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9:59:09

조광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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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201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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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대 감독
조광래
<colbgcolor=#250E77><colcolor=white>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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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박태하 (수석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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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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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박주영 (2011)
계약 기간 2010년 7월 21일 ~ 2011년 12월 8일
(1년 5개월 / 506일)
계약 종료 (성적 부진에 따른 경질)
연봉 5억 5000만 원 (감독 / 추정치) #
전술 스타일 티키타카
┗ 점유율 중시
3-4-3 또는 4-1-4-1 포메이션
성적 A매치 20전 12승 5무 3패 (승률 60%)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3위)[1]

1. 개요2. 취임3. 활동4. 해임5. 팀 스타일
5.1. 만화 축구
6. 언론과의 관계7. 평가8. 전적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68대 감독 조광래의 대표팀에 대해 다룬 문서.

전임 허정무 전 감독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후 감독직을 그만두었다. 그의 후임으로 조광래 전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허정무 전 감독이 남아공 월드컵이 끝나고 감독직에서 물러난뒤 차기 감독 후보 리스트에 있던 감독들이 모두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2] 이때 조광래 전 감독이 자신이 직접 대표팀 감독직 맡고 싶다고 했고 축구협회 입장에서는 자신들과는 정반대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 꺼렸지만 분위기나 시기상 조광래 전 감독밖에 없기에 맡긴 걸로 보여진다.

그리고 대한민국 축구의 암흑기가 다가올 거라고는 이때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 취임

파일:/image/076/2013/05/23/2013052401001850900150841_59_20130523155610.jpg
조광래는 취임할 때 많은 축구팬들의 환영을 받았는데 그가 비주류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대한축구협회의 주류였던 허정무에 대조되어 더 환영받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편견이다. 조광래는 청소년 시절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렸으며, 연세대-상무-화랑 팀을 거친 대표적인 엘리트 선수였다. 차범근, 허정무, 조광래는 화랑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 이들이 차례로 대표팀을 맡은 것이 우연이 아니다. 더욱이 지도자 생활도 대우-수원-안양-서울 등 당대의 명문팀만 거치다가 잠시 공백기를 갖고 경남을 맡은 것이다. 결코 비주류가 아닌 비장의 카드라고 보아야 옳다.

조광래 전 감독이 축구계 비주류로 여겨진 이유는 1993년 이후 지속된 정몽준 체제의 운영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한 일명 축구계 야당 인사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지배적이다. 2003년 베스트 일레븐 지와 인터뷰만 봐도 1990년대 후반에 스포츠신문에서 당시 조중연 축구협회 전무를 정몽준 빽으로 버틴다고 대놓고 비난했다고 밝힌 바 있다. 빡돈 조중연이 프로축구연맹에 항의하여 감독 자리에서 해임시키라고 요구했다가 축구연맹회장이 거절한 일도 있었을 지경이라고 한다. 그래서 2009년 축구협회 회장선거 당시 조중연 회장 후보도 정몽준 체제의 연장 선상이라면서 반대 후보인 허승표씨를 지지했다.[3]

다만 이 부분은 사정을 잘 모르는 네티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많은데, 예나 지금이나 축구협회 회장은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국대가 국민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았던 만큼 높으신 분들의 관심도 높았고, 그만큼 정-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이 거쳐갔다.

역대 축구협회 집행부 목록을 보면 뭥미? 소리가 절로 나는 이름들이 회장으로 나오는데 여운형, 신익희, 윤보선, 장택상 등이다. 방금 머리에 떠올린 그 전국구 정치가들이 맞다. 백번 양보해서 이 때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넘긴다손 쳐도, 1960년대 최치환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 출신인 국회의원이자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었고, 1970년대 장덕진 회장은 행시, 사시, 외무고시를 패스한 국보급 천재에다 육영수 여사의 조카와 결혼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직책이 청와대 경제 수석비서관 & 재정차관보. 그 뒤를 이은 고태진 회장은 조흥은행장, 김윤하 회장은 국회의원, 1980년대 최순영 회장은 신동아그룹 회장, 김우중 회장은 대우그룹 회장,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사람이 바로 정몽준 회장으로 현대중공업 고문이다. 참고로 정몽준의 대항마라는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은 GS그룹 허만정 회장의 아들이다. 그리고 정몽준 전 회장의 뒤를 이은 조중연 전 회장에 이르러서야 최초의 선수 출신 회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4]

저 엄청난 감투들만 봐도 알겠지만, 조중연 전 회장을 제외하면 어지간한 정재계 파워 엘리트가 아닌 이상 꿈도 꾸기 힘든 자리이다. 그리고 월드컵, 올림픽 진출, 아시안컵을 포함한 각종 대회 우승 등의 유형 무형의 실적을 내리라 기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었고, 그 기대에 못 미치는 순간 국민들의 분노와 함께 여태까지의 위상과 상관없이 대다수가 감독과 함께 냉정하게 떨려나갔다.

흔히 재야 인사로 알려진 신문선 같은 경우 김우중 시절부터 시작해서 정몽준 시절 축구협회 이사직까지 역임했고, 이용수 역시 기술위원장을 역임하며 거스 히딩크를 강력하게 쉴드[5] 바 있다. 까놓고 말하자면 아무리 언플하며 고고한 척 해봤자, 좁은 축구판에서는 정몽준 현대 계열과 허승표[6]계열 양대 라인 중 어디를 탔느냐 입장 차이일 뿐이다.

다만 조광래가 대표팀 감독으로서 동년배 감독들에 비해 순위가 한참 밀린 것은 분명한데,[7] 이는 격한 성격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전술한 김호 전 감독과 불화 에피소드에서 잘 나타나지만 뭔가 아니다 싶으면 속에 담아두지 않고 곧장 내뱉는 스타일이라 축구협회와 갈등을 빚을 소지가 다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2011년 5월 올림픽 대표팀 차출 문제를 놓고 이회택 부회장과 한바탕 붙었다.

3. 활동

3.1.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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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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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임

2011년 12월 7일, 언론을 통해 전격 경질 사실이 터져나왔다.

후임 감독은 외국파 중에서는 물 건너 J리그에서 감독직을 하고 있는 압신 고트비, 국내파 중에서는 최강희 감독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대한축구협회에서 강력하게 밀고 있는 모 감독을 대표팀에 픽업하기 위한 수순"이라는 음모론이 튀어나올 만큼 너무 급작스러운 경질이었다.

당시로서는 최강희 감독을 비롯한 국내파 감독이 감독직을 수락할 가능은 적었다. 당장 쿠웨이트전 날짜가 2월 29일, 즉 두달 반 가량밖에 남지 않은 빠듯한 스케줄인데다, 이날 패하기라도 하면 브라질행 티켓은 날라가는 중대한 시합이다. 아무리 야심만만한 인물이라도 단 한 번 패배로 감독 커리어를 통째로 말아먹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리스크를 선뜻 감수하려 할까?[8] 조광래를 경질하려면 차라리 레바논전 직후에 바로 경질했어야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쿠웨이트전을 치르기도 전인데 설령 예선 탈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3차 예선 최종전 쿠웨이트전까지는 조광래 감독 체제로 가고, 거기서 이기면 최종예선도 그냥 조광래 체제로 고대로 가고, 잘못돼서 예선탈락이라도 하면 그냥 경질하는 식으로 해서 쿠웨이트전 끝나고 나서 후임 감독을 (외국인 감독으로) 신중하게 선임해서 가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9]

그리고 어차피 최강희 감독은 굳이 대표팀 감독을 욕심낼 이유가 없었다. 이미 리그에서 일군 업적이 지대한데다 내년부터 승강제라는 스플릿 시스템으로 바뀌는 K리그에서 왕좌를 지켜내고 알 사드 SC한테 빼앗긴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왕좌를 재탈환하는 궁리만으로도 머리속이 복잡할 텐데 구태여 이 시점에서 양손의 떡을 내팽개치고 독이 든 성배를 받을 이유가 있을까? 본인도 직접 '국가대표보단 전북에 남는 걸 선호한다'고 밝힌 점을 고려할 때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였다.

