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09:59:21

조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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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생 대한민국의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조중연(193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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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연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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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조중연.jpg
<colbgcolor=#eeeeee,#222><colcolor=#000000,#e5e5e5> 이름 조중연
趙重衍 | Cho Chung-Yun
출생 1946년 1월 18일 ([age(1946-01-18)]세)
충청북도 보은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중동중학교 (졸업)
중동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 65 / 학사)
가족 아내 박선숙, 슬하 2남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eee,#222><colcolor=#000000,#e5e5e5> 선수 산업은행 축구단 (1969~1974)
해병대 축구단 (1970~1972 / 군 복무)
지도자 고려대학교 축구부 (1973~1974 / 코치)
현대 호랑이 (1983~1986 / 코치)
현대 호랑이 (1986 / 감독 대행)
현대 호랑이 (1987)
중동고등학교 축구부 (1989~1994)
행정가 대한축구협회 (1998~2003 / 기술위원)
대한축구협회 (2004~2008 / 부회장)
대한축구협회 (2009~2013 / 회장)
동아시아 축구 연맹 (2011~2013 / 회장)

1. 개요2. 선수3. 지도자4. 해설가5. 행정가6. 대한축구협회 회장
6.1. 공적6.2. 실책
7. 평가8. 논란
8.1. 배임 연루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대한축구협회 회장(제51대)을 맡았다.

2. 선수

선수로는 그렇게 부각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중동중 시절 처음 축구에 입문한 그는 당대 명문인 고려대학교 축구부에 스카우트되었고 청소년 대표에 선발된 적은 있으나 그 정도가 내세울만한 경력이다. 당시 산업은행 축구단도 대통령배를 우승하는 등 나름대로 잘 나가는 팀이긴 했지만 선수 시절에는 상당히 모범적인 선수였다고 한다. 고려대 재학시절에도 훈련은 똑같이 받았으나 수업은 빠지지 않았으며, 1969년 금융단 축구연맹전에서는 갓 입단한 신인선수 신분으로 선수대표 선서를 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이 시절은 지금과 달리 축구팀 자체가 많지 않았다. 조중연이 산업은행 축구단에 입단하던 시기, 당시 대한민국 축구계는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 7개 구단, 금융단 축구연맹전에 11개 구단이 있었다. 이후 1970년 양대 리그 개념의 두 리그는 전국실업축구연맹전으로 통합되어 18개 구단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현재의 K리그와 다르게 한 구단의 선수단이 20여명이 전부였던 시절이다. 지금의 축구 선수 규모에 비하면 절대적인 성인 선수 자체가 적었다는 이야기다. 국가대표에 뽑히지 않았다고 해도, 실업팀에서 주전으로 뛰지만 국가대표로 뽑히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국가대표 바로 아래급의 선수라는 것이다.

3. 지도자

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접은 조중연은 당시 대부분의 금융단 소속 선수들이 은퇴 후 은행 직원으로 취직하던 관행과는 달리 은퇴하고 바로 고려대학교 코치를 맡는다. 2년만 하고 결국 산업은행에 입사하긴 하지만. 산업은행 울산지점에 근무하다 당시 학성고 이사장 이후락의 지시로 학성고 축구부의 창단에 힘쓰게 되고 이때의 경력을 인정받아 1983년 프로축구 슈퍼리그에 참가할 현대 프로축구팀 창단 실무를 맡게 된다. 이 때 김호곤 현 울산 감독과 함께 코치를 맡게 되고 문정식 당시 현대자동차보험 실업팀 감독을 초대 감독으로 내정한다. 그리고 3년 후 문정식 감독이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대신 현대의 사령탑을 맡아 첫해에 현재의 리그컵에 해당하는 프로선수권 우승컵을 얻는다.

