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8:50

울리 슈틸리케/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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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생활 개관3. 클럽 경력
3.1. 묀헨글라트바흐3.2. 레알 마드리드
4. 국가대표 경력5.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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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리 슈틸리케의 선수 경력을 다루는 문서.

2. 선수 생활 개관

1975년에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1985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UEFA컵을 들어올려 지금도 두 팀에서 전설로 불린다.[1][2]

선수 시절 초창기에는 분데스리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당시에는 부동의 명문 바이에른 뮌헨조차도 분데스리가에서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넘어서지 못했다. 당시에는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한 울리 슈틸리케는 수비의 베르티 포그츠[3], 공격의 유프 하인케스와 같은 걸출한 동료들과 함께 팀의 척추를 구성하며 분데스리가에서 3번이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또한, 울리 슈틸리케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역시 주전 수비수였다. 프란츠 베켄바워의 빈 자리를 파울 브라이트너와 함께 채워냈다. 유로 1980 우승,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준우승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FIFA와 국제 축구 역사 통계 연맹이 20세기 최고의 명문으로 선정한 레알 마드리드에서 무려 8시즌 동안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오가면서 4연속 라 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상을 받았고,[4] 3번의 프리메라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 UEFA 컵 우승 1회에 기여한 레전드급 선수였다.

당시에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독일 출신 선수가 흔하지 않던 시절인 데다, 특유의 파이팅 넘치고 중후한 플레이 스타일이 돋보였고 레알 팬들에게 독일산 "판처"로 불리면서 널리 사랑받았고, 과거 프리메라리가에서 매 경기마다 외국인 선수는 2명 이하로 출전제한이 있던 시절에 무려 8년간 주전 멤버로 활약을 할 정도로 탄탄한 입지를 자랑했다. 지금도 팀에 애정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5] 또한, 울리 슈틸리케는 차범근과 함께 현재까지 세계적으로도 단 12명밖에 없는 서로 다른 팀에서 UEFA컵 2회 이상 우승을 경험한 전/현역 축구선수 중 한 명이다.

3. 클럽 경력

3.1. 묀헨글라트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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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의 전성기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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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축구황제 베켄바워를 마크하면서 볼 다툼을 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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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UEFA컵에서 첫번째 우승을 한 뒤 동료들과 같이 우승컵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모습.[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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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시절.[7]

SpVgg 케치 유스팀에서 활동한 뒤, 분데스리가의 명문구단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하여 팀의 중심이 된다.

당시 유럽에서 바이에른 뮌헨유러피언컵 3연패를 하며 전 유럽의 패자로 군림하던 시기였지만, 상대적으로 리그 성적은 그리 신통치 못했는데 저 3시즌 간 10위-3위-7위를 전전하며 끽해야 중위권에 안착하는 정도에 그치는 변변찮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바로 이 시기에 분데스리가 내에서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던 것이 바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1969/70, 70/71 두 시즌 귄터 네처와 베르티 포그츠를 중심으로 분데스리가를 연패했던 묀헨글라드바흐는 이후 74-75, 75-76, 76-77시즌을 3연패하고 그 마지막인 76-77시즌엔 유러피언컵 결승전까지 진출하게 된다. 1970년대 중반 귄터 네처는 이미 레알 마드리드에 이적한 이후였고, 당시 주축이 된 선수들은 독일의 올타임 베스트 라이트백인 베르티 포크츠, 지금은 감독으로 더 유명하지만 현역시절에도 대단한 공격수였던 유프 하인케스, 팀의 에이스이자 당시 활약으로 1977년도 발롱도르를 수상했던 덴마크 출신의 알란 시몬센 등이었고, 후방에는 울리 슈틸리케가 든든하게 받치고 있었다.

특히, 울리 슈틸리케는 여러모로 프란츠 베켄바워의 후계자로 불리울 만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었다. 유소년 시절에 축구를 처음 접하면서 배웠던 포지션은 골키퍼였다가 선수 커리어를 미드필더로 시작했고, 센터백을 오가면서도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보통 국가대표에서는 센터백으로, 클럽에선 수비형 미드필더로 자주 출장했고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나 레지스타 포지션으로 뛰는 경기에선 엄청난 드리블을 선보이면서, 상대의 진영을 교란시키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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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가 동료들과 마이스터샬레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8] 왼쪽부터 울리 슈틸리케, 우도 라테크(감독), 유프 하인케스, 베르티 포크츠 이 사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감독으로서도 승승장구했다는 점에서 전설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 슈틸리케만 감독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아직까지 우승을 못하고 있다.