음모론이 터져나온 모 감독은 논할 가치조차 없고,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고트비밖에 없는데, 옆동네 감독과 비교해 보면 축협이 그냥 미친 거다. 기왕 외국인 감독을 쓰기로 결정했다면 중장기적으로 보탬이 될 인물을 뽑는 것이 사리에 맞지 당장 중동 팀 하나 잡겠다고 중동 정보통 감독을 데려온다는 근시안적 행정이라니... 설혹 그렇게 최종예선을 통과해놓고도 본선에서는 월드 클래스 팀들을 상대하기 위해 고트비 자르고 또 새 감독을 뽑을 작정일까?

이쯤 되면 데자뷔를 느낄 지경이다. 2006년 코엘류 - 본프레레 - 아드보카트 교체와 소름끼칠 정도로 일치한다![10]

게다가 압신 고트비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에서 조광래에게 패했다. 당시 맡은 팀이 약하기라도 했냐 하면 그게 절대 아니다. 알다시피 이란은 명실상부 아시아 전통의 축구강국이다.[11]

일각에선 현재 쉬고 있는 거스 히딩크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첼시 FC 이후 행보들을 보면 히딩크 매직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으로 하락세라서 이전만한 호평을 못 듣고 있다. 오죽하면 첼시 팬들이 빌라스보아스호가 흔들릴 때조차 다시 거스 히딩크가 오는 건 좀 아니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그 동안 쌓인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넷상에선 축제 분위기이긴 하지만, 생각 깊은 팬들은 조광래보다 대한축구협회를 먼저 비판하고 있다.

아무런 대안도 비젼도 없이 그저 성적 나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짜고짜 감독 모가지부터 날리고 보는 쌍팔년도 행태와 그 처참한 결과는 약 1년 전 우리 모두 아시안컵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그때 사우디아라비아를 한껏 비웃던 이들은 왜 지금 환호하고 있는가?

물론 감독 경질은 팀을 위해 얼마든지 고려할 수 있는 수단이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경질 타이밍이 최악이다. 이제 와서 부랴부랴 새로운 감독 구한다고 명감독이 어정쩡한 금액으로 이 자리에 앉고 싶겠냐는 비판이 거셌으며, 실제 이런 일은 벌어지긴 않겠지만, 만약 국내파 감독도 외국인 감독도 모조리 감독직을 사양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고를 번복하고 조광래를 다시 불러올까, 아니면 박태하 전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승격시킬까? 정말이지 답이 없다. 게다가 박태하 전 코치도 수석코치직을 사퇴한 상태다. 그리고 실제로 상황은 점점 노답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고트비 전 감독의 경우 축구협회와 상성이 좋은 사람도 아니거니와, 여론도 일껏 데려오려는 외국인 감독이 하필 고트비냐며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한편 최강희 감독은 이미 고사한데다가 음모론의 주인공 홍명보조차도 히밤 2012 런던 올림픽 가는 것도 골치아파 죽겠는데 하는 마당. 이에 김호곤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모처럼 울산 현대를 리그 챔피언쉽 준우승으로 이끌고 구단과 팀 서포터들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니 떠날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결국 이들도 다 고사해버리면 할 사람이 없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부분은 이미 전술한 조광래 항명 파동의 여파다.

전임자 허정무 전 감독의 경우를 돌이켜보더라도 2년 넘는 재임 기간 동안 위기 상황과 여론이 등을 돌린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거스 히딩크 이후 많은 감독의 목을 날렸던 협회가 허정무만큼은 끝까지 감싸줬다. 그런데 조광래는 실드 한번 쳐주지도 않고 바로 목을 날려버렸다. 아무리 정당한 경질 사유가 있었다고 강변해 본들 이건 누가 봐도 높으신 분들과 사이가 틀어진 상태에서 한 번 실책을 저지르자 고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쳐낸 거다.[12] 현재 언론을 통해 하나둘씩 밝혀지는 전후 사정에 따르자면 역시나 절차대로 기술위원회를 거치지 않고서 높으신 분들이 모여 뚝딱 결정을 내린 밀실 행정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월드컵 탈락이란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변명을 하지만, 언론의 반응은 싸늘하기 짝이 없다. 찌라시조차 절차를 무시하고 몇몇 높으신 분들 입맛대로 대표팀 감독 모가지를 자르는 작금의 상황을 더 큰 위기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 요컨데 경질되어 마땅하지만 그 시기가 나빴다는 것. 게다가 축구협회가 다음 감독감은 김호곤밖에 없다는 떡밥을 흘리면서 처음부터 짜고 치는 고스톱 수순으로 밀실행정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들끓고 있다.

언론은 외국인 감독으로 고트비 말고도 전 잉글랜드 국대 - 맨시티 감독이었던 스벤예란 에릭손,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등을 언급하고는 있으나, 허정무의 후임으로 그 많은 해외 감독들 다 고사하고 결국 국내파 조광래를 불러온 걸 보면 실현성은 높아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인생 목표였고 지난 20년 간 꿈꿔온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의 시궁창스러운 전적 때문에 자신의 커리어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12월 9일 코칭스텝과 한데 모인 자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기술위원회가 축구협회의 고위층이나 외부의 영향력 있는 집단의 입김에 휘둘리는 존재가 된다면 한국 축구의 미래는 어둡다."라고 축협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후 축협이 코칭스텝에게 잔여 연봉 지급을 거부하자 12월 26일 선수 발탁에 외압이 있었음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어 작심한 듯 축구계의 초대형 지뢰를 밟아버렸다.

이런 먹음직한 떡밥 앞에 찌라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리고 군대 문화가 사회 깊숙이 자리한 대한민국, 더구나 상하관계 빡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체육계에서[13]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를 나이도 아닐 텐데, 말 그대로 축협은 조광래를 해고함으로써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부랴부랴 축협은 오해 드립을 시전했으나[14] 이미 조광래 해임부터 후임 최강희 선임까지 축협이 보인 행보는 지리멸렬 그 자체라 팬들은 축협 꼴이 그렇지 뭐 하는 비웃음만 흘렸다.

심지어 일부 축구팬은 '기왕 상처를 짼 김에 고름을 다 짜내자'며 조광래 VS 축협 3라운드를 고대하고 있다.[15][16]

이 후 연봉 미지급 문제는 무려 1년 넘게 질질 끌다가 2013년, 정몽규 회장이 취임한 후에야 해결이 되었다. 기사.

5. 팀 스타일

파일:xoMwdtX.jpg
패싱 플레이를 통해서 FC 바르셀로나와 비슷한 축구를 추구하고자 한다고 천명했다. 결국 월드컵 예선에서 레바논에게 실력으로 패배한 뒤 조광래 전 감독은 해임되고 말았다.

조광래호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축구의 특징이자 강점이었던 투박하지만 강한 체력으로 상대를 압박한 후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역습 및 침투를 보여주던 선 굵은 축구 색이 사라지고, 의미없는 횡패스 백패스만 주고받으면서 점유율만 높여가는 무특성 축구로 변해버렸다. 더군다나 이 때 뻥축구는 구식, 최신 문물인 티키타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언론이 억지로 대세를 만드는 바람에 제대로 크로스 올릴 줄 아는 윙백의 씨가 말라버렸다. 특히 되지도 않는 패스축구 애무메타가 유소년한테까지 마수를 뻗치는 바람에 2012년 U-19 AFC에서 우승했던 대표팀은 바로 다음 2014년, 2016년 연속해서 광탈해버렸다.

