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04:10:49

최정민(축구)

최정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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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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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최정민
崔貞敏 | Choi Jeong-Min
출생 1930년 8월 30일[1]
평안남도 대동군
사망 1983년 12월 8일 (향년 53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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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특무부대 축구단
감독 양지 축구단 (1966~1968)
대한민국 대표팀 (1977)
국가대표 47경기 22골 (대한민국 / 1953~1961)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사망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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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1950년대 대한민국과 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별명은 '아시아의 황금 다리'. 대한민국 스트라이커 계보의 처음을 장식한 선수였다. 한국 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는 최정민 - 허윤정[2] - 이회택 - 김재한(차범근)[3] - 최순호[4] - 황선홍[5] - 이동국(안정환)[6] - 박주영 - 황의조[7]순으로 현재까지 이어진다.

2. 선수 경력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나 경평전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4 후퇴로 남하한 뒤 CIC 축구단에 합류한 후 김용식의 발탁으로 국가대표로 발탁 받은 후 10여 년간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지역 예선에서 최초의 한일전이 성사됐다.[8] 이승만은 이 경기를 불허할 작정이었다. 가뜩이나 한국전 이후라 신예를 양성하지 못해 노장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일본에게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광복이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선수들을 입국시키는 것도 국민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고, 홈경기에서 패배를 한다면 설상가상이었다. 이 때, 재일교포 유력자들이 민족 그리고 재일교포들의 사기를 상기시켰고 이유형 감독은 두 경기 모두 원정으로 치러도 상관없고 패배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면서 간청했다. 이에 이승만의 허락이 떨어졌고,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 장택상마저 선수들을 모두 자택에 불러모아 "패배한다면 현해탄을 건너지 않고, 고기밥이 되어도 상관없느냐?"라고 당부했다. 이에 선수들은 모두 동의하고 독한 마음을 먹고 일본 원정길을 떠난다. 일본은 서류의 누락을 이유로 입국을 미루며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최정민은 한국 축구 최초의 한일전 원정 두 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9] 을 1승 1무로 이끌어 일본을 이기며, 16개국 본선 54월드컵으로 진출했다.[10]

허나, 16개국 본선에서는 스코어가 엄청나게 벌어지는 참패만 맛보고 돌아오고 마는데 1950년대 전후의 한국은 세계 최빈국급 국가로 제대로 된 세계대회 경험이 전혀 없었다. 양복조차도 외상으로 맞춰입은[11] 대표팀은 미군의 수송기를 타고 일본 하네다로 향했으나 경험이 없고 행정력이 미숙한 나머지 우왕좌왕하며 며칠을 허비하다가 겨우 스위스행 비행기가 있다는 방콕행 비행기를 타고, 거기서 다시 스위스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비행기표를 제대로 못 구해서 한날 한시에 같이 이동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코치진의 좌석은 "월드컵인데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는 영국 여행객 부부의 호의에 기대서 양보받았다. 방콕에서도 스위스 직항이 아니라 캘커타 경유였다. 경기 이틀 전 그것도 밤 10시에 도착한 대표팀은 숙소를 예약했을 리도 없고, 스위스 축구협회의 도움으로 간신히 숙소를 잡게 되었다.

그나마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 주무가 있을 리 없는 선수단은 축구화와 유니폼 준비 등으로 분주했다. 당연히 시차고 여독이고 피로가 풀렸을 리도 없는 대표팀은 당시 세계 최강의 팀 중 하나였던 헝가리와의 1차전에서 후반전 시작 후, 얼마 못 가서 탈진해서 쓰러지는 선수가 속출했고, 결국 2차전은 2군을 내보내고 만다. 이 때 선수단은 6.25 전쟁의 영향으로 너무나 당연하게도 후배들을 양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절에 활동하던 노장급의 30대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으며 40대 선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참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으나, 위엄차게 아시아 무대를 정복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당시 1956년 1회 홍콩 아시안컵, 1960년 2회 아시안컵을 2연패했다. 본선 4강 결선리그로 승자를 결정짓는 이 대회에서 한국은 1승 1무였는데 이스라엘이 베트남을 꺾고 2승 1패를 차지하게 되어 무조건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베트남을 맞이하게 된다. 최정민은 이 마지막 경기에서 팀의 3번째 골과 5번째 골을 넣으며 5:3 승리에 기여한다. 두 번째 대회에서도 최정민은 첫 경기 베트남전에서 3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5:1로 압승을 거뒀으며, 이 대회는 한국이 3전 전승을 거두며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또한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 1958 도쿄 아시안 게임 두 대회에서 연속 준우승을 차지했고[12] 아시아의 호랑이로서 명성을 드날렸으며, 최정민도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서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1960년 이후, 아직까지도 AFC 아시안컵을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주무기는 178cm의, 당시로서는 큰 키와[13]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빠른 발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한일전의 사나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한일전에 강해서 한일전에만 무려 6골을 넣은 기록을 갖고 있으며, 이는 한일전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이기도 하다. 당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에서 맞붙었던 일본 수비수 히라키 류조는 최정민에 대해 “밸런스와 스피드를 겸비한 공격수여서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우리는 거인과 싸우는 어린이들 같았다.”고 회고했다.