그러나 그 해 김종부의 스카웃을 두고 복잡한 사정, 그러니까 간략히 서술하자면 조중연이 고대 동문이라는 인맥을 내세워 김종부를 영입하기로 합의했으나 김종부는 현대와 대우 양팀과 이중계약을 맺은 것으로 확인되었고, 대한축구협회의 중재결과 김종부를 대우로 보내기로 결정되자 현대의 왕회장께서 빡돌아서 이럴 바엔 팀 해체하라고 지시한 것에 따라 감독직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4. 해설가

지도자 은퇴 후 KBS에서 축구해설을 맡았는데 올드 축구팬들은 선수, 지도자, 해설가, 행정가로서의 조중연 중 해설가로서의 조중연을 가장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해설을 잘했던 모양. 여담으로 조중연이 축구협회로 들어가면서 KBS에서 후임으로 영입한 해설위원이 이용수 교수이다. 추후 조중연이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영입하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축구계 야권에 서서 조중연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는 복잡한 인연.

당연히 지금 보면 굉장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과거 KBS가 스포츠 중계의 스탠다드를 이끌었던 시기의 방송 관계자들은 이런 축구 해설을 선호했다. 지금은 지상파 3사나 케이블 채널들 중계가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지고 시청자들에게 어필하는 추세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골라보는 선택의 폭도 그만큼 넓어지고, 방송사들 입장에서도 각자 중계 방송의 퀄리티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 당시에는 해외 축구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고 축구 이론이 전혀 잡히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현재처럼 신변잡기 만담으로 시간을 때우기도 어려웠고, 전략전술에 대해서 얘기하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의 축구경기를 보는 안목이 지금처럼 높은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문용어를 사용하면 무슨 소린지 모르고, 해외 선수를 소개하려해도 어마어마한 슈퍼스타가 아니면 몽땅 듣보잡 취급하던 시절이라. 게다가 당시는 국대경기나 K리그 포스트시즌 정도는 지상파에서 중계해주던 시절이다. 지금처럼 '스포츠는 케이블에서' 시대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경직된 사회분위기였다. 그래서 재밌고 유쾌하게 해설을 하는건 그당시 현실에서는 어려웠고 주 레퍼토리가 '고국에 계신 국민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류의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해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크게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경기의 맥을 짚거나 적당히 시청자의 수준에 맞춰 해설을 하면서 어느정도 지적인 이미지의 해설을 했다.

5. 행정가

1998년 김정남 현 프로축구연맹 총재의 후임으로 대한축구협회 전무 겸 기술위원장직을 맡으면서 행정가로서 본격적으로 입문한다. 아마 현대 프로축구단 창단을 주도한 경력을 현대 구단주였던 정몽준 당시 회장이 좋게 봐 준 듯. 이미 1993년 정몽준이 회장으로 취임한 직후 축구협회 이사로 선임되지만 이때는 실무직이라기보다 명예직의 성격이 강했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성적부진을 물어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을 경질하고 자신도 책임을 지고 기술위원장 직에서는 사임한다. 다만 전무 직책은 계속 수행한다. 이것 때문에 많은 팬들은 차범근 감독을 희생양으로 삼고 자기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대표팀 성적에 따라 책임이 좌우되는 기술위원장 직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임을 지고 물러나긴 했다. 전무 직은 직접적으로 성적에 책임을 지는 자리는 아니긴 하다.

그는 전무로 있으면서 이전 축구협회 집행부의 전무들이 시도하지 못 했던 정책들을 입안하고 실행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단적인 지표만 제시하자면 조중연 전무 임명당시 축구협회 1년 예산은 30억원이었는데, 조중연 회장 임기가 종료된 현재 예산은 1천억에 달한다.

전무로서 조중연의 업무 수행은 선수출신 행정가들에 대한 편견(공만 차느라 업무수행능력은 형편없다)을 극복하는 데 어느정도 일조했으며 이후 김호곤, 김진국, 김주성 등 선수출신 행정가들이 축구협회의 요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된다. 조중연 본인도 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승진하고, 정몽준 회장에 의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한국축구의 수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와 반대로 축구협회의 안팎으로 인적 구성의 과정에서 소위 '축피아'라 일컬어지는 파벌을 공고히 하여 이래저래 부침이 심했던 조광래호, 최강희호, 박종우 세레머니 사과편지 논란을 거치기도 했다

6. 대한축구협회 회장

2009년 회장 선거에서 야권을 대표하여 출마한 허승표 후보와의 경선에서 승리하여 4년 임기의 51대 회장에 취임한다.

