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2:22:08

최정민(축구)

최정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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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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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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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최정민
崔貞敏 | Choi Jeong-Min
출생 1930년 8월 30일[1]
평안남도 대동군
사망 1983년 12월 8일 (향년 53세)
신체 178cm | 70kg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특무부대 축구단 (1952~1962)
감독 양지 축구단 (1967~1968)
대한민국 대표팀 (1977)
국가대표 47경기 22골 (대한민국 / 1953~1961)

1. 개요2. 생애
2.1. 선수 경력2.2. 지도자 경력2.3. 사망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수상
5.1. 선수
5.1.1. 클럽5.1.2. 국가대표
5.2.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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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생애

2.1. 선수 경력

2.1.1. 클럽

최정민은 1930년, 대동군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최정민은 1.4 후퇴 때 남하한 뒤 CIC 축구팀에 합류한 후 10년간 CIC에서 뛰었다.

2.1.2. 국가대표

최정민은 대한민국 축구의 대부 김용식의 발탁으로 국가대표팀에 발탁 받은 후 8년간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서 최초의 한일전이 성사됐다.[2] 이승만 대통령은 이 경기를 불허할 작정이었다. 가뜩이나 6.25 전쟁 이후라 신예를 양성하지 못해 노장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일본에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8.15 광복이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선수들을 입국시키는 것도 국민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래놓고 홈경기에서 패배한다면 말 그대로 대표팀에 대한 여론은 불문가지였다. 이 때, 재일교포 유력자들이 민족 그리고 재일교포들의 사기를 상기시켰고 이유형 대표팀 감독은 두 경기 모두 원정으로 치러도 상관없고 패배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면서 이승만을 설득했다. 이에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치른다는 조건으로 이승만의 허락이 떨어졌고,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 장택상마저 선수들을 모두 자택에 불러모아 "패배한다면 현해탄을 건너지 않고, 고기밥이 되어도 상관없느냐?"라고 압박했다. 이에 선수들 역시 모두 동의하고 독한 마음을 품은 채 일본 원정길을 떠난다. 일본은 서류의 누락을 이유로 입국을 미루며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최정민은 이렇게 메이지 진구 경기장에서 치러진 축구 최초의 한일전 원정 두 경기에서 3골을 넣어[3] 대한민국의 1승 1무에 큰 공헌을 했다. 대한민국은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4]

그러나 16개국 본선에서 대한민국은 참패만 맛보고 돌아왔다. 1950년대의 한국은 세계 최빈국급 국가로 제대로 된 세계 대회 경험이 거의 없었다. 단복조차 구하지 못해서 대한축구협회 임원이 아는 양복집에서 양복을 외상으로 맞춰입은[5] 대표팀은 미군의 수송기를 타고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향했으나 경험이 없고 행정력이 미숙한 나머지 우왕좌왕하며 며칠을 허비하다가 겨우 스위스행 비행기가 있다는 방콕행 비행기를 타고, 거기서 다시 스위스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이마저도 비행기표를 제대로 못 구해서 1진들이 모두 이동하지 못할 뻔 했으며 심지어 코치진의 좌석은 "월드컵인데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는 영국 여행객 부부의 호의에 기대서 양보받았다. 그나마 방콕에서도 간신히 구한 표가 스위스 직항이 아닌 콜카타 경유였다. 경기 10시간을 남겨놓고 스위스에 도착한 대표팀은 숙소 예약도 못했던 상황이라 스위스 축구협회의 도움으로 간신히 숙소를 잡게 되었다.

그나마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 주무같은 개념이 있었을 리 없던 선수단은 축구화와 유니폼 준비 등으로 분주했다. 등번호가 없는 유니폼을 가져왔기 때문에 선수들은 바느질로 직접 유니폼에 등번호를 붙여야 했다. 당연히 현지적응 훈련은커녕 시차 적응조차 제대로 못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부랴부랴 당시 자타공인 세계 최강의 팀이었던 헝가리와의 1차전에 출전했다. 최정민은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선발 명단에 올랐다. 경기 결과는 0:9 대패였다. 헝가리전의 후반전이 시작되고 얼마 못 가 탈진해서 쓰러지는 선수가 속출했고 선수들은 그런 상황에서 투혼을 최대한 발휘해봤지만 헝가리와의 실력차는 투혼으로 메울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아득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튀르키예와의 2차전에 2군을 내보냈고 최정민도 스타팅에서 빠졌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튀르키예에 0:7로 패했다. 이 때 선수단은 6.25 전쟁의 영향으로 너무나 당연하게도 후배들을 양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절에 활동하던 30대 노장 선수들도 많았다.