3.2. 레알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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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9] 역대 최다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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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클라시코 경기에서 베른트 슈스터를 마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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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두 번째 UEFA컵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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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도 다들 레전드급 선수들이다.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비센테 델 보스케, 가르시아 레몬, 산티야나, 후아니토...[10]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슈틸리케는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 된다. 레알 마드리드 CF 이적 계기가 특이한데, 당시 레알 마드리드 CF회장이 귄터 네처에 이어서 슈틸리케의 동료인 헤르베르트 빔머와 사인하려고 독일로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실제 경기에서 슈틸리케의 플레이를 보고 바로 마음을 바꿔서 계약을 제시했고 곧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비센테 델 보스케, 가르시아 레몬,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11] 등, 레알 마드리드 CF의 1980년대 레전드들과 함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또한 8시즌 동안 총 306경기에 출장하며 당시 레알 마드리드 역대 외국인 최다 출전기록을 세웠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호베르투 카를로스, 마르셀루, 페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이 그의 기록을 추월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상위권에 드는 기록이다.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 CF역대 레전드 명단에 당당히 기재되어 있다.

레알 마드리드 CF에서도 마찬가지로 보통 중앙 미드필더로 출장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마지막 무렵엔 독일 국가대표에서 뛰었던 것처럼 리베로로 주로 활약한다. 1950-1960년대 저승사자 군단 시절과 1990-2000년대 갈락티코스 시기가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력이나 축구팬들에게 주는 이름값이 높아서 보통 레알 올 타임 베스트를 선정할 때 이 두 시대에 몰리게 되는데, 이런 네임 밸류 문제만 아니라면 레알 마드리드 올 타임 베스트, 나아가 라리가 올 타임 베스트에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만한 선수이다. 중앙 미드필더로서 호세 마르티네즈 산체스, 페르난도 레돈도, 사비 알론소 등과 경쟁이 가능할 정도다.

마냥 언론의 수사가 아닌 게, 라 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인 돈 발롱을 1978-1979시즌부터 1981-1982 시즌까지 무려 4연패를 달성한다. 돈 발롱 역대 연패 최다 기록은 물론이고 최다 수상 기록도 갖고 있다. 슈틸리케를 제외하면 4연패도 없고, 4번씩이나 받은 외국인 선수도 없고 루이스 피구조차도 3번에 그쳤을 정도다.[12]

괜히 토니 크로스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면서 슈틸리케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선수가 이리 잘하고 팀까지 레알 마드리드니까 우승 트로피 정도는 당연히 따라오는 부산물로 1977-1978, 1978-1979, 1979-1980 3시즌 연속으로 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석권한다. 1차례의 UEFA컵 우승과 2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따냈고, 1980-1981 시즌엔 유로피언 컵 결승까지 진출하는데, 이때는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2021년 현재도 팀에 대한 의견을 아끼지 않고있다.#

4.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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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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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의 선수가 울리 슈틸리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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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유명했던 헬무트 쇤과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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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1980 우승 멤버 베스트 일레븐.[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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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1984에서.[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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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준우승 멤버 베스트 일레븐.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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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의 간단 요약 평가
"슈틸리케는 아주 강한 선수였다. 육체적으로 굉장히 강하고 전술적으로 근면했다. ‘박스 투 박스(box to box)’ 유형의 선수로 상대편 진영 깊숙이 들어갔고 수비들을 도와 공을 빼앗고 항상 동료를 돕고 희생하는 선수였다." - 어느 스페인 기자의 평가.

독일의 축구 황제 프란츠 베켄바워의 후계자.

