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17:56:08

세기의 경기(1953)

1. 개요2. 경기
2.1. 프리뷰2.2. 포메이션2.3. 내용
2.3.1. 전반전2.3.2. 후반전
2.4. 리뷰
3. 이후4.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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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3년 11월 25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축구 A매치 경기이다.

2. 경기

파일:FIFA 로고.svg
1953 A매치 친선경기
1953년 11월 25일
웸블리 스타디움 (영국, 런던)
주심: 레오 혼 (네덜란드)
관중: 105,000명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3 : 6 파일:헝가리 국기.svg
잉글랜드 헝가리
15' 재키 시웰
38' 스탄 모텐슨
60' (PK) 알프 램지
파일:득점 아이콘.svg 1', 22', 56' 난도르 히데구티
25', 29' 페렌츠 푸스카스
52' 요제프 보직

2.1. 프리뷰

영국에서 축구가 탄생하고 세계 곳곳에서 축구가 전파된 이후에도 영국은 그들의 축구가 우월하다는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올림픽 축구는 아마추어리즘이 있는 대회기도 해서 영국은 단일팀을 내보냈고 FIFA 월드컵이 창설되었을 때도 그들은 대회가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참가를 거부했었다.[1]

초창기에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보다 조금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줬던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1930년대에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패하는 등 체면을 구긴 적이 있었지만 잉글랜드는 그래도 자존심을 조금 더 오래 지켜나갔다. 잉글랜드는 1929년에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 원정에서 발목을 잡힌 적이 있었지만 적어도 홈에서는 달랐다.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우승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아스날 스타디움에서 하이버리의 전투끝에 3-2 승리를 거둬 월드컵에 참가하면 우승할 수 있지만 참가를 안하는 것뿐이라는 말을 허언으로 만들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FIFA의 간곡한 설득에 결국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에 잉글랜드가 출전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0-1로 패하고 스페인에게도 밀려 결선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FA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1950년 월드컵의 실패는 단 한번의 실수였고 아직 잉글랜드와 세계 축구간의 격차는 크다고 생각하며 세계 각국의 축구 발전에 무관심했다. 월터 윈터보텀이 잉글랜드 대표팀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그에겐 선수 선발의 권한이 없었던 것이 그 예시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 대표팀도 월드컵 이후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에 패할 때까지 3년여간 무패 행진을 달려 FA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반면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 인민공화국의 전폭적인 투자에 힘입어 축구 수준을 차근히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미 헝가리는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준우승팀이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당시의 선수들을 능가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이 헝가리 대표팀에 모였고 셰베시 구스타브는 그들을 한 팀으로 묶어냈다.[2] 그러면서 셰베시는 그들의 파괴력을 극대화시키는 변칙적인 전술도 만들어냈는데 바로 난도르 히데구티폴스 나인화였다. 헝가리는 1950년 5월 이후 패배를 당하지 않았으며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땄던 팀이었다.

잉글랜드는 헝가리를 웸블리 스타디움으로 불러냈다. 그래도 FA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헝가리가 3년 넘게 지지 않았던 것은 대륙의 허접한 축구팀들을 상대해왔기 때문이며 유니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놈들의 무패행진을 끊어줄 팀은 바로 잉글랜드라고 생각했다.

1953년 11월 25일, 웸블리 스타디움에 10만 5천명의 관중이 모였고 그렇게 세기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2.2. 포메이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선발 명단 3-2-2-3
감독: [[월터 윈터보텀|{{{#003366 월터 윈터보텀}}}]]
GK
1. 길 메릭
FB
2. 알프 램지 파일:PKGoal.jpg 60'
FB
5. 해리 존스턴
FB
3. 빌 에커슬리
HB
4. 빌리 라이트 파일:주장 아이콘.svg
HB
6. 지미 디킨슨
FW
8. 어니 테일러
FW
10. 재키 시웰 파일:득점 아이콘.svg 15'
FW
7. 스탠리 매튜스
FW
9. 스탄 모텐슨 파일:득점 아이콘.svg 38'
FW
11. 조지 롭
FW
11. 치보르 졸탄
FW
9. 히데그쿠티 난도르 파일:득점 아이콘.svg 1', 22', 56'
FW
7. 부더이 라슬로
FW
10. 푸슈카시 페렌츠 파일:주장 아이콘.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25', 29'
FW
8. 코치시 샨도르
HB
6. 저커리아스 요제프
HB
5. 보지크 요제프 파일:득점 아이콘.svg 52'
FB
3. 런토시 미하이
FB
4. 로란트 줄러
FB
2. 부잔스키 예뇌
GK
1. 그로시치 줄러 82'
12. 겔레르 샨도르 82'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헝가리 선발 명단 3-2-2-3
감독: [[셰베시 구스타브|{{{#ffffff 셰베시 구스타브}}}]]

2.3. 내용

2.3.1. 전반전

헝가리는 경기 시작 40여초 만에 득점에 성공했다. 요제프 보직의 패스를 받은 난도르 히데구티가 슈팅하는 척하며 해리 존스턴을 속여서 만든 공간으로 잉글랜드의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들어왔다. 나머지 잉글랜드 수비수들이 붙어주지 못하자 그대로 히데그쿠티가 슈팅할 수 있는 각이 열렸고 히데그쿠티는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선제골을 뽑아냈다.