이런 무특징 축구는 신태용호 때 다시 시메오네식 4-4-2 두 줄 수비 전술로 바꾸면서 해결된다. 역습 전술에 맞는 손흥민이 대표팀 득점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지난 월드컵 우승팀에 점유율 80:20으로 내주면서 존버하다가 역관광시켜버리는 대사건을 일으키며 2010년 그리스전 이후로 또 2002년 없이 처음으로 월드컵에서 피파랭킹 1위, 디펜딩챔피언 요아힘 뢰브 감독의 독일을 상대로 2:0 승리를 이루었다. 유소년에도 좋은 영향을 미쳐서 2019 FIFA U-20 월드컵 폴란드에 나간 정정용호가 이 전술로 한국 축구계 역사상 남자 국제대회 결승에 최초로 진출하는 성과를 보였다.

이 조광래호 시절부터 슈틸리케호 시절까지는 강한 체력, 빠른 스피드, 역습 및 침투 전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강한 체력은 초반 20분 압박한 걸로 체력 다 빠져서 후반 30분만 되면 공격도 수비도 안 돼서 헤매는 조루 체력이 돼 버리고, 상대 수비수 하나를 못 제껴서 몸싸움 조금 하다 나뒹굴고 심판 바라보면서 팔 활짝 벌리는게 국대 공격수들이 매 경기 보여주는 모습이며 역습해야 할 때 의미없이 옆으로 횡패스하면서 상대 수비수들 자리잡을 때까지는 공격하지 않는 신사축구, 드리블 조금 하다가 상대 수비수 한 명 붙으면 책임전가 백패스 후 빌드업이라고 포장하는 추태가 반복되었다.

무엇보다 조광래호 전술의 핵심인 포어리베로를 찾는데 실패한것도 컸다. 기성용에게 이 포어리베로 역할을 맡기면서 3백에서 4백으로 포메이션 변화를 주었지만 끝내 이 포어리베로 역할을 제대로 할 선수를 발굴 못 한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고 벤투가 오면서 그 모습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지만 조광래호와는 다르게 공격적인 부분은 많이 개선 되어 2022년 최종 예선에서는 큰 어려움 없이 통과했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서도 성과를 보여주었다.[17]

5.1. 만화 축구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1060802672_0.jpg
그는 취임식 때 더 아름답고 세련된 축구를 하겠다고 소감을 밝히고 2010년 8월 11일 국가대표팀 감독 데뷔 경기였던 나이지리아전에서 2:1로 승리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하지만 이란과의 평가전에서는 0:1로 패배했다. 어차피 평가전은 평가전인 만큼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지만, 스페인식 패싱 게임을 하겠다는 말과는 다른 시대에 뒤쳐진 스리백 전술과 이청용 공격수 기용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10년 10월 12일 박지성이 빠진 한일전에서 득점없이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청용이 조광래의 공격전술에 대해 '머리로는 다 이해하고 있는데 경기장에서 실제로 나타내기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말그대로 만화축구. 포어 리베로 등 들고 나오는 전술들이 감독이 생각하는대로만 구현된다면 막강하지만 고도의 축구두뇌와 개인기, 조직력을 요구하는지라 실축, 그것도 국대에서 제대로 구현하기는 한없이 어려워서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충분하고 자기 입맛대로 팀을 꾸려가기 편한 프로팀 감독을 맡아오다 국가대표팀으로 옮기면서 겪는 일종의 시행착오로도 볼 수 있다.

말과 이상만 놓고 보면 스페인FC 바르셀로나의 이상적인 패스 축구를 추구하고 있지만 일단 스페인과 바르셀로나의 축구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선 선수들 개개인이 일단 1:1은 충분히 돌파할 수 있는 능력 + 유소년 클럽 시절부터 맞춰온 조직력이 맞춰줘야 하는데 현재 국대는 아무것도 안 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비단 현재 국대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통틀어도 이걸 비슷하게 흉내라도 낼만한 팀도(당연히 스페인 빼고) 없다. 심지어는 바르셀로나의 최고의 에이스인 리오넬 메시를 직접 보유한 아르헨티나조차 못하고 있는게 이 바르셀로나 축구이다. 그런데 그런 선수가 아무도 없는 한국의 실정에 이 전술은 맞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더욱이 패스워크를 통한 축구가 아닌 단순히 유럽파 선수들을 막 굴리는 경기만 이어지면서 결국 유럽파만 방전되는 결과만 낳았다.

사실 만화 축구를 말한 사람이 다름아닌 이청용이라는 것만 봐도 조광래의 전술이 얼마나 무리수인지 알 수 있다. 이청용은 어린 나이에 프로에서 활약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였고, K리그에선 명장인 세뇰 귀네슈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바로 빅리그로 직행해서 확실한 자기 자리를 잡았을 정도로 경험도 풍부한 선수였다. 그런 선수가 "만화축구"라고 말하는 것은 곧 대한민국 축구의 엘리트도 소화하기 힘든 전술이라는 말이다.

국대에서 티키타카를 사용해 재미를 본 팀은 스페인 뿐이며, 그나마도 FC 바르셀로나 + 레알 마드리드를 거의 그대로 뜯어와서 재미를 보았다는 점을 기억하자. 설령 조광래가 브라질까지 갔다 하더라도 조광래호 공무원들이 부상을 당하지 않고, 좋은 폼을 유지하고 있을 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 게다가 티키타카 전술의 유효성을 배제하더라도, 당장 일본의 스시타카는 자케로니에 의해 기초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 2010년 남아공 월드컵때 이미 '패스를 통한 점유율 축구'라는 기본틀은 잡혀 있던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자케로니가 4년 간 지도한 결과다. 결정적으로 티키타카로 메이저 대회 3연패를 거둔 스페인조차 티키타카의 파훼법이 다른 팀들에게 많이 노출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1차전에서 자기들이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긴 네덜란드에게 1:5 대패를 당한 데다 2차전에서 맞붙은 칠레 상대로도 0:2 패배를 당하며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치욕을 다른 강호들보다 훨씬 빨리 확정짓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티키타카에만 사로잡힌 축구 전술을 버리지 못한 결과, 이후에 열린 유로 2016 프랑스와 2018 러시아 월드컵 및 2022 카타르 월드컵 모두 16강 탈락을 하고 말았다.

2014년의 독일도 흔히 티키타카로 우승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펩 과르디올라바이에른 뮌헨을 거의 그대로 뜯어와서 재미를 본 것이며[18] 이마저도 별로 신통치 않아서[19] 전부터는 과르디올라의 뮌헨이 아니라 유프 하인케스 시절의 뮌헨을 모방해 속공, 역습 위주의 전술로 나갔다. 그 유명한 미네이랑의 비극 때도 볼 점유율이 더 높았던 쪽은 독일이 아니라 오히려 브라질이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전술에 대한 발상이 좋았다 하더라도, 조광래의 대표팀 선수 선발 및 운영을 보면 그 결과가 좋게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애시당초 클럽도 아니고 국가대표팀에서 주전 멤버 11명을 최대한 빨리 확정해서 그들만 가지고 월드컵까지 내내 돌리겠다는 발상 자체가 만화 같은 발상이다. 혹시 그가 중용하려 했던 해외파 선수들이 티키타카 전술을 사용하는 해외 클럽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좋은 아이디어와 허무맹랑한 공상의 차이는 발상을 현실화하고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의 유무 차이다.