프란츠 베켄바워의 후계자라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베켄바워가 은퇴한 후 그 포지션을 꿰찼지만, 베켄바워와는 성향이 달랐고, 슈틸리케도 훌륭한 선수였지만 올타임 레전드 베켄바워와 비교될 만한 레벨은 아니었다. 때문에 슈틸리케는 베켄바워의 포지션을 물려받았지만 베켄바워와 같은 역할은 한 것은 아니었고, 스위퍼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 대신에 수비와 플레이메이킹에 두루 능한 파울 브라이트너가 슈틸리케와 같은 시기에 대표팀에 재발탁되면서 브라이트너가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베켄바워와 포지션이 겹쳤기 때문에 불운하게 A매치 데뷔가 늦어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슈틸리케와 베켄바워는 9살이나 나이 차이가 있었고, 베켄바워가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나서 4년 후 슈틸리케는 대표팀에 풀 주전으로 안착하게 된다. 이 포지션 자체가 희소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척 무난하고 수월하게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당시 분데스리가에는 워낙 걸출한 선수들이 많아서 서독 대표팀은 어느 포지션에나 주전 경쟁이 치열했다. 공격수 자리로 가면 게르트 뮐러라는 대체 불가한 말뚝이 하나 박혀 있고 나머지 세컨드 스트라이커나 백업 공격수 자리를 놓고 유프 하인케스, 디터 뮐러, 클라우스 피셔, 칼 하인츠 루메니게 같은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박터지게 경쟁하고 있었다. 때문에 하인케스, 클라우스 피셔는 분데스리가에서 게르트 뮐러 바로 다음으로 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2~3위에 위치한 레전드들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대표팀 경기에 많이 출장하지 못했다. 사실 게르트 뮐러도 대표팀 출장이 의외로 62경기 밖에 안된다.

슈틸리케의 1975년 9월 3일 친선전인 오스트리아전에 국가대표로 데뷔했으나, 유로 1976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베켄바워는 유로 1976에도 주전으로 참여했고, 그해 2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18]에서는 엔트리 명단에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때 베켄바워는 국가대표를 은퇴하여 월드컵에 참여하지 않았다. 때문에 슈틸리케가 1978년 월드컵 엔트리에 탈락한 것이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즉 실력이라기보다 다름 아닌 그의 클럽 커리어 때문인데, 지금은 꽤나 많이 약해졌지만 당시에 유럽축구 강국들의 국가대표팀에서 자국리그 출신이 아닌 선수들에게 국가대표팀의 자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 울리 슈틸리케는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최전성기를 보냈고, 그가 펄펄 날아다녀도 헬무트 쇤 감독은 그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다른 나라 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경우가 지금보다 훨씬 드문 것이 사실이었고, 1970년대 각국 월드컵 대표팀 스쿼드를 보면 보통 자국 리그 선수들로만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A매치 데이 같은 제도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을 대표팀으로 차출하는 것이 여러모로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폐막 후 쇤 감독이 은퇴하고 유프 데어발 감독 체제가 되면서 울리 슈틸리케의 본격적인 국가대표팀 생활이 시작된다. 슈틸리케는 데어발 감독과 거의 국가대표 커리어를 함께 했다. 데어발 감독이 부임 후 대표팀의 주전이 되었으며, 데어발 감독이 물러남과 거의 동시에 국가대표 주전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데어발 체제 초장기에도 대표팀 주전은 아니었는데, 데어발 체제 초기 2년간 국가대표 친선전에는 거의 출장한 적이 없다. 이것이 리그 일정상의 이유인지 감독의 전술적인 판단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슈틸리케가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도약한 것은 1980년부터다. 유로 1980[19]에서 부터 메이저대회 주전으로 거의 전경기에 출장했다. 유로 1984[20]에서 4강 진출 실패(5등)로 데어발 감독이 사임하면서 슈틸리케의 대표팀 생활도 종지부를 찍는다. 유로 대회 직후인 9월 친선전 경기 출장을 끝으로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 체제에서는 대표팀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듬해에는 레알 마드리드 생활도 종지부를 찍는다.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21] 때 울리 슈틸리케는 프랑스와의 4강전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월드컵 역사상 유일하게 승부차기에서 실축했다. 그 이후 34년 간 전차군단은 승부차기에서 실축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로 2016의 8강 이탈리아전의 승부차기에서 무려 3 실축했다. 그런데 이탈리아가 더 많이 실축해서 독일은 3명이 날려먹고도 결국 승부차기 승리했다. 슈틸리케가 승부차기에서 실축했을 때 마지막에 승부를 결정짓는 골을 넣은 선수가 2016 리우 올림픽 축구에서 대한민국과 만나는 독일 올림픽 대표팀 감독인 호르스트 흐루베슈다.[22]

