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0:14:23

히딩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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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전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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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이후
56대

김호
(김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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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대

아나톨리
비쇼베츠

(비쇼베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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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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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박종환
(박종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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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차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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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김평석
(차범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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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대

허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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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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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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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김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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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대

움베르투
코엘류

(코엘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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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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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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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프레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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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보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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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2001~2002
전체 (20012002)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폴란드전 · 미국전 · 포르투갈전 · 이탈리아전 · 스페인전 · 독일전 · 터키전)
친선 경기 (브라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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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대 감독
거스 히딩크
<colbgcolor=#6677aa,#556599><colcolor=white>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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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신 고트비 (기술분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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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 룰프스 (팀 매니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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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홍명보
계약 기간 2001년 1월 1일 ~ 2002년 6월 30일
(1년 6개월 / 546일)[1]
계약 종료 (계약 기간 만료)
연봉 18억 8500만 원 (감독 / 추정치) #
27억 원 ~ 31억 원 (코치 포함 / 추정치) #
전술 스타일 토탈 축구
┗ 전원 공격 + 전원 수비[2]
3-4-3 포메이션
성적 A매치 39전 14승 13무 12패 (승률 36%)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 (5위 / 조별리그)[3]
2002 CONCACAF 골드컵 (4위)[4]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4위)[5]
1. 개요2. 특징3. 감독 선임 과정4. 코칭스태프5.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관련
5.1. 최종 명단
5.1.1. 출전 여부
5.2. 조별리그 D조 본선
6. 활동7. 분석
7.1. 동기부여7.2. 한국 축구계의 전폭적 지원과 홈 이점 활용7.3. 최정예 멤버7.4. 탄탄한 조직력7.5. 거스 히딩크의 지도력
8. 평가9. 경기 결과10. 기타11. 관련 영상12.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62대 감독 거스 히딩크의 대표팀에 대해 다룬 문서.

2. 특징

명실상부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중 단연코 최강으로 꼽히는 팀이다. 2002월드컵에서 우승후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6]을 이기며 월드컵 4위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이 대회 이후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는 화려하게 부활하며 각 국의 대표팀과 유럽 유수의 팀들을 두루 맡았고,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인의 선수들은 지금까지도 축구계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다. 여러모로 대한민국 축구에 대단히 많은 긍정적 유산을 남긴 팀이다.

3. 감독 선임 과정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 진출한 차범근호거스 히딩크가 이끌던 네덜란드에게 0:5로 대패 탈락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축구 9위와 레바논 아시안컵 3위로 우승에 실패하여 허정무호도 이렇다 할 성적[7]을 내지 못하면서 국가대표팀에 대한 우려는 극에 달했다. 2000년에 열린 아시안 청소년 대회 U-16/U-19 대회 모두 우승에 실패하고, 일본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축구 8강(5위)과 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이대로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2라운드 진출 실패 개최국이 되겠다며 비난 여론이 벌떼처럼 들끓었다. 만약 대한민국이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일본이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한다면, 이는 국민 정서상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J리그의 흥행에 이어, 프랑스 출신 명장 필립 트루시에를 영입해 1999년 U-20 월드컵 준우승, 2000 시드니 올림픽 8강 5위,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우승,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 준우승 등 많은 성과를 냈다. 세리에 A에서 활약을 펼치던 미드필더 나카타 히데토시와 당시 아시아 최초의 프리미어 리거 이나모토 준이치[8]가 활약한 것도 이때다.

당시 기술위원장으로 일한 이용수의 회상에 의하면,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시작한 하루 일과가 대국민 사과문을 작성하고 다시 수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정몽준은 이용수에게 대표팀이 16강에 못 든다면, 우리 둘 중 하나는 한강에서 뛰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자조 섞인 농담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농담이기야 하지만 이 말한 사람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에 당시 현직 국회의원에 대권 주자로 거론되던 거물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일반인 입장에서는 어떤 부담일지 생각해보자.

그들은 월드컵 국대의 운명을 '외국인 감독 영입'이라는 승부수에 걸었다. 기술위원회는 누구를 감독으로 영입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을 했고, 여지껏 주로 기용해온 값싼 동유럽 감독들은[9] 제외하고, 어차피 돈을 써서 지를거면 화끈하게 지르자는 생각으로 세계 초일류급 감독을 영입할 계획을 세운다. 새 감독을 선임하기 위한 감독 후보 1순위는 프랑스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안겨준 에메 자케. 당시 자케는 프랑스 축구 연맹에서 기술고문으로 유유자적했기 때문에 연봉 협상만 잘 되면 영입이 어렵지 않을거라는 예상이었다. 그 다음 2순위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5:0으로 박살내고 네덜란드를 4위로 이끈 거스 히딩크였다. 3순위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나이지리아에 금메달을 안긴 조 본프레레, 4순위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의 3위 돌풍을 이끈 미로슬라프 블라제비치였다고.

당시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장 가삼현은 1순위 자케와 2순위 거스 히딩크를 순차적으로 만나 한국 대표팀 감독직에 대한 의향을 타진했는데, 자케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 커리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왔고, 실제로 2000년 11월 21일 프랑스 축구 연맹에서 가삼현과 만나 최종적으로 한국 대표팀 감독직을 거절했다. 반면 거스 히딩크는 선뜻 수락만 안했을뿐 자케와는 달리 거절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 본프레레와 블라제비치를 더 이상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거스 히딩크와 계약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사실 2000년 말 시점의 거스 히딩크 또한 감독 커리어에 있어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는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위에 올려놓은 후 레알 마드리드 CF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에서 연이어 경질당해 야인으로 있던 상황이었다.[10] 그래서 월드컵 개최국인 대한민국의 감독직에 도전하는 것을 두고 갈등하다 2000년 12월 7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겠다고 통보한 뒤 2000년 12월 18일 대한축구협회를 찾아 정식 계약을 한 후 마침내 2001년 1월 1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당시 가삼현의 회고에 따르면, 거스 히딩크는 협상 도중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이에 가삼현이 대한민국 선수들은 그렇게 할거라고 답하자 만족스러워 했다고. 또한 거스 히딩크의 자서전에 따르면 처음에 네덜란드에서 가삼현을 만났을 때 감독직 수락이 내키지 않는 대신, 가볍게 조언해 줄 겸 대한민국은 장기 합숙을 통해 조직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11] 다시 만난 가삼현이 언제든 원할 때 장기 합숙에 돌입할 수 있도록 K리그 구단들과 합의했다는 답변을 했고, 결국 감독직 수락 여부를 확실하게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고.[12]

사실 거스 히딩크는 전력이 약한 대한민국이 무엇보다 조직력을 끌어올리는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만날 유럽/남미 강팀을 상대할 유일한 해법이라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는 장기 합숙 훈련이 급선무라는 취지로 조언한 것이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대한축구협회가 자신의 조언을 바로 실행에 옮기자 본인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아보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된 뒤 유럽/남미의 여러 강팀들과 친선 경기를 해야 한다는 요구를 했는데 이것 역시 대한축구협회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결국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2000년 당시의 거스 히딩크는 스페인에서의 연이은 실패로 서서히 퇴물 취급을 받았기에 에메 자케처럼 쉽게 거절할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도박수라도 던져봐야 하는 입장이었고, 반대로 대한축구협회 입장에서는 아무리 거스 히딩크의 최근 커리어가 안 좋다 해도 전체적인 커리어와 한국의 역대 월드컵 성적을 감안하면 반드시 영입해야 할 인물이었기에, 결국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히딩크의 한국 감독 취임이 성사되었다. 실제로 거스 히딩크가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고향 마을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 6.25 전쟁 참전 용사가 있어[13] 그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대한민국 감독을 한 번 맡아보라는 권유를 했다고 한다.

4. 코칭스태프

<rowcolor=#ffffff> 직책 이름 국적 생년월일
<colbgcolor=#6677aa,#556599><colcolor=#ffffff> 감독 거스 히딩크
Guus HIDDINK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1946년 11월 8일 (55세)
수석코치 박항서[14][15]
PARK Hang-Seo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1957년 10월 1일 (44세)
코치 핌 베어벡
Pim VERBEEK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1956년 3월 12일 (46세)
코치 정해성
CHUNG Hae-Soung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1958년 3월 4일 (44세)
GK코치 김현태
KIM Hyun-Tae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1961년 5월 1일 (41세)
피지컬코치 레이몬드 베르하이옌
Raymond VERHEIJEN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1971년 11월 23일 (30세)
트레이너 최진한
CHOI Jin-Han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1961년 6월 22일 (41세)
기술분석관 압신 고트비
Afshin GHOTBI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1964년 2월 8일 (38세)
팀 매니저 얀 룰프스
Jan ROELFS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1963년 2월 15일 (39세)
계약 기간 만료 당시 (2002년 6월 30일) 기준

5.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관련

5.1. 최종 명단

<rowcolor=white> No. 포지션 한글 표기 로마자 표기 생년월일 당시 소속 클럽 출전
경기수
출전
시간
비고
1 GK 이운재 Woon Jae LEE 1973-04-26 수원 삼성 블루윙즈 7 687분[16]
12 김병지 Byung Ji KIM 1970-04-08 포항 스틸러스 0 0분
23 최은성 Eun Sung CHOI 1971-04-05 대전 시티즌 0 0분
2 DF 현영민 Young Min HYUN 1979-12-25 울산 현대 호랑이 0 0분 [미필]
4 최진철 Jin Cheul CHOI 1971-03-26 전북 현대 모터스 6 562분
7 김태영 Tae Young KIM 1970-11-08 전남 드래곤즈 7 556분
15 이민성 Min Sung LEE 1973-06-23 부산 아이콘스 2 125분
20 홍명보 파일:주장 아이콘.svg Myung Bo HONG 1969-02-12 포항 스틸러스 7 596분 주장
3 MF 최성용 Sung Yong Choi 1975-12-25 수원 삼성 블루윙즈 0 0분
5 김남일 Nam Il KIM 1977-03-14 전남 드래곤즈 5 368분 [미필]
6 유상철 Sang Chul YOO 1971-10-18 가시와 레이솔 (일본) 7 574분 부주장
10 이영표 Young Pyo LEE 1977-04-23 안양 LG 치타스 5 507분 [미필]
13 이을용 Eul Yong LEE 1975-09-08 부천 SK 4 333분
17 윤정환 Jong Hwan YOON 1973-02-16 세레소 오사카 (일본) 0 0분
19 안정환 Jung Hwan AHN 1976-01-27 AC 페루자 (이탈리아) 7 529분 [미필]
21 박지성 Ji Sung PARK 1981-02-25 교토 퍼플상가 (일본) 7 634분 [미필]
22 송종국 Chong Gug SONG 1979-02-20 부산 아이콘스 7 687분[22] [미필]
8 FW 최태욱 Tae Uk CHOI 1981-03-13 안양 LG 치타스 1 12분 [미필]
9 설기현 Ki Hyeon SEOL 1979-01-08 RSC 안데를레흐트 (벨기에) 7 594분 [미필]
11 최용수 Yong Soo CHOI 1973-09-10 제프 이치하라 (일본) 1 22분
14 이천수 Chun Soo LEE 1981-07-09 울산 현대 호랑이[26] 7 365분 [미필]
16 차두리 Du Ri CHA 1980-07-25 고려대학교 4 153분 [미필]
18 황선홍 Sun Hong HWANG 1968-07-14 가시와 레이솔 (일본) 5 243분
  • 월드컵 당시 박지성, 설기현, 차두리는 K리그 출장 경력이 없었다.[29]
  • 당시 소속팀 기준으로 K리거 15명, J리거 5명, 유럽파 2명, 대학생 1명이다.
  • 포르투갈전 승리 후, 월드컵 첫 2라운드 16강 진출에 성공한 뒤, 당시 경기장을 방문한 대통령 김대중에게, 주장 홍명보가 직접 미필 선수에 대한 병역 면제를 건의하여 10명의 미필 선수가 수혜를 받게 되었다.
  • 현영민K리그 1 2017 시즌을 마치고 은퇴함에 따라 23인 엔트리 선수 모두 현역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기준으로 지도자 16명[30][31], 행정가 3명[32], 방송인 3명[33]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5월 21일에 발표된 23인의 월드컵 출전 최종 엔트리. 이동국, 김도훈, 고종수, 심재원, 김용대 등이 탈락했다. 히딩크는 자서전 '마이 웨이'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이동국은 당시 경쟁 공격수가 워낙 많아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것이고[34], 김도훈은 수비 능력이 너무 떨어졌고, 고종수는 히딩크호 초기 황태자로 불리며 붙박이 주전이었으나 부상으로 시즌 아웃됐다. 심재원 또한 베테랑 수비수 홍명보, 김태영, 최진철보다 피지컬로나 정신적으로나 능력이 부족했으며(심재원 항목에 가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기술이 되어있으니 참고), 김용대는 체중 관리를 못 할 정도로 자기 관리를 소홀히 했던 것 때문이다. 특히 김용대는 식사 때마다 많이 먹는 것은 물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챙겨먹는 것을 보고는 완전히 학을 뗄 정도로 히딩크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선배 심부름 때문에 사온 것이라는 후문이 있긴 하다)