국민들이 조광래의 전술을 '만화축구'라고 비아냥대었던 이유는 단순히 조광래호의 일본전, 레바논전 결과가 안 좋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FC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는 그 전술의 완성을 위해 매우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웬만한 한국 축구팬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이 '매우 많은 노력과 시간'이라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고작 티키타카 유형의 팀 소속인지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그저 최대한 빨리 해외파 위주의 주전 멤버 11명을 확정한 후 오직 이들만 매 경기 출전시킨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아냥대었던 것이다. 오히려 티키타카의 완성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는 것을 알던 한국 축구팬들이었기 때문에 조광래호에서 툭하면 일어나던 포지션 파괴를 볼 때마다 매우 당황스러워 했고, 만화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작전을 구사하려 든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여담으로 시작은 이청용의 투정으로 시작된 단어지만 의외로 조광래 본인은 그 단어를 좋아했다. 만화 같이 재미있고 아름다운 축구가 자신이 하고 싶은 축구라며 브라질에선 청용이 말대로 만화축구해야한다며 대표팀의 슬로건으로 삼았다. 기사 내용 그래서 뉴스 검색을 해보면 딱히 만화축구가 비아냥 대는 용어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그 기조와 슬로건은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이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조광래의 만화 축구"라는 칼럼까지 본인이 쓰는 둥 팬들이 어떻게 보거나 조광래 본인은 맘에 들어하는거 같다. 이래저래 조광래를 상징하는 단어임엔 분명하다. 축구 팬들도 경기력에 대해선 비판이 컸지만 그의 축구 철학에 대해서는 호평하는 여론이 많다.

시대가 흐른 뒤 조광래의 전술 중 4백의 3백화는 어느 정도 맞은 선견지명이 되었다. 2020년대 현재 4백을 쓰는 팀들은 과거 조광래호가 그랬듯이 한쪽은 공격적이고 반대쪽은 수비적인 비대칭 풀백을 쓴다. 조광래는 축구 전술의 흐름 자체는 선구적으로 읽고 있었지만,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 정작 세계 축구의 흐름에 한국 축구의 기술이 따라오지 못해 처참한 결과를 냈다. 쉽게 말해 1등을 따라가려고 1등의 기술들을 따라하다가 다리가 찢어진 꼴이다. 하지만 비록 쇼크패가 몇차례 있긴 했으나 승률 자체는 역대 국대 감독들 중에서도 상위권인 걸 보면 명과 암이 확연히 갈리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6. 언론과의 관계

직언을 꺼리지 않는 성격 덕분에 10년 넘게 스포츠 지면에서 칼럼을 연재했다. 그리고 이 무렵 칼럼에서 안 씹어댄 감독이 없다.[20] 차범근부터 베어백까지 오만가지 이유로 까였다.[21] 그야말로 축구계의 모두까기 인형. 특히 유럽의 강팀과 경기를 벌여 참패를 당하고 모든 선수들을 대상으로 주전 경쟁을 시켰던 거스 히딩크에 대한 비난이 매우 컸는데, 이는 일찌감치 베스트 일레븐을 확보해서 그들 위주로 경기를 해야 한다는 조광래의 생각이 서로 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대표팀 감독 부임 초기에는 언론과 호의적인 관계였다.[22] 이런 밀월 관계 덕분에 까여야 할 때 안 까이고 별것 아닌 결과를 내도 언론이 앞장서서 포장해주고 있었다. 당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 기록과 '아시안컵 세대교체' 덕분에 팬들이 대표팀에게 긍정적인 시선을 던지던 때라 언론 역시 이런 논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삿포로 참사 이후 팬들의 신뢰를 크게 잃었고, 이동국 기용 논란이나 손흥민 파동, 해외파 중시, 들쭉날쭉한 경기력 등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오면서 언론에서도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경기 며칠 전에 언론을 상대로 스타팅 명단, 전술을 모두 까발리고 시작한다는 거다. 물론 언론이야 기사거리가 되니까 좋다하고 취재해가지만 이건 전술을 감추고 시작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천명하는 셈이 된다.[23][24]

그리고 대망의 2011년 11월 15일. 레바논에게 완패를 당한 이후 그나마 남아있던 호의적인 언론과 전문가 역시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조광래 본인은 선수 탓, 심판 탓, 잔디 탓을 하고 있다. 차라리 레이저 탓을 하면 조금이나마 낫지만[25] 그나마 레바논 관중들의 레이저쇼라든가 관중난입 같은 실드거리가 있지만, 레이저 빼곤 경기력, 선수 운영, 전술 모든 면에서 레바논에게 완패했으니 까여도 할 말이 없다.

충격적 패배라 조광래 전 감독 본인을 겨냥한 노골적인 기사들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비뚤어졌다' 라는 말까지 나오니...
조광래 전 감독, 선수들 ‘힘’ 빼기 명수?
김정우는 왜 없나, 조광래호의 비뚤어진 시각

그리고 이제는 부상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기성용을 무리하게 차출시킨 건에 대해서 셀틱의 레논 전 감독이 불만을 토로하기까지 했다. # 선덜랜드의 브루스 전 감독도 조광래의 지동원 관련 발언에 대해서 한 마디를 하기도 했고. # 국가대표팀과 클럽 간의 선수 차출에 관한 잡읍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지만, 보통 국가대표팀으로 차출된 선수가 부상당해 돌아와서 생기는 잡음이 대부분이지, 부상중인 선수를 차출시켜 잡음이 생기는 상식 미만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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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기 시작한 한국 축구
다시 한 번 한국인 감독으로서 경남 FC에서 일명 경남 유치원 등을 이끌며 그 지도력을 인정받은 조광래 전 감독의 선임 당시 누리꾼들의 반응은 대부분이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경남이 갑작스럽게 지도자를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가진 K리그 팬들도 꽤 있었다.

국내파 감독 허정무를 선임하여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호성적을 보자마자 곧바로 이 정도면 앞으로는 한국인 감독으로 충분하다며 협회에서 외국인 감독을 후보에서 아예 배제해 버렸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고, 이는 결국 2010년대 대한민국 축구의 암흑기를 연 신호탄이 되었다.

당시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에서 조광래박지성이청용으로 대표되는 대표팀의 윙어 라인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박지성은 대회에서 일본전 패널티킥 유도를 제외하면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다. 박지성의 이번 대회 활약상들 중 모두의 뇌리 속에 인상깊게 남은 장면은 아마도 이란전 연장 막판에 역습 저지를 위해 슬라이딩 태클을 날리던 장면일 것이다. 수비 가담과 헌신은 빛났지만 불과 6개월 전 남아공 월드컵에서 보여줬던 수준의 파괴력과 임팩트는 보여주지 못했다. 이청용 또한 활발하게 공격 가담을 하며 2골을 만들어내고 슈팅을 많이 하던 남아공 월드컵 때와는 다르게 잘 보이지 않았다. 득점은 주로 구자철 - 지동원을 비롯한 중앙 라인으로 집중되었고, 이들이 이란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상위 토너먼트 수준의 팀들에게 봉쇄당하자 대표팀은 힘든 경기를 해야만 했다. 당시 박주영이 부상으로 빠진 상황에서 어느 정도 고육지책의 성격이 짙긴 했지만, 이 대회에서 보여준 대표팀의 측면 공격 실종은 이후 조광래호의 발목을 계속 잡게 된다. 특히나 현대 축구에서 측면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이는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26]

박지성이 은퇴한 직후에는 박주영의 폼이 멀쩡했던 덕분에 중앙에서 공격수가 볼을 잡아주며 침투할 시간을 벌고 그 틈을 타서 침투한 측면을 이용한 공격이 어느 정도 살아나기는 했었다. 그 와중에 마무리까지 박주영이 담당했었고, 일단 초반에는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조광래호 초반 각종 평가전 및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초반 몇경기에서 골폭풍을 몰아치던 AS 모나코 FC 시절 후반 ~ 아스날 FC 이적 직후의 박주영은 딱 이 때의 모습이다. 그러나 박주영은 아스날에서 자리를 잡는데 실패하며 폼이 점점 떨어졌고, 또 이 시점에서 이청용은 이미 장기 부상으로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구자철도 이적 이후 VfL 볼프스부르크에서 주전 경쟁에서 탈락하며 폼이 안 좋아진 상태. 조광래호가 침몰하기 직전의 박주영은 그래도 골을 넣어주며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골이라도 해 주던 박주영이 경고 누적으로 단 한 경기 결장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조광래 해임의 결정타가 된 레바논 원정이었다.

