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17:50:04

1956 AFC 아시안컵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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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
미정

[1] 본선 진출 16개국.[2] 본선 진출 24개국.[3] 2024년 개최.
같이 보기: 역대 AFC 아시안컵, 역대 UEFA 유로, 역대 코파 아메리카, 역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역대 CONCACAF 골드컵, 역대 OFC 네이션스컵 }}}}}}}}}
1956 AFC 아시안컵 홍콩
AFC Asian Cup Hong Kong 1956
1956年亞洲盃足球賽
대회기간 1956년 9월 1일 ~ 9월 15일
개최국 파일:영국령 홍콩 국기.svg 영국령 홍콩
본선 진출팀 4개팀
대회 결과
우승 대한민국
준우승 이스라엘
3위 영국령 홍콩
4위 남베트남
수상
득점왕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나훔 스텔마흐
이전·이후 대회
대회 신설 1956년
영국령 홍콩
1960년
대한민국

1. 개요2. 경기장3. 지역예선
3.1. 1조(서부지역)3.2. 2조(중부지역)3.3. 3조(동부지역)3.4. 본선 진출팀
4. 참가팀 정보5. 결승 리그
5.1. 제1경기 이스라엘 3 - 2 영국령 홍콩5.2. 제2경기 대한민국 2 - 2 영국령 홍콩5.3. 제3경기 대한민국 2 - 1 이스라엘5.4. 제4경기 남베트남 2 - 2 영국령 홍콩5.5. 제5경기 이스라엘 2 - 1 남베트남5.6. 제6경기 대한민국 5 - 3 남베트남
6. 결과7.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1956년 9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영국령 홍콩의 완차이에 위치한 홍콩 정부 경기장에서 개최하며, 지역예선을 통과 한 4개국(4강)이 본선 아시안컵에 진출한 초대 아시안 컵. 이때는 명칭이 AFC 아시안 컵이 아니었고, 아시안 네이션스컵 1956이었다. 1951년에 아시아 최초 축구 대회였던 1951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1]가 시작되고 1954년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2] 이후 2년만에 시작한 새로운 아시아 축구 대회였다.

2. 경기장

전경기 홍콩 스타디움(당시 28000석)에서 경기를 했다.

3. 지역예선

당시 지역예선에서 본선 아시안컵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리는 단 4자리(4강) 아시안컵[3]으로 현재 24자리 아시안컵 보다 아시안컵에 들어가기가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며, 현재처럼 인터넷도 없이 상대팀과 전력을 분석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과 비교하면 프로축구리그가 없던 국가들도 있었다.

지역예선 참가국은 20팀이었고, 이중 개최국인 홍콩[4]이 4강 본선 아시안컵에 자동 진출하게 되었다. 나머지 19팀을 서부지역(1조), 중부지역(2조), 동부지역(3조)으로 나뉘어 진행했으나, 당시 열악했던 아시아 축구 환경의 관계로 지역예선도 참가가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팀들이 기권을 하는 바람에, 나머지 7팀끼리의 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4강 본선 진출팀은 굵은 글씨, 기권팀은 취소선으로 표기한다.

1조(서부지역) : 이스라엘[5], 아프가니스탄, 버마[6], 실론[7], 인도, 이란, 네팔, 파키스탄
2조(중부지역) : 남베트남[8], 말라야[9],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3조(동부지역) : 대한민국, 필리핀, 대만[10], 북보르네오[11], 일본

21세기[12]와 비교하면 없어진 나라도 있으며, 주권국가가 아닌 식민지들도 참가가 가능했었다.

대한민국 아시안컵 우승 스토리

3.1. 1조(서부지역)

이 조에 포함된 모든 팀들이 기권하면서 이스라엘이 자동으로 4강 본선 아시안컵에 진출하였다.