이영표는 훈련 중 차두리와 부딪혀 부상을 입어 히딩크는 이영표를 엔트리에서 뺄까 고민했지만 회복을 믿었고, 이영표는 본선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 전부터 활약을 하게 된다. 이영표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이을용이 그자리를 대체했고, 그는 맹활약을 펼치며 이영표와 함께 동반 기용되었다. 이영표가 부상을 입은 직후에 팀닥터는 근육 파열로 보고 월드컵 출전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히딩크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심한 부상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핌 베어벡의 소개를 통해 네덜란드의 물리치료사 존 랑엔도엔을 따로 불러 재검사를 했고[35], 근육 파열이 아니라 타박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엔트리를 보면 알겠지만, 스쿼드는 포백을 기반으로 짜여진 것 같다. 이을용, 유상철 등 수비수가 가능한 멀티 플레이어가 포함은 되었으나 대회 내내 이루어진 쓰리백을 토너먼트 대회 동안 별탈 없이 제대로 돌리려면 센터백이 가능한 선수가 최소 5명 이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스쿼드 상 전문 센터백 자원은 홍명보, 최진철 등 4명이다. 반대로 공격 자원은 멀티 자원 포함하여 최대 8명이 있다.[36] 실제로 본선 무대 전까지 히딩크는 당시까지만 해도 어색하던 포백을 수차례 시도해 패배하고 언론에 비판을 받았음에도 도전을 계속 하였다. 이후 한국 축구의 이상은 포백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37] 결과론적으로 본선에서는 현실적인 쓰리백을 선택하여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이런 스쿼드 구성을 극복한 조직력과 정신력 그리고 전술적 이해력이 빛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K리그 팀이 10개팀이었는데 성남 일화를 제외한 팀에서 최소 1명씩 배출했는데 이로 인해 성남 차경복 감독과 히딩크 감독간 좋지 않았던 관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38]

5.1.1. 출전 여부

◎ : 선발 출전, △ : 교체 출전
<rowcolor=white> No. 포지션 이름 폴란드전 미국전 포르투갈전 이탈리아전 스페인전 독일전 터키전
1 GK 이운재
12 김병지
23 최은성
2 DF 현영민
4 최진철 [39]
7 김태영 [40] [41] [42]
15 이민성 [43]
20 홍명보 파일:주장 아이콘.svg [44] [45] [46]
3 MF 최성용
5 김남일 [47] [48]
6 유상철 [49] [50] [51]
10 이영표
13 이을용 [52] [53]
17 윤정환
19 안정환 [54] [55] [56] [57]
21 박지성 [58]
22 송종국
8 FW 최태욱 [59]
9 설기현 [60] [61] [62]
11 최용수 [63]
14 이천수 [64] [65] [66] [67] [68]
16 차두리 [69] [70] [71]
18 황선홍 [72] [73] [74] [75] [76]

5.2. 조별리그 D조 본선[32강]

2001년 12월 부산광역시 BEXCO에서 치러진 본선 조 추첨에서 한국은 32강 D조 톱시드에 배치되었는데,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이라는 모두 역대 월드컵 3위 팀들과 같은 조가 되어 험난한 조별리그 대진을 받아들었다.
  • 포르투갈: 1966 월드컵 당시 펠레의 브라질을 3:1로 격파하며 66월드컵 3위를 기록한 팀이며, 스페인의 전통 이웃 라이벌, 실질적인 톱시드 팀으로, 유로 2000[78]에서 유로 디펜딩챔피언 독일을 3:0, 잉글랜드를 3:2로 격파하며 유로 4강(4위)을 이끈 루이스 피구 등의 황금 세대가 포진한 FIFA 랭킹 5위의 우승 후보로 훗날 유로2016 우승을 달성한다. 유럽 예선에서는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본선에 올라왔는데, 네덜란드는 바로 4년 전 월드컵에서 한국을 5:0으로 털어버린 팀이다. 당시에는 FIFA 랭킹과 최근 월드컵 실적까지 시드 배정에 반영한으로 1998 월드컵 32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했던 포르투갈이 시드를 받지 못했는데, 하필 한국과 같은 조에 편성되면서 개최국 톱시드 메리트가 거의 상쇄되고 말았다.
  • 미국: 1930 월드컵 3위[79]팀이자 그나마 해볼 만하다고 평가됐지만, 본선 90월드컵부터 연속 진출팀이었으며, 1999년 2월 A매치에서는 미국이 유로 1996 우승팀 독일을 3:0으로 완파하고, 7월의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독일을 2:0으로 완파하며 대회 3위를 기록해 2경기 연속으로 독일을 완파하였고, 2002골드컵 우승과 북중미 예선을 통과한 FIFA 랭킹 13위의 북중미 강호이다. 이 월드컵 16강전에서 라이벌 멕시코를 탈락시키고 8강(8위)을 기록했으며 게다가 앞서 골드컵에서 깨진 적이 있었다.[80] 프리미어 리그 정규리그 최다 연속 출전 기록을 세운 레전드 골키퍼 브래드 프리델이 있었다.
  • 폴란드: 1974 월드컵, 1982 월드컵 3위팀이자 당시 한 끗발 날리던 리버풀 FC의 주전 골키퍼 예지 두덱과 공격수 엠마누엘 올리사데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동유럽의 다크호스다. 안드리 셰브첸코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의 우크라이나가 있었고, 4년 전 월드컵에서 브라질에게 1승을 거두고 16강에 올라간 올레 군나르 솔샤르의 노르웨이가 있어, 유럽 예선의 폴란드가 속한 조에서 폴란드가 본선에 오를 것이라 생각한 이는 드물었다. 그런데 폴란드가 16년 만에 덜컥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도 모자라 유럽 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해버렸으니 한국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상대로 인식되었다. 특히 이 월드컵 8강(8위) 미국을 3:1로 격파하였다.[81]

개최국 톱 시드 혜택을 사실상 하나도 받지 못한 조편성이다. 비교하자면 1998년 네덜란드, 벨기에, 멕시코 조편성 보다만 조금 나은 정도의 고난이도 조편성을 톱 시드임에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역대 개최국들은 최소 2라운드 진출한 것이 사실이라 2라운드(16강) 진출 실패에 대한 불안감은 상당했다.[82]

사실 월드컵 본선은 거의 모든 진출팀이 한국보다 강하기는 하지만[83] D조 대진은 특히 험난했다.[84][85] 공동 개최국 일본의 H조 대진(벨기에, 러시아, 튀니지)[86]과 비교하면 대한민국이 사실상 개최국 이점을 못 받아 불운한 것은 사실이다. 조 편성때만 해도 대한민국이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1라운드 통과에 실패하는 개최국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강한 불안감이 국민들 사이에서 돌았다.

6. 활동

6.1. 2001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딩크호/2001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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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02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딩크호/2002년/1~5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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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100%><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6002d>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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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호 그리스 · 아르헨티나 · 나이지리아 · 우루과이[15위]
홍명보호 러시아 · 알제리 · 벨기에[27위]
신태용호 스웨덴 · 멕시코 · 독일[19위]
벤투호 우루과이 · 가나 · 포르투갈 · 브라질[16위]
[4][5]
{{{-2 {{{#!folding
[1] 1954년 스위스 월드컵 ~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였다. (16강 조별리그)[2] 1982년 스페인 월드컵 ~ 1994년 미국 월드컵은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였다. (24강 조별리그)[3] 1998년 프랑스 월드컵 ~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은 32개국 본선 진출 대회였다. (32강 조별리그)[4] 2026 FIFA 월드컵 대회부터 48개국 본선으로 확대되었다. (48강 조별리그)[5] 홍명보 감독이 2026년까지 사퇴 혹은 경질을 당하지 않는 이상 홍명보호가 될 예정이다.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히딩크호
32강 조별리그 D조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전
32강 조별리그 D조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전
32강 조별리그 D조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전
16강 토너먼트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전
8강 준준결승전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전
4강 준결승전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전
3위 결정전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터키)전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파일:나이키 로고 화이트.svg


7. 분석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진출 역사는 꽤 오래되었고 그에 따른 경험도 많으며 자국에서 개최하는 월드컵이라는 이점도 있었다. 그렇지만 번번히 1승 조차 못 거두고 지난 대회에서는 5:0 안드로메다 관광까지 당해가며 탈락하는 굴욕을 겪던 승점자판기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팀이 우승후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격파하며 세계 4위에 오른 것은 당시 경기를 직관한 관중들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적에 가까운 성과다.

당시 대한민국이 현재와 비교하면 유럽파가 거의 없던 시절의 전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결과는 계속 말하듯 기적에 가까운 성과다. 대다수의 해외 언론 및 전문가들은 축구계에서 비주류인 아시아 국가의 전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이는 국내 여론도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얻어낸 결과였으니 더더욱 값진 성과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분명 기대 이상의 성과이기는 했으나 충분히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7.1. 동기부여

히딩크호에 승선한 대표팀 선수들의 동기 부여는 대부분 뛰어난 수준으로 각자 나름대로의 절실한 이유와 성공에 대한 열망이 높았기 때문에 그것이 히딩크호의 성공의 발판이 되어 주었다.

가장 먼저 대표팀의 맏형 황선홍이 컨페드컵에서 프랑스에게 5:0으로 처참하게 지고 난 뒤 히딩크 앞에서 펑펑 울며 서러워한 일화는 유명하다. 황선홍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그는 한때 월드컵 본선에서 잇달아 찬스를 날려먹은 전적이 있고,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해 엔트리에서 탈락(정확히는 명단에는 있었지만 이미 엔트리 제출이 끝났기 때문에 교체 불가능)하는 흑역사가 있었다.[87]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입은 황선홍은 2002 월드컵을 앞두고 국내 스포츠 전문 웹진 후추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전 다시 한국에 가야 합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기에 그 인식을 모두 바꾸고 은퇴하려고요."라며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토로할 만큼 월드컵에서의 골과 승리에 목마른 처지였다.[88] 그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참여했기에 2002년 한일 월드컵 첫 경기에서 역사적인 첫 골을 넣고 승리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주장 홍명보 역시 장기적인 부상을 입어 폼이 저하되었을 뿐 아니라 수비를 3백에서 4백으로 바꿀 의도가 있던 히딩크의 희망사항으로 인해 엔트리에서 탈락할 위기에 몰렸고 여론 역시 홍명보가 이제는 대표팀의 짐이 될 것이며, 차세대 중앙 수비수로는 송종국이 어울린다는 이야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한 여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홍명보는 절치부심하여 대표팀에 승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1994년 월드컵에서 는 두 골을 넣는 활약을 보이며 선전했으나, 1998년 월드컵에서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2002년 월드컵에서는 자신의 진가를 다시 한번 드러내고 승리를 얻고 싶어했기에 홍명보는 부상 회복과 재활에 집중했으며 대표팀에 복귀한 이후에도 히딩크의 요구사항을 소화하며 대표팀을 4강으로 이끌며 결국 2002년 월드컵에서 브론즈볼을 수상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운재도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교체 멤버로 참가하여 분전했지만 팀이 탈락하는 경험을 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결핵으로 쓰러져 낙마했다. 이 당시에 받은 좌절감은 큰 한이 되었고 더불어 선배 골키퍼 김병지와의 경쟁 속에서 지지 않겠다는 일념이 생겨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렇게 이운재는 히딩크의 신뢰와 김병지의 실책이 겹친 행운에 따른 기회를 잡아 최고의 골키퍼로 거듭나며 대표팀의 골문을 지키는 든든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안정환, 박지성, 이영표, 이천수 등 많은 히딩크호의 멤버들이 이번에야말로 월드컵에서 실패할 수 없다는 분발의 마음을 가진 것은 물론 자국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는 열망이 가득했기 때문에 대표팀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하여 훈련 중 부상을 입더라도 선후배 순서로 치료받기보다 후보 멤버인 선배가 주전 멤버인 후배들에게 치료 순서를 자진해서 양보할 정도로 대표팀의 성공에 대한 동기부여가 확실했다.