당시 시대적으로 리베로 시스템은 독일축구를 넘어서 세계축구의 트렌드 중에 하나였고, 슈틸리케는 아르헨티나의 다니엘 파사레야, 이탈리아의 가에타노 시레아, 네덜란드의 뤼트 크롤, 칠레의 엘리아스 피게로아,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앨런 한센 등과 함께 당대의 특급 리베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 42경기에 그쳤다는 것은 확실히 선수의 이름에 비해 부족한 감이 있다. 사실 슈틸리케가 독일 국가대표팀에서 42경기에 출전한 것이 적은 기록은 아니다. 1970년대 서독 국가대표팀의 간판 선수 중 한명이었던 브라이트너도 통산 48경기 출장했다는 사실 등을 보아도 그렇다. 당시 서독에는 재능있는 선수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고, 몇년간 대표팀에서 몇년간 맹활약을 했더라도 약간 슬럼프에 빠지면 바로 다른 선수로 대체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때문에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초까지는 대표팀 스쿼드 변동이 잦은 편이었다.

어쨌든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베른트 슈스터[23], 파울 브라이트너[24], 만프레드 칼츠, 한스 페터 브리겔, 칼 하인츠 푀르스터, 하랄트 슈마허라는 라인업의 중앙에 자리 잡은 울리 슈틸리케는 독일 전차군단의 주역이 되면서 서독의 유로 1980 우승과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렇게 당시 서독 대표팀 유로 우승과 월드컵 준우승 등 나름 잘나갔었으나, 1982 월드컵이 끝나고 유프 데어발 감독은 1986 월드컵을 염두에 둔 조기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이에 유로 1984를 앞두고 로타르 마테우스, 루디 푈러, 안드레아스 브레메, 볼프강 롤프, 노르베르트 마이어 같은 신예들을 대거 주전으로 기용했고, 기존에 대표팀의 주축이었던 클라우스 피셔, 파울 브라이트너, 베른트 슈스터, 호르스트 흐루베슈 등이 아직 기량이 녹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줄줄이 대표팀에서 하차하게 된다. 이렇게 살생부 피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슈틸리케는 살아남아서 유로 1984에 주전으로 참여했고, 1986년 월드컵까지 가나 했지만 유로 1984 본선에서 세대 교체로 신예들이 대거 발탁된 서독 대표팀은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이며 조별리그 탈락으로 4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회가 끝나고 데어발 감독은 성적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후임으로 프란츠 베켄바워가 새로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베켄바워 감독이 부임한 후에도 슈틸리케는 대표팀에 소집되어 베켄바워 감독의 데뷔전인 아르헨티나와의 친선전에 출전했다. 이 경기가 슈틸리케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가 되었다.

이후 베켄바워의 뒤를 이어 주전자리를 건네받으면서 슈틸리케가 맡고 있던 리베로 자리는 디트마어 야콥스,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로타어 마테우스[25], 마티아스 자머, 옌스 노보트니등으로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우베 젤러,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베르티 포크츠, 파울 브라이트너, 칼 하인츠 루메니게,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 제프 마이어 등으로 이어지는 독일 역대 올타임 레전드들의 네임밸류가 워낙 개인 커리어든 클럽 커리어든 워낙 끝판왕급이라서 이들에 비해 잘 언급이 안 되는 울리 슈틸리케를 비롯해서 슈넬링어, 오버라트, 회네스, 칼츠, 리트바르스키, 슈마허, 콜러 등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지만, 사실 이 선수들도 어마어마한 클래스를 지닌 선수들이었다. 이 선수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아래로 평가받는 귄터 네처, 베른트 슈스터, 브리겔, 피셔, 유프 하인케스,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위르겐 클린스만, 안드레아스 묄러, 토마스 헤슬러, 마티아스 자머, 슈테판 에펜베르크 등이 얼마나 실력이 대단했는지 생각을 해본다면 그냥 독일에서 태어난 것이 비운(?)이었다고 봐야할 듯하다.[26]

5. 논란

독일의 레전드 출신임에도 독일 축구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아시아 중동을 떠도는 이유에 대해, 슈틸리케 본인은 유럽의 축구 국가대표팀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본인이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슈틸리케는 "나는 독일 축구에 있어서 탈영병과 같은 존재다."라고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다.