3.2. 2조(중부지역)

1라운드: 태국과 남베트남은 부전승으로 1라운드를 통과,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말라야와 캄보디아의 경기로 1라운드가 치러지게 됐지만, 싱가포르의 기권으로 인도네시아는 자동진출, 결국 제대로 치러진 경기는 말라야와 캄보디아의 홈앤 어웨이 경기뿐이었다.
경기 결과 원정 1차전 2차전 경기장
파일:말라야 연방 국기.svg 말라야[13] 11 - 5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캄보디아 9 - 2 2 - 3 1차전 쿠알라룸푸르
2차전 프놈펜

말라야의 스트라이커 압둘 가니 미냐트는 1차전에서 무려 7골을 때려 박으며, 캄보디아의 전의를 상실케 했다. 팡 시앙 혹이 두 골을 보탠 말라야는 일찌감치 9-0으로 앞서갔고, 후반에서야 캄보디아는 투이, 레이스의 연속골로 따라붙기 시작했으나 경기를 뒤집기에는 너무나 많은 실점을 했다. 2차전에서 캄보디아가 3-2의 역전승을 거두지만 1차전의 대패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말라야가 11 - 5로 최종라운드에 진출하였다.

2라운드: 부전승으로 올라온 태국과 인도네시아, 역시 부전승으로 올라온 남베트남과, 1라운드를 치르고 올라온 말라야의 매치업이 성사됐지만, 태국의 기권으로 인도네시아는 최종 라운드 진출. 결국 2라운드도 말라야와 남베트남의 경기만 치러지게 되었다.
경기 결과 원정 1차전 2차전 경기장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남베트남 7 - 3 파일:말라야 연방 국기.svg 말라야 4 - 0 3 - 3 1차전 사이공
2차전 쿠알라룸푸르

1차전 사이공에서 치러진 홈경기에서 남베트남은 4-0의 대승을 거뒀고, 2차전에서도 남베트남의 응옌 반 투의 선제골로 남베트남은 앞서 나간다. 말라야 역시 1라운드의 히어로 가니 미냐트가 후반 시작하자마자 한 골 따라붙었으며, 남베트남 역시 쩐 반 누엉의 골로 도망갔다, 가니가 또 동점골을 터뜨렸고, 팡 시앙 혹이 83분경 역전골을 터뜨렸으나, 1차전 무득점 패배로 사실상 탈락은 확정되었다. 88분 쩐 반 누엉의 두 번째 골로 경기는 무승부. 남베트남이 7 - 3으로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지만...

3라운드는 인도네시아와 남베트남의 경기. 그러나 인도네시아 역시 기권으로 남베트남이 4강 본선 아시안컵에 진출하게 되었다.

3.3. 3조(동부지역)

1라운드
5팀밖에 없었기에 필리핀, 대한민국, 북보르네오는 2라운드로 바로 진출,
일본과 대만의 경기만 치러져야 했으나, 일본의 기권으로 대만이 2라운드로 진출했다.

2라운드
필리핀과 대한민국, 북보르네오와 대만의 대결로 이루어졌고,
북보르네오가 기권함에 따라 대만은 최종라운드로 진출했다.
경기 결과 원정 1차전 2차전 경기장
파일:필리핀 국기.svg 필리핀 0 - 5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0 - 2 0 - 3 1차전 마닐라
2차전 서울

대한민국은 단 1실점도 하지 않고,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5 - 0으로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최종 라운드
대만과 대한민국의 경기를 통해 본선 진출자가 결정되게 되었다.
경기 결과 원정 1차전 2차전 경기장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4 - 1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2 - 0 2 - 1 1차전 서울
2차전 타이베이

대한민국이 4 - 1로 4강 본선 아시안컵에 진출하였다. 스코어보드만 보면 무난히 이긴 걸로 보이지만, 대만은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팀이고, 이 대회 후 2년 뒤 1958년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딴 아시아의 강호였다.[14] 또한 이때부터 대한민국 대표팀은 엄청난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는데 이는, 이야깃거리에서 후술.