다만 최태욱처럼 자주 선발되지 못한 선수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멤버들은 열정과 의욕이 가득했고 그들만의 절실한 이유로 동기 부여가 높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감독인 히딩크의 경우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와 레알 베티스에서 실패한 이후 바닥을 치고 올라가겠다는 의욕이 있었으며 본인이 과거 교사 생활을 통해 심리전에 능숙하다는 점도 선수들의 사기 진작과 동기 부여에 도움을 주었다. 미국전에서 미스를 남발한 설기현이 이탈리아전에서 동점골을 터트린 점, 미국전에서 PK를 실축한 이을용이 바로 그 경기에 동점 어시스트를 만들어 낸 점, 이탈리아전에서 역시 PK를 실축한 안정환이 연장 골든골을 터뜨린 점 등 선수들이 경기 중에 이를 만회하는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히딩크의 이러한 전략 때문이었다.

7.2. 한국 축구계의 전폭적 지원과 홈 이점 활용

앞서 언급했듯이, 대한축구협회는 월드컵 첫승과 첫 2라운드 16강을 위해 영혼이라도 팔 기세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대한민국이 역대 홈 팀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준비한 팀이 되었고, 유례없을 정도로 엄청난 지원과 장기 합숙 훈련을 했다. 히딩크 부임 기간에만 2001년 1월 홍콩오만, 2월에는 UAE, 4월에는 이집트, 8월에는 네덜란드, 2002년 1월에는 미국, 2월에는 우루과이, 3월에는 스페인에서 장기 전지훈련을 가졌고, 자신이 원하는 코칭 스태프를 마음껏 꾸릴 수 있도록 하는 등 많은 지원을 받았다. 더불어 이런 수많은 전지훈련을 위한 시도 때도 없는 차출 요구에 K리그 팀들도 군소리 하나 없이 순순히 응해줬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른 국가대표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조직력을 갖추게 되어 전력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히딩크 이전이나 이후의 대한민국 감독 뿐 아니라 다른 나라 대표팀의 감독들을 봐도 이 정도의 지원을 받은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만큼 2002 월드컵이 전국민적인 관심과 지원을 받은 대회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클럽 감독은 1년은 거쳐야 팀 컬러가 정립되고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하며, 특히 국가대표팀 감독은 클럽팀처럼 매일을 함께하지는 않기 때문에 감독의 전술철학과 그에 맞는 선수구성을 짜려면 1년 반~2년 이상 꾸준히 수행해야 팀이 정비된다. 게다가 당시 한국은 히딩크의 언급대로 시스템의 전문성도 떨어졌기 때문에 최소 3년은 걸려야 성과를 드러낼 만 했었다. 그러나 히딩크가 약 1년 반 만에 팀을 완성시키는 데 성공한 건 K리그의 과감한 희생 덕이 컸다. 상기했듯 선수들이 A매치 기간에만 차출되어 국가대표에 소집되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의 완성이 느린 것인데, K리그의 과감한 희생 덕분에 평소 같았으면 대표팀이 리그를 뛸 시간에 장기 합숙 훈련을 하면서 이른 시간에 조직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히딩크호를 예시로 들며 감독이 바뀌면 짧은 시간에 강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며, 당시 알렉스 퍼거슨이 히딩크호의 활약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K리그의 희생을 잊어선 안된다"고 괜히 말한게 아니다. 실제 히딩크도 이때를 회상하면서 "월드컵에 클럽 팀이 끼어든 격", "국가대표라고 말할 수 없는 기묘한 팀"이라 평가했다.

이때문에 일각에서는 히딩크호의 4강 신화는 합숙빨이라고 폄하하기도 하는데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개최국 카타르 역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장기 합숙을 하였지만 본선에서 무승부 승점 1점도 얻지 못하고 3전 3패 전체 32등으로 탈락했다. 이 직전 중국 또한 최초 월드컵 진출을 위해 슈퍼리그까지 중단하며 합숙하였지만 최종예선에서 단 1승만 거두고 탈락했다.# 히딩크호의 장기 합숙이 탄탄한 조직력에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방증한 것이다.

또한 히딩크호부터 대한민국 대표팀은 체계적인 관리와 선수 관리, 상대팀 분석이 이루어졌다. 체력 관리 트레이너나[89] 비디오 분석관[90] 등의 보직이 생겨 감독을 보좌하고 선수들에게 폭넓은 정보를 줬다. 이전에는 이런 직책이 없었기 때문에 훈련도 주먹구구식으로 해왔고, 선수 관리나 상대 팀 분석 같은 건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91] 히딩크가 부임해 첫 훈련을 했을 때도 이런 문제로 어이없어했을 정도였다.[92]

여기에 의무팀도 전속 계약을 맺고 선수들을 면밀히 관리했다. 이영표가 대회를 앞두고 부상 당했을 땐 히딩크는 이들마저 못 미덥게 여겨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네덜란드 의료진에 따로 문의했을 정도. 이후 대표팀의 팀 닥터가 흉부외과 전문[93]이라든지, 제대로 계약도 안 한 봉사 수준이던 점을 생각하면 현재보다 훨씬 관리가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94]

그리고 당시 경기들을 보았을 때, 현재의 국가대표보다 훨씬 빠른 선수들의 움직임이 돋보이는데 이는 홈팀의 이점이기도 했다. 히딩크가 경기 전 경기장의 잔디를 짧게 손질하고 스프링클러를 가동해 달라는 주문을 넣었기 때문. 축구화의 스터드에 잔디가 길수록 빠른 볼 컨트롤과 스피드에 방해가 되는 요인이라는 것이 그 이유. 이 사실은 2003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밝혔다.[95]

7.3. 최정예 멤버

히딩크호는 전무후무할 지원을 등에 업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팀을 새로 만들다시피했다. 히딩크호는 FC 코리아라는 이름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선수들을 성장시키고 가능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바쁜 일정들을 소화했다. 선수들의 훈련 프로그램을 지시하는 한편,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을 가지고 선수의 포지션 자체를 변경하는 실험을 자주 했다. 예를 들어 송종국은 우리가 익히 아는 오른쪽 윙백/미드필더는 물론, 센터백을 겸할 수 있었으며 골드컵때에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실험했다. 이영표는 2002년 3월 이전까지는 꾸준하게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되다 김남일이 해당 위치에 자리잡은 이후에야 본래 포지션인 왼쪽 미드필더로 돌아갔으며, 박지성 역시 월드컵 직전에야 우리가 흔히 아는 윙어로 자리잡았을 뿐, 그 전까지 히딩크호 내에서 주로 중앙 미드필더를 소화했다. 이처럼 히딩크호의 장점으로 꼽히는 멀티플레이어 송종국, 이영표, 박지성, 유상철과 같은 선수들의 대거 등장은 재능있는 선수들을 다양한 포지션에 넣어져 실험한 결과의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96]

특히 윙어로 뽑아놓은 선수 중에 설기현은 그 활약이 엄청났는데, 16강까지만 갈 수 있었던 히딩크호에게 8강으로 가는 관문을 뚫어놓는 선물을 줬다.[97] 히딩크호 최대의 신의 한 수 중 하나가 바로 설기현 그 자체였다.

센터백으로 엔트리된 홍명보김태영, 이민성은 1998 월드컵 당시에도 국가대표 선수들이었으며, 1998년 월드컵 네덜란드전과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에서 0-5 패배를 당할 때 당시에도 국가대표 선수들이다. 하지만 히딩크호의 손을 거치자 이들은 결국 월드컵 4위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낸 선수들이 되었다.

그 결과 히딩크호의 멤버들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정예 멤버로 완성되었으며, 히딩크의 지도 하에 의해 완성된 한국식 토탈 사커를 제대로 수행해낼 수 있는 균형 잡힌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골키퍼 이운재[98], 공격수 황선홍, 수비수 홍명보, 미드필더에 유상철 등 한국 축구사상 최고의 핵심 멤버들이 포진했으며 각자의 개성이 다양해 균형이 잘 잡혔다.[99] 게다가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수많은 선수들을 단기간에 빡세게 실험해 본 후 추리는 유리함까지 있었다.

잘 추려냈기 때문에 굳이 선수를 하나하나 나열할 것까지도 없이 이 당시 출전한 멤버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폼도 상당히 좋았으며, 비교적 균형도 잘 맞는 편이었다. 다만 멀티플레이어들을 제외하면 엔트리에 주전을 제외한 전문 중앙 수비수 자원이 이민성 1명 뿐이라 주전이자 베테랑인 30대 스리백 3명을 4강까지 내내 돌린 것은 아쉬우며, 현영민, 최성용 등 윙백 교체 자원의 무게감이 부족해 멀티플레이어 이을용만 활용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아무래도 윙백이나 수비수 교체 자원이 김남일이나 유상철에 준하는 수비력으로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소화할 수 있는 강력한 수비력을 지닌 자원이었거나 차두리가 일찌감치 공격수와 윙백을 소화 가능했으면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스쿼드에 선발되었으나 출전 횟수가 적거나 없던 2군 멤버 최용수, 최태욱, 차두리, 윤정환, 최성용, 이민성, 김병지, 최은성 그리고 2002 월드컵 스쿼드에 선발되지 못한 이동국, 김도훈, 서정원 등의 능력을 2010년대 국가대표들과 비교해 보면 2002년 멤버들의 무게감이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100] 이동국은 2015년 아시안컵 주전 멤버로 예상되다 부상으로 탈락했으나 2017년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경기를 뛰었으며, 차두리는 2015년 아시안컵에서 훌륭한 활약을 하고 국가대표 경력을 마무리했다.

훗날 최진철은 월드컵 데뷔전을 떠올리며 "너무 떨려 도망가고 싶었다. 폴란드전에 애국가를 부르는데 복도 입구만이 보였다. 당장 거기로 뛰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했다. 그만큼 압박감이 심했다는 뜻이다. 해당 기사

이후 히딩크가 중국 U-23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행했을 때 "중국이 월드컵 진출하려면 개최 말고는 답이 없다"고 할 만큼 선수들의 질이 매우 안 좋았고, 히딩크 본인이 20세 이하에서까지 선수들을 찾으려 할 정도였다. 한국 대표팀을 맡을 땐 조직력을 끌어올리면 강호들과 겨룰 수준은 될 거라고 평가한 것과는 대조적인데, 2002년 시절 기량과 잠재력이 높은 한국 선수들이 제법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101] 즉 히딩크의 지도력도 좋았지만 기본적인 선수풀 또한 좋았다.

7.4. 탄탄한 조직력

축구는 조직력이 생명이다. 애초에 팀을 구성할 때 선수들끼리 손발을 무지하게 많이 맞춰봤다. 그 결과 손발이 잘맞는 조합인 안정환-설기현의 공격진과 송종국-박지성-김남일-이영표-이운재의 수비진을 구축했으며 그 연결고리로 유상철을 택했다. 게다가 그들을 아우를 노장으로 홍명보-황선홍 콤비를 택했다. 차두리의 경우 좀 우려가 있었다. 바로 아버지가 분데스리가의 전설 차범근이기 때문에 혹시나 약관을 갓 넘긴 젊은 선수가 스타 의식에 젖을까봐 걱정도 했다. 허나 차두리는 아버지와 자기는 별개의 선수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차두리는 차범근의 후광을 이기려고 전심전력을 다했다.[102]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엄청나게 강한 그 원동력이 바로 조직력이며 히딩크 역시 조직력을 극대화해 대한민국 국민들과 대표팀의 목표인 16강을 훨씬 뛰어넘는 4위라는 성적을 달성시킨 것이다. 21년 뒤 김은중호도 조직력 원툴로 2연속 4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뤄낸다.

