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04:50:48

홍덕영

홍덕영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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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월드컵 주전 수문장
홍덕영
(1954, 스위스)
오연교
(1986,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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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파일:i13849438484.jpg
이름 홍덕영
洪德泳 | Hong Deok-Young
출생 1921년[1] 5월 5일
함경남도 함흥부
사망 2005년 9월 13일 (향년 84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6cm | 70kg
직업 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선수 조선방직 축구단 (1951~1955)
감독 고려대학교 축구부 (1959~1962)
서울은행 축구단 (1969~1976)
대한민국 대표팀 (1971)
행정가 대한축구협회 (1985~1986 / 부회장)
국가대표 17경기 56실점 (대한민국 / 1948~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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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력 한일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경력
3. 이후4. 플레이 스타일5. 사생활6. 수상
6.1. 선수
6.1.1. 클럽6.1.2. 국가대표
6.2. 개인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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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축구계의 1세대로 활약했던 원로이며 김용식, 이회택, 차범근과 함께 선수로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4인 중 한 명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홍덕영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함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8.15 광복서울에 건너와 정착했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홍덕영은 서울에서 고려대학교를 다녔고 1951년 이후 조선방직 축구단에서 뛰었다. 조선방직 축구단에서 홍덕영은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 1회(1951),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준우승 3회(1952, 1953, 1954)의 기록을 남겼다.

2.2.2. 국가대표

홍덕영은 갑작스럽게 1948년 올림픽에서 미군정 대한민국의 주전 골키퍼가 되었다. 원래 주전 골키퍼로 낙점받았던 선수는 차순종이었는데, 차순종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홍덕영이 대신 뛴 것이라고 한다.

홍덕영의 회고에 따르면 원래는 그냥 구경만 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주전 골키퍼의 역할을 떠맡는 바람에 굉장히 무섭고 떨렸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1라운드 16강전에서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와 맞붙었는데, 결과는 한국이 5:3으로 승리했다. 멕시코 입장에선 상당한 코리아 쇼크라고 볼 수 있겠다. 독립한 지 3년도 안 되어 미군의 지배를 받던의 나라의 국가대표가 멕시코에게 승리했으니 엄청난 국위선양을 한 셈이다.[3] 주전 골키퍼의 부상으로 얼떨결에 골문을 지키게 된 홍덕영 골키퍼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첫 획을 긋는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8강전에서 대한민국은 스웨덴0:12로 대패했고 그의 첫 국제대회도 막을 내렸다.[4] 이 대패 기록은 [age(1948-08-06)]년이 지난 현재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다 실점 및 최다 스코어 차 패배 기록인데, 참고로 이 시기의 스웨덴은 '그레노리 트리오'가 이끄는 황금세대를 보유하고 있었다.[5] 스웨덴이 한국전에서 기록한 전체 슈팅은 무려 48개로, 홍덕영 골키퍼는 수많은 슈팅 속에서 고군분투하다가 12골이나 내줘야 했다.[6][7] 이후 대승을 거두고 4강에 진출한 스웨덴 황금 세대는 자국 축구 역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달성했다.
2.2.2.1.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대한민국일본월드컵 본선 진출을 놓고 다투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당시의 대한민국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컸는데 이승만 대통령부터 "일본 놈들이 한국 땅을 밟는 것을 두 눈 뜨고 못 본다"며 일본대표팀의 입국을 매우 강력히 반대했다. 당시 분위기는 몹시 살벌했고 이 소문이 퍼지자 일본 대표팀의 입국 반대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홈 앤드 어웨이가 아닌 2경기 모두를 원정 경기로 치르는 핸디캡을 안게 되었다.

그렇게 치러진 최초의 한일전의 결과는 한국의 5:1 대승. 당시 홍덕영은 일본 땅에 처음 펄럭이는 태극기애국가 연주를 들으면서 느꼈던 뭉클한 기억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고했다. 전반 16분, 일본의 나가누마 켄에게 대한민국이 선제골을 내주자 수많은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대한민국 선수들을 조롱했으나 선수들은 이에 주눅들지 않고 내리 5골을 꽂아 넣으며 역전승, 일본 축구팬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린다. 홍덕영 골키퍼는 당시 우리보다 축구 인프라가 훨씬 발달되어 있던 일본을 상대로 한국 응원단도 없는 원정 경기에서 90분 내내 1실점밖에 허용하지 않았고, 그야말로 엄청난 선방들을 보여 주면서 최후방을 든든하게 지키며 맹활약했다. 그리고 원정 2차전에서도 대한민국은 일본과 2:2로 비기며 월드컵 본선[8][9]에 진출한다.