결국 해외파들의 총출동에도 불구하고 레바논 원정에서 1:2로 패배한 레바논 쇼크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쿠웨이트와의 마지막 경기 결과에 따라 최종예선 진출 여부가 결정되는 벼랑 끝에 선 상황이 되었고, 결국 조광래 전 감독은 한달 후 전격 해고되었다.[27]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최강희호에 힘겨웠던 본선 진출이나 홍명보호의 본선에서의 삽질로 인해 재평가하는 여론과 조광래가 최소 월드컵까지는 맡았어야 한다는 말 역시 나오기도 했다. 특히 '그나마 만화축구가 보는 재미는 있었다', '전술 완성에 시간만 더 주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거다', '만일 최강희가 아니라 조광래였으면 본선 진출에 크게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축협이 끈기가 없어도 너무 없다' 등의 여론들이 꽤 있는 편이지만...

아무리 "보는 재미"가 중요해도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 본선 진출이라는 성과에 우선하지는 못하며, 차라리 일관적인 늪축구로 가더라도 안정적으로 승점을 확보하고 최종예선과 본선에 진출해야 본격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조광래호 정도면 충분히 "시간"이 주어진 편이었고, 선수 선발, 운용 면에서 자신의 뜻대로 관철을 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본선까지 내다볼 처지였다면 레바논 쇼크는 일어나지도 않았거나 혹 일어나더라도 최종예선 진출에 악영향을 크게 미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종예선도 못 가고 떨어질 위기에 처했었고, 그로 인해 경질되었기 때문에 이 주장은 통하지 않는다.

다만 "조광래가 크게 잘못하고 있지만, 최종 예선도 못 가고 탈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쿠웨이트전까지는 무조건 조광래호에게 맡기고, 어찌어찌 해서 탈락하지 않고 통과한다면 중도에 감독을 교체하려고 해도 맡으려고 할 인물도 없었고, 감독을 새로 영입한다고 해서 팀 성적과 경기력이 무조건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래도 최종 예선까지는 조광래에게 맡기는 식으로 갔어야 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그나마 이 보는 재미라는 것도 결국은 삿포로 참사를 기점으로 사라져버려서 아시아 2차예선에서는 슈틸리케호, 최강희호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는 역대 최악의 경기력을 선보인다.

아시아 예선 최악의 경기력 그 중심에는 구자철이 있었는데,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2012 런던 올림픽 남자 축구 이후 자신감이 너무 과다하게 붙은 탓인지 혹은 감독의 전술 탓인지 이 시기 대표팀에서의 구자철은 중원에서 패스 타이밍에 팽이만 돌리며 볼을 질질 끌거나 그나마 패스를 해도 끔찍한 정확도를 자랑하며 대단히 답답한 플레이를 선보이던 시기이다.[28]

조광래호의 중원의 핵심 역할을 해 줘야 할 구자철부터가 이러니 경기는 제대로 풀릴 리가 만무했고, 감독은 선수가 부진하든 말든 무한 신뢰만 보내며 경쟁 선수들의 사기에 영향을 미치며 경쟁 체제가 무너지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대표팀 선수를 국내파 vs 해외파 구도로 나누게 한 장본인이 바로 조광래이다. 인터뷰에서도 대놓고 "해외파에게 상처를 주어선 안 된다."라고 하던가, 아스날 FC의 벤치만 달구면서 경기 감각이 떨어진 박주영을 계속 기용한다든가, 이청용이 부상으로 아웃되어서 소속팀인 볼턴 원더러스 FC에서 대표팀 차출이 안 된다 하는데도, 조광래 본인이 확인하겠다는 등의 해외파 편애가 지나치게 심했다. 본인은 국내파들이 해외파들의 속도를 못 따라잡는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J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도 해외파로 분류하는 것을 보면 핑계에 불과하다. 게다가 경기 전에 언론에다 대놓고 선발 라인업, 전술 등을 미리 공개하는 행위라던가, 폴란드와의 평가전에서 교체 인원 초과로 A매치 인정을 못 받게 하는 등 이해 못할 엽기적인 짓거리를 상당히 많이 했다. 이래놓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이후 베스트 일레븐 인터뷰에서 "나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었더라면..."이라고 변명하기도 했다. 관련 링크.

그래도 단순히 전술만 보면 히딩크호 이후 최고의 전술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애초에 저 전술은 티키타카 따라하기로, 정교한 세부전술과 압박이 가능한 전성기 FC 바르셀로나가 아니면 수행하기 힘든 전술이고[29], 바르셀로나 구단급의 선수 수급이 불가능한 한국에겐 더더욱 현실성이 제로였다. 말 그대로 만화 축구였던 셈이었고, 실제로 조광래의 전술을 월드컵에 고대로 갖고 간 한국의 홍명보호가 처참한 결말만 갖고 오게 된다.[30]

분명히 클럽 감독으로서 나름대로 선수 보는 안목을 가졌고, 전술면에서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축구철학과 색깔이 또렷했고, 클럽을 꾸려나가는 능력도 있었다. 허정무 감독의 후임으로 뽑힐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소고집이 발목을 잡아버렸다.[31]

프로스포츠에서 감독 개인의 정치력 또한 무시 못할 요소이다. 그런데 조광래는 선수 차출을 놓고 타협 대신 항명을 선택하며 축구협회 내에서 입지를 스스로 좁혀버렸다.[32] 뿐만 아니라 '대표팀 감독이 인터뷰를 할 때 협회의 사전 통제를 받아야 하나'고 디스를 걸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감독 재량권의 확대가 아니라 때에 따라 적절히 포장하고 쉴드를 쳐줄 축구협회 홍보부와 척을 지면서 진심이든 오해든 모든 발언에 대한 뒷감당은 감독 혼자 한다는 결과로 이어졌다.

가장 아쉬운 점은 만화축구로 대변되는 전술 변화 자체는 얼마든지 시도해볼 만한 조치였으나, 문제는 전술에 선수를 맞추는 과정에서 터져나온 불협화음을 적절히 다독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소통'을 중시하는 요즘 세대에게 무작정 본인 말대로만 하라는 식의 태도가 씨알머리도 먹힐 리가 없다. 이는 본질적으로 전술적인 문제인 3-4-3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3-4-3은 철저하게 압박을 중시하고 라인을 유지하는 전술이다. 측면 공격수가 단순한 공격이 아닌 수비에도 가담해야 하며 이들의 압박이 느슨해질 경우 미드필더 진영까지 올라온 윙백들이 공간을 커버해야하기 때문에 측면 수비 공간을 쉽게 노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까지 미드필더의 핵심이었던 김정우를 제외하고 마킹과 커버링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활동량이 높은 이용래를 중용하였으나, 높은 활동량에도 불구하고 수비적 불안정을 잡는데 실패했다. 현실적인 측면을 봤을 때 기량이 좋은 선수에게 3-4-3을 끼워 맞춘다는 목표도 실패라고 할 수 있다. AS 모나코에서 1선에서 볼 경합을 위해 빌드업을 했던 박주영에게는 측면에서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중앙으로 침투하는 민첩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며 움직임과 미드필더 간의 조율이나 사이드로 빠져서 정교한 크로스를 시도하는 사이드플레이어 이청용에게 강한 슈팅력을 요구하는 것은 이청용이 클럽팀에서 의도적으로 빌드업을 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측면 공격수에게 특성에 안맞는 옷을 입히려 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파괴력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아시안컵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재미를 봤었던 구자철에게 트레콰르티스타를 넣어 공격 가담을 활발하게 하려고 시도했으나 이는 플렛 형태로 간격을 유지하며 압박에 참여해야하는 중앙 미드필더를 가지고 공격형 미드필더를 넣어버려 수비시 빌드업에 부담을 크게 주게 되었고 구자철이 공격진으로 나간만큼의 공간 커버는 이용래에게 부담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전술적으로 잡음이 많았던 다른 감독들의 예를 들자면 안드레 빌라스보아스는 그래도 클럽 감독이었기 때문에 단기간 내에 팀을 맞춰나갈 수가 있었고, 리그 뉴캐슬전이나 챔스 최종전 발렌시아와 경기에서 준비된 감독으로서 진가를 확실히 보여줬다. 또한 마르셀로 비엘사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아 자신의 축구철학을 고집하며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전술을 들고 나왔지만 결국 성적으로 모든 비난을 잠재웠다.