7.5. 거스 히딩크의 지도력

상기 서술한 선수들의 사기 충천 + 전폭적인 지원 요소를 등에 업은 히딩크로선 성과를 못 낼 수가 없을 노릇. 그나마 방해되는 요소는 오직 여론 뿐이었고 당시 히딩크는 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편한 마음으로 준비 과정에서 쏟아지는 비판은 수용하되, 월드컵 본선 대회에만 철저히 올인하여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103] 선수들을 선발했으며 전략, 전술을 짜고 고도의 체력 훈련을 감행하였다. 이 결과 대한민국 선수들의 전력은 웬만한 유럽, 남미팀 급으로 수직상승하였으며 이에 맞선 유럽의 강팀들을 집으로 되돌려보낼 수 있었다. 특히 체력적인 면에서의 비약적인 발전은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상대로 대등한 접전을 벌이고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을 차례로 상대하면서도 체력 방전 없이 꾸준히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된 셈. 체력과 몸싸움의 발전은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발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로 뽑히곤 한다.

그리고 히딩크는 2002년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같이 실력은 세계 최정상급으로 뛰어나지만 플레이 스타일이 독불장군형인 선수는 과감히 배제했다. 얼마나 동료 선수들을 위해 희생하느냐, 얼마나 팀에 기여하느냐 오직 이 두가지만 보고 엔트리 멤버를 차출했다. 일례로 홍명보의 경우는 팀의 맏형이라 맏형으로서 팀을 장악하려들자 히딩크는 그런 홍명보를 과감하게 팀에서 내쫓았다. 이에 홍명보는 모든 것을 버리고 겸손하게 경기에 임하겠다고 해서야 겨우 히딩크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히딩크는 연습경기이든 평가전이든 실제 월드컵 경기이든 간에 골을 어시스트한 선수를 매우 크게 칭찬했다.

일각에서, 특히 한국의 몇몇 거물급 축구 지도자들은 히딩크호의 성과를 위에서 제시한 축구협회의 전폭적 지원 덕으로만 치부하며 자신들에게도 동일한 지원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월드컵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히딩크 이전의 한국 축구계는 상대팀 분석은 고사하고 한국 축구 자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조차 오판하고 있었다. 당시 히딩크가 보여주었던 한국 축구에 대한 냉철한 평가, 한국 축구에 도입한 훈련 시스템, 실력 위주의 선수 선발 방식, 선수단 장악 능력, 언론 및 여론에 대한 대응 능력 중에서 단 한가지라도 부족했다면 단순히 긴 시간과 예산만 가지고 성과를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히딩크 이전 부임한 데트마어 크라머, 아나톨리 비쇼베츠 두 외국인 감독에 대해 한국 축구인들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보면 한국 축구인들이 히딩크를 대신해 성과를 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지원 가지고 투덜거리는 건 크라머가 해야 할 소리 같은데 그리고 팀 안팎에서 히딩크를 향해 닥쳐온 여러 도전들을 그가 물리쳐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럽 무대에서 보여준 실적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야망 또한 남달랐다. 알려진대로 당시 축구협회장 정몽준이 목표는 우승이라며 할 수 있냐고 말했을 때 그 부분이 마음에 들어 팀을 맡았다고 이야기했고 막상 대한민국 국민들이 32개국 본선 조편성을 보고 16강이나 제대로 갈 수 있을까를 걱정했을 당시 히딩크는 최소 4강 이상의 성과를 바라봤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16강으로 이끈 다음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I am still hungry)."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이는 붉은 악마의 4강전 카드 섹션 '꿈★은 이루어진다'와 함께 오랫동안 기억될 2002년의 상징적인 문구로 자리잡았다.

선수들 앞에서도 이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한국이 16강에 오른 직후 훈련장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스페인이 아일랜드를 꺾고 8강에 오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스페인의 전력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팀은 스페인과 8강전에서 붙을 각오로 이탈리아를 꺾는다."는 의도와 함께 스페인-아일랜드전을 관전하러 가는 패기갑스런 모습을 보여줄 정도였다.[104] 이런 감독의 행보 하에서 대표팀은 16강 진출 이후 해이해진 정신을 다 잡았고, 16강, 8강, 4강전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았다.

히딩크는 전술적으로 굉장히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수비 라인에서 백3와 백4를, 공격에서는 3톱과 2톱을 모두 사용했다. 월드컵 경기 내내 선발 라인업은 3-4-3이지만 원래는 4-3-3을 사용하려 했고, 경기 도중에는 선수 교체에 따라 혹은 선수들의 위치 조절 만으로 4-3-3[105]이나 4-4-2[106]로 변화시키는 변화무쌍한 전략을 사용했다. 히딩크는 이러한 유연하고 뛰어난 전술로, 기존 전술적 흐름에서 사장되어 가던 리베로판타지스타를 모두 적절히 사용했다. 특히 히딩크의 전술적 능력은 이탈리아전에서 돋보였는데, 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빼고 공격수만 셋을 추가로 투입하면서도 수비 밸런스를 유지, 세계 최강급 전력이던 조반니 트라파토니의 이탈리아를 침몰시켰다. 이러한 전술적 능력은 선수 육성과 더불어 히딩크 매직이라는 단어가 생기게 하였고, 이후 뛰어난 감독들의 성과를 매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로이스터 매직 등)의 원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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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운재

8. 평가

2022년 모로코와 나란히 하는 역대 최강의 제3대륙 대표팀으로 남은,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된 대한민국 축구 사상 최고의 전성기 시절이라 할 수 있다. 좁게 보면 대한민국 축구가, 넓게 보면 동아시아 축구가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만약 히딩크가 한국 국대의 감독직을 수락하지 않았다면 송종국 같은 인재를 발굴하기 힘들었을테고, 이영표설기현 같은 선수들은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히딩크가 아닌 다른 감독 밑에 있었다면 그들의 능력이 빛을 발했을지는 미지수. 그렇게 히딩크가 발굴한 신예들 대부분이 유럽으로 진출했고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특히 박지성은 영국 최고의 명문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팀의 최전성기를 함께했다. 이후 박지성을 필두로 국내에서는 구자철, 기성용, 손흥민, 이청용, 황희찬, 이강인, 김민재같은 인재들이 유럽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결국 손흥민은 EPL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차범근, 박지성과 함께 아시아 최고의 축구선수로 올라서기까지 했다.[107]
파일:external/img.koreatimes.co.kr/05031501.jpg
파일:히딩크감독행가레.jpg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108][109]
2002년 3월, 유럽 전지훈련 중 외신 기자회견에서
"우린 이미 목표(16강)를 달성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배가 고프다."[110]
포르투갈전 승리 후 16강을 확정지으면서[111]
파일:소비더머니.jpg
<rowcolor=white> 한국의 수준을 완전히 바꿔놓은 외국인..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 히딩크
(2023년 10월 15일 공개분)
이렇게 대한민국 축구가 점점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한 계기를 만들고, 역사상 다시는 없을 지도 모르는 엄청난 성과를 거둔 거스 히딩크는 이 월드컵에서의 공로로 외국인 지도자 최초로 대한민국 최고의 체육 훈장 청룡장을 받았고, 주장 홍명보는 아시아 뿐 아니라 유럽, 남미 지역을 제외한 국적 출신으로는 사상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브론즈볼 수상자가 되었으며 홍명보와 유상철은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인터넷 투표로 뽑힌 본 대회 최고의 인기팀 상을 수상했다. 또한 거스 히딩크 본인은 축구 감독으로서는 2002년 AFC 올해의 감독상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축구 감독들의 최고 권위 개인상 중 하나인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상도 수상하였다. 보통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상이 당해 월드컵이나 유로 우승,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나 압도적인 리그 성적을 기록해야 받을 수 있는 상인데 히딩크는 대한민국으로 우승후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격파하며 월드컵 4위를 기록하면서 이례적으로 이 상을 받게 되었다. 그만큼 전세계 축구 관계자들에게도 이 4강 신화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맡기 전까지 레알 베티스 같은 팀에서도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는 등 자신의 감독 커리어 중 가장 암울한 시기를 보내던 히딩크는 대한민국의 4강 신화로 화려하게 부활한 셈. 당연히 계약 연장 얘기가 나왔지만 담담하게 감독직을 내려놓고 떠났다. 사실 축협도 재계약 이야기를 했으나, 월드컵이 끝나면 PSV 에인트호번과 가장 먼저 협상을 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키고자 떠난 것이다.(출처: 히딩크 자서전 '마이 웨이')[112] 그리고 국가대표 감독 자리는 한동안 공석이 된다. 일각에서는 히딩크가 재계약을 원했으나 축협이 뒤늦게 움직여 PSV한테 빼앗겼다든지 말 안듣는 외국인 감독을 일부러 내쫓았다는 음모론도 꾸준히 나온다. 그러나 월드컵 이후 당분간 큰 대회라고는 아시안컵 뿐이고 그 이후에는 기나긴 공백이 있는데 히딩크 입장에서도 재계약 메리트보다는 박수칠 때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9. 경기 결과

히딩크호의 2001년 1월 24일부터 2002월드컵 본선과 2002년 11월 20일 히딩크가 기술고문으로 참석하고 김호곤이 감독대행으로 지휘한 A매치 평가전 브라질전까지 경기 결과이며, 2002년 7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FIFA랭킹은 22위, 아시아 1위였다.
경기수 득점 실점 승률[113]
39 14 13 12 47 48 36%
[별도로 무승부 후 승부차기전까지 포함하고 계산할 시]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cd313a><tablebgcolor=#cd313a><width=15%> 경기수 ||<width=14%> ||<width=14%> ||<width=14%> ||<width=14%> 득점 ||<width=14%> 실점 ||<width=15%> 승률 ||
39 17 13 12 47 48 43%
일시 / 장소 상대팀 결과 대회 득점 비고
2001년
2001년 1월 24일
(홍콩)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웨이
2:3
홍콩 칼스버그컵 고종수, 김도훈 히딩크호 데뷔전
2001년 1월 27일
(홍콩)
파일:파라과이 국기.svg
파라과이
1:1

(PSO 6:5 승)
[114]
고종수 [a][116]
<rowcolor=#000000> 2001년 2월 8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파일:모로코 국기.svg
모로코
1:1
두바이 4개국 대회 유상철 [117]
2001년 2월 11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아랍에미리트
4:1
두바이 4개국 대회 송종국, 유상철
설기현, 고종수
<rowcolor=#000000> 2001년 2월 14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파일:덴마크 국기.svg
덴마크
0:2
두바이 4개국 대회 [a][119]
2001년 4월 24일
(이집트, 카이로)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1:0
LG컵 이집트 4개국 대회 김도훈
2001년 4월 26일
(이집트, 카이로)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2:1
하석주, 안효연 [120]
2001년 5월 25일
(수원)
파일:카메룬 국기.svg
카메룬
0:0
평가전 [a]
2001년 5월 30일
(대구)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0:5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a]
2001년 6월 1일
(울산)
파일:멕시코 국기.svg
멕시코
2:1
황선홍, 유상철 [a]
2001년 6월 3일
(수원)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1:0
황선홍 [124]
2001년 8월 15일
(체코, 브르노)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
0:5
평가전
2001년 9월 13일
(대전)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나이지리아
2:2
이천수, 최용수 [a]
2001년 9월 16일
(부산)
2:1
김도훈, 이동국 [a][127]
2001년 11월 8일
(전주)
파일:세네갈 국기.svg
세네갈
0:1
[a]
2001년 11월 10일
(서울)
파일:크로아티아 국기.svg
크로아티아
2:0
최태욱, 김남일 [a][130]
2001년 11월 13일
(광주)
1:1
최용수 [a][132]
2001년 12월 9일
(서귀포)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1:0
유상철 [a]
2002년
2002년 1월 2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1:2
CONCACAF 골드컵 송종국 [a]
2002년 1월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파일:쿠바 국기.svg
쿠바
0:0
[135]
2002년 1월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파일:멕시코 국기.svg
멕시코
0:0