시작하자마자 히데구티에게 한대 얻어맞고 난 후 잉글랜드 선수들은 개인기와 팀 플레이를 섞어가며 헝가리의 수비진을 공략해보려 했지만 의미있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전반 7분에 헝가리의 주장 페렌츠 푸스카스가 로란트의 스로인을 받아 왼발 슈팅을 날려봤지만 길 메릭 골키퍼에게 걸렸다. 히데그쿠티와 산도르 코츠시스, 부더이 라슬로도 슈팅을 쏴봤지만 메릭 골키퍼를 위협할 순 없었다. 계속 공은 헝가리 선수들이 가졌고 잉글랜드의 진영에서 돌았다. 잉글랜드 선수들의 킥은 계속 헝가리 선수들이 잘라냈다.

전반 10분, 히데그쿠티는 푸슈카시와 원투패스를 주고 받아서 메릭 골키퍼와 맞섰다. 히데그쿠티는 바로 강력한 슈팅을 날렸고 메릭은 몸조차 날릴 수 없었지만 오프사이드로 득점은 인정되지 않았다.

전반 15분, 잉글랜드의 만회골이 나왔다. 헝가리의 공격 실패로 공수간의 틈이 벌어진 사이에 잉글랜드는 빠른 역습을 가했고 재키 시웰의 왼발 슈팅이 골로 이어져 스코어는 1-1이 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잉글랜드 선수의 킥은 계속 부정확했고 조금 정확하게 가나 싶은 패스는 헝가리 선수들에게 계속 커트당했다.

전반 22분, 히데구티가 다시 나섰다. 메릭의 패스가 졸탄 치보르의 헤더로 끊겼고 치보르와 푸스카스는 공을 주고받으며 잉글랜드의 오른쪽 진영을 파고들어왔다. 푸슈카시는 존스턴의 태클에 걸렸지만 태클은 푸스카스와 공을 분리시키지 못했다. 푸슈카시는 히데그쿠티에게 패스했다. 히데그쿠티는 지미 디킨슨을 앞에 놓고 오른발로 강하게 공을 찼고 메릭은 공을 막지 못했다.

킥오프를 하자마자 잉글랜드는 헝가리에게 공을 빼앗겼고 잉글랜드의 왼쪽을 유린하던 부더이가 슛을 시도해봤지만 골문을 살짝 빗나갔다.

전반 25분, 푸스카스도 스코어 보드에 이름을 올렸다. 부더이의 패스를 받은 치보르는 부더이의 자리에서 푸슈카시를 발견했고 푸슈카시에게 패스를 했다. 푸슈카시는 공을 잡았고 뒤에는 빌리 라이트가 달려오고 있었다. 푸슈카시는 오른발 앞에 있던 공을 왼발로 끌어서[3] 라이트의 태클을 피했고 그의 앞에는 메릭 골키퍼만이 있었다. 푸슈카시는 그의 강력한 왼발로 메릭과 잉글랜드의 왼쪽 골문 사이를 그대로 뚫어버렸다.

4분 후, 푸슈카시의 추가골이 기록되었다. 보지크가 찬 프리킥이 푸슈카시쪽으로 향했고 푸슈카시는 왼발로 공을 잡으려했지만 공이 빠졌는데 그 공은 바로 잉글랜드의 골문 구석으로 들어갔다. 1-4로 점수는 더욱 벌어졌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잉글랜드는 1881년에 1-6, 1928년에 1-5로 홈에서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패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영연방팀에게 당한 일격이었고 그것도 후반에 무너져서 이런 스코어가 나왔었다. 이렇게 전반부터 잉글랜드가 홈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것도 그 상대가 유럽 대륙팀이었다는 것도 처음이었다. 잉글랜드 선수들, 축구 관계자와 팬들은 눈앞의 광경을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양팀은 계속 공격을 주고 받았다. 코츠시스의 헤더는 메릭 골키퍼의 정면, 롭의 헤더는 헝가리의 골문 구석을 향했지만 줄러 그로시치 골키퍼의 슈퍼 세이브로 코츠시스와 롭의 득점은 무산되었다.

전반 38분, 잉글랜드의 센터 포워드 스탄 모텐슨이 골을 넣었다. 모텐슨은 왼발로 그로시치의 왼쪽을 공략하는 데에 성공했다. 2-4가 되었다. 41분에 나온 어니 테일러의 유효 슈팅 역시 그로시치의 손에 걸렸고 43분에 나온 부더이의 일대일 찬스는 부더이가 놓치고 말았다.

