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성낙운 (成樂雲 | Sung Nak-Woon) |
출생 | 1926년?[1] 2월 2일 |
경기도 경성부 | |
사망 | 1997년 5월 28일 (향년 71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고려대로 안암동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 |
포지션 | 포워드 |
신체조건 | 166cm | 63kg |
소속팀 | 조선전업 축구단 (1948-1950) 육군 병참단 축구단 (1950-1960) |
국가대표 | 18경기 12골 (1954-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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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2. 생애[2]
2.1. 선수 생활
성낙운은 1926년, 경성부에서 태어났고 동국대학교 출신이었다.성낙운은 육군 병참단 축구단 소속으로 1954년 월드컵 지역 예선 일본과의 1차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에 데뷔했고 후반 26분에 3:1로 리드를 벌리는 추가골을 넣었다.[3]
성낙운은 1954년 월드컵을 한 달 앞두고 열린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 참가했다. 성낙운은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4골을 넣었고 아시안 게임 대표팀 멤버들은 은메달을 차지한 후 스위스로 향했다.
성낙운은 대한민국 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FIFA 월드컵에서 10번을 단 선수였고 헝가리와의 1차전에 센터 포워드로 출전했다. 성낙운은 우상권과 함께 대한민국의 첫 골을 노려보기도 했지만 골까지 연결되지는 못했고 이후 대한민국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헝가리에 일방적으로 두들겨맞고 0:9로 참패했다. 성낙운은 튀르키예와의 2차전에는 빠졌다.
이후에 성낙운은 대한민국 대표팀 소속으로 초대 아시안컵과 1958년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고 1960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2.2. 이후
성낙운은 이후 심판으로 축구계에 종사했다. 베스트일레븐에 의하면 성낙운은 1965년 4월 4일, 제2회 춘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경기에서 주심을 맡았는데 금성방직팀과 제일모직팀의 경기에서 불상사가 일어났다고 한다.금성방직팀이 1-0으로 리드하고 있는 상태에서 경기가 진행됐는데 제일모직 선수들의 플레이가 지나칠 정도로 거칠어졌다. 이때 소신이 강했던 성낙운 주심은 제일모직선수들의 거친 플레이로 금성방직선수들이 쓰러질 때마다 휘슬을 불고 금성방직팀에게 프리킥을 선언했다. 프리킥을 할 때마다 위기를 맡게 됐던 제일모직팀에서는 주심에 대한 항의가 계속되더니 급기야 성낙운 주심을 제일모직선수들이 주먹으로 때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경기는 중단됐고 성낙운 주심은 자기에게 폭행을 한 제일모직팀 선수 3명에게 모두 퇴장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3명의 선수가 모두 도쿄올림픽에 한국축구를 대표해서 출전했던 선수들이었다. 최치환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그날 저녁 7시에 긴급이사회를 소집하고 폭력을 휘두른 선수 3명에 대해서는 '2년간의 선수자격 정지' 그리고 제일모직팀에게는 '1965년 12월 31일까지의 모든 축구대회에 출전금지 처분'을 내렸다. 최치환 회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2년간 선수자격을 박탈당한 선수 3명을 폭력사범으로 중부경찰서에 고발까지 했다. 한국 대표팀이 도쿄 올림픽에 출전할 때는 전혀 아무 지원도 없이 팔짱만 끼고 있던 축구협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선수자격박탈이라는 징계만으로는 부족해서 경찰에 고발까지 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크게 화제가 됐었다.
성낙운은 1997년에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별세했다.
3. 수상
3.1. 선수
3.1.1. 클럽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 4회: 1949(조선전업 축구단), 1953, 1956, 1958(육군 병참단 축구단)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준우승 2회: 1955, 1956(육군 병참단 축구단)
3.1.2. 국가대표
[1] 대한축구협회의 기록에는 1923년생으로 기록되어 있다.[2] 출처: 위키피디아, kfa[3] FIFA 경기 보고서, 조선일보, 닛칸스포츠 등의 기록 참조. 대한축구협회(대한축구협회의 기록은 3번째 득점 시간도 후반 23분으로 다르다.), 동아일보, 요미우리는 3번째 득점자를 최정민, 경향신문은 최광석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