(PSO 4:2 승)
[a][137]
2002년 1월 31일
(미국, 애너하임)
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
코스타리카
1:3
최진철 [a][139]
2002년 2월 3일
(미국, 샌디에이고)
파일:캐나다 국기.svg
캐나다
1:2
김도훈 [140]
2002년 02월 14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우루과이
1:2
평가전 김도훈 [a][142]
2002년 3월 13일
(튀니지, 튀니스)
파일:튀니지 국기.svg
튀니지
0:0
[a][b]
2002년 3월 20일
(스페인, 카르타헤나)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2:0
황선홍(2골) [b]
2002년 3월 27일
(독일, 보훔)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터키
0:0
[a][b]
2002년 4월 20일
(대구)
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
코스타리카
2:0
차두리, 최태욱 [a][149]
2002년 4월 27일
(인천)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0:0
[a][151]
2002년 5월 16일
(부산)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스코틀랜드
4:1
이천수, 윤정환
안정환(2골)
[c]
2002년 5월 21일
(서귀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1:1
박지성 [a][c]
2002년 5월 26일
(수원)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2:3
박지성, 설기현 [a]
2002년 6월 4일
(부산)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2:0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황선홍, 유상철 [a][157]
2002년 6월 10일
(대구)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1:1
안정환 [a][159]
2002년 6월 14일
(인천)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포르투갈
1:0
박지성 [a][161]
2002년 6월 18일
(대전)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2:1
설기현, 안정환 [a][163]
2002년 6월 22일
(광주)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0:0

(PSO 5:3 승)
[a][165]
2002년 6월 25일
(서울)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0:1
[a][167]
2002년 6월 29일
(대구)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터키
2:3
이을용, 송종국 [a][169]
2002년 11월 20일
(서울)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2:3
평가전 설기현, 안정환 [a][171]

10. 기타

10.1. 편파 음모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딩크호/편파 음모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0.2. 대진운

당시 다른 4강 팀들(브라질, 독일, 튀르키예)과 한국의 당시 본선 대진 난이도를 비교해보자. 역대 월드컵 우승팀은 밑줄 표시했다.
  • 한국: 폴란드[172], 미국[173], 포르투갈[174] - 이탈리아[175] - 스페인[176] - 독일[177] - 튀르키예[A]
  • 브라질: 튀르키예, 코스타리카, 중국 - 벨기에 - 잉글랜드 - 튀르키예 - 독일
  • 독일: 사우디아라비아[179], 아일랜드, 카메룬 - 파라과이 - 미국 - 한국[180] - 브라질
  • 튀르키예: 브라질, 코스타리카, 중국 - 일본 - 세네갈 - 브라질 - 한국[A]

당시 한국이 연속으로 격파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은 역대 월드컵 또는 유로와 챔스 우승 국가들이며, 유로2000에서 이탈리아는 준우승, 포르투갈은 4강 4위, 스페인은 8강 5위를 기록했던 팀들로 2002월드컵 전에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힌 프랑스나 아르헨티나 같은 팀들일지라도 절대 승리를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막강한 상대들이고, 폴란드와 미국 역시 충분히 다른 조에 갔더라도 강호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다크호스로 평가받는 팀들이었다.[182]

특히 포르투갈은 유럽 예선에서 전 대회 4강 팀인 네덜란드를 탈락시켰고, 2000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2001년에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루이스 피구를 비롯하여 UEFA 챔피언스리그와 유럽 각국의 최상위 빅리그 및 컵 대회 등에서 우승을 경험한 선수들로 이루어진 스타 군단이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엔트리 역시 각각 94 월드컵 준우승 및 UEFA 챔피언스 리그/UEFA 컵 우승, 그리고 프리메라리가, 세리에 A, 코파 이탈리아, 코파 델 레이 등에서 우승을 경험한 멤버들로 이루어진 지금 봐도 입이 벌어질 수준의 엄청난 엔트리다. 게다가 포르투갈은 유로 2004 준우승에 이어 2006 월드컵에서 4위를 기록했고, 이탈리아는 2006 월드컵에서 우승, 스페인은 유로 2008에 이어 2010 월드컵까지 우승을 차지하였다. 또 챔스 우승국가도 2002년 스페인[183], 2003년 이탈리아[184], 2004년 포르투갈[185]로 차례대로 우승하였다. 한국은 연속으로 다음 월드컵과 챔스 우승국들을 상대한 것이다.

만일, 튀르키예는 물론이고[186] 브라질이나 독일[187]이라도 한국과 똑같은 대진으로 연달아 경기를 치렀다면 우승이나 준우승, 혹은 3위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을지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188] 당시는 느끼지 못한 말도 안 되는 골키퍼 라인이 현재에 이르러 회자되고는 하는데, 간단하게 당시 맞붙은 골키퍼 7명 중 4 훗날 빅 이어를 들었고, 2FIFA 월드컵을 들었으며, 해당하지 않는 골키퍼도 튀르키예와 미국에서 손꼽히는 골키퍼였다.[189]

반면 이 대회 우승국 브라질, 준우승국 독일은 월드컵 본선 뚜껑이 열리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우승 후보로 꼽히지 않은 팀이었다.[190] 그러나 두 팀은 본선에선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브라질의 대진을 보면 32강 조별리그에서 튀르키예와 중국, 코스타리카를 상대했는데, 당시 튀르키예는 상위권 팀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복병으로 평가받았고, 코스타리카는 지역예선에서 조 1위로 올라왔는데, 그것도 이번 대회에서 16강을 차지한 멕시코와 8강을 차지한 미국을 각각 조 2위와 조 3위로 밀어내버릴 정도로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가진 팀이었다. 중국만 승점 자판기에 불과했다.[191]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브라질 입장에서 보면 튀르키예나 코스타리카는 명백히 한 수 아래인 상대들이었다.

16강 상대 벨기에는 당시 트루시에호의 일본과 함께 꿀대진의 수혜를 받아 16강에 올라온 팀[192]이었으며, 8강 상대 잉글랜드는 당시 아르헨티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브라질 등의 바로 아래급으로 우승후보 중에서 1순위 전력까지는 아니고 포르투갈과 비슷한 급으로 우승후보 5순위급의 팀이었다. 실제로도 잉글랜드는 조별리그에서 아르헨티나와 스웨덴에게 연파당한 나이지리아와 유일하게 비긴 팀이다.[193] 4강에선 조별리그에서 만난 튀르키예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독일은 다른 4강 팀들 한국, 브라질 이 두 팀과는 달리 32강 조별리그가 비교적 쉬웠다.[194] 당시 내분으로 지리멸렬하던 사우디아라비아[195], 지역 예선에서는 준수했지만, 대회 이전부터 실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평을 들은 카메룬[196]이라는 비교적 쉬운 상대들을 조별리그에서 만났다. 그 중 조별리그 2차전에서 만난 아일랜드가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가진 팀이었다.[197] 16강에서 만난 파라과이는 세계 경쟁력이 조금은 떨어진다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팀이었다. 독일은 이런 파라과이를 상대로 이 대회 최악의 졸전을 보여주었다.[198][199] 8강 상대 미국을 상대로 고전끝에 1-0으로 겨우 이겼고[200], 4강에서는 한국을 만나 미하엘 발락의 결승골로 1-0으로 겨우 이겼지만 당시 한국은 강력한 상대들[201]과 연달아 싸우고 오는 동안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즉, 독일은 대진운에서 어느 정도 수혜를 본 것이다.

1954 월드컵 16개국 본선[202] 이후 48년만에 월드컵 진출한 튀르키예는 당시 우승급 전력의 브라질과 32강 조별리그 1차전, 4강전에서 두 번 맞붙은 것과 32강 조별리그 2차전에서 이 대회의 16강, 8강에 오른 멕시코와 미국을 제치고 조 1위로 지역예선을 통과한 코스타리카[203]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강력한 상대들과 싸운 적이 없다. 8강에서 만난 세네갈은 한국과 잉글랜드처럼 강력한 팀들[204]을 상대하느라 다소 힘이 빠진 상태였고, 3, 4위전에서 만난 한국 역시 강력한 팀들[205]을 연달아 상대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중국은 아예 있으나 마나한 팀에 불과했다. 결국 튀르키예가 상대한 팀 중 코스타리카와 세네갈, 브라질을 제외하면 튀르키예는 한국, 중국, 일본이라는 아시아 3팀을 만나 거저먹기로 승리를 거두었고, 8강까지 오는데 프랑스스웨덴, 덴마크등의 강팀을 상대하느라 지친 세네갈을 8강전에서 1:0으로 꺾고 거의 거저먹기로 4강에 오른 것이다. 세네갈과는 반대로 8강까지 오는데 튀르키예가 만난 상대는 튀르키예보다 강한 팀이라고 하기 힘든 코스타리카, 중국, 일본에 불과하다. 튀르키예는 개최국 대한민국에 3:2의 승리를 거두고 대회 3위로 튀르키예 역사상 월드컵 최고 성적을 달성했으나 이 대회 토너먼트에서 브라질을 제외하고 튀르키예가 상대한 5팀이 튀르키예보다 더 전력상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는 코스타리카-중국-일본-세네갈-대한민국으로 월드컵에서 한중일을 만난 점을 감안하면 거의 아시안컵과 비슷하게 3위에 오른 것이다.

정리하자면 당시 월드컵에서 한국, 브라질, 독일, 튀르키예가 각각 맞이한 당시 대진 난이도를 비교하면 한국 >>> 브라질 > 독일 > 튀르키예 순으로 어려웠다. 즉, 한국은 피터지게 고생했고[206], 브라질은 8강에서 당시 4강급 전력으로 평가를 받은 잉글랜드와 16강에서 유럽의 복병 벨기에를 만나는 불운을 겪은 팀이지만, 한국 대진에 비하면 브라질의 대진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 브라질이 이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무난한 대진운으로 올라갔다. 독일의 경우에는 한국 대진과 브라질 대진보다는 쉬웠지만 터키 대진보다는 좀 더 난이도가 있는 대진을 맞이했다. 사우디를 8-0으로 압살한 이후에 만난 팀이 아일랜드-카메룬-파라과이-미국-한국 이런 대진운으로 결승에 올라왔으나 아일랜드와 카메룬 미국 파라과이 4팀 모두 각 대륙에서 의외의 복병으로 꼽히는 팀인 점을 감안하면 독일의 대진운도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한국이나 브라질에 대진운에 비하면 수월했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위의 세 팀과는 다르게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작되었다고 말해도 믿을 수 있는 수준으로 대진 난이도가 그야말로 월드컵 역사에서 다시 나오기 힘든 쉬운 대진운이어서 4강까지 거의 날로 먹다시피 올라왔다. 튀르키예는 토너먼트에서 세네갈과 코스타리카, 여기에 중국, 일본, 대한민국 이렇게 아시아 3팀과 맞붙었다.브라질과 마찬가지로 튀르키예가 이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쉬운 난이도로 4강에 올라갔다.[207]

그리고 이때부터 한국이 이긴 탑시드 우승후보들이 차례대로 우승하기 시작했으며[208], 한국이 이긴 이탈리아가 2006년, 스페인이 2010년, 독일이 2014년에 각각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 국가들에 속하는 프로팀들 중 최소 한 팀 이상이 그 전해에 있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한 것도 공통점이고[209], 한국이 32강 조별리그에서 이긴 포르투갈의 FC 포르투2003-0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포르투갈 국가대표팀도 유로 2004 준우승, 2006 독일 월드컵 4위, UEFA 유로 2016UEFA 네이션스 리그/2018-19 시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유로 2016에서 포르투갈이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최근 10년간 메이저 국가대항전인 월드컵, 유로의 우승팀은 전부 2002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경유한 셈이 되었다. 2006 월드컵 이탈리아 우승, 유로 2008 & 2010 월드컵 & 유로 2012 스페인 우승, 2014 월드컵 독일 우승, 유로 2016 포르투갈 우승. UEFA 유로 2004에서 포르투갈이 자국에서 그리스를 상대로 패하지 않았다면 이 기록은 2002 한일 월드컵 이후로 쭉 이어져왔을 것이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상기한 우승팀들 혹은 폴란드, 미국, 튀르키예 중 한 팀이 우승을 차지하면 2006 독일 월드컵 이후로 이 기록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될 전망이었으나, 이탈리아, 미국, 튀르키예는 지역예선에서 탈락했고 월드컵 32개국 본선 진출팀 중 독일 22등, 폴란드 25등으로 32강 조별리그 탈락, 16강에 진출한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각각 러시아와 우루과이에게 지며 이 기록은 깨졌으나, 한국이 2006월드컵에서 만난 탑시드 프랑스가 2018월드컵에 우승하였고, 그 다음 한국이 2010월드컵에서 만난 탑시드 아르헨티나가 2022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2002월드컵부터 이어진 한국이 만난 탑시드 우승후보들이 차례대로 우승하고 있다.