월드컵 진출 확정 이후 홍덕영은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서 주전 골키퍼로 은메달을 수상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10] 대한민국은 아시안 게임을 치르고 다음 달에 있을 대망의 월드컵 본선을 준비하게 된다.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508290348_01.jpg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 경기 전 축구화를 수선하는 모습

그러나 처음으로 해외에 가게 된 선수들과 관계자들은 항공편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당시에 비행기를 타려면 20여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 월드컵이 치러질 날짜까지 스위스에 도착하지 못하게 될 위기를 겪었다. 스위스까지 남은 비행기 표도 얼마 없어서 선수들은 표를 모으는데 최선을 다했고 잉글랜드 출신 신혼부부가 티켓 두 장을 양보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11] 다행히 선수단은 아슬아슬하게 비행기를 타는데 성공했지만 46시간의 비행 이후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는 1차전 경기로부터 겨우 10시간 전이었고 선수들은 현지 환경은커녕 시차 적응조차 못한채 바로 경기를 치러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니폼 제작업소가 선수들 유니폼의 등번호를 넣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고 그걸 뒤늦게 확인한 선수들은 그 부족한 휴식 시간을 또 쪼개서 대회 관계자로부터 천으로 된 숫자를 구하고 유니폼에 박는 수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급하게 치르게 된 조별리그 1차전의 상대는 하필 당대를 넘어 역대 최고의 국가대표 축구팀 중 하나로 평가를 받는 헝가리였다. 헝가리는 매직 머저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1952년 올림픽 축구의 챔피언이자 1954년 월드컵 전까지 28경기 무패행진 중이었으며 특히 바로 직전 평가전에서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세기의 경기에 이어 부다페스트 홈경기에서 잉글랜드에 7:1 대승을 거뒸다. 이는 헝가리가 잉글랜드에 홈에서 유럽 대륙팀에 최초 패배를 대패로 안겨준 굴욕에 최다 스코어차 패배 기록까지 함께 얹어준 것으로 당시 헝가리는 우승후보 0순위 팀이었다. 그 선수진은 푸슈카시, 코치시, 히데그쿠티, 보지크 등 홍덕영이 6년 전 올림픽에서 만났던 스웨덴의 그레노리 트리오와 비슷하거나 그를 능가하는 선수들이 다수 있었다.

결국 헝가리전의 결과는 0:9 패배였다. 후반전 도중에 무려 4명의 선수들이 탈진하거나 쥐가 나서 쓰러지는 바람에 고작 7명이 경기를 마무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2] 당시 홍덕영 골키퍼는 이 경기에서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들을 일방적으로 받는 대단한 투혼을 보였기에,[13] 경기가 끝나고 일부 관중들이 그의 활약에 감동하여 사인을 받아 가거나 한국 대표팀 숙소에 선물을 놔두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당장 한국을 9:0 이라는 무지막지한 점수차로 꺾은 헝가리의 매직 마자르가 '아시아의 듣보잡 팀, 그것도 전쟁이 끝난지 1년도 안된 나라의 대표팀을 상대로 고작 9골밖에 못 넣은 거냐!'라며 욕을 먹었을 정도였다.

이후 2차전 튀르키예전에서 대한민국은 7명의 멤버를 바꿨지만 0:7로 패배하며 귀국하게 되었다. 사실 튀르키예는 당시 한국이 꼭 그렇게 크게 질 상대가 아니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1961년에 가졌던 터키 원정 친선경기에서도 0:1로 패배했던 것이나 같은 조에 편성된 서독이 헝가리에게 3:8로 패배했는데 튀르키예도 그런 서독에게 1:4, 2:7로 찍소리도 못하고 패배한 것으로 봐도 당시 한국이 튀르키예에 이렇게까지 크게 질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지적응훈련은 커녕 경기에 지각만 면할 정도로 스위스에 늦게 온 데다가 오랜 비행으로 컨디션이 떨어진 상태에서 세계 최강 헝가리까지 무리하게 상대한 한국의 상황이라면 이해 못 할 결과는 아니다.

3. 이후

홍덕영은 1955년에 선수 생활을 접고 심판으로서도 활동했다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 감독직을,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서울은행의 감독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홍덕영은 1971년에 대한민국의 대표팀 감독으로 킹스컵에 참가하기도 했고 1985년부터 이듬해인 1986년까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직도 맡았다.

홍덕영은 말년엔 당뇨합병증으로 인해 시력을 잃고 발가락 절단 수술까지 하는 고생을 하다가 병세 악화로 2005년 9월 13일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그래도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노환임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4강 신화를 달성하는 맹활약을 들으면서 "후배들이 원을 풀어줘 고맙다."라는 말을 남겼고, 세상을 떠난 해인 2005년에는 런던 올림픽 당시 선배이자 동료, 스위스 월드컵 당시 감독이었던 김용식, 후배들인 이회택, 차범근, 공로 부문의 김화집, 거스 히딩크, 정몽준 등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7인 중 한 명으로 헌액되는 영광을 누렸으니, 이렇게나마 오랫동안 응어리진 월드컵에서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그에게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4.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반사 신경을 바탕으로 슈퍼세이브를 기록하던 골키퍼였다. 그 외에 페널티 킥 선방도 꽤 잘하는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5. 사생활