회장 임기 동안 일단 한국축구의 성적 면에서는 화려했다. 월드컵 16강, FIFA U-20 월드컵FIFA U-17 월드컵의 8강 진출, 여자 U-20 월드컵 3위와 U-17 월드컵 우승, 올림픽 동메달 등 각급 대표팀은 나가는 족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이는 자국 축구전반에 대한 선순환으로 이어져, 임기 동안 K리그 팀들은 매 시즌마다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하였고 그 중 3번 우승컵을 안았다. 성적뿐만 아니라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U리그도 기틀을 착실하게 다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행정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저지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조광래 감독 경질 과정이라거나 코칭스태프 임금 미지급 건, 비리직원 퇴직금 지급, 박종우 세레머니 사건 때의 대응 등이다. 아래에서 자세히 서술.

이런저런 일들로 여론이 좋지 않자 조 회장은 회장직 재선 도전에 나서지 않겠다고 불출마 선언을 한다. 나이도 있고 회장 임기가 끝나면 자연스레 축구계 원로로 물러날 듯.

2013년 1월 28일 협회 회장 선거에서 정몽규 프로축구연맹 총재가 당선되자 현장에서 곧바로 회장직 이임식을 갖고 협회 일선에서 물러났다.

6.1. 공적

  • 파주 NFC 건립 - 그전까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가대표팀이 소집되어도 여관에 투숙하고 흙바닥이나 인조잔디에서 훈련하던 것을 전용 숙소와 전용 훈련장에서 마음껏 훈련할 수 있게 되었다.
  • 경기장 인프라 확충 - 잠실종합운동장 활용, 뚝섬 돔 경기장 겸용 등을 내세우던 서울시를 상대로 이리저리 설득해서 전용경기장인 서울 월드컵 경기장 건설을 성사시킨 주역이 조중연이다. 그 영향인지 월드컵을 개최한 10개 도시 중 향후 종합경기대회 개최계획이 있던 도시들[1]을 제외한 곳들은 전부 축구전용구장을 지었다. 이 축구전용구장들은 이후 고스란히 K리그의 인프라로 귀속되었다. 월드컵경기장 같은 대형 경기장들뿐만 아니라 천안, 목포, 창원 세 곳에 축구센터를 조성하기도 했으며 전국적으로 각지에 잔디구장 건설 붐을 이끌기도 했다. 그래서 현재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주관하는 초중고리그는 물론이고 아무리 지방 듣보 대회라도 전 경기가 잔디구장에서 개최된다. 2000년대 초반엔 상상도 못할 일.[2]
  •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 개최와 공부하는 축구선수 육성 - 성적위주의 단기 토너먼트 대회만 존재하던 초중고 축구를 권역별로 쪼개 연중리그를 실시하는 방향으로 바꾸었다.[3] 이 제도의 핵심은 정상적인 학습이 불가능하던 학원축구 선수들로 하여금 주중에는 일반학생과 똑같이 수업을 듣고 나서, 주말에 리그경기에 참가하도록 한 것이다. 이로써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결과 선수 출신으로 일반학생들과 똑같이 경쟁하여 서울대 등 명문대에 입학하는 선수들이 나오기도 했다.[4] 또한 이는 축구 실력 향상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일인데, 선수들의 학습 능력이 향상되면서 필요한 역할을 잘 수행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
  • U리그 개최 - 대학축구에도 초중고 주말리그와 마찬가지로 연중리그 모델을 도입하였다. 캠퍼스 내 홈경기장 개최를 권장함으로써 잠재적인 대학생 축구팬들의 응원을 유도하고 있다.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보면 간간히 U리그 중계를 해 주는 경우가 있는데, 관중석이 따로 없고 철창으로만 구분된 경기장의 경우 지나가던 학생들이 멈춰서서 구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유소년 육성 - 모르는 사람들은 축구협회 예산이 1000억원이라면서 유럽 유명감독들 안 데려오고 뭐하냐고 까지만[5] 천억 예산이 가장 많이 쓰이는 분야는 바로 유소년 육성이다. 주로 프로구단 산하 유소년팀 운영, 초중고리그 운영, 유소년 상비군, 유망주 장학금 등에 지원된다.
  • 우수 유소년 해외 유학 - 싹이 보이는 유망주들을 유럽 유소년클럽에 축구유학을 보냈다. 이 프로젝트의 수혜자들로는 설기현, 이용래, 조영철, 지동원, 남태희, 백성동, 손흥민 등이 있다.[6] 이에 대해서는 유망주들의 해외유출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도 있다.
  • 지도자 육성 - AFC로부터 전달되던 지도자 교재가 모두 영문으로 되어 있어 보급률이 떨어지던 것을 번역하여 보급하고 C, B, A, P코스에 걸쳐 지도자 라이센스제를 시행하였다.[7]
  • 월드컵 병역 특례 - 2002 월드컵 준비 당시 16강 진출시 선수단에게 병역특례를 주는 것을 특정종목에 대한 특혜로 여겨 회의적이던 국회의원들을 한 명씩 직접 찾아다니며 간곡하게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박지성, 이영표, 안정환 등 여러 유망한 선수들이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미 1990년대에 16강만 가면 알아서 특혜줄 거라고 대중들도 인지하고 있었고 의원들도 공감대가 형성이 어느 정도 되어있기는 했지만 확실한 도장을 받기위해 조율을 해두는 게 맞다. 김대중 대통령이 즉흥즉으로 면제 시켜준 걸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건 전혀 아니다.
  • 대한축구협회 법인화 - 2005년 국정감사에서 제대로 털린 이후 운영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법인화를 실시하였다.
  • 기타 자세한 사항은 링크 참조. 협회 전속기자의 조비어천가 느낌이 과하게 나기는 하지만 없는 얘기를 만들어서 쓴 건 아니니 적절히 필터링해서 읽어야 한다.