11. 관련 영상

피파 영상 1 | 피파 영상 2
대한민국 골 모음 영상 | 대한민국 하이라이트 영상

12. 관련 문서


[1] 계약 만료일 기준.[2] 다만 전원 공격 한정으로 골키퍼는 여기서 배제된다.[3] 8개 진출팀 중 5위 기록. 월드컵 우승팀, 각 대륙 우승팀, 개최국이 진출한 대회였고, 프랑스전 0:5 참패로 유명한 대회이자 대한민국은 호주와 컨페드 디펜딩 챔피언 멕시코를 격파하였으나, 4강 진출은 실패하였고, 2승 1패 승점 6점으로 대회 5위를 기록하였다.
(8강 조별리그)
[4] 12개 진출팀 중 4위 기록.[5] 32개 진출팀 중 4위 기록. 아시아 최고 성적.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고 성적.[6] 이 당시 챔스 2001-2002 우승 국가였으며, (레알 마드리드 CF로 우승). 이들의 스페인 리그가 랭킹 1위였다.[7]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는 태국 쇼크를 터뜨렸지만, 1999년 아시아 최초로 A매치에서 FIFA 랭킹 1위 브라질 격파, 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은 1988년 대회 준우승 이후로 12년 만에 아시안컵 3위를 기록했고, 4년 전 2:6 대패를 안겨준 이란을 8강전에서 이겨 설욕을 했다는 점과 박지성, 이영표 등의 2002년 멤버 대부분이 이때 뽑히며, 세대 교체에 성공했던 점도 있다. 이란 감독이 대한민국전 패배로 스스로 사퇴했을 정도. 하지만 당시 12강 조별리그에서 중국과 비기고 쿠웨이트에게 패하는 등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가까스로 조 3위로 8강에 진출했기에 비난도 컸다. 게다가 4강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0:2로 끌려가다 종료 직전에 간신히 이동국의 만회골이 터지는 등 그나마 있던 동정 여론조차 소멸했다.[8] 클럽 팀에서는 아스날 FC에서 전혀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유니폼팔이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과 풀럼에서는 밥값하는 수준은 해줬다.[9] 당시 철의 장막이 붕괴함으로 인해 동구권 축구인들의 가성비가 좋았다. 대한민국은 이전에 아나톨리 비쇼베츠를 국대 감독으로 선임한 적이 있다.[10] 이는 카잔 참사 이후 스페인에게 0:6 대패, 유로 2020에서 잉글랜드에 패해 16강 15등 탈락으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사퇴한 요아힘 뢰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11] 위에서 말한 자케의 거절 통보 직후.[12] 이후 거스 히딩크가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당시에 나이지리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표팀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해 차이가 너무 커서 두 팀 모두 결렬되었는데 신뢰감이 너무 없었다고 한다.[13] 참전용사의 고향마을 별명은 얍(Jap)이었는데, 일본(Japan)에서 따온 것이다. 대한민국이 아닌 일본에 가서 싸운 줄 알았다고. 지금이야 대한민국의 소프트 파워가 비약적으로 상승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많이 알려졌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유럽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1988 서울 올림픽을 통해 그나마 예전보다는 알려졌어도, 이 당시 대한민국은 아직 아는 사람만 아는 나라였던 것이다.[14] 이때의 수석코치가 핌 베어백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박항서가 맞다. 핌 베어백은 거스 히딩크가 데려온 코치들 중에 최선임자이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박항서 다음 서열인 셈.[15] 거스 히딩크가 정식 취임하기 직전 2000년 12월 20일 일본 국립 카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의 평가전을 감독대행 자격으로 지휘했다.[16] 전 경기 풀타임 출전.[미필] [미필] [미필] [미필] [미필] [22] 필드 플레이어 유일 전경기 풀타임 출전.[미필] [미필] [미필] [26] 2002년 2월에 계약하고, 월드컵 이후에 울산에서 데뷔하였다. 2002년의 K리그는 월드컵이 끝난 후인 7월에 개막하였다.[미필] [미필] [29] 이후 박지성은 K리그 경력 없이 은퇴하였으며, 설기현은 2010년 포항 스틸러스, 차두리는 2013년 FC 서울에서 K리그 데뷔를 했다.[30] 김남일, 김태영, 설기현, 윤정환, 이민성, 이운재, 이을용, 차두리, 최성용, 최용수, 최은성, 최진철, 최태욱, 현영민, 홍명보, 황선홍.[31] 2021년 유명을 달리한 유상철도 투병 생활 이전인 2019년까지 지도자 생활을 했다.[32]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33] 김병지, 안정환, 이천수.[34] 이동국은 월드컵 기간 동안 술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이동국의 아버지는 히딩크에게 불만이 있는지라 텔레비전에 히딩크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고 한다.[35] 당시 기존 의료진 몰래 호출을 했고, 존은 근육을 따라 멍이 번지듯이 나타나 근육 파열로 오인한 것이라 진단을 내린다. 히딩크는 그에게 이영표의 전담 치료를 맡겼고 그 후에야 기존 의료진에게 이해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36] 황선홍, 최용수, 안정환, 박지성, 설기현, 이천수, 최태욱, 차두리 등.[37] 대한민국 포백 수비는 당시 코치 핌 베어벡이 2006년에 감독으로 부임하고 비로소 정착되었다.[38] 심지어 성남 일화는 2001년 리그 우승팀이었다. 꼴찌였던 대전 시티즌은 골키퍼 최은성이 발탁이 되어 대전 구단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멤버가 된다.[39] '56 OUT[40] '63 OUT[41] '90 OUT[42] '46 IN[43] '56 IN[44] '83 OUT[45] '80 OUT[46] '46 OUT[47] '68 OUT[48] '32 OUT[49] '61 OUT[50] '69 OUT[51] '60 OUT[52] '32 IN[53] '65 OUT[54] '50 IN[55] '56 IN[56] '90+3 OUT[57] '54 IN[58] '38 OUT[59] '79 IN[60] '89 OUT[61] '80 IN[62] '79 OUT[63] '69 IN[64] '61 IN[65] '38 IN[66] '90+3 IN[67] 68 IN[68] '60 IN[69] '89 IN[70] '83 IN[71] '65 IN[72] '50 OUT[73] '56 OUT[74] '63 IN[75] '90 IN[76] '54 OUT[32강] 조별리그[78] 16개국 본선 진출 체제.[79] 미국은 1930년 월드컵 3위, 1950년 월드컵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 잉글랜드를 격파하고 월드컵 10위를 기록한 팀이다. 특히 1930 월드컵 당시는 월드컵이 처음 열린 때라 진출국이 적었더라도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이 상대팀과 전력을 분석하던 시절이며, 식민지 국가, 세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국가, 월드컵까지 참가 여객선 교통 비용이 없는 국가들은 참가할 수 없었으며(무려 1930년 당시는 비행기 항공 교통이 발달 되기 전이었고 여객선으로 장거리 해외를 많이 가는 시절이었다.), 세계 축구 인프라와 정보가 보급이 안 되었고, 전술과 기량이 발달한 것도 아니었다. 1930월드컵에서 미국은 1920올림픽축구 우승팀 벨기에를 3:0, 남미 파라과이를 3:0 연속으로 격파하며 4강에 진출하였고 월드컵 최초의 해트트릭팀도 미국이다. 한국이 월드컵 1승을 2002년에 달성한 것을 비교하면 1930년 당시 월드컵 1승은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다.[80] 조 추첨 전 8일 후 미국과의 평가전에서는 1:0으로 이겼다.[81] 독일도 8강전에서 미국을 1:0으로 어렵게 승리할 정도였다.[82] 참고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이전까지 개최국은 무조건 2라운드에 진출했다. 남아공이 받은 조편성은 멕시코 - 우루과이 - 프랑스로, 2002년의 한국보다 더한 불지옥조로, 결국 개최국 최초로 2라운드 진출에 실패(20등)한다.[83] 사실 2020년대 지금도 어느정도 그렇긴 하지만 지난 98월드컵에서 멕시코전 1:3, 네덜란드전 0:5참패로 2002월드컵 당시에는 더더욱 심했다.[84] 당시 개최국 자격으로 톱 시드의 한국 대신 다른 톱 시드 팀 브라질을 넣어 보면(브라질, 포르투갈, 폴란드, 미국) 얼마나 힘든 조인지를 알 수 있다. 당시 죽음의 조로 꼽힌 아르헨티나-잉글랜드-스웨덴-나이지리아에 모자람이 없는 조 편성이 나온다.[85] 게다가 이 조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할 경우 만나는 팀은 G조 팀들 중 한팀이 되는데, G조에는 이탈리아, 멕시코, 크로아티아, 에콰도르가 있었다.[86]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이 2014년알제리 쇼크를 당한 러시아, 벨기에, 알제리 조와 흡사하며, 똑같이 H조다. 다만 2014년과 달리 2002년의 벨기에는 전력이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난이도 자체는 2014년이 훨씬 높다.[87] 특히 1994년 월드컵 볼리비아전에서의 졸전으로 인해 황선홍 = 똥볼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축구팬 역시 엄청난 비난을 쏟아냈다. 황선홍 본인에게도 이는 상당한 트라우마가 되어 자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날 정도였고, 비난 여론을 이기지 못해 K리그가 아닌 J리그로 진출하고 만다.[88] 당시 황선홍은 '대한민국에서 욕을 가장 많이 먹는 사람'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정말로 많은 욕을 먹고있었다. 축구 응원문화가 성숙해지기 직전의 시기였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는 약팀인 대한민국 국가대표 스트라이커라는 자리는 필연적으로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자리였다.[89] 당시 체력 관리 트레이너(피지컬 코치)를 맡은 레이몬드 베르하이옌은 선수들에게 '저승사자'라고 불릴 만큼 혹독한 지옥훈련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90] 훗날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에도 오르게 되는 압신 고트비가 담당했다.[91]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는 고지대 경기 대비를 하지 않았다. 4년 후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도 무슨 깡인지는 몰라도 상대 팀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역시 현지 적응도 없이 대회가 코 앞일 때 출국해서 경기를 뛰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독일전에서 골키퍼 최인영은 몸 상태가 안 좋아 못 뛰겠다고 하소연했지만 김호 감독은 출전 지시를 강행했고, 결국 전반에만 3골을 허용했는데 세번째 골은 골키퍼의 치명적 실책으로 평가된다. 후반에 독일이 지쳐 대반격이 이루어진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사실 히딩크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소위 정신력을 강조하는 소리가 엄청 많았고 흔히 말해서 까라면 까라는 문화, 상명하복식 문화가 강했을 시기다.[92] 체력 강화 훈련의 경우 차범근이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6개월 전에 강도 높게 시행했지만, 그 여파로 3.1절 한일전에서 패했고, 이후 월드컵 대비 훈련은 묵살되어 4월 한일전 복수에 올인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 대회의 상대 팀 멕시코, 벨기에, 네덜란드에 대한 분석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멕시코는 막연히 1승 제물, 벨기에는 노땅팀, 네덜란드는 허벌나게 강함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당시엔 일반 시민들의 해외 축구에 대한 무지도 심했다. 당시 뉴스를 보면 정말 시민들이 해외 축구에 대해 어두운 것을 알 수 있다. 1998년에는 선수들도 세계 무대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었고 상대의 기에 많이 눌렸다. 최용수, 고종수의 증언에 따르면 많이 위축이 되었다고...[93] 이 점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거보다 체력 축구가 주류를 이루면서 경기 중에 심장마비나 호홉 곤란을 겪는 선수들이 종종 나타나고 심하면 사망까지 이르는 점을 생각하면 마냥 관계 없다고 몰아붙이긴 힘들다. 당장 이듬해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마르크비비앙 푀가 대표적인 예다. 다만 전공이 그러니 선수들이 부상을 잘 입는 관절이나 근육 쪽에는 신경을 못 쓴 점도 맞다.[94]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홍명보호는 말라리아 예방 주사를 늦게 맞아 컨디션이 크게 떨어진 채 대회에 나갔다. 