3.4. 본선[4강] 진출팀

국가명 진출 자격 진출 자격 획득일 진출횟수 최근 진출 최고성적 1954 아시안 게임 축구 성적[16]
파일:영국령 홍콩 국기.svg 영국령 홍콩 개최국 - 1회 첫 진출 5위[17]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18] 서부지역 예선 승자 1956년 1회 첫 진출 불참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베트남 공화국 중부지역 예선 승자 1956년 5월 24일 1회 첫 진출 7위[19]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동부지역 예선 승자 1956년 9월 2일 1회 첫 진출 준우승[20]

4. 참가팀 정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1956 AFC 아시안컵 홍콩/참가팀 정보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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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 결승 리그[4강]

결승리그 4강에 진출한 국가는 이스라엘, 대한민국, 홍콩, 남베트남의 4개국이었다. 결승리그는 토너먼트 없이 풀리그제로 치러졌다.

5.1. 제1경기 이스라엘 3 - 2 영국령 홍콩

1956년 9월 1일 19:00

예선을 전혀 치르지 않고 본선에 진출한 이스라엘과 개최국 홍콩의 경기가 개막전으로 치러졌다.

참고로 날짜는 오타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대한민국이 대만과 최종예선 2차전을 진행한 게 9월 2일, 즉 이 경기는 본선 진출국조차 전부 확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된 경기라는 것이다.

개최국 홍콩이 12분경 아우치잉의 선제골로 앞서갔고, 이스라엘의 글레이저가 37분경 동점골을 성공시키고 전반 종료. 아우치이인은 후반전에도 맹활약을 하며 66분에 대회 두 번째 골을 터트렸지만, 3분 뒤 스텔마치의 동점골이 터지고, 76분에 그라제르가 대회 2호 골을 성공시키며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아시안컵 첫 승리를 가져갔다.

5.2. 제2경기 대한민국 2 - 2 영국령 홍콩

1956년 9월 6일 19:00
1경기로부터 무려 5일 뒤에 2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이유는 대한민국이 재정상황으로 출국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이야깃거리에서 후술. 9월 6일 8:00에 간신히 도착해서 같은 날 19:00에 경기를 치르는 살인적인 일정 속에 대한민국은 첫 경기를 치르게 된다. 푹 쉰 홍콩은 첫 경기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10분경이 탕이킷의 선제골로 앞서가고, 39분 코포쿵의 골로 2-0으로 산뜻한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갑자기 비가 내리고, 45분 김지성의 골에 이은, 62분 성낙운의 골로 최악의 여건 속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안컵 첫 승점을 얻게 되었다.

5.3. 제3경기 대한민국 2 - 1 이스라엘

1956년 9월 8일 19:00
무려 2일 뒤에 또다시 이스라엘과 경기를 치르게 된 대한민국. 반면 상대인 이스라엘은 이미 1승을 거두었고 무려 7일간의 휴식을 통해 완벽한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2경기의 큰 비로, 유니폼 물이 다빠져서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현지 교민의 도움으로 빨간색 유니폼과 축구화에 번호를 대충 붙여서 착용하는 열악한 환경을 겪었다. 이스라엘의 낙승이 예상됐지만, 이스라엘은 너무 쉬었던게 독이 된 건지, 경기력이 좋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52분 우상권의 골과 성낙운의 추가골로 순식간에 2-0으로 앞서갔다. 대한민국은 스텔마치의 한 골로 따라붙은 이스라엘을 제치고, 승점 3점으로 1위에 등극한다.

5.4. 제4경기 남베트남 2 - 2 영국령 홍콩

1956년 9월 9일 19:00
개최국 홍콩의 마지막 경기. 3만 명의 홈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했던 홍콩과, 대회 첫 경기를 치르는 남베트남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남베트남의 쩐 반 통의 선제골이 먼저 터지며 홈팬들은 절망에 빠졌고, 추윙와가 대회 첫 PK를 성공시키며 동점으로 따라붙었지만, 레 후이 득이 또다시 홈팬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추가골을 터뜨리며 앞서나갔다. 라우치람이 간신히 동점골을 만들었지만, 그대로 경기는 끝났고, 홍콩은 승점 2점으로 대회를 마무리 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이미 승점 3점이었기 때문에, 우승은 실패.