6.2. 실책

  • 차범근 감독 경질 -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대회 도중 현지에서 감독을 경질하는 것은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았다는 것에는 다들 동의한다.[8] 대회 경기가 아직 남아있는데 참패를 이유로 감독이 잘린다고 선수들이 힘을 내거나 사기가 오를 이유가 없기 때문. 그저 국민들의 분노를 감독에게 돌리고 꼬리자르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조중연 본인은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다음 경기인 벨기에전에서 1:1 무승부의 좋은 경기력을 보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 하지만 글쎄다. 이때 차범근만 자르고 본인은 자리를 지켰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위에서 서술했듯이 조중연 역시 기술위원장직에서는 함께 사임했다. 결과적으로 차범근은 큰 상처를 입었고 조중연은 별 타격 없이 축구행정가로 계속 승승장구 했다.
  • 19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실책 - 위의 차범근 감독 경질은 1998년 당시에 조중연이 저지른 최악의 스노우볼이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잘못을 차범근 감독한테 모조리 뒤집어 씌운 악질적인 행동을 자행했다. 먼저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날에 반칙으로 악명이 높은 중국과의 친선경기를 잡아서 차범근호의 전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황선홍 선수를 부상을 당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차범근 감독이 반대한 경기를 조중연이 기술위원장으로 있는 대한축구협회가 억지로 밀어부친 것이었다. 또한 FIFA가 월드컵에서 새로 적용한 백태클 규칙룰을 선수들에게 전달하지 않아서 차범근호의 또다른 핵심 전력 하석주 선수가 허무하게 퇴장당하게 만들었고 멕시코전을 역전패당하게 만들었다. 결국 황선홍, 하석주 양날개를 모두 잃은 차범근호는 네덜란드전에서 마르세유 참사를 당하게 만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포상급 차등 지급 논란 - 2002 월드컵이 끝나고 선수단에 대한 포상금 논의 중에 각 선수들의 출전시간에 따라 포상금을 차등지급해야 한다고 주장. 이는 축구팬들의 강력한 비판에 부딪혔고 결국 축구협회는 포상금을 균등지급하기로 한다.[9]
  • 감독 선임 - 축구계 고정 떡밥 중 하나. 클럽 감독으로 그다지 성적이 시원찮았던 김호곤이나 박성화를 올림픽 대표팀이나 청소년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했고, 조 본프레레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특정 에이전시와의 유착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10] 특히 조광래, 최강희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K리그 클럽들을 무시한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11]
  • 조광래 감독 경질 과정 잡음 - FC 서울을 파탄낼 뻔한 황보관을 기술위원장으로 선임하더니 기술위원회가 구성되기도 전에 절차 따위 무시하고 조광래 대표팀 감독을 경질한 데 대한 비판도 컸다. 더군다나 감독 및 코치진에 대한 연봉이 일부 미지급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조광래 전 감독에 대한 연봉은 아직도 미지급 상태였다가 정몽규 회장 체제로 넘어가서 지급이 완료됐다. 참고로 조광래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조광래는 원래 축협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12]
  • 최강희 감독 선임 과정 - 국대 감독직 제안 거절 의사를 밝혔던 최강희 전북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구단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조중연이 최강희와 술자리를 가지면서[13] 거의 강제에 가까운 설득을 하자 최강희가 어쩔 수 없이 승낙[14]했다는 것이 기정사실로 판단된다.