그러나 조광래는 그럴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광래는 대표팀을 이끌고 있었다. 한정된 시간과 선수자원을 가지고 어떻게든 성적을 내야만 하는 위치였다. 때문에 선수들을 달래고 추스르며 함께 발맞춰서 가야 했는데, 끝내 소통 부재로 팀이 구심점 없이 흩어져버렸다. 축협의 매끄럽지 못한 감독 선임 과정과 임명 시점도 짐으로 작용했는데, 아시안컵을 목전에 두고 감독직을 맡으면서 아시안컵 성적+세대교체+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아주 어중간한 목표를 가진 팀을 꾸려야 했다.[33]

갑작스런 해임이 있던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레바논전의 패배가 결정타였다. 다음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패하면 한국은 꼼짝없이 월드컵이고 뭐고 없어지는 상황이었다. 아시아 최종예선도 아니고 3차 예선에서 한국의 월드컵이 끝날지도 모르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패배의 책임은 누가 뭐래도 일차적으로 감독에게 있다. 그런데 조광래 스스로는 해임 원인에 대해 레바논전 패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중연 축협 회장의 재선 문제만 원인이라고 들먹이고 있다. 절차상의 하자는 분명히 언급할만 하더라도 스스로 레바논전 패배의 책임을 우선 거론해야 되는 것이 순서 아닐까? 조광래는 예전부터 패전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 게다가 '대표팀이 목표했던 팀으로 완성단계에 있었기에 중도하차의 아쉬움은 너무 크다'는 발언을 하면서 거의 누리꾼에게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훗날 인터뷰 영상이 인터넷에 흘러나오면서 밝혀졌지만 몇몇 찌라시의 왜곡으로 밝혀졌다. 당시 조광래의 발언은 '완성되기 전에 중도하차'라는 시시껄렁한 퇴임사였는데, 이걸 완성단계라는 식으로 써버렸기 때문에 앞뒤 맥락이 엉뚱하게 바뀌었다.[34]

짧게 요약하자면 조광래 개인의 결함과 축협의 전근대적인 행정이 맞물려 벌어진 당연하지만 씁쓸한 결과였으며, 이것이 한국 월드컵 예선에 있어서 호재가 결코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감독 해임으로 인한 충격 및 혼란으로 탈락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대한민국 축구는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지대한 타격을 입는다는 사실을 높으신 분들은 제대로 인지하고 있기나 한 것일까? 조광래 한 사람 희생양으로 삼아 어영부영 넘길 수 있으리라 믿는다면 그냥 뇌가 없는 거다.

허나 그 상세를 추측해 보자면 높으신 분들부터가 지금 모양새가 엉망진창인 건 알텐데, 만약 조광래가 공정한 절차 운운하기 전에 본인부터 유화적인 제스처라든가, 남의 말을 듣는 태도, 상식적인 선에서의 행동거지를 보였다면 아무 말 없이 경질하기 이전에 먼저 형식적인 소통의 의사라도 타전해 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조광래가 극단적인 강수나 외통수를 즐겨 쓴다는 건 뭐 본인이 전술이나 선수 선발 및 교체 등으로도 여실히 증명하고 있지만 이회택과의 대립에서도 잘 드러난다. 선수 차출 문제로 불거진 이회택과의 대립 과정을 보자면 이회택의 입장에선 밀실회담 쯤으로 익스큐즈를 하고 임했을 터이지만 조광래는 이회택의 이야기를 듣고 대뜸 테이블을 엎고 나가며 기자들 불러서 모든 사실을 까발리는 극단적인 언플을 시전했다. 훌륭한 언플 능력이다. 다만 조광래는 정몽준 라인이 아니라 허승표 라인이고, 국대 감독 취임 후에도 여권의 정몽준 라인과는 뜸하단 걸 고려하면 문제가 있다. 또한 두 번째 문제가 있는데, 한 방에 조광래를 바보로 전락시켜버린 장본인이 바로 이회택이다. 그는 국축 레전드이자 조광래에게 있어서는 대선배인데, 대놓고 조져서 축구계 퇴물로 만들어 버렸다. 거기다 이회택이 여권 내에서 나름대로 조광래의 감독 발탁에 기여한 친조광래파라는 것까지 고려하면 정말 심각한 문제다.

이 정도쯤 되면 목표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암묵적 룰을 깨부수고 극단적인 수를 쓸 인물이란 걸 과시한 꼴이다. 선배고 레전드고 뭐고 없고 여권 내에서 본인 편이고 뭐고 없다. 이쯤 되면 본인 심기를 거스르면 나는 뭘 할 지 모른다고 축협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친 격이다. 또한 이쯤 되면 어설프게 달래거나 토론해 보려다 자극해서 화를 부르기보단 차라리 한 방에 목을 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결론이 아니었을까? 솔직히 이 부분은 나는 시간을 주거나 눈치를 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니 스스로 소통 없이 절차 없이 잘라달라고 탄원한 거나 다름없다.

이랬으면서 어이없게도 본인이 암흑기와 분열을 일으킨 장본인이면서도 "예선에서 1패했다고 대표팀 감독에서 짤린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라며 2014 브라질 월드컵 실패를 자신의 책임은 인정 안 하고 불만만 실컷 터트렸다. 근데 2003년 ~ 2004년 국대 감독이던 움베르투 코엘류는 약체 몰디브 상대로 1무로 승점 1점을 빼앗껴서 짤렸다. 더구나 이 당시 몰디브의 FIFA 랭킹은 142위였고, 2011년 조광래를 이기던 당시 레바논의 피파 랭킹은 146위였다. 거기다 이 때에 조광래는 코엘류의 지도 스타일이나 성격이 한국팀과 맞지 않고 감독한지 1년이 지났는데 선수 파악도 못 했다면서 협회에서 손을 써야 한다고 비판했다. 더구나 이 당시에 코엘류 전 감독이 개인기를 중시한다며 유럽이나 남미에 비해 기술이 처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랬던 사람이 현실도 모르고 베스트 일레븐이나 짜서 대한민국 축구 현실에 맞지도 않은 티키타카를 하려고 했고, 그러다가 일본에게 대차게 패했다. 그야말로 남에게는 가혹하면서 본인에게는 너그러운 전형적인 소인배 같은 행실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설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절차의 부재는 개선해야 할 점이다. 선수 차출에 대한 감독의 전권과 더불어 오래도록 관행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낙후한 축구 행정이 대중에게 부각된 점은 조광래가 감독하면서 남긴 업적 중의 하나일 것이다.