5.5. 제5경기 이스라엘 2 - 1 남베트남

1956년 9월 12일 19:00
승점 2점의 이스라엘로서는, 이 경기를 반드시 잡고, 남베트남이 대한민국을 이기거나 무승부를 해주길 바라며 마지막 경기를 시작했다. 개최국의 경기가 끝난지라 관중 수는 절반인 15,000명. 스탈라치가 대회 3호 골과 4호 골을 연속으로 기록하며,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남베트남의 쩐 반 통도 대회 2호 골을 넣었지만, 역부족. 이스라엘은 승점 4점을 거두며, 선두에 등극했다.

5.6. 제6경기 대한민국 5 - 3 남베트남

1956년 9월 15일 19:00
당시 순위는
이스라엘 승점 4점
대한민국 승점 3점
홍콩 승점 2점.
남베트남 승점 1점
대한민국은 이기면 승점 5점으로 우승, 비기면 승점 4점. 패배하면 승점 3점으로 3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남베트남은 이겨도 승점 3점으로 우승은 불가능한 상황이라, 대회 우승은 대한민국과 이스라엘로 좁혀지게 되었다.
살인적인 일정으로 두 경기를 치른 대한민국은 7일간의 귀중한 휴식을 가졌고, 남베트남은 이겨도 우승이 물 건너간 상황이라 여러모로 대한민국에 유리했다. 그러나 경기는 성낙운의 선취골에도 남베트남은 물러서지 않고 짜이 반 다오의 동점골, 우상권이 PK득점에 성공했지만, 레 후이 득이 또 다시 따라오며 팽팽히 흘러갔다. 그러나 57분 최정민, 58분 우상권의 릴레이골로 베트남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63 레 후이 득이 또다시 골을 기록했지만, 3분 뒤 최정민이 또다시 골을 넣으며 대한민국의 승리로 경기는 마무리된다.

순위 국가 경기수 득점 실점 승점
1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3 2 1 0 9 6 5
2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3 2 0 1 6 5 4
3 파일:영국령 홍콩 기(1955~1959).svg 영국령 홍콩 3 0 2 1 6 7 2
4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남베트남 3 0 1 2 6 9 1

<rowcolor=#373a3c> 1956 AFC 아시안컵 우승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대한민국
첫 아시안컵 첫 번째 우승

대한민국이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6. 결과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rowcolor=#373a3c> 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3 2 1 0 9 6 +3 5 우승
<rowcolor=#373a3c> 2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3 2 0 1 6 5 +1 4 준우승
<rowcolor=#373a3c> 3 파일:영국령 홍콩 국기.svg 영국령 홍콩 3 0 2 1 6 7 -1 2 3위
<rowcolor=#373a3c> 4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남베트남 3 0 1 2 6 9 -3 1 4위
  • 득점왕 : 나훔 스텔마치(1936~1999)(이스라엘) 4골