  • 비리직원 퇴직금 지급 - 한 축구협회 직원이 공금을 유용한 것이 발각되어 퇴직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는데, 이것만으로도 까일 일이지만 그 직원에게 1억5천만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는 사실이 터지자 곱배기로 까였다. 그 퇴직금의 성격이 입막음 목적이 짙어 보이기 때문. 이에 책임지고 김진국 전무가 사표를 썼으며, 축구협회는 뒤늦게 퇴직금 환수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해서 한 번 더 쪽을 팔았다.
  • 박종우 세레머니 사과 편지 논란 - 런던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으로 열린 한일전 승리 후 박종우가 독도는 우리땅 플래카드를 드는 세레머니를 한 데 대해 논란이 가중되던 중 축구협회에서 일본축구협회에 사과조의 편지를 발송한 사실이 밝혀졌다. 축구협회에서는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한 편지였고 사과조로 보이는 표현들은 관례적인 외교적 수사라고 해명했지만[15]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자극한 꼴이 되어 폭풍까임을 당했다. 해당 편지는 김주성 사무총장이 작성했다지만 조중연이 최종결재를 했고 발신도 조중연 회장 명의로 이루어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문방위에서 최재천 의원에게 신랄하게 까였다.
  • 임기말 국가대표팀 중계권 판매 시도 - 임기 2주를 남기고 4년짜리 국가대표 A매치 중계권 협상을 추진하다가 여론이 심하게 나빠지자 결국은 재계약 협상을 취소했다. 당시 차기 회장선거에 도전장을 낸 정몽규 후보의 공약 중 하나가 A매치 중계권과 K리그 중계권 연동판매였기 때문에, 말은 범현대家라고 하지만 조중연과 정몽규의 사이가 껄끄러운 것 아니냐는 소문에 힘을 실어 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근데 그것 치고는 '축피아' 소리를 듣는 정몽준-조중연 라인의 인사들이 정몽규의 회장 부임 이후에도 여전히 축협에서 고위직을 맡았기 때문에 판단하기는 애매한 상황이다.
  • 나이키 장기 계약 의문 -임기 1년을 남기고 8년짜리,나이키랑 현물600억 현금 600억이라는 터무니없는 장기계약을 맺었는데 이때 루머에 의하면 아디다스는 물론 다른 스폰서들이랑 저울질을 하지도 않고 덥썩 나이키랑 8년짜리 장기계약을 맺어버리는 바람에 이것도 욕을 먹고있다. 나이키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계약은 2019년 12월 31일날 종료된다.

7. 평가

전반적으로 볼 때 조중연의 실무추진능력은 선수, 지도자, 해설가, 행정가로 모두 활동해 본 풍부한 경험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며, 이는 조중연 이후 선수출신 행정가가 협회 내에서 중용되는 흐름에 기여한다. 언론매체에선 조중연이 선수출신 최초의 축협 회장이라고 보도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 이미 이종환 회장이 선수출신으로 회장에 역임한 바가 있다. 조중연은 두번째 선수출신 회장.

위 항목을 찬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조중연의 정책은 당장 눈에 보이지도 않고 결과가 나오려면 오래 걸리지만, 가장 중요한 장기적인 플랜이다. 일반 대중들에게 축협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아 틈만 나면 "일본은 유망주를 저렇게 키우는데 한국은 지원을 안하고 어쩌고..."하는 염려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안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실책을 보면 대표팀 감독 선임 때의 잡음, 여타 추문에 대한 졸속대응으로 비난을 자초했다. 즉, 수수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을 잘했으나, 당장당장의 임기응변이 필요할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굳이 듣지도 않아도 됐을 비난들을 알아서 자초한 것.