8. 전적

경기수 득점 실점 승률[35]
20 12 5 3 37 8 60%
[공식 A매치로 취급되지 않는 폴란드전의 전적을 포함하고 계산할 시]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cd313a><tablebgcolor=#cd313a><width=15%> 경기수 ||<width=14%> ||<width=14%> ||<width=14%> ||<width=14%> 득점 ||<width=14%> 실점 ||<width=15%> 승률[36] ||
21 12 6 3 39 10 57.1%
일시 / 장소 상대팀 결과 대회 득점 비고
2010년
2010년 8월 11일
(수원)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나이지리아
2 : 1
친선 경기 윤빛가람, 최효진
2010년 9월 7일
(서울)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0 : 1
2010년 10월 12일
(서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0 : 0
2010년 12월 30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파일:시리아 국기.svg
시리아
1 : 0
지동원
2011년
2011년 1월 10일
(카타르, 도하)
파일:바레인 국기.svg
바레인
2 : 1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16강 본선 조별리그 C조
구자철(2골)
2011년 1월 14일
(카타르, 도하)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1 : 1
구자철
2011년 1월 18일
(카타르, 도하)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4 : 1
지동원(2골),
구자철, 손흥민
2011년 1월 22일
(카타르, 도하)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1 : 0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8강
윤빛가람
2011년 1월 25일
(카타르, 도하)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2 : 2
(PSO 0:3)
[37]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준결승
기성용, 황재원
2011년 1월 28일
(카타르, 도하)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우즈베키스탄
3 : 2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3·4위전
구자철,
지동원(2골)
대회 3위
[38]
2011년 2월 9일
(터키, 트라브존)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0 : 0
친선 경기
2011년 3월 25일
(서울)
파일:온두라스 국기.svg
온두라스
4 : 0
이정수, 김정우,
박주영, 이근호
2011년 6월 3일
(서울)
파일:세르비아 국기.svg
세르비아
2 : 1
박주영, 김영권
2011년 6월 7일
(전주)
파일:가나 국기.svg
가나
2 : 1
지동원, 구자철
2011년 8월 10일
(일본, 삿포로)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0 : 3
삿포로 참사
2011년 9월 2일
(고양)
파일:레바논 국기.svg
레바논
6 : 0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박주영(3골),
지동원(2골),
김정우
2011년 9월 6일
(쿠웨이트, 쿠웨이트 시티)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쿠웨이트
1 : 1
박주영
<rowcolor=#000000> 2011년 10월 7일
(서울)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2 : 2
친선 경기 박주영(2골) [39]
2011년 10월 11일
(수원)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아랍에미리트
2 : 1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박주영,
함단 알 카말리(OG)
2011년 11월 11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아랍에미리트
2 : 0
이근호, 박주영
2011년 11월 15일
(레바논, 베이루트)
파일:레바논 국기.svg
레바논
1 : 2
구자철 레바논 쇼크
대표팀 감독으로 있는 동안 패배는 단 3번에 불과하지만, 그 세 번의 패배 중 두 번의 패배가 하필이면 너무나도 임팩트가 큰 레바논 쇼크삿포로 참사인지라 결국 조광래 전 감독은 대한민국 축구 팬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기 힘들게 되었다.

이 두번의 경기만 가지고 지나치게 일찍 경질한거 아니냐는 동정론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레바논 충격패로 벌써부터 경우의 수를 따지게 만들 정도로 월드컵 아시아 예선 탈락 진출 실패 위기로 몰았다.