7. 이야깃거리

  • 단순히 보면 대한민국 대표팀이 손쉽게 우승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기적 같은 우승을 한 대회였다. 불과 3년전 한국 전쟁 발생피해로 대한민국의 축구 환경도 많이 열악했고, 대만과의 지역예선에서 1차전인 홈경기는 문제없이 치렀지만, 2차전을 치르러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로 비행기를 타야 했지만 재정이 바닥이 나서 출국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현 대한항공의 전신인 KNA와의 협상 끝에 외상 달고 원정길에 올라서 2-1의 값진 승리를 거두었다. 문제는 저 외상값이랑, 본 대회인 홍콩행 비행깃값인데... 당초 대만과 9월 2일에 열렸던[22] 2차전이 끝난 2일 뒤인 9월 4일 친선경기를 연이어 치러서 이 수익금으로, 경비를 충당할 게획이었으나, 당일 비가 오는 바람에 경기가 취소되었다. 졸지에 대만에서 미아가 될 뻔한 대한민국팀이었으나, KNA와 다시 재협상 끝에 이번에도 외상 달고 홍콩으로 오게 되었으니, 이날은 9월 6일이었다. 대회 두 번째 경기이자 한국의 첫 경기가 치러지는 당일 도착했다. 오전 8시에 도착해서 숙소에 간신히 짐을 풀고 컨디션 조절할 것도 없이 오후 7시에 바로 경기를 스타트했기에 컨디션은 이미 상상 그 이상의 최하...[23] 그럼에도 불구하고 홈팀 홍콩을 상대로 무승부를 거두며 역사적인 아시안컵 첫 승점을 거두게 되었다. 문제는 그다음 경기는... 48시간 뒤인 9월 8일에 열리게 되었다. 9월 2일~9월 8일까지 3경기를 치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48시간 만에 한 경기 더 치러야 하는 살인적인 일정에[24], 상대는 우승을 다툴 강팀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9월 1일 첫 경기 이후 무려 7일이나 쉰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기에, 사실 이스라엘의 낙승으로 보였으나 놀랍게도 대한민국이 첫 승리를 따내며 우승을 향한 교두보를 쌓게 되었다. 이후 7일을 쉬며, 컨디션을 회복한 대표팀은 마지막 경기 남베트남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우승을 하게 된 것이다.
  • 경기 일정이 상당히 독특한데,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동부지역팀은 결정도 안 됐는데 이미 대회는 시작했고, 개최국이 초반에 3경기를 연달아 치르고, 남베트남은 마지막 3경기를 연달아 하는 등, 초대 대회다 보니 행정적으로 열악한 점도 보인다. 본래 각 지역예선 최종라운드가 대회 시작 즈음이었을 텐데, 서부지역은 당시 강호 이스라엘을 제외한 전원 기권으로 지역예선 참가도 못하였고, 중부지역 역시 최종 라운드가 기권으로 진행되지 않다 보니 5월경에 치른 2라운드로 종료가 되었다. 동부지역만 최종라운드가 개최돼버리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출국이 늦어진 것. 물론 그렇다고 해도, 4경기에서 남베트남이 첫 경기를 치른 건 현대축구대회 일정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덕분에 대한민국만 홀로 박싱데이를 치렀다.
  • 대한뉴스에서 1956년 AFC 아시안컵 동부 지역예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만전에서 2-0로 이긴 것을 보도한 적 있다.#[25]

[1] 1위 인도(금메달) 3승 0무 0패 7득 0실
2위 이란(은메달) 2승 1무 1패 5득 3실
3위 일본(동메달) 1승 1무 1패 4득 3실
4위 아프가니스탄 0승 0무 2패 0득 5실

5위 버마(1라운드) 0승 0무 1패 0득 2실
6위 인도네시아(1라운드) 0승 0무 1패 0득 3실

결승전 인도 1:0 이란

동메달전(3,4위전) 일본 2:0 아프가니스탄

4강전 이란 3:2 일본, 인도 3:0 아프가니스탄

1라운드 이란 2:0 버마, 인도 3:0 인도네시아

이 대회는 일본과 아프가니스탄이 4강전부터 치르도록 되었다.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
[2] 1위 대만(금메달) 4승 0무 0패 16득 6실
2위 대한민국(은메달) 1승 2무 1패 15득 12실
3위 버마(동메달) 2승 2무 0패 10득 8실
4위 인도네시아 2승 0무 2패 15득 12실