대부분의 국내 스포츠 협회에 등에서 주먹구구식의 운영을 할때 기초공사 등의 부분에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은 분명 공적이다.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알 수 있는 부분. 그러나 당장의 신속한 결단이 필요한 일에서는 여러가지로 아쉬운 부분을 많이 남겨, 축구협회라는 거대 조직의 수장의 면모로는 아쉬움을 많이 보인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행정가로서는 뛰어난 실무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나, 리더로서는 정치력이나 처신에 물음표가 나오던 행보를 보였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한 인물.

8. 논란

8.1. 배임 연루

2017년 9월 14일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가 황보관, 이회택, 김주성 등과 같이 업무상 배임혐의로 입건됐다. 이듬해에 황보관, 이회택, 김주성 등에 대해서는 혐의없음으로 사건종결되었으나, 조중연 회장과 협회 직원 1인은 약식 기소되어 2019년 1심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조중연을 비롯한 축구협회 임원들이 공금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업무추진비 명목으로 지급된 법인카드로 220여회 1억1000만원 상당을 업무와 무관하게 사용하였다고 하며, 조중연의 경우 2011년 7월 콜롬비아에서 열린 U-20 월드컵 대회, 2011년 11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아시아연맹 총회와 올림픽 도하 경기, 2012년 헝가리에서 개최된 국제축구연맹 총회와 국가대표 평가전에 부인과 동행했다고 하며, 부인의 항공료 등 약 3000만원을 협회 공금으로 부정 처리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지인들과 골프를 치면서 골프장 비용 1400만원을 법인카드로 결제하기도 했다.#


[1] 부산, 인천(아시안게임), 대구(유니버시아드)[2] 제주도에서 개최되는 백록기 전국고교축구대회가 사상최초 전경기 천연잔디 개최로 주목을 받은 것이 불과 2003년이다.[3] 단기 토너먼트의 경우 흔히 생각하는 선수 혹사 외에도, 최상위 성적을 거둔 소수의 팀 외에는 치르는 경기가 적어 선수들의 경기 감각이나 경험 등이 떨어지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그에 비해 리그는 모든 팀이 일정 수의 경기를 치르기 때문에 각 팀이 경기 감각을 유지하기 쉽고 경기 경험도 늘어나면서 선수들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지는 장점이 있다.[4] 이 제도가 아래 서술한 유소년 육성책과 지도자 육성책과 맞물리면서, 진학을 미끼로 학부모에게 갑질하며 금품수수를 일삼던 구태의연한 지도자들이 감소하게 되는 효과도 노릴 수 있다.[5] 물론 그런 감독들이 돈만 많이 준다고 오는 건 아니다.[6] 돈들여가면서 유학보내놨더니 조작질이나 한 선수도 있다만(...).[7] 라이센스 급수에 따라 맡을 수 있는 팀이 제한된다. D급은 8세 이하, C급은 초등학교와 U-12, B급은 중고교와 U-17, 각급 대표팀을 맡으려면 A급 이상.[8] 당시 조중연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1954년에 대량 실점을 한 이후로 1986년부터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독일 등 세계 강호들과 만났지만 지금처럼 처참한 결과를 내지는 않았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는 발언을 하였다.[9] 선수마다 4강 진출에 기여한 정도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오랫동안 한 팀으로서 함께 훈련해왔고 후보 선수는 주연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10] 거스 히딩크, 움베르투 코엘류, 본프레레,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까지 모두 같은 에이전시가 연결점이었다.[11] 한 명은 K리그 시즌 도중에, 한 명은 시즌을 한창 준비해야 할 시기에 빼가듯이 감독으로 선임했다.[12] 조광래가 국대 감독이 되기 훨씬 전인 2000년 초반 축구 월간지 베스트 일레븐과 인터뷰에서 조광래는 조중연을 신랄하게 깐 바 있다.[13] 둘은 현대에서 감독과 선수 사이였던 인연이 있다.[14] 월드컵 최종 예선까지만 대표팀을 지휘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15] 직접 읽어보고 각자 판단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