[1] 16개 진출팀 중 3위 기록.[2] 외국인 감독은 차기 감독 후보에서 처음부터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3] 이들의 다툼을 뿌리깊은 연고대학교 학맥 다툼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조중연은 고려대학교 출신이고, 보통 그 반대에 섰던 허승표, 신문선, 조광래가 연세대 출신이다. 다만 실제로 조중연과 가까운 인사 중 이회택, 황보관 등은 고려대 출신이 아닌 점을 두고 볼 때는 지나치게 단순한 프레임이다. 이것은 親조중연 인사인 허정무(연세대학교)와 위명에 비해 축협에서 야인취급 받는 차범근(고려대학교)의 경우를 봐도 학맥과는 무관함을 알 수 있다.[4] 엄밀히 말하면 1990년대에 이종환 회장이 선수 출신으로서 축구협회 회장을 맡긴 했지만 약 4개월간의 회장직 대행이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는 조중연 전 회장을 최초의 선수 출신 회장으로 지칭한다.[5] 사실 2002년 이전까진 거스 히딩크에게 명줄을 맡긴 공동운명체였지만, 4강 신화 이후 논공행상를 하는 과정에서 섭섭한 대우를 받았다고 정몽준과 결별했다.[6] GS에서는 허승표와 선을 그은 상태다.[7] 순위가 밀렸단 말에 대해선 반론의 여지가 있다. 그는 이미 1992년에 대표팀 코치를 맡았었다. 위의 스태프 커리어 표 참조. 여기도 같이 참고. 이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은 김호 전 감독이었다.[8] 최강희 감독이 결국 어쩔 수 없이 떠맡았지만, 조광래 때문에 감독 커리어를 통째로 망칠 뻔했다. 관련 기사 참고.[9] 당장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에도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도 아직 안 했고 끝나지도 않았는 와중에 차범근을 자른 게 절대로 잘한 게 아니라는 비판적 의견이 있다. 당시 차범근의 경질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차라리 3전 전패를 하더라도 이왕에 조별리그는 다 치르게 하고 나서 해임시키든지 어쩌든지 했어야 했다는 거다.[10] 아시아 예선에서 부진 → 아시아 사정에 빠삭한 감독 선임 → 최종예선은 통과했지만 팀은 부진 중 → 유럽통 새 감독을 뽑긴 했지만 여전히 팀은 개판 5분 전.[11] 고트비의 2011 카타르 아시안컵 이전의 커리어를 보면 이란 프로축구팀 감독 시절(2007 - 2008년 시즌 페르세폴리스 우승)도 그렇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예선 때도 한국에 패하지 않았고 안타깝게 예선에서 탈락하며 남아공은 결국은 못 가게 됐지만, 전임자 알리 다에이에 비하면 그렇게 나쁘진 않았으며, 2011 카타르 아시안컵 본선 전 2010년 하반기에 조광래 전 감독의 한국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선 승리도 했고, 2011년 아시안컵 챔피언 먹고 더 나아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16강까지 생각했던 것 같은데, 2011 카타르 아시안컵 8강전에서 윤빛가람의 한 방이 좀 임팩트가 컸다.[12] 기간이 짧아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아시안컵 이후에도 경질되지 않았고, 한일전 대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에서 다소 한계가 있는 논리였으며, 무엇보다 허정무 감독은 월드컵 예선은 무난히 통과했다.[13] 대표팀 감독 취임을 한사코 거부하던 최강희 감독도 결국 대선배이자 은사인 조중연 협회장이 나서자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14] 비록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미 축빠들은 어느 선수인지 대충 감 잡은 상태다. 그 선수가 맞다면 분명히 현 상황에서 한번쯤 추천할 만한 좋은 선수지만, 문제는 뒤에는 이회택이 있었다는 거다.[15] 한 가지 상기해야 할 점은 선수단 운용에서 조광래는 본인이 운용하고자 하는 바를 거의 이뤄냈다는 거다. 주축 선수들을 국대로 대부분 빼앗긴 홍명보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오히려 해야 할 말 같지만, 게다가 그렇게 뽑은 선수단도 해외파 중용에 만화축구로 불리는 전술로 제대로 된 선수단 역량도 뽑아내지 못했다.[16] 혹자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차범근 감독을 벤치마킹한다는 비아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때는 적어도 예선만큼은 쉽게 통과해서 본선에서 잔뜩 기대했다가 멕시코전의 역전패와 그 분네덜란드전 참패 때문에 경질된 경우다.[17] 애초에 벤투호랑은 비교가 실례인 게 빌드업을 전개할 때 디테일적인 측면에서는 비교 불가였고, 필요에 따라 롱패스도 과감하게 활용하는 등 어느 정도의 유연성은 갖추고 있었다. 일례로 2022년의 최종 예선 7차전 레바논과의 경기는 잔디가 레바논 쇼크 때보다 더 심한 수준이었는데, 과감하게 롱볼 축구를 꺼내들어서 조규성의 결승골로 승리를 거뒀다. 조광래급 경직성이었다면 분명 레바논 쇼크 시즌2가 되었을 것이다.[18] 실제 당시 독일 국대 구성원 대부분이 바이에른 뮌헨 소속이었다.[19] 사실 과르디올라가 감독이었던 2013-2014 시즌부터 2015-2016 시즌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에서는 항상 1등에 DFB-포칼도 2014-2015 시즌을 제외하고는 우승하면서 더블까지 기록했으나, 챔피언스리그에서는 4강전에서 스페인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 바르샤, ATM에게 발목을 잡히고 탈락했었다.[20] 특히 10년 가까이 스포츠 조선에서 연재했던 '조광래의 눈' 시리즈의 칼럼은 지금 본다면 성지에 가까운 언행 불일치를 보일 정도. 납득하기 힘든 선수-선발 전술베어벡의 책임 떠넘기기[21] 안티들에 의하면 베어백을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로 취급해서 2007년에 국대 차출 거부를 주도했다고 한다.[22] 2012 런던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지역 예선 통과를 다룬 공간과 압박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보면 축구 대표팀 소집 훈련을 위해 파주 트레이닝 센터에 조광래 전 감독이 들어설 때 사진을 찍던 기자들이 조광래 전 감독이 따봉을 하자 "오오~"하고 환호하고 이어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조광래 전 감독도 "여기서 보네."하고 말을 건네는 화기애애하고 훈훈한 모습이 나온다.[23] 이 부분은 약간 다르게 생각할 부분이 있긴 한 것이, 차라리 전술을 밝힌 뒤 상대팀의 대응에 따라 다른 대응법을 쌓아 나가는 것 역시도 하나의 방법이다.[24] 하지만 꼼수도 한 번 두 번이지 남들 안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특정 캐릭터나 덱스를 미리 사용한다고 심리전을 걸고 그게 성공했다 해도 어차피 특정되어버린 이상 이후 취할 만한 행동은 몇 개 정해져 있고 본인의 패턴을 적에게 보여 준다면 현재 벤투호는 경기전에 스타팅 포메이션을 깔 이유가 없다며 아예 스타팅 멤버 공개하는 걸 나열식으로 바꾼걸 생각해보자.[25] 차라리 레이저 문제를 걸고 넘어졌으면 레바논 축구협회로 하여금 벌금이라도 물리게 할 수 있었다.[26] 전성기의 FC 바르셀로나도 결국 측면 자원들의 침투를 통해서 득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중원에서의 점유도 점유지만 결국 공격의 마무리는 측면 자원들이 아이솔레이션을 통해 형성된 빈 공간으로 침투하고 그것을 넓은 시야로 캐치한 중앙 미드필더들이 스루패스를 찔러넣어 그 패스를 받은 측면 공격수들이 결정적인 패스를 하거나 슛을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조광래호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매우 부족했다. 중앙에서의 점유를 시도하지만 점유가 측면 자원의 침투를 통한 공격의 마무리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27] 2011년 여름에 일본에게 0:3으로 완패한 삿포로 참사는 친선경기로, 이 경기도 물론 많은 비판을 받긴 했지만, 친선경기라서 최종 예선 진출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여론이 나빠지긴 했어도 아무래도 친선경기이기도 하고 선수들이 공에 강타당해 교체 카드를 낭비하게 된 문제도 있어서 일단은 지켜보자는 분위기도 컸지만...[28] 그나마 공격 시 거의 스트라이커마냥 전방에 올리는 기용법 덕분인지 패널티박스 안에 짱박혀 있는 시간이 길어 뜬금골은 자주 넣어주었다. 덕분에 중원 공미가 사라져 볼운반이 안 되는 지경이었지만, 어차피 그 당시 구자철은 중원에 있어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으니...[29] 애초에 바르샤에서도 전술 창시자 펩 과르디올라가 떠나고 핵심 멤버였던 차비 에르난데스가 노쇠화되자 카운터 전술을 들고온 바이에른 뮌헨에 합산 스코어 7:0으로 털린다.[30] 전술 자체만 놓고 보면 최고의 전술이라는 판단 자체도 좀 이상한 것이, 축구는 이기는 것이 목적인 스포츠이며, 감독마다 그리는 어떤 이상향은 있을지 몰라도 모든 축구를 통틀어서 단 하나의 최고의 전술 같은 것은 없다. 최고의 전술은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상대와 아군의 상황에 맞춰서 가장 잘 이길 수 있도록 판을 짜는 것이 최고의 전술이지 기술적이거나 예술적인 미학 같은 것은 별 상관이 없다. 몇몇 감독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지만, 멋있는 전술을 역량이 모자라서 안 하는 감독도 물론 있겠지만, 모든 감독들이 멋있는 전술을 할 역량이 없어서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31] 양날의 검이다. 히딩크 감독 역시도 고집이 센 사람이었지만, 결국 본인 뜻대로 팀을 잘 조련해서 매우 성공적으로 월드컵을 마쳤다. 즉, 고집대로 밀어붙여서 성공하면 소신과 뚝심이지만, 실패하면 아집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으며, 2002년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포백 시스템을 정착시키려다 결국 포기하고 스리백으로 원상복귀했던 점을 떠올려보자. 클럽과 달리 대표팀은 정해진 짧은 기간 안에 일정한 성적을 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이상과 철학도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타협과 궤도 수정이 불가피한데, 조광래는 끝내 이를 거부했다.[32] 더러운 현실이지만 까놓고 말해보자. 동년배 감독들이 이미 각급 대표팀 가운데 한두 군데는 거쳐갈 때 조광래는 1992년에 국가대표팀 코치를 잠시 맡은 시절을 제외하고는 자칫 리그만 맴돌던 쩌리가 될 뻔한 것을 높으신 분이 파격적으로 간택한 셈인데, 조광래는 대놓고 항명했다.[33] 허정무 전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놓을 때 넷상에서도 '아시안컵까진 2010 남아공 월드컵 멤버 그대로 가고 이후 새 감독이 새 팀을 꾸려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축협은 허정무 전 감독의 결심을 돌리지 못했고, 이후 되도 않은 언플을 벌이다가 뜬금없이 조광래 카드를 내밀어서 다양한 감독의 하마평을 올리던 누리꾼에게 모조리 함정카드를 먹였다.[34] 당일 언론 보도를 한데 모아 비교해보면 분명이 드러난다. '완성되기 전에'라고 보도한 언론도 상당수 있었지만, 이미 네티즌에게 평생까임권을 받은 인물이었다.[35] 축구야구와 달리 무승부를 분모에 산입 계산해서, 무승부는 승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승률 문서 참조 바람.[36] 축구야구와 달리 무승부를 분모에 산입 계산해서, 무승부는 승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승률 문서 참조 바람.[37] 승부차기 기록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무승부로 취급된다.[38] 차기 대회 자동출전권 획득[39] 이 경기는 조광래 감독이 선수 교체를 FIFA 규정에서 정하는 6명을 초과하여 교체하는 바람에 비공식 A매치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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