대한민국과 세계와의 격차가 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용식 감독은 "다 져도 좋다. 그래도 한 골만이라도 넣자. 그래야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느냐?"라는 말로 선수들을 독려했지만 어찌보면 소박한 목표도 당시 대표팀은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놓고 비춰보면 최정민을 포함한 대한민국 공격진, 넘어서 대한민국 선수단에 누구도 비난을 할 수 없었다.

대신 대한민국 대표팀은 위엄차게 아시아 무대를 정복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당시 대한민국은 1회 대회, 2회 대회를 2연패했다. 초대 대회 본선 4강 결선 리그전[6]으로 승자를 결정짓는 이 대회에서 한국은 1승 1무였는데 이스라엘이 베트남 공화국을 꺾고 2승 1패를 차지하게 되어 무조건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베트남 공화국을 맞이하게 된다. 최정민은 이 마지막 경기에서 팀의 3번째 골과 5번째 골을 넣으며 5:3 승리에 기여했다. 두 번째 대회에서도 최정민은 첫 경기 베트남 공화국전에서 3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5:1로 압승을 거뒀으며, 이 대회는 한국이 3전 전승을 거두며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최정민은 1954년, 1958년 두 대회에 참가했고 대한민국은 연속 준우승을 차지했다.[7] 대한민국은 당시 아시아의 호랑이로 명성을 드날렸으며, 최정민도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서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1960년 이후, 아직까지도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2.2. 지도자 경력

최정민은 은퇴 이후, 1966년에서 1968년 사이에 여러모로 전설적인 축구팀이었던 양지 축구단의 초대 감독을 맡았으며 1977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여기서 차범근을 가르쳤다.

최정민의 딸 최혜정씨는 "아버지는 선수들이 눈을 못 쳐다볼 정도로 무서웠어요. "이놈의 애미나이 새끼들"하면서 운동장에서 소리치던 게 생생해요. 국가대표팀을 맡았을 땐 특히 차범근 선수를 많이 야단쳤던 것 같아요. 그만큼 잠재력이 뛰어났으니까 더 잘하라고 다그치신 거죠. 그렇지만 품어줄 땐 넉넉하게 품어주셨고, 윗사람 눈치를 보지 않으셨어요."라고 회고했다.

2.3. 사망

1983년에 최정민은 전국체육대회 이북5도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최정민은 병원에 입원중이었음에도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 선수들을 독려한 일화도 있다. 결국, 동년에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지병인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3. 플레이 스타일

최정민은 178cm의, 당시로서는 큰 키와[8] 100m를 11초대 초반에 주파하는 빠른 발을 갖고 있었다. 이 신체 조건을 통해 최정민은 제공권과 강력한 슈팅, 스피드로 이름을 날렸다. 물론 최정민 본인도 몸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새벽에 등산로나 운동장에서 달리기는 기본이고 정규 훈련 후에도 자신의 보충 트레이닝과 후배들의 개인 지도에 신경을 썼다.

특히, 최정민은 상술했듯 '한일전의 사나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한일전에 강했는데 한일전에만 무려 6골을 넣은 기록을 갖고 있으며, 이는 한일전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이기도 하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서 맞붙었던 일본 수비수 히라키 류조는 최정민에 대해 “최정민은 밸런스와 스피드를 겸비한 공격수여서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우리는 거인과 싸우는 어린이들 같았다.”고 회고했다.

4. 평가

최정민은 '아시아의 황금 다리'라는 별명과 함께 1950년대 대한민국과 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대한민국 대표팀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연 선수였다. 대한민국 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는 최정민 - 허윤정[9] - 이회택 - 김재한(차범근)[10] - 최순호[11] - 황선홍[12] - 이동국(안정환)[13] - 박주영 - 황의조[14] 순으로 현재까지 이어진다.

최정민은 대한민국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최전방 스트라이커이자 A매치 47경기 22골을 넣었던 당대 최고의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지 못했다.