일부 축구팬들은 그 당시 울리 슈틸리케가 차범근과 같은 케이스로서, 커리어로는 절대로 밀리지 않는 레전드급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축구계에서는 야인에 가까운 케이스라서 자국에서 자리를 못 잡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슈틸리케의 거주지는 사실 한국에 오기 전에 스페인 마드리드였으며,[27] 한국에서도 일반적으로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독일어를 사용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마치 본인이 사실상 이민을 가서 독일계 스페인인이 된 셈이니 독일 축구계에서 왕따를 당해 독일에서 자리를 못잡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슈틸리케는 선수 시절이든 지도자 시절이든 단 한번도 스페인 경력으로 불이익을 받은 적이 없었다.

사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의 리그는 폐쇄적이었고, 외국인 선수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때문에 타국 리그에서 뛴 선수들이 어느정도 자국에서 따돌림이나 소외를 받는 현상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서독 대표팀에서 해외 리그에서 뛴다고 불이익을 받은 사례는 없다.

슈틸리케 이전에서도 서독 출신으로 귄터 네처, 파울 브라이트너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한 선수들이 있었고, 슈틸리케와 같은 시기에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한 베른트 슈스터도 있었는데 이들은 스페인 리그에서 활약했지만 서독 국가대표로 활약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실 70~80년대는 독일 분데스리가가 전성기에 있던 시기였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고 반면 스페인리그는 60년대말부터 기나긴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70~80년대 유럽클럽 대항전에서도 레알 마드리드FC 바르셀로나보다 바이에른 뮌헨이나 함부르크 SV 같은 분데스리가의 팀들이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독일에 뛰어난 선수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라 하더라도 대표팀에 승선하기 위해서는 헬게이트급으로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다. 70년대부터 80년대초에 스페인 리그에서 뛰었던 네처, 브라이트너, 슈틸리케, 슈스터 등은 모두 대표팀에서 충분한 기회를 받았으며 전차군단의 일원으로 충분히 활약했다.

사실 서독 대표팀은 이미 1974년에 스페인 리그에서 뛴다는 이유로 대표팀에서 배제되었다는 썰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바 있었다. 바로 귄터 네처가 1974년 월드컵 대표팀에서 주전에서 배제되었을 때였다. 귄터 네처는 1972년 유로에서 보여준 창의적인 플레이로 찬사를 받으며 그해 발롱도르 2위를 차지한 스타였다. 유로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네처는 1973시즌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는데, 당시로서는 서독 국가대표급 선수가 해외 리그로 진출한 거의 첫 사례였다. 그런데 네처가 1974년 월드컵 개막 후 주전에서 계속 빠졌던 것이다. 당시 월드컵 예선전에서 서독이 라이벌 동독에 밀리는 경기를 하자 홈팀 관중들이 네처를 연호하며 헬무트 쇤 감독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당시에 네처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것이 밉보여서 대표팀에서 탈락했다는 썰이 파다했다. 그러나 사실 당시 네처는 폼이 상당히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표팀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네처 스스로도 이를 인정했다. 반면 당시 국가대표팀에서 네처의 포지션 경쟁자였던 볼프강 오베라트는 상당히 좋은 기량을 유지하고 있었고, 결국 쇤 감독은 오베라트를 선택했다.

1980년대 바로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던 베른트 슈스터도 역시 프리메라리가에서 뛰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에서 소외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는데, 슈스터도 대표팀에서 적지 않은 기회를 부여받았고, 80년 유로 등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슈스터가 대표팀에서 많이 뛰지 못한 것은 기본적으로 스스로 대표팀에서 주전을 차지할 만한 기량이 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서독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뛰어난 미드필드진과 비교했을 때 슈스터가 이를 뚫고 완전히 주전을 차지할 만한 기량을 보이지 못한 게 사실이다.