전반 정규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엔 모텐슨이 페널티 구역 안에서 보지크에게 걸려 넘어졌지만 심판은 파울을 선언하지 않았다. 웸블리 스타디움엔 야유 소리가 가득 찼다. 전반은 얼마 후 종료되었다.

2.3.2. 후반전

후반 3분, 잉글랜드의 공격이 나왔다. 스탠리 매튜스의 코너킥 숏패스를 받은 빌리 라이트는 크로스를 올렸고 스탄 모텐슨은 위협적인 헤더로 줄러 그로시치 골키퍼의 기량을 시험했다. 그로시치의 선방으로 득점은 나오지 않았지만 모텐슨은 헤더때 헝가리 수비수와 충돌하면서 입은 충격으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로시치와 런토시 미하이는 축 늘어진 모텐슨을 피치 밖으로 내보냈다. 라이트도 크로스를 올리는 과정에서의 충돌로 불편함을 호소했다. 모텐슨은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자기 발로 걸어서 피치로 돌아왔지만 라이트는 계속 치료를 받으며 다친 오른 다리로 디뎌보다가 붕대를 감고 복귀했다.

후반 7분, 헝가리의 추가 득점이 나왔다. 요제프 보직였다. 산도르 코츠시스의 헤더가 잉글랜드의 골포스트를 맞고 튀어나오자 수비수가 걷어냈고 어니 테일러에게 공이 갔지만 테일러는 공을 뺐겼다. 공을 뺏은 저커리아스 요제프는 보지크에게 패스했고 보지크는 잉글랜드의 골문 오른쪽으로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날렸다.

후반 11분에 헝가리는 6번째 득점을 올렸다. 코치시의 헤더 패스를 받은 페렌츠 푸스카스는 트래핑 후 뒤에서 달려오던 난도르 히데구티를 발견하고 왼발로 높은 크로스를 올렸다. 히데그쿠티의 앞에 지미 디킨슨이 있었지만 푸슈카시의 크로스는 디킨슨이 건드릴 수 없을 만큼 깊이, 하지만 히데그쿠티가 받기 좋게 날아왔다. 히데구티는 발리 슈팅으로 헝가리의 6번째 골이자 해트 트릭을 완성했고 스코어는 2-6이 되었다.

헝가리는 이후에도 잉글랜드를 진지하게 상대했고 계속해서 찬스를 만들었지만 더 이상의 골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잉글랜드는 후반 14분, 그로시치의 파울로 페널티 킥을 얻어냈다. 그로시치는 모텐슨의 헤더 패스를 막으려 달려나왔다가 잉글랜드 공격수와 부딪혔고 주심은 페널티 킥을 선언했다. 키커로는 알프 램지가 나섰고 램지는 오른쪽으로 정확히 킥을 해 스코어를 3-6으로 좁혔다.

양팀은 이후에도 득점을 위해 노력했지만 더 이상은 득점이 나오지 않았다. 후반 37분, 그로시치가 부상으로 빠지고 서브 골키퍼 겔레르 샨도르가 투입되었다.

그리고 주심의 휘슬과 함께 잉글랜드는 그들의 성지이자 자존심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유럽 대륙팀에 의한 첫 패배를 대패로 맞이해야 했다.

2.4. 리뷰

당시 잉글랜드보다 헝가리에 더 좋은 기량으로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들도 많았지만 전술의 차이도 승패에 영향이 있었다. 헝가리가 변칙 포메이션으로 재미를 볼 때 잉글랜드는 W-M 포메이션을 그대로 들고 나왔고 이를 많이 상대해본 헝가리에게 잉글랜드 선수들의 움직임은 대부분 읽혔다.

3. 이후

일부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위대함을 인정했지만 이 시합에서 대패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FA, 잉글랜드의 축구팬 대부분의 반응은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아슬아슬하게 진 것도 아니고 시작하자마자 선제골을 허용하고 고작 27분 만에 1-4로 조기에 K.O 당하는 경기를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잉글랜드는 이 경기 결과에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라고 생각했다. 바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대승을 거둬 헝가리 선수, 축구팬들에게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6개월 후 잉글랜드는 칼을 갈고 부다페스트 원정을 떠났지만 경기 결과는 헝가리에 1-7로 완전히 씹어먹혀버렸다. 이 경기는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대표팀 역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가 기록된 경기로 남아있다.

4. 뒷이야기



[1] 월드컵의 창시자 쥘 리메가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입장에선 프랑스와의 뿌리깊은 악감정으로 인해 더욱 참가하기 싫었던 이유도 있었다.[2] 당시 헝가리 대표팀 선수들 중 상당수가 부다페스트 혼베드 FC 소속이어서 선수들의 호흡이 더 잘맞기도 했다.[3] 이것이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드래그백 개인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