제6대 입법위원 제7대 입법위원 제8대 입법위원 제9대 입법위원 제10대 입법위원 중국국민당 부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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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의 정치인. 당적은 중국국민당이다. 2015년까지 입법원의 입법원장, 즉 국회의장을 역임했다.2. 상세
국립대만사범대학(당시 대만성립사법학원)을 나와서 잠시 동안 수학 교사로 지내다가 중화민국 국군에 입대해 헌병으로 복무했다. 제대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가업(식품가공업)을 이었기 때문에 교사 경력은 그대로 끝[1]. 가업이었던 식품가공업에서 수출 및 수입 관련 업무에 종사하였다.1975년부터 가오슝시 지역구에서 입법원 의원(국회의원)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후 중국국민당 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국민당 지도부에 있다. 대만의 입법원 부원장을 지냈고, 이후 원장(국회의장)을 했는데 무려 1999년부터 16년간 국회의장직을 지켰다.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장은 정계은퇴 직전의 마지막 정치 커리어로 2년 단임[2]인 것에 비하면 대만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다. 그리고 왕진핑 입법원장 하에서 수많은 국회 공성전이 나왔다.(...) 하도 공성전을 많이 해서 어지간한 공성전에는 꿈쩍도 않고 법안처리를 진행하는 강한 멘탈의 소유자다.
2013년 당시에는 마잉주 총통과 사이가 안 좋아서 중국국민당 당적을 박탈당한 적이 있으나 2015년 복당해서 여전히 국민당 지도부 및 입법원장으로 활동중이다. 마잉주 전 총통과는 2005년 중국국민당 주석선거에서 맞붙은 적 있었다. 한 때 차이잉원에 맞설 중국국민당 대선후보 얘기도 나왔지만,[3] 대만 정부총통 선거 출마를 포기했다. 아무래도 70대로 접어든 고령의 나이가 부담으로 작용한 듯.
3인칭화표현을 즐겨쓴다. 또 2013년에 대한민국에 개인 자격으로나마 방한한 적이 있다.
2016년 제9대 대만 입법위원 선거에서는 지역구 낙선을 우려했는지 소선거구제 지역구를 버리고 비례대표 1번으로 나갔다.(...) 왕진핑 본인은 당선됐지만 결국 선거에서 참패하고 입법원장직 임기가 끝나 입법원장이 민주진보당의 쑤자취안한테 넘어갔다.
왕진핑의 17년 국회의장 시절을 나타낸 보도.
차이잉원이 총통에 취임한 후 중국과의 양안 대화, 교류를 담당하는 반관반민 기구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 이사장을 제의했지만, 사양한 것으로 전해졌다.
2020년의 제15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중국국민당 총통 후보 경선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한창 정치적 인기를 누리는 중인 한궈위 가오슝 시장의 지지 선언을 확보한 상태. 하지만 6월 7일에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2020년 입법위원 선거에 불참하며 정치 커리어를 끝냈다.
2020년 9월, 푸젠 성 샤먼시에서 열리는 중국공산당 관리들과 대만의 정치인들이 만나는 행사인 해협포럼에 중국국민당측 대표로 내정되었으나, 중국 CCTV가 "국민당의 왕진핑 전 입법원장이 본토에 평화를 구걸하러 온다"는 논조의 보도를 하자, 대만 국내에서도 "중공 전투기가 방공식별구역을 넘나드는 이 시국에 중공을 방문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장치천 중국국민당 주석이 당 차원의 해협포럼 참석을 없던 일로 하면서 대륙방문은 좌절되었다.
3. 기타
- 외성인 출신이 많은 중국국민당 정치인들 가운데 본성인이다.
- 국민당 당적 박탈 문제를 놓고 크게 부딪혔던 마잉주 전 총통을 제외하면 정치권에 적이 없는 스타일이다. 리덩후이 시절에 국민당 주류로 성장하였으며, 리덩후이 전 총통을 포함해 롄잔, 우보슝, 하오룽빈 등 국민당 각 계파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이 깊다. 중국 대륙은 여러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다 민주진보당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어 차이잉원으로부터 해협교류기금회 이사장 제안을 받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 본성인에 가오슝 출신이며 리덩후이 총통 시절에 거물로 등극한 특성상 중국국민당 내에서는 본토파의 수장으로 불린다.[4] 물론 92공식에 대한 지지의사와 타이완 독립운동에 대한 반대의사는 명시적으로 드러냈으나, 그렇다고 해서 양안통일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중국의 대만 간섭에도 명확하게 반대입장을 견지했다.
- 온건한 스타일로 ECFA 서비스협정 확대 때도 입법원장 권한으로 국민당의 협정안 강행 처리를 막았으며, 해바라기 운동 때도 시위대들을 강제로 내보내지 않고 협상을 통해 자진해산시켰다. 당시 마잉주 총통은 해바라기 운동 강경 진압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왕진핑은 이를 막기 위해 고생을 꽤나 했다는 후문.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5 | 입법위원 선거 | 타이완성 5선거구 | | 당선 | 초선 | |
1980 | 입법위원 선거 | 타이완성 5선거구 | 당선 | 재선 | ||
1983 | 입법위원 선거 | 타이완성 5선거구 | 당선 | 3선 | ||
1986 | 입법위원 선거 | 타이완성 5선거구[5] | 당선 | 4선 | ||
1989 | 입법위원 선거 | 타이완성 12선거구[6] | 당선 | 5선 | ||
1992 | 제2대 입법위원 선거 | 가오슝현 | 90,552(16.94 %) | 당선 | 6선 | |
1995 | 제3대 입법위원 선거 | 106,656(19.6 %) | 당선 | 7선 | ||
1998 | 제4대 입법위원 선거 | 81,050(13.85 %) | 당선 | 8선 | ||
2001 | 제5대 입법위원 선거 | 59,100(10.21 %) | 당선 | 9선 | ||
2004 | 제6대 입법위원 선거 | 비례대표 | 3,190,081(32.83 %) | 당선(1번) | 10선 | |
2008 | 제7대 입법위원 선거 | 5,010,801(52.4 %) | 당선(1번) | 11선 | ||
2012 | 제8대 입법위원 선거 | 5,863,279(47.59 %) | 당선(1번) | 12선 | ||
2016 | 제9대 입법위원 선거 | 3,280,949(32.19 %) | 당선(1번) | 13선 |
[1] 이 시절 제자로 유명한 사람이 대만 루엔텍스그룹 회장 인옌랑이다. 관련 기사[2] 이론적으로는 왕진핑처럼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지만 이만섭 국회의장 시절부터 국회의장들이 관례적으로 단임 및 퇴임 후 정계은퇴를 해왔다.[3] 국민당 소속이지만 전통적으로 민진당 지지층이 많은 가오슝 출신이고, 입법원장으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여야간 타협을 이끌어내는 경험이 풍부하여 중도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4] 국민당 내 본성인들을 주축으로 한 계파로 리덩후이 시기가 전성기였지만, 2000년 총통 선거 패배를 계기로 많이 위축된 상태다. 이들 대부분 화독, 혹은 계파 좌장이었던 리덩후이를 따라 대만 독립(대독)을 주장한다.[5] 가오슝현,핑둥현,펑후현 일대[6] 가오슝현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