5위 홍콩(12강 조별리그) 1승 1무 0패 7득 5실
6위 파키스탄(12강 조별리그) 1승 0무 1패 7득 4실
7위 남베트남(12강 조별리그) 1승 0무 1패 5득 5실
8위 인도(12강 조별리그) 1승 0무 1패 3득 6실
9위 싱가포르(12강 조별리그) 0승 1무 1패 3득 7실
10위 일본(12강 조별리그) 0승 0무 2패 5득 8실
11위 필리핀(12강 조별리그) 0승 0무 2패 2득 7실
12위 아프간(12강 조별리그) 0승 0무 2패 득4 실12

이 대회는 12강 조별리그에서 각 조 1위만 4강 토너먼트 진출로 진행되었다.(8강전이 없었다.)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
[3] 유로도 첫 대회인 1960년 부터 1976년 대회까지 유로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리가 단 4자리(4강) 유로 대회로 현재 24자리 유로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웠던 시절이었다.[4] 당시 홍콩은 1954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5위를 기록한 아시아의 강호였고, 이 대회 우승국 대한민국과 2:2 무승부로 승점 1점을 얻으며 56 아시안컵 3위, 1958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6위를 기록한다. 아시안게임은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5] 이 시절 이스라엘은 1956~60아시안컵 준우승, 1958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6위(8강), 1964아시안컵 우승하며, 자국 클럽팀으로 아챔 우승 3회, 준우승 1회1968 올림픽 축구 5위(8강), 1970월드컵 12위를 기록한 강팀이었다.[6] 지금의 미얀마[7] 지금의 스리랑카[8] 이 시절 남베트남은 2년전 1954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7위, 1956 호주 맬버른 올림픽 지역예선까지 통과하였고, 1958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7위, 1959 메르데카컵에서 대한민국을 3:2로 이겼고, 1962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4위를 기록할 정도로 강호였다. 아시안게임 축구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9] 지금의 말레이시아[10] 1954년과 1958년 아시안게임 축구 두 대회 연속 금메달(우승)팀이었으며, 아시안게임 축구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11] 오늘날 동말레이시아 사바 주 지역으로, 이후 말레이시아로 합병[12] 2001년 ~ 2100년[13] 그 후 말라야는 1962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동메달전(3,4위전)에서 남베트남을 이기고 동메달(3위)를 기록한다. 아시안게임 축구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14] 물론 한국이 대만에 밀려 은메달을 연속 수상했으며, 아시안게임 축구는 1998년까지 A매치 대회였다.[4강] [16] 아시안컵이 생기기 전 아시안게임 축구는 아시아 챔피언을 가리는 유일한 대회였기에 비교 자료로써 여기에 기재한다. 1954 아시안게임 축구 자료[17] 12강 조별리그(당시 12강 각 조 1위만 4강 토너먼트로 진출했다. 8강전이 있었으면 8강에 진출 성적이었다.)[18] 이 시절 이스라엘은 1956~60아시안컵 준우승, 1958 아시안게임 축구 대회 6위(8강), 1964아시안컵 우승하며, 자국 클럽팀으로 아챔 우승 3회, 준우승 1회1968 올림픽 축구 5위(8강), 1970월드컵 12위를 기록한 강팀이었다.[19] 12강 조별리그(당시 12강 각 조 1위만 4강 토너먼트로 진출했다. 8강전이 있었으면 8강에 진출 성적이었다.)[20] 은메달[4강] [22] 하루 전날 이미 홍콩에서는 홍콩과 이스라엘이 4강 1차전을 치른 상황이다. 대회 초창기다 보니, 아직 4강 본선 아시안컵 진출팀이 결정도 안 된 상황에서 대회가 시작된 것이다.[23] 2년 전 스위스 월드컵은 그래도 2일 전에 도착했다. 물론 여행거리는 스위스가 훨씬 멀었고 말이 2일 전이지 엄밀히 말해 하루하고 그 전날 밤 1진급 선수들만 우선 급하게 도착한 것이었다.[24] 놀랍게도 프리미어 리그의 박싱데이 일정이 현대에도 이렇게 운영이 된다!!![25] 당시에는 현대에 '중국'으로 불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현대에 대만으로 통용되는 대만중국, 또는 자유중국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