로타어 마테우스는 70년대말부터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활약하면서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떠올랐고, 바이에른 뮌헨이 라이벌팀 선수라는 리스크를 무릅쓰고 마테우스를 영입했을 정도였지만, 대표팀에서는 슈스터와 슈틸리케 때문에 84년까지 오랜 시간 동안 후보 선수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당시 서독대표팀이 실제로 쇄국정책을 고수했다면 탈영병이었던 슈스터나 슈틸리케 대신 분데스리가 스타였으며 기량도 이들보다 못할게 없었던 마테우스를 주전으로 썼을 것이다. [28]

위에서 보듯이 스페인 리그에서 뛰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탈영병 취급 받았다는 슈틸리케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슈틸은 1982년 독일 국대 동문이자, 비슷한 시기에 라리가에서 뛴 독일인 슈스터보다도 훨씬 더 독일에서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스터는 세계 최고 구단이었던 레알 마드리드감독까지 했었지만, 슈틸리케는 아시아를 떠돌고 있다. 먼저 슈틸리케는 레알 마드리드시절에도 유로 1980과 1982년 월드컵에 독일 국대로 발탁되어 전혀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라리가가 분데스보다 레벨이 낮은 리그였는데도 슈틸리케는 잘만 뽑혔다. [29] 이것을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중국 리그에서 뛰는 브라질 선수가 국대에 뽑힌 것과 마찬가지니 슈틸리케가 스페인 리그에서 뛰었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은 것은 말도 안된다. 그런데도 이렇게 슈틸리케가 그 선수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계속 야인으로 지내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축구 선진국인 스페인과 독일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본인의 빈약한 커리어를 옹호하기 위한 변명에 가깝다.

먼저 슈틸리케는 자기를 왕따한다는 독일에서 (1995-96, 1998-2006) 10년간 지도자생활을 했다. 즉, 2.분데스에서 2년, 독일 국대 성인팀 및 유스팀의 스텝으로 8년 (1998-2006)년을 보낸 것이다. 만약 스페인 경력때문에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면 자국에서 이렇게 10년간 일한 것은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

독일에서의 경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슈틸리케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지냈다. [30] 이 자리는 차기 독일 대표팀의 감독 단독 후보를 의미하는 자리다. 수석코치를 거치는 동안 감독이 될 만한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어 낙마하는 경우도 있지만, 수석코치를 거치면서 큰 결격 사유 없이 능력을 인정받는다면 차기 국가대표 감독으로 바로 승진하게 된다. 역대 독일국가대표팀 감독 대부분이 수석코치직에 있다가 감독으로 승진했다.[31]

슈틸리케는 암흑기 시기인 1998년 독일국가대표팀 수석코치직에 선임되었다. 사실 슈틸리케는 수석코치가 아닌 국가대표 감독으로 가장 유력하게 고려되었다. 물론 이것은 슈틸리케와 절친한 사이였던 베르티 포크츠 독일국가대표팀 감독이 슈틸리케를 밀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32] 결국 감독직은 에리히 리베크에게 돌아갔다.

감독직에 슈틸리케가 아닌 리베크에 돌아간 것을 두고 슈틸리케가 차별받았다고 말할 근거는 전혀 없다. 물론 국가대표 선수로서 경력은 슈틸리케가 훨씬 뛰어났다. 국가대표에서 거의 50경기 가까이 출장한 슈틸리케는 당시 서독 대표팀에서 분명 한 시대의 레귤러였다고 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에 비해 에리히 리베크의 선수 시절 경력은 초라했다. 하지만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은 선수 시절 활약만 보고 뽑지는 않는다. 물론 프란츠 베켄바워, 루디 푈러, 위르겐 클린스만처럼 화려한 선수 시절 경력을 바탕으로 지도자 경력없이 대표팀 감독이 된 케이스도 있다. 하지만 유프 데어발이나 요아힘 뢰프처럼 국가대표 경력이 거의 없다시피한 인물도 자질이 있다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곤 했다. 물론 리베크는 감독으로서 뛰어난 커리어를 쌓아왔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분데스리가에서 무려 30년 동안 구르며 산전수전 다 겪으며 감독 생활을 했으며, 독일 국가대표 수석코치도 지낸 바 았다. 물론 리베크는 독일에서 수석코치를 지냈으나 국대 감독이 되지 못한 드문 케이스 중 한 명이었으며, 공교롭게도 울리 슈틸리케도 그렇게 되었다. 참고로 리베크 대신 감독인 된 사람이 바로 수석 코치 경력 없이 처음으로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 프란츠 베켄바워였다. 물론 리베크는 나중에라도 울리 슈틸리케를 젖히고 국대 감독이 되었다.