정치경제학자인 홍기빈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이 그의 차남이다.[14] 2022년 1월 방영된 SBS 교양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1954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이야기를 다룬 '출격 1954 -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편의 주인공 '홍덕영 씨'의 아들로 나와 아버지의 활약을 회고하는 증언자로도 등장했다. 홍기빈 소장은 당시에 고생했던 아버지를 지금 만났다면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라도 사드리고 싶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6. 수상

6.1. 선수

6.1.1. 클럽[15]

6.1.2. 국가대표

6.2. 개인

7. 관련 문서



[1] 대한축구협회 아카이브. 1926년생으로 알려진 기록도 다수 존재한다.[2]고려대학교[3] 다만, 멕시코는 그 당시에도 북중미에서는 강호였지만 월드컵에서는 그야말로 동네북 신세였다. 멕시코는 초대 월드컵에서부터 13위 꼴찌였고, 당시 1948년 올림픽에서도 연이어 꼴찌 신세였다가 1958년에서야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비겨 승점 1점을 얻었다. 멕시코가 월드컵 2라운드에 진출한 것은 1970년 자국 월드컵 때였다. 그리고 올림픽 축구에서는 멕시코가 이상하게도 한국을 단 1번도 못 이기고 있다. 멕시코가 2012년 올림픽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받을 때조차도 한국에게 0-0으로 비겼고, 한국과 올림픽팀 성적은 1948년 이후로 1승 4무 3패로 압도적으로 밀려있다. 그나마 양팀의 최근 경기였던 2020년 올림픽에서는 멕시코가 6:3으로 승리했다.[4] 저 당시 스웨덴도 "저런 나라한테 고작 12골밖에 못넣었냐"(...)고 욕을 먹었을 정도였다고 한다.[5] 군나르 그렌, 군나르 르달, 닐스 드홀름을 묶어 그레노리 트리오로 불렀다. 특히 노르달과 리드홀름은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명문 클럽인 AC 밀란의 역대 베스트 11을 선정할 때도 자주 언급되는 선수들이다.[6] 이 기록은 2005년 인터뷰에서 홍덕영 선수가 직접 밝힌 기록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효 슈팅으로 와전되어 보도되고 있다. 만약 유효 슈팅이라면 수비의 도움을 받았다 해도 단 한 경기에서 무려 36개의 유효 슛을 막았다는 주장인데, 이는 골키퍼의 상징인 레프 야신도 소환할 수 있는 기록이라 상식적으로 전체 슈팅일 가능성이 높다.[7] 한국 축구 최악의 경기라 평가받는 1998년 월드컵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네덜란드의 기록이 슈팅 27개, 유효 슈팅 17개로 김병지가 이 경기에서 5실점이나 하고도 팬들에게 그의 인생 경기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홍덕영은 이에 2배 가까운 슈팅 수를 맞이한 것이다.[8] 기록상으로 대한민국의 첫 16강 기록은 이 대회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의 본선 1라운드는 16강 조별리그였다. 즉, 1986년 월드컵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이 FIFA 월드컵에서 흔히 목표로 삼던 16강은 2라운드 진출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다.[9] 당시 FIFA1938년 대회부터 1954년 대회까지 FIFA아시아에 무려 1장의 티켓을 배분했다. FIFA도 당시 아시아의 축구 실력이 낮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쥘 리메 회장이 전세계인의 축제에 아시아를 빼놓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입장을 보여 그의 뜻을 받아들인 것도 있었다.[10] 과거의 아시아 축구에 대해서 동남아시아가 지금과 달리 잘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돌고 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시에도 상대 전적이나 대회 성적을 볼 때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우리나라보다 한 수 아래였고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국가는 이스라엘, 중화민국, 버마로 추려진다. 즉, 당시 대한민국에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선 버마가 까다로운 상대에 해당된다. 1954년 아시안 게임 결승에서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에 2:5로 패배했다.[11] 이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우여곡절은 이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12] 당시 축구 규정상으로 선수를 교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선수 교체 제도는 그로부터 16년 뒤에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이탈리아가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던 마지막 월드컵인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과의 16강 조별리그 경기를 치르던 도중 선수 1명이 부상을 당해 10명으로 치러야 하는 악조건까지 겹친 끝에 결국 북한의 박두익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패배하여 8강 진출 실패를(16강 조별리그 9위 탈락) 겪기도 했다.[13] 특히 푸슈카시의 슈팅 파워가 크게 충격적이었는지 2005년 인터뷰에서도 푸슈카시의 슛이 골대를 맞을 때의 소리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가 있은 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야말로 홍덕영은 평생을 기억한 것이다.[14] 홍덕영의 부고 당시 선친을 회고하는 인터뷰이로 나오기도 했다.[15] 홍덕영은 조선방직 축구단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