그리고 2019년 벤투호의 경우 의무팀이 완전히 파국을 맞으며 선수 관리에 큰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아시안컵 8강 탈락의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95] 마이웨이 - 거스 히딩크.[96] 히딩크의 일기 형식으로 구성된 자서전을 보면 이영표, 송종국, 박지성은 각각 차례로 2001년 초부터 히딩크의 기준에서 합격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미 이들의 재능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검증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PSV 감독을 맡게 되자 히딩크는 이영표와 박지성을 자신의 팀으로 데려간다.[97] 본디 히딩크는 대한민국 축구의 수준을 알기에, 어떻게든 우승 후보인 이탈리아를 피하기 위해 16강에 무조건 조 1위로 올라가는 목표를 세웠고 실제로도 이뤘지만... 문제는 이탈리아가 그 조에서 크로아티아에게 유일하게 지는 등 못하는 바람에 둘이 16강에서 만나고 말았다.[98] 심지어 서브 골키퍼가 김병지였다. 현재까지도 K리그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가 누구냐는 논쟁에서 두 선수의 이름이 끊임없이 나올 만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선수들이다. 또한 윙병지가 도화선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시기 이후로 이운재에게 대표팀 주전 자리를 내주긴 했어도 이운재를 제외하면 대표팀 주전 골키퍼로서 김병지만큼 장기간 팬들의 지지를 받았던 선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한국 축구 역사에서 최고의 골키퍼로 불리는 두 선수가 전성기에 히딩크호에 승선했으니 당시 골키퍼 스쿼드가 탄탄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최은성이 서드였고 김용대가 뽑히지 못할 정도였으니.[99] 특히 홍명보와 황선홍은 10년에 한번 나올 정도라는 평가를 받는 핵심 수비수와 공격수였다. 일명 H-H 라인. 실제로 그들이 은퇴한지 10년이 더 지날때도 홍명보나 황선홍을 대체할만한 선수들은 나오지 않다가, 20년이 가까이 지난 후에야 손흥민 - 김민재 라인 정도가 비교 대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걸 보면 경이로운 부분.[100] 물론 그렇다고 2002년 2군 멤버들이나 탈락했어도 주요 자원으로 꼽히던 선수들의 대다수가 2010년대에 대접받으리란 생각은 너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당장 현영민, 최태욱 등은 이후 다시 월드컵에서 선발되지 않았으며 국가대표 주요 자원조차 아니었다. 이 시기의 전력은 당시 박지성, 이천수, 이영표, 송종국, 차두리, 설기현, 최태욱, 김남일과 고종수, 이동국, 김은중 등 뽑히지 않은 선수들 가운데에도 괜찮은 젊은 선수들이 많이 나왔고 히딩크가 그들을 잘 조련시켰다는 것, 그리고 노장들의 정신무장과 동기부여가 잘 된 시기였으며 유상철과 홍명보, 황선홍, 김병지, 이운재 등 주전으로 뛰어줄 수 있는 핵심 멤버들이 아주 훌륭한 멤버였다는 점, 당시 약팀이던 전북에서 뛰던 최진철의 진가를 알아보고 발탁한 점 등에 있다.[101] 전임 감독 허정무가 옥석과 같은 선수들을 발굴해놓은 공도 컸다. 허정무 시절 엔트리와 히딩크호의 엔트리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 증거로, 전술했듯 히딩크가 부임 초기에 기량을 체크할 때 '합격'이라고 한 선수들 중 허정무가 발굴해놓은 인물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아는 사실이 박지성을 히딩크가 처음으로 대표팀에 선발했다는 것인데, 이미 허정무 눈에 들어 올림픽 대표팀과 성인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연령별 대표팀에도 뽑힌 적이 없던 무명 박지성을 뽑은 덕에 허정무는 당시 온갖 비난을 받았고 해명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영표도 허정무가 처음으로 발탁하여 중용했다.[102] 오히려 차두리는 스타 의식이나 자만감은커녕, 아버지의 위대한 업적과 이름값에 억눌려 스스로에 대한 증명의식에 시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두리는 끝까지 아버지를 넘어서려 노력했지만 은퇴할 때까지 아버지를 못 넘어섬에 대한 아쉬움과 아들로서의 미안함에 안타까워하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10분 40초부터 차범근은 아들을 위해 아들의 4강 월드컵 커리어 등을 말하며 본인보다 아들이 더 뛰어나다고 치켜주기도 하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줬다.[103] 이는 히딩크의 카리스마 능력이 탁월한 것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었던 정몽준 회장이 여론 및 언론의 비난 속에서도 히딩크가 본인의 뜻대로 대표팀을 완성할 수 있게끔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히딩크가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104] 16강 진출 확정 직후니까 이탈리아전을 하기도 전에 이길 걸 대전제로 가정하고 다음 상대인 스페인을 먼저 보러 간 것이다.[105] 홍명보의 오버래핑, 양쪽 윙백이 풀백 위치로 이동[106] 피지컬이 부족한 안정환 대신 설기현이 중앙으로 이동하여 포스트 플레이, 안정환은 세컨드 스트라이커 위치로 이동. 이영표는 윙백에서 윙어로, 김태영은 센터백에서 풀백으로, 박지성은 윙포워드에서 윙어로, 송종국은 윙백에서 풀백으로 이동[107] 손차박[108] 사실 이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발언은 아니었는데,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outside world is not expecting much from Korea, but I hope that we can make a very nice surprise for the outside world" ("세계는 대한민국에 그리 큰 기대가 없으나, 난 우리가 아주 근사한 놀라움을 선사하길 희망한다") 출처: 10분 31초 부분[109] 그리고 그의 바램대로 당시 유럽, 남미팀을 제외한 최고의 업적을 이루어 내었다.[110] 원문이 "But, I'm still hungry."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실제 원문은 다음과 같다: "- it was already reached, but I'd like the team to be greedy and hungry to a next aim." ("(16강이란) 목표는 달성했으나, 나는 우리 팀이 다음 목표를 향한 욕심과 굶주림을 가졌으면 좋겠다.") 출처: 17분 24초 부분 즉 본인이 더 높이 올라가고 싶다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선수들이 더 높은 목표의식을 갖길 바란다고 한 말인데 사실상 거의 오역에 가까운 의역이다만, 워낙 임팩트가 커서 역변역까지 되어 유명해진 케이스다. 히딩크가 오버히트 광고를 찍을 때 그대로 썼을 정도.[111] 16강 진출 후 대표팀의 기강이 다소 흐트러진 상황이었고, 예술체육요원 혜택이 기정 사실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히딩크는 언론을 통해 이 말을 했고, 대표팀 선수들에게 우리 목표는 최소 4강이다. 고작 16강에 만족하지 마라!고 일갈하여 기강을 다 잡았다. 정부는 16강전 당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병역법 시행령 개정안을 심의 의결하여 대회 중인 10명의 선수가 혜택을 받았다.[112] 월드컵 시작 전부터 아인트호벤에서 접촉을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월드컵에 집중해야해서 월드컵이 끝나고 대화하자고 하면서 가장 먼저 연락을 준 구단이라 가장 먼저 협상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엄청난 성적을 이어가는 중이라 아인트호벤에서 상당히 불안해했다고 한다.[113] 축구야구와 달리 무승부를 분모에 산입 계산해 승률상 무승부는 승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물론 상대팀의 승률도 하락시킨다. 자세한 내용은 승률 문서 참조 바람.[114] 승부차기 결과와 관계없이 전적상은 무승부로 기록된다. 이하 모두 같음.[a]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본선 진출국.[116] 대회 3위[117] 이 경기는 모로코 리그 선발팀과의 경기였기 때문에 정식 A매치로 기록되지 않았다.[a] [119] 대회 준우승. 이 경기는 덴마크 리그 선발팀과의 경기였기 때문에 정식 A매치로 기록되지 않았다.[120] 대회 우승[a] [a] [a] [124] 조 3위, 컨페드컵 최종 5위로 4강 실패 (승점 6점 2승 1패)[a] [a] [127] 나이지리아 2연전 1승 1무. 최은성의 유일한 A매치 출전 경기로 선발 출장해 90분 풀타임을 뛰며 1실점했다.[a] [a] [130] 히딩크호 사상 첫 유럽전 승리[a] [132] 크로아티아 2연전 1승 1무[a] [a] [135] 12강 조별리그 조 2위(승점 1점 1무 1패)로 8강 진출[a] [137] 8강전[a] [139] 준결승전[140] 3·4위전, 총 전적 승점 2점 2무 3패로 대회 4위[a] [142] 북중미 전지훈련[a] [b] 스페인 전지훈련[b] [a] [b] [a] [149] 대구 전지훈련[a] [151] 파주 훈련 센터 합숙훈련[c] 서귀포 전지훈련[a] [c] [a] [a] [157] 1라운드 D조 1차전, 한국 월드컵 사상 첫 승리[a] [159] 1라운드 D조 2차전, 한국 월드컵 사상 북중미팀에 첫 승점 획득[a] [161] 1라운드 D조 3차전, 조 1위(2승 1무), 한국 월드컵 사상 첫 2라운드(16강) 진출[a] [163] 16강전, 한국 월드컵 사상 첫 8강 진출, 아시아 첫 3라운드 진출[a] [165] 8강전, 아시아 첫 승부차기 & 아시아 첫 승부차기 승리, 아시아 국가 월드컵 사상 첫 4강 진출[a] [167] 아시아 첫 4강전[a] [169] 아시아 첫 3·4위전, 역대 아시아 국가 월드컵 최고 기록(4위)[a] [171] 기술고문 자격으로 참석, 감독대행 김호곤이 경기 지휘[172] 74월드컵 3위와 82월드컵 3위팀이며, 유럽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팀이며, 피파랭킹 13위의 이 월드컵 8강(8위) 미국을 3:1로 이겼다.[173] 당시 독일을 2차례 이겼고, 99컨페드컵 3위와 2002골드컵 우승, 북중미 예선 통과하며 피파랭킹 13위팀이었으며, 이 월드컵 8강(8위) 팀이었다.[174] 66월드컵에서 펠레의 브라질을 3:1로 격파하며 66월드컵 3위를 기록한 팀이며 2002년 당시 피파랭킹 5위와 유로2000 4강 4위팀이었고, 그 후 포르투갈은 유로 2004 준우승, 2006월드컵 4위, 유로2016 우승과 유럽네이션스리그 우승한다.[175] 당시 피파랭킹 6위였고, 바로 다음 2006독일월드컵 홈팀 독일을 격파하며 우승을 차지한 팀이며, 2006월드컵 우승멤버 델피에로, 가투소, 토티, 잠브로타, 부폰이 있었으며, 자국리그 세리에가 당시 2위 리그였다.[176] 당시 피파랭킹 8위었고, 2010월드컵 우승멤버 카시야스, 푸욜, 차비가 있었으며, 자국리그 라리가가 당시 1위 리그였다. 8강 준준결승전 당시 한국보다 이틀을 더 휴식했다.[177] 이때 한국은 32강 조별리그부터 쭈욱 수준급 팀을 만났다. 게다가 16강전과 8강전에서 주심들이 이탈리아와 스페인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관대한 모습을 보여준 탓에 한국 선수들의 체력은 더 심하게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4강에 올라왔을 당시 한국 선수들의 체력은 바닥난 상태였다. '우승 후보 3개국을 연속 상대하며 악전고투를 펼친' 한국과 '만만한 상대들을 꺾어오며 충분한 휴식을 누린' 독일의 대결이라 체력적인 측면에서 상대가 안되는 경기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0:1로 선전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결과이며(그 와중에도 이천수올리버 칸에게 회심의 슛이 막히기 전까지 100% 골이라고 확신했다고 회고했다. 체력은 바닥이었을지 몰라도 사기와 자신감은 그만큼이나 충천했던 것.), 독일은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 다음으로 2014월드컵에 우승한다.[A] 3, 4위전에서 서로 맞붙었다.[179] 한 마디로 공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당시 어떻게 월드컵 32개국 본선에 진출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중국보다 더한 최약체였다. 실제로도 독일한테 0-8로 대학살을 당할 만큼 팀 자체가 별볼일 없었다. 이 팀으로 인해 독일은 결과적으로 한 경기 덜 치르고 1승과 8득점을 공짜로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180] 보다시피 역대 월드컵 우승팀과 우승후보 팀들을 여기까지는 아예 안 만났다.[A] [182] 당시 한국의 조는 한국을 제외한 다른 팀들은 모두 역대 월드컵 3위 팀들이다. 포르투갈은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 전설적인 스타 에우제비우를 앞세워 펠레의 브라질을 3:1로 격파하며 66월드컵 3위에 올랐고, 미국은 초대 대회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에서 3위에 올랐다. 