슈틸리케는 독일 국가대표팀 수석코치까지 올랐지만 대표팀 감독이 되지 못한 케이스가 되었는데, 이것이 앞서 말했던 배신자로서의 차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차별이 있었다면 차기 국대감독 단독 후보인 수석코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수석코치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대감독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떤 결격 사유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 슈틸리케는 수석코치에 부임하고 나서, 감독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리베크 감독의 3백 전술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갈등을 빚었고, 훈련 도중에 선수들에게 비웃음을 당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망신을 사다가 결국 전격 경질되고 말았다. [33] 게다가 슈틸리케가 수석 코치에서 물러난 직후인 유로 2000에서 독일이 16개국 본선 조별리그 탈락(14등)이자 8강 진출 실패라는 처참한 결과를 냈다.

슈틸리케가 친정인 독일이나 제2의 고향인 스페인의 2, 3부 리그에도 발을 못 붙이고 중동-아시아를 떠도는 것은 본인의 주장대로 스페인에서 뛰었기 때문이 아니라 은퇴 후 지도자로 독일에 10년간 있었을 당시에 실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 UEFA컵 우승을 각각 다른 팀에서 두 번 이상 달성한 선수는 전 세계에서 12명에 불과하다. 참고로 그 12명 중 한 명이 차범근이다.[2]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대한민국의 모든 현역 선수들 다 합쳐서 레알 마드리드에서 현역을 뛴 적이 있는 사람은 슈틸리케가 처음이다. 이전에 레알 마드리드 감독 경력이 있는 사람은 거스 히딩크가 유일하다. 하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의 흑역사 취급을 받는 감독이라... 여담으로 레알 마드리드레알 베티스까지 말아먹은 거스 히딩크는 자존심 회복을 위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맡았다. 결과는 알다시피 자존심 회복을 넘어서 아시아 축구 역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뒀다.[3] 1994 FIFA 월드컵 미국 당시 독일 대표팀을 이끌고 한국과 만나 고전했던 그 감독이기도 하다.[4] 최다 연속 수상 기록이며 동시에 이 4번이 최다 수상 기록이다. 2000년대 중반에 폐지된다.[5] 인터뷰를 보면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점잖은 모습과는 다른 열혈 OB의 모습을 볼 수 있다.[6] 이것이 슈틸리케의 첫 번째 UEFA컵 우승이었다.[7] 뒷줄: 한스 유르겐 비트캄프, 디트마르 다네르, 유프 하인케스, 볼프강 크나이브, 울리 슈틸리케, 라이너 본호프, 앞줄: 알란 시몬센, 헤르베르트 하이덴라이히, 크리스티안 쿨릭, 한스 클링크하머, 베르티 포크츠[8] 마이스터샬레가 지금 항목에 올라와 있는 사진보다 작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연히 지금은 우승팀을 더 새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저 시점보다 테두리를 두 개나 더 둘러놨기 때문. 2026년까지는 무리없이 가능하며, 그 이후는 더 테두리를 둘러놓을 예정이다.[9] 돈 발롱(Don Balon) 어워드 링크[10] 후아니토와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고 한다.[1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의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0년대에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홈에서 태국에게 1:5로 대패하는 등 성적 부진 등의 이유로 해임되었다.[12] 리오넬 메시가 있긴 하지만, 스페인 이중국적자이기도 하고 2000년대 중반 돈 발롱이 폐지되면서 중간에 끊겨버렸다. 아마 폐지가 없었다면 최다 수상 기록이건 연패 수상 기록이건 메날두가 다 차지했을 듯하다.[13] 참고로, 바로 가운데 선수가 독일 최고의 레프트백으로 유명했던 파울 브라이트너이며, 오른쪽의 선수는 귄터 네처[14] 맨 왼쪽 상단이 울리 슈틸리케. 맨 오른쪽 상단은 2016 리우 올림픽에서 독일 올림픽 대표팀을 맡았던 호르스트 흐루베쉬(Horst Hrubesch)다.