축구인들 사이에서 최정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중앙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후배들은 그를 ‘정 많고 화통한 선배’로 기억한다. 이재(利財)에 밝았던 최정민은 친형과 함께 갈비 · 냉면집을 운영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씀씀이가 컸고, 어려운 후배를 보면 그냥 보고 넘기지 않았다는 게 주위의 증언이다. 최혜정씨는 “중앙대 감독 시절엔 당시 귀한 고기나 생선을 시장에서 떼 와서 어머니가 직접 요리를 해 선수들을 먹이곤 했어요”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축구 원로들도 있었다. 사생활이 반듯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까마’[15]라는 별명처럼 그는 해외로 나갈 때마다 국내에 없는 물건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곤 했다. 어떤 이는 이를 ‘밀수’라고 했고, ‘지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성격 탓’이라고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습도박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2005년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당시 최정민도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일부 원로들의 거센 반대로 등재되지 못했다.

중앙대와 대표팀 시절 최정민과 인연을 맺었던 조영증은 “최정민 선생님은 워낙 실력이 출중한 스타 출신이어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가 대단했죠. 체력과 정신력을 강조하셨고, 축구에 대한 집념만큼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어요”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조영증은 “사생활에 대한 논란과는 별도로, 대한민국 축구 스트라이커 계보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객관적인 평가와 예우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16]

5.1.2. 국가대표

5.2. 감독



[1] 다만 대한축구협회 웹 사이트에는 1927년 7월 7일생으로 나와 있다[2] 이 무렵 최정민이 신었던 축구화가 홍덕영 선수의 일화와 더불어 이 당시 대표팀을 다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13회에 등장하기도 했다. 스파이크 몇개만 있고 그것마저도 나무 재질의 다소 충격적인 축구화로 그때 당시 축구 대표팀의 열약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3] 최정민은 한일전에서 이후 3골을 더 넣어 6골을 넣었고 차범근과 함께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서 이 부문 최다 득점자이다.[4] 이 당시의 아시아는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축구팀이나 대회가 있기는커녕 축구라는 스포츠가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FIFA 역시 이러한 아시아의 축구 수준을 알고 있었지만 쥘 리메 회장이 "세계인의 축제에 아시아만 차별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력 주장하여 아시아도 참여가 성사되었다. 그래서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과의 경쟁 없이 아시아 국가들끼리만 예선을 치렀고 대한민국은 수월하게 일본만 이기고 월드컵 본선에 갈 수 있었다.[5] 그 양복의 품질도 당시 시대상 어쩔 수 없는 저질이라 장시간 비행에 밑단이 닳아서 짧아졌고 당신네 나라에서는 이렇게 양복을 짧게 입는게 유행이냐는 유럽 기자단의 조롱을 받았다. 이에 대표팀은 우리 나라는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물자를 아끼는 것이 미덕이라고 답했다는 눈물나는 일화도 전해진다.[6] 1964 아시안컵까지는 지역예선에서 본선 아시안컵에 들어 갈 자리가 단 4자리(4강)라 현재 24자리 아시안컵에 들어가는 것보다 매우 어려웠고 지역예선도 참가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7] 우승은 2차례 다 중화민국이 차지했다.[8] 당시 대한민국 선수들 중에서 최장신급이었다. 최정민과 14년의 나이차이가 있고 현역 시절 국가대표팀에서 장신으로 분류됐던 중앙 수비수 김호의 키도 177cm였다. 이 정도 신장은 당시 유럽 선수 기준으로도 작은 편이 아니었다. 이 시기 180대 선수는 드물었고, 160~170대의 선수들이 주류였기 때문이다. 190cm의 김재한이 1970년대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최정민보다 큰 선수를 찾기 힘들었다.[9] 허정무의 친척(일부 언론에서는 삼촌이라고 소개했으나 불확실하다.)이자 1964 도쿄 올림픽, 1964 AFC 아시안컵 이스라엘에 출전한 스트라이커. 그와 함께 출전한 조윤옥은 최전방 공격수가 아니라 인사이드 포워드였다.[10] 차범근은 국가대표팀에서 대부분의 경력을 윙어로 뛰었지만 김재한과 투톱의 스트라이커로 뛰기도 했고 원톱을 소화한 적도 있다.[11] 이태호도 국가대표 팀에서 상당히 중용되었지만 1순위 스트라이커는 최순호였으며, 메이저 대회에서도 최순호가 주로 나왔다.[12] 최용수, 김도훈도 같은 시기에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으나 1순위 스트라이커는 황선홍이었다.[13] 안정환의 본래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으나 투톱의 세컨드 스트라이커나 원톱을 소화하기도 했다.[14] 다만, 월드컵 주전 자리는 조규성에게 밀렸다.[15] 중간상인을 뜻하는 일본어다.[16] 최정민은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