4.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1966년에서 1968년 사이에는 전설적인 축구팀(경기 내적이든 외적이든)인 양지 축구단의 감독을 맡았으며, 1977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여기서 차범근 감독을 가르쳤다.

최정민의 딸이었던 최혜정 씨의 의하면 "선수들이 눈을 못 쳐다볼 정도로 무서웠어요. ‘이놈의 애미나이 새끼들’ 하면서 운동장에서 소리치던 게 생생해요. 국가대표팀 맡았을 땐 특히 차범근 선수를 많이 야단쳤던 것 같아요. 그만큼 잠재력이 뛰어났으니까 더 잘하라고 다그치신 거죠. 그렇지만 품어줄 땐 넉넉하게 품어주셨고, 윗사람 눈치를 보지 않으셨어요."라고 회고했다.

5. 사망

1983년에는 전국체육대회 이북5도 대표팀 감독을 맡은 가운데 지병으로 입원 중이었음에도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서 선수들을 독려한 일화도 있다. 결국, 동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6. 평가

이상하게도 한국 최초의 최전방 스트라이커이자 A매치 47경기 22골을 넣었던 당대 최고의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축구인 사이에서 최정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후배들은 그를 ‘정 많고 화통한 선배’로 기억한다. 이재(利財)에 밝은 최정민은 친형과 함께 갈비 · 냉면집을 운영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씀씀이가 컸고, 어려운 후배를 보면 그냥 보고 넘기지 않았다는 게 주위의 증언이다. 최혜정씨는 “중앙대 감독 시절엔 당시 귀한 고기나 생선을 시장에서 떼 와서 어머니가 직접 요리를 해 선수들을 먹이곤 했어요”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축구 원로들도 있었다. 사생활이 반듯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까마’[14]라는 별명처럼 그는 해외로 나갈 때마다 국내에 없는 물건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곤 했다. 어떤 이는 이를 ‘밀수’라고 했고, ‘지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성격 탓’이라고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습도박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2005년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 에도 그는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일부 원로들의 거센 반대로 등재되지 못했다.

중앙대와 대표팀 시절 최정민을 감독으로 모셨던 조영증 프로축구연맹 심판위원장은 “최정민 선생님은 워낙 실력이 출중한 스타 출신이어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가 대단했죠. 체력과 정신력을 강조하셨고, 축구에 대한 집념만큼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어요”라고 회고했다. 조 위원장은 “사생활에 대한 논란과는 별도로,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객관적인 평가와 예우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 다만 대한축구협회 웹 사이트에는 1927년 7월 7일생으로 나와 있다[2] 허정무의 친척이자 (일부 언론에서는 삼촌이라고 소개했으나 불확실) 1964 도쿄 올림픽, 1964 AFC 아시안컵 이스라엘에 출전한 스트라이커. 그와 함께 출전한 조윤옥은 최전방 공격수가 아니라 인사이드 포워드였다.[3] 차범근은 국가대표팀에서 대부분의 경력을 윙어로 뛰었지만 김재한과 투톱의 스트라이커로 뛰기도 했고 원톱을 소화한 적도 있다.[4] 이태호도 국가대표 팀에서 상당히 중용되었지만 1순위 스트라이커는 최순호였으며, 메이저 대회에서도 최순호가 주로 나왔다.[5] 최용수, 김도훈도 같은 시기에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으나 1순위 스트라이커는 황선홍이었다.[6] 안정환의 본래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으나 투톱의 세컨드 스트라이커나 원톱을 소화하기도 했다.[7] 다만, 월드컵 주전 자리는 조규성에게 밀렸다.[8] 경기 당시 최정민 선수가 신었던 축구화가 홍덕영 선수의 일화와 더불어 이 한일전을 다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13회에 등장하기도 했다. 무려 스파이크 몇개만 나있고 그것마저도 나무 재질인 다소 충격적인 축구화로 그때 당시 축구 대표팀의 열약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9] 6골로 차범근과 함께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서 이 부문 최다 권위자이다.[10] 이 당시의 아시아는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축구팀이나 대회가 있기는 커녕 축구라는 스포츠가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은 열악한 시점이었는데, FIFA는 이러한 아시아의 축구 수준을 고려하지 못하고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과의 경쟁 없이 아시아 국가들끼리만 예선을 치르게 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타 대륙에 비해 수월하게 일본만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이 16강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0:9, 터키에 0:7로 참패하고 탈락하자 FIFA가 아시아들이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기에는 아시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지하고 1958 월드컵 지역예선부터는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들과 경쟁을 치러야 1958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11] 그런데 당시 국내 양복점이라 품질이 똥같은 나머지 장시간 비행에 단복이 망가져서 유럽 기자단의 조롱을 받았다.[12] 우승은 2차례 다 대만이 차지했다.[13] 당시로서는 최장신급이었다. 10년이 넘는 후배인 국가대표 중앙 수비수들인 김호와 김정남도 170대의 비슷한 신장이었다. 이 정도 신장은 당시 유럽이나 남미선수 기준으로도 큰 편에 속했다. 이 시기 180대 선수는 정말 드물었고, 160~170대의 선수들이 주류였기 때문.[14] 중간상인을 뜻하는 일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