[15] 왼쪽부터 루디 푈러, 울리 슈틸리케, 노르베르트 마이어.[16] 참고로 루디 푈러와 노르베르트 마이어는 차씨 부자와 인연이 있다. 루비 푈러는 차범근과 설전을 벌이다 독일 여론의 극딜을 맞고 사과하기도 했고 노르베르트 마이어는 차두리가 뒤셀도르프에서 뛰던 시절의 감독이기도 했다.[17] 준결승전인 프랑스전 멤버이다. 베스트는 아닌데, 컨디션이 안좋았던 루메니게와 흐루베슈가 빠졌기 때문이다. 윗줄 왼쪽부터, 파울 브라이트너, 슈틸리케, 슈마허, 브레겔, 피셔, 베른트 푀어스터, 아랫쪽 왼쪽부터 칼츠, 리티바르스키, 칼하인츠 푀어스터, 드렘너, 펠릭스 마가트[18] 마지막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19] 첫 8개국(8강) 본선 진출 유로 대회[20] 8개국(8강) 본선 진출 유로 대회[21] 첫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22] 히혼의 수치 당시 득점자이다.[23] 유로 1980만 출전[24] 유로 1980만 불참[25] 마테우스는 1990 월드컵까지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하다가 1994 월드컵부터 리베로로 활약했다. 유로 1996에서는 부상으로 불참했고, 1998 월드컵, 유로 2000까지 리베로로 활약했다.[26] 마티아스 자머는 저 라인업에 끼고도 남을 대단한 리베로다. 오히려 베켄바워, 뮐러, 루메니게, 마테우스 등의 전설들의 바로 아래 위치할만한데, 몇 안되는 센터백 출신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2020년 발롱도르 드림팀에서 역대 센터백 순위 9위에 이름을 올린 전설적인 인물이다.[27] 한국에 부임하면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잘린 후 스페인이 아니라 독일로 돌아갔다.[28]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독일 대표팀에도 해외에서는 뛰는 선수들이 꽤 많아졌다. 80년대 중반부터 독일 국대 간판급으로 활약했던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루디 푈러, 안드레아스 브레메는 세리에A에서 활약하는 동안에도 대표팀에 발탁되는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29] 라리가는 슈틸이 뛰던 1970-80년대가 암흑기였다. 이당시 라리가의 유로피언컵(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우승은 한번도 없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은 1966년에 한번, 1981년 준우승 한번이며, 그 이후에는 1998년에야 다시 챔스에서 우승한다. 슈틸리케가 있을 때 탄 UEFA컵은 유로파 리그의 전신으로, 당시 유로컵(현재 챔스)보다는 한단계 아래였다.) 이었다. 이에 반해 분데스의 바이에른 뮌헨은 3연속우승 (1974-76)을 할 정도. 라리가가 세계최고로 떠오른 것은 1990년 후반대이며, 1980년대 극소수였던 해축빠들도 대부분 차범근의 활약으로 조금 알려진 분데스팬이었지, 라리가는 정말 논외였다.[30] 그 전의 경력은 아래 참조바람.[31] 슈틸리케 이전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 중에 수석코치에서 감독으로 승진하지 않은 예는 수석코치가 될 수 없었던 초대 감독 오토 네어츠와 프란츠 베켄바워 뿐이다. 물론 슈틸리케가 수석코치로 부임한 직후 리베크, 푈러, 클린스만이 연이어 수석코치를 거치지 않고 감독이 되었는데, 당시 암흑기에 있던 대표팀에 쇄신을 가하려는 시도의 일부로 풀이된다. 결국 클린스만 부임 후 암흑기가 끝나면서 후임으로 수석코치 뢰브가 감독직을 승계하면서 다시 과거의 관행으로 돌아가게 된다.[32] 포그츠가 슈틸리케를 챙기는 마음도 있긴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독일 축구가 포그츠 자신이 추구하던 보수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개혁과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고 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슈틸리케를 추천했을 가능성이 있다.[33] 다만 기사 내용을 읽어보면 이는 당시 선수들에게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대놓고 한 팀의 지도자를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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