특히 폴란드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3위에 오른 바 있는데, 1974 FIFA 월드컵 서독,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서 두번의 3위를 기록했다.[183] 2002년 레알 마드리드 우승[184] 2003년 AC 밀란 우승[185] 2004년 FC 포르투 우승[186] 튀르키예는 불과 2년 전 유로 2000에서 첫 승 및 사상 첫 8강(6위)을 기록하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그때도 16강 조별리그에서 만난 이탈리아 및 8강에서 만난 포르투갈에는 여지없이 패배했다.[187] 독일은 불과 2년 전인 유로 2000에서 1무 2패 대회 15등이라는 망신살 뻗치는 성적으로 탈락하는 굴욕을 당한 팀이었고, 독일에게 그런 굴욕을 안긴 팀 중에는 한국이 2002 월드컵 32강 조별리그에서 꺾은 포르투갈이 포함되었다.[188] 당시 한국 쪽 대진에 그만큼 우승 후보로 손꼽힌 팀들이 몰렸는데, 설령 이 라인을 통과하더라도 그만큼 체력 소모가 상당하기 때문에 당시 우승국 브라질이라든지, 준우승국 독일 그리고 3위를 기록한 튀르키예 역시 한국처럼 이 대진을 뚫고 4강에 올랐다 할지라도 선수들의 체력은 고갈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189] 물론 월드컵 기준으로 봤을 때는 올리버 칸 밖에 없지만.[190] 브라질은 1999 코파 아메리카 우승 이후 호나우두의 장기 부재 및 히바우두의 장기적인 컨디션 난조 문제 그리고 역대 남미 예선 중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라는 점 때문에 남미 예선에서 심하게 빌빌댔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는 아예 에르난 크레스포 혼자에게 있는대로 농락당했고 심지어 에콰도르에게마저 밀려 3위에 랭크한 게 이 당시의 브라질이었다. 독일의 경우에는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8강전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3-0으로 완패한 이후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유로 2000에서 15등으로 광탈을 맞이했고, 지역예선에서도 잉글랜드에게 홈에서 1-5로 패하는 망신을 당하며 플레이오프에서 우크라이나에게 하마터면 질뻔하다 홈에서의 극적인 승리로 2002년 월드컵 본선에 올랐다. 참고로 저 1-5 대학살은 선제골은 되려 독일이 넣었으나 독일 역시 마이클 오웬 혼자에게 있는대로 농락당했다.[191] 중국은 2002 한일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시드 배정에서 다소 수혜를 받았다. 그 이유는 2000 레바논 아시안컵 성적으로 시드 배정을 했기 때문이다.[192] 벨기에는 유로 2000에서 승점 3점 1승 2패 조 3위 대회 12위로 8강에 실패했다. 이후 지역예선에서는 크로아티아에 밀려 조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체코를 제치고 간신히 본선 진출을 이루어낸 팀이다. 본선 조추첨 당시 일본과 함께 H조에 배정되었을 때, 벨기에의 FIFA 랭킹은 20위 안에도 들지 못한 상태였다. 이처럼 벨기에는 대회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그런 전력이었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생각보다 전력이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특히 16강에서는 당시 아르헨티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와 함께 우승급 전력이던 브라질을 상대로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벨기에는 이 대회에서 페어플레이상을 수상했을 만큼 플레이도 매우 깔끔했다.[193] 2002년 잉글랜드는 1998년 잉글랜드보다 더 강한 팀인데다 제3의 전성기를 맞이한 팀이다. 유로 2000에서 8강 진출에 실패해 탈락(11등)한 이후 지역예선 초반까지 빌빌댄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1년 9월 독일 뮌헨 원정에서 마이클 오웬의 활약으로 독일을 5-1로 대파하는데, 이 경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전력이 상승했다. 하지만 32개국 본선에서는 그 조 최하위 27등 나이지리아와 힘겹게 겨루다 비기는 등 뭔가 불안했고 아르헨티나 하나만 심판의 잘못된 판정으로 운 좋게 이겨 겨우 올라왔을 뿐이다. 16강에 올라와서는 당시 우승급 전력의 프랑스, 당시 돌풍의 팀 세네갈이 있는 A조에서 2승 1무 조 1위로 당당하게 통과한 덴마크를 3-0으로 완파하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8강에서는 당시 초공격팀으로 명성이 높던 브라질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졌다.[194] 당시 한국이 속한 D조는 우승후보에 해당하는 포르투갈, 이번 대회 8강팀 세네갈과 함께 돌풍의 핵인 미국, 그리고 동유럽의 신흥 강자 폴란드가 있었다. 그래서 조추첨 당시 한국에서는 " 한국 죽어봐라 조 ", "본선 광탈 예약 조 "라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지배했다. 그리고 브라질과 튀르키예가 속한 C조의 경우에는 2강 1중 1약 수준이었는데, 당시 브라질은 우승급 전력으로 탈바꿈했고, 튀르키예는 복병으로 꼽히는 팀 중 하나였고, 1중 코스타리카는 이 대회에서 각각 16강, 8강을 차지한 멕시코와 미국을 제치고 지역예선 1위로 올라온 팀으로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에 브라질과 튀르키예라는 양강 체제가 이미 16강 자리를 사실상 차지하는 불운을 겪은 팀이다. 중국이야 이때나 지금이나 승점자판기에 불과할 뿐이지만...[195] 사우디아라비아는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조별 예선 탈락(28등)한 이후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에 2000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사실 이 준우승도 아시안컵 당시 강력 우승 후보 이란을 허정무호의 한국이 8강에서 발목 잡아준 데다 그 한국이 이란을 잡은 탓에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난 상태로 사우디아라비아와 4강에 맞붙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196] 카메룬도 쉬운 상대라고 볼 수 없는 것이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지난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이기는 최대 이변을 일으키고 8강까지 올라온 강팀이었다. 8강전에서 잉글랜드에 2-3으로 석패했으나 아프리카 팀 최초로 월드컵 8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197] 이때 아일랜드는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네덜란드를 탈락시키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여 우승급 전력의 스페인을 상대로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독일 역시 네덜란드를 탈락시키고 올라온 아일랜드를 상대로 고전을 한 것이다.[198] 파라과이는 대회전에는 역사상 가장 지옥급 난이도의 남미 예선에서 조 4위로 통과했을 정도로 준수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파라과이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스페인을 제치고 16강에 올랐으며 16강에서 우승국이자 개최국 프랑스를 상대로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의 눈부신 선방을 보이며 경기를 연장전까지 끌고 갔으나 연장 후반에 프랑스의 로랑 블랑에게 실점하며 0:1로 석패했다.[199] 당시 독일과 파라과이의 16강전을 중계하던 차범근이 졸전을 비난하자(해설 하던 중, “저런 수준의 경기는, 우리나라 한강 고수부지에 가도 많이 볼 수 있어요”라고 하였다.), 푈러는 '차붐이 바이엘 레버쿠젠에 있을 때 (바이엘) 아스피린을 많이 먹은 것 같다'며 차범근을 비난했다. 그러나 독일 언론에서는 오히려 푈러가 차붐의 충고를 들어야 한다며 푈러를 비판했으며, 여론이 불리해지자 푈러는 결국 공식 석상에서 차범근에게 '스트레스가 많아 실수했다'며 사과를 하게 되었고, 차범근 역시 '이해한다'며 사과를 받아들인다. 이후 차범근은 독일과 브라질 결승전에서 이 일화를 꺼낸 캐스터의 질문에 자신이 독일에서 한창 활약할 때 신인으로 들어와 열심히 운동하던 루디 푈러를 기억한다면서 루디 푈러의 건승을 기원했다. 아무래도 독일 축구에 남다른 애정이 있어 실망감도 크게 표현한 것 같다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200] 2002년 월드컵 이전이던 1999년 독일과 미국이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맞붙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미국이 마테우스옌스 레만까지 있던 독일을 2-0으로 완파하고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대이변을 일으켰다.[201] 당시 한국은 32강 조별리그부터 불난이도였는데, 특히 조별리그 3차전에서는 포르투갈을, 16강전에서는 이탈리아를, 8강전에서는 스페인을 만나는 지옥급 난이도를 겪어야 했다. 만약 독일 보고 이 대회의 한국과 똑같은 대진을 주고 4강에 올라가라고 하면 한국이 이뤄낸 것의 절반도 못 해냈을 것이다. 일단 16강에서 이탈리아한테 덜미를 잡혀 탈락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한국이 이탈리아 이긴 게 홈빨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게 반박하자면, 다음 대회에서 독일이 준결승에서 자기 나라에서 가장 큰 경기장인 베스트팔렌 슈타디온에 65,000명 만원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참고로 한국 vs 이탈리아전의 관중수가 38,588명이다.) 홈빨을 제대로 받았으며 2002 대한민국보다 실력에서 당연히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게 0:2로 져 결승 진출에 실패한 걸 생각해보자. 그럼 이번엔 독일 월드컵 당시 독일이 8강에서 아르헨티나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악전고투를 겪어 패배하지 않았냐고 반문하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는데, 그런 논리대로라면 한일 월드컵 당시 32강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상대편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로 진을 많이 뺀 한국도 아마 이탈리아한테 패배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더 개연성 있는 추론이다.), 설령 어렵사리 8강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다다음 대회에서 스페인에게 0:1로 덜미를 잡혀 결승 진출에 실패한 것으로 볼 때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당시 독일 대표팀이 무적함대를 꺾었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202] 튀르키예는 이 당시 유럽 예선에서 스페인을 격파하며 1954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였고 1954 월드컵 대회 9위를 기록했다.[203] 그렇다고 코스타리카가 튀르키예보다 전력상 우위에 있는 팀은 아니었다. 비록 멕시코와 미국을 제치고 1위로 월드컵 예선을 통과했다고는 하지만 튀르키예 쉬페르리그를 비롯해 유럽 유수의 여러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이 즐비했던 튀르키예에 비하면 코스타리카는 확실히 처지는 전력이 맞았다.[204] 당시 세네갈은 프랑스 - 덴마크 - 우루과이 - 스웨덴을 연속으로 만났다. 당시 스웨덴은 본선 조별리그에서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역사상 최악의 지옥의 조로 평가받는 F조를 조 1위로 뚫고 16강에 올랐으나 세네갈에게 패해 마감하였고, 튀르키예를 지역예선에서 조 2위로 밀어내고 조 1위로 통과한 팀이다.[205] 당시 한국은 폴란드 - 미국 - 포르투갈 - 이탈리아 - 스페인 - 독일을 연속으로 만났다.[206] 당시 잉글랜드와 세네갈 역시 당시 한국 못지않게 대진을 맞이한 불운을 겪었다. 특히 세네갈은 당시 피파랭킹1위 & 디펜딩챔피언 프랑스가 지네딘 지단이 부상으로 빠진점도 있다.[207] 당시 튀르키예의 대진은 32강 조별리그 1차전과 4강에서 두 차례 상대한 브라질을 제외한 나머지 5팀(코스타리카, 중국, 일본, 세네갈, 대한민국)중 세 팀이 튀르키예보다 약한 아시아 팀이었고, 세네갈과 코스타리카도 아시아 3국보다는 강하지만 튀르키예보다는 전력상 열세에 있는 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튀르키예는 그 대진운이 좋다는 브라질, 독일과 비교해도 제일 쉬운 난이도로 거저먹기 수준으로 4강까지 올라온 것이다.[208] 포르투갈은 탑시드가 아니었으며, 개최국 한국이 탑시드였다.[209] 2004-05 시즌 AC 밀란 준우승, 2008-09 시즌 FC 바르셀로나 우승 및 트레블 달성, 2012-13 시즌 FC 바이에른 뮌헨 우승 및 트레블 달성,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준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