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6 11:45:40

조지 레이너

조지 레이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2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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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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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 감독
파일:Cap 2019-04-28 12-59-34-246.pn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조지 레이너
George Raynor
본명 조지 시드니 레이너
George Sidney Raynor
출생 1907년 1월 13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사우스요크셔주 호일랜드
사망 1985년 11월 24일 (향년 78세)
국적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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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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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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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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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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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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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신체 170cm
직업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웜브웰 FC (1929~1930)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1930~1931)
맨스필드 타운 FC (1932~1933)
로더럼 유나이티드 FC (1933~1935)
베리 FC (1935~1938)
올더숏 FC (1938~1939)
감독 스웨덴 대표팀 (1946~1954)
GAIS (1947~1948)
AIK 포트볼 (1948~1952)
오트비다베리 FF (1952~1954)
유벤투스 FC (1954 / 테크니컬 디렉터)
SS 라치오 (1954~1955)
코번트리 시티 FC (1956)
스웨덴 대표팀 (1956~1958)
스케그너스 타운 AFC (1958~1960)
유르고덴스 IF (1960)
스웨덴 대표팀 (1961)
동커스터 로버스 FC (1967~1968)
국가대표 없음

1. 개요2. 생애
2.1. 선수 경력2.2. 감독 경력
3.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감독
5.1.1. 클럽5.1.2. 국가대표
6.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영국(잉글랜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1967년부터 1968년까지 동커스터 로버스 FC 감독을 맡았다.

2. 생애

2.1. 선수 경력

레이너가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1930년, 팀은 셰필드 유나이티드 FC였다. 그러나 레이너는 셰필드에서 출전 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고 1932년부터 1939년까지 4팀을 옮겨 다녔다.

전쟁이 터지자 잉글리시 풋볼 리그는 올스톱되었고 레이너도 자동으로 선수 생활을 잠시 그만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레이너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신체 훈련 교관으로 복무하면서 가끔 친선 경기에 참가했다.

2.2. 감독 경력

레이너는 스웨덴 대표팀의 기술위원 소속으로 감독직을 시작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을 시작으로 레이너는 스웨덴 대표팀에 영향력을 끼쳤다. 레이너는 선수들을 분석하면서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선수들 하나하나에 더 잘맞는 역할을 찾아냈고 양질의 선수들도 그것을 잘 받아들인 결과였다.

레이너는 1950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큰 변수와 맞닥뜨려야했다. 스웨덴 축구 협회은 선수 선발의 원칙으로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는데 군나르 그렌, 군나르 노르달, 닐스 리드홀름이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프로 선수가 되어 더 이상 스웨덴 대표팀에 부를 수 없었다. 레이너는 남아 있는 선수들을 추려 월드컵 3위의 성적을 냈지만 그 결과는 더 많은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었다. 레이너는 1952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지만 1954년 월드컵 진출엔 실패했다.

그래도 레이너가 이끄는 스웨덴 대표팀은 1953년 11월 15일, 부다페스트에서 매직 마자르를 상대로 2:2 무승부를 거두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비책을 10일 후인 25일에 경기를 가질 조국 대표팀에 전달했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월터 윈터보텀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 대가는 바로 웸블리 참사로 나왔다.[1]

1958년 월드컵을 앞두고 스웨덴 축구 협회는 드디어 아마추어리즘을 버렸고 결과적으로 스웨덴 대표팀은 노르달을 제외한 해외 리거들을 거의 다 데려올 수 있었다. 레이너는 1958년 월드컵 결승전에까지 진출했고 상대는 브라질이었다. 레이너는 경기에 앞서 우리가 선제골을 넣는다면 브라질 선수들은 당황할 것이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경기가 풀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레이너의 시나리오는 전반 4분에 리드홀름의 선제골로 맞아들어갔지만 브라질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바바펠레가 나서서 스웨덴의 골문을 열어젖혔고 결국 스웨덴은 2:5로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레이너는 스웨덴 대표팀 이외에도 여러 클럽팀도 맡았다.

3. 스타일 & 평가

레이너는 화를 잘 안내고 지치지 않는 스타일의 사람이라 보수적인 잉글랜드보다 외국에서의 감독 생활이 더 어울리는 타입이었다. 그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자 스웨덴은 빠르게 성적을 냈고 레이너는 1948 런던 올림픽/축구에서 금메달, 1958 월드컵 준우승으로 대표되는 커리어로 역대 스웨덴 대표팀 감독 중에서 가장 업적이 좋은 감독이 되었다.[2]

4. 뒷이야기

  • 레이너는 1953년 11월에 부다페스트에서 매직 마자르와 친선 경기를 가질 때 "우리가 이기면 그 놈 동상의 콧수염을 빨간색으로 칠해버리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5. 수상

5.1. 감독

5.1.1. 클럽

5.1.2. 국가대표

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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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94d3> 1조 파일:독일 국기.svg
제프
헤어베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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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콜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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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도허티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기예르모
스타빌레
2조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알베르
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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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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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
워커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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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렐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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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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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57–1990).svg
버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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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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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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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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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윈터보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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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치
페올라

역대 대회의 참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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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비책의 내용은 바로 폴스 나인 역할을 하던 히데그쿠티 난도르에 맨마킹을 붙여 히데그쿠티의 최대한 영향력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윈터보텀은 이를 무시했지만 이를 생각해내고 실천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제프 헤르베르거였다. 헤르베르거의 비책은 제대로 먹혀서 결국 195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서독은 역전 우승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2] 몇십 년이 흐른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스웨덴인 스벤예란 에릭손잉글랜드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